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2화
다음 날 아침 평소 때와 달리 일찍 일어난 제이나노는 아침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려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침부터 이드와 라미아로부터 한 대씩 두드려 맞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일찍 일어났는지 다른 사람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제이나노는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이드를 깨우기 위해 이드의 방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이나노는 꽤나 부럽고 샘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어제 밤 머리를 말려주던 그 자세 그대로 침대에 넘어져 라미아를 안고서, 이드에게 안겨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을 깨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 제이나노는 잠시 후 일어난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며 짓궂게 놀려댔다.
그것도 탐욕스런 배불둑이 귀족이 자주 짓는 그런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드와 라미아도 그의 농담에 간단히 얼굴을 붉히고 말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의 농담에 결국 손을 쓰고 만 것이다.
그 결과로 지금 제이나노의 머리엔 두 개의 혹이 이층으로 싸아올려져 있었다.
제이나노 덕분에 조금 늦어진 아침을 먹은 네 사람은 아침부터 찾아와 오엘의 검술을 감상하던 하거스를 비롯한 디처팀원들의 안내로 본부에 마련된 장례식장에 들렸다.
그곳엔 이번 제로와의 전투로 희생된 가디언들, 그리고 용병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드들은 그중 부룩의 사진을 찾아 그 앞에 예를 올렸다.
몇몇 아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는 용병들이나 가디언들은 그들의 제식에 맞게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부룩은 영국인이었던 만큼 간단히 허리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예를 다 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에 하거스는 너스레를 떨며 저번 이드들이 가봤었던 본부 뒤쪽의 작은 공원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일행들 앞으로 걸어가는 하거스의 어깨에는 튼튼해 보이는 목발이 떡 하니 걸려 있었다.
아무리 포션과 신성력을 써서 완치시켰다지만 몇 일간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다며 의사가 억지로 떠넘긴 목발이라고 했다.
억지로 받아든 만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은 하거스였다.
그러나 그것은 디처 팀의 숨은 잔소리꾼인 오엘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팀 내의 유일한 여성이었던 만큼 얼음 공주라 불리었어도 챙길 건 다 챙기는 오엘이 어느새 하거스에게 붙어 강압적인 표정으로 목발을 사용하게 한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전혀 바뀌는 건 없었다. 단지 목발이 어깨 위에서 팔 아래로 이동한 것일 뿐.
하거스는 여전히 두 다리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가디언 공원은 저번에 왔을 때보다 한산했다.
많은 동료들의 희생이 있었던 만큼 이곳에 나와서 느긋이 햇살을 즐길 사람은 없는 때문이었다.
“흠! 저기…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하거스 씨나 다른 용병 분들은 용병일 그만두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니면…. 제로와 연관된 일만이라도.”
따끈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하던 도중 나온 이드의 말이었다.
하거스 등은 생각지도 못한 이드의 말에, 대화에서 빠져 한쪽에 누워 있던 비토와 쿠르거까지 일어나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승산이 보이지 않는 전투를 굳이 계속할 필요는 없을 거란 말이죠.”
“승산이…. 없다?”
하거스는 이드의 말에 한 부분을 되뇌이며 슬쩍 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직접 제로와 전투도 해보고 가디언으로서 어느 정도 활동을 한 이드가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한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될만한 일은 오엘이 합류해서 런던을 떠난 뒤에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오엘도 알 것이란 생각에서 그녀의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
하거스의 그런 행동을 잘 알고 있는 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사숙 말이 맞아요. 제가 생각해도…. 승패가 결정된 전투예요. 제로의 뜻대로 나라란 이름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일 것예요.”
“너도… 그런 생각이란 말이지. 하지만 제로 때문에 생긴 사상자들이 많아. 이런 상황에서 그냥 손을 땐다는 것은….”
오엘은 하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아온 하거스란 인물은 유난히 동지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같이 생활하고 수련했던 가디언들의 죽음에 쉽게 손을 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도 따라 죽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하거스는 오엘의 단호한 말에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저 오엘이 저렇게 나서서 말할 정도라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오엘, 제이나노, 이드, 라미아. 이 네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으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제로가 절대로 승리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 하거스를 대신해 이드들에게 그 물음을 던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빈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가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우리의 절대적인 패배를 자신하는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오엘양.”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죠.”
오엘이 아닌 제이나노가 빈의 질문에 답을 달았다.
이드는 그런 그를 보며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전음을 뛰었다.
“-카르네르엘이 드래곤이란 내용은 빼고 말해.-“
제이나노는 전음의 내용에 씨익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드와 함께 다니며 줄긴 했지만 한때 이드와 라미아를 지치도록 만든 그의 수다 실력을 생각한다면 그런 정도야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희들이 런던을 떠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저희는……..”
그렇게 시작된 제이나노의 이야기는 간단히 일행들의 여행 경로를 짚어 나가며 카르네르엘을 만난 이야기까지 순식간에 흘러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들은 그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디처의 팀원들과 빈은 드래곤에 대항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가녀린 소녀이며, 또 드래곤을 도망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연속적으로 놀라야 했다.
그들 스스로 드래곤의 힘이 어느 정도는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런 충격은 더했다.
그런 엄청난 드래곤이란 존재를 순식간에 꼬리를 말게 만든 상대가 제로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니.
확실히 이드와 오엘 등이 저렇게 단호하게 승패를 확신하고 몸이나 다치지 않게 제로와 관계된 일에서 손을 때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아마 상황을 바뀐다면 자신들이라도 이드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이 바뀐다면의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순 없네.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지금 상태가 좋다고 저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저들 때문에 사상자가 생겨나는 건 사실이니까. 더구나 사상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도 고작 이런 종이쪼가리 한 장만 달랑 보내는 놈들을 두고는 절대 그냥은 물러나지 않아.”
빈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새하얀 종이를 일행들 중앙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빈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 종이 위에 적힌 까만 글씨들을 향했다.
“제로가 보냈다구요?”
“그래. 젠장. 오늘 아침에 영국 국회와 우리 가디언 본부 양측에 동시에 전달된 내용이야.
내용은 간단해. 이번에 자신들 실수로 사람이 많이 죽어서 미안하다고.
민간인이 휘말린 일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모든 나라들을 밀어 버린 후 각각의 가족들에게 어떻게든 보상하겠다는 내용이지.
그리고 선심 쓰듯 마지막에 몇 자 써넣기를 이번에 영국에 입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생각해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해체된 후에야 영국에서 자기네들이 활동하겠다고 적혀 있더군. 정말 기가 막힌 내용이지.”
“…. 맞아요. 빈씨가 말한 내용 그대로네요.”
빈이 꺼내놓은 종이를 읽어 내려가던 피렌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좌우간 이번 일로 우리는 물론 세계 각국은 한층 더 긴장감을 가질 수 있게 됐네.
솔직히 그들의 행동에 조금 방심한 면도 없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젠 달라.
이 공문을 받고서 세계 각지의 가디언들과 의견을 나눈 결과 이젠 제로에 관한 일은 국제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네.
이젠 자국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제로 측에서 예고장을 보내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각국의 가디언들이 모이는 식이 될 것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이 중국에서 가져갔던 강시들을 들고 나온다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네. 여기 오기 전 있었던 회의의 결과지.”
빈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래, 자네들 말은 아네. 자네들 말대로 제로 측에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실력자가 있다면…. 우리에게 큰 가망은 없겠지.
하지만 전혀 없는 것 또한 아니니까 포기할 수 없지.”
가망이 없지 않다는 그의 말에 주위 몇몇은 의아한 듯 눈을 빛내며 빈을 바라보았고,
경험이 많은 하거스와 이드나 라미아 같은 특이한 경우에 놓여 있는 세 사람은 대충 짐작이 가는 빈의 말에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마법사 말을 잘한다더니….. 확실히 빈씨도 말발이 세긴 세. 그렇지?’
‘호호호… 그러네요.’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크건 작건 간에 실수라는 걸 하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간인 이상엔 어떠한 허점은 생기는 법.
나는 우리들이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그 허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제이나노가 빈이 잘라먹어 버린 것으로 보이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렇지만 희생이 많을 거라는 것 또한 사실이겠죠.”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되겠지.”
담담한 빈의 대답에 분위기가 다시 다운되려고 하자 하거스가 다시 나서서 분위기를 뛰우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목발을 들어 본부 건물의 후문을 가리켜 보였다.
“자자… 괜히 어두 침침한 아저씨 분위기 그만 풍기고. 저기 밝고 상큼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과연 그곳엔 꽤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방금 전까지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가디언들과 이번 일로 인해 본부에 온 사망자의 유가족들일 것이다. 그리고 저 후문이 시끄럽다는 것은 정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 본부 건물 뒤에 공원이 있는 만큼 1층 중앙의 커다란 홀을 중심으로 그 정면에 정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것과 마주 보는 곳에 후문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하거스가 일행들의 앞에 섰다. 목발 역시 처음과 같이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지만, 이번엔 오엘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일행들을 향한 빈의 당부가 있었다.
“모두 쉽게 말을 퍼트릴 분들이 아니란 건 알지만…. 아까 제이나노 사제께서 말씀하셨던 그 드래곤과 소녀에 관한 일은….”
“아아…. 알아. 비밀로 해달라는 거 아닌가. 우리들이야 어차피 같이 싸울 놈들 기죽일 이야기 같은 걸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저 네 명은 말할 것도 없겠지. 여기까지 오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야.”
빈은 하거스의 말에 수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가디언들 상부 측에서 조용히 의논되어질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소식으로 머리 꽤나 빠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행들이 후문 앞에 도착했을 때도 후문은 여전히 붐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갈 생각을 앉고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 뒤에 서 있는 일행들에게 안의 상황이 보일 턱이 없다. 그렇다고 들어가고 싶어도 앞의 사람들이 쉽게 비켜줄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이에 잠시 잔머리를 굴리던 하거스가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빈을 불렀다. 하거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그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얹더니 그를 눈앞에 있는 가디언 대원들 사이로 들이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리치면서 말이다.
“이봐. 비켜, 비켜! 길을 막고 있어서 에플렉 대장님이 못 들어가시고 있잖아!!!”
“어엇! 죄,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순식간이었다. 하거스의 말을 들은 가디언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길을 열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에플렉이라면 그들의 직속 상관임과 동시에 부 본부장이란 직위를 함께 가지고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함부로 에플렉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은 단 두 명뿐이란 이야기다.
갑작스레 가디언들이 길을 열자 그에 덩달아 본부에 들렀던 사람들도 얼결에 따라서 길을 열어 주었고, 덕분에 그 단단하던 인파의 벽은 모세의 기적에서처럼 바다가 갈라지듯 깨끗하게 갈라져 빈을 비롯한 일행들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길을 맘 편히 당당히 지나간 것은 하거스와 쿠르거, 제이나노의 얼굴 가죽 두꺼운 사람들뿐 나머지 사람들은 최대한 양쪽으로 비켜선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무난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고 나서야 빈을 비롯한 이드들은 뒤쪽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서 이렇게 몰려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중앙홀을 점령한 채 두 명의 남자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고 있고, 그 주위를 세 명의 남자가 큼직한 조명을 들어 비추고 있는 곳. 그곳에는 티나지 않게 꾸민 깔끔한 옷차림에 연신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는 다섯 명의 남녀와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불퉁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가 꽤나 개성 있는 미남미녀들로 별생각 없는 사람이라도 현재 상황을 본다면 그들이 연예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중에 조금이라도 오락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옷~~ 인피니티 아냐?”
하거스처럼 아는 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드는 그가 저들을 아는 듯한 말을 하자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관심을 끈 후 저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하거스는 당연하다는 듯 거만한 웃음으로 조금 뜸을 들였는데, 그 사이 먼저 입을 열어 버리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연예인이란 것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비토였던 것이다.
“인피니티. 저기 있는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혼성 오인조 그룹의 이름이다. 여기저기 많은 프로그램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어서 요즘 꽤나 인기가 있다고 하더군. 대장과 같은 병실이라 노래하는 것도 좀 들었는데… 그럭저럭 들을 만하더군.”
평소 말없던 비토의 설명에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뚝뚝한 비토가 기억해서 설명해 줄 정도라면, 확실히 요즘 인기 좋고 노래도 잘 부르는 괜찮은 그룹인 모양이다.
그때 비토에게 설명의 기회를 뺏겨버린 하거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건 그렇고…. 재들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게다가… 저 인상파는 분명 콘달 부 본부장인 걸로 아는데… 어째 평소보다 더 인상이 좋지 못한걸. 이드. 자네 전음이란 거 사용할 줄 알지? 저 부 본부장 좀 이쪽으로 불러봐.”
이드는 하거스의 말과 함께 다가오는 그의 목발을 탁 쳐내며 빈을 돌아보았다. 자신도 저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저렇게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데 함부로 불러내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음, 한번 불러보게. 저 분 표정을 보아하니…. 저기 있는 게 절대로 편해 보이지 않는 인상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기다렸다는 듯이 콘달 부 본부장의 고개가 일행들 쪽으로, 정확히는 빈 쪽으로 돌려졌다. 상대가 빈인 것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일행들에게 빠르게 다가왔는데, 그런 그의 표정은 마치 질척한 진흙탕에서 겨우 벗어난 듯한 시원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회의장을 나서더니…. 이 사람들에게 간 거였나?”
“그렇지요. 덕분에 꽤 중요한 정보도 하나 얻었고….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방송국 카메라에 가수들이라니.”
외모 면에서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만, 콘달이 빈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다. 콘달은 빈의 말에도 비위 상한다는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젠장… 원래 이런 건 자네 일인데 말이야. 내가 듣기론 저 약해빠져 보이는 꼬맹이들이 이번 제로와의 전투로 다친 사람들을 간호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더군. 내가 듣.기.에.는. 말이야.”
상당히 감정이 실린 콘달의 말에 빈은 이해한다는 뜻으로 한숨이라도 같이 내쉬어 줘야 할까 하고 생각했다. 확실히 자신도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자원봉사식의 간호라면, 저런 카메라는 있을 필요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건 쇼다. 그것도 목숨을 내걸고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가디언들과 용병들까지 끌어들인.
콘달 부 본부장도 아마 그것 때문인지 이리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촬영 허가가 떨어진 겁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메스컴에서 본부에 들어온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본부장님은요?”
그 말에 콘달은 다시 한 번 등 뒤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은근한 살기까지 내비쳐 보였다.
“더러운 게 권력이지. 저 노래 부르는 광대 놈들 중에 상원의원의 자식이 있는 모양이야.”
그 한마디로 모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그중 하거스는 콘달과 그리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만들어진 미소를 짓고 있는 인피니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메스컴이 전혀 들어온 적이 없는 가디언 본부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확실히 눈길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근데… 본부장님은 어째서 저런 짓을 허락하신 겁니까? 평소 행동으로 보시면 오히려 저런 장비들을 때려 부시겠다고 직접 내려와도 모자랄 판에요. 사실 저희들과 정부의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지 않습니까. 영국 정부 측이라면 몰라도 저희는 저들과 사이가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사이를 벌릴 필요는 없다는 게 본부장님 대답이시다. 또….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하시더군. 아무튼 일은 전부 우리한테 떠넘기시고 일찍 귀댁으로 돌아가 버리셨네.”
“젠장… 일을 벌이셨으면 책임을 지실 것이지. 왜 뒤처리는 항상 저희가 해야 하는 건지.”
빈이 한참 푸념인지 한탄인지를 쏟아내고 있을 때였다. 카메라맨과 같이 서 있던 몇 명의 스태프들 중 PD로 보이는 한 사람이 콘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PD가 부르는 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자네가 돌아왔으니 이번 일은 자네가 맡게. 원래 이런 일은 자네 몫이었으니까 말이야. 주위에 있는 가디언들은 내가 정리하도록 하지.”
콘달은 빈이 뭐라고 더 말할 사이도 주지 않고서 주위에 있는 가디언들을 내몰았다. 그 위세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전혀 그에게 쫓길 입장이 아닌 주위의 민간인들까지 싸그리 몰아내 버리고 자신도 곧 그 뒤를 따라 1층의 중앙홀을 빠져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고 도망가버린 콘달의 행동에 빈은 한순간 당황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비록 이런 일을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도망이라니.
그때 저쪽에서 갑자기 나가버린 콘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쓴 입맛을 다시며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됐군. 자네들은 어쩔 텐가?”
“난 이만 올라가겠어. 꽤 인기 있는 놈들인 줄 알았더니…. 전투 후의 환자를 방송의 이용물로 삼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하거스가 그렇게 몸을 돌려 윗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나머지 디처의 팀원들도 그를 따라 가 버렸다.
다만 이드의 일행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 오엘은 제외한 세 명은 꽤나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한창 바쁜 중앙홀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희들이 구경해도 되나요? 아직 연예인이란 걸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서요.”
라미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모두 싫어하는 일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려니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조심스런 말과는 달리 빈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콘달을 찾고 있는 중앙홀로 걸음을 옮겼다.
“중요한 인물들도 아니고. 대충 저들이 원하는 것 몇 가지만 해주면 되니까 구경해도 되네. 하지만 라미아양. 지금은 말이야. 연예인이란 직업보다 가디언이란 것이 더 큰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네…. 한마디로 저들에겐 우리들이 신기하고 동경의 대상이란 걸 말이야.”
PD는 찾고 있던 콘달은 보이지 않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그 중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방금 전 콘달과 이야기하던 사람들 같았다.
그를 확인한 PD는 나머지 일행들에겐 눈도 돌리지 않고 급히 다가왔다.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PD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잠깐의 시간이 아까운 그였다.
어느 방송국의 어느 PD가 이곳 가디언 본부에 들어와 봤겠는가. 이번 기회에 찍을 수 있을 만큼 다 찍어가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아까 콘달 부 본부장님과 이야기하시던….”
“아, 콘달 부 본부장님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셔서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 대신에 제가 여러분들을 돕도록 하지요. 빈 에플렉입니다. 이곳에서 콘달 부 본부장님과 같은 직책을 맡고 있지요.”
“그러시군요. 잘 됐군요. 마침 콘달 부 본부장님을 찾고 있었는데… 저는 오늘 촬영을 맡은 프라이드 글러드 PD입니다.”
PD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으로 빈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로서도 인상 더러운 콩달인지 콘달인지 하는 부 본부장보단 이쪽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었다.
PD는 곧 인피니티까지 불러 부 본부장과 인사를 시켰다.
그제야 조금 여유를 가진 그의 시야에 빈의 뒤쪽에 서 있는 네 명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의 눈에 들어온 라미아와 이드는 여쁘다고 하는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보지 못한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 쌍으로 보이는 그 모습에 은발과 흑발의 조화.
‘와, 완벽한 스타 감이다. 다른 건 더 볼 필요 없이 저 외모만으로도 대박감이야.’
PD의 눈이 다시없는 최상의 먹이를 발견한 듯 반짝였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눈빛은 태풍 앞의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한 가지 생각을 못 한 것이 있었으니 저들이 바로 가디언이란 것이었다.
지금은 연예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 가디언.
그는 스스로도 포기가 쉽지 않은 저 둘의 외모에서 겨우 시선을 옮겨 인피니티들과 빈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인사를 모두 나눈 상태였다.
요즘의 인기 행진으로 자신감이 높아진 그룹이었다.
PD는 저들에게 저 두 사람을 보여주면 이들의 높던 자신감도 한순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쓸모없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에플렉 부 본부장님, 오늘 저희들이 촬영하고 싶은 곳들을….”
“이미 연락 받았습니다. 오늘 촬영이 환자들의 간호를 위한 것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꼭 병실만 촬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저기 도울 일이 있는 곳에 들러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 이번 촬영의 계획입니다.”
빈은 그의 말에서 그들이 본부 내를 휘젓고 다닐 생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흐음… 하지만 병실 이외엔 여러분들이 도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만. 병실일 이외에는 모두 서류 정리나 무기류 손질인데…. 그런 일은 여러분들이 하겠다고 해도 저희들이 허락해드릴 수 없는 일이고. 그 외엔 특별히 없습니다. 있다면 쓰레기 버리는 것 정도? 저희 쪽에서 마법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여러분들이 하실 만한 일이 없군요.”
PD는 빈의 말에 잘못하면 다른 곳은 찍을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이런 류의 사람들을 상대하며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방송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럼 대략 본부 시설 몇 가지를 견학하는 정도의 가벼운 배려는 해 주실 수 있겠지요.”
이런 일에 꽤나 능숙한 사람이군. 하고 빈은 생각했다.
저렇게 말하며 빈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가벼운 이란 말로 포장한 상태에서 거절해 버리면 가디언 본부는 가벼운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삭막한 곳이다. 라는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또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윗선과 뭔 일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하시죠. 그럼 우선 병실부터 들러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모두 이동하게 준비해.”
그의 말에 스텝들이 바쁘게 자신들의 짐을 집어들었다.
인피니티의 멤버들 역시 조금은 긴장되고 흥분된 모습으로 자신들의 옷을 매만졌다.
그들은 아직 직접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가디언들을 만난다는 데 은근히 흥분된 상태였다. 그들에게도 가디언이란 것은 신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만날 사람들이 전부 가디언들이란 말이지… 호호홋. 역시 아빠한테 졸라보길 잘했는걸.’
카리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그녀는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로 인피니티의 메인보컬을 맡고 있었다. 또 이번에 그들 그룹이 가디언 본부에 올 수 있게 된 것도 그녀가 상원의원인 그녀의 아버지께 조른 덕분이었다.
콘달이란 살벌한 인상의 사람이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도 금방 부드러운 분위기의 마법사처럼 보이는 아저씨로 바뀌어 상당히 만족스러운 그녀였다.
그때 PD의 이동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가디언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대부분 빈로 물러나 있어 신경 쓰지 않았던 빈의 일행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빈이 물러나면서 그녀를 포함한 그룹 멤버들의 눈에 들어왔다.
실제 보기는 처음인 사제복을 입은 소년 사제와 영화에 나오는 어설픈 여검사가 아닌 정말 분위기부터 진짜라는 생각이 드는 아름다운 여검사.
그리고 그런 두 사람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두 인물.
순간이지만 인피니티는 이곳 가디언 본부에 자신들 이외에 또 다른 연예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빈과 앞서 말한 사제와 여검사와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카리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그들의 모습을 살피다 자신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지 은발과 흑발이 아름다운 한 쌍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사람들도 가디언… 이겠지?”
“여기에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냥 봐도 보통 사람들론 안 보여. 정말 질투 날 정도로 예뻐.”
그녀의 말에 인피니티의 나머지 여성 멤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데, 그 모습이 꼭 아름다운 조형물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저런 체형이라면 마법사나 ESP 능력자 같은데…. 저 사람 허리에 저 검은 뭐지?”
두 여성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뻗침 머리의 남자 멤버가 유심히 봤는지 이드의 허리에서 곤히 자고 있는 일라이져를 가리켜 보였다. 정신없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관찰력이 좋은 것 같았다.
카리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일라이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고 계속 흔들려 그 문양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반짝반짝거리는 칼집에 역시 손때도 묻지 않은 손집이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흥, 척 보면 모르겠어요? 번쩍번쩍거리는 게 폼 잡으려고 저렇게 매고 있는 거겠지. 자고로 진짜 실력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거나 싸구려처럼 보이는 철검을 허리에 차고, 평범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여유 있어 보이는 거라구요. 처음에 나왔던 그 무서운 부 본부장이란 아저씨하고 저기 저 에플… 렉이라는 부 본부장 아저씨처럼…..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언니라고 불린 여인은 조금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리나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영웅상. 그것은 만화에 자주 나오는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런 영웅상이었다.
사람들 각각의 이상향이야 누가 뭐라고 간섭할 수 있겠는가만은.
‘아직…. 어려.’
그룹 원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돌아가는 대로 그녀에게 좀 튀는 영화라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의도로 웃는 인물이 있었다.
꽤나 먼 거리를 떨어져 있으면서도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우연히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오엘이었다.
그녀는 카리나의 판단이 처음 이드를 만났을 때의 디처 팀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웃었다.
그리고 저 엄청난 검인 일라이져를 단순한 장식용 검으로 격하시켜버리는 그녀의 안목에 그녀의 웃음은 황당함으로 변했다.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바라마지 않을 저 일라이져를 말이다.
가디언 본부의 병실은 사 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병실은 일인실에서 사인실까지 다양하며 그 내부 장식과 실내 시설은 역시 호텔은 개조한 거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깨끗하고 고급이다.
이삼 인용 객실에 들어가더라도 여느 병원의 특실보다 훨씬 부드럽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병실이라고 하기에 아까울 정도의 병실들이다.
더구나 이곳 병실의 환자 대부분이 감기나 피로 등의 가벼운 병과 내상이나 진정 등으로 입원해 있는 것이기에 따로 피가 묻어 나온다거나, 소독약 냄새가 진동한다는 등의 일도 없다.
모두 포션과 신성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가디언 본부 내의 병동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병동에서 인피니티가 할 일이란 게 뭐 있겠는가. 간단했다. 그저 잔심부름과 호텔의 청소부가 하는 일정도일 뿐이다.
병동에서 처음 의사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PD는 물론 인피니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일반 병원에서의 간호사 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모습에 라미아는 김빠졌다는 표정으로 이드와 오엘을 돌아보았다.
“칫, 뭐 재미있을 줄 알고 따라왔더니…. 별거 없네요. 우리 하거스씨들이 있는 병실이나 찾아가요.”
라미아는 말과 함께 이드를 잡아끌었다. 그 뒤를 따라 오엘이 따라갔고 마지막으로 제이나노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감상하듯 바라보다 킥킥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정말 사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짓궂은 사람이다.
하거스의 병실엔 아까 돌아간다고 갔던 디처의 팀원들 모두가 있었다. 비록 이인실 병실이긴 하지만 워낙 넓은 덕분에 디처팀원에 일행들까지 들어와도 그다지 비좁아 보이지 않았다.
하거스들은 일행이 들어오자 대화를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대화의 주제는 오엘이었다. 그녀의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와 함께 도대체 무슨 수련을 했느냐는 질문까지. 그들도 강해지길 원하는 용병들인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카리나와 삐죽머리의 남자 멤버, 그리고 카메라 한 대와 조명맨이 서 있었다. 아마 다른 병실을 청소하고 이곳에 온 듯했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에 잠깐 하거스의 병실을 돌아보았다. 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아마 거의가 하거스의 작품일 것이다.
“험, 청소하러 온 모양인데… 어떻게 우리가 나가 있어야 합니까?”
하거스가 덤덤히 물었다.
“아니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근데….. 이 방은 유난히…. 어질러 진 게 많네요.”
방안을 돌아본 카리나가 솔직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삐죽머리 남자 멤버 체토가 슬쩍 눈총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크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하하하… 좀 그렇죠? 내 성격이 워낙 털털하다 보니 말이요. 아, 참. 이거.”
카리나는 자신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새하얀 백지와 볼펜을 얼결에 받아 들고서 물었다.
“이… 이건 왜.”
“싸인 해 달라고 주는 거지. 인피니티 팬이거든.”
“…. 저희들을 아세요?”
카리나는 생각 못한 하거스의 말에 의아한 듯 물었다. 사실 이곳까지 오며 들른 몇몇 병동의 환자 같지 않은 환자들 중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들어서는데도 덤덤하기만 한 하거스 등의 모습에 이들도 자신들을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저기 자주 나오니까. 노래도 좋더군요.”
그 말에 그녀는 기분 좋은 듯 방긋 웃으며 체토의 싸인까지 해서 하거스에게 종이를 건넸다. 오엘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슬쩍 돌리고 픽하고 웃었다. 나이는 달랐지만 하거스는 아까 들었던 카리나의 영웅상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카리나와 하거스 사이에 자연스레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자연히 청소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재촉하는 사람이 없는 청소이니 서두를 건 없었다. 오히려 카메라맨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평소 그녀는 가디언들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여러 가지를 물어왔고, 하거스는 벙글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그 모습에 비토를 비롯한 디처의 팀원들과 이드들은 설래설래 고개를 내저었다. 다친 환자를 방송에 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나 어쩐다나 하고 떠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저렇게 친해서는 수다를 떨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럼 아저씨도 엄청 강한 거네요. 저 큰 칼에 검기를 뿜고 마법도 가를 수 있는 거면…. 한번 보여 주실 수 있어요?”
카메라맨 등이 맘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하지만 정작 하거스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하… 엄청 강하다라…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보통 검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가벼운 마법은 막아 낼 수 있거든. 하지만 정말 네 말대로 ‘엄청 강한 사람’이란 건 그 정도가 아니지.”
순간 카리나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정말 강한 사람들은 말이야. 검강을 능숙히 사용하는 사람이나 의지의 검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겠지. 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은 이런 건물도 두 동강 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지.”
“헤어~ 정말이요?”
“나도 보진 못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지. 누구한테 물어보던 내 대답과 비슷할 걸? 그리고 너도 소설책을 읽어봤으면 알텐데?”
“하지만…. 그건 상상한 걸 써놓은 책이잖아요.”
그 말에 하거스를 비롯한 방안의 사람들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세상이 바로 그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웃음에 뚱한 표정이던 카리나도 곧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알았는지 곧 볼을 붉혔다. 그녀의 모습에 웃음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하거스는 웃음소리가 계속될수록 슬슬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중에 나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너도 생각해봐라. 누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내보이고 싶겠는가. 그렇지?”
슬금슬금 방을 치우던 체토는 그의 말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내심 카리나 덕분에 검기라는 걸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던 그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 안에 그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니? 분명 그가 말하길 자신이 여기 있는 세 용병들의 대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한 번 방 안의 인물들을 관찰해 보았다.
카리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거스의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은 또 하거스의 장난이구나 하는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거스의 입에 오른 당사자인 이드는 별로 편하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도 말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재밌게 됐네요.’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즉시 하거스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또 왜 저는 걸고 넘어지고 그래요? 사람 귀찮아지게.-“
“하하하…. 자화자찬이냐? 나는 아직 누가 어떻다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다니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 있나보지?”
이드는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가만히 있었어도 하거스가 그리 쉽게 불리는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하거스의 놀림만 받았다. 자신의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