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0화
1405화
황궁의 내밀한 곳에 자리한 어느 방.
얼마 전까지 주인 없이 비어 있던 이곳은 최근 그 용도가 정해지며, 근위 기사들에 의해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평소 방문을 지키는 기사는 하나.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문 앞에는 무려 네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
뿐인가. 방이 있는 복도 양쪽 끝에 각각 세 명, 정면 창문 밖에 또 세 명의 근위 기사가 서서 주변을 경계 중이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에 기사들이 얼마나 더 숨어 있는지 짐작되지 않는 상황.
다른 이도 아니고 근위 기사가 이 정도로 움직이는 시점에서 방 안에 있을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황제.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면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텅 빈 방을 채우는 것은 화려한 의자 하나뿐. 황제는 없고 두 명의 근위 기사만 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중 하나는 잠시도 황제의 곁을 비우는 법이 없는 근위 기사단장인 하퍼였다.
그는 방의 중앙에 마치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는, 멈춰 버린 듯 방바닥만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부-
미미한 마나의 움직임과 함께,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복잡한 은색의 마법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두 근위 기사의 등이 꼿꼿이 서고 눈이 정면을 향한다. 동시에 환한 마나광이 휘몰아치고, 자리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황제는 정면에 선 하퍼 단장의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편히 있으라지 않았나.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훗, 거기에 누가 있는지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폐하를 지키는 근위 기사로서 폐하 옆을 지키지 못하는 그 순간이 가장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자신도 데려가 줬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 속내를 담은 하퍼 단장의 말을 웃어넘긴 황제는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방을 나서기 전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 방을 나간 후 그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이런 황제의 모습에 하퍼 단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황제가 심각한 모습일 때 간단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 또한 근위 기사의 임무였다.
“가셨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아. 갔더니, 난데없이 숙제를 주시지 뭔가. 자네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일은 없었나?”
“대신들은 여전히 대전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한 보고가 두 건 있었습니다.”
“흐음,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지?”
“약식 보고서를 받아 두었습니다.”
말과 함께 은쟁반을 내미는 하퍼 단장. 쟁반 위에는 반듯하게 접힌 종이 두 장이 겹쳐 있었다. 약식으로 정리된 보고서는 단출했다.
황제에 대한 미사여구는 쏙 빠지고 핵심만 담아 세 줄로 요약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어 내린 황제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참 빠르군, 빨라, 이제야 이걸 보고라고 올리고 앉았다니.”
“…….”
저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
하퍼 단장은 내심 혀를 찼다. 누군지 몰라도 이 보고를 올린 놈은 상당히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런 보고가 올라오도록 만든 대신들에도 불똥이 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부터 불려 나와 고생 중인 대신들인데 말이다.
“모두 물러 터졌어. 마스의 도발을 앞에 두고 있는 시기에, 겨우 이따위 정신머리라니. 어떤가, 단장. 역시 느슨해진 기강을 한번 쪼아 줄 필요가 있겠지?”
“제가 아는 것은 폐하의 안전을 지키는 일뿐입니다.”
“크큭. 그렇게 대답을 피해 가긴가?”
재밌다며 끌끌거리는 황제 앞에서 하퍼 단장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였지만, 괜한 대답으로 대신들의 눈총을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황제는 감히 자신의 물음에 침묵하는 근위 기사단장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검후가 내 준 숙제를 할 시간이었다. 마침 그에 관련된 보고도 올라오지 않았나.
‘정체불명의 무리가 영혼의 관을 습격. 습격 직전 아군에 대한 마스 정규군의 기습 발생. 충돌을 피해 후퇴 중. 영혼의 관으로부터 폭발 확인. 이후 정체불명의 녹색 빛이 하늘로 솟아오름. 모든 사건이 정체불명의 무리에 의해 계획된 작전으로 짐작됨. 이상 검왕으로부터 긴급 보고’
황제는 여전히 들고 있던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검왕으로부터 올라온 보고, 마침 자리를 비운 황제를 위해 요약한 내용으로, 정말 중요한 사실만 담겨 있었다.
그런 중에 깨알처럼 담긴 정체불명의 무리에 대한 책임 회피까지.
“단장.”
“예, 폐하.”
“마법사를 불러오라. 대전에 들면 가장 먼저 검왕의 보고부터 들어야겠다.”
“대신들을 물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대신들도 그에 관한 일로 고생을 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도 이유 모를 현상에 전전긍긍 답답해하고 있을 대신들.
하지만 황제는 정말 그들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대신들을 주변에 세움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검왕의 의심을 피하고, 동시에 그에게 압력을 주기 위함이었다.
“명을 따릅니다.”
하퍼 단장의 대답과 동시에 가장 뒷줄에 있던 근위 기사 하나가 움직였다. 통신에 필요한 마법사를 부르러 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빠른 걸음으로 황궁을 가로지른 황제는 어느새 대전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과 함께 대전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장이 힘차게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거참, 매정하셔라.”
라울이 문이 닫힌 저택을 돌아보며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이야기를 마친 황제를 배웅한 후 라울은 검후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 볼일 없으면 돌아가. 아니, 볼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던 검후.
그녀의 명령을 받은 스폴에 의해 라울은 그야말로 떠밀려 나와야 했다.
라울은 그것이 진심으로 섭섭했다.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가 아닌가. 전우에게 방 하나 내어주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이렇게 거지 취급을 하는 것인지.
“내일 또 올 겁니다!!”
라울이 저택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절대 거지 취급에 충격을 받아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대답 없는 저택을 한 번 더 살피고는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빛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다.
정말이지 충격의 연속이지 않은가.
초인 마법에 대한 정리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존 워스는 어떤가. 또 그를 상대한 이드의 전력은 어떻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작전이 끝난 후 안티로스로 돌아온 후 확인하게 된 사건은 어떤 면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바로 저 위대한 기사의 왕, 검왕의 운명이 몇 마디 이야기가 오가는 것으로 결정되는 걸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검왕이 누구이던가. 또 그가 가진 힘은? 영향력은?
바벨이 그저 버서커에 대한 해법에 눈이 뒤집혀 그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야망에서 가능성을 보아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검왕이 이드 명예 후작과 검후, 그리고 황제가 나눈 몇 마디 대화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었다. 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온전히 검왕에 대한 이야기만 가늠하면 차 한잔을 마실 시간이나 걸렸을까.
그 짧은 시간에 검왕의 운명, 죽음이 결정된 것이다.
“이것이 제국인가.”
라울은 새삼 소름이 돋았다.
왕국 정도의 사이즈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검왕이 아니라도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인물을 제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전력으로나 결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심에 고심을 더하고.
그와 관련이 있는 귀족들 사이를 조율한 다음 전략적으로 대상을 고립시킨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아나크렌은 어떠한가.
검후가 결심하고, 황제가 결정하는 것으로 그 모든 복잡한 과정이 생략되었다.
물론 현재 검왕이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지 않다는 특수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그걸 포함하더라도 분명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 이건 오직 아나크렌 제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 검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라울은 굳이 그에 하나를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드 명예 후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검후는 여전히 바벨에 의해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검왕의 죄가 밝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미완의 마탑은 탈 없이 초인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어.”
검후에게? 아니면 바벨에 있어서?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미소를 띤 라울은 곧 발걸음을 서둘렀다.
황제가 움직인 만큼 자신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를 서둘러야 했다. 제국의 움직임과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 그 즉시 바벨의 손해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황제를 상대로 협력을 약속한 이상 바벨은 발을 뺄 수도 없다. 물론! 발을 뺄 생각도 없다.
아직 소멸시켜야 할 혼돈의 파편이 남았으며, 초인 마법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게 문제로군. 초인 마법. 미완의 마탑. 이 빌어먹을 것들은 끝까지 골칫덩이를 남기는군. 아니면……”
잠시 발을 멈춘 라울이 저택을 힐끔 돌아본다.
저택을 떠나기 전 라미아를 통해 확인했던 초인 마법의 법칙.
그 단단히 선 기둥은 이제는 뽑아낼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완의 마탑이 초기에 안배한 흉흉한 법칙들이 사라졌다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초인 마법에 의한 초인기 박탈? 가능했죠.’
‘초인 마법으로 초인기 부여? 당연히 가능하죠.’
‘초인 마법에 의한 초인기 제어? 그건 기본 중에 기본이던데요?’
라미아를 통해 확인한 바이트 타블렛에 기록된 초인 마법의 설계 핵심. 그 내용은 바벨에 있어, 초인에 있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이건 목줄이 걸리는 수준이 아니라, 초인 마법의 노예가 예약된 상태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가능성을 내포한 초인 마법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후작 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초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도려낸 상태로 초인 마법을 정리해 온전한 법칙으로 빚어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떠올린 라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