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86화
1421화
아나크렌 제국의 영토는 거대하다. 다른 두 개 제국도 그러하지만, 어지간한 왕국 영토의 서너 배는 된다.
그러다 보니 지역 간 불균형도 극심했다. 발전한 지역은 수도 못지않게 화려했고, 낙후된 지역은 마법등 하나 보기도 힘들 정도로 차이가 컸다. 보통 이런 불균형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가 교통의 불편이다. 우리 지역이 볼거리가 많고, 물건이 좋아도 길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고.
하지만 제국에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거대한 제국 전역을 꼼꼼하게 이어 주고 있는 대로 때문이다.
여기서 대로는 폭 육 미터에 두꺼운 돌이 깔린 길을 의미한다. 영지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돌 대신 초인기나 마법으로 땅을 고르고 단단히 해 놓은 구간도 있다.
이 대로가 완성된 것은 사십 년 전이다.
그 이전에도 대로라 할 만한 길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제국 전역을 잇지는 못하고 나름 자금이 넉넉한 영지나 수도 인근에만 뚫려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제국의 힘이 강해지며 제국 전역을 잇는 대공사로 번진 것이다.
제국의 힘이 강해지니 여유 자금도 생겼거니와, 적국이 대로를 따라 침입하리라는 헛소리도 사라진 덕분이다.
그리고 현재.
바로 그러한 대로 위를 은색 기사단과 황금 마차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렇다.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달리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속도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검후가 속도를 높이라 명령한 것도 아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속도가 올라가더니, 지금과 같이 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소드 팰러스에 대한 은색 기사단의 그리움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한시라도 빨리 배신자들의 피를 보려는 투쟁심의 정도거나.
검후는 물론, 쉴라와 스폴도 현재의 속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소드 팰러스까지의 길은 아직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다면, 마차다.
아무리 잘 정비된 대로라지만 완성된 지 사십 년이다. 주기적으로 보수를 한다지만 비바람에 깨지고 갈라진 곳이 한둘이 아니다.
덜컹!
지금도 보라. 불쑥 튀어 올라 있는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덜커덕하고 흔들렸다. 마침 힘차게 내달리던 속도까지 더해진 덕분에 마차가 살짝 허공에 뜬 것처럼 보였다.
쉴라는 말을 몰아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검후님. 괜찮으십니까.”
이런 질문도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돌아오는 똑같은 대답.
“편안하단다. 신경 쓰지 말래도 그러는구나.”
“속도를 줄이면 이런 경우가 없을 텐데요.”
“다시 말하지만, 그냥 두어라. 아이들도 오랜만에 맘껏 달리고 싶은 모양이니까.”
“알겠습니다.”
“쉴라 경이 생각보다 잔걱정이 많네?”
대답과 함께 물러나는 쉴라의 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보던 이드가 말했다. 그는 현재 라미아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상태였다.
“모르셨어요?”
“딱히 알 만한 기회가 없었지.”
“하긴.”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검후가 돌아온 뒤 지금처럼 소소하게 쉴라가 살펴야 할 상황이 많지 않았다.
있다면 영혼의 관 습격처럼 하나같이 선이 굵고 파괴적인 움직임뿐이었으니, 섬세함이 나올 구석이 없기는 했다.
“그나저나 이드는 편해 보이네요. 마차는 느리지 않냐고 그러더니.”
“뭐, 내 일은 아니니까.”
“어머나? 우리 사이에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딨어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스승과 제자?”
당연한 거 아니냐는 검후의 반문에 이드는 피식 웃고 만다. 그리고는 정답에 대한 상이라도 되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젤리 조각을 내민다.
냉큼 젤리를 받아 입에 넣은 검후는 입에서 퍼지는 새콤달콤함을 즐기며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이드가 가져온 이 다른 세계의 간식은 너무 훌륭해요. 우리 제국에서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머지않아 그렇게 되겠지. 그레센도 변하고 있으니까.”
더욱이 이드와 라미아가 가져온 것들이 있으니, 그 변화의 속도는 한층 격렬할 것이 분명했다. 목표가 있으면 아무래도 속도는 빨라지는 법이니까. 그전에 혼돈의 파편이라는 시련을 잘 넘겨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갑자기? 뭘 말하는 거예요?”
“소문.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제법 많았잖아.”
제국의 대로인 만큼 이용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대로가 쉬는 시간은 몬스터의 습격이 발생할 위험이 커지는 밤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밤도 아니다. 자연히 대로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았고, 그들은 빠르게 대로를 달리는 황금 마차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많은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대로를 달리는 황금 마차.
지루한 이동에 이만한 이야깃거리도 없을 것이다.
즉, 저들로부터 소문이 시작되리라는 의미였다.
“글쎄요. 대략 오일 정도?”
입에 든 젤리를 혓바닥으로 문질러 녹여 먹은 검후의 답이었다.
이드는 그럴 리가 있냐는 듯 검후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물론 단순히 화려하기만 한 마차라면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차를 호위하는 여기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더해지면? 분명 이야기는 들불처럼 퍼질 것이다.
그렇게 소문에 제대로 살이 붙을 때까지의 시간.
이드는 그 시간을 삼 일 정도로 보았다. 그런데 오일이라니?
하지만 이는 이드의 오해였다.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것.
검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전국 주요 길목과 영지로 곳곳이 퍼지기까지 오 일이요.”
“・・・・・・・ 그건 또 너무 빠르잖아. 제국이 무슨 손바닥만 한 섬나라도 아니고.”
그러자 이드가 들고 있던 젤리 봉지에 손을 집어넣던 검후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런 걸 보면 이드가 참 옛날 사람이라는 실감이 나네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고 있는 줄 알아요? 어지간한 소식은 제국 끝에서 끝까지 길어야 이틀이거든요? 그래도 소문이라서 넉넉히 오일을 잡은 건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오 일은.”
이드는 부정적인 태도를 쉽게 바꾸지 않았다.
오일이라니. 인터넷이 있던 지구에서도 제대로 된 소문이 퍼지기까지 그보다는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은색 기사단과 네 이름 값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흥, 그렇게 못 믿겠으면 이 젤리 봉지를 두고 내기라도 하든가.”
검후가 땅땅 큰소리를 쳤다. 어지간히도 젤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드는 스승으로서의 넓은 아량으로 들고 있던 젤리 봉지를 검후에게 넘겼다. 봉지에 남은 젤리는 고작 한 줌이었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내기를 하자던 검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 백 년 연륜이 어디 가는 건 아니네.”
처음 이틀은 조용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다음부터,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는 일행들의 귀에도 자신들에 대한 소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들려온 소문은 별것 아니었다.
-어느 황족이 황금 마차를 타고 대로를 폭주 중이다!
당연히도 제일 처음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것은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였다. 그냥 딱 보기에도 터무니없이 비싸 보이는 마차.
하지만 스토리가 없는 소문은 힘이 없기 마련.
곧 그럴듯한 스토리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황금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단이 있는데, 그 기사들이 전부 여자더라.
-여기사로 이뤄진 기사단이면…… 은색 기사단?!
-은색 기사단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다고? 대체 누가 타고 있기에?
-멍청하긴! 은색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실 분이 검후 말고 누가 있냐! 검후가 돌아오셨다!
엉성하던 소문에 제대로 된 살이 붙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불씨를 한번 일으키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키우는 건 순식간인 것처럼.
그래서 소문이 퍼지는 모습을 들불 같다고 하는 걸까.
좌우간 검후가 언급된 순간부터, 소문이 퍼지는 속도에 날개가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퍼지던 소문은 그야말로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소문은 소드 팰러스로 힘차게 달리는 일행을 옛날에 앞질러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국 끝에까지 닿았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오일.
“내 말이 맞죠?”
“……인정. 내가 그레센을 얕봤네. 여기, 상품.”
내기가 성립한 건 아니지만, 이드는 검후가 노리던 젤리 두 봉지를 꺼내 검후에게 안겨 줬다.
동시에 인정했다. 마법을 이용한 그레센의 통신 시스템은 그 속도 면에서는 지구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감히 중원 무림과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렇듯 검후의 복귀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진 시점에서, 일행은 소드 팰러스까지 삼 일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소문을 접하고 마중을 나온 영주의 초대로 영주성에 머물게 된 일행은 그곳을 찾아온 황제의 연락관을 통해 소드 팰러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도 난리가 났네.”
가장 먼저 보고서를 읽어 본 이드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고서에 담긴 소드 팰러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흥분이 가득한 혼란이다. 마치 축제를 앞둔 도시의 모습이랄까.
사실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기도 했다.
삼검왕이 검후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수련생을 포함해 많은 이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자 존경하고 사랑하는 검후가 돌아온다는 사실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더욱이 현재 소드 팰러스는 자랑스러운 삼검왕 중 하나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 명성에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검후가 돌아오면 그것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이런 모습과 달리, 과연 수면 아래의 반응은 어떨까?
그들도 검후의 복귀를 기뻐하고 있을까?
절대 그럴 일이 없기는 하지만, 보고서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파견한 사람들도 그 안까지는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자신들이 한 짓이 있고, 최근에 연속으로 터진 사건들에 저들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 접근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읽어 볼래?”
“아뇨. 안 봐도 알 것 같아요.”
하긴 주기적으로 잠적과 활동을 반복해 온 검후였으니까.
“혹시 폐관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매번 이런 느낌이었어?”
“개인적으로 축제를 위한 핑계라고 생각하지만요.”
검후는 말해 놓고는 무슨 일이 떠올랐는지 비실비실 웃는다. 과거 재밌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더니 곧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드의 반응을 보니 아직 도망자는 나오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러게. 이탈자가 있다는 말은 없는데?
말을 마친 이드가 다시금 보고서를 팔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