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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62화


1397화

철컥.

마지막으로 이드까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활짝 열렸던 문이 닫혔다.

먼저 들어선 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모두 식당으로 갔습니까?”

“아뇨, 전부 대욕탕으로 가셨습니다.”

“대욕탕? 어째서?”

집사의 대답에 쉴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분명 배가 고프다며 뛰어 들어간 자신의 기사들이 아니던가. 한데 어째서 식당이 아니라 대욕탕에 있는 거지?

대욕탕이라면 훈련 후에 땀에 젖은 기사들이 가장 애용하는 공동 목욕 시설이 아니던가. 그녀가 알기로 절대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제가 권해 드렸습니다.”

“어째서요?”

“그대로 식당으로 가셨다가는 요리보다 먼지를 더 많이 드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장님께서도 씻은 후에 식사하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깨끗한 얼굴과는 달리 옷에서는 움직일 때마다 흙과 먼지가 날렸다. 거친 전투의 후유증이었다.

동시에 이드의 탓이었다. 그의 전투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쉴라가 돌아보자 검후가 결정을 내렸다.

“집사의 말대로, 이대로 식탁에 앉기는 힘들겠다. 간단히 씻은 후에 다시 모이는 게 좋겠어. 그래도 괜찮겠지요? 명예 후작.”

“물론입니다.”

이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일리나와 라미아가 강력하게 원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씻으실 물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드의 대답과 함께 집사가 메이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따로 지시를 받은 건 아니지만 현재 이 저택에서 검후와 이드의 결정을 반대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완벽히 파악한 집사의 센스였다.

“저도 좋습니다!”

그에 라울이 섭섭하다는 듯 표를 냈지만, 그의 말은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직후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대욕탕을 이용하는 기사들과 달리 그들의 방에는 넓은 욕실이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저택이 넓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이드들의 손길은 능숙했다.

따뜻한 물이 순식간에 욕조를 가득 채우며 찰랑거렸다. 이드는 뿌연 김이 올라오는 욕조를 보고는 말했다.

“단순히 씻기만 하는 거라면 클린 마법이 제일 간편한데.”

“해 줘요?”

“말이 그렇다고.”

말만 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라미아에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간편한 것도 좋지만, 물의 부드러운 감촉만은 아무리 마법이라도 따를 수가 없다. 아무리 이드라도 격렬한 전투 후에는 아무래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진다.

“그럼 빨리 벗어요.”

“알았어.”

라미아의 재촉에 이드가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목욕을 같이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먼저 옷을 벗은 라미아가 욕조 안으로 입욕제를 퐁당퐁당 던져 넣었다. 입욕제는 금방 녹아 달콤한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그 향이 마음에 든 일리나가 욕조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거품이 풍성하게 일어나며 향이 진해졌다.

“이건 향이 굉장하네요.”

“마음에 들어요? 제 비장의 자몽 향이에요.”

“그거, 몇 개 없는 최고급 입욕제라고 굉장히 아끼던 거잖아. 그런데 그걸 넣었어?”

“존 워스를 잡았으니 기념해야죠.”

말과 함께 라미아가 몽글몽글 일어난 거품을 양손에 쥐어서는 이드를 향해 불어 냈다. 이드는 코에 묻은 거품을 가볍게 닦아 내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기엔 가성비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냐? 혼돈의 파편을 잡은 기념으로 고작 최고급 입욕제라니.”

“불만이면 직접 골라 볼래요?”

말과 함께 머리 위에서 아공간 창고의 입구가 열렸다. 그 모습에 이드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망설이는 순간 창고의 물건이 몽땅 자신에게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사양할래. 생각해 보면 이제 둘 잡은 거잖아. 지금은 이 정도가 딱 적당하지. 응응.’

그리고 이드의 이런 모습에 일리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시한 장난을 치는 이 순간이 그녀에겐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넷만 남은 거죠?”

“넷이나 남은 거죠. 하아~”

남은 혼돈의 파편의 숫자를 떠올린 이드가 걱정이 태산이라는 듯 한숨을 터트렸다.

이 난리를 피워 둘을 잡았다. 과연 나머지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그러자 일리나가 이드의 머리를 안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드라면 분명 현명하게 잘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기분 좋은 손길에 이드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와 함께 라미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더해졌다.

“맞아요. 정말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데?”

“드래곤이요.”

“……아하?”

“곧 드래곤들이 돌아오잖아요. 그들이 돌아오면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는 혼돈의 파편을 찾는 것도 금방이라고요.”

어쩌면 저 말을 하는 라미아의 머릿속에는 자신과 드래곤들이 일렬로 서서 대륙을 훑어 나가는 모습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바라는 바다.

다만, 온전히 드래곤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드래곤이 돌아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할 것이 많은 혼돈의 파편이 가만히 있겠냐는 말이다. 드래곤들이 온전히 이 땅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어느 것 하나 확신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은 자신대로 드래곤들의 복귀를 위해 최대한 노력을 다하긴 할 거다.

각자 생각에 빠진 채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일리나가 말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다. 하지만 라미아는 물론, 정작 말을 꺼낸 일리나까지 나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나가기 싫은데. 그냥 있으면 안 돼요?”

“안돼. 이미 같이 먹기로 약속했잖아. 그만 마무리하자.”

엿가락처럼 욕조 안으로 늘어지려는 라미아를 밀어낸 이드는 손바닥에 샴푸를 짜면서 말했다.

“자, 누가 먼저 씻을래요?”

“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리나가 냉큼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례대로 머리를 감는 것으로 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세 사람은 새 옷을 꺼내 입은 후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선 이미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테이블 중 하나에 검후와 쉴라 일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눈이 마주친 검후의 손짓에 따라서 같은 테이블에 앉으며 이드가 놀라움을 표했다.

“이렇게 빨리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드도 그렇게 늦게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씻고 바로 내려와서 따로 관리와 치장에 소비된 시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검후도 전혀 꾸미지 않은 민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끝은 살짝 젖어 있기까지 했다.

“땀과 흙먼지만 털어 내면 끝인데 오래 걸릴 이유가 없지요.”

“……제가 알기로는 씻는 시간보다 꾸미는 시간이 더 길다고 하던데요.”

“호호호.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그것도 젊은 아이들이 하는 일이죠. 이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꾸미는 것도 적당히 귀찮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말과 달리 검후의 얼굴에는 빛이 났다.

팽팽한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다. 관리가 귀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을 정도의 생기와 아름다움이 깃든 얼굴이었다.

아무렴 반로환동보다 좋은 관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검후 본인일 것이다.

그녀도 천생 여자인 이상 자신이 없다면 관리를 손 놓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머리가 촉촉이 젖은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면서도 농염한 수국 같았다.

“뭐, 그런 것으로 해 두지요.

이드는 더 따지기를 포기하고 발을 뺐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식당에 있던 기사들도 모두 검후와 마찬가지로 민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화사한 얼굴을 자랑하던 기사들이었다.

‘역시 은색 기사단이 유명한 건 무력 때문만은 아니라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 실감을 했다고 할까.

잠시 후, 가장 늦게 도착한 라울까지 더해지고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검후와 함께 하는 아침이었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지극히 편안했다. 지금처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의미였다.

평소 검후가 그녀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려 주는 단면이었다.

그렇게 먼저 식사를 마친 기사들은 하나둘 미뤄 둔 잠을 보충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한편, 마찬가지로 식사를 끝낸 이드와 검후 일행은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서재는 밤사이 전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서재에 쿠키와 과일의 달콤한 향이 더해졌다.

메이드들이 디저트를 놓고 물러나자 라울이 빈 잔에 정성스럽게 차를 따르고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중히 찻잔을 건넸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 작전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와 바벨은 그런 여러분의 수고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고비를 기대 중입니다.”

“하하.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간부다운 라울의 인사말을 이드가 농담으로 받았다.

그렇게 말문이 열리자 대화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서로의 전투에 대해서 느낀 것을 이야기했고, 영혼의 관의 초인 마법에 대해서도 함께 의견을 나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함께 밤을 보내며, 같이 피 흘려 싸웠으며, 같이 먹고 마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드는 존 워스와의 전투에 대해서 끈질기게 묻는 라울의 질문을 적당히 흘려 넘겼다.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 가려는 라울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짜로 알려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게 요리조리 피하는 이드에 라울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영혼의 관의 잔당에 관한 이야기였다.

라울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바벨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그들에 대한 추적을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들에 대한 추가 정보가 들어오면 공유해 줄 수 있겠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검후의 요청에 라울이 냉큼 그러마고 답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그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바벨도 그렇고 제국도 그렇지만, 귀중한 정보일수록 독점하려 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이어지던 이야기는 결국 검왕과 마스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재밌는 사실은 그와 같은 시각, 마스의 대전에서도 검왕에 대해 언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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