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8화


535화

“허어!”

빡빡한 개구멍을 통과하고 일어난 이드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졌다.

이드의 눈앞에 은백색의 달빛을 받아 색색으로 빛나는 수백, 수천의 꽃들이 가득한 장관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화아아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꽃에서 마치 안개처럼 향기가 뿜어지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환상적인 광경에 먼저 개구멍을 벗어난 케마란은 한참 동안 움직일 생각을 하질 못했다.

그러다 이드의 뒤를 이어 일리나와 에단이 들어오면서 앞으로 밀리자, 정신을 차린 케마란이 느닷없이 네리베르의 뒤통수를 치고는 말했다. 

“나쁜 년!”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네리베르가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렸다.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허락도 없이 외인을 데리고 화원에 들어온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마란은 이미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그녀는 황홀한 듯 화원의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사하네. 이런 걸 지금까지 혼자 몰래 보고 왔다는 거 아냐.”

노골적인 부러움의 표시에 화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네리베르가 조금 우쭐한 모양으로 답했다.

“그럼 케마란 양이 직접 검후님께 허락을 받지 그랬어요. 당신의 노력 부족을 저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어, 그럼 이 개구멍으로 몰래 숨어드는 걸 검후님께서 허락하셨단 말이야?”

“당연해요. 애초에 여길 저에게 알려주신 것도 검후님이셨는걸요. 게다가 설마 제가 검후님의 허락도 없이 제 마음대로 화원을 드나들었겠어요.” 이드는 두 아가씨의 뒤에서 네리베르를 다시 보게 됐다. 짧은 인연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녀와 시르피의 관계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팬으로서 선망하던 아이돌과 같은 검후와 친분을 가졌으니 팬의 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느긋하게 두 아가씨의 수다를 들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드는 두 아가씨를 재촉해서 화원 깊이 들어갔다.

원래 혼 후작 영지의 영주성이었던 화원은 외성의 역할은 소드 팰러스에 넘긴 후 영주가 머무는 내성만 남은 상태로, 내성을 둘러싼 성벽과 영주성 사이에는 꽃이 가득했고 그 중심에 하얀색의 고색창연한 궁전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뾰족한 첨탑과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성이 아니라 저 버킹엄 궁전과 비슷한 형태의 기품 있는 궁전이었다. 이는 시르피와 결혼하면서 혼 후작으로 승작한 뒤 성을 개조한 때문이었다.

네리베르는 이드들을 궁전의 쪽문으로 안내했다.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온 입장에서 정문을 열고 당당히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리베르는 작지만 회색으로 단단해 보이는 강철 문 앞으로 이드들을 안내했다.

“제가 화원에 올 때 항상 사용하던 출입문이에요.”

철컥! 철컥!

성질 급한 케마란이 조심성 없이 손잡이를 비틀어 보고는 말했다.

“잠겼는데?”

·열쇠가 있어요.”

그녀의 성급한 행동에 네리베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을 했지만 포기하고 직사각형 모양의 길쭉한 열쇠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네리베르를 대신해서 결국에는 에단이 말을 꺼냈다. 덤벙대고 서투른 후배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저 문에 특별한 마법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경우 작게는 그 개인이 다칠 수 있고, 크게는 작전이 실패하고 동료가 다칠 수도 있다.

“주의하겠습니다.”

케마란이 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의 상황과 이드의 정체에 가슴이 두근거려 평소 같지 않은 서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는 듯 에단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네리베르가 잠긴 문을 열었다. 묵직한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며 열리고, 그 안으로 중간중간 희미한 등이 밝혀진 궁 안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음산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네리베르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말했다.

“말씀하신 방은 2층에 있어요. 밤이라 관리인들도 대부분 퇴근을 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잠을 자고 있을 테니까,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잠시만.”

이드가 막 돌아서는 네리베르의 어깨를 잡았다.

“……”

갑작스러운 이드의 행동에 네리베르가 물어왔지만 이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찬찬히 어두운 궁 안을 살폈다.

문 안쪽은 밤하늘만큼이나 조용했다.

‘투기다.”

그러나 이드는 문이 열리는 순간 분명히 느꼈다. 짧은 순간이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궁 안에 흐르던 애절한 투기가 밖으로 흘러나오며 사라진 것을 말이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숨이 흐른다.’

그것은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투기를 느낀 기감처럼 초극을 넘은 무인의 감각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드가 감지한 숨은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숨이 아니다. 투기와 같이 깊고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는 무인의 정돈된 숨이다.

‘어때?’

이드의 물음에 어느새 그의 어깨 위로 올라온 라미아가 대답했다.

[정문이 있는 홀 쪽에 상당한 마력이 응축된 뭔가가 감지되고 있어요. 마법이 가리고 있어서 그 안에 인간이 있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요.] ‘인간이야. 마법에서는 숨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인의 감각을 피하지는 못한 것 같아.’

이드는 그렇게 확신하고는 어깨의 라미아를 다시 일리나에게 넘겨 준 후 말했다.

“아무래도 안에 누군가 모습을 숨기고 잠복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평소에도 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이드의 말에 네리베르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에단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스터. 혹시 긴급대책위에서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이드의 요청을 틀어막고 있는 그들이다. 이드가 담을 넘을 수 있다는 걱정으로 화원을 지키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최근 에단에게 생긴 스트레스성 위염의 원인도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떤 일이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그럼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 들어간다.”

이드는 에단의 말을 끊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저들이 경계를 풀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호한 이드의 말에 에단이 남은 말을 쑥 삼켰다.

이드를 선두로 일행은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드는 숨이 느껴지는 궁전의 홀까지 거침없이 발을 놀렸다. 네리베르의 말과 달리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궁 안에 머물고 있는 관리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 밖으로 궁 밖으로 내보낸 모양이었다.

이드는 홀과 가까운 그림자 안에 일행들을 남기고 홀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홀은 넓고 높았다. 파티 때 이용되던 곳이라 2층까지 트여 있어 더욱 커 보였다. 그 넓은 공간을 돌아 이드의 시선이 숨이 느껴진 곳에 가 멈췄다. 홀의 중앙에서 가장 안쪽이었다.

그곳에는 전쟁의 여신처럼 양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석상이 서 있었고, 그 양측에는 그녀를 호위하듯 은색의 번뜩이는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검을 지팡이처럼 잡고 서 있었다.

이드의 시선이 석상의 여인에게 머물렀다.

‘시르피.’

처음 보는 여성의 얼굴이지만 이드는 보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안에 기억 속의 작고 귀여운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엿보인 때문이었다.

‘이쁘게 컸네.’

어쩌면 시르피를 보더라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싶었다. 동시에 이드의 마음속에 담겨 있던 시르피의 이미지가 급격하게 성장하더니 더 이상 귀엽게만 보이지는 않는, 기품 있는 여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시르피의 석상이 아니었다.

이드의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 은색 풀플레이트 아머의 기사를 향했다. 하얗게 빛나는 작은 눈구멍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이 갑옷으로 덮여 있어서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언뜻 보면 리빙아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드는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리빙아머가 숨을 쉬지는 않을 테니, 저것은 분명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은색 갑옷의 기사로부터 쇳덩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가라!”

정상적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경직되고, 딱딱한 기계의 소리였다. 하지만 그 짧은 말 속에는 은근한 짜증과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음?”

이드는 생각지 않은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좋은 꼬투리를 잡았다고 따져도 모자를 판에 돌아가라니? 그러기 위해서 저런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돌아가라! 이곳은 감히 너희들이 함부로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의아한 마음에 이드가 반응이 없자 은(銀)기사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길어졌다.

‘이거, 긴급대책위가 대비를 했다고 생각한 건 섣부른 생각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 턱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이곳에 있는 거요?”

“어이없는 자다. 허락도 받지 않은 불법 침입자가 물을 질문이 아니지 않은가.”

이드는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말은 맞는 말이다. 이드도 설마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작 지금의 상황이 되고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소. 미안하오. 하지만 결단코 좋지 않은 뜻으로 궁에 든 것은 아니오.”

“그렇겠지.”

은기사가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거기에는 지겨움이 담겨 있었다.

“분명 검후님의 흔적을 찾기 위해 들어온 것일 테지!”

그것은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빌어먹을 작자들, 도대체 기밀이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

은기사의 목소리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깃들었다.

이드는 뭔가 생각과는 다른 흐름에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확실히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검후님의 흔적을 찾기 위해 왔소.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빌어먹을 작자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오.”

“연관이 없기는. 설마 네놈들이 전지전능하여 검후님의 일을 그냥 알았다고 할 셈이냐. 네놈들에게 그분의 일을 알려 준 자가 있을 것이 아니냐. 이 일은 기밀 중의 기밀인데 네놈들과 같은 애송이에게 그 정보를 흘렸으니 당연히 기밀이란 단어도 알지 못하는 빌어먹을 작자들이 아니겠는가.”

“으음…………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가 있는 하오.”

이드는 은기사와 자신 사이에 묘한 오해가 생겨난 것을 알았다. 잘못하다가는 엉뚱한 화풀이 상대가 되게 생겼다.

하지만 이드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은기사는 오히려 확신을 하는 듯했다.

“흥! 오해는 무슨! 네놈들이 하는 변명을 내 한두 번 들은 줄 아느냐!”

‘에단 이놈.’

은기사의 말대로라면 이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이드는 화원의 담을 넘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펄쩍 뛰던 에단을 향해 이를 갈았다.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경고하건대, 이곳은 너희들이 감히 발을 붙일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마지막이라는 은기사의 말에는 정말 앞서와 다른 기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드로서도 지금 상황이 오해든 아니든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소.”

“과연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화된 마법진을 감히 너희들이 어떻게 넘어왔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그것을 알아봐야겠구나!”

은기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희미한 빛 아래서도 창백한 은색의 갑옷 위로 신비와 이적을 집대성한 문양이 빛나며 떠올랐다.

부우우우-

그 뒤를 따라 은기사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힘의 파동과 투기가 솟아올랐다.

파아아앗!

그것이 신호가 된 듯 홀에 달려 있던 모든 마법 등의 불이 켜지며 홀을 환하게 밝혔다. 그 아래에서 은기사는 은빛과 청빛으로 빛나며 검을 세워 말했다.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다. 너희들의 어리석음을 탓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