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화


534화

‘어라? 이것 봐라!’

이드는 네리베르가 꺼내 놓은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른 질문이 날아든 때문이었다.

그녀가 케마란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진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면 그 증거를 보여라.’거나 ‘그렇게 서둘러서 화원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정도의 질문이 날아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케마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그 뒤의 사정까지 예측한 거야?’

그렇다면 정말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른 아가씨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시르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녀의 첫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

‘이 아가씨가 시르피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이드는 네리베르에 대해서 케마란이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시르피의 성숙한 모습이 아니라 귀엽고 애교 많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 이드에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내보이는 것은 꽤 기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르피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는 소드 팰러스 긴급대책위 인간들의 행태를 보고 난 뒤라서 그런 생각은 특히 더했다.

이드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 다른 질문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게는 검후님에 대한 소식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해요. 그러니 대답해 주세요.”

간절한 그녀의 눈에는 이 대답을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담겨 있었다.

“휴우.”

이드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지 싶었다. 문득 이드는 소드 팰러스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르피가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륙의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존경하지만, 그중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드가 에단을 따라 나온 이유는 시르피와의 인연(因緣)과 자신이 전한 무공으로 고생한 그녀에 대한 사죄 때문이었다. 이드의 행동도 사랑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오직 시르피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소드 팰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마음대로 움직일까? 화원의 담을 넘어? 중간에 걸리면 엎어 버릴 생각으로.’

에단이 알았다면 기겁할 생각이었다.

“나도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지 못해요. 소드 팰러스로부터 실종되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어요.”

“아.”

네리베르가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마운 일이네요.”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당신처럼 순수하게 검후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요.”

“소드 팰러스의 모든 사람이 검후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안타깝게도 제가 만난 사람들은 이미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더군요.”

이드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하던 네리베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드는 그녀에게 자신이 에단에게 듣고 소드 팰러스에 와서 알게 된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충분히 검후에 대해서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시르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아가씨인지도 몰라.’

네리베르는 이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복숭아색으로 도드라진 턱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서…………… 검후님이 실종되셨기 때문에 이런 지저분한 그림이 만들어진 거군요.”

“지저분한 그림?”

오고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두 눈만 굴리고 있던 케마란이 물었다.

“그래요. 이드 님께 들은 이야기와 소드 팰러스의 대처 등을 보면 한 가지가 떠올라요. 귀족의 작위 승계 암투가 딱 그래요. 권력의 누수를 염려해서 검후님의 실종을 알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에요.”

“말도 안 돼! 후계 암투라니. 여긴 소드 팰러스라구. 검후님의 성이야. 아무리 이드 님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지만 설마 그럴까.”

소드 팰러스의 영향력은 제국을 넘고 있다. 겨우 영지를 물려받기 위한 집안싸움과 비교가 될까 하는 것이 케마란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검후가 없는 소드 팰러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검후와 소드 팰러스가 둘이 아닌 것이다.

네리베르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보들이 많은 것이 이유겠죠.”

초기의 소드 팰러스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때는 순수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검에 대한 열정 하나로 검후의 주변에 사람이 모였던 때였다. 하지만 이후 초인파에 대한 견제라는 정치적 논리가 끼어들고, 황제의 권력이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순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정치 논리와 권력의 향방에 대한 복잡한 인과관계가 없었다면 검후가 실종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혹 실종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며 그녀를 찾았을 것이고,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서 전 대륙을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실종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그녀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말이다. 어디 집 안에 숨겨 둔 비상금을 찾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고로 수색의 성공 여부는 사람의 머릿수로 결정된다. 하나의 국가를 넘어 대륙을 뒤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에서 몇몇 제한된 사람들만 움직이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이 네리베르와 케마란에게는 없었다. 대신 두 사람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화원에 가시려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여기 에단의 말로는 검후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 그곳이라고 하더군요.”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원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드는 만족스러운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일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네리베르 양은 따로 확인하고 싶지 않나요? 제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맞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소드 팰러스에서조차 그것을 이유로 들어 이드의 문제를 뒤로 미뤄 두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기 힘든 골치 아픈 문제라는 점은 확실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의 혈연관계는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리베르는 그에 대해서 묻지 않고 있었다. 케마란이야 직접 들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케마란에게 전해 들었을 뿐인데도 다시 묻지 않는 것이다.

과연 네리베르는 이유가 있는지 다시 이드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대로 빼닮으신 것 같아요.”

“내게 하는 말인가요?”

“네. 화원에 있는 검후님의 방에서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검후님의 추억을 담은 그림인데, 그중 그분의 어릴 적 추억을 담은 그림에서 이드 님과 똑같은 얼굴을 봤답니다. 그분이 마인드 마스터라고 검후님이 말씀해 주셨죠. 이드 님은 그분과 꼭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처음엔 몰랐어요.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은 했지만, 소드 팰러스에 계신 만큼 오다가다 봤겠거니 했죠. 하지만 케마란 양의 설명을 듣고 나서 떠올랐어요. 그림 속의 얼굴이요. 그리고 오늘 이 방에 들어오고서 확신이 들었죠. 확인이라고 하셨죠? 이만큼 마인드 마스터를 닮으셨다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이 크게 놀랐다. 케마란과 에단이었다.

케마란은 네리베르가 검후의 방에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라고 부러워했고, 에단은 그런 확실한 확인 방법이 있는데도 침묵하고서 이드에게 검증 운운하는 긴급대책위의 행태에 조용히 이빨을 갈았다.

“그림이라…………….”

이드는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다는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시르피와의 인연이 좀 더 질겨지고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설마 그녀가 그 시절의 추억을 그림으로 남겨 둘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화원에 가면 한번 보고 싶네요.”

“가능하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록 검후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화원을 관리하는 관리인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검후의 방에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결정이 내려지자 행동은 빨랐다.

오늘 화원에 잠입하기로 한 것이다. 네리베르는 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는 케마란과 방을 나갔다.

[생각보다 화원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걸요?]

“그렇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시르피가 실종되기 전과 지금은 경계 상태가 다를 텐데요.”

두 아가씨가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라미아와 일리나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시르피가 실종된 상태에서 경비가 더 강화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검후가 사라진 화원이 가진 의미는 크지 않았다.

“마스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긴급대책위와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되겠냐?”

혹시나 생길지 모를 소드 팰러스와의 충돌을 걱정한 에단은 이드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긴급대책위가 ‘아, 마인드 마스터와 이렇게나 빼다 박으셨군요.’ 하고 화원의 문을 열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해서 이드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너무 닮았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따지고 나서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애초에 저들이 그림의 존재를 몰랐을까? 화원이 출입 금지도 아니고, 네리베르도 볼 수 있었던 그림이다. 검후가 그녀를 특별히 아꼈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본 사람이 그녀뿐일까. 분명 긴급대책위의 사람 중 누군가도 그림을 봤을 것이다. ‘에이, 빌어먹을 인간들.’

에단은 찝찔한 마음으로 포기했다.


이드들은 깊은 밤에 방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의 눈은 철저하게 피했다. 쓸데없는 관심은 사절이었다.

네르베르와는 그녀를 처음 만난 연무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자리에는 케마란도 함께 나와 있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요.”

이드들도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온 상태였지만, 두 아가씨는 그보다 더 일찍 나온 것 같았다.

“이드 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케마란 양에게 하듯이 제게도 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리베르는 케마란과 대련을 핑계로 숙소를 나섰다고 했다. 늦은 밤까지 칼을 휘두르는 일은 칼귀신들이 모인 소드 팰러스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절 따라오세요.”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혹시 있을지 모를 사람과 시선을 피해서 이드들을 화원으로 안내했다.

원래 화원은 백작성이었다. 그것을 조금 증축한 후에 혼 후작가의 성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소드 팰러스에서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부러 조용한 곳에 위치하도록 만든 것이다. 후작성을 중심으로 잘 조성된 작은 숲이 있었는데, 네리베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나무들이 우거진 후작성의 후문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달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성벽 아래 도착한 그녀는 성벽의 가장 밑에 있는 돌 하나를 들어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사람 하나가 겨우 기어서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이 나타났다.

“하하.”

이드가 조금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건 흔히 말하는 개구멍이었다. 이드뿐만 아니라 네리베르를 제외한 모두가 어이없다는 듯 구멍과 네리베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특히 케마란은 어이없는 표정 뒤로 소리 죽여 킥킥거렸다.

평소 고상을 떠는 그녀가 밤마다 이 구멍으로 기어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그 갭에 웃음이 났던 것이다.

짙은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빨갛게 달아오른 네리베르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코홈. 가끔………… 검후님이 몰래 밖으로 나오실 때 사용하던 곳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곳만은 방어 마법에서도 제외되어 있어요.”

민망함을 숨기기 위함인지 변명 같은 말을 꺼낸 네리베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케마란까지 구멍 속으로 사라지자 이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숙이다 말했다.

“이거 정말…… 가출이 아니라 납치인 거 맞아?”

굉장한 의문을 담은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설마요!”

에단은 마치 자신이 범인으로 몰린 듯이 초조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검후의 납치가 사실이기를 빌고 말았다. 불경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