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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24화


똑똑똑…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들려온 가벼운 노크 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은 나무로 짜여져 자연스런 분위기를 내는 문 쪽으로 돌려졌다. 그 소리에 침대에 파묻히듯 엎드려 있던 라미아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가 무슨 이유로 찾아온지는 몰라도 남자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뭐, 여성이 찾아와도 보기 좋지 않다는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네, 누구세요.”

“잠깐… 시, 실례 좀 해도 될까?”

나무 문을 넘어 굵직하지만 뭔가 망설이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가 이드들의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언뜻 듣기에 여관 내에서 들어본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 제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련을 하고 있는 용병들 중 한 사람인 것 같은데요.”

잠시 목소리의 주인을 생각하듯 뜸을 들이던 오엘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 주었다. 며칠 동안 검을 나눈 사이인 만큼 얼굴과 목소리는 외우고 있는 오엘이었던 것이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네, 괜찮아요. 문은 열려 있으니까 그냥 들어오세요.”

이드의 대답이 떨어지자 나무 문의 손잡이가 찰칵 소리를 내고 돌려지며 방문이 열렸다. 천천히 방 안과 복도 사이의 벽을 허물어 가는 문 사이로 제법 넓은 어깨에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어딘가 묵직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세 사람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운동하기에 좋아 보이는 가벼운 상의와 하의를 걸친 그는 방 안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모이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잠시 움찔하며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미남 미녀 세 사람의 눈길을 한 번에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원래의 그 큰 모습을 회복하고는 곧바로 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미아와 이드에게는 전혀 시선이 머물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한 반응이기도 했다. 라미아와 이드, 특히 라미아의 미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몇 번을 봤던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하게 하는 그런 미모인데, 그런 라미아와 이드를 깨끗이 무시하고 오엘에게 시선을 두다니 말이다. 만약 이 자리에 눈치 빠르고 말 많은 제이나노가 있었다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심미안을 가지신 모양이죠?’라고 했을지도…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다름이 아니라 대련을 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괜찮겠나?”

다듬어지지 않은 뭉툭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듯한 그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들어선 남자의 목표가 자신들이 아닌 때문이었다. 오엘은 남자의 말에 의자 옆에 세워 두었던 소호검을 바라보다 이드와 라미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내려가서 대련을 했으면 하는데요. 사숙…”

이곳에 와서 거의 매일 하는 일이 대련인데도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대련을 하겠다는 오엘의 모습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해. 어차피 라미아도 나도 오늘 오후는 여관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오엘의 실력이 얼만큼 늘었는지나 확인해 보지 뭐.”

“내려가죠.”

이드의 말에 오엘은 소호검을 집어 들고서 밖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라미아는 이드를 따라 일어나 앞서 가는 오엘의 뒤를 따랐다. 여관의 식당엔 아직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할 일을 읽어 버린 용병들이었고, 그 외에 마을의 남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계로 인해 공간이 한정되어 버린 너비스라는 마을 안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중 제일 손꼽히는 곳이 바로 이곳 용병들이 가장 많이 머물고 있는 ‘만남이 흐르는 곳’이다. 특히 오엘이 오고서부터는 하루도 끊이지 않는 화려한 대련으로 인해 구경꾼까지 끊이지 않아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남이 흐르는 곳’의 수입이 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도 손님들로부터 루칼트가 돈을 받는 모습을 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대련을 청한 남자를 앞장세운 채 오엘과 이드, 라미아가 계단을 내려오자 식당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휘익~ 좋아. 또 시작이구만.”

“야, 루칼트. 돈 받아.”

“나는 오늘도 저 아가씨한테 건다. 오엘 양 오늘도 잘 부탁해요.”

여관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런 목소리는 여관 밖, 그러니까 항상 오엘이 대련을 하는 여관 뒤쪽 공터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대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공터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드는 지금의 이런 상황에 주위의 사람들이나 오엘이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이드님, 이건 뭔가 무투회 같지 않아요? 거기다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게…”

“아무래도 그렇지? 특히, 저 루칼트는 오엘과 함께 그런 분위기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작은 바구니와 종이, 펜을 든 루칼트가 사람들로부터 내기 돈을 챙겨 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오엘과 남자의 뒤를 따라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여관 뒤쪽 공터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공터 주위는 그야말로 구경꾼들로 바글대고 있었다. 특히나 공터의 한쪽은 아이들과 여성들로 꽉 차 있는 모습이 이 대련이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거기다 구경하고 있는 여성들 중 일부는 ‘오엘 파이팅’이라고 적힌 종이까지 들고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너비스 마을의 여성들 사이에 오엘의 인기가 상당하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광경이지?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던 루칼트가 내기 돈을 모두 챙겼는지 이드와 라미아에게 슬그머니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표정은 방금 전까지 요리를 들고 다니던 여관 주인의 표정에서 도박장의 도박사와 같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용병에 여관 주인, 요리사, 도박사까지. 참, 여러 가지 직업에 그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루칼트였다.

“저희들이 없을 때 항상 이러고 노는 거예요?”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너비스에서 이것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어디 있겠어? 자연히 사람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거지.”

루칼트는 라미아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는 두 사람 앞으로 사람들이 내기 돈이 담긴 바구니를 떡 하니 내밀었다. 바구니 안에는 꽤나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고액권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작은 액수의 지폐와 동전들뿐이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내기로 돈을 따겠다는 것보다는 이런 가벼운 내기로 좀 더 흥을 돋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돈을 딴다고 해도 너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얼마나 쓸 수 있을지가 더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얼마나 걸 거야?”

누가 이길지 내기 돈을 걸라는 말이다. 당연히 내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루칼트의 말에 별로 거절할 생각이 없었는지 라미아는 슬쩍 대련 준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꽤나 고액권의 지폐 한 장을 꺼내 바구니 안에 집어넣으며 오엘을 지명했다. 루칼트는 꽤나 오랜만에 들어온 고액권인 때문인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라미아의 이름과 걸린 돈을 장부에 기입하고는 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넨 안 하나? 아니면,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대로 이쁜 마누라가 건 걸로 만족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가요.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진 대련이라면서… 사람들이 상당히 많네요. 좋은 구경도 며칠 동안 계속되면 지루해질 텐데…”

이드는 루칼트의 말과 함께 자신의 팔을 안아 오는 라미아의 모습에 농담 반 진담 반인 루칼트의 놀림 수를 간단히 받아넘기며 물었다. 하지만 내심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저번 라미아에게서 아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그런 이드의 바람이 통한 건지 루칼트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것도 모두가 들을 만한 내용이 안 되는 말을 할 때 말이다.

“크큭… 그게 다~ 이유가 있지. 사실은 말이야….”

은근히 목소리를 줄이며 흥미를 돋우는 루칼트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음침한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루칼트의 모습에서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을 부수며 그 사이를 비집고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리의 진원지를 날카롭게 쏘아보아 주었다.

“야, 루칼트, 심판 봐야 할 거…. 아…. 냐… 왜, 왜 그래?”

기세 좋게 루칼트의 이름을 부르던 황소 같은 덩치를 자랑하던 용병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세 쌍의 싸늘한 눈길이 가지는 압력 때문이었다. 특히 그중 바라만 보아도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진 라미아의 눈길이 가장 두려운 그였다. 남들보다 몇 배나 아름다운 그녀인 만큼 그녀의 미움을 사는 것은 몇 배나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저런 싸늘한 눈길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팩 돌리더니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 황소만한 몸으로 가볍게… 말이다. 물론 주위에서는 그 모습에 가.벼.운. 마음으로 온몸에 닭살을 생성시켰지만 말이다. 그런 친구의 행동에 속에서 올라오려는 무언가를 짓누른 용병은 이제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주저앉은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친구가 못다 한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루칼트 네가 항상 심판을 봤으니까. 빨리 와서 시작해라. 라고 말하려고 했었던 거 같은데. 너 심판 안 볼 거냐?”

그 말에 어깨를 떨구고 있던 황소 덩치의 용병이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어리어 있었고, 순간 모든 사람들은 그의 눈을 피해 얼굴을 피해 버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속이 거북해졌다고 할까. 루칼트는 애써 그 모습을 피해서 한쪽에 서 있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아무나 해. 그냥 치고 박고 싸우는 걸 가지고 무슨 심판이야? 그냥 시작 신호만 올려 주면 되는 걸 가지고… 아무나 해. 아무나!”

그의 말에 잠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제일 처음 말을 꺼내서 못 볼 꼴을 보이고 있는 용병에게 심판의 자격을 부여했고, 그의 시작 신호에 맞추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오엘과 용병 남자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차앙…

“그런데 아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던 거였어요?”

척 보기에도 쉽게 결말이 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에 라미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루칼트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가 하려다 못한 말이 뭔지 궁금했던 것이다. 루칼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슬쩍 몸을 뺐다. 이드와 라미아 역시 그런 루칼트를 따라 원래 있던 자리에서 몸을 뺐다.

“흠흠… 사실은 말이야. 이 대련에 애정 문제가 걸려 있거든? 사람이란 게 싸움 구경, 불구경도 좋아하지만 그만큼 남의 애정사에 관한 것도 관심이 많다는 말씀이야. 그런데 그 좋은 구경 거리 중에 두 가지나 걸려 있으니… 관심을 쉽게 끊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

이드와 라미아는 대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갑작스런 애정 문제에 서로를 돌아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애정 문제?!?!?”

헌데 그 목소리가 조금 컸던지 주위 사람 몇몇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고, 루칼트는 급히 두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쉿! 큰 소리 내지 마. 솔직히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거든. 자신들에 대한 소문이 났다는 것도, 또 어떤 관계로 보인다는 것도… 괜히 본인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 없다구.”

확실히 그랬다. 그런 좋은 구경거리를 한 번의 실수로 놓칠 수는 없지. 이드와 라미아는 딱 붙어 서서는 몸까지 슬그머니 숙이며 마치 음모자 마냥 사악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허기야 그렇죠. 그럼 몇 명이나 알고 있는 거예요? 루칼트가 알고 있다면, 용병들은 다 알고 있는 건가?”

“어이, 그 말은 꼭 내가 입이 가볍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리고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 글쎄. 나도 정확한 숫자는 잘 몰라. 다만 본인들과 내용을 잘 모르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이드는 그의 대답에 허탈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동안 본인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서로를 바라볼 때 눈을 감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정도로 둔탱이란 말인가. 거기다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면서 좀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구경만 하다니… 솔직히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듣고 있는 자신도 문제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건지. 좌우가 돕건 돕지 않건 간에 이 정도 되면 어떤 둔하디 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둔탱이 커플이 누구예요?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 있겠죠?”

라미아는 오엘과 용병이 한참 접전 중인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있지. 그런데 누군지 밝히기 전에 해 둘 말이 있는데… 너희들이 그 둘을 좀 도와줬으면 해서 말이야. 협조해 줄 거지?”

“… 그냥 구경만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갑작스레 도움을 청하는 루칼트의 이야기에 이드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가만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말이야. 어떻게든 상황에 변화가 있어야 지켜보는 우리도 좀 더 흥미진진하게 구경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그 두 사람 사이가 발전할 가망성이 전혀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자연히 구경하는 우리가 좀 나설 수밖에. 안 그래? 그리고 우리가 도와서 한 커플이 잘되면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어?”

사악하다. 재미를 위해서라니. 그래도 도와주겠다니 다행이다. 좀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둘을 갈라놓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 해도 그 둔탱이 커플에겐 천운인 것이다. 이드는 처음 루칼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라고 생각한 것을 내심 미안해하며 루칼트에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자신과 라미아가 그 커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해낼 능력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애정 문제에 자신과 리마아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뭔데요? 참, 그전에 우선 그 문제의 커플이 누군지부터 말해 줘요.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뭐… 보시다시피 지금도 둘이 같이 있는데… 너희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이드는 자신의 재촉에 루칼트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자 그 손끝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이드와 라미아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채채챙… 차캉…

“신연흘(晨演訖)!!”

오엘은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대검을 쳐 내며 정확하고 힘 있게 하나하나의 초식을 전개해 나갔다. 상대는 대련을 시작하고서부터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꼭 검을 나누었던 상대로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자신 역시 상대를 잘 알고 있다는 뜻도 되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조금의 실수라도 보이면 그것이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식은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힘이 있었다. 또 이 용병을 상대하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모습의 검법이 가장 잘 들어맞는다. 상대의 검법과 검 실력을 보아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기 때문에 잔재주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차분하게 상대와 검을 섞어가던 오엘은 소호를 휘두르다 한순간 급히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 나쁜 서늘한 기운이 자신의 등골을 타고 흘렀던 때문이었다. 잠깐의 멈칫거림이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멈칫거림으로 인해 공격의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가 버렸다.

‘칫, 갑자기 왜 이러지? 주위에 변태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누가 내 흉을 보나?’

오엘은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자신을 멈칫거리게 만든 상대를 향해 가볍게 응징을 다짐하며 다시금 소호를 들어 방어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오…. 오, 오엘… 오엘이!!!”

정확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오엘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드와 라미아는 뻣뻣한 고개를 겨우 돌려 루칼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그런 메시지가 한가득 새겨져 있었다. 요즘 넉넉히 여유를 가지고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긴 했지만 누군가와 사귄다든가 하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호,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오엘이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는데…”

“나도 그녀가 누군가와 사귄다고는…”

이드와 라미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견을 내놓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 그녀의 모습을 볼 때 너비스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의 일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정말 저 오엘이 누군가와 사귄단 말이예요?”

마치 못 들을 걸 들은 사람 마냥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며 루칼트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쩝. 이거 말이… 아니, 뜻이 조금 잘못 전달된 모양인 것 같군. 만약 둘이 사귀는 거라면 뭐 하러 우리가 옆에서 돕겠다고 나서겠냐? 한쪽은 덤덤한 반면, 다른 한쪽이 열을 올리고 있으니까 도와주자는 거지. 이런 걸 짝사랑이라고 하지. 참고로 아무것도 모르는 쪽은 저 예쁜 전직 용병 아가씨고, 열을 올리는 건 저 무뚝뚝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무뚝뚝한 쑥맥 중의 쑥맥인 켈더크지.”

“……”

이드는 그 말에 라미아를 슬쩍 돌아보았다. 어째 자신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좀 다른 내용이다. 설명하는 쪽은 짝사랑. 설명을 듣는 쪽은 둔탱이에 쑥맥이라 전혀 진전이 없는 한 쌍의 짝. 하지만 분명히 자신들은 설명을 똑바로 들었었다. 그럼…

“당신 설명이 틀린 거잖아!!”

“아. 하. 하. 하… 그런가? 에이, 그런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고. 어쨌든 도와줄 거지?”

이드와 라미아는 루칼트의 말에 뭐라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서 돕겠지만, 잘 아는 사람. 더구나 오엘이 좋아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나서기란 왠지 불편했다. 더구나 오엘의 마음도 모르지 않는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상대편의 마음을 강요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물론 오엘이 조금이라도 상대를 좋아하는 기색이 있었다면 두 발 벗고 나설 용의가 있지만 말이다.

“그게… 좀… 오엘에 대한 거라면 나서기가 조심스러운데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그녀의 사숙이잖아요. 그런데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요?”

“뭐, 별거 아니야. 단지 오엘 양이 켈더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 관심이 없다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것과 평소 좋아하는 취미와 취향, 음식 종류나 스타일 등등을 알아내서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게 어떻게 별거 아닌 겁니까?”

오엘에 대한 모든 걸 다 하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뭘 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루칼트들로서는 또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이드를 사숙으로 모시며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용병으로 활동할 때는 얼음 공주로 불렸을 만큼 날카로운 오엘이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취미가 어쩌니 취향이 어떠니 묻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니, 묻더라도 답을 받아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좀 부탁하자. 네가 저 켈더크란 놈을 몰라서 그러는데, 저 자식 아직 여자하고 연애 비슷한 것도 해 본 적 없는 놈이야. 그만큼 여자 문제에 있어서 깨끗한 백지와도 같은 놈이지. 더구나 헤프게 돈 쓰는 것도 아니고, 차분하고 계획성 있는 성격에 아무튼 대단한 놈이야. 지금까지 용병 일 한 것도 다 모아 놨을걸? 단지 좀 무뚝뚝하고 표정 없는 게 흠이긴 한데… 저 전직 용병 아가씨 앞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아무 문제없지. 암! 저런 신랑감 구하기 힘들다. 너.”

구경거리보다는 친구 장가보내고 싶어서 저러는 걸 거다. 중매쟁이 마냥 켈더크의 장점을 늘어놓는 걸 보면 말이다.

“쩝… 확실히… 그 말대로라면 상당히 좋은 사람이긴 하네요.”

“당연하지.”

“하지만 역시 그 부탁을 들어 드리진 못할 것 같네요. 대신 오엘에게 켈더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한번 슬쩍 찔러볼게요. 만약 오엘이 생각이 있는 거라면…. 그때 도와드릴게요.”

루칼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드의 대답에 켈더크와 오엘을 이어주긴 틀렸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조금이라도 오엘이 켈더크 녀석에게 관심 있는 반응을 보였다면, 일을 벌써 한참은 진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드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데…

‘휴~ 이놈아. 왜 하필이면 골라도 드센 전직 용병 아가씨를 고르냐… 이쁘긴 이쁘지만, 상대가 웬만해야 우리들이 도와주지. 쯧,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근데, 이번 기회 놓치면 저놈 저거 평생 장가 못 가는 거 아냐?’

루칼트는 두 사람 사이가 절대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이라도 하듯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는 친구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불쌍한 친구는 빼곡이 밀려드는 오엘의 검격에 오늘의 첫 패배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엘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과 여성진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칼트는 그 모습이 꼭 오엘에게 차이는 친구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와~ 오엘. 잘했어요. 루칼트, 오엘이 이겼으니까 제게 돌아오는 게 얼마나 되죠? 제가 제일 많이 걸었던 것 같은데…”

두 손을 들고 팔짝거리며 좋아하는 라미아의 말에 루칼트는 바구니에 들어 있던 돈을 한 움큼 쥐어서는 라미아에게 툭 내밀었다. 뒤이어 몇 번의 대련이 더 벌어졌다. 오엘과 대련한 용병들도 있고, 자신들끼리 검을 나누는 용병들도 있었다. 중간엔 오엘과 라미아의 애원에 이드가 직접 나서서 실력 발휘를 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 속에 대련은 몇 시간이나 이어져 저녁때서야 끝이 났다. 하나하나의 대련이 벌어질 때마다 돈을 걸었던 라미아는 대련이 끝났을 때 온전히 원금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그녀를 향해 돈을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라미아는 내기 초반에 땄던 돈이 아까운지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내일 하루 더 쉬자고 이드를 조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내기 도박에 맛을 들이려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 이드였다.

저녁 식사 시간을 일부러 늦게 잡았다. 보통 때보다 한참을 늦은 시간이었다. 식당에는 평소와 다르게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만이 앉아 술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한 이곳 ‘만남이 흐르는 곳’에서는 이상하다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엘에게 켈더크에 대한 것을 물어보기 위한 것으로 루칼트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서 생긴 일이었다. 루칼트는 조금 전 자신이 가져다준 요리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간단 간단히 들려오는 말소리에…

“검초가 상당히 자유로워졌어. 대련하면서 상당히 실력이 는 것 같아.”

“네, 사숙. 혼자 연습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와 검을 나누는 게 더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초식 운용도 빨라지고.”

“그래. 그런데 낮에 찾아와서 세 번이나 싸웠던 사람 있잖아?”

“…. 네. 아마… 켈더크라는 이름이었을 거예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마 한 손 안에 꼽히는 실력자 같았어요. 물론 사숙과 라미아는 빼고요.”

“후훗. 정말 상당한 실력의 강검(强劍)이던걸. 또 듣기로는 상당히 사람도 좋다고 하던데… 오엘이 보기엔 어땠어?”

꿀꺽. 루칼트는 침을 삼키며 좀 더 오엘의 목소리를 크게 듣기 위해서 고개를 쭉 빼서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식당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귀도 이어질 오엘의 말을 기대하며 쫑긋 세워졌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그 말 대로인 듯도 해요. 하지만 대련 상대로만 봐서인지 그런 건 모르겠어요. 별 관심도 없구요.”

크윽, 불쌍한 친구야! 앞으로 쭉 내밀고 있던 루칼트의 몸이 그대로 카운터 위로 퍼질러지고 말았다. 하루에 두세 번씩 만나서 칼을 맞대는 상대인데도, 별 관심이 없다니. 정말 불쌍하고 불쌍한 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루칼트였다.

“쯧… 상대가 불쌍하다. 며칠 동안 검을 나눴으면서도 그렇게 무관심하기는… 그럼, 여태 네가 관심을 가지고 상대해 본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야? 설마 하나도 없는 건 아니겠지? 아, 남자들 중에 말이야.”

“흐응… 남자라면… 두 명이요. 앞으로 더 늘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지낸 사람은 딱 두 명이에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사숙과 런던에 있을 하거스 씨. 그러고 보니 하거스 씨는 큰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으음… 하거스 씨라… 보고 싶냐?”

거기까지 들은 루칼트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끄… 끝났다.”

지금까지 생활하며 만나고 헤어졌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딱 두 명의 남자에게만 관심을 가졌다니. 그렇다면 남자와 사귀게 되더라도 그 두 사람을 제외하면 가망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사숙이며 이미 임자 있는 이드는 자연히 빠지고, 하거스라는 인물이 떠오르는데… 한마디로 오엘이 점찍어 놓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 되고, 켈더크는 애초부터 가망 없는 짓을 했다는 말이다. 이래 가지고선 아무리 주위에서 도와 줘 봐야 무슨 소용인가.

‘불쌍한 놈. 불쌍한 켈더크…’

루칼트는 이 사실을 켈더크 놈에게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라미아는 루칼트 모르게 오엘과 좀 더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돌아와 이드에게 그대로 알려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음흉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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