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25화
다음 날도 이드와 라미아는 카르넬르엘의 레어를 찾기 위해 벤네비스의 산들을 뒤지고 다녔다. 전날 라미아가 하루를 더 쉬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오늘 아침의 분위기에 밀려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여관을 나오고 말았다. 다름 아니라 아침부터 식당을 점거한 채 술을 마셔 대고 있는 켈더크 때문이었다. 그는 전날의 무표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침중하고 무거운 얼굴로 마치 전투를 하듯 술을 마셔 댔고, 그 주위로 어느새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오엘은 그냥 무시하고 공터로 나가 버렸다. 내기 때문에 오늘 쉬려고 했었던 라미아는 그 모습에 대련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도시락을 들고 나와 버린 것이다.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도 카르네르엘의 레어나, 레어를 보호하고 있을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로 드래곤들은 자신의 레어를 숨겨 두지 않는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다. 숨기지 않더라도 어떤 미친놈이나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몽상가가 아닌 이상 레어에 다가올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 쳐들어온다고 해도 드래곤의 상대가 될 존재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몇 경우에는 지금의 카르네르엘과 같이 레어를 숨겨 둔다. 대표적으로 조용히 수면기에 들 때와 유희를 나갈 때 레어의 입구를 마법으로 봉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막아 둔 레어의 입구는 보통 찾기 힘든 것이 아니다. 마법에 있어서는 궁극에 다다라 있는 드래곤들인 만큼 그들이 사용한 마법을 뚫고 레어를 찾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못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드와 라미아의 능력 정도 되면 찾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척 봐서 한 번에 찾을 수는 없다. 대충 레어의 입구 부근에 가야 그곳에 설치된 마법의 존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드와 라미아는 드래곤이 레어로 정할 만큼의 거대한 동굴이 있을 만한 산만 뒤졌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레어를 찾지 못했다. 지금 두 사람이 훑어보고 있는 산을 제외하고는 레어가 있을 법한 산은 두 개. 만약 나머지 산에서도 레어를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이드였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꼭꼭 숨겨 둔 건지… 카르네르엘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레어를 찾지 못한 이드는 그것에까지 은근히 짜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호~! 이드님. 찾은 것 같아요!!!’
라미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이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드는 그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들어 라미아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미아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으로 재차 확인의 말을 건네며 이드의 몸은 어느새 경공을 사용하여 라미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정말이야? 레어가 맞아?’
터터텅!!
빠르게 나아가던 이드의 몸이 한순간 허공 높이 치솟아 올랐다. 순간 이드의 눈 안으로 주위 광경이 한꺼번에 뛰쳐 들어왔다. 그 한쪽으로 라미아의 모습이 잡혔다. 워낙 높이 뛰어오른 때문인지 인형처럼 작게 보이는 라미아는 작은 동산 정도의 아담하고 형세가 오밀조밀한 산의 한쪽 면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크기를 따져 보자면 절대 레어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산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녀석이었다.
“으음… 확실히…”
이드는 라미아 앞으로 내려서며 몸으로 느껴지는 오밀조밀하고 은밀한 마력의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기운이 확실했다. 하지만 레어가 있기에는 산이 너무 작았다. 이드는 다시 한번 산을 바라보았다. 높이 이십여 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산.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산은 공원에나 심어 놓는 잎이 풍성하면서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런 나무들로 둘러싸여 푸르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로 일부러 꾸며 놓은 듯한 옥빛의 잔디가 산 전체를 덮고 있었다. 게다가 이드와 라미아가 서 있는 위치는 산이 두 사람을 감싸 안는 듯한 형상으로 어떤 “입구”라는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정말 무언가 작은 동굴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두 사람의 눈앞엔 그저 옥빛의 산의 일부분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 더불어 그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마력의 기운도 함께 말이다.
“확실히… 뭔가 있긴 해. 하지만… 이런 곳에 레어를 만들기에는 산이 너무 작아! 헤츨링도 이런 데서는 못 살 것 같은 크기잖아.”
그 말에 라미아가 멀뚱이 이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원래 헤츨링 때는 모두 부모와 함께 사는데 레어가 왜 필요해요?”
“…..”
“하. 지. 만 헤츨링이 레어에 산다고 가정하면 확실히 작긴 작겠네요. 호호호…”
이드는 자신의 말에 태클을 걸어오는 라미아에게 한마디 해주려다 그 기세를 느꼈는지 슬그머니 말을 돌리는 모습에 고개를 돌려 마법에 의해 조종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정면의 산을 바라보았다.
“레어가 맞는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레어가 맞다면… 카르네르엘을 만났을 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라미아, 처리해.”
“네, 맡겨 두세요.”
선생님의 호명에 답하는 아이처럼 한쪽 손을 들어 보인 라미아가 앞으로 나섰다.
“인비스티가터 디스맨트!!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듣기 좋은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다. 살짝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린 손 안으로 작은 피구공 정도 크기의 푸른 구가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구를 중심으로 미세한 먼지와 같은 마나의 파장이 파도가 치듯 흘러나와 퍼졌고, 곧이어 그 푸른 구 위로 라미아가 서 있는 산의 정면 모습이 비쳐졌다. 그 영상 위로 무언가 하얀 선이 복잡하게 그어지고, 알 수 없는 수치들이 빼곡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잠시 그 구체 위로 드러난 정보를 바라보던 라미아는 좀 더 산 쪽으로 다가가서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설치된 마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모습을 바라보다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로서는 저런 머리 아픈 작업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봤지만 확실히 화려한 산세다. 하지만 그런 산들 중에 며칠 동안 고생하면서 살펴본 산들이 눈에 들어오자 여간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레어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돌아다닌 산들. 며칠 동안 고생하면서 뱅글뱅글 돌고 돌았던 산들이다. 헌데 정작 레어라고 생각되는 마법적 기운이 느껴진 곳은 집 뒤에 있으면 딱 좋을 만한 동산 정도의 산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산이라니. 심히 허무하고도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이게 레어라면 카르네르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작은 레어를 만들었단 말인가? 레어에서 쉴 때는 몸을 줄여서 쉬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생물로 폴리모프해서 쉬는 건가? 하지만 그건 쉬는 것도 뭐도 아니다. 정말 이 작은 산이 레어라면 카르네르엘과 심각하게 상의를 한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드였다.
“이드님, 조사 끝났어요.”
멍하니 주위 산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곳엔 세 가지의 복합 마법이 걸려 있어요. 상당히 고급의 마법이예요. 하지만 대충 수식과 마나의 연계점을 찾아냈으니까 좀만 힘을 쓰면 해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그럼 빨리 치워 버리고 뭐가 있는지 들어가 보자.”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라미아의 곁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라미아는 기다렸다는 듯 이드의 힘을 끌어오며 복잡한 캐스팅을 거친 후 눈앞의 산을 향해 한쪽 손가락을 뻗었다.
“캔슬레이션 스펠!!”
슈아아아아….
마치 빛에 휩싸인 거미줄 같았다. 시동어와 함께 라미아의 손가락이 빛으로 휘감기더니 그 빛에서 가늘은 은빛을 머금은 마법의 결정체가 실처럼 뿜어져 이드와 라미아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마법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캔슬레이션 스펠은 디스펠과는 확실히 다른 마법이었다. 디스펠이 강제적인 힘으로 상대의 마법을 강제로 억누르고 깨부수는데 반해 캔슬레이션 스펠은 상대 마법이 적용된 수식과 마나의 조합식 등을 알아내어 그 결합 부분을 풀어 버림으로써 마법을 해제시켜 버리는 마법인 것이다. 특히 디스펠은 자신보다 최소 두, 세 단계 낮아야 사용이 가능하지만 이 캔슬레이션 스펠은 같은 수준의 마법사의 마법도 풀어 낼 수 있으며, 디스펠의 사용 시 일어나는 반발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단, 상대 마법사보다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과 컨트롤 능력, 수식을 계산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엄청 잘난 천재만 가능한 마법이란 말이다. 덕분에 오히려 디스펠보다 더 잘 사용되지 않는 마법이기도 하다. 마법을 펼치는 라미아의 모습에서 SF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던 이드는 곧이어 앞에서 느껴지던 마력의 결속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산의 한쪽 부분이 빗속에 씻겨 나가는 수채화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흐릿해져 가는 푸른 영상 너머로 어둠에 싸인 작은 동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점점 뚜렷해져 마침내 깨끗한 모습으로 이드와 라미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은 삼 미터 정도 높이에 세 사람이 나란히 지나가도 비좁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동굴 입구 부분은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 위로 푸른 잔디와 덩굴이 싸고 돌아 동굴 특유의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보다는 아늑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강하게 전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 안쪽으로부터 묘한 마력의 느낌이 풍겨 오는 것이 안쪽에도 무언가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의견을 묻듯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천천히 동굴로 향했다. 동굴은 여느 곳들과 비슷하게 돌로 구성되어 있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루는 동굴은 벽과 바닥이 깨끗한 솜씨로 반들반들하게 깎여져 있었다. 특히 입구 부분에 시작되는 덩굴 형태의 자연스런 조각은 이 동굴의 주인이 얼마나 신경을 써서 다듬어 놓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이 미터 정도를 들어가자 어떤 마법적 장치가 작동한 것인지 천정에 박혀 있는 돌이 빛을 내며 동굴 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꾸며진 동굴도 십여 미터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멈춰야 했다. 그런 두 사람 앞에는 투명한 녹옥(綠玉)을 깎아 세워 놓은 듯한 벽과 같은 것이 동굴 전체를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마법의 기운은 그것이 실제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라미아의 말로는 방어를 위한 마법이 아닌 일종의 문 역할을 하는 마법으로 허락된 존재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도록 하는 그런 마법이라고 했다. 확실히 이런 동굴에 문을 만들기보다는 이런 것을 설치하는 것이 좋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이 없을 때 들어가자니 상당히 신경 쓰이는 것들이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라이저를 통해 무형기류의 일식을 펼쳐 눈앞의 마법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생각해 보니 애초 이곳에 들어서기 위해 입구의 마법을 해제할 때도 캔슬레이션 스펠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때려 부쉈어야 했다. 두 사람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카르네르엘을 만나기 위한 것. 하지만 카르네르엘이 레어에 없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지금 두 사람이 카르네르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를 부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이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레어에 걸려 있을 알람 마법이다. 혹시라도 모를 레어의 침입자를 대비해 드래곤들이 외출 시 펼쳐 놓는 그 마법을 자극하면 카르네르엘은 어디에 있던지 침입자를 응징하기 위해 날아올 거란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잠시 깜빡한 이드와 라미아는 입구의 마법을 제일 무난하고 안전한 방법인 캔슬레이션 스펠로 해제하고 들어와 버렸다. 당연히 알람 마법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한 이드는 이제부터라도 앞을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부수고 볼 작정이었다. 물론, 저 안쪽을 들어갔을 때 이곳이 카르네르엘의 레어가 아니라는 등의 어이없는 사실이 밝혀지면 조금은… 허탈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이상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마법적 장벽이나 문과 같은 방해물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십여 미터를 더 들어선 두 사람은 잘 꾸며진 석조건물의 내부를 연상시키는 듯한 동굴의 심장부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높이 팔 미터에 지름 이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 홀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원형 홀에는 다섯 개에 이르는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아담한 나무 문이 달려 있어서, 원형 홀이라기보다는 왠지 거실과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홀의 바닥에 새파란 잔디가 깔려 있는 흙 바닥이란 것이었다. 이곳까지 들어온 길은 돌 바닥이었으면서 말이다. 잠시 생각도 못한 잔디 바닥에 멈칫 하던 이드와 라미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홀의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보통은 생각지도 못하는 잔디 바닥. 하지만 그것은 딱딱한 홀의 바닥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홀의 천정엔 포도 넝쿨의 조각이 유려하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중 포도 열매를 조각한 부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 그 포도 넝쿨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뜨려져 홀의 벽면으로 뻗어 있었다. 확실히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홀이었다. 하지만 홀 구경을 위해 들어선 것이 아닌 이드와 라미아였기에 각각 양쪽으로 흩어져 방을 뒤져 보기로 하고, 이드는 두 사람이 들어섰던 곳에서 제일 오른쪽에 위치한 방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앞서 설치되어 있던 마법처럼 무언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문은 너무도 쉽고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스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인지 소리도 없이 열려진 나무 문 뒤로는 깨끗하고 간결하게 정리된 주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때문인지 주방엔 다섯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드는 이드였다. 주방엔 더 살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드는 곧바로 다음 문을 열었다. 그곳은 서재였다. 홀과 같은 팔 미터 정도 되는 높이를 가진 방의 네 벽이 모두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도서 삼매경을 즐길 수 있도록 놓여 있는 앉으면 편해 보일 듯한 의자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드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고서 정중앙, 세 번째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미아 역시 이드 옆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카르네르엘의 레어는 맞는 것 같아요. 제가 본 두 개 방은 욕실과 창고였는데… 창고는 확실히 드래곤의 창고더라 구요.”
드래곤의 창고. 대충 상상이 갔다. 보물과 유물에 해당할 물건들과 괴상한 것들이 쌓였겠지.
“이쪽도 마찬가지. 주방과 서재라기 부르기 어색 할 정도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서재 뿐이야.”
“그럼… 이 방만 남은 거네요.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생각해보면 남은… 침실이겠죠?”
그 말과 함께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과연 방은 녹색의 조용한 분위기로 꾸며진 커다란 침실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황당하네… 정말 이런 쪼그만 곳을 레어라고 정했단 말이지?!”
“근데 저희들은 이제 어쩌죠?”
“… 어쩌긴. 애초 생각했던 대로 적당한 곳을 찾아 두드려 부숴 봐야지. 그럼 알아서 나타나겠지.”
하지만 라미아는 그 말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 말에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한쪽 발을 톡톡 굴리며 불만스레 입을 연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봐요. 이 작은 곳에 어디 부술 곳이 있나. 더구나 별로 크지도 않은 산이에요. 괜히 충격을 줬다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구요?”
그럴지도.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때려 부술래도 부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보통의 드래곤 레어라면 그 엄청난 크기에 한참을 때려 부수더라도 부서지는 것은 레어의 일부분으로서 부담이 적은데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작은 곳을 조금만 부수어도 카르네르엘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할 만한 곳이 없을까?
“아, 그럼 저기 저 창고를 노리는 건 어때요? 창고라면 당연히 마법을 걸어 두었을 것 같은데… 확인해 봐야겠네요.”
“아…. 그, 그래…”
이드의 생각을 읽은 듯 빠르게 대답한 라미아는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보지도 않고서 디텍터 마법을 사용하여 주위의 마나 분포와 마법의 작용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았을까. 갑자기 눈을 반짝이던 라미아가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무 말도 없는 라미아의 행동에 이드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침실로 들어서자 라미아는 이미 무언가를 찾는 듯 침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침실은 중앙에 침대가 놓여 있고, 한쪽에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 다였다. 상당히 썰렁한 침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비어 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라미아는 그 비어 있는 공간의 한가운데 서더니 활짝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미소는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 상자를 얻은 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이 바라보고 있는 이드의 모습에 라미아는 한 손에 집중시킨 마력을 바닥으로 내려뜨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이 마력을 받아들여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복잡한 형태를 취하고서 그 안 가득 알 수 없는 기호와 룬 문자를 안고 있는 녹옥빛 문양.
“… 마법진… 이라고?”
“딩동댕. 게다가 이건 쌍방간의 이동을 위한 이동용 마법진이라구요.”
이드는 그 말에 천천히 라미아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이드의 입가로는 라미아와 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럼, 그 말은 이게 현재 카르네르엘이 있는 곳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는 라미아의 얼굴에 자신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확신할 수 없어요. 이 마법진의 형태나 주입되는 마력의 양으로 보면…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거든요.”
라미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한번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드래곤의 작품답게 정교한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들어가는 마력의 양 등을 따져 볼 때 그렇게 멀리까지의 이동은 생각할 수 없다. 최대한 멀리 잡더라도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면 첫날 이드가 카르네르엘을 불렀을 때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이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는 곳에 없다는 말일 수 있다.
“그럼 그곳으로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
라미아의 말 뜻을 이해한 이드가 마법진으로 다가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하지만… 한번쯤 가 봐도 될 것 같은 걸요. 침실에 있는 마법진이잖아요. 분명 어디 중요한 곳과 이어져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그곳을 부수면 카르네르엘이 더 빨리 알 수 있을 거구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이드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라미아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 그는 라미아를 재촉했다.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해가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을 시간이다. 확실히 배가 고픈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지 싶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늦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드였다.
“좋아. 그럼 빨리 움직이자. 저녁 시간에 늦고 싶지는 않거든…”
“핏,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요. 뭐…”
라미아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마법진을 향해 허용량까지 마력을 주입했다. 이 마법진은 별다른 시동어도 필요 없이 필요한 정도의 마력만 넣어 주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마법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충분한 마력으로 배가 부른 마법진은 강렬한 녹옥의 빛을 내뿜어 두 사람의 모습을 삼켜 버렸다.
“흐음… 그럼 어디부터 손을 봐 줘야 할까…. 지금 심정으로는 몽땅 부숴 버리고 싶은데 말이야…”
“이드님, 혼자 독식하시지 마세요. 저도 쌓인 게 있다구요. 설마 이런 데 있을 줄은…. 아우… 정말!!”
이드와 라미아는 각각 분하다는 듯 사방을 돌아보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현재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정말 거대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공동(空洞)의 한가운데였다. 사방이 대충 다듬어 놓은 듯한 암석질로 이루어진 이곳은 천정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발광구를 제외하면 정말 자연 그대로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런 곳이었다. 다만 평평히 다듬어진 바닥과 한쪽 벽면에 뚫려 있는 검은 두 개의 동혈(洞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 외에는 정말 아무런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또,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땅속이거나 다른 거대한 산 속인 것은 짐작이 되었지만, 마치 속을 파내고 입구를 막아 버린 것처럼 이 거대한 동혈에는 밖으로 통하는 길이 전혀 나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이드와 라미아가 이동되어 온 곳이다. 그것도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바로 이 위치로 말이다. 처음 이동되어 왔을 땐 갑자기 보이는 황량한 공간에 어리둥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이런 공간이 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또 자신들이 어디서 이동되어 왔는지를 생각한 두 사람은 곧 한쪽 벽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동굴을 살펴보았다. 두 개의 동굴이 이어진 곳에는 두 개의 커다란 동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엔 쉽게 볼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발하는 보석이라든가, 귀금속, 또는 쉽게 볼 수 없는 유물들과 책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이드와 라미아는 즉석에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니, 다른 답은 없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드래곤의 레어였던 것이다. 처음 두 사람이 들어섰던 그런 어설픈 장소가 아닌 보통의 드래곤이 사용하는 레어. 그렇게 이곳의 존재를 확인한 두 사람은 곧이어 이곳의 위치를 확인했다. 도대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없으니 당연히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의 결과를 본 두 사람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심한 짜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 바로 레어가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벤네비스 산이었던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가 카르네르엘을 찾기 위해 올라서 제일 먼저 조사했던 산. 이곳에 오면서 항상 보게 되는 산. 이미 레어가 없다고 지나쳤던 산. 바로 그 산의 뱃속에 떡하니 레어가 들어앉아 있다니. 카르네르엘을 찾기 위해 며칠을 고생한 두 사람으로서는 허탈하고 허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산에 만들어 놓은 쪼그만 레어, 아니 천연 동굴 저택과 이어진 레어라니. 더구나 입구도 없이 마법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레어라니. 이드와 라미아는 끓어오르는 짜증에 잔을 높이 들어 건배하고는 각자 두 개의 동혈 중 하나씩을 맞아서 들어갔다. 이 넓기만 한 동공을 부숴서는 카르네르엘이 모를 것 같았다. 때문에 보석들이 쌓여 있고, 책들이 쌓여 있고, 여러 가지 보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을 부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콰콰콰쾅….. 퍼퍼퍼펑…..
나란히 뚫려 있던 두 개의 동혈로부터 엄청난 소음과 동시에 뿌연 먼지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음과 뿌연 먼지의 양이 많아질수록 그 크기만 하던 동공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이번 기회를 잡아 카르네르엘을 찾으며 쌓아 왔던 스트레스를 완전히 풀어 버릴 생각인 것 같다.
“크흠… 쿨럭… 소환 실프. 쿨럭…. 이곳의 먼지를… 쿨럭… 가라앉혀 줘.”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사방으로 무형검강결의 다섯 초식을 모두 펼쳐 낸 이드는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에 따끔거리는 목을 감싸고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이렇게까지 먼지가 일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실프에 의해 먼지가 사라지자 실내의 모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발광구는 검강에 닿지 않았는지 멀쩡했고, 덕분에 실내의 모습이 환하게 잘 보였다. 그런 빛 아래로 커다란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실의 사방의 벽은 산 자체의 돌로 깨끗하게 깎여 있었고, 바닥에는 대리석과 같은 반들거리는 돌이 깔려 있었으며,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는 나무와 식물의 조각품들은 석실의 딱딱한 분위기를 미술관에 온 듯 품위 있게 바꾸어 주고 있었다. 뭐, 이렇게 만들기 위해 드워프들이 꽤나 고생했을 것이란 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런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에 있다. 사방이 번쩍거리는 것들로만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원형 석실의 중앙 부분에 하나 가득 보석과 금, 은이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정성 들여 만든 것이 분명한 명품이 확실한 듯한 보석들이 장식되어 걸려 있거나 놓여 있었다. 또 왼쪽으로는 다이아몬드나, 금과 같은 보석류는 아니지만, 쉽게 보기 어려운 보물로 분류되어도 좋을 것 같은 검이나 로드, 갑옷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값어치를 가진 듯 대단해 보였다. 물론, 실제로도 대단할 것이다. 모두 드워프들의 작품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 대단한 것들의 상태는 현재 별로 좋지가 못했다. 방금 전 이드의 무형검강결이 한바탕 휘저어 놓은 결과 덕분이었다. 다섯 초식뿐이지만 극강한 무형검강결의 검강에 벽에 걸려 있던 물건들은 모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심한 것은 산산이 부서져서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물건들도 몇몇 있었다. 물건들뿐만이 아니었다. 석실의 벽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흉측하게 생겨난 강기에 베어진 자국은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상처가 난 것처럼 보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무형검강결의 위력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도 양호한 편에 속한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짜증에 밀려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될 수 있는 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신경을 조금, 아주 조금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다 부숴 버렸다가는 그 뒷감당이 너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보석을 아끼는 드워프가 봤다면 당장에 그 짧은 다리로 이드의 멱살을 잡아 당기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물론, 보석의 주인은 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얏!!! 내 레어를 건드리는 놈이…. 일렉트릭트 캐논!!”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마치 레이저포와 같은 백색의 에너지 포가 날아왔다.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텔레포트를 통해 보물 창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이루어진 마법 공격이었다.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한 순간적인 공격.
“헛!!”
이드는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급히 일어나는 커다란 기운에 급히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에 헛바람을 들이키고는 일라이저를 땅바닥에 꽃아 넣으며 급히 몸을 뛰어 올려 피했다. 보통의 마법 공격이라면 중간에 막거나 검기로 파괴해 버리겠지만, 그 공격이 뇌(雷) 속성을 띠고 있을 때는 우선 피하고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뇌 속성이 가지는 특유의 전도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할 경우 일라이저를 통해 스며든 뇌기를 이드가 직격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뛰어오르면서도 일라이저를 땅에 박아 손에서 놓아 버렸다. 뭐, 직접 맞게 되더라도 이드의 가진 바 능력이, 능력인 만큼 죽진 않지만, 대신 짜릿하고 화끈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사양하고 싶은 이드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추가타를 생각한 이드는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카르에르넬. 나, 이드예요!!!”
“…….”
이드는 천마후의 수법을 실어 급하게 소리쳤다. 순간 카르네르엘도 이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급박하게 마나를 움직이던 움직임을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하지만….
“네가… 네가 어떻게 내 레어에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슬레이닝 컷터!!”
자신의 보물이 부서진 것에 대한 드래곤의 분노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아무리 첫 만남에서 성격이 좋아 보였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우와아아아….”
이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녹색 창에 일라이저를 회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뽑아 올리며 장력을 내쳤다. 워낙 창졸지간에 내친 장력이라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앞에 다가오던 녹색 창을 격추시키기엔 충분했다.
쓔아아악… 콰과과광….
“잠깜만…. 우선 내 말 좀 들어봐요. 듣고 나서…. “
“시끄러. 이야기는 잠시 뒤야. 그전에 우선 몇 대 맞고 시작하자. 디 워터 필리셔!!”
“이잇… 이야기부터 듣고 공격해도 하란 말이예요. 열화인(熱火印)!!”
이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세 줄기의 채찍 같은 물줄기를 향해 열화인을 쳐 냈다. 순간 물과 불의 만남으로 양측의 접촉 지점으로부터 뿌연 수증기가 터져 나왔다.
치이이이이익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 열받을 줄은 몰랐었다. 첫 만남의 인상이 너무 좋았던 탓에 이렇게 화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석은 그냥 두고 이 석실 자체만 손보는 것인데… 하지만 후회란 언제나 일이 벌어진 후에 찾아오는 법.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같이 반격을 하자니,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이 있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잘못으로 화가 났는데, 같이 반격하고 나서서 싸우면 더욱 화내지 않을까.
‘좋아, 우선 오는 대로 피하고 막고 보자.’
하지만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이익….. 좀 맞으란 말이야앗!!! 익스플러젼!”
콰앙!!
이드는 마나가 몰려드는 느낌에 급히 몸을 빼 올리며 정말 화가 난 듯 팔을 휘둘러 대는 카르네르엘의 모습에 난처함을 느꼈다. 자신이 피하고 있으면 화가 좀 삭을 줄 알았다. 헌데 저건 어디로 보나 더 화가 커져 가는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 그녀는 “만남이 흐르는 곳”의 주인으로 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중년이었고, 지금은 십대 소녀의 모습이란 것이 다를 뿐이었다. 좌우간 처음 공격 시작부터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자 그녀는 점점 과격해졌다. 솔직히 처음엔 상대가 이드란 것을 알고 공격을 멈추려고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보석들을 부숴 버린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그건 어떤 드래곤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문에 간단히 몇 대 때려 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드라는 특별한 인연을 자신의 콜렉션을 조금 부쉈다는 이유로 끊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헌데 그 몇 대가 문제였다. 도대체 맞출 수가 있어야 때릴 것이 아닌가. 몇 번을 공격해도 모조리 피하고 막아 버리지 상황에 맞지 않게 불끈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오기가 점점 끓어오름에 따라 카르네르엘이 시전하는 마법이 점점 더 과격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한 번씩 공격하고 피하고 할 때마다 주위에 널린 보석들이 산산조각 나고, 보물들이 파괴되고, 정성 들여 다듬은 듯한 석실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카르네르엘은 이번엔 꼭 맞추겠다고 내심 다짐하며 방금 전에 사용했던 마법보다 좀 더 고위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신의 보석들을 파괴하는 행위란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불쌍한 카르네르엘…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이드와 카르네르엘 두 사람의 동작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마도 더 이상 아까운 보석들이 부서지는 것을 보지 못한 드워프의 신이 보내 준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잠깐. 카르네르엘. 지금 멈추면 이드님이 부숴 버린 보석들을 배상해 줄게요.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이 일로 인해 일어나는 피해는 우리가 책임지지 않을 거예요.”
어느새 석실 입구에 다가온 라미아의 말에 이드와 카르네르엘은 동시에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이드는 보상해 줄 보석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카르네르엘은 얼마나 더 해야 맞출 수 있을지, 또 맞춘다고 해서 뭐가 더 좋아질 것도 없으니 정당히 끝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서 말이다.
“좋아… 그 말 잊지 마.”
카르네르엘은 흩어진 옥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라미아의 다짐을 받았다.
“걱정 마세요. 이.드.님이 부숴 버린 보석은 꼭 배상해 줄게요.”
방실거리는 라미아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카르네르엘은 확답을 듣고도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상을 받겠다고 이드를 밀어붙인 게 아니었다. 그저 장난스럽게 시작한 것이 오기가 생겨 이 지경이 됐을 뿐이었다. 고작 보석 몇 개 가지고 죽자 사자 달려들 정도로 자신은 쪼잔하지 않다. 그리고 때마침 두 사람을 말리는 라미아의 말에 그냥 물러서도 괜찮겠다 싶어 물러선 것이었다. 그런데…. 저 이드의 이름을 강조하는 라미아의 말이 신경에 거슬리는 이유는 뭘까. 카르네르엘은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보석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래도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 뭔가가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털썩.
석실 내부를 바라보던 카르네르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흐윽…. 내 보서어억….. 흐앙….”
그녀가 본 것은 아름다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석실 내부의 모습과 산산이 흩어지고 부서져 있는 수많은 부석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라미아가 강조한 “이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피해의 반 이상이 바로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드는 망연자실해 있는 카르네르엘의 모습이 자신의 탓인 듯했다. 사실 그것이 정답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 주나 생각하며 라미아를 데리고 석실을 나섰다. 카르네르엘의 눈앞에 알짱거려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간 화가 풀린 후에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