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15화
“고마워. 그 조사는 계속 할 거야. 그 내용상 우리들 가디언으로서는 쉽게 접을 수 없는 일이니까. 더구나 몬스터들 때문에 우리들 눈치를 보느라 조사 방해 같은 것도 없으니…. 어쩌면 조사가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쨌거나 가디언들만 엄청 바빠지겠네요.”
그녀의 말에 찻잔을 들던 디엔의 어머니에게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록 직접 몬스터와의 전투에 나서는 그녀는 아니었지만 서류 문제로도 충분히 고달픈 모양이었다. 그리고 같은 단체에 있는 가디언들이나, 그들과 같이 움직이며 오 일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우선 그녀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세르네오만 해도 지금 저 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정부에 대한 조사를 빨리 끝내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 중이야. 조사에 파견된 인원이 꽤 되거든.”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정부 측에 파견되어 있는 가디언들의 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벌여 놓은 그 엄청난 일을 조사해 나가려면 그만한 인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덕분에 지금 한창 바쁜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용병들이었다. 평소에도 가디언들 못지않게 능력자 이름의 용병으로서 일거리가 많은 그들이었지만, 요 오 일간의 기간보다 바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엘과 이드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 시각 영국에서 가디언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던 오엘의 전 동료였던 하거스들은 평소보다 몇 배에 달하는 액수를 받아 챙기는 용병들의 모습에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이드가 말했던 십 분이라는 시간이 지났던 모양이었다. 세르네오를 머금고 있던 물기둥으로부터 부르르르르 거리는 떨림과 함께 물이 끓을 때 생기는 것과 같은 작은 공기 방울들이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공기 방울들은 자동적으로 물기둥의 위쪽으로 올라가 터졌고, 그렇게 올라오는 공기 방울의 양만큼 물기둥이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잠깐 사이 물기둥의 높이는 세르네오의 허리까지 낮아져 버렸다. 뿜어져 나오는 공기 방울이 그만큼 많은 까닭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완전히 끝나면 돌아가도 좋아.”
[알았어요.]
디엔의 어머니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곧 저 물기둥에 대한 정체를 생각하고는 대충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니안의 말이 있은 후 물기둥은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고 결국에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물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 거대한 물기둥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네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에는 몸이 필요로 하는 수분 이외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머리만이 방금 전 그녀가 물에 담겨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었다.
“어때?”
라미아가 세르네오의 상태를 물었다. 세르네오는 물기둥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다 두 팔을 쭈욱 펴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깨끗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라미아의 대답에 충분히 답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좋아. 조금 뻐근하고 찝찝하던 몸도 개운하고, 피곤하던 것도 싹 사라졌어. 거기다 네 말대로 답답하던 공기가 엄청 시원해. 아우~ 고마워. 이드. 이건 감사의 표시.”
세르네오는 그렇게 말하며 큰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이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이드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고, 라미아는 고성을 발했다.
“아아앗.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기는. 감사의 표시지. 쯧, 넌 좋겠다. 이런 능력 좋은 애인을 둬서 말이야. 게다가 어차피 네 거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일로 질투하면 안 돼~”
“이익….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세르네오는 실로 오랜만에 라미아를 놀려 대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모습을 보면 완전히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런 것은 겉모습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주름이 가 있던 옷은 색감이 살아나 쫙 펴져 있었고, 푸석하던 머릿결과 얼굴도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핏발이 서 있던 그녀의 눈동자도 원래의 루비와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라미아를 놀려 대는 그녀의 활기였다. 확실히 요 오 일간의 피로를 확실하게 풀어 버린 듯했다. 잠시간 웃고 떠들던 두 사람은 이드의 중재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디엔의 어머니는 그런 세르네오의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마 그녀도 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몇 일 동안 서류만 붙들고 앉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말이다. 그때 라미아의 것으로 짐작되는 주스를 한 모금에 들이킨 세르네오가 디엔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머리 뒤로 느껴지는 라미아의 눈 째림을 애써 무시하며 말이다.
“그런데 아까 하던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 말인데…. 세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절대적으로 두 번째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말하는 건데 혹시 제로에서 이번 일을 한 건 아닐까?”
“흐음…. 사실 여기저기서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해.”
디엔 어머니가 입을 열자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모였다. 그녀는 라미아가 밀어 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제로는 여러 번 몬스터를 이용해서 공격을 한 게 사실이야. 그런 만큼 곳곳에서 이번 일의 범인으로 제로를 지목하고 있어. 지금 네 의견과 비슷하지. 하지만 대대적으로 제로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고 있지. 그건 여론 신분, 방송 쪽에서도 마찬가지고. 막상 제로를 의심하고 나서자니 지금껏 제로가 해 왔던 행동이 마음속에 걸린 거야.”
“제로의 행동?”
“그래. 지금까지 제로는 어딘가를 공격할 때 항상 경고장을 보냈었어. 그리고 최대한 사상자가 나지 않도록, 특히 민간인이 다치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어. 저번 영국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을 때도 정중히 사과문을 보내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 뿐이니? 우리들과의 전투 중에도 이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비겁한 행동을 한 적은 없어. 그런데 그런 제로가 갑자기 몬스터를 용해서 도시를 공격하고, 시민들을 아무 이유 없이 학살했다? 지금까지의 정정당당한 이미지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사람들의 분노를 살 행동을? 우선 나부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
세르네오는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생각해 보면 또 그랬다.
지금까지 착실하다 할 정도로 정정당당한 이미지를 쌓아왔던 그들이고 그런 만큼 각국의 국민들과 방송에서도 제로의 움직임을 단순한 이야기 거리와 재미거리로만 다루었을 뿐 심각하게 거론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때 다시 디엔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과 같은 일은 제로에겐 악영양만 줄 뿐이야. 만약 자신들이 범인으로 지목되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이미지가 무너짐과 동시에 지금까지 호의적이었던 각국의 국민들까지 적대적으로 변할 텐데, 그런 일을 제로측에서 왜 하겠니? 그런 이유때문에 함부로 제로를 의심하지 못하는 거지. 방송에서도 지금까지 제로를 좋게 말했는데 갑자기 의심스럽다고 떠 들수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송에 나오긴 할거야. 이미 여러 사람들이 제로를 의심하고 있으니까.”
디엔 어머이는 그렇게 말하며 찻 잔을 비웠다.
그녀의 그런 예측은 정확이 맞아 떨어졌다. 몇 일 후 도, 한 달 후도 아닌 그녀의 이야기가 있었던 바로 다음날 아침 방송과 신문에서 터져 버린 것이었다. 전날 몬스터에 의한 대책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미국의 의원의 입에서 잠깐 제로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 시작이었다. 마치 터트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식으로 길게 길게 이어져 그낭 하루 종이 제로의 이야기만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은근히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각국의 국민들도 계속되는 방송에 정말 제로가 한것이라도 되는 양 제로를 향해 그 분노를 표했던 것이다. 당장 몬스터의 위협을 받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는 제로의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말도 돼지 않는다고, 확인도 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서 요란하게 떠들어댄다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로에 의해 점령된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로가 점령한 도시에 살고 있는 만큼 자신들을 몬스터로 부터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제로의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제로인 만큼, 또 그들이 오고서 부터 도시의 치안이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인 만큼 제로를 변호 하는 것은 당연 했다.
이들의 이런 반응에 방송국에서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저녁때쯤을 기해서 제로와 몬스터의 출연을 연관시키는 방송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제로와 몬스터를 연관시키는 방송이 뜨고 난 후 였다.
방송이 그쳤다지만,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 되게 시끄럽네.”
이드는 창 밖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다름 이드와 라미아가 사용하는 방이었다.
창 밖으로 향한 이드의 시선에 부랑자 마냥 한쪽도로를 막고서 쉬고 있는 수 십,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이 잡혔다. 그들은 모두 요 몇 일간 몬스터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갑작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자 경찰이 나서서 해산시켜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실패고 말았다. 살기 위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해산시키겠는가. 가디언들 역시 몬스터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을 어쩌지 못했다. 다만 급히 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한쪽 도로만은 비워둘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디언 본부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서 차를 타고 출동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좌우간 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불어난 덕분에 아직 이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간에도 밖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제 있었던 제로에 대한 방송은 저들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이드와 라미아는 조용히 잠들기 위해서 사일런스 마법까지 사용해야 하는 수고-고작 사일런스 마법이 수고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를 겪어야 했다.
우당탕.
“뭐, 뭐야.”
이드는 부서질 듯 한 기세로 왈칵 열리는 문소리에 움찔 해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급하게 뛰어 온 듯 숨을 할딱이는 라미아가 디엔을 안고 서 있었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한 순간 자신의 기운을 풀어 가디언 본부주변을 살폈다.
갑작스런 그녀의 출현에 주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였다.
“무슨일이야? 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데…. 주위에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이드는 자신의 퍼트린 기운 안에 특별한 것이 집히지 않는 느낌에 다시 기운을 갈무리하며 라미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디엔을 이드에게 안겨주며 방안에 마련되어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갑작스런 라미아의 행동에 의아해 하던 이드는 디엔을 바로 안으며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모았다. 전원이 들어옴에 따라 한 순간 새까맣기만 하던 텔레비젼이 빛을 바라하며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대머리에 눈이 가는 그는 다름 아닌 제로의 대장들 중 한 명인 존 폴켄이었다. 그는 항상 뉴스 캐스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텔레비전 전원이 들어옴과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에 의한 공격은 본 단체와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이는 저희 제로라는 단체의 이름과 지금까지 저희들이 외쳤던 의지의 모든 것을 걸로 맹세하는 일이며, 사적으로는 저 존 폴켄의 목숨을 걸고 단언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적은 공문이 각국의 정부와 가디언 본부로 보내어 지고 있을 것입니다. 결단코 저희 제로는 이번 일과 무관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벼운 말로서 저희 제로를 비난한 미국의 하원의원 그린 로벨트씨께 정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말을 마친 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과 함께 장면이 바뀌며 항상 모습을 보이던 캐스터의 모습이 다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캐스터의 말을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이드는 디엔을 안은 채로 아직 열려있는 방문을 나섰다.
“세르네오에게 가보자.”
웅성웅성….. 수군수군…..
방밖을 나서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역시 제로의 존이 직접 나와서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디언들 대부분이 존의 말을 믿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몇 몇 은 아직 제로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가디언 본부는 때아닌 토론장 분위기에 휩싸여 버렸다. 세르네오의 사무실 역시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무실 안에서부터 여성의 것으로 생각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드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라미아는 디엔을 안은 이드를 대신해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의 등장에 한참 무언가를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던 세르네오와 디엔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맞아 주었다. 특히 디엔 어머니는 이드의 품에 안겨 있던 디엔을 받아 안고서 볼을 비벼 대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다 보니 귀엽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디엔 정도의 귀여운 아이라면, 자신의 아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너희들 텔레비전 보고 왔지?”
세르네오가 왜 왔는지 대충 짐작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이드들이 들어올 때부터 들고 있던 한 장의 서류에 머물러 있었다. 이드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난 라미아가 가르쳐 줘서 끝에 핵심을 간추려 말하는 부분만 봤는데…”
“물론 봤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직접 나와서 말을 한다길래 기다리다 봤지. 이게 제로 쪽에서 보낸 공문인데… 볼래?”
이드는 그녀가 지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건네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서류 상에는 이드가 들었던 내용이 자세하고 길게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이 정말 그런 일을 했다면 세상없어도 칼을 물고 죽겠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절대로 자기들은 결백하다는 말이었다. 서류를 모두 읽어 본 이드는 그 서류를 다시 세르네오 앞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가디언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요? 혹시나 하고 있던 제로가 절대 아니라는데… 이런 내용이면 의심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 별수 없잖아. 그냥 전 세계 모든 몬스터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미쳤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막아내는 수밖에 별 도리 없지. 뭐.”
암담하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린 세르네오는 자신의 몸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슬쩍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디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제로를 제외하고 이런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들을 생각해 본 두 사람이었다. 결과 지금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두 존재. 또한 가능성이 가장 많은 두 존재가 있었다.
“흐음… 어제 라미아와 같이 생각해 본 게 있는데.”
“응?”
이드가 느긋하게 말을 꺼내자 세르네오와 디엔 어머니의 눈길이 이드와 라미아에게로 모였다.
“만일 이번 일이 누군가에 의해서 벌어지는 인위적인 일이라면… 제로 외에도 가능성이 있어.”
“…… 그게… 누군데?”
두 여성의 눈빛이 이드를 향해 가공할 빛을 뿌렸다. 그녀들로서는 이놈의 끝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한시 바삐 해결하고서 편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이드가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두 사람의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마족과 드래곤이죠. 가디언들이고 사람들이고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두 존재라면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겠죠.”
이드는 딱 부러지게 자신과 라미아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세르네오와 디엔 어머니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못했다. 두 사람의 그런 반응에 오히려 말을 꺼낸 이드가 무안해지려 하고 있었다. 라미아는 이드의 그런 모습에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반응이 왜 그래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인데….”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우리도 마족은 아니지만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기도 했었지. 하지만….”
세르네오가 말을 끊으며 길지 않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드래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막막하긴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너희들도 알겠지만, 이 짓이 드래곤의 짓이라면 지금 이런 짓을 하는 드래곤을 잡아야 한다는 말인데… 어디 있는 줄 알고 드래곤을 잡겠어? 또 몇 마리가 되는지 모르는 드래곤들 중에 누가 이런 짓을 했을 줄 알고 찾아가고, 설사 찾아간다고 해도 무슨 수로 해치우는가 하는 것도 문제지. 그런 상황에 마족이 이번 일의 원흉이라면 더욱더 막막하기만 할 뿐이고. 그래서 가디언들 사이에 언뜻 나온 내용이지만 바로 무시되어 버렸었어. 그런 대단한 존재가 왜 할 일 없이 이번 일을 벌이는가 하는 말로…”
이드는 그녀의 푸념을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만약 그레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어도 이런 반응일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현자를 찾거나 신탁을 받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후~ 허기사 아직 이 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레센처럼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하겠지.’
이드는 이번 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도 없었다. 이 일을 알아보고자 하면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인데, 지금은 그것보다 룬이란 소녀가 가진 검의 정체부터 아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실제, 마족이나 드래곤과 연관되어 전투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이드는 그 전투에 별로 나서고 싶지가 않았다.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봉인이 풀린 후 처음 맞이하는 대전투가 될 것이고. 그것은 인간들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겨 내야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종족들이 섞여 살아가게 될 이곳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가. 이드는 전투의 의미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전쟁 또한 벌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생각은 이어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변할 수밖에 없었다.
“드, 드, 드래곤!!! 드래곤이 나타났다!!!”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가 가디언 본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온 힘을 다한 듯한 그 목소리에 잠시지만 본부는 사일런스 마법이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곧 엄청난 소동으로 바뀌어 본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벌떡
세르네오는 드래곤이란 소리를 듣는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의 창문으로 다가가 본부 건물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푸르른 창공만이 들어올 뿐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형 생물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연이어 엄청난 소음이 사무실 문을 넘어 들어오자 세르네오의 눈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던 세르네오의 머릿속에 뿌연 안개로 가려진 얼굴의 남자가 혼비백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신나게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어~ 떤 놈이 장난질이야!!!!!”
세르네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비록 한 순간이지만, 세르네오의 사무실 안에서는 밖의 소음이 그녀의 목소리에 눌려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사무실의 문이 부서질 듯 활짝 열리며 굵은 눈썹이 인상적인 이십대의 남자가 구르듯이 달려 들어왔다. 급하게 세르네오의 사무실로 달려 들어온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슨 내용이 적힌 하얀 종이를 내밀어 보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런 남자의 목소리는 손 못지않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부… 부… 부본부장님. 드…. 드래곤입니다.”
세르네오는 그의 목소리에 눈앞의 남자가 조금 전 드래곤이라고 소리치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하던 남자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세르네오는 반사적으로 주먹이 날아갈 뻔했다. 남자의 떨리는 손에 들린 종이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도록 때려 주었을 것이다. 세르네오는 남자의 손에서 빼앗듯이 팩스 종이로 보이는 것을 낚아채 들었다. 팩스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드래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죽도록 때려 주겠다고 다짐했다. 종이는 평범한 서류 용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만은 결코 평범하지가 못했다. 세르네오의 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변해 갔다. 그 내용을 읽어 본 세르네오는 눈앞의 떨고 있는 남자를 때려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의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방금 전 남자가 소리친 내용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밖에서 일고 있는 소란은 분명 이 남자의 것이었다. 세르네오는 종이를 디엔 어머니께 건네주고는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과연 드래곤이 나타났군.”
“예…. 예!”
목소리가 떨린다. 세르네오는 눈앞의 이 겁 많은 남자가 어떻게 가디언이 되었나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직접 드래곤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떨고 있다니. 이 남자에 대해서만은 적성 검사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세르네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 파리에 나타난 건 아니지.”
“그… 그렇습니다.”
“그럼 저 밖에서 놀라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저들은 뭐야?”
남자는 세르네오의 말에 그제야 밖의 소동이 귓가에 들리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다가 아니야. 바로 네가 소리친 덕분에 일어난 소동이잖아. 네가 일으킨 일이니까 빨리 네가 가서 해결해. 삼 분 주겠어. 그 시간 안에 모두들 조용히 시키고 저 안에 있는 내용을 설명해 줘. 어서 가.”
“예, 옛. 알겠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소리치는 세르네오의 목소리에 남자는 기겁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갑작스런 세르네오의 변화에 디엔이 놀란 듯이 엄마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드 역시 여태껏 본 적 없는 세르네오의 모습에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다. 또한 드래곤의 출현에 놀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디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새하얀 팩스 종이에 머물렀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을까? 디엔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에게 읽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 팩스를 받아 든 이드와 라미아는 머리를 맞대고 종이 위에 찍힌 검은색의 글자들에 시선을 주었다.
‘캐나다 가디언 중앙 본부에서 각국의 모든 가디언 분들께 급히 전합니다. 캐나다 시각으로 당일-런던과의 시차는 아홉 시간.- 21시 30분경 캐나다의 수도급 도시인 에드먼턴이 블루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생물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20여 분간에 걸친 드래곤의 공격에 옛 원자력 발전소를 비롯한 에드먼턴 전체가 예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뒤늦게 블루 드래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통신을 받고 집결할 수 있는 전투력을 모두 집중하여 에드먼턴으로 향했으나 저희들이 도착한 후 볼 수 있었던 것은 폐허가 되어 버린 에드먼턴의 모습과 세 자리 숫자가 넘지 않는 고통스러워하는 생존자들이 전부였습니다. 갑작스런 블루 드래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지만.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는 블루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한 우려에 각국의 가디언 본부에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각국의 가디언 분들께서는 특별히 경계를 하시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캐나다 가디언 충 본부 본부장 멕켄리 하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