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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69화


1404화

황제의 반응이 예민하다 못해 사뭇 까칠하다.

그 앞에 선 라울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도 날을 세운 황제는 두려웠다. 동시에 짜증도 났다.

‘과연 황제. 검후도 있으신 분이 빈틈을 안 주시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제국이다.

검후와 소드 팰러스, 그리고 넘치도록 많은 기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슨 욕심이 이렇게 많은지.

물론 이해는 간다.

원래 많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욕심이지 않나. 더욱이 전력은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이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 커질 전력이 얼마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드는 나눠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바벨이 국토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라울은 이 이상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아직 남은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자면 앞으로도 제국과의 협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괜히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파탄을 일으켜 봐야 바벨에 좋을 것이 없었다.

해서 깔끔히 미련을 접었다.

단, 그것이 포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바벨의 간부로서 바벨이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이리 쉽게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대신 황제의 견제를 피해서 공략 방법을 좀 바꿀 필요가 있겠어.’

당사자보다 주변을 먼저 공략하는 것.

가장 효과 좋은 설득의 기술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대상은 일리나와 라미아라는 두 명예 후작 부인이지만!

‘여기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지.’

단순히 강력한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들 부부 사이의 주도권 때문이었다.

언뜻 보면 목소리가 큰 라미아가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부부이지만, 실제 모든 결정권은 온전히 이드가 쥐고 있었다. 그가 한번 무언가를 결정하면 라미아와 일리나는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설득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라울은 많은 경험이 있었기에 이런 경우 징검다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미아와 일리나를 건너, 이드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

바로 검후다.

‘・・・・・・・ 이봐, 라울. 정말 이게 최선이야?’

스스로 내놓은 황당한 결과에 라울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제국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그녀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드를 바벨로 인도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지옥 불 난이도의 미션.

하지만 자신이 미친 것도 아니고, 진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이런 결과를 내놓지도 않았다. 라울은 그간 자신이 파악한 검후에 대한 정보를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구워삶아야 잘 삶았다는 말이 나오려나.’

그런 생각으로 눈을 빛내는 라울.

하지만 제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양 자신을 노려보는 검후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답이 정말 옳은 것인지 다시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라울이 오로지 바벨의 이익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이야기는 황제로 하여금 황궁을 나와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든 원인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다.

바로 검왕,

그에 대해 검후가 말하고 있었다.

“……해서. 황제가 결정을 내려 주었으면 좋겠소.”

“할마마마께선 결심을 굳히신 것입니까?”

승낙을 구하는 검후의 말에 황제는 오히려 그녀가 진심으로 결정을 내렸는지를 묻는다. 과거 검왕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결심이랄 것이 있겠소. 어차피 정해진 결과인데. 빠른가 느린가의 차이일 뿐이오. 검왕의 죄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소.”

세상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생각보다 많다.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시스템이 정한 틀을 벗어난 죄라면 특히 더 그러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반역이다.

검왕은 제국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검후를 배신하고, 그녀를 향해 검을 들었다.

그 이상 확실한 반역의 증거는 없다.

“혹시 황제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었소?”

“그럴 수는 없지요.”

단호히 부정하는 황제다.

그에게 황실과 제국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이상, 그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검왕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답할 줄 알았소. 사실 이제와 후회되는 일은 하나뿐이라오.”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 한없이 강하면서도 나약한 여인이 검왕에 대한 정을 온전히 끊어 내지 못한 것일까. 그런 걱정을 담고서.

하지만 그건 괜한 우려였다.

“좀 더 빨리 검왕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이오. 명예 후작의 도움을 받아 제국으로 돌아온 그 날, 바로 그날 소드 팰러스로 달려가 배신자들을 처단했어야 했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황제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모두 나의 어리석은 미련 탓이지.”

“…..”

섬뜩함이 느껴지는 검후의 발언에 황제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잠시 말을 잊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자신 앞에 있는 여인은 검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인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배신이라는 칼이 날카롭긴 하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이겨 낸 그녀를 흔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믿고 신뢰하던 기사이자 제자의 배신이 그저 무덤덤할까. 그저 고고하게 서 있을 뿐, 사실 그녀도 상처를 받았으리라.

어쩌면 지금 모습도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한 가면일 수 있었다.

제국을 다스려 온 황제의 눈에는 검후가 쓴 가면의 그림자가 살짝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후회가 몰려왔다.

어째서 자신은 이처럼 쓸쓸한 처지의 검후를 멀리했던가.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기댈 수 있는 가족이었는데 말이다. 뿌드득.

그리고 이런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아프게 만든 놈들에 대한 분노가 되었다.

“할마마마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셨다면 되었습니다. 할마마마의 말씀처럼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 죄에 대한 저의 판결은 오로지 하나. 사형입니다.”

황제의 결정에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예상한 결과였다.

“그럴 줄 알았소. 하지만 정말 이렇게 급히 처결을 해도 괜찮으시겠소? 아무래도 전쟁을 앞둔 상황이지 않소.”

“하하하, 제국 황제인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검왕의 죄도 명명백백한 이상, 감히 그에 대해 반론을 낼 작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할마마마께서 원하시는 일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고맙소, 황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니 할마마마께선 아무 걱정 마십시오.”

황제는 호언장담을 더하며 검후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을 타고 가족 간의 정이 오갔다. 그에 검후의 안색도 한결 편안해졌다.

다만 미안함이 아주 사라지진 않았다.

황제는 호언장담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을 수는 없다.

마음을 정한 검후가 말을 이었다.

“이번 건에 대한 진행에는 내가 직접 나서 황제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죄를 밝히려면 내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 방법이…….”

“제 말을 들으세요. 그래야 황제에게 부담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소드 팰러스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소드 팰러스의 반역이 아닌, 삼검왕 개인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나설 필요가 있어요.”

“끙,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난감하다는 듯 황제의 주름이 깊어졌다.

검후의 주장은 옳았다.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중심을 잡아 준다면, 혹시 있을지 모를 황제에 대한 의심도 사라지고 무공의 본류라는 명예도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럼으로서 검후의 명성에 흠집이 생길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러할 터였다.

떠들기 좋아하는 인간은 어디나 있기 마련.

처음에는 검왕의 무도함을 욕하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검왕을 제대로 보듬지 못한 탓이라며 검후에 대해 흠결을 찾으려 할 게 분명했다. 

‘내가 그 꼴은 못 본다.’

황제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소문을 향해 이를 갈았다.

검후는 그런 황제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 어차피 내가 전면에 나서든 나서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빠르고 짧게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옳은 말.

황제는 잠시 고심하는 듯하더니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요. 할마마마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아~”

“웬 한숨입니까?”

“이번에도 그렇고, 할마마마의 고집을 한 번도 꺾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황제라는 이름도 할마마마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니.”

“호호호. 황제의 기저귀를 갈아 준 사람이 납니다. 그런 사람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소? 보자, 또 무엇이 있더라.”

당장이라도 황제의 흑역사를 읊어 내릴 기세인 검후에 황제는 불에 댄 듯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사하게 흑역사 소환이라니.

과거에 대한 이야기로는 황제가 아니라 선황제가 살아 돌아와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검후였다.

동시에 기억이 나 버렸다. 검후를 멀리한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큼큼.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그럼 전 이만 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혼의 관 붕괴로 인해 발생한 녹색 빛에 대한 불안도 잠재워야 하고, 검왕도 소환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훗, 어쩔 수 없군요. 국정이 바쁜 황제를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검왕의 소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떻게랄 것이 있겠습니까? 영혼의 관이 무너졌습니다. 당연히 그 현장에 있었던 검왕을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요.”

검왕을 소환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사유는 없다.

무엇보다 마스에서 일어난 사단은 하나하나가 가벼운 것이 없는 만큼, 검왕도 보고를 서두르려 할 것이다.

황제는 그때 검왕에게 소환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에 검후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당부를 더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 조금 더 신중하도록 하세요. 검왕은 눈치가 비상한 자예요. 조금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사라져 버릴 겁니다.”

“……유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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