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4화


“프랑스의 수도. 파리. 이번 제로가 예고장을 보낸 도시의 이름이다!”

“…….. 끄응… 이번엔 놈들이 크게 노리는 군요.”

다들 그의 말에 동감이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국가의 수도를 노리다니. 과연 프랑스에서 협조요청을 해 올만 하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한 시간 안으로 출발 준비하고 본부 앞으로 집합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드군, 자제와 일행들은 어쩔 텐가?”

“가겠습니다. 원래 저희들의 목적지가 프랑스였으니까요. 오히려 잘됐죠.”

그리고 할 일이 없어 너무 심심하기도 하구요. 이드는 뒷말을 삼켰다. 이미 오엘과 제이나노에게 넘겨버린 여행일정이지만,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드는 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방을 나서는 가디언들의 뒤를 따랐다. 그의 한쪽 팔은 여전히 라미아가 붙잡고 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갈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급하게 뛰쳐나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오엘과 제이나노였다.
이드는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간단히 말하지. 파리로 간다. 올라가서 한 시간 안에 짐싸!”

“…. 너무 간단한데요.”

오엘은 추가 설명을 부탁한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라미아는 싱긋 웃으며 이드를 대신해 빈에게서 들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역시나 두 사람도 빈에게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던 가디언들 못지 않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단연히 가야지요. 그런데 가디언들과 함께 간다면 그 쪽 명령을 들어야 하나요?”

“어느 정도는요. 분명 빈씨가 이드님께 말 할 때 부탁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그들의 부탁으로 같이 동행하는 이상엔 어느 정도는 그 쪽의 명령대로 움직여 줘야 할거예요.”

라미아의 설명에 두 사람은 크게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들의 출발 준비는 간단했다. 처음부터 이드와 라미아의 짐은 거의가 그녀의 아공간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다. 오엘과 제이나노역시 큰 물건은 그녀에게 맡겼기에 간단한 옷가지와 생활용품 몇 가지를 챙겨 작은 가방안에 간단히 넣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가방은 이드와 라미아가 들고 있는 가방보다 좀 더 크고 빵빵했다. 잠시도 라미아와 떨어져 있지 않는 이드와는 달리 두 사람은 필요 때마다 라미아에게 건네 달라기가 미안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것들을 챙겨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워낙 간단한 짐에 십 여분만에 출발 준비를 마친 일행들은 빈의 명령대로 본부 앞으로 나섰다. 그곳엔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듯 한 빈과 드윈, 그리고 페르테리온이 서 있었다.
그런 세 사람의 뒤로는 대형버스가 한대 서 있었다. 일행들을 나르기 위한 버스인 것 같았다.
프랑스로 파견되어질 인원은 빈과 이드 일행을 합해서 총 스물 세 명. 적긴 하지만 모두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을 이 십분 남겨둔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빈 앞으로 모여들었다. 늦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목숨걸고 일을 하는 그들인 만큼 무슨 일을 한다하면 한 둘이 늦는 그런 헤이 한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번에 그토록 당했던 제로와 다시 한번 전투가 있다는 말에 모두들 긴장한 명도 있었다.
스물 세 명의 일행들을 태운 버스는 시원스레 도로를 달렸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얼마 전 이드들이 프랑스로 향하는 배를 타려다 가디언 본부로 향했던 항구였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 일행들은 배를 탈 수 있었다. 제이나노는 배에 오르며 한 시간 전에 출발했을 배가 정박하고 있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런 그의 의문은 곧 풀렸다. 빈이 스스로 자수를 한 것이었다. 그는 가디언이라는 공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바쁘게 파리로 가자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일행들은 그 날 밤 도버해협을 건넜다. 밤에 도착했지만, 일행들은 그곳에서 쉬지 않았다.
빈의 연락으로 마중 나와 있던 프랑스측에서 준비한 버스에 다시 올라야 했던 것이다.
일년 전 까지라면 파리로 통하는 고속철도를 이용해서 편하고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철도가 놓여있는 부근 땅에 많은 수의 어스 웜이 서식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철도가 깔리는 족족 어스 웜이 철도를 덥쳐 끊어버리는 때문이었다. 땅속에 있는 녀석이라 쉽게 잡을 수도 없어 가디언 측에서 포기해 버린 녀석이었다. 다행이 인명 피해는 없었는데, 제 딴엔 저희들이 사는 곳이 기차로 인해 시끄러워 저지른 일이었던 모양이다.
버스는 일행들의 배려해 중간 중간 휴게소에 들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운전수도 두 명이라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버스에 정말 이러다 무리가 가서 고장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일행들은 하루도 되지 않아 파리에 있는 프랑스 가디언 본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 영국의 본부 건물보다 작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의 덩치는 오히려 영국보다 컸다. 작아 보인 이유는 건물의 높이가 5층으로 낮아서 였다. 이 건물 역시 파리시내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만큼 프랑스에서 가디언들에게 비중을 크게 둔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디언 본부 앞에는 일행들을 마중 나온 듯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가 귀엽게 잘 어울리는 그녀는 분명히 붉은 눈의 외국인임에도 오밀조밀한 동양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어려 보이는 동안에 머리색과 대비되는 푸른색의 심플한 원피스, 액세서리처럼 허리에 걸려있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은 빛 허리띠는 자연스레 사람의 시선을 끌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당돌한 여대생의 분위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소개는 보통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곳 프랑스 가디언 중앙본부에서 부 본부장을 맞고 있는 세르네오 이띠앙 입니다. 본부장님을 대신해 영국에서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에플렉 부 본부장님 되시죠?”

빈은 불쑥 내미는 그녀의 손을 잠시 멍한 눈길로 바라보다 마주 잡았다. 그로서도 이렇게 어려 보이는 여성이 프랑스의 부 본부장을 맞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이름을 들어보았었고, 어리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어릴 지는 몰랐다. 많이 잡아도 스물 하나?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띠앙양께서 직접 이렇게 나와 손수 맞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저희들을 위해 걸음 하신 만큼 저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자,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시죠. 오랫동안 차를 타셔서 피곤하실 텐데…. 이미 방과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죠.”

조금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대외용 맨트가 그들 사이에 오고 갔다. 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그레센이든 이곳이든 나라간의 일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디언이라는 초국가적 단체도 국적이 다르니, 저렇게 쓸모 없는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세르네오를 따라간 일행들은 그녀가 정해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방은 사인 실이었다. 빈의 말에 따라 짐을 풀고 쉬고 싶은 사람은 그대로 쉬고 배가 고픈 사람들은 그녀가 말해준 식당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그의 말에 많은 가디언들이 침대에 몸을 묻어 버렸다. 버스에서 잠을 자긴 했지만, 그 좁은 곳에서의 불편한 잠이 피로를 풀게 해주지 못했던 때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빈을 따라 식당으로 내려간 것은 겨우 열 손가락을 펼 수 있을 정도뿐이었다.

이드는 지금 나오는 이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꽤나 여러 번 요리가 바뀌는 듯 하긴 한데 나오는 요리마다 한 두 입 먹으면 없어질 그런 양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 겪어봤기에 이것의 예의를 차린 것이란 걸 알긴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레센의 귀족들도 이렇게 먹진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사람들 보다 몇 배나 많이 차려둔 뒤 먹고 남기는 식이었는데….
이드는 라미아에게 슬쩍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꽤나 만족스런 표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이드의 불만을 알았는지 방긋 웃으며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순간 이드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 라미아의 접시에 반정도 남은 고기조각을 찍어와 이드의 입안으로 들고 들어가 버렸다.

“이…. 이드님!!”

이드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크게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았다. 양은 작지만 고기 맛을 잘 살린 부드러운 좋은 요리다.

“우물… 우물…. 왜? 우물…. 근데 이 고기 정말… 맛있다.”

천연덕스런 이드의 모습에 라미아는 화내는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세초롬이 이드를 노려만 보다 한 마디를 하고는 획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흥, 두고 봐요.”

삐졌다. 그런 라미아의 모습을 보며 이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버린 손을 원망했다. 저렇게 삐쳐버린 라미아를 달래려면 또 무슨 짓을 해야하는지.

‘다음에 나오는 요리는 저 녀석에 넘겨줄까?’

식탁의 제일 상석. 세르네오는 이드와 라미아의 사랑싸움과 같은 투닥 거리는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는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 스스로는 아직 저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봉인의 날 이전엔 수련으로, 봉인의 날 이후엔 가디언으로서 활동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세르네오는 이드와 라미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눈에 뛰는 외모와 소풍이라도 온 듯한 가벼운 분위기.

“에플렉님. 저기 두 사람도 가디언인가요? 꽤나 어려 보이는데…. 게다가 한 사람은 동양인인 것 같은데요.”

조금 전부터 한 쪽만을 바라보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빈은 당신 역시 어리긴 마찬가지야. 라는 말을 속으로 먼저 던진 후 입을 열었다.

“맞아요. 둘 다 열 여덟 살이죠. 실은 두 사람 다 영국에 소속된 가디언은 아니죠. 단지 저희 측에서 여러 번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인연이 돼서 여기까지 같이 동행을 하게 됐지요. 하지만 저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그 일행들도 실력이 뛰어나니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저기 보이죠? 보기 쉽지 않은 사제분이요, 한 교단의 대 사제 시라더군요.”

“흐음… 에플렉님이 이렇게 칭찬을 아끼시지 않는 것을 보니, 실력들이 대단한가 보군요.”

세르네르는 다시 나온 음식으로 건네며 라미아를 달래는 이드를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녀의 나이는 열 아홉으로 프랑스 가디언 내에서는 가장 어린 나이로 소위 천재였다. 무공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무능력과 분석 등에도 약간의 소질이 있는 것이 인정되어 정말 어린 나이에 부 본부장까지 되었다. 물론 처음엔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에선 그런 사람은 없다. 실력이 우선 시 되는 가디언들인 만큼 그녀가 확실히 일 처리를 해 나가자 자연스레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과 동갑은 물론 나이가 어린 사람도 없는 이 곳에 있자니 정신적으로 꽤나 힘들었다. 다른 곳엔 자신과 동갑이나 그보다 어린 가디언들도 있다는데 말이다. 물론 실제로 보진 못했다. 그런데 오늘 자신보다 어린 가디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협조요청에 응해서 오신 다른 분들은……?”

“아, 그분들은 쉬고 계세요. 독일과 네델란드, 그리스에서 다섯 분이 오셨죠. 중국과 미국에서도 온다고 연락이 왔으니… 아마 오늘내일 중엔 도착하실 겁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오히려 제가 부담스럽거든요.”

빈은 그녀의 말에 빙긋 웃어 보이며, 그녀의 말 대로라면 중국에서 만났었던 대원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캉! 캉! 캉!

날카롭지만 투명한 소리가 식당안을 울렸다.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소리가 난 곳으로 몰렸다. 주목하라는 뜻으로 물 컵을 때렸던 빈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스푼을 내려놓으며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식당 안의 사람들은 하고 있던 식사를 멈추었다. 일부러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만큼 지금부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신다니 다행이군. 그럼, 제로 측에서 예고한 공격 날짜는 언제지?”

“이틀 후 예요. 그래서 협조 요청을 한 모든 곳에 내일까지 도착해 주십사 적어 넣었구요.”

“혹시 그 예고장에…. 병력문제는 적혀 있지 않았나?”

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페스테리온이 물었다.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였다.

“예. 단순한 예고장일 뿐이었어요. 언제 어느 쪽에서 공격해 들어오겠다는.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수도 외곽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괜히 시민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뭐, 저희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그 쪽에서도 우리때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군.”

“무슨? 그놈들은 그저 멀리 떨어져서 싸우는 게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저렇게 얌체 짓을 하는 것 뿐이야!”

페스테리온의 말에 드윈이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다. 록슨의 일부터 시작해 얼마 전 있었던 참사까지. 드윈은 제로를 천하의 악당으로 낙인찍어 버린 듯했다. 아마 그들이 화산폭발을 막아 수백의 인명을 살리더라도 인심을 얻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페스테리온은 그런 드윈의 말은 상관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이틀 후라… 그때까지는 컨디션을 최상으로 해둬야 겠군요. 그런데 그들과 전투를 벌일 만한 곳은 찾았나?”

참 딱딱하고 사교성 없는 사람이다. 세르네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 파리 외곽지역에 있는 평원으로 정했어요. 주위 몇 킬로 내에는 인근한 인가도 없고 몸을 숨길 만한 엄폐물도 없죠. 어떻게 보면 천연 경기장과도 같은 곳이에요.”

“엄폐물이 없다라. 허기사 대규모 인원이 전투를 벌이는 데는 그게 정석이지. 엄폐물이 많은 숲에서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그런 난전은 없을 테니까.”

“네, 그럼 에플렉님은 식사가 끝나시면 본부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가디언 분들도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죠.”

“부탁하지. 그럼 빨리빨리 식사들을 끝내고 편히 쉬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드는 빈의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 역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전 이야기 도중 요리가 바뀌어 요리는 따끈따끈했다.

이드일행은 넷 명이 한방을 사용하게 됐다. 파리의 전투로 용병과 가디언들이 대거 몰려들어 개인실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이나노는 방이 배정되자마자 사제복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모습도 보기 어렵고, 피곤하다고 사제복을 벗어 아무곳에나 던지는 사제. 저런 인간을 대사제로 정할 때, 정말 리포제투스께서는 제정신이었을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이드는 고개를 내 젖고는 반대편에 앉은 라미아와 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전투는 록슨에서의 전투보다 더 치열하고 힘들 거야.”

“당연하죠. 수도를 지키는 일인데. 또 제로도 수도를 직접 공격하는 만큼 단단히 준비를 할 테구요. 아마…. 저번에 봤던 그 강시들도 들고 나올걸요.”

“맞아. 그래서 말인데…. 오엘 넌 어떻할 거지?”

그 말에 가만히 앉아 이드와 라미아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드가 하는 말이 뭔지 모를 정도로 둔한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위험하니까 빠지라는 말일 거다. 하지만 그러긴 싫었다. 물론 사숙이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건 알지만, 자신도 검을 사용하는 한 사람의 검수였다. 위험하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오만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보다 어린 사숙을 모시며 자신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됐다. 힘이 들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으면 뒤로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투에서 직접 검을 써보고 난 후에 결정할 일이었다.

“당연히 갈 거예요. 제 한 사람의 검사로서 싸워보고 싶어요. 걱정 마세요. 제 실력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마냥 부드럽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 자신에게 사질이나 제자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드의 옆에는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미아가 앉아 있었다. 이드의 기분이 그녀에게 흘러들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큰 감정은 자동적으로 그녀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 대신 보호구를 구해 와. 그럼 거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을 걸어 줄 테니까. 그걸 차고 나가. 그리고 또 하나. 넌 라미아 곁에서 멀리까지 떨어지지 마. 이 두 가지를 지키면 전투에 참가하도록 해주지.”

“네.”

이드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침대에 편히 누웠다. 이미 몸 상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빌어먹을 팔찌 때문에 막혔던 기혈이 거의 풀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 전력을 발휘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 때문도 있었지만, 제로라는 적이 별로 내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격해 오면 싸우긴 하겠지만, 지금 생각으로서는 그들이 끌고 올 강시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르륵.

누군가 침대 위로 다가오는 기척과 함께 가슴 위로 올려두었던 팔 하나가 타의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보나마나 라미아뿐이다. 그렇게 상대를 결정지을 무렵 펼쳐진 팔 위로 묵직한 느낌과 함께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느낌이 느껴졌다.

“….. 라미아. 저기 오엘이 보잖아. 남의 시선도 생각해야지.”

이드는 이미 잠들어 버린 제이나노를 무시하고 오엘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러나 오엘은 자신이 편이 아니었다. 이드의 말과 함께 쓰윽 돌아누워 버리는 것이다.

“이젠 안 보여요. 사숙. 게다가 저도 피곤해서 좀 잘 거거든요.”

“….. 라는데요. 헤헷…. 그냥 이쪽 팔은 저한테 넘기세요.”

“쩝, 마음대로 해라.”

이드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이미 제이나노와 오엘은 라미아와 자신의 관계를 연인이상으로 보고 있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제이나노에겐 같이 자던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옛날을 살았던 이드인 만큼 이렇게 직접적인 애정 표현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미 적응해 버린 뒤였다.
잠시 후 방 안에 가벼운 숨소리만이 감돌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얀 색으로 만들어진 커튼은 환한 햇살을 힘겹게 막아내며 방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렇게 네 사람과 영국에서 파견된 일부 가디언들은 피곤을 덜기 위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저러다 밤엔 어떻게 자려고 저러는지 걱정 될 뿐이다.

스르륵…. 사락….

낮잠을 자면서도 한잠에 빠져 있던 이드는 낯선 옷자락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뜨진 않았지만 상대가 살며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인기척을 완전히 지운 것도 아닌 것이 적은 아니었다. 라미아는 여전히 한밤 중인 모양이다. 자신의 옆으로 바짝 붙어 있는 라미아의 체온과 가슴 위로 올라가 있는 그녀의 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있는데 계속 재울 수는 없지… 라미아…. 라미아… 라미아!!!’

“우웅… 이드님….”

몇 번의 부름에도 라미아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더욱 이드에게 파묻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름을 부른 걸 보면 어느 정도 정신은 든 모양이다. 이드는 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쯤 그 낯선 기척의 주인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어서 침대가 약간 흔들리는 것이 침대에 앉은 모양이었다.

‘이드님, 일어나셔야 하는 거 아니예요?’

‘아니… 잠깐만. 악의를 갖고 있는 것… 이익… 뭐야!’

이드는 갑작스레 볼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의식하지 않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 움직임으로 상대도 이드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볼 위에서 움직이던 손가락으로 이드의 볼을 폭 찔러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리는 것은 이드의 모국어였다.

“자,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야지. 조카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한 자신을 조카님이라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다. 이드는 반짝 눈을 떴다. 과연 그의 눈을 뜬 그에게 보인 것은 단아한 분위기에 편안한 인상을 가진 다정선자 문옥련이었다.

“이모님!”

이드는 반색을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라미아 역시 그런 이드를 따라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녀 역시 문옥련을 알아보았다.
문옥련은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의 조카와 그 뒤의 연인으로 보이는 여성을 바라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카지만, 중국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종종 생각나는 얼굴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았던 만큼 새로 생긴 조카에게 자신의 아이 같은 모성애가 은근히 발휘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이번 프랑스에서의 협조 요청에 파견되어 와 이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잔다고 말에 살그머니 들어와 바라본 이드의 얼굴은 정말이지 자신의 아이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특히 둘이 엉켜서 자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지?”

“하하… 꽤 재미있는 일들이 많긴 했죠. 근데, 이번에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다던 가디언이 이모님이셨는 줄 몰랐는 걸요. 저번에 봤던 분들도 같이 오신 건가요?”

“그래. 나이가 어려서 절영금이 빠지긴 했지만, 나머지 인원은 모두 저번 그대로란다. 하지만 네가 여기 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것도 네 연인까지 같이 말이야. 아까 꼭 붙어 자던 모습이 보기 좋던걸요.”

“헤헤헤…..”

라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말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 이드가 이모님이라 부르는 그녀에게 듣자 부끄러웠고,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무슨 낮잠을 그렇게 깊이 자는 거니? 너희 일행이란 두 사람은 벌써 일어나 저녁식사도 마쳤는데. 특히 좀 딱딱해 보이는 숙녀분은 검술을 연습하고 있던걸?”

이드는 그녀의 말에 양쪽 침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두 다 비어 있었다. 너무 곤히 자는 모습에 깨우지 않고 그냥 방을 나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문옥련은 여전히 이드에게 손을 잡힌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 그만 나가봐야지. 두 사람 다 저녁도 먹어야 할 테고 우리 대원들도 만나봐야겠지?”

이드는 그녀의 말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라미아와 함께 일어났다. 문옥련의 안내로 널찍한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엔 중국에서 파견 나온 가디언뿐 아니라 영국에서 같이 건너왔던 대부분의 가디언과 처음 보는 얼굴 몇 명이 끼어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중 안면이 있는 중국의 가디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또 세르네오의 소개로 처음 보는 얼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중 독일에서 왔다는 두 명의 기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한 명은 딱딱하기가 얼음 같아 냉기가지 피어 오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하거스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능글맞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저 둘이 어떻게 한 팀이 되어 이런 일에 파견되어 왔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짧은 대화를 나눈 이드와 라미아는 문옥련이 해주는 아주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난 덕분에 그녀가 손수 나서서 해결해 준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요리를 하나하나 비워 나가며 중국에서 헤어진 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빈보다 가깝게 느껴진 그녀였기에 빈에게도 해주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도 해주었다. 가령 엘프를 만났던 이야기와 봉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물론 카르네르엘에 관한 것은 그녀에게도 비밀이었다.
시간이 점차 흘러 밤이 깊어지자 문옥련을 포함한 모두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밤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휴식의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낮에 너무 쉬어버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이드와 라미아도 그들을 따라 배정된 방을 들어갔다. 하지만 낮에 너무 자버린 두 사람이 쉽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이드는 잠시 라미아와 놀아 주다 정말 오랜만의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를 지켜보다 어느새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원래 검이었던 그녀인 만큼 잠이라면 드래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 수 있는 그녀였던 것이다.

다음 날. 이드는 다시 한번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 파견된 가디언들이 그들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중국에서 안면이 익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협조에 응한 각국의 가디언들이 모두 도착하자, 파리 본부장을 주체로 내일 있을 전투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실이 넓긴 했지만 가디언들 모두가 들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에서 대표할 수 있는 한 두 명만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빈과 문옥련 사이에 있던 이드와 라미아 역시 얼결에 그 어려운 자리에 끼이게 되었다. 명목상 개인적으로 참여한 한국의 명예 가디언이란 이름이었다.

회의를 주체한 파리의 놀랑 본부장이란 인물의 첫 인상은 평.범. 그 자체였다. 눈, 코, 입이 뚜렷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길가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는 영국의 가디언 본부장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나 카리스마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부장을 맞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력을 모두 갈무리한 고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도 평범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모인 가디언들이 그를 쉽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어 회의는 시작부터 아주 부드러웠다. 바로 이 부드러움과 평범함이 그가 가진 특유의 카리스마인 것이다.

이드는 이런 본부장의 모습에 그를 바람 같다고 생각했다. 이드가 보기에 그가 갈무리하고 있는 내력조차도 바람과 같이 부드럽고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바람의 향기도 그랬다.

그런 바람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회의는 오래가질 못했다. 계획에 대한 의논도 해보지 못했다. 빈과 가디언 등 각국의 가디언 대장들이 몇 가지 계획을 내놓았지만 모두 본부장의 몇 마디 말에 막혀 버린 것이었다.

“무슨 계획을 세우자는 말인가요? 평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계획이라. 나는 없다고 보는데요. 그런 곳에선 서로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싸우는 방법밖에 없죠. 내가 듣기로 제로는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단체에게 굳이 머리를 써가며 작전을 쓸 필요는 없지요. 우리는 그날 모두 힘을 합해 그들과 싸워 이기면 되는 겁니다. 그게 계획이라면 계획이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이냐.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몇 있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그렇다고 틀린 생각도 아니기에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과연 지금 머리를 짜낸다고 해도 평원에서 써먹을 만한 기똥찬 계획이 세워질 것 같지도 않았기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회의장은 친목 도모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프랑스 측의 가디언들은 그런 본부장의 모습이 익숙한 듯 서로 안부를 물으며 가벼운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일견 너무도 편해 보였다.

세르네오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않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타국의 가디언들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실 자신뿐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가디언들은 누구나 처음에 저런 표정을 짓기 때문이었다. 세르네오는 본부장 덕에 가벼워진 기분으로 옆에 앉아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여신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에 호기심이 일어 일부러 라미아 옆에 자리한 그녀였다.

“조금 당황스럽죠?”

“조금이요. 하지만 느낌이 좋은데요. 그런데… 계속 이런 분위기일까요? 제 생각엔 각국에서 온 가디언들인 만큼 서로 얼굴이라도 익혀둬야 할 것 같은데요.”

세르네오는 이 소녀가 생각이 깊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예요. 잠시 후 저녁 때 잠깐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언니처럼 편히 말해줘요. 라미아. 가디언이 되고 처음으로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났는데,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라미아는 그 말에 멀뚱히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에 대한 호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편히 사귀어도 좋을 것이다.

“헤헷… 좋아. 그럼 내가 한 살 어린 만큼 언니라고 부를게. 대신 언니도 편하게 말해줘. 동생처럼.”

“…. 고마워. 라미아.”

일단 말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여성의 특기인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특히 세르네오는 워낙에 싸인 게 많았는지 한 번 말문이 열리자 쉽게 닫혀질 생각을 않을 정도였다.

“후우~ 지루하구만…. 괜히 따라 들어왔어.”

이드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양옆자리에 있는 두 여성들 모두 자신들의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이야기 중이신 덕분에 그 중앙에 끼어 있던 이드는 할 일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밖에서 검술 수련 중일 오엘이나 봐줄 것을 하고 후회하는 이드였다.

시간. 시간은 짧던 길던, 느끼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각양각색이다. 회의장에서의 두 시간은 이드에겐 인내의 시간이었고, 라미아와 세르네오에겐 즐거운 대화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뭔가를 하면 끝이 있는 법. 회의는 본부장의 주도 하에 끝을 내고 전투에 참가하는 모든 인원은 밖에서 다시 모였다. 세르네오가 말했던 얼굴 익히기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간단히 서로를 인식하고 약간의 기분 좋은 긴장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본부장은 모여든 모든 이들에게 부드럽지만 확고한 말투로 내일의 전투를 각인 시키고 해산시켰다. 모두는 자리를 떠나며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 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만큼 내일은 아침부터 엄청나게 바빠질 것 같다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예측은 모두 빗나가 버리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도 여전히 여유로웠던 것이다. 정말 오늘 전투가 있는게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부담감 없이 식사를 마친 가디언들은 준비된 십 여대의 버스에 올라타고서 미리 정해둔 전투지역으로 향했다.

버스가 점점 파리를 벗어나는 만큼 버스 안의 긴장감도 높아갔다. 지금까지 느껴지지 않던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직전까지의 여유 때문인지 오히려 지금의 긴장감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드와 여럿 가디언들은 주위의 이런 반응에 적잖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분위기는 전투가 있다고 해서 몇 일 전부터 바싹 긴장해 있는 그런 분위기보다 오히려 좋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저 평범해 보이는 놀랑의 얼굴 중에 비범함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경기장이 따로 없군. 큼직한 돌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해. 시야가 확 트여서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버스에서 내려 전투를 치를 곳을 처음 바라본 이드의 소감이었다. 정말 일부러 정리해둔 느낌이 들 정도의 장소였다. 저 멀리까지 뻗어가도 시야에 걸리는 게 없었고, 주위엔 큰 나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땅엔 한 뼘도 되지 않는 잡초들이 나있어서 마치 일부로 조성해놓은 공원 같았다. 가족끼리 소풍오기 딱 좋은 곳처럼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이곳을 바라본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때였다. 여태까지 여유 있던 것과는 다른 은근한 긴장감과 무게가 실린 놀랑의 목소리가 일행들의 귓가를 때렸다.

“모든 가디언들은 신속히 각자 소속된 대장을 선두로 정렬해 주세요.”

강력한 발언은 아니지만 평소의 부드럽고 여유 있는 분위기 때문에 어떤 말보다 가디언들의 뇌리에 또렷이 박혔고, 각 가디언들은 순식간에 각자가 소속된 곳에 대열을 맞추어 늘어섰다. 서고 보니, 네덜란드 측의 가디언이 한 명으로 가장 적었고, 역시 자국의 일인지라 프랑스 측 가디언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와 비슷할 정도로 용병들 또한 많았다. 그들도 평소와 달리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삐뚤긴 하지만 바르게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좋아요. 우리들은 지금 이 대열 그대로 제로와 맞섭니다. 저는 혼전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제 말을 잘 듣고 제대로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최대한으로 저희 측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그 자리를 지키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얼굴들이 같이 싸우고, 위험할 때 자신을 도와주며, 또 자신이 도와야 할 동료의 얼굴입니다.”

놀랑의 말에 일대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정말 사람을 다루고 분위기를 다루는 건 타고난 듯해 보이는 그의 말과 분위기였다.

“저 사람 정말 사람을 잘 다루는 걸요. 지금 당장 그레센에 있는 제국의 총 사령관 자리에 앉혀놓더라도 잘 해 나갈 것 같아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차분히 전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제로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차라리 녀석들이 빨리 와주면 좋겠는데….”

“흐응…. 이드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속담 혹시 알고 계세요?”

“응?”

일라이져의 손잡이를 웃옷 위로 꺼내놓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반사적으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히 설명을 바라는 눈길은 라미아를 향했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순간 라미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뭔가 있다고 했나요? 그 속담을 아느냐고 물었죠.”

이드는 그녀의 말에 그것이 장난인 걸 알고 눈썹을 접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은 자신이 잘못이지 속인 그녀가 잘못이겠는가. 이드는 그녀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알아. 꽤나 여러 번 많이 들어봤거든. 근데 그건 왜?”

“이드님이 제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맞춰서 녀석들이 움직였거든요. 헤헷…”

라미아가 다시 아까와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드는 그 말에 다시 얼굴을 굳히며 주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에 오 육 킬로 정도 앞에서 희미하지만 마나 유동이 있었어요. 그 먼 거리에서 느껴질 정도면 꽤 대량의 마나가 사용된 듯 하거든요. 그런 마나를 사용해서 이런 곳에 올 사람들이라면 하나뿐이겠죠.”

이드는 그 말에 감각을 가다듬어 마나 유동을 체크해보려 했지만 옆에 있던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거리가 너무 멀고 이미 그 마나의 흐름이 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드는 빈과 문옥련을 불러 제로의 등장을 알렸다. 두 사람은 그 먼 거리에 있는 제로를 탐지했다는 말에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마법사인 빈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로에 대한 일로 장난치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또 이드와 라미아의 실력을 믿고 놀랑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놀랑은 잠시 그 이야기에 뭔가를 생각하더니 허공을 향해 작게 무슨 소리를 속삭였다. 그에 그의 주위로 작은 회오리가 일더니 잠잠해졌다.

“어머…. 바람의 정령?”

라미아의 중얼거림 대로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드와 라미아의 눈엔 지금 놀랑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새 모양을 한 노이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드가 회의장에서 처음 만난 놀랑에게서 느꼈던 바람, 바로 바람의 정령에 의한 것이었다. 놀랑의 명령에 저 앞으로 날아갔던 정령은 잠시 후 돌아와 놀랑에게 몇 마디를 전한 후 사라졌다. 그에 놀랑은 뒤 돌아서며 제로의 등장을 알렸다. 노이드로 제로를 확인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