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30화
그에 맞추어 이드와 마주 선 세 사람의 검에서도 각자의 기운에 따른 검기와 검강, 그리고 마법의 기운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단을 제외한 미카와 켈렌이 양옆으로 넓게 돌아서며 이드의 양옆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드를 경계만 할 뿐 곧바로 공격해 들어올 의사는 없어 보였다. 대신 이드와 마주 서 있는 단의 도에서는 현오색 검강이 강렬한 투기와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 날 막겠다기보다는 다시 한번 붙어 보겠다는 목적 같은걸.’
이드는 그런 단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그가 천상 무인이라 생각했다. 아마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단의 부탁이 있었던 때문인 듯싶다. 단이 밀리면 그때 공격해 들어올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먼저 가도록 하지. 처음 싸움에서 다 보여 주지 못한 초식들이네… 만곡(萬梏)!”
츠어어억!
한순간 거리를 좁혀온 단의 일도였다. 그의 도가 움직임에 따라 둘, 넷, 여섯으로 계속해서 나누어진 수많은 현오색 도강의 그림자가 이드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정말 초식 이름에 걸맞은 초식이었다.
“빨리 끝내도록 하죠. 분영화(分影花)!”
이드의 손에 들린 일라이저가 이드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순간 그 검로를 따라 붉은 꽃이 피어나며 현오색의 검강을 막아 갔다. 일종의 검막이었다. 원래 수라삼검을 위해 준비된 검강이었지만 만곡의 도초를 막아 내기 위해 난화십이식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라삼검과 난화십이식을 만들어 낸 사람이 같은 덕분에 그 전환은 아무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화십이식은 살기가 강하고 너무 패도적인 수라삼검의 진화(進化), 절충형(折衷形)이었다. 수라삼검을 사용했던 혈무살검(血舞殺劍)이 그의 말년에 완성한 수라삼검의 완전판인 것이다. 이드는 일라이저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완성하는 순간 그대로 일라이저를 만곡의 중심으로 돌진시켰다. 수많은 도를 상대하지 않고 그 모든 도의 출발점이자 중심지를 곧바로 찔러 들어간 것이었다. 순간 검은색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오던 수많은 칼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 대신 두 개의 검은 검강이 그 자리를 대신해 이드를 향해 날아왔다.
“인(刃)!”
“넓은 그물에 노니는 물고기… 수라만마무!”
일라이저의 검신이 작게 떨렸다 싶은 순간 일라이저의 검봉(劍峰)에서 붉은 빛이 폭발했다. 검사(劍絲)로 짜여진 촘촘한 강기의 그물이 순식간에 두 개의 검광과 함께 단을 덮쳐 들어갔다. 너무도 빠르고 생각지도 못했던 초식의 변화였다. 단은 전개하던 초식을 급히 버리고 그물을 피해 도망가는 물고기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빼돌렸다. 단 두 초식만에 밀려 버린 것이다. 단은 당혹스러웠다. 파리에서 싸웠을 때와 너무도 다른 검의 변화였고, 위력이었다.
‘그땐 본 실력이 아니었던 건가… 크윽…’
본래 실력을 보이지 않고 싸웠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전개였다. 그 모습에 양쪽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이드와 단을 향해 덮쳐 들어왔다.
“파이어 슬레이닝!”
켈렌의 손으로부터 수십 개의 작고 작은 불덩이들이 강기의 그물을 향해 날았다. 그와 동시에 미카의 외침이 들려왔다.
“여길 봐라… 도연회(徒演徊)!!”
미카의 손에 잡힌 두 개의 도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하나의 은색 벽을 만들어 냈다. 도법이 저렇게 화려했던가 생각하게 만들 정도의 현란한 도법이었다. 그의 사형인 단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법인 것이다. 단과 미카의 스승이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저런 도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니.
‘만나 보고 싶군.’
하지만 지금은 저 도법과 맞설 생각은 없었다. 이드의 목적은 몬스터지, 제로의 대원들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쿠웅!!
땅을 울리는 강렬한 진각과 동시에 이드의 몸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벼락처럼 빠른 속도로 솟아올랐다. 그렇게 십여 미터를 순식간에 솟아오른 이드는 운룡유해의 식으로 몸을 바로잡으며 일라이저를 오성의 내력으로 강렬하게 휘둘렀다.
“수라참마인!!”
쩌저저정
그 강렬한 힘에 일라이저의 검신이 울음을 토했다. 지금의 일식은 처음 메르시오와 싸웠을 때 그에게 떨쳐냈던 공격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강렬한 그 기운은 주위까지 퍼져 나가며, 관전 중이던 존과 제로의 대원들, 그리고 몬스터들을 경동시켰다. 하지만 그 기운에 가장 난감해하는 것은 그 공격을 직접 받고 있는 단을 포함한 세 사람이었다. 자신들을 향해 교수대의 로프처럼 뻗어 나가는 십여 가닥의 검사. 그 검사들이 당장이라도 목줄을 조일 듯 쏘아져 오고 있었다.
“으드득… 두 사람 다 최고의 절기를 펼쳐 내. 현현대도(玄賢大刀)!”
그 말과 함께 그의 도를 감싸고 있던 현오색 도강이 십 배로 그 크기를 더하며 불어났다.
“은하도결(銀河刀結) 방어식… 은하수(垠廈守)!!”
은색의 별빛 무리가 미카의 쌍도를 따라 빛을 내뿜었다.
“푸른 물결 속에 담긴 염화의 업이여… 인시너레이트!!!”
이드를 향해 내뻗어진 그녀의 양손 앞으로 화염방사기에서 뿜어지는 것처럼 끈적한 느낌의 푸른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검은빛과 은빛, 푸른빛의 방어선이 구축되어져 버렸다. 각각의 기운들이 방어를 위한 것이든 공격을 위한 것이든 상관이 없었다. 목적이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붉은 줄이 늘어트려졌다.
쿠콰콰콰쾅…. 콰콰쾅….
“그럼, 가볼까.”
이드는 폭음과 함께 자신에게 전해지는 묵직한 반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아 세 사람의 힘을 완전히 깨지 못한 데서 오는 반발력. 하지만 이드가 바란 것이 바로 이 반발력이었다. 이드는 그 반발력을 그대로 추진력으로 바꾸어 두더지 몬스터의 식탁으로 변해 버린 전장의 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또한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세 명은 더 이상 자신의 앞을 막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반탄력으로 끝났지만, 그 셋은 외상과 내상을 함께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드의 생각은 정확했다. 처음 싸움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단은 무릎을 꿇고서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미카가 운기조식에 들어간 듯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켈렌은 그대로 기절해 있었다.
“크읍… 여… 영광… 이었… 소.”
도를 집고 겨우 일어선 단의 한마디였다. 역시 천상 무인인 듯한 사람이다.
운룡대팔식과 부운귀령보를 함께 펼쳐 순식간에 거리를 격해 버린 이드는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두더지 몬스터 바로 위에서 아래를 바라본 주위 광경은 더욱 진저리 처지는 모습이었다. 먹다 남긴 빵처럼 여기저기 몸 구석구석 이빨자국을 남기소서 죽어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몸 어디 한구석 온전한 곳이 없었고, 사지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시신이 없었다. 끈적하게 땅을 적시고 있는 뿌연 뇌수와 붉디붉은 핏물. 욕지기가 절로 치밀어 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이드가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두더지 몬스터는 열심히 사람을 쫓아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이드는 이 이상 저 몬스터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지상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몬스터의 위치를 확인하고 천시지청술(千視祗聽術)을 사용해 땅속의 몬스터의 움직임을 읽었다.
“모든 사람들은 600미터 밖으로 벗어나라!!”
머릿속까지 웅웅 울려 대는 웅혼한 천마후에 한순간 전장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미친 듯이 인간을 집어삼키던 두더지 몬스터도 그 움직임을 잠시간 멈출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다. 두더지 몬스터는 다시 사람들을 덮쳤고, 허공 중에 둥둥 떠 있는 이드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말에 따라 죽으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다는 것으로 가디언으로 인식했고, 그런 만큼 무슨 수를 쓸지 예상할 수 없으니 우선 말대로 따르는 게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이미 두더지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던 상황이지 않은가. 꽤나 먼 거리임에도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드가 말한 거리를 벗어나 버렸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듯했다. 이드는 사람들이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허공답보의 경공으로 좀 더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랐다. 지름 600미터 정도의 커다란 지형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정도로 솟아오른 이드는 자신이 가진 내력을 모두 운용해 나갔다. 그에 따라 거대한 기운의 흐름이 이드 주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드가 운용하는 그 막대한 기운에 주위에 퍼져 있는 대기가 그 인력에 끌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든 거대한 기운은 이드의 양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쯔즈즈즉.
그 강력한 기운에 이드의 팔이 잔잔하게 떨렸으며 양손 주위로 황색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이드는 양손의 기운을 느끼며 다시 한번 지상의 몬스터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후우~”
한 번의 심호흡을 마친 이드는 양손의 기운을 정확한 양으로 조정하며 두 손을 마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양손 사이로 번개가 치는 듯 굉장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저쪽 손에서 이쪽 손으로 왔다 갔다 하는 스파크는 별다른 폭발 없이 광폭 해져 버린 내력을 순환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두 손이 마주 깍지 껴지는 순간 이드의 팔은 팔꿈치까지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빛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는 말 그대로 산(山)과 같았다. 그 거대한 파괴력과 팔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이드가 작게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응?”
이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하얀 백색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저 아래에서 쏘아낸 뇌격계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 빛이 가지는 기운은 지금 이드의 양손에 모인 힘에 비하면 말 그대로 산과 모래성의 차이. 이드는 깍지 낀 양손을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슬쩍 내리쳐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 행동을 따라 주위에 형성된 거대한 기류가 같이 움직였고, 그 압력은 고스란히 마법에 미쳤다. 그 결과는…
퍼억.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의 간단한 소멸이었다. 누가 저 아래에서 마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탈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드는 자신을 받치고 있던 경공을 풀고, 천근추의 신법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신영이 엄청난 속도를 내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순간에도 주위의 몬스터를 확인하고 양손에 맺혀 있는 기운을 조종해 나갔다. 전장의 수많은 시선이 이드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드의 양손이 땅과 마주치는 그 순간.
“12대식 대지굉광열파(大地宏廣熱破)!!!”
쿠아아아아아아앙……..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미사일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거대한 폭음과 함께 새까맣게 하늘을 덮어 버리는 흙더미 많이 사람과 몬스터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이드는 자신의 양손에서 엄청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그 기운을 조종했다. 어느 선까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 두던 기운을 어느 한계점부터는 칼날처럼 뽑아 확인해 두었던 몬스터의 위치를 향해 뿜어내게 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드가 말했던 육 백 미터의 공간 안으로 거미줄 같은 땅의 균열이 생겨났다.
그렇게 정신없는 폭발과 균열이 몇 분간 이어졌을까 그제야 잦아드는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공할 흔적. 지름 삼 백 미터에 깊이 삼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레이터. 그리고 그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선을 그은 듯 반듯하게 갈라져 버린 땅의 모습이란. 이걸 인간이. 그것도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서 만든 결과란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기 위해 인간과 몬스터들 사이로 순간적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주 작은 소리가 흘러들었다.
뿌그르르륵…. 끄르르르륵….
무언가 좁은 곳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듯한 물소리. 그것은 이드가 만들어 놓은 크레이터 주위의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균열 사이로 솟아오르는 붉은 색의 진득한 핏물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것은 이드가 흘려보낸 힘에 의해 땅과 함께 잘려 버린 두더지 몬스터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 사실을 짐작하는 순간 전장엔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돌았다.
“히, 히이익!! 죽었어. 저 괴물 두더지 놈들… 다 죽었어! 으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여기저기서 그와 비슷한 또는 이드의 무위를 숭배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각자의 기분에 취해 있는지 몇몇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서 내력을 조종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 자신의 내력에 그레이드론의 드래곤 하트가 많이 녹아든 것 같았다. 설마 이 정도의 파괴력을 낼 줄이야. 게다가 아직 그레이드론의 드래곤 하트는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녹아든 것도 아니니… 점점 더 힘이 커진단 말이지 않은가. 이드는 정말 오랜만에 전력을 사용한 덕분에 허전해진 전신의 혈도로 조금씩 녹아 내리는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라미아!!”
“네, 여기 왔어요.”
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미아가 이드 곁으로 내려섰다. 아마 위에서 보고 있다, 이드가 부르기 전에 내려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가자.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으니까.”
“에? 어디루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갈지 정해 놓지를 않았다. 그런 이드의 눈에 이쪽을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엔 경이와 흥분,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담긴 공포 등이 떠올라 있었다.
“우선 여기서 떨어지자. 잘못 하다간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연관될지 모르니까.”
라미아 역시 주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기에 이드의 팔을 안았다. 그 사이 전투가 다시 재개되었는지 비명과 폭음이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텔레포트!”
시동어와 함께 빛에 휘감기던 이드의 눈에 죽어 있는 두더지 몬스터가 사람들의 손에 갈갈이 찢겨 나가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가 주위의 모든 공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몽페랑, 아니 전장에서 칠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평원. 그 평원 한켠에 위치한 작은 숲 속의 한 나무 아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단발머리의 갸름한 미남보다는 미녀란 쪽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얼굴의 소년과 긴 은발 머리를 주변 풀잎 위로 깔아 놓고서 그런 소년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다름 아닌 전장에서 텔레포트 해 온 이드와 라미아였다. 두 시간 전 이곳 평야로 텔레포트 해온 두 사람은 이곳에 있는 숲을 보고 잠시 쉬면서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푸하~~~”
기계인 마냥 규칙적이고 정확한 호흡을 하고 있던 이드의 입술이 열리며 시원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라미아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두 시간 동안 이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느라 심심했던 것이다.
“운기조식 이제 끝내신 거예요?”
“아, 드래곤 하트가 녹아든 덕분에 생각 외로 일찍 마칠 수 있었어.”
대답과 함께 눈을 뜨는 이드의 눈동자 깊숙이 은은한 금빛이 비치다 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석양의 영향 때문은 아닐 것이다. 라미아는 그 모습에 방긋 웃어 보였다.
“근데 이제 정말 어떻게 하지? 그냥 돌아가기엔 넬이란 아이가 걸린단 말이야.”
“저도요. 드래곤들이나 알고 있을 내용도 알고 있고…”
“그렇지? 근데…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란 말이야.”
이드는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그런 이드의 눈에 져 가는 석양의 빛 무리가 비쳐 왔다. 애초 파리의 가디언 본부를 나온 시간이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으니… 밤이 가까워 올 만한 시간인 것이다. 그러자 그와 함께 떠오르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서 지내지? 그냥 파리로 돌아가는 건… 좀 그렇겠지? 헤헤…”
“그것도 그렇죠. 후훗…”
이드와 라미아는 마주 보며 웃어 보였다. 빠이빠이 인사하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고 나와 놓고서 다시 돌아가는 건 좀 얼굴 팔리는 일이다.
“하.지.만. 제가 미리 봐 둔 곳이 있다구요. 일어나세요. 천천히 걸어가게.”
이드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윙크를 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미아를 따라 일어나며,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털어 냈다.
“봐 둔 곳이라니?”
“저쪽이요. 아까 하늘에 올라가 있을 때 봤죠. 꽤 거리가 있긴 했지만 작은 도시가 있었어요.”
“역시~ 너 뿐이야.”
이드는 라미아의 머리에 쓱쓱 얼굴을 비비고는 라미아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전장이 있는 곳. 아직도 전투가 그치지 않았는지, 희미하지만 검은 연기가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것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전투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실제로 내가 한 건 두더지를 잡은 일 뿐이지만,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하긴 그렇다. 한번 기세가 오르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는 게 전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인간인 이드가 두더지 몬스터를 그렇게 무지막지한 힘을 써 가며 모조리 잡아 버렸으니… 확실한 사기 진작이 되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두더지 몬스터로 인해 느꼈던 공포는 까맣게 잊어 버렸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지막에 언뜻 봤던 장면을 생각해서는 두더지에 대한 분노를 다른 몬스터들에게 풀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괜히 끼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가 걱정이에요? 한두 곳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승패가 달라진다고 뭐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넬이란 아이와 제로 말이에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맞다고 생각하며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넬과 제로가 왜?”
“그거 아닐까요?”
이드는 뭉뚱한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지.
“‘그거’라니?”
“아이 참, 카르네르엘이 말했던 변수 말이에요. 변수.”
“흐음…”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변수. 확실히 이드도 들었다. 하지만 제로가 변수란 말은 별로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변수란 어디로 튈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원래 계산해 두었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상대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넬이나 제로는 변수라고 하기 그렇지 않아? 인간이 몬스터 편에 서 있는 게 좀 보기 그렇지만, 신들이 하려는 일에 찬성하고 돕고 있잖아. 차라리 변수라면 너와 나. 우리 둘이 변수라고 생각되는데?”
확실히 이드와 라미아는 이미 두 번이나 몬스터를 쓸어내 버린 적이 있었고, 오늘도 몇십, 몇백 마리의 몬스터를 터트려 버렸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당장의 모습만 보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또 신이 우리 존재를 알고 있을까요? 이드님도 아시겠지만, 그레센의 신들조차도 이드님이 직접 청하기 전엔 이드님이 그 세계에 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잖아요. 저는 이쪽의 신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그렇지.”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확실히 지금의 신이 이드와 라미아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제이나노가 신의 뜻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이드와 라미아를 따랐지만, 그건 신의 인도라기보다는 제이나노 자신의 신성에 의한 것. 한마디로 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뭐,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네 말대로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이야기보다는 마을에 도착하는 게 더 급한 것 같지? 좀 있으면 해가 질 것 같다.”
그 말 대로였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걸은 시간이 꽤 되는지 어느새 해가 산꼭대기에 대롱대롱 겨우 매달려 있었다.
“네, 네. 알았어요.”
라미아가 그렇게 대답한 다음. 평원엔 갑자기 휘황한 빛이 잠시 일렁이며 날아가던 새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도시는 라미아의 말대로 작은 도시였다. 주위로 간단한 나무 목책이 서 있을 뿐 가디언도 없는 마을이었다. 여관 주인의 말로는 이 부근에서는 몬스터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디언이 마을에 머무르는 게 낭비일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여관에서 푸짐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 움직일 방향에 대해 입을 맞추었고 자리에 누웠다.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은 후 내일부터 다시 움직이기로 결정을 본 후였다.
그때 가만히 누워 있던 라미아의 팔이 이드의 허리를 감아 들어왔다.
“저기요~오. 이드니이임…”
이드는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떠는 라미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 한두 번 당해야 당황을 하지.
“오늘은 왜?”
“저기… 낮에 했던 말 기억하시죠?”
“낮에 했던 말?”
끄덕끄덕. 뭔가 기대하는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시선에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낮에… 내가 뭐라고 했었어? 통 기억이 안 나네.”
“히잉… 그걸 기억 못 하시다니. 분명 아기를 잘 키우겠다고 하셨었잖아요.”
순간. 이드는 몸을 움찔 거렸다. 또 아기 이야기라니.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못 들은 줄 알았었는데… 들었단 말이냐?
“들었죠. 이드님이 그런 말을 하셨는데 제가 못 들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요. 저 아기 가지고 싶어요. 이드님 말대로 잘 키울 수 있다니까요. 네에~ 이드님~~~”
이드는 그러면서 자신의 품에 얼굴을 비벼 대는 라미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오늘은 조용히 자기는 틀렸구나…’
그 후로 두 시간이나 그렇게 시달린 후 겨우 라미아가 잠이 들자 이드도 그제야 쉴 수 있었다.
‘아, 정말. 아기라도 가져 버려?’
꽤나 시달린 이드의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다음 날 아침을 해결하고 가까운 도시의 위치를 묻고서 마을을 나섰다. 텔레포트를 하고 싶어도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걸어야 했다. 물론 중간중간 날거나 경공을 사용해서 가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디언 지부를 찾아서 텔레포트 좌표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당연히 이드와 라미아가 떠나왔던 몽페랑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사흘 거리에 있는 파르텐이란 도시를 목적지로 정해야 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오랜만의 여행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평원을 걸었다.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경공이나 마법을 사용해서 달리거나 날아가기도 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중간중간 라미아가 걸어오는 장난을 받아 주기도 하면서 걸었다. 가는 길엔 작은 숲은 물론이고 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지나면서도 두 사람은 몬스터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몽페랑을 공격하기 위해 몬스터의 대군이 몰려오면서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몬스터가 그곳에 흡수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사실 그 많은 수의 몬스터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다닐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마 절반 정도는, 아니 절반이 되지 못하더라도 상당수의 몬스터를 공격할 곳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로 충당할 것이다. 그것이 몬스터들의 방법일 거라고 생각된다. 덕분에 몬스터가 없는 여행은 조용하고 쾌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딜 가든 심심치 않게 나오던 몬스터가 없어지자 조금 심심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느긋한 기분으로 움직인 덕분에 이드와 라미아는 하루를 노숙하고 다음 날 오후에 목적한 파르텐이란 도시가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르텐은 몽페랑의 반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진 도시였다. 비록 몽페랑의 반이라고 하지만 몽페랑의 규모를 생각하면 실로 커다란 도시라고 할 만한 것이다. 거기에 특이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도시 주위를 따라 형성된 성벽이었다. 견고하게 주위를 둘러쳐진 성벽의 모습이 또한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런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열여섯 개의 성문 중 하나의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문 앞에는 경비로 보이는 사람 네 명이 허리에 총을 차고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사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몽페랑이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때문인지 상당히 경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드가 보기엔 별달리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사실 그럴 만도 한 듯했다. 가까운 거리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파르텐을 드나드는 사람이 꽤나 많은 때문인 듯했다. 아무리 경비가 임무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모두 살피겠는가. 이드와 라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람들의 시선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 둘 주위의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선의 주인은 주로 남성. 향하는 시선의 목적지는 은발의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있는 라미아였다.
‘헤헤… 오랜만의 시선 집중인걸.’
확실히 파리의 가디언 본부나 너비스에서의 라미아는 꽤나 익숙해져서 이렇게 시선이 모여드는 경우는 별로 없어졌으니 말이다.
‘후후훗…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이렇게 하면, 저 눈빛이 또 변하겠죠.’
이드는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이는 라미아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끼며 몸을 빼 버렸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뭘 하려는지 직감적으로 알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라미아가 좀 더 빨랐다. 피하기도 전에 라미아에게 한쪽 팔을 뺏겨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이드의 팔이 라미아의 품에 꼭 안겨졌다 싶은 순간. 라미아에게 모여 있던 시선이 이드에게로 향하며 은은한 살기와 질시의 감정으로 빛났다.
“하아~ 내가 왜 그런 말을 꺼낸 건지… 떨어지지 않을 거지?”
“헷, 물론이죠. 이드님.”
이드는 그녀의 미소와 말투에 따라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압력에 오랜만이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불구하고, 이드는 도시에 들어설 때까지 그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도시 내부로 들어선 두 사람은 우선 여관부터 잡아 방을 구했다.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을 잡은 두 사람은 여관 주인으로부터 가디언 지부의 위치를 물어 그곳으로 향했다.
‘프랑스 파르텐 가디언 지부’
이드는 건물 입구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으며 건물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편안한 색을 칠한 삼층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곳 지부는… 다른 곳보다 건물이 작네요.”
“조금 그렇네. 뭐, 안에 가디언들은 많은지 모르지. 들어가자.”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받으며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딸랑, 딸랑
문이 열림과 동시에 유리문 상단에 매달려 있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귀여운 종에서 맑은 종소리가 흘러나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건물의 일층은 한산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기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벽이 허물어져 일층 전체가 대기실로 보였다. 곳곳에 놓여 있는 의자들과 탁자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드와 라미아가 보아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디언 본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 오셨나요?”
텅 비어 버린 대기실의 모습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이드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출입구의 오른쪽 안쪽, 그곳에 여관의 카운터처럼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탁자의 안쪽에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방금 전 말을 건 것이 그녀인 듯했다. 그녀는 이드와 라미아가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물어왔다.
“거기 두 분. 무슨 일로 찾아 오셨나요?”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고요.”
그녀의 말에 라미아가 나서며 대답했다.
“잠시 뭘 좀 알아볼까 해서요. 그런데… 사람이 아무도 보이질 않네요.”
“몇 분을 제외하고, 모두 몽페랑 전투에 지원을 가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뭘 알아보시려고 그러시나요? 제가 필요한 분을 모셔 와 드리겠습니다.”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밖으로 나서려는 그녀를 팔을 흔들어 제지했다.
“아아…. 괜찮아요. 저흰 그냥 저희가 갈 곳의 텔레포트 좌표를 알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까 다른 사람은 불러오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마법이나, 검술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연금술사인가요? 아니면 스피릿 가디언?”
그 말에 카운터의 여성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헌데 그런 여성의 미소엔 어떤 뜻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던 모양이었다.
“둘 다 아니에요. 전 그냥 평범한 사람인걸요. 단지 이곳에서는 카운터를 보며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텔레포트 마법의 위치 좌표를 알고 싶으시다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위에 놓여진 몇 가지 책 중 하나를 들어 뭔가를 읽어 내려가며 물었다.
“네, 그래요. 거기에 더해서 제로에게 점령되어 보호받고 있는 도시가 어딘지도 알고 싶은데요.”
“흐음… 저기 그 좌표는 쉽게 알려 드릴 수가 없네요. 함부로 외부인에게 알려 줄 수 없다고… 아! 두 분도 가디언이셨군요.”
카운터의 아가씨는 말을 하던 중 갑자기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두 장의 가디언 신분증에 역시 그렇구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실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것. 그런 두 사람이 가디언 지부에 들어서자 혹시나 가디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카운터를 맞을 만큼 꽤나 눈치가 있는 여성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아, 죄송해요. 젊은 나이에 가디언이라니. 대단한 실력인가 보군요.”
그 말에 이드는 가만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카운터의 아가씨는 ‘좌표, 좌표, 좌표…’ 중얼거리며 한참 동안 카운터를 뒤졌다.
“흠… 그게 여기 없는 모양이네. 잠시만 여기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윗 층에 가서 마법사님 한 분을 모시고 올 테니까.”
그 말에 라미아가 텅 빈 일층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많은 분이 몽페랑으로 지원을 가셨지만, 몇 분은 파르텐을 방어하기 위해 남아 계시니까요.”
카운터의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쌩하니 윗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성격이 참 좋은 아가씨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저 아가씨는 사람이 반가운 건지도. 하루 종일 아무도 없이 조용한 이 일층을 지키고 있다가 들어온 이드와 라미아였으니 말이다. 그때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카운터의 아가씨가 마법사를 데려온 것이다. 그녀가 먼저 이드와 라미아 앞에 모습을 보였고, 그 뒤를 따라 노년의 마법사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하지만 별로 마법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 노인분들이 즐겨 입을 만한 펑퍼짐하고 편안한 옷에 잘 다듬은 머리카락과 수염. 꼭 인상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의 마법사였다.
“로어 할아버지. 이쪽 분들이 텔레포트 좌표를 찾으시는 분들이세요.”
그녀의 소개에 로어라는 마법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아 그냥 로어라고 하라니까. 꼭 할아버지란 말을 붙이고 있어. 그래 텔레포트 좌표가 필요하다고? 흐음… 잘들 생겼구만. 그래, 어디의 좌표가 필요한가?”
성격도 꽤나 밝은 분 같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금 전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다시 한번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자 로어란 마법사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제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때문인 듯했다.
“제로라… 그곳엔 뭐 하러 가는가? 자네들도 귀가 있을 테니 제로의 행동에 대해 들었을 텐데… 그곳은 위험하다고.”
“물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곳에서 알아볼 게 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몬스터들과 함께 움직이는 제로와 도시를 지키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말에 로어는 주름진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분열…이란 말인가? 허기사 그런 의견도 나왔었지.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라고 하던데… 흠… 그럼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게.”
그렇게 두 사람을 잡아 둔 로어는 다시 윗 층으로 올라갔다. 이드는 노인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다 다시 카운터에 가서 앉아 있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좌표를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니요. 이제 제 일인 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지루한 시간을 저 책으로 때우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마음속으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님, 마법의 기운인데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감각을 개방했다. 그러자 윗 층에서 꽤나 큰 마나의 기운이 잡혔다. 하지만 윗 층에 마법사들이 쉬고 있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라미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 마법. 방금 전 올라간 로어란 마법사의 기운인 것 같아요. 모르긴 몰라도 저희들에 대해 알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이드는 그 말에 다시 한번 천정 넘어 이 층을 바라보았다. 사실 로어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기분 나쁠 게 없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니 말이다. 몬스터 측에 붙어서 인간과 싸우는 제로가 보호하고 있는 도시로 가겠다는 데, 가디언으로서 누가 그냥 곱게 텔레포트 좌표를 가르쳐 주겠는가?
‘그런데 알린다면… 파리에 있는 본부에 알린다는 거겠지?’
그 말에 라미아가 씨익 웃어 보였다. 파리의 본부라면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겠죠. 뭐, 금방 좌표를 가지고 내려올 테죠.’
그런 그녀의 말이 신호였다. 이 층으로부터 퉁퉁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로어가 손에 작은 쪽지를 들고서 내려온 것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장거리 마법 통신을 사용한 때문인지 피곤한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여기 찾았네. 그런데 자네들 파리에 있는 가디언 중에 친한 사람이 있는가?”
“있지요. 세르네오라고. 거기서 부 본부장 직을 맡고 있는데요.”
그 대답에 로어는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손에 쥔 종이를 건네주었다. 아마, 파리에 통신을 넣었다가 될 수 있는 한은 다 해주란 이야기라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좌표를 받아 든 이드는 로어와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디언 지부를 나섰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맑은 종소리가 두 사람을 배웅해 주었다. 밖으로 나온 이드는 손에 든 좌표를 한번 바라본 후 라미아에게 넘겼다. 제로가 보호하고 있는 도시. 전날 이드와 라미아는 넬이란 소녀를 만나보기 위한 방법을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될 수 있다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지금은 분열되어 도시를 보호하고 있는 제로의 대원들이었다. 이미 제로와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그들에게서라면 넬이 있는 위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지그레브는 항구 도시인 마르세유와 리옹 사이에 위치한 대도시였다. 항구 도시인 마르세유와 리옹 사이에 있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그 덕분에 그 덩치가 커진 일종의 상업 도시였다.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 수만도 수만.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가 바로 지그레브다. 그리고 지그레브는 두 달 전. 제로라는 단체에 장악되었다. 아니, 장악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말이 좀 더 상황에 맞게 느껴졌다. 지그레브의 시민 중 누구도 제로에 의해 행동에 제재를 받거나, 피해를 받은 적이 없는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오히려 치안이 좋아져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지그레브를 드나드는 상인들이 좋아했다. 그런 이유로 지그레브에서도 여타의 제로에게 장악된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제로의 인기가 날로 상승곡선을 그려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승곡선이 며칠 전부터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정보에서라면 국가의 정보 기관만큼이나 유통이 빠른 상인들의 입을 타고 몬스터와 행동을 같이 하는 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이고, 자신들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제로의 사람들의 행동이 변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 소문이 나돌면서 제로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그레브는 시끄럽지만 활기차고 바쁜 도시였다.
“… 그렇다는 데요.”
라미아는 읽어 내려가던 종이에서 눈을 뗐다. 그 종이는 다름 아니라 텔레포트의 좌표가 쓰여 있는 것으로 거기엔 좌표와 함께 지금 지그레브의 사정에 대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수도와의 통신 때문에 로어가 제법 신경 써서 써 둔 것 같았다. 특별한 정보는 없지만 말이다. 현재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지그레브의 입구에서 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텅 빈 공터였다. 옛날의 공장 터라도 되는지 주위는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여서 사람들에게 텔레포트 되는 걸 들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장소였다.
“별로… 도움되는 내용은 없는 것 같네. 그보다 천천히 걸어가자. 저쪽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 것 같으니까.”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미아를 안고서 벽을 뛰어넘었다. 주위에 문이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문을 막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라도 몬스터나, 아이들이 들어와서 놀게 되면 곤란한 것은 이곳으로 텔레포트 해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또 텔레포트를 사용할 만한 사람이라면 저런 높다란 벽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척을 잡아낸 대로 벽을 넘자 조금은 황량해 보이는 주위의 환경과 함께 포장된 길 위를 지나가는 일단의 사람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길 위를 가고 있다면 지그레브를 향하는 사람들일 것인데, 글에서 쓰인 바와 같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는 것은 맞는 모양이었다. 또 모든 사람들의 몸엔 뭔가가 들려 있거나 짐을 매고 있는 때문에 오히려 빈손에 가벼운 복장인 이드와 라미아가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끼어든 곳 역시 사람들이 대부분 등 뒤로 커다란 짐을 지고서 걷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짐을 지고서 걸은 때문인지 그들의 몸엔 하나같이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계절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무거운 짐을 나르기엔 더운 날씨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목적지인 지그레브가 바로 코앞인 탓인지 그들의 얼굴엔 피곤함보다는 반가움과 활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이드와 라미아가 주위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