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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65화


 1400화

상벌이 불분명한 형벌을 누가 인정할까. 그런 건 본보기는커녕 불신을 쌓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심을 하더라도, 모든 일이 그렇듯 완벽할 수는 없다.

그로 인해 일어난 유명한 혈사가 한둘이 아니다. 심할 땐 문파가 날아갈 정도.

그럼에도 대부분의 문파에서는 이 잔인한 본보기를 유지하고 있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효과 또한 확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일까.

“사지근맥? 그거, 나도 써 볼까요?”

검후가 관심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취향 고백에 라울이 크게 놀랐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런 걸 좋아하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이런 게 어떤 건데?”

“잔혹한 것들 말입니다. 사지근맥을 절단해 버리면, 그건 그냥 산송장입니다.”

보통은 끔찍해서 눈을 돌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드물게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라울의 말은, 검후가 그런 경우가 아니냐는 것.

물론 결코 진심은 아니었고, 검후도 그걸 안다.

그럼에도 검후에게 미움을 사기엔 충분했다.

“허튼소리를 하려거든 당장 나가!”

“하하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반역자인데, 그에 내려질 형벌을 생각하면 오히려 약하지요.”

이드는 납죽 엎드리는 라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림의 형벌이 아무리 가혹해도 나라에서 내리는 형벌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지.’

무려 반역자다. 그런 자들에게 편한 죽음은 차라리 자비와 같다.

문파보다 수백 배 거대한 국가에서도 확실한 본보기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

규모의 차이만큼 형벌의 잔혹함은 더했고, 강도 역시 더 컸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형벌의 결과다.

나라에서 내리는 형벌의 결과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음이다.

반면에 사지근맥을 자르면 누군가가 죽이기 전에는 죽을 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편한 것도 아니다. 라울의 말처럼 산송장이나 마찬가지. 옆에서 수발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검왕을 죽이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드는 검후의 표정을 살폈다.

검왕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진짜였지만, 동시에 그간의 정도 있었을 그녀가 혹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다.

“죽이는 건 너무 쉽잖아요. 편한 죽음은 그에게 너무 편한 처벌입니다. 그로 인해 고생한 이들이 몇인가요. 당장 지금도 그 때문에 이렇게 머리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반대였네.’

허튼 걱정이었다.

하긴, 검후의 나이가 몇이던가. 아직도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릴 정도로 그녀의 인생은 만만하지 않았다.

거기에 검왕의 배신은 정에 흔들릴 정도로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이렇게 둘러앉은 이유도 그 후폭풍 때문이 아니던가.

물론 모든 사건이 삼검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장 미완의 마탑만 해도 그렇다.

검왕의 후원이 없다고 미완의 마탑이 세워지지 않았을까? 결코 아니다.

하지만 검왕의 후원이 있기에 미완의 마탑이 더 커진 것도 사실.

거기에 오색 기사단 중 세 개 기사단이 등을 돌렸으며, 그로 인해 제국 내부의 폭탄이 되었다. 더욱이 코앞으로 다가온 마스와의 전쟁에서도 어떤 최악의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상태.

검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후의 입장에선 아마 문득문득 후회가 될 것이다.

어째서 검왕의 야망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그를 옳은 길로 이끌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건 검후의 탓이 아니지.’

이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이 존 워스로서 세상에 나와 활동하고 있던 시점에서, 지금과 같은 결과는 이미 예정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검왕을 옳은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결국 결과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드는 일단 검후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말씀대로 배신자인 동시에 반역자에게 죽음은 차라리 편한 것이긴 합니다만.”

“사실 후회하고 있어요.’

“……?”

“명예 후작의 도움을 받아 쉐어 가든을 탈출했을 때, 곧바로 소드 팰러스로 달려가 검왕의 목을 잘랐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고, 황제께 고심할 거리를 안겨 드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검후의 발언처럼 했다면 최소한 마스의 전쟁에 있어 변수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검후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검후가 검왕의 목을 자른다.

그것이 불러올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쉐어 가든을 탈출한 검후도 그것을 걱정했다.

특히 그 충격파를 직통으로 맞게 될 소드 팰러스.

검후로서는 그녀에게 너무도 소중한 소드 팰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삼검왕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이 쌓아 올린 명성까지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긴 하지만.’

이드는 눈을 내려 검후의 검을 바라보았다.

사실 자질구레한 이유는 다 변명이었다. 재회를 마치고 검왕에 대해 처음 언급했을 때, 검후가 내보인 거친 살기를 이드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였지만, 결국 검후는 자신의 손으로 검왕을 처단하고 싶던 것이다.

“그렇긴 해요.”

“그런데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시면서, 왜 지금은 살려 두려고 하시는지?”

나 몰래 청개구리라도 삶아 먹었니?

그런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검후가 라울 몰래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음울하게 느껴지는 눈웃음이었다.

“모두 분노가 깊어진 탓이죠. 그런데, 명예 후작의 얼굴을 보면 역시 옳은 선택은 아니었나 보군요.”

“이전이라면 살려 둘 최소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 워스가 처리된 지금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럴 까닭이 없습니다. 그를 계속 살려 두면 오히려 분란의 씨앗이 될 겁니다.”

이드에 있어 삼검왕의 가치는 딱 여기까지였다.

지난밤, 존 워스를 소멸시킨 것과 동시에 삼검왕이라는 존재는 그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지다시피 했다.

혼돈의 파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삼검왕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드에 있어 검왕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그 위치를 알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달려가 처리할 수 있는 인간.

그렇다고 이드가 아무나 죽이는 도살자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이드가 죽이는 대상은 자신을 향해 검을 든 사람과, 죽을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죽을 만한 사람뿐이다.

운이 좋게도 검왕은 이 셋에 모두 해당되는 경우였다.

죽을 짓을 했고, 그것을 밝히려는 이드를 공격했으며, 공격하는 순간 자신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드는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한 사지근맥의 절단은 가문 단위에서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나크렌은 제국이지요. 그런 만큼, 얼마나 많은 인간이 검왕과 연결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검왕과 특히나 강력하게 연결된 인간의 경우・・・・・・ 검왕이라는 불안 요소를 그냥 둘 수는 없을 테니. 결단을 내리려 하겠지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을 위해 검후를 찌른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라면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했을까.

무엇보다 제국에서 독립하는 일이다. 협력자는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다. 분명 아직 나타나지 않고 숨죽이는 내부 협력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언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검왕의 존재가 과연 편할까? 모르긴 몰라도 산송장이 된 검왕을 진짜 송장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거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검왕에 대한 구출 말이다. 그를 중심으로 다시 기회를 엿보려 할 가능성도 작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중원에서라면 걱정할 이유가 없지. 설령 연결이 깊어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니까.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었더라도 산송장을 가져다 어디에 쓸까. 하지만 여긴 중원이 아니라 그레센이거든.’

중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땅.

그레센의 신성력과 마법이라면 사지근맥의 치유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아니, 초기 무공의 연구 과정에서 검후로 하여금 수많은 위기를 넘기게 만들어 준 신성력과 마법을 생각하면 가능할 게 분명했다.

아, 최근엔 그 둘에 초인기라는 방법이 하나 더 늘기까지 한 만큼 회복은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두고두고 제국의 근심거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검왕의 야망을 이루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진 무공은 그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무공이라면, 또 하나의 소드 팰러스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거기에 제국이 그렇게 만만한 곳도 아니고.”

하지만 과연 누가 ‘절대로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뻔히 위험 요소임을 알면서도 그냥 두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아니에요. 역시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사지근맥은 포기해야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후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 속에는 더 이상 검왕으로 인해 귀찮아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검후의 결심이 서자, 가만히 듣고 있던 라미아가 툭 하고 의견을 던졌다.

“그럼, 결국 검왕의 처분은 사형으로 결정이 난 건가요?”

“그래요,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이왕 말이 나온 차에 그냥 끝까지 가시는 건 어떨까요?”

“무슨?”

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라미아가 몇 개 남지 않은 쿠기를 들어 반으로 뚝 잘라 보였다.

“검왕의 처분이 났다면서요. 그럼 늦든 빠르든 검왕의 죄를 밝히고 그의 목을 자를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를 처리해서 변수를 없애자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굳이 여기 앉아서 고민할 이유도 없잖아요. 아니면 당분간 검왕을 살려 둬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어…….”

검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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