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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85화


1420화

검후는 그 자리에서 출발 날짜까지 정했다.

바로 내일.

서두르는 감이 있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많은 준비가 필요한 기사단의 경우, 그 단장이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의 주인공은 검후였기에 이드로서는 얌전히 대세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런 차에 검후가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기사들이 타고 갈 말이 필요한데. 황제가 준비해 주겠습니까?”

“그러지요. 할마마마께서 타고 갈 마차까지 최고로 준비하겠습니다.”

황제는 검후의 요청이 오히려 반가운지 기꺼운 표정이 되어 답했다. 그리고는 출발 전까지 문제없이 마무리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마법진 속으로 사라지는 황제를 배웅한 이드는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기며 검후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뭐가요?”

“말을 타고 소드 팰러스로 가겠다는 거.”

황제에게 말과 마차를 요청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마법을 통한 공간 이동이 아닌, 직접 움직이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길에 버리는 시간이 적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저택과 소드 팰러스 사이에는 이전에 설치해 둔 마법진이 있었기에,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저택의 모든 인원을 소드 팰러스로 옮길 수 있었다.

즉, 공간 이동이 어려운 것도 아닌 상황.

당연히 검후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괜찮지 않을 것이 있나요?”

“금방 소문이 퍼지잖아.”

은색 기사단이 호위하는 마차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으리라.

특히나 여러 사건이 발생하는 중에 검후가 돌아온 만큼, 지대한 관심이 모일 게 너무도 뻔했다.

이래서야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혹시 그걸 노린 거야?”

“제 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잖아요. 당당히 정문을 지나야죠. 은밀히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말은,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는 거지?”

“원래 여자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답니다.”

에둘러 답하는 검후에 이드는 머리가 아팠다.

명분, 체면, 체통.

긴 역사를 가진 문파와 명문가에 관련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던 요소였다.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지만, 또한 이해하고 싶지 않은 무의미한 것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일 뿐이다.

세상은 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지독할 정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그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검후는 모든 행동에서 이런 요소를 신경 써야만 했다. ‘검후’라고 불리기까지의 과정에서 그런 부분에 어느 정도 초탈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다 털어 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드 일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특히 반기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말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소문보다 빠를 수는 없잖아. 결국 소드 팰러스에도 소문을 들어갈 텐데, 그건 어쩌려고? 검왕 때와 같은 실수가 생길지도 몰라.’

황제의 부름을 거부하고 사라진 검왕.

무려 검왕이 사라졌는데 그 아래 기사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오히려 실시간으로 가까워지는 검후에 검왕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두려움에 먹힌 기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도주뿐이다.

“괜찮아요. 이번엔 감시도 붙었고, 병력도 미리 배치된 상태니까요. 겁쟁이들이 도망치더라도 대부분은 잡히게 될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옛말에,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잡는다고 했다. 더욱이 병사들이 기사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황제는 언제든 소드 팰러스를 포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중 기사가 얼마나 될까.

물론 제국에 기사는 충분하다. 하나 그들 전부를 모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당연히 기사와 병사들을 섞어서 배치했을 터.

도망을 생각한 기사들이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을 노린다면, 일개 병사들이 그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상대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시골뜨기도 아니고, 삼검왕 아래서 단련된 최고의 기사들일 텐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같은 기사라도 쉽지 않을 그들을 병사들로 감당하라니. 죽으라는 말과 다를 게 뭔가.

호각이나 마법 통신 따위로 그에 대비해 둬도, 그렇게 신호를 받아 지원이 도착했을 때면 죄인들은 이미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생각보다 많은 기사들이 도망에 성공할 것 같았다.

“상관없어요.”

그러나 검후는 딱히 미련이 없다는 얼굴로 말한다.

그러고 보면 과연 그녀라고 그런 예상을 하지 못했을까? 따지고 보면 이드보다 세상을 살아온 경험이 더 풍부한 검후가?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혹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 생각인 거니? 도망자가 발생하도록 유도하려는 거야?”

“도망자들이 많이 나올까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검후.

하지만 그것이면 대답으로 충분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나오겠지. 삼검왕과 관련해서 찔리는 놈이라면 최소 육, 칠 할은 기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지.”

나쁜 놈들일수록 위기에 민감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살길부터 살피는 부류가 바로 그런 놈들이다. 특히 더 큰 권력을 좇아 배신자를 따르는 놈들이라면 백발백중이다.

서재로 돌아온 검후가 창가에 섰다. 저 멀리 보이는 황궁.

“황제가 그랬지요. 귀족 중 검왕과 교감을 주고받은 반역자의 색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어렵지만 어쩌겠어. 해야지.”

황제를 향해 직접 칼을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반역이라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한 번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언제고 다시 기회만 있다면 제국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자들이라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철저히 가려내야 옳다.

“해야죠. 그런데 말이에요. 소드 팰러스는 황궁보다 더 어려워요. 왠지 아세요? 삼검왕은 소드 팰러스의 시작과 함께했기 때문이에요.” 

삼검왕은 검후가 들인 첫 제자이자 기사들이다.

소드 팰러스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 세워졌다. 소드 팰러스는 검후와 삼검왕이라는 이름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인연은 거미줄보다 복잡했다. 크고 작은 인연을 따라가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 없을 지경이다. 한 다리를 건너면 모두 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곳이 바로 소드 팰러스라는 말이다.

이런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을 따르는 배신자를 가려내야 한다.

황제의 미션보다 최소 두 단계는 더 어려웠다. 그 과정을 예상해 보자면, 모르긴 몰라도 보통 혼란이 아닐 것이다.

배신자를 가려내는 일.

보통은 이런 사건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약삭빠르게 정적을 음해해 죽여버리는 경우까지 있다.

물론 검후가 나선다면 그런 억울한 자가 나오는 일은 없다.

그녀라면 참과 거짓을 구분할 만한 능력자를 있는 대로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신관이나 마법사 같은 사람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다.

더해서 검후와 소드 팰러스의 명성이 추락하는 일도.

“그래서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죠. 내려놓기로.”

“…..”

무엇을 내려놨다는 말일까?

“어때요? 제 선택이 틀린 것 같아요?”

“모르지. 어차피 그들을 어떻게 하든 그건 네 몫이니까. 답이 없는 일이잖아.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무서운 고양이를 풀어 쥐가 알아서 도망가게 만든다. 그런 중에 성긴 그물을 쳐서 재수 없는 놈은 목을 잘라 버리고.

“응,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진심이었다.

그야말로 검후의 연륜이 그대로 묻어나는 수였다.

명예도 지키고 쓰레기도 치우고.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을 배신한 죄인들을 놓아주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경험이 없다면 떠올릴 수도 없는 방법일 것이다. 특히 권좌에 올라 있다면 더더욱.

“괜히 검후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네.”

“뭐에요? 갑자기.”

“대단하다고, 끙, 그럼 나도 이제 슬슬 내일 출발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 볼까?”

“……그거 어차피 일리나와 라미아가 하는 거잖아요. 자기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대답 대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드를 째려보는 검후다.

사실 일리나와 라미아가 아니라도, 준비라고 할 만한 건 딱히 없다. 어차피 필요한 모든 것은 아공간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소드 팰러스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전날 통지를 받은 기사들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깨어나 있었다.

뒤이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저택으로 달려와 일행들을 성문 밖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황제가 준비한 것이 분명한 말과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말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사나워 보였다. 잘 훈련되어 실전을 경험한 전마들이 분명했다. 결코 아무에게나 등을 내어 주지 않는 전사들. 하지만 그런 놈들도.

“어머나, 귀여워라!”

“네 이름은 오늘부터 햄토리야. 알았지?”

푸르르륵!

전의 가득한 은색 기사단 앞에서는 그저 순한 양과 같았다.

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살피고는, 검후가 바라보는 마차를 눈에 담았다.

“황제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네.”

화려했다.

그 말 말고는 다른 감상이 나올 것이 없을 정도로 마차는 화려했다.

진짜 금을 입힌 것은 물론이고, 화려한 문양에 보석까지 달렸다. 과연 이걸 진짜 타고 장거리를 움직여도 괜찮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화려함. 진짜 마차라기보다는 관상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절대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외부가 이 정도라니, 그 내부가 궁금하긴 하지만 자신이 타고 싶지는 않은 마차였다.

하지만 정작 그런 마차를 바라보는 검후는 만족스러운 것 같다.

“딱 좋구나. 황제께 내가 참 만족했다고 전해 드리거라.”

“폐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기사가 물러나자 은색 기사단 소속의 여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검후가 그 안으로 들어가서는 이드를 돌아본다. 

“뭐 해요? 타지 않고.”

“……끙.”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재촉에 이드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이드를 따라 일리나와 라미아마저 마차에 오르자 기사가 다시 문을 닫는다.

직후 마차 옆에 선 쉴라가 소리 높여 외쳤다.

“돌아간다! 소드 팰러스, 우리들의 성으로!”

“오!”

“출발!”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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