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14화
“적어도… 세 자리 숫자는 되겠는걸.”
어느새 다가온 이드가 가만히 마법사의 손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굳어져 있던 틸과 마법사, 세르네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틸이 뿌드득 하고 가죽이 뭔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있게 주먹을 쥔 덕분이었다.
“좋아, 좋아. 오랜만에…. 죽도록 붙어볼 수 있겠어. 위치가… 이쪽인가?”
세르네오는 호기 있게 외치던 틸이 마법사의 손을 잡고 방향을 가늠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 얼굴로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아, 안 돼요. 지금 움직이면. 아무리 틸 씨가 싸움을 좋아해도 이건 위험해요. 상대의 숫자는 아무리 못 잡아도 백이에요. 더구나 상대 몬스터의 종류도 모르고. 막말로 해서 저게 전부 다 오우거면 어떻하려고 이렇게 무턱대고 나서는 거예요? 우선 여기서 다른 가디언 분들이 오길 기다리죠. 그리고 베칸 마법사님. 혹시 무전기 가지고 계세요? 군에 지원을 요청해야겠는데, 전 무전기를 버스에 두고 내려 버려서….”
이드는 등 뒤로 들리는 세르네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멀리 시선을 던졌다. 물론 공력을 운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느낌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언가 진정되지 않은 흥분과 열기로 가득한 숨결이 하나 가득 퍼지고 있는 느낌이. 이드는 슬쩍 세르네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베칸에게서 건네받은 무전기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더니, 지금은 가만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슬쩍 입을 열었다.
“흐음…. 저기 틸과 나라도 우선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말을 꺼낸 이드는 곧바로 날아오는 세르네오의 매서운 눈길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기 틸 씨를 붙잡고 있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너까지 그래?”
순간 범인이라도 되는 양 그녀에게 한 팔이 잡혀 있던 틸은 억울하다는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팔을 잡히고선 가만히 있었는데, 이런 그런 말을 듣게 되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더구나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라미아를 무슨 얼굴로 보라고 그래? 괜히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말고 가만히, 거기 가만히 서 있어.”
하지만 이드도 쉽게 그녀의 말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몬스터가 백 단위라고는 하지만 이드에겐 한 끼 식후 운동거리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연속해서 대기술만 사용해도 십 분도 되지 않아 쓸어 버릴 수 있었다. 솔직히 세르네오가 말하는 지원이 언제 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저들 몬스터가 도심 깊숙이 들어오면 과연 군대에서 지원이 될까? 이드는 한 마디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지원이란 것이 제때에 잘 될지 알 수 없는 거 아니야? 게다가 혹시라도 몬스터들이 들이닥친 곳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쩔 거야?”
“저기 사람은 없어. 너도 베칸 마법사님의 마법으로 봤잖아. 저쪽엔 몬스터들뿐이야. 그리고 군의 지원은….. 지금 바로 될 거야.”
쓰아아아아아아악
높은 하늘에서 대기가 찢어진다. 세르네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들의 머리 위로 한 대의 전투기가 지나쳐 갔다. 그 전투기는 이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하고 세르네오의 무전기가 소음을 발하더니 곧 한 남자의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여기는 pp-0012 현재 위치 파리 동쪽의 최 외곽 지역. 란트의 몬스터들 머리 위다. 아래에 있는 가디언은 응답 바랍니다.”
이드는 그 소리에 입맛을 쩝 다시며 하늘을 날고 있는 전투기를 바라보았다.
“저는 가디언 부본부장 세르네오라고 합니다.”
세르네오는 그렇게 대답하며 씨익 웃으며 틸의 팔을 놓아 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어디 가고 싶으면 가 보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본부장님. 지원 요청받고 왔습니다. 이곳에서 보이는 몬스터의 숫자는 대략 백에서 이백 정도. 이 녀석들에게 불비(火雨)를 내리면 되겠습니까?”
“네, 주위에 민간인은 없고 몬스터뿐이니까 녀석들이 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명령 접수. 그럼 지금부터 공격에 들어갑니다.”
제트기 조종사의 마지막 말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몬스터들이 들어서고 있을 곳으로 향해졌다. 그리고 그곳으로 시선이 향하자 자연스레 그곳을 공격해야 할 제트기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파리를 벗어나 선회하며 돌아온 제트기는 몬스터들에게 가까워지자 고도를 낮추다가 날개에 장착되어 있는 네 개의 로켓 중 두 개를 발사함과 동시에 고도를 높여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순간이지만 이드들의 눈에 황혼이 찾아온 듯 보였다.
쿠콰콰콰쾅…….
두 발의 로켓은 붉은 홍염(紅炎)과 시커먼 흑연(黑煙)을 자아냈다. 모르긴 몰라도 로켓이 떨어진 자리는 불바다와 다름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숫자는 백 이상이었다. 결코 두 발의 로켓으로는 그 모든 숫자를 잠재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제트기 조종사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트기는 허공 중에서 다시 동체를 뒤집으며 로켓이 떨어진 자리를 지나갔다. 아마 몬스터들이 어느 곳에 모여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콰콰쾅….. 콰콰쾅…..
두 발의 로켓이 다시 발사되었다. 또 다시 시커먼 흑연이 피어올라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보기에 저 제트기라는 것과 로켓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로켓이 떨어지고 난 후 솟아오르는 흑연은 사람의 마음까지 어둡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때 세르네오가 들고 있는 무전기로부터 예의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pp-0012 부본부장님 들리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내려 주신 임무 수행 완료했습니다. 하지만 적 몬스터들을 완전히 잡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 기에 탑재되어 있던 네 대의 로켓을 모두 써 버렸기 때문에 저로서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나머지는 저희 가디언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넵! 그럼 계속 수고하십시오. 라져.”
그 말에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제트기를 잠시 바라본 세르네오가 베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탐지 마법으로 몬스터들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이미 들어와 있던 몬스터들과 가디언들의 상태도 같이요. 그리고 틸 씨와 이드는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요.”
그녀의 말에 틸이 찢어진 가죽 장갑을 벗어 내며 입을 열었다.
“준비랄 게 뭐 있나. 바로 나가면 되는데…. 근데 부본부장. 저 제트기는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보통 저런 건 뜨는 준비만 해도 십 분은 족히 잡아먹는다고 들었는데… 저 녀석은 금방 왔잖아.”
들고 있던 무전기를 다시 베칸에게 넘긴 세르네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죠. 십 분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건 맞아요. 하지만 날고 있던 비행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미 하늘에 떠 있던 만큼 뜨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거든요.”
“흠, 그럼 저건 하늘에 떠 있던 녀석인가 보군.”
세르네오는 그 말에 묘한 고양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거죠. 특히 저 제트기는 와이번을 상대하기 위해 출동했던 거라 멀리 있지도 않은 덕분에 순식간에 날아올 수 있었던 거죠.”
이드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상대하고 있던 와이번은 어쩌고 왔단 말인가?
“그, 그럼 와이번을 맞은 쪽은 어쩌고.”
“당연히 여유가 있지. 와이번 때문에 출동한 제트기와 헬기는 저 한 대만이 아니니까. 더구나 지상에서 지원해 주는 마법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와 준 거거든. 그리고… 우리 쪽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기도 했었고. 뭐, 라미아가 다칠 걱정은 안 해도 좋아.”
“하아~ 여기서 라미아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호호호… 글쎄.”
그렇게 두 사람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베칸의 탐색 결과가 나왔다. 그의 말로는 가디언은 아직 아무런 희생자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도 그대로라고 했다. 그리고 문제의 폭격을 받은 곳에 모여 있던 몬스터는 반 수 이상이 탐지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대신 아직 살아서 탐색되는 것이 삼십 마리에서 사십 마리 정도 된다고 한다. 그 몬스터들 중에는 아직 펄펄한 놈도 있을 것이고 곧이라도 죽을 상처를 입은 몬스터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좌우간 제트기의 폭격을 맞은 것치고는 많은 수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저와 이드, 틸 씨가 우선 가서 살아 있는 몬스터를 처리합니다. 베칸 마법사님은 이곳에 계시다가 몬스터를 처리하신 가디언 분들이 돌아오시면 저희 쪽으로 유도해 주세요. 그리고 오엘 양에게는 베칸 마법사님의 안전을 부탁드릴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게. 세 사람 다 조심하고.”
세르네오는 베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와 틸에게 손짓을 해 보이고는 경신법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올렸다. 틸과 이드 역시 그 뒤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세 사람 모두 도로 나 땅을 이용하기보다는 집과 집 사이의 지붕을 발판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경공을 사용하여 뛰어가는 이 킬로미터는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경공을 펼쳐 나가던 이드는 코끝을 스치는 역겨운 노린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폭격을 맞은 자리에 도착한 것이 아닌데도 몬스터가 타 들어가며 내는 노린내는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와 같이 경공을 사용하고 있는 두 사람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이드는 냄새를 떨치기 위해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후아~ 무슨 냄새가 이렇게 독해? 소환 실프!”
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고 있는 이드의 눈앞으로 실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이지만 실프의 상큼한 향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세르네오와 틸이 갑작스런 실프의 출현에 놀란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이드는 두 명의 실프를 더 소환해 내서 자신들이 더 이상 역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이드의 부탁은 바로 이루어졌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세 명의 실프는 세 사람의 얼굴 부분에 날아들어 바람으로 변하며 각자의 얼굴을 감싼 것이었다. 마치 방독면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더 이상 역한 냄새가 나지 일행들의 코를 자극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실프로 인한 깨끗한 공기가 일행들의 폐를 가득 채워 주었다.
“후아~ 살았다. 그런데 너 정령도 사용할 줄 알았었니?”
세르네오가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듯이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피우며 경공의 속도를 좀 더 올렸다.
“지금처럼 필요할 때만 사용하죠.”
“후야… 대단한걸. 권으로도 그만한 실력에 검으로도 간단하게 오우거 두 마리를 양단해 버리고, 이젠 정령까지. 이거 이거… 살려면 대련 신청한 거 취소해야 되는 거 아냐?”
틸의 농담에 세르네오와 이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련 취소라니,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틸이라면 오히려 좋다구나 하고 싸움을 걸 것을 아는 두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실프의 도움으로 역한 냄새를 피해서 폭격을 맞은 자리에 도착한 세 사람은 거북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몸이 터져 죽어 버린 그 모습들이 심히 보기 좋은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이곳에 와서야 폭격을 맞은 몬스터들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인간 이상의 종족 수를 가지고 있는 오크였다. 하지만 그냥 오크가 아니었다. 발달된 근육과 송곳니를 보자면 이들은 오크들 중에서도 전사라 불리며 보통 오크의 두세 배에 달하는 힘과 덩치를 가진 그레이트 오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죽어 있는 그레이트 오크들을 살피던 세르네오는 정말 요 며칠간 있었던 몬스터의 습격이 단순한 ‘몬스터의 습격’인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수십 번이나 되는 공격과 다양한 몬스터의 종류. 특히나 오늘은 그 이름이 자자한 네 종류의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서 공격해 왔다. 그것도 같은 시간에 말이다. 물론 누군가 몬스터를 조종한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은 나중에. 지금은 지금 할 일이 있으니까. 그 일부터 하는 게 좋겠지.
“자, 그럼 남은 몬스터들이 도심으로 움직이기 전에 처리하도록 하죠. 우선 서로 이 근처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중앙은 내가 맞고, 오른쪽은 이드가, 왼쪽은 틸 씨가 맞기로 하죠. 자, 그럼 빨리들 움직여요.”
세르네오의 지시에 따라 이드와 틸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드는 실프를 한 명 더 소환해 내서 그녀로 하여금 주위에 있는 생명체를 찾게 했다. 자신이 직접 다니며 찾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쉬울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과연 실프는 한 번 이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아직 살아 있는 그레이트 오크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잡고 있는 동안 먼저 몬스터를 없애기 위해 나갔던 가디언들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역겨운 냄새 때문인지 오만 가지 인상을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냄새를 맡지 못하는 인물이 보았다면, 무슨 큰 불만이 있는 표정인 줄 알 것이다. 이드는 새로 도착하는 그들을 위해 실프를 좀 더 소환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여든 가디언들 덕분에 폭격에서 살아남은 그레이트 오크의 처리는 빠르게 이루어졌고, 마지막으로 베칸이 다가와 탐색 마법으로 더 이상의 몬스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모두 폭격이 맞은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실프는 한참이 더 지나고서야 정령계로 돌려보내졌다. 다름 아닌 옷과 몸에 배인 역겨운 냄새 때문이었다.
‘본부에 도착하는 대로 목욕부터 먼저 해야겠다.’
그것이 가디언들이 다시 버스에 오르며 가진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몇몇 가디언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에 몰려든 가디언들을 처리하기가 무섭게 다시 몬스터에 대한 신고가 가디언 본부로 접수된 때문이었다. 세르네오는 피곤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려서는 몇몇 가디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번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해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몬스터와의 전투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났다. 몬스터들의 공격 횟수는 오일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덕택에 쉬지도 못하고 있는 가디언들은 휴식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그런 지친 가디언들을 대신해 하루에 세, 네 번씩 출동하고 있었다. 제이나노는 여전히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나 되어서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일 전부터 제이나노도 보통의 가디언들 못지않게 바쁘고 힘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되는 몬스터의 출현으로 인해 그만큼 부상자도 많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자연적으로 그 주위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었고, 당연히 그가 할 일은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많아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디언 본부 주변으로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틀 전 폭격이 있고부터 파리 외곽 지역에 군대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놀랑 본부장과 세르네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군 역시 전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가디언 본부의 요청을 쉽게 수락했다. 단 오일 만에 파리는…. 아니, 프랑스의 주요 몇몇 도시들은 봉인이 풀린 초기의 모습을 돌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몬스터의 출연을 경계하는 공포가 깃든 모습으로 말이다.
“후우~ 정말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아~~”
세르네오가 푸석푸석한 머리를 매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나란히 앉아 그런 세르네오를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사무실이었다. 세 사람은 방금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올라왔다. 하지만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는 몬스터의 출현에 다시 한바탕 하고 난 후였다.
“그러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푹 자는 건 어때? 지금 모습이 말이 아니야.”
확실히 그랬다. 찰랑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니 흐트러져 있고, 붉은 루비 같던 그녀의 눈동자 역시 가는 핏발이 서 있어서 귀신의 눈처럼 보였다. 거기에 더해 옷까지 구겨져 있으니…. 정말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르네오는 의자에 푹 몸을 묻은 채 고개만 흔들었다.
“안 돼.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마땅히 할 사람이 없단 말이야.”
“디엔의 어머니는?”
이드는 저번 그녀가 디엔의 어머니와 함께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모습이 생각나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세르네오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안 돼. 언니도 따로 하는 일이 있어. 그리고 나는 직접 출동을 하지 않고 서류상의 일만 하니까 육체적인 피로는 가디언들보다 덜 해. 그렇게 생각하고 좀 더 참아 봐야지.”
세르네오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계속 서류를 보고 있어서인지 눈이 꽤나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런 이드의 행동이 의아스러워진 세르네오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이드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사무실 한쪽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곳에 세르네오를 세워 두고서 뒤로 물러섰다. 세르네오는 그런 이드를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야, 야…. 뭘 하려는 거야? 뭘 하려는지 이야기 정도는 해 줘야 사람이 불안해하지 않지.”
갑작스런 상황이 꽤나 당혹스러웠나 보다. 그 모습에 이드를 대신해 라미아가 입을 열었다. 이드와 마음이 통하는 그녀인 만큼 지금 이드가 뭘 하려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런 라미아의 표정엔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만히 있어. 너한테 좋은 일이니까.”
“그래도 뭘 할 건지 정도는 알아야지.”
세르네오의 말에 이번엔 이드가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씻어 주려는 것뿐이지. 물의 정령으로 말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물의 정령은 정화와 치료의 힘도 가지고 있지. 아마 씻고 나면 몸의 때뿐만 아니라 그 피로감까지 싹 씻겨 나갈 수 있을 거야. 아, 참고로 숨 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평소처럼 숨 쉬면 돼. 소환 플라니안!”
슈와아아아아……..
시원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중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마음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씻어 주는 폭포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어디 다른 곳으로 튀지도 않고 모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떨어지던 물줄기가 하나의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머리카락과 깊디깊은 푸른 바다 빛 눈을 가진 보통 성인 정도의 크기를 가진 인어. 그랬다. 물의 상급 정령 플라니안은 벌거벗은 여인의 상체를 가진 아름다운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주인님.]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플라니아의 목소리는 마치 물소리와도 같다는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드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드가 세워 둔 자리에서 멍하니 플라니안을 바라보는 세르네오를 가리켜 보였다.
“내 친구인데, 많이 지쳐 있어.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이드의 손짓에 따라 세르네오를 바라본 플라니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허공 중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세르네오의 발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찰랑이는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르네오를 중심으로 지름이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물기둥. 그것은 순식간에 솟아올라 세르네오의 가슴께에 이르렀다.
“이,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세르네오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정령이란 존재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본능상 물이 가슴까지 차 오르면 겁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걱정 말아요. 그리고 아까 한 말대로 그냥 편하게 숨을 쉬면 돼요.”
이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르네오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물기둥은 사무실의 천장 부분까지 솟아올랐고, 세르네오는 그 중앙에 둥둥 떠 있게 되었다. 물기둥 안의 세르네오는 양 볼을 부풀린 채 보글보글 공기 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드는 킥킥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편하게 있으라고 했는데…. 숨을 참기는. 쯧.”
“하지만 설명이 너무 없었다 구요. 뭐…. 조금 있으면 숨이 차서도 입을 열겠지만….”
그렇게…. 오 분이 흘렀다.
“호~ 오래 참는걸.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물에 잠겼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이제 한계인 것 같은데요. 얼굴이 완전 문어처럼 발갛게 변했어요.”
과연 물기둥 속의 세르네오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물기둥 속을 빠져나가려는지 온 몸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 분이 더 흐르는 순간.
세르네오의 입이 열리며 부그르르 하고 공기 방울이 쏟아져 나왔다. 그에 따라 세르네오의 몸이 잠시간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세르네오의 표정은 의아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냥 편하게 숨 쉬라고 했잖아. 지금 세르네오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물들은… 뭐라고 할까. 액체화된 공기? 하여튼 그래… 그리고 그게 오히려 피로를 푸는 데는 더욱 좋지. 몸이 필요한 공기를 직접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 중에서 숨 쉬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편할 거야. 거기다 폐 속에 있는 노폐물들까지 깨끗하게 씻어 줄 테니까 공기 중에 나와서 숨을 쉬면 시원할걸?”
이드가 설명을 마치자 세르네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 속인데도 이드의 목소리가 모두 들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드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세르네오는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싸늘히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냐고 따지는 듯했다. 그 사이 세르네오를 담은 물기둥은 몇 개의 층을 나누며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미세한 회전이었지만 물기둥 속에 있는 사람의 온 몸을 매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똑… 똑…..
세르네오가 물기둥 속에 담긴 지 십 분쯤이 지났을 무렵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에 있니? 음? 너희들도 있었…. 어머!!!”
빼꼼히 고개부터 들이밀던 디엔의 어머니는 소파에 앉은 이드와 라미아를 보고 생긋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서 눈에 들어온 물기둥과 그 속의 세르네오의 모습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그녀 자신도 모르게 사무실의 문을 잡아당길 뻔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 편의 코미디가 따로 없을 테지만 말이다. 라미아는 놀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디엔의 어머니를 소파에 앉히고 물기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물기둥 속의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거 얼마나 더 있어야 끝나는 거니?”
이드는 갑작스런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앞으로 한 십 분은 더 저렇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실 말씀 있으면 그냥 하세요. 안에서도 충분히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디엔의 어머니는 이드의 말에 물기둥 속에 둥둥 떠 있는 세르네오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럼… 그냥 이야기할까? 너 내 말 들리니?”
끄…. 덕….. 끄…. 덕…..
물살 때문인지 세르네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세 사람은 그 모습에 자신들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다름 아닌 몬스터 이야기인데. 오늘 각국의 가디언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지금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데. 한마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의 활발한 습격은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거야. 그 말은 곧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단순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지.”
……
디엔의 어머니의 이야기에 세르네오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커다랗게 뜬 눈으로 대충 그 뜻이 전해져 왔다.
‘정말? 그럼 도대체 뭣 때문에 몬스터들이 이렇게 설쳐 대는 거야?’
대충 이런 내용인 듯했다. 디엔의 어머니도 대충 그런 눈빛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 버렸다.
“몰라!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몬스터를 잡아서 혹시 조종을 받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조사를 해 봤지만 아무런 것도 나오지 않았데. 마법적인 기운도 약물의 흔적도. 그래서 세계 각국의 가디언들도 상당히 당황하고 있나 봐. 하지만 결국 결론은 두 가지지. 첫째는 세계의 몬스터가 한꺼번에 단합 대회라도 가졌을지 모른다는 거고, 둘째는 가디언이 알지 못하는 조종 방법으로 조종받고 있다는 것.”
껌뻑껌뻑. 세르네오의 눈꺼풀이 느리게 들썩였다. 이어 손까지 휘저어 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은 들은 대로지. 끝에 붙인 두 가지 결론은 내 것이지만 말이야. 좌우간 국제적인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 같아. 몬스터들 때문에 정부의 압력이 없어져서 좋아했더니…. 이젠 더 골치 아파지게 생겼어.”
‘몰라, 몰라. 나는 몰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드는 온 몸으로 언어를 표현하고 있는 세르네오의 모습에 웃음을 삼키고 디엔의 어머니를 향해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몬스터 덕분에 정부의 압력이 사라졌다는 건 무슨 말이죠?”
“음… 정확히는 사라졌다기보다는 정부 스스로 꼬리를 내린 거라고 하는 게 맞을 거야. 그들도 지금처럼 몬스터가 들끓는 상황에서 가디언들을 상대할 바보는 아니라는 이야기지. 만약 우리들에게 외면당하면 몬스터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거라고 할까? 몬스터가 날뛸수록 가디언의 주가가 올라간다. 뭐, 그런 거지.”
“그럼 정부에 대한 조사는요?”
라미아가 찻잔에 차를 따라 디엔의 어머니께 건네며 물었다.
“고마워. 그 조사는 계속할 거야. 그 내용상 우리들 가디언으로서는 쉽게 접을 수 없는 일이니까. 더구나 몬스터들 때문에 우리들 눈치를 보느라 조사 방해 같은 것도 없으니…. 어쩌면 조사가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 커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