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0화


“누님!! 여기 정식 곱빼기로 하나요!!”

“시끄러 임마! 왜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헤헤… 미안해요. 근데 너희들 아침은? 내려오면서 보니까 거 이쁜 전직 용병 아가씨도 밖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더만…. 아직 아침 전이면 내가 내지.”

“아니요. 이드님과 저희들은 벌써 아침을 먹었어요. 근데 혼자 이신 걸 보면… 어제 같이 계시던 분들은 아직 못 일어나신 모양이네요.”

라미아의 말에 루칼트는 신문을 접어 따로 치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정상이니까 말이야. 오히려 내가 술이 비정상적으로 센 거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루칼트였다. 그때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주인 아줌마의 말이 들려왔다. 그녀의 손엔 어느새 루칼트가 주문한 요리들이 들려 있었다. 아침인 만큼 많은 요리가 준비되어 있어 빨리 나온 모양이었다.

“알긴 하네. 그런데 너 여기 앉아서 먹을 거야? 손님들 방해 말고 이거 들고 저~ 리가서 먹어!”

그 말과 그녀가 쟁반을 루칼트에게 내밀었다. 루칼트는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 쟁반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또 큰소리 나겠다 싶어 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괜찮으니까 그냥 여기 놔주세요. 아주머니.”

루칼트는 그 말에 보란 듯이 요리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는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의 모습에 주인 아주머니는 날카로운 눈으로 루칼트를 내려다보고는 바람이 휘날리는 몸을 획 돌렸다. 하지만 급히 그녀를 부르는 이드의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 세워야 했다. 이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루칼트를 바라보던 시선과 달리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저… 잠깐만요. 아주머니.”

“응? 무슨 일인데?”

“저기 아주머니가 어제 말했던 몬스터 습격이요. 언제 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주인 아주머니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묘하단 말이야.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뭐지?’

사실 어제의 말 같은 건 그냥 농담으로 간단히 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라미아에겐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무언가 가려져 있는 듯한 느낌과 어딘가 낯익은 듯한 그 기운에 이드와 라미아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조만간 몬스터의 습격을 예견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말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몬스터의 습격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드는 벤네비스에 올라 드래곤의 레어를 찾는 것보다 이 묘한 기운을 가진 여인의 정체부터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드의 생각을 눈치챘을까. 주인 역시 녹옥색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순간이지만 이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루칼트의 요상한 비명성이 그 침묵을 깨버린 것이다.

“후엑! 저, 정말이야? 정말 누님이 또 예언했단 말이야?”

꽤 크게 소리친 그의 말에 여관 여기저기서 웅성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위의 분위기야 어떻든 루칼트는 다시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고, 그녀는 고양이를 닮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금 전 이드와 오갔단 묘한 분위기는 어딘가로 사라진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판 함정에 상대가 걸려들었구나 하는 개구장이 같은 표정과도 같았다.

그녀의 긍정에 루칼트는 인상을 구겼고 주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몇몇 용병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빼들고 손질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어제와 같이 주인이 몬스터의 습격을 예언한 일이 몇 번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저렇게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정확성은 의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젠장…. 얼마간 얌전하다 했더니….. 그럼 언제예요? 그 녀석들이 움직이는 게….”

그 말에 그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잠깐 기다려 보라는 듯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이드도 가만히 내력을 끌어올려 주위의 기운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렇게 몇 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드는 종잡을 수 없는 흉폭한 기운과 함께 대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주인 아주머니 역시 눈을 반짝이며 루칼트를 바라보았는데, 그와 동시에 너비스 전체에 퍼져 나갈 듯 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앙~ 와아아아아아~ 몬스터 출현. 몬스터 출현. 마을의 남동쪽 방향으로 몬스터 출현. 마을 내 용병들과 가디언들은 속히 집합하십시오. 그리고 마을 외곽에 있으신 분들은 속히 마을 중앙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와아아아아앙~

“… 바로 지금이지. 호홋…. 불쌍하게도 아침도 못 먹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움직여야겠구나.”

루칼트는 경보음이 들림과 동시에 뛰어나가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주인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꽥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 그랬죠!! 저 골탕 먹으라고 일부러 이야기 안 해 준 거 아니예요?”

“호호호… 잘 아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소리 치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먼저 아닐까? 돈 벌어야지~”

염장을 지르는 그녀의 말에 루칼트는 뭐라 하지도 못하고 급히 윗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마도 자신의 무기를 가지러 가는 모양이었다. 루칼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뒤를 이어 여관의 뒷문을 열고 급히 들어서는 오엘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의 습격이란 소식 때문인지 그녀는 뽑아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들고 있었다.

“사숙 지금….”

“아아… 나도 들었으니까 진정하고 여기 앉아.”

이드는 그녀에게 방금 전까지 루칼트가 앉아 있던 자리를 권했다. 오엘은 상황과 맞지 않은 이드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검을 검집에 넣으며 이드와 그 양옆으로 서 있는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로서는 몬스터가 습격했다는 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드와 라미아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 이상한 상황에 오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여관 밖으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구요. 누님…..”

오엘은 이드와 라미아가 등지고 있는 창문 밖으로 여러 개의 단봉을 들고 뛰어가는 루칼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의문을 표했다.

“몬스터와 전투가 있는데… 가보지 않으실 건가요?”

하지만 이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씨익 웃으며 주인 아주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묘한 이드의 모습에 오엘이 엉거주춤해있자 라미아가 살짝 눈을 깜박이며 이드가 권했던 자리에 그녀를 앉혔다.

“……….”

“………….”

이미 텅 비어버린 여관 안으로 묘한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이 길어질수록 이드와 마주선 주인 아주머니의 분위기도 묘해져 갔다. 거친 용병도 쉽게 다루는 여관 주인이란 이미지에서 마치 신비한 분위기의 엘프와 같은 분위기로.

그제 서야 오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라미아 옆으로 붙어 앉아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주인 아주머니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지되는 침묵 사이로 간간이 멀게 느껴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폭음이 세 네 번 들렸을 때였다. 가만히 서서 이드와 눈길을 나누던 주인 아주머니가 이드 앞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부드럽고 맑게 울리고 있었다.

“정말 이런 일은 처음인걸. 나라는 ‘존재’에 대해 눈치채다니 말이야. 보통은 내가 보이고 있는 모습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데…. 대단해.”

이드는 부드러운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눈앞의 ‘존재’의 모습에 자세를 바로 했다. 처음엔 은거한 무술의 고수이거나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 중에서 이런 존재감을 내보일 수 있는 존재. 이런 모습으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을 만한 존재. 그리고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그 낯익은 기운의 정체.

‘라미아…. 벤네비스에 올라갈 필요 없을 것 같아.’

이드는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저도 설마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이죠.”

“그 말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는 말이겠지?”

“물론이죠. 사실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이런 곳에 있을 ‘존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더구나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 주셨으니…. 더욱 당신의 정체를 알기 쉽지요.”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옆얼굴에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오엘의 시선에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지금 당장의 상황에 대한 해명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를 비롯한 라미아와 눈앞의 존재는 대화의 내용을 아는데 자신은 알아듣고 있지 못하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아마 대충 눈치는 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스스로의 예측을 믿기보단 확답이 담긴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예측만을 믿기엔 결론 내려진 대상의 존재감이 너무도 거대한 때문이었다.

이런 오엘을 위해서였을까. 이드는 눈앞의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했다.

“아마 지금이 당신의 본 모습일 테니…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지요. 제 이름은 그레이드론. 먼 길을 여행하고 있는 여행자죠. 이드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리고 저 쪽은 저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라미아와 사질인 오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푸른 숲의 수호자이신 그린 드래곤이여.”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드의 마지막 말 때문일 것이다.
주인… 아니, 지금은 그린 드래곤인 그녀의 미소가 이드의 말에 좀 더 깊어졌다. 자신이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방금 전의 이야기로 그 정체를 알고도 저렇게 태연하게 자기 소개라니. 비록 그녀가 인간을 만나고 겪은 것이 일년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으로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기만 한 그녀였다.

“호호호… 푸른 숲의 수호자란 말이지. 과연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네…. 좋아. 나도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이름은 카르네르엘. 네 말대로 그린 드래곤이지. 나이는 대략 이천 살을 좀 넘었단다. 지금은 이때까지의 내 일생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한때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을 대하고도 이렇게 태연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당연했다. 방금까지 편하게 이야기하던 사람이 드래곤이라고 밝혀졌는데 태연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원래는 저 쪽에서 아직도 멍한 눈으로 그린 드래곤 카르네르엘을 바라보고 있는 오엘과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유희가 재미있다니 다행이군요.”

“모두 너와 저기 있는 라미아라는 아이 덕분이지.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보통 인간 같아 보이진 않거든. 저기 아직 정신차리지 못하는 얘를 빼고 말이야.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넌 희미하긴 하지만 엘프의 향이 묻어 있거든.”

카르네르엘은 그렇게 말하며 이드를 향해 다시 한번 눈을 빛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것도 흥미롭지만 자신과 꽤나 친한 종족인 엘프의 향을 간직한 인간이라니.

‘호호호… 점점 재미있어지는 인간이야…. 이참에 유희 내용을 바꿔볼까?’

“이상하지?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섬 나라에 있는 엘프 중엔 인간들 사이로 나간 엘프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이드는 그녀의 이야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에 온 지 꽤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일리나의 향이 그대로 남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 카르네르엘이 말하는 향이란 냄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일종의 기운과 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엘프와 몇 일 같이 다닌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 엘프와 많은 교류가 있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드는 그레센에서 일리나와 아주아주 깊은 교류를 나누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누어야 할 교류였다.

“흐음… 일리나의 향이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군요.”

“일리나라… 너에게서 나는 향의 주인이라면 엘프겠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라미아를 불러 이제야 정신이 들어오는 오엘을 재우게 했다. 이제부터 오갈 이야기는 그녀가 들어서 별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듣는다 해도 이드와 라미아가 상당히 귀찮아지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상관이 없기 하지만 말이다.

라미아의 마법에 오엘은 앉은 자세 그대로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카르네르엘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오가는 이야기는 비밀인가 보지? 사질이라면…. 혈족 이상으로 상당히 가까운 존재일 텐데 말이야….”

“상관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생기니까요. 그리고 앞서 말했던 일리나는 제 아내입니다.”

그 말에 카르네르엘의 눈길이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미아를 향했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갔다. 라미아를 소개했을 때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소개한 때문이었다. 엘프 아내가 있으면서도 말이다. 보통의 엘프들은 자신의 짝이 자신이외의 짝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라미아의 존재는 일리나도 알고 있지요. 그녀도 알지만 라미아는 조금 특별한 존재라서요.”

카르네르엘은 자신의 의문을 미리 풀어주는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재주도 좋군. 특별한 존재라지만 짝을 이루는 문제에서 엘프를 납득시키다니 말이야. 자… 그럼.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볼까? 네 아내 이야기 때문에 저 아이를 재우진 않았을 테니 말이야.”

이드는 그녀의 말에 라미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 드래곤과 이야기를 하자면 자신과 라미아의 이야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드 자신의 지금 상황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원의 벽에 대해서 아시겠죠?”

무언가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던 카르네르엘은 생각도 못한 갑작스런 질문에 또한 까다로운 주제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이드는 자신이 그레센으로 차원 이동 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틈틈이 그레센에서 있었던 큼직한 사건들의 이야기도 합해서 말이다. 그런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카르네르엘의 눈은 마치 그 안에 보석이 들어앉은 듯 흥미로 반짝거렸다. 확실히 이드가 겪은 일들은 드래곤들도 겪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드의 이야기가 이 세계로 넘어온 부분에 이르러서 그녀의 눈은 다시 라미아에게로 향했다. 이드에게서 라미아가 검이었다는 것과 이곳에 오면서 인간으로 변했다는 것을 들은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녀로선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말들이었다.

잠시 후 그렇게 정신없이 흥미로운 이드의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카르네르엘은 쉽게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드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라미아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완전히 비우고서야 끝이 났다.

“그럼…. 결국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이 날 보기 위해서 이고, 그 이유가 차원의 벽을 넘는 문제라는 건데….”

“네,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이드의 재촉에 카르네르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드래곤으로서의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이미 이드와 라미아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안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드래곤과 같은 존재로 봐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었다. 입가에 머물던 그녀의 손가락이 이번에 슬쩍 뒤로 이동해 분홍빛 볼을 톡톡 두드렸다. 뭔가 차원에 관한 것을 모두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왔을까. 카르네르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부정이었다.

“휴~ 안됐지만 없어. 그 엘프녀석의 말이 맞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그런 방법은 없어. 아직 시간의 벽도 넘지 못했어. 그런 상황에서 무슨 차원의 벽을 넘겠니? 단지 네가 들렸었던 그레센이란 곳보다 공간계 마법이 좀 더 발달한 정도지. 사실 차원의 벽을 넘는다는 건 그 세계의 최고위 신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야. 내 생각이긴 하지만 차원을 넘는 마법을 찾기보단 그 팔찌를 어떻게 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이드는 그녀의 말에 이야기 도중 걷어둔 말에 걸려있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카르네르엘의 대답에 별다른 실망은 없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이제 차원을 넘는 문제는 이 팔찌를 잘 사용해 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도대체 어떻게 작동시킨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숨을 내쉬던 이드는 라미아가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포근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상당히 낙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드는 마주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카르네르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쨓든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충고도 잘 들었구요.”

“별로 도움도 되지 못했는데 뭐….”

그녀는 드래곤답지 않게 겸양의 말을 하며 오엘을 향해 손장난을 치듯 손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그와 함께 주위로 묘한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카르네르엘이 오엘의 마법을 깨우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과연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오엘이 잠시 움찔거리더니 평소 짓지 않을 것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자신이 눈감기 전의 상황이 생각이 났는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그녀 앞의 세 명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이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괜찮아. 그냥 잠시 잠들었던 것 뿐이니까.”

이드는 자신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이던 오엘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모습에 미안한 얼굴로 잠시 후에 이야기하자는 말을 건넸다. 그녀로서는 자신을 따돌리는 그들의 행동이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이다.

‘하아~ 하지만 쉽게 이야기할 꺼리가 아닌걸 어쩌겠어. 라미아… 잠시 후에 네가 좀 달래봐.’

‘칫, 왜 저한테 일을 떠 넘겨요? 재우라고 한 건 이드님이잖아요. 이드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드는 자신의 얼굴 옆에 있는 그녀를 째려보았다. 점점 자기 맘대로인 라미아였다. 그때였다.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다시 열린 카르네르엘의 이야기가 세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그런데 아까 나온 그 제로라는 단체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그들이 왜요?”

“….. 어쩌면 꽤나 대단한 녀석들일지 모르겠다고.”

“그게 뭐가요? 그건 저희도 직접 겪어봐서 잘 아는 이야긴데.”

이드들은 생각지도 않게 나온 제로에 대한 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저 그린 드래곤이 대단하다니…. 그들의 전력이 보고 들은 것 이상이란 말인가?

“너희들도 아마 알걸? 봉인의 날 이후에 한동안 날뛰었던 멍청한 두 마리 검둥이와 빨갱이 드래곤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그들에 의해 도시 다섯 개가 그냥 날아갔는데…. 하지만 검둥이에 빨갱이라니.

“하하하… 깜둥이에 빨갱이 표현이 재밌네요. 물론 알고 있죠. 그때가 유일하게 드래곤이 본체를 사람들 앞에 드러냈던 때니까요.”

“사… 사숙! 그런 말은….”

오엘은 방금 전 좋지 않던 기분도 잊고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드래곤 앞에서 저렇게 드래곤을 막 부르는 사숙의 행동이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문제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이드의 말대로 그 두 드래곤 이후로 아직까지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없었다. 물론 간간이 와이번을 드래곤을 착각해 들어오는 소식이 있긴 했지만 정말 드래곤이 나타난 건 그때뿐이었다. 사람들에겐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제로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라미아가 카르네르엘의 말을 재촉했다.

“있지. 사실 그 둘은 성인이긴 하지만 겨우 천 살을 넘긴 어린 드래곤이라 갑작스런 봉인 해제에 그렇게 날뛴 거지. 꽤나 놀랐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상황도 모르고 함부로 날뛸 수가 없어서 드래곤 로드의 부탁으로 나를 포함한 둘이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지. 나는 빨갱이에게, 나와 같은 연배의 놈은 깜둥이에게. 단순히 말 몇 마디 하러 갔던 거였는데… 거기서 그 계집애와 그 일당들을 봤지.”

계집애와 그 일당들이라. 어쩐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제로와는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드였다. 그렇다고 듣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카르네르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카르네르엘은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서로 대치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인간형으로 위프해 온 덕분에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감히 드래곤 앞에 배짱 좋게 모습을 보인 인간들에 흥미가 들어 한쪽에 숨어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뭔가 이야기가 오고 가는 모습에 마법을 사용했다.

“…. 물러나 주십시요. 드래곤이여. 지금까지 그대가 행한 파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꽤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진 계집아이였다. 종아리까지 다아 있는 석양빛의 긴 머리와 하얀 얼굴. 대충 본 모습이나 목소리로 보아 14살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그 말하는 내용이나 분위기는 전혀 애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것은 난폭하며 철들지 않은 레드 드래곤. 저놈은 그녀의 말에 곱게 물러날 놈이 아니었다.

“꼬마 인간 계집아. 내가 왜 너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은 나의 의지. 앞으로의 행동 역시 나의 의지이다. 나는 전혀 너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비켜라. 용감히 내 앞에 나선 너의 용기를 높이사 이번 한번은 살려 줄 테니 물러가라.”

카르네르엘은 그 말에 저 녀석이 꽤나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이여. 저의 이름은 꼬마 계집이 아니라. 메르엔입니다. 이미 가르쳐 드렸을 텐데요. 또한 당신께서 행하는 일이 당신의 의지라면 그 의지에 의해 지금까지 희생된 자들은 저희들 인간. 저도 같은 인간이므로 충분히 당신께 제 의지를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 꼬마 인간이 성질 나쁜 빨갱이보다 말발이 더 센 것 같았다. 아마도 얼마 가지 못해 폭발할 것이라고 카르네르엘은 생각했다. 과연 꼬마 계집 메르엔에게 몇 마디 더 들은 빨갱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표호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보통은 저 정도—빨갱이의 덩치는 길이만 80미터다. 날개를 펴면 더 커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덩치가 날아오르면 그 위압감과 공기의 파동에 뒤로 날아가거나 밀리는 게 당연하지만, 메르엔이란 계집애는 어떻게 된 것이 꿈쩍도 않고 있었다. 단지 그녀 뒤로 떨어져 있는 나이 들어 뵈는 놈들이 창백한 얼굴빛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을 뿐이었다. 특히 기가 막힌 것은 주위로 몰아치는 그 강렬한 바람에도 메르엔의 긴 머리는 살랑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한쪽 손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녀가 들고 있긴 벅차 보이는 긴 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석양 빛 머리와 닮은 색을 머금은 검.

카르네르엘은 갑자기 나타난 그 검이 소환 마법을 비롯한 몇 가지 마법이 걸린 마법검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일어난 일에 그녀는 그 검이 단순한 마법검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 검과 소녀는 황당하게도 빨갱이가 펼쳐낸 마법을 순식간에 봉인해 버린 것이었다.

특히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봉인된 마법을 방향을 바꾸어 풀면 그 위력 그대로 빨갱이에게 되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빨갱이도 그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는지 자신의 마법에 그대로 두드려 맞았다. 하지만 어려도 드래곤이다. 상처는 고사하고 더욱더 화가 난 빨갱이는 처음의 마법보다 더욱 큰 마법을 시전했다.

처음 시전한 마법이 약했기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한 듯 하다고 에르네르엘은 생각했다. 솔직히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마법을 봉인하는 아티팩트. 그런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들자면 못 만들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티팩트는 그 대단해 보이는 기능과는 달리 고위의 마법은 봉인하지 못하리라. 아니, 설사 봉인한다 하더라도 방금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에르네르엘의 생각을 비웃으려는지 7써클 고위급 마법이 아주 쉽게 봉인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마법만을 따로 봉인하기 어려운 대지계 마법을 말이다. 그리고 방금 전과 같은 메르엔의 마법 되돌리기. 이번엔 빨갱이도 한번 겪은 일이라서인지 급히 실드를 형성해 마법을 막았다. 그 뒤 몇 차례 강력한 마법이 이따라 시전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마법들이 모두 봉인되어 되돌아왔다. 정말 저 황당한 아티팩트를 만든 놈이 누구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빨갱이도 자신의 마법에 되려 자신이 당하자 화가 났는지 크게 회를 치며 날아올라 커다란 숨을 들이켰다.

“브레스…. 저것이라면….”

이번엔 성공일 것이다. 카르네르엘은 생각했다. 숨을 모두 들이마신 빨갱이의 주위로 브레스의 기운을 응축하는지 강렬한 열기가 어리었다. 그 열기가 얼마 대단한지 빨갱이의 몸체 주위로 진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다음 순간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세상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한 강렬한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의 힘에 가장 가까운 힘,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카르네르엘은 브레스가 작렬하며 일어난 충격에 대비해 주위에 방어막을 두르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있을 강렬한 섬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불안하도록 고요한 그 상황에 살짝 눈을 뜬 그녀에게 보인 것은 투명한 선홍빛 구에 둘러싸여 맹렬히 타오르는 빨갱이의 드래곤 브레스였다. 저 메르엔이 가진 빌어먹게도 황당한 아티팩트가 드래곤의 브레스를 봉인해 버린 것이다.

“뭐…. 야…..”

놀람에 크게 치떠진 그녀의 눈에 메르엔이 들고 있던 검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동작을 신호로 허공에 떠 있던 선홍색 봉인구가 잠시 출렁이더니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안에 머물러 있던 강렬한 불꽃이 그 위력 그대로 날아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빨갱이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자신의 브레스가 그토록 쉽게 봉인되어 버린 데 대한 경악일 것이다. 카르네르엘조차 그리 놀랐는데, 정작 그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카르네르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땅을 살짝 박차 오르며 지금 필요한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텔레포트!!”

“나는 그대로 빨갱이 등으로 텔레포트 해서는 녀석을 잡고 곧바로 다시 이동했지. 덕분에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드래곤으로서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아티팩트를 피해 도망가야 하다니. 생각 같아선 앞뒤 생각 없이 한판 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왜 싸우지 않으셨어요?”

이드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물론 고위의 마법들을 가볍게 봉인하고 그것을 되돌린다니. 그런 방법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라미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아는 그 검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라미아 자신이 검으로 창조되었기에 그런 것 같았다.

그때 카르네르엘의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왜 싸우지 않았냐 라. 간단해. 그때 검이 낼 수 있는 힘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녀의 말에 모두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한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지금 그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전투를 피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보통 상대라면 꺼내지도 않았을 이야기. 하지만 듣는 존재가 특별하니 자연히 흘러나오는가 보다.

“고위 마법부터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봉인과 해제가 자유자재인 아티팩트. 하지만 그때 보인 그 힘이 그 검의 전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 얼마나 더 강한 봉인 능력을 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자칫 내가 판단을 잘못 내렸을 때는 내 마법과 브레스에 두드려 맞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봉인되어 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그들이 어째서 제로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카르네르엘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라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겠지.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진 인물이 용병이나
가디언이라면 벌써 이름이 퍼져도 벌써 퍼졌겠지.”

“하지만 일부러 정체를 숨기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산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처럼.”

카르네르엘은 고개를 저었다.

“노~ 노~ 그런 인물이라면 분위기만으로 알 수 있어. 나도 눈썰미가 제법 좋거든.
거기에다 그 메르엔 계집애는 혼자서 움직인 게 아니었어. 그 애 뒤에 있는 나이든
놈들. 그들은 딱 보기에도 한패야. 그렇게 몰려다니는 녀석들은 분명 뭔가 꾸미거나
일거리가 있는 놈들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에게 끼워 맞출 조직은 제로라는
놈들 뿐인게 되는 거지.”

확실히 그렇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세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위와 같은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 대로라면 국가란 이름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드는 머릿속으로 자신과 라미아가 알게된 많은 가디언들의
얼굴을 떠 올렸다. 아마 그들이 국가란 이름아래 매어 있는 동안은 제로와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떠올랐기 때문일까. 라미아가 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 걱정되세요?”

“큰 변수가 없는 한 승패는 났으니까.”

“흐음… 그럼 네가 직접 나서보는 건 어때? 너 정도라면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잖아?”

“에엑!! 싫어요. 싫어. 내가 뭐 하려고요?”

이드는 한번 해보라는 표정의 카르네르엘의 말에 두 손을 내저았다. 그들과 적으로
대치중인 것도 아니고, 그들이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게 생각하면
좋다고 볼 수 있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 그들 제로였다. 좋은 예로 제로에게 점령된
도시는 오히려 치안이 더 좋아졌다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만 아니라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쯤 밖의 전투도 끝이 났는지 작게 들려오던 폭음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고함소리가 들리는데…. 몬스터들을 해치운 모양이네요.”

내력을 귀에 집중해 창 밖의 동정을 살피던 오엘의 말이었다. 그 말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생각났는지 카르네르엘에게 눈총을 주었다.

“오늘 습격한 몬스터…. 카르네르엘 짓.이.지.요?”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검사와 같은 분위기에 카르네르엘은 슬며시 이드의 눈길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모, 몰라. 내가… 어떻게 그런걸 알겠어?”

“거.짓.말! 사실대로 불어요. 카르네르엘 짓이 아니면 어떻게 몬스터가 온다는 걸
미리 알 수 있겠어요? 도대체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이 유희를 즐기고 있는 마을에
몬스터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 예요?”

강하게 나오는 이드의 모습에 순간 자신이 드래곤이란 것도 있고 움찔한 카르네르엘은
더 이상 시치미 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체 작게 사실을 말했다.

“아, 아니야. 평소 저 녀석들 습격해오는 건 저 녀석들 스스로 그러는거야. 정말이야. 뭐…. 가끔 오늘처럼… 내가 불러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손으로
꼭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된다구.”

“그럼, 오늘은 왜 부른건데요? 저 녀석들을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예요. 설마
심심해서는 아닐테고…”

“…..”

“빨리 말해요.!!!”

“우쒸…. 이건 내 유희데… 그래, 사실은 루칼트 녀석 뺑뺑이나 돌릴려고 그런거야.
녀석이 어제 보통 날 놀렸어야지. 하지만 너희들 앞이라 두들겨 패지도 못했고 해서….
또 너희들이 겁먹고 벤네비스에 오르는 걸 포기 할가 해서….”

“…. 에효~ 정말 이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온 드래곤 맞아요?”

“…. 킥… 푸훗… 하하하하…..”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어이없었는지 이드는 고개를 내 저었고 라미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그녀가 뒤에 붙인 말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한 인간을 괴롭히려고
이 천살 넘은 드래곤이 그런 유치한 수를 쓰다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오엘은 이 일에 웃을 수만은 없었다. 드래곤의 가벼운 분풀이에
지금 자신과 같은 용병들이 죽고 있을지 다치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눈앞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함께 정말 인간이 아니란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이드와 너무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잠시 눈앞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정체를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드래곤 앞에서 저리 당당히 할말 다하고
웃어대는 이드와 라미아가 웬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젠장, 그래 웃고싶으면 웃어라. 하지만 그 녀석은 정말 싫어.”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너비스엔 다시 활기가 찾아 들었다. 여관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여관안으로 들어서는
일단의 인물들. 그 중 한 명이 자기 키보다 커 보이는 길다란 창을 들고 식당안을
울리는 큰 소리를 쳤다.

“누님!! 저희들 왔어요. 돈벌어 왔습니다.”

“시끄러! 조용히들 못…. 꺄악!!!! 너희들 거기서 한발 작만 더 들여 놨다간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도대체 그렇게 피칠 갑을 해서 들어오면 어쩌잔 거야? 빨리 나가서
대충이라도 씻고 들어와!”

목청 높여 소리치는 카르네르엘의 모습에선 더 이상 드래곤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어딜 어떻게 봐도 드센 용병을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여관 주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 너어…. 루우카알트으!! 내가 꼼짝 말랬잖아. 이 자식아~~”

확실히 여관 주인 아.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