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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21화


콰콰콰쾅
쿠쿠쿠쿠
투투투투
투타타타
이드는 한 번씩 들려 오는 폭음에 사방의 공기가 급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 지역이 바로 코앞인 만큼 포탄을 들고, 또는 여러 가지 장비를 옮기느라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전투가 한창인 이곳을 마치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한가하게 지나가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나서서 제재를 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의 허리에 걸린 일라이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라이져를 곁눈질하고는 둘을 간단히 가디언이라 판단한 것이다. 좀 더 앞으로 전진하던 이드는 한순간 주위가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신 포격을 해 대던 탱크와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춘 갖가지 포들이 일제히 멈춘 탓이었다. 아마도 몬스터들이 사정거리 뒤로 잠시 물러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주위에 흐르던 긴장감이 완연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한 번씩 물러선 몬스터들은 나름대로 흩어진 무리를 모아 정렬한 뒤 더욱 엄청난 기세로 몰아쳐 오기 때문이다. 주위를 쭉 돌아보던 이드의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들어왔다. 포병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전방의 정중앙, 그곳에 약 10평방미터의 공간을 차지하고 서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세르네오와 틸을 비롯한 가디언 본부의 정예들이었다. 그들 모두 꽤 지친 모습으로 각자의 병기를 들고 있었는데, 특히 세르네오의 그 은빛 채찍과 같은 연검의 경우 마치 또아리를 튼 뱀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이드는 곧장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꽤나 수고들 하셨나 보네요. 특히 틸은 확실히 몸을 푼 모양이네요. 옷이 너덜너덜한 게 말이 아닌 걸 보면 말이에요.”

후방에서 느닷없이 들려 오는 이드의 장난스런 외침에 전방의 몬스터만을 주시하고 있던 가디언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지쳐 보이는 얼굴 위로 반가움이 담긴 미소를 띠웠다.

“여~ 이제 돌아온 거냐? 근데 너희들도 참 재수 없다. 왜 하필 이런 때 오냐? 그저 좀 한산할 때 오면 편하잖아.”

“이봐,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아무튼 잘들 왔네.”

“솜씨 좋은 녀석이 돌아왔으니 나는 좀 쉬어도 되려나? 온몸이 쑤셔서 말이야.”

“쳇, 영감탱이 같은 말을 하고 있구먼. 임마, 네가 쉬긴 뭘 쉬어? 쉬는 건 나같이 이렇게 한 칼 맞은 사람들이 쉬는 거야.”

상당히 정신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몬스터들이 강하게 밀고 들어올까 하는 생각에 긴장감만 높아 가는 시점에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 모두 이것을 기회로 각자의 긴장감을 풀어 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런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세르네오가 다가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적의는 여기저기 찢어진 흔적과 함께 몬스터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머리카락 역시 헝클어져 있었다.

“어서 와. 이곳 상황을 알고 온 거야?”

“응, 내가 가기 전에 디엔한테 연락할 수 있도록 스크롤을 주고 갔었거든.”

“호호호… 그럼, 죽을힘을 다해서 뛰어왔겠네? 네가 디엔을 좀 귀여워했니?”

“뭐, 좀 서두른 감이 있긴 하지. 덕분에 오엘도 그냥 두고 왔거든.”

세르네오와 라미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좌우간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손이 모자라던 참이었거든. 지원이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여기를 지키고 있어야 되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에 라미아는 이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세르네오에게 웃어 보였다.

“호호호호…. 걱정 마. 내가 지원도 필요 없을 정도로 아주 확실하게 저 놈들을 꺾어 줄 테니까 말이야.”

“그래, 그래. 너만 믿을게.”

라미아의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세르네오가 힘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농담으로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 몬스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뒤로 쭉 물러났던 놈들은 뭔가를 하는지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놈들 중에도 녀석들을 지휘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리고 하는 모습을 보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달려들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거든. 뒤로 물러난 김에 완전히 돌아가도록 해 주지.’

슈르르릉

일라이져가 맑은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일라이져 역시 잠시 후 있을 전투를 아는지 매끄럽던 검신이 오늘은 유난히 더 빛나 보였다. 그때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상처가 많은 틸이 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야, 전의를 불태우는 건 좋지만 벌써부터 그럴 필요는 없어. 지금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쉬는 시간이니까 말이야.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틸, 전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아요. 그보다… 지금부터 굉장한 걸 보게 될 테니까. 눈 딴 데로 돌리지 마세요. 아셨죠?”

이드는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인 틸을 내버려 두고 아직도 세르네오와 수다를 떨고 있는 라미아를 불렀다. 그 부름에 라미아는 곧장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 라미아의 옆에는 세르네오도 같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녀가 있는 것에 관계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저 놈들이 다시 달려들 준비가 다 끝나 가는 것 같은데… 네가 먼저 할래?”

이드의 말에 주위에 있던 가디언들이 급히 몬스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라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네, 아무래도 큰 마법으로 먼저 기를 꺾어야. 이드 님이 말한테로 일찌감치 도망을 칠 테니까요. 그럼… 뒤에서 저 좀 잡아 주세요. 작은 마법은 큰 상관이 없지만, 이런 큰 마법은 이드 님의 마나가 없으면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거든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가녀린 어깨 위로 한쪽 손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자 세르네오를 비롯한 가디언들이 뭔가 말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이드는 한 손을 들어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하고는 자신의 모든 혈도를 열어 자신의 마나를 라미아와 마주 닿게 해 주었다. 라미아는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이드의 마나에 가만히 양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양팔을 따라 칙칙한 검푸른 색의 바람 같은 마나가 뭉쳐지며, 대기 중에 떠돌던 모든 마나들을 한꺼번에 밀어내 버렸다.

푸화아아아….

마치 헬기가 착륙할 때처럼 이드와 라미아를 중심으로 땅에 깔려 있던 흙과 먼지들이 퍼져 나갔다. 갑작스런 그런 모습에 주위에 있던 군인들이 또 무슨 일인가 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엔 전투 때 보여 주는 가디언들의 수법들은 돈 주고도 구경 못 할 구경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 달리 가디언들은 두 사람으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에 경악하고 있었다.

“하악… 이, 이건….”

“뭐, 뭐냐.”

“마… 마…. 말도 안 돼.”

세르네오와 틸은 각각 자신들에게 묵직하게 느껴지는 대기의 기운에 떨리는 눈길로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경험이 많아 7서클의 마법도 직접 보긴 했지만 이런 느낌을 주진 않았었다. 더구나 이드와 라미아에게서 느껴지는 이 엄청난 기운은… 하지만 이런 군인들과 가디언, 세르네오와 틸의 놀람은 한쪽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이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중년의 나이를 넘겨 노년에 이르렀거나 가까워진 인물들. 한평생 마법이란 학문만을 연구해 온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이 마나와 저 작은 소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마나의 배열과 여러 가지 현상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자신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광범위한 마나의 배열과 집합. 7서클의 마법 같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연구되어 나온 번외급의 마법에서도 저런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이 사용되려고 하는 것인가. 마법사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결과물이 시동어와 함께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마법사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해 온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저 앞에 버티고 있는 몬스터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한편으론 거부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저 몬스터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었으면 하는 두 가지 생각에 마법사들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라미아의 캐스팅에 의해 배열된 마나가 마법진의 형태를 띠며 그녀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푸른 색으로 물든 두 개의 마법진.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하학적이고 현란한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만들어진 대가로 이드는 오랜만에 맛보는 심한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푸른 두 개의 마법진이 엇갈린 회전을 하고 있던 라미아의 양손이 천천히 허공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저 혼돈에서 불어와 만물의 죽음에 다다르는 절망의 바람이여, 암흑조차 흩어 버리는 희망의 삭풍이여… 지금 여기 그대를 소환하여 부르노니 그대 긴긴 잠에서 깨어나 오만하고도 오만한 그대의 모습을 보여라. 디스파일 스토미아!”

시동어가 일어나는 순간 바람이 멎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던 바람도, 가만히 흐르던 바람도, 모든 바람이 멎어 버렸다. 대신 저 앞. 1킬로미터나 떨어진 그곳에서 작게 보이는 검은 회오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군인들 중 몇몇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거나 비웃음을 날렸다. 그것은 몇 명의 가디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창하던 라미아의 캐스팅 내용과는 달리 볼품없는 회오리에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깨어나라. 절망의 지배자여.”

쿠아아아…. 크아아아아아…..

비웃던 모습 그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저앉아 버렸다. 라미아의 말과 함께 그 작던 회오리바람이 마치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것이었다. 뿐인가. 검은 회오리 속으로는 갖가지 괴기스런 모습을 한 목 없는 괴물들이 너울거리며 회오리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저 지옥의 악마들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심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거기다 더 두려운 것은 직경 400미터짜리 괴물 같은 회오리가 일어나는 데도 그 회오리 주위나 이곳에는 여전히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시금 라미아의 목소리가 너무도 조용하고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그대 절망을 지배하는 자여. 내 앞의 적을 그 절망으로 물들이고, 그 죽음의 공포에 도취되게 하라. 가라. 디스파일 스토미아!”

끄아아아아아아악…..

라미아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놀랍게도 검은 회오리로부터 비명성이 울렸다. 저 깊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한 그런 비명성이었다. 그 소리를 유지한 채 검은 회오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몬스터들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자신들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닌데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떠는 군인들이 몇몇 나왔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예민함을 넘어선 마법사들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는 두 눈이 찢어지도록 치뜨고서 검은 회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너무도 조용한 대지로 몬스터들의 고통에 가득 찬 비명성과 도망치기 위해 움직이는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쿠아아아악…. 끼에에에엑…..

검은 회오리는 천천히 전진했다. 여전히 아무런 바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회오리 근처로 조금만 다가가는 몬스터는 회오리를 따라 돌던 괴물의 아가리에 물려 회오리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또한 워낙 수가 많아 쉽게 움직이거나 피하지 못한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회오리에서 들려오는 비명성은 더욱 거칠어졌다. 간간이 회오리 밖으로 뛰어나오는 찢어진 몬스터의 조각에 몬스터들은 더욱더 살기 위해 처절히 발버둥 쳤다.

꾸아아아아아악…..

느릿느릿 한참을 전진한 회오리는 결국 몬스터들의 한 중간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금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절망의 지배자. 끝없는 절망을 모으는 자. 이제 돌아가 그대가 섭취한 절망을 즐겨라…..”

꾸어어어어억…..

다시 한 번의 비명성과 함께 검은 회오리는 천천히 그 크기를 줄여갔다. 마지막, 처음 등장할 때의 크기를 보이던 회오리는 한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몬스터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기 바쁘건만, 군인들과 가디언들은 계속해서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에 모아져 있었다. 바로 검은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였다. 그곳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망가는 몬스터는 물론이고, 포탄에 맞아 죽은 몬스터와 바위, 나무, 잡초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움찔하며 불어오는 바람을 피했다. 이드는 마법이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라미아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어 깊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에 진기를 돌렸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허탈감이 채워져 나갔다. 방금 전 시전 된 디스파일 스토미아라는 마법은 라미아가 시전 했지만, 들어가는 마나만은 이드의 것이었다. 덕분에 라미아는 아직 쌩쌩하기 그지없었다. 이드는 다시 진기가 보충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겠지. 틸!”

“… 으응? 왜, 왜 부르냐?”

저 싸움 좋아하는 틸이 디스파일 스토미아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하기사 자신도 알고는 있을 뿐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놀랐지만 말이다.

“잘 보고 있어요.”

말을 마친 이드의 몸이 쭉 늘어나는 듯한 모습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뇌령전궁보의 보법이었다. 순식간에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줄인 이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우연인지, 이드의 의도인지 이드가 멈추어 선 곳은 디스파일 스토미아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바로 그곳이었다. 몬스터들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순간 사라져 버린 동족들과 자신들을 억압하던 공포에서 이제 막 벗어난 것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정신을 차리고 주위 몬스터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몇몇 눈에 띄는 녀석들이 있었다. 특이하게 은색의 외뿔이 머리에 나 있는 오우거와 만년 고목처럼 거대한 몸을 가지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뱀의 모습인 바질리스크와 소 서너 마리를 합쳐 놓은 크기를 가진 독수리의 몸에 사람 여성의 상체를 가진 하피가 그들이었다. 그 셋은 몬스터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힐끔힐끔 이드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전 생각지도 못한 일로 2천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한순간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적군으로부터 한 명이 걸어 나왔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드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마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들어라!!!”

그 한마디가 몬스터들의 괴성을 내리눌렀다.

“이 이상 그대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이 자리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세 마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중 바질리스크가 몬스터들을 진정시키던 것을 멈추고서 이드를 바라보며 쉭쉭거렸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텔레파시였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머릿속으로 가녀린 듯 하면서도 색기가 감도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말은 잘하는군요. 어째서 우리들이 물러나야 하나요. 방금 전의 그 마법으로 많은 동료들을 잃기는 했지만, 우린 이길 수 있지요.’

“흥, 너희 정도는 나 혼자서도 처리가 가능하다. 더구나 아까와 같이 절망의 지배자가 온다면 너희들이 막을 수 있겠느냐?”

‘…. 우린 쉽게 물러서지 않아요. 절대 물러서지 않아요. 인간들은 우리의 적.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여야 하는 적이지요. 그대 역시 그 죽어야 할 자 가운데 하나이군요.’

이드의 말에 대답하는 바질리스크의 말 속에는 진한 살기가 가득했다. 도대체 저들이 왜 인간들에게 이리 강한 살기를 보일까? 의아해하는 이드의 눈에 바질리스크의 고개가 살짝 숙여지는 것이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일라이져의 검신을 어루만졌다. 그래이드론의 기억에 따르면 바질리스크의 무기는 눈. 그것도 이마 가운데 붙어 있는 눈이다. 그 눈으로 바질리스크는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 바질리스크의 약점도 바로 눈이다. 이마 가운데 있는 눈을 찌르면 놈은 죽는다. 하지만 그 눈을 덮고 있는 곳의 눈꺼풀이 보통 두껍고 강한 것이 아니라 바질리스크가 눈을 뜰 때 공격하는 방법뿐이라고 했었다.

“흥, 날 돌로 만들려는 것인가? 하지만 이마 가운데 있는 네 눈이 열리는 순간이 네가 죽는 순간이다.”

쉬이익… 쉬이익…

이드의 자신만만한 말에 바질리스크가 고개를 들며 쉭쉭거렸다.

‘그대는 나의 능력이자, 약점을 아는군요. 지금까지 그런 인간은 없었는데… 하지만 저희들은 물러서지 않아요. 인간들이 이상한 물건을 사용하지만, 저희들은 이길 수 있지요. 인간들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

확실히 그랬다. 몬스터의 숫자가 비록 줄긴 했지만, 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포격만 멈추면 군대는 바로 쓸어 버릴 수 있다. 바질리스크의 경우 이마의 눈만 뜨고 있는 것으로도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이드와 라미아가 없을 경우에 말이다.

“나는 너희들의 희생도, 인간의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약하지도 않다. 그러니 돌아가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인간에게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해 주겠다.”

‘방금 전의 마법은 당신의 것인가요?’

“아니, 하지만 반은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지.”

‘… 인간은 약하지요. 저희들을 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인간들을 보았지만, 저희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지요. 하지만… 당신 같은 자도 있군요. 좋습니다. 당신의 강함을 보지요. 당신이 방금 전 마법과 같이 강하다면, 저희들을 물러갈 것입니다.’

바질리스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우거가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전체적인 모습은 보통의 오우거와 비슷하게 생겨 있었다. 하지만 놈의 머리에 나 있는 은색의 뿔이 달랐고, 놈의 손에 들린 길다란 메이스가 또 달랐다. 보통의 오우거는 나무 둥치나 돌덩이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메이스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보통 물건은 아니군. 이런 몬스터들이 몬스터를 끌고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그 사이 오우거는 이드와 3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놈은 언제든 덤비겠다는 뜻인지 이드를 죽이겠다는 뜻인지 고개를 꺾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쿠오오오오옹…..

“…. 마치 드래곤의 로어 같은데…”

이드는 대기를 떨어 울리는 오우거의 외침에 일라이져를 바로 잡았다. 확실히 뭔가 다를 줄은 알았지만, 이런 드래곤 로어 같은 것까지 쓸 줄이야. 물론 그 위력은 천지차이다. 천마후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오우거의 외침에 시끄럽던 몬스터들이 조용해져 버렸다. 대신, 지금까지 조용하기만 했던 군인들과 가디언들 쪽에서 술렁이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오우거의 울음은 엄청난 힘과 투기를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듣는다면 도망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그런 힘을 말이다. 드래곤의 외침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꼼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드래곤 피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드래곤 로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 어떤 정도인지… 볼까?”

이드의 말과 함께 일라이져가 힘 있게 휘둘렸다. 무극검강의 일식으로 검강이 똑바로 서서 오우거에게 날아들었다.

꾸오오옹

오우거도 이드가 날린 검강을 본 모양인지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치더니 손에 쥐고 있던 메이스로 그대로 자신의 앞으로 휘둘러 버리는 것이다. 보통의 무기로는 막을 수 없는 검강을. 하지만 앞서 이드가 짐작했던 대로 메이스는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다. 휘둘러짐과 동시에 메이스 주위로 황금색 번개가 일어나며 날아오는 무극검강을 그대로 깨부숴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오우거가 메이스를 휘두르는 속도 또한 엄청나게 빨랐다. 마치 소드 마스터가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이건 도저히 오우거로 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너한테 내 실력을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해선 이 녀석을 빨리 이겨야겠지?”

쉬이익… 쉬이익….

쉭쉭거리는 바질리스크의 소리에 가만히 서 있던 오우거가 그 묵직한 몸을 이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헌데 그 속도가 사뭇 빠른 것이 보통 오우거의 몇 배는 되어 보였다. 보통의 오우거도 그 크기 때문에 성인 남자가 뛰는 속도보다 빠른데 말이다. 덕분에 오우거는 마치 신법을 시전 한 것처럼 이드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이드도 그런 오우거의 모습에 마주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라이져가 수평으로 누웠다.

“무형일절(無形一切)!”

무형일절이 앞으로 쏘아져 나감과 동시에 이드는 뒤로 가던 속도를 순간적으로 낮추며 다시 일라이져가 앞으로 뻗어 나갔다.

“무형기류(無形氣類)! 무형대천강(無形大天剛)!!”

은빛의 안개와 같은 무형기류 뒤쪽으로 둥근 원통형의 검강이 응축된 강력한 무형대천강이 쏘아져 나갔다. 무형일절을 막고, 무형기류에 신경을 쓴다면 그대로 무형대천강에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 것이다. 이어서 이드는 곧바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가 평범한 오우거라면 무형일절이나 무형기류로 끝낼 수 있겠지만… 지금 앞으로 나와 있는 녀석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은백색으로 빛나던 일라이져의 검신은 어느새 핏빛 붉은색으로 물들어 언제든 검강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오우거는 무형일절마저 그 무식한 메이스로 휘둘러 깨 버렸다. 얼마나 쉽게 깨 버리는지 무형일절을 날린 이드가 다 허탈할 지경이었다. 분명 저 메이스에 무슨 장난질이 되어 있거나, 저 오우거에 뭐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번엔 오우거가 손에 든 메이스로 허공에 엑스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개와 같은 무형이류를 달리 상대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드는 다음 순간 일라이져를 휘두르려던 것을 멈추고 그냥 땅에 내려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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