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8화
1403화
시작부터 세 배를 외친 황제의 감상법은 과연 범상치 않았다.
이후에도 그는 과감한 스킵과 재생 속도 증가를 수시로 요청했다. 덕분에 그 길었던 밤이 단 십삼 분만에 끝났다.
“음냐, 이렇게 보니까 저희는 정말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네요.”
“응, 그건 아냐.”
살그머니 속삭이는 스폴에 이드는 피식 웃으며 즉답했다.
내용이 압축되다 보니 은색 기사단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 모양이지만, 그들이 제 몫을 확실히 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힘을 잃은 플레타 부대를 지켜 낸 일은 라울의 요구를 이백 프로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플레타 부대원들은 은색 기사단이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감사를 전하지 않았던가.
물론 거기에 다른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드는 똑똑히 봤다.
우쭐한 얼굴을 하고서 당연하다는 듯 감사의 인사를 받던 스폴의 모습을.
“그래 놓고는 왜 그래요? 평소의 스폴 경답지 않게. 혹시 황제 폐하 때문에?”
끄덕끄덕.
“황제께서 우리 전투만 대충 돌려 보시잖아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스폴.
이드는 작게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눈치를 보지 않는 그녀도 제국의 황제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정말 모든 전투를 대강 살폈으니까. 그야말로 대략적인 과정과 결과만 알면 된다는 느낌이었다.
황제의 평가 아닌 평가 대상이 된 입장에서는 애가 탈 만했다.
거기에 더해 그렇게 모든 전투를 대충 살핀 황제가 또 자신과 존 워스의 마지막 전투는 자세히 살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앞의 전투와는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달랐으니까.
아무리 황제라도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드와 혼돈의 파편에 대해 알고 있는 황제였기에 더욱 신경 쓰였으리라.
문제는 스폴을 비롯해서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이랄까.
이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애를 태우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검후님의 전투도 빠르게 넘기셨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대답이 궁한 스폴이 슬쩍 눈길을 피했다.
이드의 말대로, 황제가 대충 넘긴 전투에는 검후의 활약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폴의 괜한 걱정처럼 황제가 은색 기사단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자 스폴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야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자각이 든 모양이다. 그녀는 곧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것보다! 이드 님은 좋으시겠어요. 검후님의 전투도 그냥 넘기신 황제께서 이드 님의 전투만 유심히 살피시잖아요.”
그녀의 말처럼, 존 워스의 죽음으로 영상이 끝이 났음에도 황제는 무언가를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황제의 낯빛은 불그스름했다. 술 때문이 아니라, 영상을 넘어 전달되는 무시무시한 힘의 폭류가 가져다주는 흥분에 취한 것이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움과 흥분이 컸다는 증거다.
어쩌면 애써 감추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대전과 달리, 검후가 함께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는 굳이 철저하게 자신을 단속하지 않아도 되니까. 잠시 후, 눈을 뜬 황제는 가장 먼저 라미아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이런 엄청난 전투를 보고서로 보았다면 평생을 아쉬워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고해 주신 명예 후작 부인께 감사드리오.”
“황제 폐하께 감사를 받았으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라미아가 방긋 웃었다.
그녀에게 표한 황제의 감사가 그저 예법에 따라 귀부인에게 건네는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고마움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감사의 마음을 그저 말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명예 후작 부인의 공을 어떻게 치하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물론 여럿이 모두 고생했고, 특히 마지막 명예 후작의 전투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명예 후작보다 명예 후작 부인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탑주가 목숨을 건 마지막 의식을 명예 후작 부인께서 잘 수습해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지금쯤 큰 혼란이 일어났을 듯한데. 틀렸습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호호.”
노골적으로 라미아의 공을 추켜세우는 황제.
그 발언이 이어질수록 라미아의 콧대가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갔다.
황제를 앞에 두고 자신의 기분을 전혀 감추지 않는 그 모습에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검후가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반대로 황제는 그 모습이 신선하고 기꺼웠다.
이드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자신 앞에서 이렇게 솔직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명예 후작 부인이 제국을 위해 세운 공을 어떻게 치하하고, 무엇으로 보상을 줘야 할지 말입니다.”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춘 황제는 곧 검후와 이드, 그리고 쉴라와 차례로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이것은 할마마마와 명예 후작에도 해당되는 일이오. 은색 기사단장은 섭섭해 말라. 그대들에게 내릴 상은 이미 정해 둔 것이 있으니.”
“섭섭하다니요.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 폐하.”
“안다. 나도 농담을 했을 뿐이다. 하하하.”
“……무슨 농담을 간 떨어지게 하셔.”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스폴이 몰래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아무리 작다고는 해도 황제를 앞에 두고 저런 소리를 하다니.
“……..”
이드는 헷갈렸다. 과연 이 사람이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닌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황제는 라울을 향해 눈을 돌렸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눈빛도 차갑게 변했다.
“바벨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공을 치하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이번 작전은 어디까지나 저희 바벨이 필요에 의해 주도한 일. 결코 제국에 작은 책임도 돌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괜찮으시다면 이번 작전에 크게 활약한 용사들에 대한 포상도 저희 바벨이 하려 합니다.”
“호오, 바벨에서 말인가?”
그것참 흥미롭다는 듯 반응하는 황제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당연했다.
황제는 지난밤의 작전을 ‘제국에 대한 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벨에서 보상하겠다는 라울의 말은 그 작전이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바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히 누구의 공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영혼의 관 붕괴는 대놓고 공개할 수 없는 비밀 작전이었다.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제국은 여러모로 곤혹스러워지고, 마스는 다양하게 쓸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되니까.
그럼에도 황제가 달갑잖은 기색이었던 건, 라울이 선을 그음으로써 제국의 명예 후작인 이드 일가를 바벨에서 욕심낸다는 내심을 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해석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 증거로 라울은 황제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감히 자신 앞에서 사람을 빼 가려 하다니.
황제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례를 논하기에는 또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명분이 부족했다.
비록 명예 후작으로 삼기는 했지만, 이드는 아직 온전히 제국의 사람이 아니었다. 또 자신이 원한다고 제국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며, 황제의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만약 그러려고 했다가는 다른 문제 이전에 검후가 먼저 자신의 종아리를 치겠다고 양팔을 걷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황제는 내심 애가 탔다. 동시에 안타까웠다.
이드를 명예 후작으로 삼을 때, 그때 조금 더 강하게 권했어야 했다. 만약 그때 이드의 정체를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제국의 사람으로 만들었을 텐데.
‘조금 전 보았던 전투를 생각하니, 더욱더 아쉽기만 하구나.’
이런 마음은 이드와 존 워스의 전투를 본 직후부터 끝없이 커져만 갔다.
황제는 나름 스스로 무공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다.
누가 뭐래도 검후를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영상 너머로 보게 된 전투로 인해 그런 인식의 벽이 무너졌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는 힘.
가능하다면 꼭 제국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런 욕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마음과 달리 상대는 황제의 명령도, 명예도, 재력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황제는 그런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원했다면 작위를 사양하고 명예 후작으로 남지도 않았을 테니까.
객관적인 자료를 봐도 그랬다. 마인드 마스터라면 이미 백 년 전의 인물. 그럼에도 젊은 모습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대륙에는 이런 장수종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엘프를 비롯한 요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수종의 특징이, 바로 세속적인 데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수종에게 권력, 명예, 돈 같은 건 시간만 투자하면 당연하게 얻을 수 있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굳이 집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알기에 황제도 굳이 그런 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검후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현재 이드와 제국을 연결하는 가장 튼튼한 끈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믿고 있습니다. 할마마마!’
황제는 이런 자신의 내심을 검후라면 분명 알아줄 것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런 황제의 속내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검후는.
‘쯧쯧쯧.’
내심 혀를 찰 뿐이었다.
이드와 혼돈의 파편 존 워스의 전투를 보고도 겨우 한다는 것이 제국의 힘을 늘리고 싶은 욕심이라니.
‘오랜만에 잔소리를 좀 해야겠구나.’
검후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때 회초리가 필요할지는 황제의 태도를 봐가며 결정할 일이고 말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황제는 라울과의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바벨은 바벨의 일을, 제국은 제국의 일을 하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