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6화
1411화
꺅! 꺅!
꺄르르르!
수련장이 들썩일 정도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막 저택으로 들어서던 이드는 혀를 내둘러야 했다.
“있는 대로 쥐어짠 줄 알았는데. 아직 웃을 힘이 남았어? 젊네, 젊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으면서 마치 노인처럼 말하는 이드였다.
그에 비해 기사단의 구성원은 대부분 삼십 대. 그래도 여타 다른 기사단의 평균적인 나이대를 따지면 젊다고 할 수 있는 구성이기는 했다. 기사단이 이렇게 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검후다.
기사단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무력이다. 젊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공과 경험은 쌓일수록 그 가치를 더하는 법.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이 될수록 기사단의 나이대는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검후가 기사단에 필요한 시간을 메꿔 버렸다.
그녀의 지도 아래 은색 기사단은 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물론 그렇다고 기사들의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가르침도 의미를 가지니까.
이는 다시 말해서 은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이 그만큼 강도 높은 수련에 익숙하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그에 따른 회복 속도도 빠르다. 그걸 이해한 이드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내일은 훈련 강도를 두 배…… 아냐, 세 배 정도 올려 보자.”
말이 끝나는 순간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수련장에서 터져 나오던 웃고 떠들던 소리가 뚝 멈춰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명상 중이던 일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고는 미리 준비해 놓은 차가운 수건과 물을 내밀었다.
“수고했어요, 이드.
이드는 이를 고맙게 받아 들고는 손을 닦고 물잔을 비웠다.
“일리나만 괜찮다면 내일은 같이 나가지 않을래요?”
“이드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굳이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하는 어조로 물으면서도 일리나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일리나도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 회복이 빨라서요. 수련 강도를 좀 올려 볼까 해요. 일리나가 도와주면 여러 가지로 편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좋아요. 일단 시르피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죠?”
“필요 없어요. 이미 맘껏 해도 좋다는 부탁을 받았으니까.”
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소리를 늘어놓았다.
수련 시간 동안에는 기사단을 죽이든 살리든, 그야말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기사단의 생사여탈권을 내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좀 웃긴 일이잖아요?”
검후를 찾으려고 애쓰던 시기.
이드와 일리나는 은색 기사단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그중에는 무공에 대한 가르침도 있었다.
특히 일리나의 경우 쉴라 등에게 난화십이식을 직접 전수하기도 했으니, 아닌게 아니라 정말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랄까.
일리나도 그렇게 생각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긴 해요. 아, 그럼 수련 시간에 저도 가르쳐 줄 건가요?”
살짝 몸을 기대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와 같은 경지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외부의 가르침은 큰 의미가 없기에 스스로 깨달아 얻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일리나가 그걸 몰라서 이런 말을 할까. 이드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당연하죠.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게요.”
“내일이 기다려지네요.”
말 한마디에 환해지는 일리나의 모습에 이드는 잘 대답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그러다 곧 뒤이어 떠오른 얼굴에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이드.
“그런데 라미아는 어디 갔어요? 보이지 않는데.”
“지하 연구실에 내려갔어요.”
“연구실이면, 비올라?”
현재 저택 지하실을 독점하고 있는 인물은 비올라뿐이다.
“네, 연구실이 노총각 냄새로 찌드는 꼴은 볼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드가 오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으랬어요.”
“쯧쯧.”
비올라가 연구실에 틀어박힌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새삼 노총각 냄새라는 트집이라니.
이드는 솔직하지 못한 라미아에 혀를 찼다.
하긴, 신경이 쓰이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전에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도 식사 시간에는 기어 나오던 인간이 지금은 삼 일째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힘으로 끌어내자면 어려울 것도 없다. 다만 그런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기에 그냥 두고 있었을 뿐이다.
초인 마법에 대한 비올라의 열정과 고집이 어디 보통이던가.
그런데 그런 비올라 앞에서 초인 마탑의 시조인 탑주가 죽었다. 비올라 입장에서 탑주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스승이자, 이기고 싶은 상대.
자신이 이뤄 낸 성과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은 상대.
조금은 치기 어린,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그런 감정의 대상이 탑주다.
그런 탑주가 죽었다.
아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저러고 있는 건 과했다.
탑주가 죽고 이미 삼 일이 지났다.
삼일이면 어지간한 충격도 정리가 끝날 시간이다.
부모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이상은 구질구질할 뿐이다.
무엇보다 탑주가 비올라의 스승이긴 했지만, 비올라에게 탑주는 사랑보다는 호승심이 더 강했다. 그렇기에 미완의 마탑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찰싹 붙지 않았던가.
머리가 나쁘지 않은, 오히려 뛰어난 비올라이니 그 시점에서 이미 탑주의 죽음을 한 번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미완의 마탑이 벌여 놓은 짓은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럼 지금 비올라의 반응은 뭐냐 싶지만.
‘뭐긴 뭐야. 생각과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는 거지.’
상상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의 괴리감.
막연한 상상이 생생한 현실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클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로 늙으신 부모님의 죽음이 있다.
돌아가실 거라는 건 알지만 막상 더 이상 부모님이 옆에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 닥치는 막막한 슬픔.
그것이 지금 비올라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삼 일은 과했다.
“그럼 라미아 말대로 우리 먼저 먹어요. 올라오면서 보니까 오늘 스튜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았어요.”
이드는 말과 함께 곧장 일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라미아의 당부도 있었지만, 곧 회복을 마치고 땀을 씻은 기사들이 식당으로 몰려올 것이기에 그 전에 식사를 마치기 위해서였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넓은 식당은 조용했고, 요리는 하나같이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큼직한 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스튜는 여태 먹어 본 것 중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렇게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자 때마침 식당을 향해 몰려오는 굶주린 무리가 보였다.
축축한 머리도 다 말리지 않고 주린 배를 감싸 쥐고 식당을 향해 달리는 그들은 그야말로 짐승과 같았다. 은색 기사단의 환상을 단숨에 부숴 버릴 것 같은 파괴력이랄까.
이드는 그들을 피해 위층 테라스로 향했다.
검왕이 대전에 들기 전까지는 일정이 없으니, 저택 곳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테라스에는 길쭉한 소파가 있었다. 고급 가죽에 몸이 묻힐 정도로 푹신한 최고급 소파.
이드는 책을 한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일리나가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기대고는 이드가 펼친 책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보기 좋은 한가로운 광경.
하지만 누군가 두 사람 가까이 다가간다면 한 가지 특별한 점에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드의 손에 들린 책에 적혀 있는 문자.
그것은 그레센 땅에 처음 나타난 문자였다.
문자의 이름은 한글.
한글을 처음 본 일리나는 동글동글 귀여운 문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삼십 분만에 한글을 마스터했다.
참고로 영어의 마스터에는 2시간이 걸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쓰는 것 기준이다.
좌우간 그렇게 문자를 익힌 일리나는 독서 목록에는 자연스럽게 지구의 책이 들어갔다. 영상과 음악에 이어 도서까지.
착실하게 지구의 문화를 흡수하는 일리나였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구의 문화를 흡수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재미와 호기심도 분명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과 떨어져 있을 때 이드가 생활한 시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의 표시였던 것.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지금에 와서는 가족 모두가 즐기는 취미가 되었지만 말이다.
사락사락.
그렇게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오길 몇 시간이 흘렀다.
산 정상에 솟아 있던 해도 어느새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테라스로 나서며 가져온 차도 이미 텅 빈 상태.
책에 못 박혔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미아가 너무 늦는 것 같죠?”
“연구실로 간 지 네 시간 이십오 분이 지나고 있어요.”
일리나가 말했다.
엘프의 체내 시계의 정확성이란. 더 자세히 물어보면 초 단위로 대답해 줄 것 같아서 무섭다.
“비올라가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려나.”
그렇다면 이해는 간다.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라미아라고 해도 비올라의 똥고집을 감당하긴 쉽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가 볼까요?”
이드는 일리나의 물음에 들고 있던 책을 탁 하고 접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저택 지하에 있는 연구실이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궁금하면 직접 가서 살피면 된다. 만약 비올라가 되도 않는 똥고집으로 라미아를 괴롭히고 있다면 시원하게 엉덩이라도 들고 차 줄 겸.
“가 보죠. 라미아에만 맡겨 두는 것도 미안하고.”
결정을 내린 이드와 일리나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독서도 좋지만 아무렴 이쪽이 더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두 사람은 곧장 계단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라이트 마법으로 환하게 밝혀진 지하실 복도를 지나 연구실 문 앞에 도착한 두 사람.
문이 닫힌 연구실은 조용했다. 연구실의 특성상 여러 가지 마법적 처리를 잘 해 둔 덕분에 소리가 새지 않는 것이다.
퉁퉁.
이드가 문을 두드렸다.
딱히 노크 없이 바로 들어가도 뭐랄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런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것이 좋다.
철컥,
직후 문이 열리며 라미아가 나타났다.
“새삼스럽게 노크는, 아무튼 들어와요.”
기본이 중요하니까 그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하아~ 말하기도 지쳐요.”
“역시 비올라가 똥고집을 부렸구만? 이 자식 어딨어? 감히 남의 부인을 고생시키고!”
이드가 팍 하고 인상을 썼다.
아닌게 아니라 라미아의 얼굴에는 상당한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바이트 타블렛을 다룰 때보다 더 힘들어하는 기색이다.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스트레스가 큰 것일까.
이드는 비올라를 단단히 혼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