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28화
산 속과 숲 속을 달리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고르지 않은 지형에 함정처럼 땅 위로 뻗어 있는 나무뿌리들과 갑자기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줄기줄기 사방으로 뻗쳐 있는 나무 줄기. 이런 상황에서 그 사이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종족은 숲의 사랑을 받는 엘프라는 종족 하나뿐이다. 그리고 유(柳), 유(流), 환(幻)의 묘리(妙理)를 담은 절정의 신법(身法)을 익힌 자뿐이다. 부운귀령보 역시 여러 가지 묘리를 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법들 중 손꼽히는 신법이다.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 주는 듯 산 속을 달리고 있는 이드의 모습은 빨랐고 또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빠르게 달려 나가던 이드의 신형이 한순간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그런 이드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 얼기설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하나의 장면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었다. 나무로 짜여진 그 화면 안에서는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흙 범벅의 소년, 소녀와 두 마리의 트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중 두 아이들은 커다란 나무둥치 아래 넘어져 있었고, 두 마리의 트롤은 그런 아이들을 가지고 놀 듯이 그 앞에서 크르륵거리면서 서 있기만 했다. 그렇게 이드가 바라보고 있을 때 뒤쪽에서부터 투박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루칼트가 도착한 것이었다.
“헥헥… 헥헥… 흐아~ 몬스터를 상대하기 전에 쓰러지는 줄 알았네… 응? 그런데 뭘 보는…”
숨을 가다듬던 루칼트는 이드의 시선을 쫓다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오~”
이때는 좀 전과 상황이 또 달라져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두 아이들 중 갈색 머리를 질끈 동여맨, 나이 또래 조금 외소한 체격의 소년이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 막대를 손에 들고 트롤들 앞에 서서 등 뒤의 소녀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보통 일검(一劍)에 나가떨어지는 초급의 고블린을 보고도 무서워할 나이의 꼬맹이가 두 마리의 트롤 앞에서 떨지도 않고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루칼트는 가벼운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전혀 가망성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소녀를 지키겠다고 저 무시무시한 트롤 앞에 몽둥이를 들고 일어선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녀석… 대단한데…”
“그렇죠?”
이드 역시 루칼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좀 더 상황을 지켜봐도 되겠지?”
“…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드와 루칼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는데도 볼 만하게 돌아가는 상황 전개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만약 두 아이의 부모가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만한 소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엔 아이들의 부모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눈앞에 벌어지는 일보다 더욱 흥미진진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등 뒤로 관중을 둔 상태에서 가만히 위협만 가하던 트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트롤의 육중한 몸이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바위를 땅 위에 던져 놓는 듯한 진동과 굉음이 일었다. 트롤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몽둥이를 들고 있던 소년은 몸이 잠시 굳은 듯하더니 몽둥이를 몸 앞에 바로 세워 잡았다.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기초가 되어 있는데요?”
이드는 조금은 엉성한 그 모습에서 검술의 기초를 수련한 자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럴 거야. 저 녀석… 내가 알기로 페이턴 녀석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었거든. 왜 있잖아. 짝짝이 눈에 레이피어 들고 있는 녀석.”
아! 이드도 알고 있는 용병이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오드아이에 자로 잰 듯한 정확하고 날카로운 검법을 사용하는 남자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의 남자였다. 그는 현재 구르트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구르트가 검술을 가르쳐 달라며 자그마치 한 달 하고도 보름을 쫓아다닌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 배운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검술의 기초를 다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용병들과 마법사들에게 검술과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 마을 아이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허락을 받은 건 구르트뿐이다. 아이들 중에 한 달이 넘게 따라다닐 정도로 끈기 있는 녀석이 구르트뿐이었던 것이다.
“빨리 도망가. 베시. 내가 여기 있으면… 그러면 이 녀석이 널 따라가진 않을 거야. 어서, 베시!”
갑작스레 터져 나온 구르트의 목소리였다. 이드와 루칼트는 그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몽둥이를 들고 소리치는 구르트와 울면서 고개를 흔드는 베시가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용사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았다.
“저놈 저거… 소설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뭐, 그래도 친구 버리고 도망가는 놈보다는 백 배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페이턴 녀석도 그런 용사류의 소설책을 자주 읽더만… 아주 애를 버려 놓은 것 같아서…”
루칼트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때였다.
“차앗!!”
가만히 몽둥이를 들고 있던 구르트가 그 몽둥이를 들고 그대로 트롤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그 모습에 쩝쩝 입맛을 다시던 루칼트는 놀라 혀를 깨물어 버렸고, 가만히 바라보던 이드는 그대로 몸을 날려 현장을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이드가 구르트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트롤이 팔을 휘두르는 게 한 박자 빨랐다. 이드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구르트의 한쪽 팔에서 붉은 핏방울이 튕겨 나오며 한쪽으로 날려가 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강한 충격이었는지 구르트에게선 비명 한마디 새어 나오지 못했다.
“제길. 좀 더 일찍 나오는 건데… 죽어라. 수라섬광단!”
이드는 땅바닥을 구르는 구르트의 모습에 시선을 둔 채 일라이저를 휘둘렀다. 수라섬광단의 일식에 의해 붉게 물든 일라이저의 검봉 끝으로 한 줄기 붉은 강기의 실이 뿜어지며 허공을 날아 하늘거렸다. 그것은 마치 축제 무대를 장식하는 장식품인 양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 강기의 실이 가지는 위력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허공에서 잠시 하늘거리던 강기의 실이 트롤의 목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순간 이드에 의해 강기의 실이 잡아당겨졌고, 그에 따라 급하게 줄어든 강기의 실이 아무런 부담 없이 깨끗하게 트롤의 목을 잘라 버린 것이다. 너무도 깨끗하게 잘려 나간 트롤의 목이었던 덕분에 잘려져 나간 자리에서는 몇 분간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드는 그것을 바라보지도 않고 곧바로 쓰러져 있는 구르트에게 달려갔다. 아직 다른 트롤 한 마리가 남아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뒤이어 뛰쳐나온 루칼트가 그 트롤을 향해 달려든 때문이었다. 이드는 등 뒤로 들리는 트롤의 괴성과 루칼트의 기합 소리를 무시하며 구르트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쯧… 엉망이군.”
트롤에게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구르트의 한쪽 팔은 아주 엉망이었다. 원래 연약한 아이의 팔인데, 거기에 무식한 트롤의 손이 닿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트롤의 손이 직접 닿았던 부분은 완전히 살이 터져 나가 있었고, 그 반대쪽으로는 허연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삐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드는 그 모습에 다시 한번 구경만 하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탓했다. 어쨌든 빨리 손을 써야 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직접적인 상처보다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더 위험할 듯했다. 결론을 내린 이드는 가볍게 손을 놀려 구르트의 팔의 혈도를 봉해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혼혈을 눌러 완전히 구르트를 기절시킨 후 조심스럽게 부러진 뼈를 맞추었다. 그그극 하는 느낌과 함께 기절해 있는 구르트에게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러진 뼈를 맞추는 고통이 기절해 있는 상황에서도 느껴진 모양이었다.
“됐다. 나머지는 라미아가 마법으로 치료하면 완전히 나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알았지?”
“흑… 흐윽…. 네… 흑…”
이드는 눈앞의 베시를 바라보았다. 뼈를 맞추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다가온 베시는 그때부터 구르트를 보며 계속해서 훌쩍이는 것이다.
“헐~ 녀석. 벌써 여자친구 하나는 확실하게 물어 놨구만. 능력도 좋아…”
그 사이 트롤을 쓰러트린 루칼트가 다가와 가볍게 농담을 중얼거렸다. 물론 그런 농담을 알아들을 사람은 이 자리에 이드뿐이지만 말이다. 그런 루칼트의 뒤로 머리에 커다란 칼자국을 가지고 쓰러져 있는 트롤의 모습이 보였다. 이로써 잠시 동안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은 개구쟁이 다섯 명을 모두 찾아낸 것이다. 이드는 기절해 있는 구르트를 훌쩍이는 베시에게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잠시 후 콜린과 토미를 데리고 라미아와 오엘이 도착했고, 곧바로 구르트의 치료가 이루어졌다. 거의 팔의 한쪽 부분이 날아가 버린 그런 상처지만 라미아의 손을 거치면서 깨끗하게 회복되어 버렸다. 아마 깨어나면 자신의 팔이 그렇게 심한 고생을 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트롤에게 얻어맞는 순간 기절해 버린 구르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구르트의 옆에는 베시가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얼마 후 구르트가 깨어나자 일행들은 산을 내려와 다시 마을로 향했다. 호크웨이 역시 무사했다. 걱정하던 아이들 모두 무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들을 찾아 나섰던 용병들은 꽤나 많은 수가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서 산을 내려와야 했다. 용병들이 아이를 데리고서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에선 환호성이 터졌고, 아이들의 입에선 비명성이 터졌다. 이번 장난은 보통 장난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부상을 당한 용병들이 있어서 다섯 명의 개구쟁이는 평소와는 차원이 다른 꾸지람과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 걸맞은 야단과 체벌. 덕분에 아이들은 며칠 동안 얼굴도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얌전해진 다섯의 모습에 너비스의 다섯 말썽쟁이라는 말이 전설이 되려는가 하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며칠도 가지 않아 마을의 한 청년이 오물통을 뒤집어쓰는 것을 시작으로 너비스의 마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너비스의 다섯 말썽쟁이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최강자는 단연 커플로 재탄생한 구르트와 베시 커플이었다.
아이들에 의한 소동이 있은 지도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젠 제법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더 이상 덥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더 이상 시원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 너비스의 위치 특성상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뀌어 가는 계절과는 달리 너비스에서는 별로 바뀌는 것이 없었다. 있다면 옷차림 정도가 다였다. 결계로 보호되고 있는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드는 그렇게 끝나 가는 여름의 끝자락이 남겨진 하늘을 라미아의 무릎베개를 베고서 편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주부터는 대련으로 내기를 하는 것도 질렸는지 다시 이드와 붙어 다니기 시작한 라미아였다. 그리고 그런 라미아의 옆으로는 오엘이 편안히 누워 있었는데, 그녀 스스로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지난주부터 대련을 쉬고 있었다.
“헉헉… 웨, 웬만하면… 으읏… 차앗…. 나도… 쉬고 싶은데 말이야.”
루칼트는 가쁜 숨을 쉬어 가는 중에 겨우 말을 이어가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가공할 속도의 작은 돌멩이들을 피해 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주워온 작은 돌멩이들이었는데, 어떻게 이드의 손에서 던져지는 저 손가락 한마디도 되지 않는 돌멩이들의 기세가 이렇게 사람을 겁먹게 만드는지. 다음엔 좀 더 작은 걸로 준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칼트는 다시 한번 날아오는 돌멩이를 유연한 보법으로 피해 냈다. 현재 그는 신법 수련 중에 있었다. 아이들을 구해 온 한 달 전. 숲에서도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는 이드의 모습이 인상에 남아서, 또 그런 이드의 뒷모습만 보고 달려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신경 쓰였던 루칼트가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이드에게 부탁을 해 왔던 것이다. 원래 이런 무술이나 마법이란 것이 아무에게나 전해 주지 않는 것인데다, 특히 동양 사람들은 이런 쪽으로 까다롭다는 소리를 들어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고민을 많이 하고서 꺼낸 말이었다. 물론 정작 말을 꺼냈을 때는 장난치듯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 무안할 정도로 이드의 승낙은 쉽게 떨어졌다. 이미 그레센의 기사를 가르쳤던 경험과 몇몇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공을 전해 준 이드였기 때문에 루칼트를 가르치는 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시간을 보낼 좋은 일거리가 생겼기에 반기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신법의 연습이 오늘까지 3주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드가 가르치는 신법은 개방의 풍운보. 거기에 더해 내공이 없는 그에게 풍운보의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력의 운용을 위해 전해 준 금강선도. 이 두 가지였다. 처음 2주간은 금강선도의 운용에만 매달려 있었고, 실제 풍운보에 대한 수련은 이제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오늘의 수련은 누구라도 보면 알겠지만 보법의 운용과 회피술에 대한 수련이었다. 이드는 그 수련을 루칼트를 시켜 모아 놓은 작은 돌멩이를 던져 내는 것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후아~ 정말… 조금만… 헥헥… 쉬고 하자.”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루칼트가 이드 쪽을 바라보며 애원하듯 소리쳤다.
“아직 멀었어요. 이 정도에 그렇게 지쳐 버리다니… 체력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만 슬쩍 돌리며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듣는 루칼트로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벌써 두 시간째 이렇게 뛰고 있었다. 이렇게 지치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던가.
“지치는 게… 당연하지. 벌써 두. 시. 간. 째라구. 더구나 장창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체력 문제라니. 말도 안 되지.”
“그럼 내력 운용을 잘못해서 그런 거겠죠. 억울하면 잘 해 봐요.”
“…..”
루칼트는 별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력의 운용이란 게 그리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인가 말이다.
덕분에 저 말에는 항상 말이 막히는 루칼트였다.
“그리고 내력이 안 되니. 우선 체력으로 커버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한계 상황까지 가는 게 좋은 방법이 되죠. 그러니까… 쉬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피이잉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또 하나의 돌멩이가 허공을 갈랐다. 루칼트는 그 소리에 그냥 이걸 맞고 누워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다 결국엔 피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쉬고 싶은 루칼트였고, 그때 그를 구원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님.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될 것 같네요.”
이럴 때면 꼭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라미아였다. 루칼트는 라미아가 이드를 말리면서부터 날아오지 않은 돌멩이에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정말 두 시간 동안 미친 개 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더니 마지막 한 방울의 체력까지 똑 떨어진 느낌이었다.
‘꽤나 잘 버티고 있다. 내력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두 시간씩이나 저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체력은 엄청난 수준인 듯하다.’ 이드는 땅에 누워 숨을 헐떡이는 루칼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신의 얼굴 위에 위치해 있는 라미아의 두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평소 늘 이 정도쯤 되면 자신을 말리는 라미아이긴 하지만 오늘 라미아가 자신을 말리는 멘트가 조금 이상했던 때문이었다. 꼭 다른 할 일이 있으니 이제 그만 멈추라는 뜻으로 들렸던 것이다.
“무슨 할 말 있어?”
“네, 할 말이 있데요.”
그 말에 라미아가 빙긋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의견을 대신 전하는 듯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누운 자세 그대로 멀뚱이 라미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카르네르엘?”
아무래도 할 말 있다고 찾을 사람… 아니, 존재라면 카르네르엘 뿐일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드의 짐작이 틀렸는지 라미아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땡.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이 아니고. 디엔에게 줬던 스크롤을 사용한 것 같아요.”
이드는 그 말에 라미아의 무릎에서 머리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라미아 곁에 누워 있던 오엘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스크롤에 말을 전할 수 있는 기능까지 넣었었어?”
“간단한 말을 전할 수 있도록 제가 약간 손을 봤죠. 그보다 제로와 몬스터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데요.”
이드는 그 말에 눈을 빛냈다. 제로. 제로라면 확인해 볼 사실이 있는 이드와 라미아였다. 그런데 거기다 몬스터에 대한 것까지. 모르긴 몰라도 두 가지 단어를 같이 사용한 걸 보면 뭔가 관계가 있을 텐데… 이드는 여전히 누워 있는 루칼트를 한번 바라본 후 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같이 갈래?”
오엘에겐 아주 반말이 입에 붙어 버린 이드였다. 아마 앞으로도 오엘에 대한 말투는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엘은 이드의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별로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죠?”
“그래.”
“그럼 연락 온 일만 보고 바로 돌아오시겠네요?”
“그렇지.”
“그럼… 전 런던에 가 보고 싶은데요.”
“하거스 씨들을 만나 볼 생각이야?”
“네, 요즘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치열한데, 모두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 알아보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전 런던에 내려 주고 파리에 가시면 될 것 같은데…”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소식을 듣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걱정도 될 만했다. 그러고 보니, 오엘의 집에도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런던에 데려다 주면 집에도 연락을 하겠지.
“좋아. 그럼 돌아올 때 런던 본부로 데리러 가도록 할게. 그럼 바로 출발해야지? 루칼트 씨.”
“아아… 들었어. 짐은 내가 잘 맡아 둘 테니까 다녀오라구. 나도 이 기회에 좀 쉬어야겠어.”
루칼트는 여전히 누운 자세 그대로 한쪽 손만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의 모습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봅을 찾았다. 따로 준비할 것도 없는 세 사람이었기에 곧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세 사람의 외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봅은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열쇠 중 하나를 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들을 찾아온 것에서 봅에게 꽤나 신뢰를 얻은 듯했다. 이 귀한 열쇠를 맡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결계를 나선 후 바로 텔레포트를 해 갔다. 저번 호출 때는 두 번에 이어서 텔레포트를 시전 했지만 이번엔 세 번에 걸쳐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당연히 한번이 더 추가된 이유는 오엘을 런던의 가디언 본부에 데려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의 텔레포트가 끝나면서 이드와 라미아는 허공 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번과 같이 스크롤이 사용된 좌표의 상공 백 미터 지점이었다. 이드는 항상 텔레포트를 할 때 느끼는 헛헛한 느낌을 느끼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드의 시선 안으로 파리의 가디언 본부와 파리의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드들이 없는 동안 몇 차례 더 몬스터의 공격이 있었던지 외곽 부근이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잠시간 허공을 유영하던 두 사람은 곧 가디언 본부 정문 앞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가디언 본부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봐봐… 가디언들이다.”
“하늘에서 날아왔어. 대단해… 게다가 생긴 것도 탤런트 뺨치게 생겼는걸…”
“확실히 이곳이 좋아. 안전하지. 볼거리 많지.”
여전히 가디언 본부의 한쪽 도로를 점거한 채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파리의 시민들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드와 라미아가 떠날 때보다 사람들이 더욱 많이 늘어난 듯 보였다. 아마도 몬스터의 공격이 더해질수록 사람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지 싶다. 이드와 라미아는 더 이상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가디언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드와 라미아는 반사적으로 검과 마법을 난사할 뻔했다. 다름 아닌 본부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흐느적거리는 좀비와 다를 바 없는 가디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상태로 출동했다간 몬스터 퇴치는 고사하고 몬스터에게 퇴치당할 것만 같은 모습들이었다. 더구나 그런 좀비 같은 몸에도 불구하고 눈은 묘한 광기로 반짝이는 것이 왠지 몬스터 소굴에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런 가디언들을 피해 곧바로 세르네오의 방으로 찾아 들었다.
똑! 똑! 똑!
“세르네오, 우리…”
“뭐야! 이번엔 또!”
“…..”
이드는 중간에 자신의 말을 잘라 들어오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움찔 문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정말 가디언들도 그렇고, 세르네오의 목소리도 그렇고… 이드는 잠깐이지만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세르네오, 우리 왔어. 이드라구.”
순간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세르네오의 목소리는 힘이 쭉 빠져 버린 그런 목소리였다.
“들어와….”
그 목소리에 들어선 세르네오의 방안은 실로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 모를 서류 종이들과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 옆엔 간이 침대와 모포까지 놓여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보다 더한 모습을 하고 있는 두 여성이 있었다. 다름 아닌 세르네오와 디엔의 어머니, 페트리샤였다. 두 사람은 저번 세르네오가 며칠 동안 과로를 했을 때 이상으로 피곤해 보였고, 지쳐 보였다. 특히 세르네오의 눈은 붉다 못해 눈동자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게 어떻게…”
“아아… 요즘 좀 바쁘거든. 먼저 저번에 했던 그거 좀 부탁할게. 피곤해 죽겠어…”
이드는 중간에 다시 말이 끊겨 버렸지만 세르네오의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거라면 아마 저번에 정령으로 피로를 풀어 준 일을 말하는 것일 거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사용해 주고 싶었던 방법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거의 축 늘어지다시피 한 세르네오와 페트리샤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사무실의 한쪽으로 끌고 왔다.
“완전히 산송장이 따로 없구만…. 소환 플라니안!”
이드의 말과 함께 칙칙하던 사무실 안으로 맑은 물소리가 들리며 플라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사무실의 모습과 한쪽에 축 늘어져 있는 두 여성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뭘 해야 할지 알겠네요.]”
확실히 정령이 보기에도 두 여성의 모습은 너무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부탁할게.”
그 말과 함께 두 여성은 순식간에 물기둥 속으로 잠겨 들었다. 세르네오와 페트리샤를 세탁기에 던져 넣듯 물기둥 속에 집어넣어 놓은 이드와 라미아는 대충이나마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굳이 세르네오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사무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으~ 정말 이 많은 쓰레기가 다 어디서 나온 거야?”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정말 고마워.”
청소가 끝남과 동시에 물기둥 속에서 피를 빤 뱀파이어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나온 세르네오는 저번과 같이 이드의 뺨에 키스를 시도했지만,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는 라미아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세르네오와 페트리샤는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린 후 깨끗이 치워진 소파에 앉으며 다시 한번 사무실까지 청소해 준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본부의 가디언들이 전부… 전부…”
“… 좀비 같지?”
이드는 자신의 말을 이어 주는 세르네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세르네오와 페트리샤는 이해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들어 매일 출동이거든.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뭐. 너희들이 가고 난 후에 출동 횟수가 좀 더 늘었지. 덕분에 몬스터에 죽기 전에 과로사로 죽을 것 같은 가디언들이 꽤 되는 실정이지.”
“확실히 그런 것 같았어.”
라미아가 들어올 때 봤던 광경을 떠올리며 그 말에 동의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네 말대로 이러다간 몬스터를 막긴 커녕 먼저 가디언들이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뭐, 어쩌겠어. 하는 데까진 해 봐야지. 참, 그보다 여기 서류. 저번에 제로가 움직이면 알려 달라고 했었지? 이번에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제 알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정신없는 것도 다~ 그놈들 때문이야. 빠드득.”
이드는 세르네오가 건네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받아 들다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또 뿌득 이를 가는 페트리샤의 모습에 오싹 닭살이 돋았다. 도대체 제로가 뭔 짓을 했길래 저렇게 여성들에게 원한을 산 건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된서리가 내린댔는데… 이드는 제로의 머리 위로 뿌려진 서리가 어떤 건지 상상하며 잠깐 동안 제로에 대해 약간의 걱정을 해 주었다. 서류를 받아 든 이드는 서류를 파라락 넘겨 보았다. 대충 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들 정도의 양이었다. 보나 마나 이 중에 실제로 신경 쓰고 봐야 할 분량은 서류 한, 두 장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면서 말이다.
“저기… 이거 그냥 설명해 주면 안 돼? 이건 괜히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은데…”
이드는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로 툭 던져 놓으며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보자… 그러니까 저기 내용이…”
세르네오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저 머릿속엔 지금 수백 장에 달하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서류들이 뭉쳐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드가 듣길 바라는 내용은 그런 서류 사이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르네오가 서류의 내용을 생각해 냈는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제로가 움직였다고 확인된 건 세 번이야. 일주일 전에 한번, 나흘 전에 한번, 어제 한번. 그리고 그 세 번의 움직임 모두 몬스터와의 합동 공격에 의한 도시의 공격이야. 죽일 놈들. 그놈들 때문에 벌써 세 개의 도시가 폐허가 돼 버렸어. 젠장.”
“그럴 리가…”
이드와 라미아는 말을 하다 격분하는 세르네오가 해 준 말의 내용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들에 의해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 또 인간을 철천지원수 이상으로 보지 않는 몬스터와 인간이 같이 움직이다니.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다.
“그럴 리가가 아니야. 사실로 확인된 일이니까. 그놈들이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지금껏 뒤에서 몬스터를 조종하다가, 그러다가 이제야 서서히 본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그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그놈들 때문에 내가… 내가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이게 다 그놈들 제로 탓이야.”
상당히 쌓였던 모양이군. 아마 일에 치이는 스트레스와 피로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일의 배후로 지목되는 제로에 대한 말만 나오면 저렇게 흥분을 하고 있으니… 라미아는 제로에 대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세르네오를 잠시 제쳐 두고 페트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에요?”
“그래. 일주일 전 캐나다에 있었던 몬스터의 공격 중에 몬스터 무리 속에 사람의 모습이 확인됐고, 나흘 전 중국의 몬스터 공격에서도 사람이 있었지. 확인된 건 나흘 전인데, 싸우면서 무슨 몬스터길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제로’라고 하더래. 너희들도 알지만 몬스터는 무조건 사람이라면 죽이려고 들잖아. 그래서 다시 물어봤데. 사람이면서 왜 몬스터 무리 속에 있냐고.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여신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세계에 알려진 거지. 그리고 이번에 유럽에 나타났을 때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이기도 해.”
이드와 라미아는 여신이란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여신이라면… 그 제로의 보스를 말하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여신을 제외하고, 제로가 여신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새로 나타나진 않았을 테니까.”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카르네르엘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몬스터와 연계된다는 말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여태껏 좋은 인상을 주던 제로가 갑자기 왜 몬스터의 편에서서 인간과 싸우는 건지. 그때 라미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제로가 차지하고 있던 도시도 전부 몬스터에게 넘어갔겠네요.”
그 말에 페트리샤가 약간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좀 이상하거든. 몇몇 도시는 제로의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는데, 몇 개 도시는 그대로 제로가 지키고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사실은 조금… 헷갈려 하고 있는 상황이야.”
‘그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간다는 소리야?’ 이드는 내심 투덜거리며 제로의 행동에 대해 머리를 굴려 봤지만 뚜렷이 짐작되는 사실이 없었다. 그때 한참 동안 제로를 씹어 대던 세르네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조금은 풀려 있었다. 제로를 씹으며 스트레스를 조금은 푼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어.”
“이상한 점?”
“응, 서류를 읽어 보고 안 건데, 우선 사람을 학살하는 곳엔 잘 나서지 않는 것 같았어. 지들도 사람이라고 그런 건지. 대신 건물을 부수거나 뭔가를 부수는 데는 아주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더라. 또 군대와의 전투에서도 무기를 못 쓰게 만들거나 부수는 일에는 거의 제로가 나선 걸로 되어 있었어.”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이드와 라미아가 듣기에는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두가 몬스터보다는 제로가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짐작만 한다고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이드의 눈에 세르네오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일단의 서류들이 보였다.
“그럼… 저기 서류들이 다 제로에 관한 것들이야?”
그 말에 네 쌍의 눈길이 순간이지만 모두 서류 더미에 모여지게 되었다. 확실히 저런 서류들에 치이는 이유가 제로 때문이라면 빠득빠득 이빨을 갈아 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생각이 틀렸는지 세르네오는 더욱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어 댔다.
“휴~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저건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일에 대한 내용이야.”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일에 대한 것이라니? 이드와 라미아는 그 말에 은근히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모르는 모양인데… 저건 전부 다 드래곤에 관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보고된 내용들이야.”
“드래곤? 혹시 우리가 떠나기 전에 출연했던 블루 드래곤에 관해서 말하는 거야?”
이드는 그녀의 말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 블루 드래곤이 움직이는 이유를 이미 카르네르엘로부터 전해 들었던 것이다.
“맞아. 하지만 지금은 블루 드래곤만 움직이는 게 아니야. 약 3주 전부터 레드, 실버, 그린, 골드까지. 처음 모습을 보였을 때도 단 두 마리가 움직였던 드래곤들이 이번엔 아주 색깔별로 나와서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머리 아파 죽을 지경이야. 더구나 이상하게 이놈들이 사용하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곳만 때려 부수고 있단 말이야. 덕분에 그 인근의 주민을 미리 대피시켜 놓으면 인명 피해는 없앨 수 있지만… 후~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녀의 말에 이드는 내심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카르네르엘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3주 전. 그녀가 주었던 통신구로 얼굴을 내비친 그녀는 이드와 라미아에게 블루 드래곤이 직접 움직인 이유를 전해 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이라는 희귀하디 희귀한 금속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단다. 이 사실은 종족의 수장인 로드가 직접 족쳐서 알아낸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블루 녀석이 우연히 알아낸 바로는 봉인이 풀리기 전 이쪽 세상에 우라늄이라고 하는 특수하게 가공되고 처리된 소량의 물질이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폭발하는 마나에 이상 변화하여 소량의 미스릴과 극소량의 오리하르콘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이 두 금속은 가공을 하지 않은 그 자체로도 보석 이상의 값어치를 가졌기 때문에 드래곤이 탐내는 것은 당연한 일. 당연히 놈은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본체 그대로 가장 가까운 원자력 발전소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날아가다 보니 자신을 보고 공격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그대로 쓸어 버렸다고 했다. 한마디로 가만히만 있었으면 인간은 손대지 않고 미스릴과 오리하르콘만 챙겨갈 생각이었단다. 좌우간 그렇게 소식을 전해 주던 카르네르엘의 모습도 뭔가 상당히 급해 보였다. 통신을 마친 후 혹시나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세르네오의 말을 들으니 역시나인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말하는 그린 드래곤은 카르네르엘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때 이드의 눈에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라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드의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기도 했다. 드래곤의 단순한 보석 수집이 인간에겐 재앙으로 느껴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드는 머리를 단발로 변해 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힘들겠다. 근데… 방 남는 거 있지? 여기서 며칠 있었으면 하는데…”
“있어. 하나면 되지?”
이드와 라미아가 한 방, 한 침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르네오였다. 사실 남은 방도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