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31화
“누… 누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에 이어 이드와 라미아의 나이 또래의 남자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앞서 가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멈추며 한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그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누군가 쓰러져 있는 모습과 그 누군가를 안아 일으키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 정신 차례. 왜 그래. 누나”
남매인 모양이었다. 그때 당황해 하는 소년의 목소리를 뒤쫓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그냥 기절한 걸 꺼다. 흥분하지 말고, 누가 물 가진 사람 있소?”
하지만 그의 말에 물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라 무게를 줄이려고 물을 모두 버리거나 마셔 버린 후였기 때문이었다.
“어이, 뒤쪽에 누가 물 가진 사람 없소?”
“물이요. 물 가지고 계신 분 없으세요? 네?”
남자의 목소리에 소년도 급히 일어나 소리쳤다. 일어난 소년은 키가 꽤나 컸다. 그냥 봐도 이드보다 주먹 하나 정도는 커 보였으며, 덩치 또한 좋았다. 그런 소년이 다급한 얼굴로 소리치는 모습은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순박해 보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라미아와 함께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물을 가지고 있어요.”
이드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쓰러진 사람을 향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이드에게로 향했다. 뭔가에 집중하다 다른 쪽에서 큰 소동이 나면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드와 라미아를 시선에 담은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누나 때문에 급하게 소리치던 소년까지 멍한 표정으로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쯧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쓰러졌다는데, 뭘 구경하는 건지.
“물 필요 없어요?”
“아, 그렇지. 저기 좀 비켜 주세요. 비켜 주세요.”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년이 급히 이드와 라미아가 있는 쪽 사람들에게 소리쳤고, 이미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길을 내어 준 사람들 사이로 쓰러져 있는 소년의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큰 덩치의 소년과는 달리 작고 가녀린 체구였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오래된 듯한 청바지와 헐렁해 보이는 반팔 티와 조끼는 짧은 머리와 함께 활달해 보이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년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문제라면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하다는 게 흠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성의 옆으로 체격이 좋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 소년에게 단순히 기절이라고 진정시키던 말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에게 다가가던 이드는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는 우선 자리부터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이리 주게.”
중년의 남자가 이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니요. 우선 자리부터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척 보니 기도 상당히 허해 보이는데… 우선 한 옆으로 비켜 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드를 바라보던 남자도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과 뒤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쓰러진 여성을 안고서 길옆으로 향했다. 도로 주변이 모두 탁 트여 있는 상태라 옮겨 봐야 거기서 거기지만, 더 이상 사람이 모여들진 않았다. 설마 사람이 쓰러진 걸 구경하러 따라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소년 일행과 이드들이 빠지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지그레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보게, 소년. 이제 물을…”
소년의 누나를 다시 땅에 눕힌 중년의 남자가 다시 한번 이드를 재촉했다. 이드는 그 남자의 말에 누워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척 보기에도 약해 보이는 몸인데다 전체적인 기력도 상당히 허한 것 같았다. 저런 상태라면 그냥 물만 뿌려 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을 뿌리고 먹여 주면 깨어나긴 하겠지만 곧바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소환 운디네.”
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드의 가슴 앞으로 운디네가 그 모습을 들어냈다. 손바닥 만한 운디네의 등장에 물통을 건네주길 바라고 손을 내밀고 있던 중년의 남자와 소년 모두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갑자기 나타난 운디네를 바라보았다. 실제 가디언이다, 용병들이다 해서 마법과 검법, 정령이란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직접 마법을 보거나 정령을 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운디네는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허공을 둥둥 떠가서 옆에 서 있는 라미아의 등 뒤로 가서 숨으며 머리만 빼꼼히 내밀었다. 왜 주인을 두고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숨는지. 조금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이드는 여전히 운디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은 여기 운디네에게 부탁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분을 위한 조치로는 좀 부족한 듯한데…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이드의 말을 들은 중년의 남자는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손가락 한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운디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디언… 인가? 아니면 능력자?”
“가디언입니다. 한국의…”
이드는 그의 물음에 소년의 누나 옆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처음 운디네를 소환해 낸 것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생각해 보라. 누가 갑자기 다가와서 제가 고쳐 드리죠. 하면 쉽게 믿음이 가는가. 그것도 환자가 간단한 기절 정도로 보이는데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신분이 확실하다면 믿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라는 가디언이라면 말이다. 이드는 가만히 누워 있는 아가씨의 손목을 잡았다.
‘생각했던 대로군… 원래 체질이 약해서 기가 허한 데다, 피로가 쌓여 기가 빠졌다.’
진단을 내린 이드는 누워 있는 상대의 몸을 일으키며 한쪽에 서 있는 두 남정네에게 지나가듯 말을 꺼냈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 피로 때문에 기가 빠졌어요. 이 아가씨…. 이름이 뭐죠?”
“응? 아, 센티. 그 녀석 이름은 센티네. 이 녀석은 모라세이. 센티의 동생이지. 그리고 난 델프. 이 두 녀석의 삼촌이지.”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센티라는 이름을 알게 된 여성의 등 뒤로 돌아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에 장심(掌心)을 가져다 대고 천천히, 아기를 얼르듯 내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산 속에 흐르는 개울물 마냥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간 이드의 내력은 그녀의 혈도를 조심조심 걸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원래 이런 내공의 치료는 깨어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상대가 깨어 있어서 상대방의 기운에 반응하지 않고 잘 따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치료받는 자가 내공을 익힌 자일 때 해당되는 말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내력을 다스릴 줄 모른다. 그 상태에서 잘못 내공 치료를 하다 보면 자신에게 흘러 들어온 상대의 내력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서 오히려 내상이 도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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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신을 잃은 경우라면 그런 반응이 적어져, 치료하는 사람의 기운을 자연스레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깊고 정순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치료하는 거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이드는 천천히 센티의 기력을 회복시키며 입을 열었다.
보통의 무림인들이라면 감히 흉내 내지도 않을 그런 일을, 이드는 자연스럽게 해대고 있는 것이다.
“이 센티란 분. 몇 일 동안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한 모양이던데요. 그것 때문에 기가 빠져 쓰러진 것 같은데… 몸이 약한 사람을 데리고 너무 멀리 다녀오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델프라는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이드의 말에 수긍하는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센티가 쓰러질 줄 알았다는 듯도 했다.
“그랬지. 자넨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은 장사를 한다네. 큰 장사는 아니지만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이번에 형님이 물건을 가지고 마르세유로 가게 되셨는데, 이번엔 짐이 많아서 나와 모라세이 녀석까지 같이 가야 됐어. 그렇게 되면 몇 일 동안 이 녀석만 집에 남아 있어야 되는데 그게 불안해서 같이 가게 됐네.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지금 지그레브를 장악하고 있는 제로의 사람들이 몬스터 편을 들어 자신들이 지키고 있던 도시를 떠나고 몬스터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서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무리를 하면 별로 좋지 않아요.”
이드는 델프의 말에 그렇게 대답을 해주고는 센티의 몸에서 운기되고 있던 자신의 내력을 거두어 들였다.
센티의 몸엔 이미 아프기 전보다 더 정순하고 안정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깨어난다면 지금까지의 피로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더욱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운디네. 여기 이 여자 분을 좀 깨워주고 돌아가렴.”
이드의 말에 운디네는 순식간에 커다란 물방울 모양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은 한 두 사람의 신체를 완전히 덮어 버릴 정도의 크기였다.
갑작스런 물방울의 등장에 길을 가던 몇몇의 사람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이쪽을 볼 정도였다.
운디네가 변한 커다란 물방울은 센티의 앞쪽으로 오더니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해버렸다.
‘잠자다 물벼락’이라는 방법으로 깨울 모양이었다.
그리고 센티를 거친 물방울은 그대로 이드까지 덮쳐버렸다.
‘이 녀석… 장난은….’
이드는 상반신 전체를 시원하게 지나쳐 가는 물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떴다.
운디네는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옷도 젖어 있지 않았다.
지나치는 순간 물기를 다 가져가 버린 탓이었다.
다름 아닌 운디네의 가벼운 장난이었다.
다음에 나오면 한껏 부려먹어 주마.
이드가 그렇게 복수를 다짐할 때였다.
“푸하아아악…. 뭐, 뭐니? 누가 나한테 물을 뿌린 거야? 어떤 놈이야?”
확실히 그렇게 잠을 깨우는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센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버럭 소리쳤다.
이드가 봤던 첫 인상 그대로 몸은 약하면서 성격은 괄괄한 것 같다.
“누나, 진정하고. 이제 괜찮은 거야?”
“응? 아, 나… 쓰러졌었… 지?”
센티는 자신의 덩치 큰 동생의 말에 자신이 쓰러지기 전의 상황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은 전혀 그런 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몸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던 몸이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니? 기절한 건 생각나는데… 지금은 몸이 가뿐한 게 나아 갈 것 같아. 내 몸이 왜 이렇지?”
다그치는 듯 대답을 재촉하는 센티의 말에 모라세이는 조심스럽게 그녀 뒤에 서 있는 이드와 라미아를 가리켜 보였다.
“뒤에…”
“응? 뒤….? 엄마야!”
동생의 말에 생각 없이 돌아보던 센티는 봉사의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미모를 보고는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그렇게 생각할 때 모르세이의 설명이 그녀의 귓가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두분 다 가디언이셔. 두 분 중 남자분이 누나가 기절해 있을 때 도와주셨어. 그냥… 그냥 등 뒤에 손을 대기만 한 것뿐이지만 말이야.”
모르세이는 뒷말을 조금 끌면서 대답했다.
확실히 그가 눈으로 본 것은 운디네 뿐이고, 내력을 이용한 기력 회복을 모르세이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센티는 그런 모르세이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몸은 확실히 가뿐하고, 피곤이 싹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몸이 좋아졌네요.”
센티가 정중히 이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상대의 나이가 어린데도 저렇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괄괄한 성격만큼이나 화통한 면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아니요. 힘든 일도 아닌 걸요. 굳이 그렇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는데…”
이드의 말에 그제야 센티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한쪽에 가만히 서있던 델프가 라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목적지가 어디지? 저기 지그레브인가?”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지그레브로 가는 행렬에 끼어있었으니 지그레브로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네,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지낼 곳은 있고?”
“여관을 이용할 생각인데요.”
그 말에 가만히 질문을 해대던 델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잘됐군. 센티의 일도 있고 하니. 우리 집으로 가세. 내가 초대하지.”
하지만 델프의 말에 이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런 델프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센티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이드와 델프사이에 끼어 든 것이다.
“삼촌, 무슨 말 이예요!”
“이, 이 녀석이 목소리만 커서는…”
델프는 귓가가 쩡쩡 울린다는 듯 과장된 표정으로 귓가를 문질렀다. 확실히 목소리가 크기는 컸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 않냐. 도움을 받았으니 저녁초대를 하겠다는데. 또 여관보다야 우리 집이 편하지.”
하지만 센티는 그 말이 못마땅했는지 뚱한 표정으로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다 다시 델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왜 삼촌 집으로 이 분들을 데려가느냐 구요. 도움 받은 건 난데. 당연히 저희 집에서 대접을 해야죠.”
“… 이 녀석아, 넌 뭘 그런걸 가지고 그렇게 큰소리냐? 그리고 너희 집이나 우리 집이나 바로 이웃하고 있는데 어디서 초대하면 어때서 그러냐?”
“그래도요. 제가 대접할게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몸이 약한게 맞는가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델프는 고개를 저으며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느새 그 두 사람은 이드와 라미아가 그들의 초대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여관보다야 집이 좀 더 편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집이라도 말이다.
“근데… 몇 살 이예요? 전 올해 열 여덟인데.”
지그레브를 향해 다시 발길을 옮기며 모르세이가 이드를 향해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라미아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그였다. 하지만 그 인간 같지 않은 미모에 오히려 다가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 나도 같은 나이네요. 라미아도 같은 나이구요.”
그 말에 센티가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기절하기 전과 달리 너무나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서로 말 놓으면 되겠네. 괜히 말을 높이면 서로 불편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하하하… 그러세요. 저희는 별 상관없거든요.”
“하하… 그래, 그럼 그러자. 근데 지그레브엔 무슨 일이야? 지그레브가 제로에게 넘어가고선 가디언들은 이곳에 오지 않는데… 설마, 제로와 가디언들 간의 전투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예요. 보면 알겠지만 우리 둘 뿐인 걸요. 이걸로 전투가 되겠어요? 개인적인 볼일로 가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몬스터들이 날뛰는 상황에 사람들이 제 살 깍아먹는 짓을 하겠어요? 몬스터 상대하는데도 버거운데…”
“맞는 말이야. 근데… 말 놓지 않을 거야? 나이 차도 고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이드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여성이란 생각이 든다. 센티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덕분인지 다섯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지그레브안에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센티의 집은 지그레브의 주택들이 모여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빼곡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수 십, 수백은 되어 보이는 집. 거기다 모양도 조금씩의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가 같았다. 센티의 집과 델프씨의 집은 큰 길 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집에 문이 두개 달려있었다. 하지만 들어와서 보니 두 집 사이를 나누는 담장이 없었다. 대신 넓다란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아도 두 집의 왕래가 얼마나 잦은지 짐작이 갔다. 센티 집 쪽의 문으로 들어온 델프는 정원을 지나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럼 집에 가서 쉬고있어라. 저녁이 준비되면 부를 테니까. 그리고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어라. 센티, 너도 너 보단 너희 숙모의 요리 솜씨가 좋은 거. 인정하지? 고마운 만큼 맛있는 음식을 대접 하는게 좋은 거야. 그럼 있다 보자.”
처음 들어선 센티 집의 거실은 별달리 꾸며져 있지 않았다. 특별히 장식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실이라면 있어야 할 것만 있다고 할까? 그래서 상당히 직설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분위기의 거실이었다. 그것은 거실 뿐 아니라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였다. 이드와 라미아의 방으로 주어진 방도 꾸며지지 않은 단순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방의 중앙에 놓인 침대와 밋밋한 느낌의 붙박이 장. 그리고 창문에 매달린 단색의 단조로운 커텐까지 누가 꾸몄는지 센스가 있다고 해야할지, 멋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인테리어다. 이드와 라미아 앞으로는 하나의 방만이 주어졌다. 라미아가 같이 잔다는 말을 당당히 해준 덕분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센티와 모르세이의 표정은 상당히 미묘했다. 그리고 그 미묘한 표정이 풀리지 알 수 없는 뜻을 담은 눈총을 이드는 받아야 했다.
좌우간 결국 하나의 방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을 볼 수 있었다.
“자, 이 옷으로 갈아입어. 집에 있을 때는 편하게 있어야지.”
거실로 음료와 함께 편해 보이는 옷가지들을 가져 나온 센티가 두 사람에 옷을 건넸다. 현재 입고 있는 옷 이외에 따로 짐이 없는 두 사람이라 배려해 준 듯 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현재의 옷이 편하긴 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센티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옷은 라미아만 갈아입을 수 있었다. 이드는 아공간에 넣어 놓았던 옷을 갈아 입어야했다. 이드가 입기에 센티의 옷은 작고, 모르세이의 옷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가디언이란 말이지?”
“응, 한국에서 가디언에 소속됐지. 하지만 명령을 받는 일은 없어.”
센티의 말에 라미아가 대답했다.
“그럼 두 사람이 할 줄 아는게… 라미아는 마법이고, 이드는 무술과 정령술?”
“맞아.”
“대단하네! 그 나이에 벌써 가디언으로 활동한다면 정말 굉장한 거잖아. 내가 가디언을 몇 번 보긴 했지만 전부다 너희들 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었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십대 초? 그런데 너희들은 아직 십대잖아.”
그때 가만히 누나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르세이가 은근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가디언이란거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되기 어려워?”
그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중 센티가 쯧쯧 혀를 찼다.
“너 가디언 되고 싶다는 생각 아직도 못 버렸니?”
“뭘… 그냥 묻는 것도 안되냐?”
모르세이는 누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가디언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으로, 십대 아이들이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 번씩은 생각하듯 가디언 역시 모든 사람들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특히 십대의 아이들이라면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사용하며 몬스터와 싸우는 가디언은 가수나 탤런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상인 것이다. 그런 십대의 한 명인 모르세이 역시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가 되길 바라던 가디언이 앉아 있으니 질문을 던져 온 것이었다. 이드는 그런 모르세이의 눈빛에 빙긋 웃어 보이며 들고 있던 컵을 내려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세… 뭐라고 할까. 음… 맞다. 네 질문이 잘 못 됐다고 해야겠다. 질문내용을 바꿔서 물어야돼. “무술이나, 정령술, 마법을 수련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라고. 가디언이 되는 건 쉬워. 실력만 되면 가디언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실력을 키우기가 힘들지. 수련이 힘든 거야.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 재능이란 것을 매울 만큼 노력한 사람만이 그 노력의 결실을 보고 가디언이 될 수 있는거지. 간단히 말하자면 얼만큼 수련해서 실력을 얼만큼 키웠는가가 가디언이 되고 못 되고를 결정한다는 말이야.”
그 설명에 모르세이는 물론이고 센티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러면 내가 수련하면 가디언이 될 수 있을까?”
그 말에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그건 본인이 직접 수련하지 않는 한 잘 모르는 일이지만… 잠깐 손 좀 줘볼래?”
이드의 말에 모르세이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가디언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주위에 뭐라 도움의 말을 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누나역시 고개를 저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가능성을 가려줄지도. 이드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던 모르세이 어느 순간 자신의 어깨 부근이 묵직하게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드의 손이 떨어지며 그 묵직한 느낌이 같이 사라졌다. 모르세이는 그 느낌이 이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때?”
센티가 이드의 손이 떨어지자 물었다. 비록 평소 안 된다고 하긴 했지만, 동생이 가디언으로서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듣게 될텐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쎄요. 우선 체격이나 골격으로 봐서 외공엔 어느정도 수련하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공 쪽으로는 안될 것 같아. 선천적으로 혈도가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이드는 그렇게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재능이 없다고 답을 해야하니 조금 어려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드만의 기분이었다. 센티와 모르세이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거든? 좀 쉽게 설명해 줘. 외공은 뭐고, 내공은 뭐야?”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설명해줘야 좋을까. 잠시 아무 말 없이 머리를 굴리던 이드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검기(劍氣), 검기 본적 있지?”
이 질문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단히 설명해 줄게. 외공은 검기를 사용할 수 없어. 하지만 내공을 익힌 사람은 검기를 사용할 수 있어.”
그 말에 모르세이가 입맛을 다시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검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자 가디언에 대한 호기심이 팍 꺼진 듯 했다. 보통 사람이 가디언하고 떠올리면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와 검기에 감싸인 검을 휘두르는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검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으니… 그때 모르세이를 슬쩍 바라본 센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기절했을 때 네가 날 깨어나게 하고, 또 몸이 가뿐하게 된 게 그 내공 때문이란 말이야?”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르세이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그에겐 배아픈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맞아요. 내가 가진 내공으로 누나의 내기를 북돋우어 준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누나 몸이 약한게 바로 이 기가 다른 사람보다 약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인데… 내공이란 거 익혀볼 생각 없어요?”
“내가?”
“… 뭐?!?!”
역시 놀라는 군. 이드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공을 배운다고 해서 거창하게 검기를 사용하거나 그런 건 아니예요. 누나의 약한 혈도와 기운을 생각하면 그렇게 되긴 어려워요. 단지 내공의 연공법을 연마하면 누나의 허한 기가 단련돼서 보통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아요. 꾸준히 연마해야 될 거예요. 누나의 상태를 보자면… 일년? 그 정도 되어야 효과가 나타날 거예요.”
그러나 두 사람에게 이드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공을 배울 수 있다는데, 허약한 몸을 고칠 수 있다니. 귀가 번쩍 트이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넋을 놓고 있을 때 벌컥 현관문이 열린 것이다.
“식사 준비 다 됐다. 밥 먹으로 와라!”
“우와악!”
“아악… 삼촌!”
델프의 갑작스런 등장에 넋을 놓고 있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그런 반응에 오히려 델프가 놀란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뭘 그렇게 놀래냐? 빨리들 나와 저녁준비 다 됐으니까.”
델프는 그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 슬금슬금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그게 정말이냐? 그렇게만 된다면 더 없이 좋지.”
델프는 술잔을 들고서 흥분된다는 듯 센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의 앞으로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져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 놓은 식탁 위로는 이런저런 다양한 요리들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식탁 주위로는 이드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식탁이 놓여 있는 곳은 두 집 사이에 만들어진 커다란 정원 위였다. 델프가 그곳에서 가벼운 저녁파티를 연 것이다. 식탁은 물론이고, 음식 그릇과 여러가지 요리 도구를 보아서 이렇게 정원에서 식사를 하는데, 두 집 모두 익숙한 듯 했다. 식탁 주위에는 이드와 라미아가 처음 보는 새로운 얼굴이 두 사람 있었다. 다름아닌 델프의 아내와 딸이었다. 소개받기로는 아내의 이름이 므린, 딸의 이름이 코제트라고 했었다. 므린은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에 미소가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코제트는 모델마냥 큰 키에 조금은 화려한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 가족은 현재 센티로부터 이드의 내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놀라고 반가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모두 센티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것 때문에 양 쪽 집안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거 형님이 돌아오시면 엄청나게 좋아하시겠구만. 좋아하시겠어. 하하하…”
“정말이요. 항상 센티가 몸이 약한걸 걱정하셨는데. 이젠 쓰러지는 일은 없는거네?”
므린이 센티를 바라보며 빙긋에 웃어 보였다. 그것은 조카를 바라보는 숙모의 눈길이 아니라 딸을 돌보는 어머니의 눈길과 같았다. 하긴 이렇게 붙어살고 있는걸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예요. 숙모. 지금 배워도 일 년 후에나 효과가 있다는데요. 뭐.”
“그래도 그게 어디냐? 이놈아. 하하하… 자네한텐 정말 고맙구만. 이거 저녁식사 대접 가지고는 모자라겠어. 자자… 한 잔 받게나.”
이드는 이야기를 들은 후 연신 싱글벙글 거리는 델프가 건네는 맥주잔을 받았다.
“아니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걸요. 사정만 이야기한다면, 가디언측에서도 내공심법을 가르쳐 줬을 겁니다. 그러니까 괜히 신경쓰지 마시지 마세요.”
이드의 말 대로였다. 인류를 위해 각파에서 내어놓은 그 많은 비급들 중에 센티에 맞는 내공심법 정도는 충분히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심한 무공을 내어주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 바로 그게 중요한 거지. 지금까지 아무도 이 녀석이 어떻게 아픈지 알아보지 못했거든. 그런데 자네가 알아보고 방법을 알려준 것 아닌가. 자네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오랫동안 허약하게 살아야 됐을지 모를 녀석이란 말이지.”
이드는 그의 말에 이번엔 아무말 없이 맥주로 입안을 축였다. 고기특유의 텁텁한 느낌까지 맥주와 함께 씻겨내려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델프가 다시 술잔을 채우다 므린에게 술병을 뺏겨버리고서 사탕을 빼앗긴 아이와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술병을 달라고 하는 소리를 못하다니…
‘공처가로군. 므린씨는 척 봐서는 사나워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누군가의 마음에서 공처가로 낙인찍힌 델프는 그나마 따른 술이나마 아껴 먹으려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술병을 달라는 요구는 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이드군은 여기에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지그레브의 지리는 알고 있나?”
몰라도 됬다. 지금까지 모르는 곳에서도 잘 다녔던 이드와 라미아였다. 또 이곳에 사는 사람 중 제로의 대원들이 있는 곳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아니요. 초행이라…”
“그럼 센티가 안내해주면 되겠구만. 그럼 되겠어. 자, 한잔들 하자고.”
델프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말을 하고는 슬그머니 다시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 마디에 고양이 앞의 쥐 마냥 그의 손과 머리가 동시에 축 늘어져 버렸다.
“여봇!”
다음 날. 전날의 밤늦게까지 이어진 파티 덕분에 양 쪽 집 모두 늦잠을 자고 말았다. 덕분에 오늘 아침이 상당히 시끌벅적했다. 델프와 코제트의 출근시간이 늦어 버린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 때문에 밥도 먹지 못하고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두 사람을 뒤에서 눈을 비비며 배웅해준 이드들도 그때서야 일어나 씻을 수 있었다. 아침은 므린씨의 말에 따라 그녀의 집에서 먹었다. 두 사람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날의 아침이 그대로 남아 버린 때문이었다.
전날도 느낀 거지만 므린씨의 요리들은 상당히 담백해서 정말 먹기가 편했다.
아침을 먹은 후 이드와 라미아는 센티의 안내로 지그레브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모르세이는 집 앞에서 헤어져 델프씨가 있는 창고로 가버렸다. 양 집안을 통틀어 한 명 있는 남자인 덕분에 그가 일을 거들면서 배우고 있었다. 남녀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워낙에 힘든데다 코제트는 다른 일을 하길 원했고 센티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저절로 모르세이가 일을 거들고, 배우게 된 것이다. 센티의 집에서 시내의 번화가까지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 여유 있게 도착 할 수 있었다. 센티의 집이 시내 주변에 위치한 덕분이었다. 어제 센티의 집으로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움직였는데 말이다. 센티의 안내로 나오게 된 지그레브의 시내 중심가는 상당히 번잡하고 바쁜 것 같았다. 아마도 유동인구, 특히 상인들이 많이 출입하는 지그레브의 특징인 듯 했다. 그리고 그런 때문인지 대로의 양쪽을 따라 여러가지 생각도 못했던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가게들의 나열에 작게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몇 몇 도시들을 지나오고 구경도 해봤지만, 이 곳처럼 다양하고 많은 가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곳은 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어때, 구경할게 꽤 많지?”
“정말~ 복잡하기는 하지만 진짜 구경할게 많아. 가게들만 보고 돌아다녀도 하루는 금방 가버릴 것 같아.”
라미아의 말에 센티는 자랑스런 표정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고향을 칭찬하는 라미아의 말이 과히 듣기 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뭐부터 구경시켜 줄까’라고 생각하던 센티는 이드의 얼굴에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이드를 불렀다.
“참, 그런데 너 이곳에 볼일이 있다고 했지?”
그 말에 라미아처럼 주위에 시선을 뺏기고 있던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그냥 편하게 말 놓으라니깐. 근데 지그레브 어디에 볼일이 있는 건데? 내가 정확하게 안내해 주지. 이래봬도 이곳 지그레브가 고향인 사람이라 지그레브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세세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디 말해봐.”
“제로의 사람들을 만나러 왔어요. 아니, 왔어.”
순간 센티의 표정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뿐이지 비명을 지르는 표정과 다를게 없었다. 곧 주위를 돌아 본 센티는 이드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고서 비밀이야기를 하듯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 분명히 어제 가디언과 제로가 싸울 일은 없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제로의 사람들은 왜 만나겠다는 거야!!”
이드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다는 얼굴의 센티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언제 싸운다고 했… 어? 제로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 사람 말을 똑바로 듣고 말해.”
센티는 그 말에 가만히 뭔가를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이드가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센티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이드에게서 물러섰다.
“험, 험… 뭐, 잠시 착각 할 수도 있는거지. 근데… 제로를 만나러 왔다면… 좀 더, 한 사일 가량 더 기다려야 될텐데?”
그 말에 라미아와 이드의 시선이 동시에 센티의 얼굴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한 마디 질문을 담고 있었다.
“왜?”
두 사람이 동시에 쏟아낸 질문에 센티는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앞과 뒤쪽을 각각 한번씩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 저쪽과 저쪽의 도시 외곽에 있는데, 그쪽으로 사람이 찾아가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월요일 뿐이야. 그 외에 도시에 어떤 문제가 생기가나 몬스터가 습격하면 바로 출동하지. 하지만 그 외의 일로 할말이 있으면 매주 월요일 날 만 찾아 가봐야 되. 그때밖에 만나주지 않거든. 아주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뭐, 바쁜 일이야?”
그녀의 말에 이드는 푹 한숨을 내 쉬었다. 오기만 하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하루만 더 일찍 왔었다면 바로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이라도 쳐들어간다면 만날 수는 있겠지만, 그 후에는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 듯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지. 일주일 동안 기다리는 수밖에.”
“일주일 동안 잘 부탁할게. 언니”
라미아가 센티를 바라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당연했다. 상대는 일주일 동안 머물 집의 집주인이니까. 미리 잘 보여놔야 될 것 아닌가. 의도야 어쨌던. 센티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라미아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걱정마. 일주일 동안 내가 편안하게 써비스 해줄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하던거나 계속하자. 시간도 남아도니까 말이야.”
하던 거란 건 당연히 시내관광이었다. 센티의 말대로 그녀는 지그레브 시내의 모든 대로와 골목길에서부터 볼만한 것들이 있는 곳까지 자신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덕분에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뒤를 강아지 마냥 따라다니며 이곳저곳 지그레브의 핵심적인 관광거리를 구경하고 다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관광을 갈 때 가이드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반나절의 시간동안 세 사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구경했다. 또 구경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세 사람이 찾는 곳은 사람이 많은 곳이 대부분이었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미아의 미모에 저절로 시선을 모으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센티가 잘 아는 곳만을 돌아다닌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거기다 점심까지 밖에서 해결한 이드는 이제 어딜 갈까 하고 목적지를 고르고 있는 센티를 말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남아 도는게 시간이다 보니, 천천히 구경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공심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센티가 너무도 가볍게 발길을 돌려버린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므린이 세 사람을 맞아 주었다. 두 집 식구가 모두 나가버린 덕분에 혼자서 점심을 해결하는 듯 했다. 그리고 혼자 먹기 심심하다며,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으면 같이 먹자는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은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과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부룩해져 버린 배를 두드리며 거실에 나온 이드들은 이어 므린이 끌여온 차를 먹으며 천천히 더부룩한 배가 꺼지길 기다렸다.
“이제 슬슬 배도 꺼졌으니 내공심법에 대해 설명해 줄게요.”
그 말에 호로록 두 잔 째의 차를 마시던 므린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흐음… 그럼 지금 내공심법이란 걸 배우는 거야?”
“네, 그것 때문에 일찍 들어 온 걸요.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정도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호호호. 조카의 은인인데 당연한 말을… 근데 내도 그 설명을 들어도 되는 거야?”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내공이란 어떤 것 인가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센티처럼 기와 혈이 약한 사람이라면 정확한 내공과 기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였다. 그레센에서 그래이들에게 금강선도를 가르쳤던 것처럼 해도 되지만 그건 그래이들이 건강한 몸인데다 내공이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센티는 너무 약했다.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서 기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내공과 기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이다. 똑바로 알아야 이상이 생기더라도 대처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공과 기에 대한 설명 만했는데도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배운다면 하루종일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도 꼭 필요하고 기억해둬야 할 것만 설명한 덕분에 짧게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설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소파에는 단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바로 설명을 하고 듣는 당사자인 이드와 센티뿐이었다. 므린은 진작에 방에 들어가 잠들어 버린 후였고, 라미아역시 이드의 다리를 베고 잠들어 버린 후였다. 센티역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겨우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므른과 같이 방에 들어가 잠들었을 것이란 것을 그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센티의 몸은 그대로 옆으로 미끄러지며 소파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들려오는 숨소리에 이드는 자신의 한계를 찬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가 하는 설명이 그렇게 지루했나? 어째… 전부다 잠이 들어 버린 거냐고!”
하지만 그런 이드도 해진 후 들려오는 델프와 모르세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뭐야. 불도 안 켜고. 어둡게…”
“삼촌… 다 자는 것 같은데요.”
라미아에게 다리를 내어준 체 이드역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이드들은 다음날밖에 나가지 않았다. 므린이 일찌감치 자리를 피해버린 가운데 센티가 배울 금강선도(金剛禪道)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어야 했고, 이드의 도움을 받아 운기까지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운기하면서 생기는 이상이나 궁금한 점을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니 그날하루가 그렇게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래도 중간에 이드가 직접 자신의 내력으로 운기를 시켜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일주일이란 시간을 가지고서 운공을 해낼 수 있었을지. 어쨌든 그날 센티는 자신의 허약한 몸을 바꿀 내공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효과는 일 년 후에나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