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13화
본부 앞 정문은 경보음을 듣고 집합하기 위해 나온 가디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여 있는 가디언들의 수는 대략 사십. 몇 일 전 디엔을 찾기 위해 모였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전체적인 분위기와 모여 있는 가디언들의 모습이었다. 디엔을 찾을 때의 가벼운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무겁게 가라앉은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일부의 가디언들은 가벼운 상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정문 앞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르네오의 미간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찌푸려졌다. 이틀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파리 전역에 출몰하고 있는 몬스터를 단 사십 명이 막아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저 사십여 명의 가디언들 중 제대로 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가디언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도움을 청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인을 대신해 리옹에 가 있는 본부장에게도, 주위 도시에 상주하고 있는 가디언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 역시 이곳 파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좋은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더구나 더 기가 막힌 일은 이 놈의 몬스터들이 혼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세 마리씩 꼭 붙어서 움직인다는데 그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뭉쳐 다니는 통에 더 해치우기 어려워졌고, 덕분에 가벼운 부상자들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과 같은 몬스터들의 갑작스런 움직임이 당혹스럽기만 한 세르네오였다.
그때였다. 고민하고 있는 그녀의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이어 몇 개의 발자국 소리와 또랑또랑한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송에 따라 나온 이드와 라미아, 오엘과 곧바로 이곳으로 오느라 그냥 데리고 온 디엔이었다.
이드는 세르네오의 등을 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지나 열을 지어 있는 가디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세르네오가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출동하는 시점에서 이드의 일행들을 불러 모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누나~”
라미아의 손을 잡고 있던 디엔이 세르네오를 불렀다. 디엔의 목소리에 세르네오가 뒤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도 꽤나 피곤해 보였다. 가디언들이 저런데, 명실공히 이곳 가디언 본부의 실질적인 대장인 그녀가 편히 쉬었을 리가 없다. 그녀 역시 연 이틀 동안 가디언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디엔. 엔니, 누나들하고 잘 놀았어?”
“응.”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이제부터 라미아 누나랑 이 누나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부탁인데 디엔. 엄마한테 가 있을래?”
세르네오는 타이르듯 디엔을 향해 설명했다. 디엔은 잠시 등 뒤에 서 있는 이드들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가 어른들 이야기하는 데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었어. 그럼 디엔은 엄마한테 갈게….”
세르네오는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뛰어가는 디엔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드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방금 전 디엔을 대할 때와는 달리 약간은 굳어 있었다. 라미아는 그런 세르네오의 얼굴이 안쓰러워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쉬지도 않은 거야? 얼굴이 상당히 지쳐 보이는데…”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거든. 그보다 여기에 세 분을 모이게 한 건 이번 일에 여러분들의 도움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예요.”
라미아의 말에 빙긋 미소로 답한 세르네오는 이드와 라미아, 오엘을 바라보며 본론을 꺼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말투는 평소 이드나 라미아와 이야기할 때처럼 편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과 함께 온 오엘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르네오보다 나이가 약간 많기 때문에 쉽게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르네오는 말을 하고 세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로서는 프랑스의 가디언도 아닌 세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게 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혹시라도 거절해 버리면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사십 명만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한 손이라도 아쉬운 지금 상황에 상당한 전력이 될 세 사람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라미아가 바로 되물어 왔던 것이다.
“부탁은 무슨…. 당연히 도와야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세르네오는 라미아의 시원스런 대답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지금 상황이 꽤나 좋지 못했거든…. 그럼, 그리고 현재 상황은 모두에게 알려야 하니까. 아니, 아니… 그렇다고 내려갈 필요는 없고, 그냥 여기서 들으면 돼.”
세르네오는 자신의 말에 가디언들의 대열 사이로 내려가려는 세 사람을 한 옆으로 세워둔 채 가디언들의 앞으로 나섰다.
“흠, 흠… 조금 전 저희 가디언 본부로 몬스터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이틀 전부터 계속해서 써 왔던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 세르네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들어온 신고 내용에 따르면 파리의 동쪽 외곽 지역인 란트와 서쪽 외곽 지역….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외곽 지역에서 좀 더 떨어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아르켄이라는 곳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란트 쪽에는 열 마리의 트롤과 일곱 마리의 오우거가, 아르켄 쪽에는 십여 마리의 와이번이. 한 마디로 파리의 끝과 끝에서 동시에 일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나타난 몬스터들이란 것이 하나 같이 트롤에 오우거, 와이번이다 보니,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와이번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아르켄 상공을 날고 있지만 언제 파리 도심 한가운데를 덮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세르네오의 설명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가디언들 사이로 당혹스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름을 불린 몬스터들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트롤과 오우거, 와이번. 이 세 종류의 몬스터 중 한 사람이 일대일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몬스터들과 일대일로 붙어서 끝장낼 수 있는 실력의 가디언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좌우간 사십 명의 가디언들로 그 악명 높은 이름의 몬스터들을 그것도 파리를 중심으로 양 끝에 있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지금부터 양쪽의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팀을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몬스터 처리에 시간도 많이 걸릴 뿐 아니라. 우리 측의…. 희생도 적지 않을 텐데.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팀을 나눈다는 것은….”
가디언들 중 앞 열에 서 있던 중년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말에 여러 가디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네오는 그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래서 군에 지원을 요청했었고, 군으로부터 지상 지원은 힘들지만 와이번들을 처리하는 데는 도와줄 수 있다고 답이 왔어요. 하지만 와이번들이 십여 마리나 되는 이상 군의 제트기와 헬기만으론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지상에서 응원해 줄 마법사 분들이 몇 분 그쪽으로 가 주셔야겠어요. 그리고 그 마법사 분들을 보호해 주실 검사 분들까지 합해서 열 명. 그 외 나머지 모든 인원은 란트 쪽의 몬스터를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 호명하는 열 분은 곧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로 이동해 주세요.”
빠르게 이야기를 마친 세르네오는 미리 열 명을 골라 놓았는지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호명된 사람들은 즉시 뒤로 돌아 대기하고 있는 차를 향해 뛰었다. 열 명의 인원을 모두 호명한 세르네오는 이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하게는 라미아를 향해서였다.
“라미아, 너도 저쪽 일행과 함께 가 주겠니? 저번에 나한테 6써클 이상의 고위 마법도 몇 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었지? 상당히 위험하겠지만…. 부탁해.”
라미아는 그녀의 말에 슬쩍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의 의견을 묻는 듯 했다. 실제로 라미아에게 와이번 열 마리 정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아직까지 이드와 떨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 라미아가 인간으로 변한 후 한 번도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단, 조심해야 된다.’
‘넵!’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미아는 곧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에 따라 따라 내린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지금의 긴장되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은 덜어 주는 그런 가벼움을 가진 움직임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드님.”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된다. 알았… 아! 자, 잠깐. 잠깐만! 라미아. 검, 일라이져는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라미아를 향해 재차 당부의 말을 건네던 이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소리쳤다. 거의 보름간이나 전투가 없었기에 깨끗이 손질된 일라이져는 어느새 라미아의 아공간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드의 급한 말에 라미아도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뾰족 혀를 내밀며 아공간 속의 일라이져를 휙 던져 버리고 달려나갔다. 은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일라이져를 가볍게 받아 든 이드는 고개를 돌려 세르네오를 재촉했다.
“자, 그럼 우리도 움직여야죠.”
본부를 나선 이드와 가디언들은 버스를 타고 란트를 향해 이동했다. 이 버스는 항상 가디언 본부에 대기하고 있는 몇 대의 차들 중의 하나였다. 신속한 기동성을 요하는 가디언들인 만큼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세르네오는 그런 버스의 앞좌석에 올라 란트의 상황을 알아보려는지 열심히 무전기를 조작하며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아마 가디언들에 앞서 그쪽의 경찰이 먼저 도착해 있는 모양이었다. 파리라는 도시가 수도인 만큼 그 크기가 대단했다. 덕분에 란트에 도착한 것도 꽤나 시간이 걸린 후였다. 란트 부근으로 접근함에 따라 란트에서 피신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재미있지 않아?”
창을 통해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드의 등 뒤. 그러니까 이드의 바로 뒷좌석에는 선한 눈매의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씨익 웃으며 앉아 있었다.
“틸 씨.”
이드는 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드와의 대련으로 이틀 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완치되었다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뛰쳐 나갔었다. 그리고 이 이틀 간은 정신없이 싸움만 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런 틸의 모습에서는 지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몬스터와 전투를 가장 많이 치른 사람 중에 하나이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강기를 사용하는 절정의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틸이 다시 입을 열어 이드를 향해 물었다.
“씨는 무슨 씨? 그냥 틸이라고 불러. 그런데 재밌단 생각 안 들어?”
“…. 뭐가요?”
이드는 가만히 틸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버스 유리창을 톡톡 두드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창밖 피난하는 사람들을 보는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살겠다고 도망가는 모습. 한때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재미로 동물들을 사냥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몬스터에 의해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서 저렇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말이야. 난 무술을 익히기 위해서 여러 동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한 적이 있거든. 덕분에 맹수가 사냥하는 모습도 보았고, 인간들이 재미로 동물을 쫓는 모습도 봤지. 그리고 지금은 몬스터를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그때 살기 위해 도망 다니던 동물들의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드는 틸의 말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금 도망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 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인간들보다 힘이 센 몬스터는 지천에 널렸고,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가진 이 종족들도 나타나겠지. 그리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드래곤도 있고, 이제 인간도 사냥당하는 입장에 놓인 하나의 동물이 된 거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재밌지 않냐?”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이드는 틸의 중얼거리는 저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레이드론의 지식을 전해 받은 이드가 볼 때 사람이 동물을 보는 시각이나 드래곤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탕! 탕! 탕! 탕! 탕!
연이어진 총성에 이드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버스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총성을 들은 가디언들은 각자의 무장을 점검했다. 경찰이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와중에 총을 쏠 이유는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었다. 세르네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의 문을 열었다. 피난민들 때문에 함부로 속도를 올리지 못하는 버스보다는 직접 뛰어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모든 가디언 분들은 버스에서 내려 방금 전 총성이 들렸던 곳으로 모여 주세요. 모두 내려요.”
“좋았어. 오늘도 뻑적지근하게 몸을 풀어 볼까나?”
팡! 팡!
검은색 가죽 장갑에 싸인 주먹을 마주쳐 보인 틸이 힘차게 외치며 버스의 문을 나섰다.
조금 전 심도 있는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 이드는 피식 웃으며 오엘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세르네오를 비롯한 가디언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모든 가디언들은 각자의 능력껏 사람들을 피해 목표 지점으로 다가갔다. 모두가 버스에서 내린 뒤 몇 번의 총성이 이어졌기에 그 위치를 잡아내는 것은 쉬웠다.
총성이 들렸던 목적지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가장 먼저 버스에서 뛰어내렸던 틸이었다. 그 뒤를 이어 오엘과 함께 이드가 도착했다. 이드는 자신들이 도착한 곳을 바라보았다. 이드들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로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그 중 총성의 주인으로 보이는 세 명의 경찰이 이쪽으로 급히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뒤를 건물의 한쪽 벽을 무너뜨린 삼 미터 크기의 우둘투둘한 피부를 가진 트롤이 쫓아 나왔다. 그런 트롤의 손에는 어디서 뽑았는지 성인 남자 크기의 철제 빔이 들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경찰들이 다시 손에 든 총을 내쏘았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총알은 트롤의 몸에 박히며 초록색 진득한 액체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주루룩 흘러내리던 진득한 액체는 금방 멈추어 버렸고, 상체는 금세 아물어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트롤의 머리를 목표로 날아든 총알이었다. 그 총알들은 마치 돌을 맞춘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 사이 틸과 이드의 뒤를 이어 많은 수의 가디언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푸른색 강기로 뒤덮여 마치 날카로운 매의 발톱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제도 봤던 놈인데… 젠장, 저놈은 때리는 맛이 없는데… 쯧, 부본부장 나는 먼저 먹이를 낚아채러 가 보겠수다.”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틸은 매가 활공하듯 양팔을 쫙 펼치고서는 경찰들을 뒤쫓는 트롤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런 틸의 모습에 익숙한 때문인지 세르네오는 단지 고개를 가볍게 저어댈 뿐 제지하지는 않았다.
“누구 한 분, 틸 씨를 서포트해 주세요. 그리고 베칸 마법사님은 주위 어디에 몬스터들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그녀의 말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경찰들은 가디언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이드는 그 모습에 일라이져를 뽑아 들며 틸을 향해 앞으로 나섰다. 틸을 서포트하는 일을 스스로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별로 서포트해 줄 일도 없었다. 틸은 트롤을 상대로 재빠르고, 변화무쌍하며, 묵직한 몸놀림을 사용해 트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틸이 트롤의 몸을 한 번씩 스칠 때마다 트롤의 살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고 있었다. 트롤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라이져를 다시 검집에 넣으려다 귓가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드의 시선 안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한 채의 건물과 그 건물을 밝고 넘어오고 있는 세 마리의 오우거가 눈에 들어왔다. 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체를 가진 무지막지한 몬스터. 지금 가디언들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약 사백 미터.
우우우웅
손에 들린 일라이져의 검신을 중심으로 은백색 검강이 뭉쳐졌다. 이드는 고개를 돌려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오우거를 발견했는지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내가 처리할게.”
“…. 혼자서?”
“아니, 내 사질과 함께. 오엘, 따라와.”
“네, 사숙.”
이드는 오엘의 대답을 들으며 가볍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그 가벼운 행동에 이드의 몸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백여 미터를 날았다. 그 뒤를 따라 오엘 역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세르네오는 그 모습을 보며 틸을 재촉했다.
“틸 씨. 빨리 처리해 주세요. 지금 그렇게 시간 끌 시간 없어요. 그리고 베칸 마법사님. 몬스터의 위치는요?”
이드는 운룡출해의 경공으로 순식간에 오우거들 앞으로 날아 들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일라이져를 감싸고 있던 은백색 검강의 길이가 쭉 늘어나며 롱 소드처럼 변해 버렸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들어 올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오엘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내가 두 녀석을 맞을 테니까. 넌 한 마리만 맞아. 절대 가까이는 접근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피해. 간다. 무극검강!!”
콰콰콰쾅
이드의 손에 들린 일라이져가 허공에 은백색 검막을 쳐내는 순간 잘게 쪼개어진 검강이 두 마리의 오우거를 덮쳤다.
크워어어어어어
부서진 건물 잔해에서 일어난 뿌연 먼지 가운데서 굉포한 오우거의 표호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분노한 두 마리의 오우거가 먼지를 뚫고 이드를 향해 뛰쳐나왔다. 그런 오우거의 전신에는 자잘한 검상이 생겨나 있었다. 전혀 무방비 상태로 검상에 두드려 맞은 덕분에 생겨난 상처였다. 만약 한 번에 끝내기 위해 마음을 먹고 검강을 펼쳤다면 두 초식만에 오우거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가 바란 것은 두 마리의 오우거와 다른 한 마리 오우거를 따로 떼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일격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두 마리 오우거는 이드를 따라 원래 있던 곳에서 오십여 미터가 떨어진 곳까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쯧, 저 무거운 몸으로 잘도 뛰는군…..”
이드는 한 단층집 지붕 위에 서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마리의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은 사이도 좋게 나란히 뛰어오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오우거들 사이로 나머지 한 마리의 오우거에게 달려드는 오엘의 모습을 보며 일라이져를 반대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그리고 오우거들과의 거리가 오 미터로 좁혀지는 순간. 이드의 팔이 회오리치듯 강렬한 기운을 머금고 휘둘러졌다.
“무형일절(無形一切)!!!”
거대한 은빛의 빛 무리였다. 한순간 폭발시키듯 내뻗어 나간 거대한 크기의 반달형의 무형일절은 마주 달려오는 두 마리 오우거의 허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검강의 잔재가 주위 건물을 부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두 마리의 오우거 역시 여전히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것엔 전혀 상관 않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운룡출해를 시전해 오엘과 오우거가 한창 격돌하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았다.
쿠워어어어어
두 마리의 오우거는 자신들의 몸에 고통을 준 상대가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가자 급히 손을 뻗으며 멈추어 서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다리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앞으로만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드가 서 있던 단층의 집을 향해서.
쿠워어어??
다음 순간. 두 마리의 오우거는 자신들의 몸이 무언가 단단한 것과 부딪히는 것을 느낌과 함께 자신들의 몸이 허공을 난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걷기만 해도 쿵쾅거리며 땅을 울리는 자신들의 몸이 하늘을 날다니. 오우거는 순간 황당함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당혹이란 감정도 느껴보았다. 다름 아닌 그들의 눈에 건물에 걸쳐져 있는 자신들의 하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상체가 붙어 있지 않아 붉은 피를 분수처럼 내뿜고 있는 하체를. 그리고 이어지는 강렬한 충격이 두 마리의 오우거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하아앗….. 변환익(變換翼)!”
오엘의 기합성과 동시에 푸르게 물든 소호의 검날이 새의 날개를 닮은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 앞에 목표가 된 오우거의 전신을 베어 내며 지나갔다. 오우거는 다시 하나의 상처가 더해지는 아픔에 더욱더 성질을 부리며 오엘을 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덩치 크고 단순한 데다 화까지 나 있는 녀석이 보법을 사용하고 있는 오엘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음… 이젠 상당한 실력이야.”
이드는 또 다른 집의 지붕 위에 서 오엘과 오우거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일라이져가 들려 이드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까딱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몸을 움직이면 오우거가 쓰러지겠다 생각한 이드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방금 전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어깨 위의 물건을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 트롤이 드러누워 있었다. 삼십에 달하던 가디언들 역시 몇 명 보이지 않았다. 모두 주위로 흩어진 모양이었다. 다만, 세르네오와 틸,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오엘의 기합성에 맞추어 오우거의 괴성이 들려왔다. 자동적으로 돌려진 이드의 시선에 완전히 십자형으로 벌어져 버린 가슴을 드러낸 채 빌딩 속에 처박혀 버린 오우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오우거 앞으로 오엘이 숨을 가다듬으며 소호검에 묻어 있는 오우거의 피와 찌꺼기를 털어 내고 있었다.
“잘했어. 그런데…. 저건 신한비환(晨翰飛還)의 초식인 것 같은데?”
“네, 틸 씨와 대련한 후에 익힌 초식이에요.”
“대단한데? 이젠 나한테 따로 배울 게 없겠는걸…. 자, 다시 돌아가자.”
이드는 밝게 웃음 지으며 몸을 뛰웠다. 그런 이드의 귓가로 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멀었어요. 최소한 사숙이 가진 실력의 반 정도를 따라잡기 전까진 계속 따라다닐 거예요.”
이드와 오엘이 오우거를 처리하고 돌아오자 틸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마법사와 세르네오는 한창 마법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 정말 엄청난 장면이었어. 일 검에 두 마리의 오우거를 반 토막 내 버리다니 말이야.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래서 말인데 언제 검을 들고서 한번 대련해 줄 수 있을까?”
이드는 너스레를 떨며 다가서는 틸의 모습에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기회가 되면요. 그런데 저 두 사람은 뭐 하는 거예요?”
“마법이라는군. 저 손바닥 위로 몬스터의 위치와 가디언들의 위치가 표시된다나?”
이드는 그 말에 자신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오브젝트 렉토라는 마법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이라면 주변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전하는 사람의 마나 양과 숙련도에 따라 그 영역이 정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틸 씨 성격에 무슨 일로 싸우러 가지 않고 여기 가만히 서 있는 거예요?”
“아아… 나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저 트롤을 가지고 노는 동안 저 깐깐한 부본부장이 가디언들을 몬스터들에게 보냈거든. 이 상태에서 가 봐야 다른 사람이 먹던 밥을 뺏어 먹는 기분밖에는 들지 않아서 말이야. 거기다…. 내 몫으로 남은 게 한 마리 있어서 말이야.”
“틸 씨의…. 몫이요?”
이드는 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에 알아듣기엔 틸의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 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등 뒤로 보이는 마법사를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모두 열일곱 마리 중에 저 마법사의 마법에 걸린 녀석이 열여섯 마리. 한마디로 걸리지 않은 하나가 있다는 말이지. 탐지 영역 밖에 있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나타나면 내가 처리하기로 했거든. 기대해. 이번엔 나도 너처럼 멋지게 해치워 보여 줄 테니까.”
틸은 흥분된다는 표정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이드들이 서 있는 곳에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높다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마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폭발물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때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가 처음 듣는 베칸이란 마법사의 목소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카랑카랑했다.
“방금의 폭발과 함께 한 녀석의 생명 반응이 사라졌소. 부본부장. 이제 남은 건 열 마리요.”
마법사의 목소리에 세르네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간 가디언 분들은요?”
“…. 살아있소. 다쳤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살아 있소. 그러니 걱정할 것 없소. 아, 이제 아홉 마리 남았구만.”
그 말과 함께 마법사의 손이 한쪽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아마 그쪽에 있던 트롤인지 오우거인지 모를 몬스터 녀석이 쓰러진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틸이 허공에 주먹을 뿌리며 투덜거렸다. 아마도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쳇, 마지막 남은 그놈은 왜 안 나오는 거야? 베칸 씨. 그 쥐새끼 같은 놈 아직도 안 잡혀요?”
“아직이야. 잠깐만 더 기다려…. 호~ 아무래도 자네가 기다리던 님을 찾은 것 같군.”
마법사의 말에 틸은 즉시 주먹을 거두어들이고는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정말입니까? 어디요? 그 녀석 어딨습니까? 내가 한 방에 보내 버릴 테니까.”
“아, 이 사람 서두르기는…. 그러니까 자네가 찾는 놈은… 그래. 저쪽이구만. 거리는 이 킬로미터가 좀 넘겠는데…. 한 방에 보내긴 어려워 보이는군. 젠~ 장! 이봐, 부본부장. 일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아.”
“무슨 일인데요?”
틸은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마법사의 손바닥에는 붉은 점과 푸른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주위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몬스터와 가디언들의 위치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손바닥의 끝 부분 희미해지는 그 부분으로부터 붉은 점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얼마나 붉은 점이 많은지. 아예 붉은 색 물감으로 칠해 놓은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호기와 투지로 불타던 틸의 얼굴도 이 순간만은 진지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