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 233화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으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소리를 들어보아 세 명의 인원인 것 같았다. 그 중 한 명은 발자국 소리가 작고 가벼운 것이 상당한 수련을 쌓은 고수인 듯 했고, 그 뒤에 사람들 역시 보통 사람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묵직한 발소리가 뒤따랐다. 무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법사도 아닌 듯 했다. 이드가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가장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던 제일 실력이 좋아 보이던 검사가 천천히 이층에 그 모습을 보였다. 검은색의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 그저 상대의 눈에 고통을 주지 않을 정도의 얼굴을 가진 그는 머리가 정말 엉망이었다. 마치 방금 전에 번개라도 직통으로 두드려 맞은 듯 머리카락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뻗쳐 있었던 것이다. 그를 보는 순간 이드와 라미아는 서로를 마주보며 한가지 이름을 외쳤다.

‘페인 숀!!’

그 뒤를 이어 검을 든 체격이 좋은 남자 두 명과 인상 좋은 통통한 몸집의 노인이 올라왔다. 이층으로 올라선 노인은 코제트를 바라보고 반색을 하고 다가오다 한 쪽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고는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름 아닌 그가 바로 이 ‘캐비타’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코제트는 그런 그를 향해 상황을 설명했고, 그 목소리에 페인을 비롯한 다른 검사 두 명도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페인은 기절해 있는 남자와 이드, 그리고 버서커의 저주가 걸린 마법검을 번갈아 보다 뒤의 검사 두 명에게 명령해 시체를 치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멍해 있는 동양인을 깨워 자초지정을 전해 들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다. 세 사람은 용병으로 검은 우연히 지나온 산 속의 동굴 속 부셔진 바위 속에서 지금은 기절해 있는 친구가 찾게 됐다고 한다. 알고 지내는 마법사에게 마법검이란 것을 듣고 친구가 몇 번 사용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사용할 때부터 이상하게 해제가 잘 되지 않아 몇 번 고생을 했었지만, 그 위력에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식사를 하다 이미 죽은 친구와 기절해 있는 친구가 투닥 거리다 우연히 칼을 뽑았는데, 바로 버서커로 변해 버리더란 설명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되자 페인은 이드와 라미아에게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미녀와 미남이 지그레브에 있다는 소리를 듣진 못했으니 절대 외부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이렇게 일을 처리해 줘서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큰 사고가 날 뻔했어. 그런데 들어보니 대단한 실력을 가졌더군. 버서커 전사를 쓰러트려 버리다니 말이야.”

꽤나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가식적으로 인사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이드는 그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요. 별 말씀을요. 제 일행의 아는 사람이 위험한 상황이라 나선 것뿐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나서기가 어렵지. 그런데 그런 실력이라면… 용병이나, 가디언 같은데. 어느 쪽인가?”

“용병 같은 가디언입니다.”

이드는 사실대로 말했다. 가디언과 제로가 싸우긴 했지만 정말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던 것 아니었다. 또 이들은 국가의 횡포에 대항하여 모여든 사람들. 그 중에서도 몬스터와 같이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제로의 일에 같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을 속여서 좋은 것은 없는 때문에 사실대로 밝힌 것이었다. 페인은 그 말에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용병 같은 이란 건… 무슨 뜻인가?”

“용병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니까요. 저희 둘도 똑같거든요.”

그 말에 페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때 뒤쪽에 물러나 있던 ‘캐비타’의 주인이 다가와 허락을 받고 손님들을 해산시켰다. 또 일층에 있는 손님들까지 오늘의 일을 들어 모두 내보냈다. 다만 코제트를 통해 이드들만은 일층으로 안내되어 왔다. 주인은 그곳에서 이드와 라미아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말을 했다. 이에 이드의 요청에 따라 페인도 같이 초대되었다. 일층은 순식간에 치워졌다. 웨이트레스들이 유능한 때문인지 금방 치워진 식탁 위로는 따끈따끈한 요리들이 새로 올려졌다. 처음 코제트가 가져왔던 요리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요리들이었는데, 갑작스런 사건 때문에 손님들께 나가지 못한 요리들인 것 같았다. 일층 식당 내부엔 어느새 이드와 라미아, 코제트와 센티. 그리고 페인의 다섯 명만이 남게 되었다. 다섯 명은 모두가 양껏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엄청난 양의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페인은 그 중 몇 가지 요리를 집어먹었다. 몇 가지라곤 하지만 ‘캐비타’의 요리가 유명한 탓인지 그는 상당한 양을 먹었다. 물론 나머지 네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드와 라미아는 왜 센티가 이곳으로 두 사람을 데려왔는지와 왜 사람들이 그렇게 줄을 서서 ‘캐비타’의 요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요리들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던 것이다. 고기 요리는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요리는 싱겁지 않았다. 모든 재료가 싱싱했고 인공적인 맛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섯 사람 모두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때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열심히 나이프와 포크만을 놀려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배가 불렀다고 생각될 때 페인이 고개를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단검이지만 검을 든 버서커를 맨손으로 잡은 소년과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아름다운 소녀. 더구나 두 사람은 가디언이라고 밝혔고, 자신을 식사에 초대했다. 페인은 이 두 사람이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곳에 무슨 일로 왔나? 용병 같은 가디언이라고 했으니 위쪽의 명령을 받은 건 아닐 텐데?”

이드는 페인이 먼저 꺼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둘의 생각에 이곳을 찾아 온 거죠.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제로의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구요.”

그 말에 페인은 흥미 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빼더니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우리들을 만나러 왔다라. 무슨 일로?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으니 이야기해 주겠나? 들어주지.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 말이야.”

신세졌다는 건 버서커를 보고 말하는 거겠지.

‘여기서 그냥 물어보실 거예요?’

옆에서 과식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포크를 놀리고 있던 라미아가 마음속으로 물어왔다.

‘응, 어차피 일주일 후에 묻는 것과 다를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좋다면 좋은 상황이잖아.’

라미아에게 대답한 이드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제로의 사람 중 누구 한 명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제로가 다니는 전장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로의 대원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찾아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 끝에 같은 제로의 대원들에게 물어보기로 했죠.”

이드의 말에 페인은 물론이고 그저 볼일이 있다고만 했던 이드의 목적을 듣게 된 센티와 코제트도 귀를 쫑긋 세우고서 이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페인은 이드의 이야기에 내심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누굴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에게 만날 생각이 있다면 만나게 해 주는 건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 자신은 그저 연락만 해 주면 끝인 것이다.

“가능한 이야기야. 우리가 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을 강제해서 잡아두는 단체도 아니니까. 충분히 만나볼 수 있어. 그런데, 자네가 만나겠다는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가? 혈족? 친구?”

“아니요.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그녀가 가진 물건이 제가 아는 사람의 것인 것 같아서 확인을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더불어 물어볼 것도 한 가지 있고요.”

만나겠다는 이유가 조금은 허탈했던 때문일까. 페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북적거리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수시로 머리를 만져대는 것이 아마 버릇인 듯한데. 호로의 말대로 손질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손질해도 아무 소용없는 저 버릇 때문에 저런 머리 상태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하군. 고작 물건 하나 확인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말이야. 아니면 그 물건이 엄청나게 중요한 건가 보군. 그런데 혹시 도둑맞은 물건인가?”

“아니요. 잃어버린 물건입니다.”

페인은 이드의 대답을 들으며 생각을 달리했다. 어쩌면 만나게 해 주기 어렵겠다고. 그 물건이 뭔지, 또 제로의 대원이 그 물건을 가진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오라고 하면 올지 오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또 중요한 물건이라고 하면 내어 주려고 할까? 굳이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이 소년은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버서커를 먼저 처리해서 시민들의 목숨을 건졌고, 방금 자신이 신세를 갚는다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말해 보고 안 되면 그만이고…

“좋아. 한 번 알아는 보지. 그럼 찾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제가 찾는 사람의 이름은 룬, 룬 지너스입니다.”

스릉

이드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페인의 검이 검집에서 그 곧고 싸늘한 몸을 반이나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페인의 얼굴까지 검날처럼 싸늘이 굳어 있었으며, 방금 전까지 느슨해 있던 마음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네가 말하는 룬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룬 님이 맞는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페인의 검이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코제트와 센티는 갑자기 검이 등장하고 분위기가 굳어지자 기겁하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가슴이 답답하게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으윽… 아무래도 체한 것 같아.’

그럴 만도 했다. 살기를 뿌리는 미친 버서커를 봤고, 시체를 본 데다 다시 이런 상황이라니. 체할 만도 했다. 저녁때 꽤나 고생할 것 같은 두 여성이었다. 페인은 제로의 대원들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룬의 이름에 당황하고 경계하며 검을 뽑긴 했지만 막상 상대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무조건 검을 휘두를 순 없었다.

‘제길 이럴 땐 데스티스가 있어야 되는 건데…’

페인은 자신과 함께 지그레브를 책임지고 있는 퓨와 데스티스를 생각했다. 원래 도시를 관리하고 몬스터를 상대로 계획을 짜는 건 그들이 했었고, 자신은 행동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의 문제도 그들이 대처하는 게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페인은 잠시 검을 들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드를 바라보다 검을 다시 집어넣고서 코제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센티는 그가 검을 집어넣으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했다. 하지만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 더 이상 요리를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또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소화제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코제트씨 여기 전화기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캐비타’의 유명인인 코제트의 이름은 페인도 알고 있었다.

“저기… 저기 카운터 아래에 있어요.”

페인은 그 말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돌아왔다.

“이야기는 조금 있다 퓨와 데스티스가 돌아오면 계속하자.”

이드는 그 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호로에게 들었던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생각했다. 그때 라미아는 코제트와 센티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두 사람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었다. 페인이 풍기는 분위기가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으면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을 테니까 먼저 돌아가 있어요. 우리도 이야기 끝나는 대로 집으로 갈게요.”

그녀의 말에 코제트가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면 고개를 흔들었으나 코제트를 다시 부르겠다고 하자 센티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뭐, 두 사람이 제일 먼저 찾을 곳은 집도다 약국이 될 테지만 말이다. 그녀들이 나가고 난 후 식당 안으로는 향긋한 요리 냄새와 더불어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페인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저절로 조용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귀에 들리는 범위 안에서 일 뿐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페인 역시 이드와 라미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풀 가동시켜서 회전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나게 떠드는 사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캐비타’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호로가 앞서 설명했던 것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상대를 알기에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페인의 말에 따라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 페인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앞서 이드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 하나의 더함이나 뺌도 없이 고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두 사람 다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깊게 로브를 눌러썼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있어서 정확하게 어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데스티스의 입이 힘들게 열리며 이드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룬 님께 무슨 물건을 확인한다는 건가요? 또 할 말은 뭐죠?”

이드는 그녀의 말에 라미아와 의논한 대로 입을 열었다.

“브리트니스. 제가 찾고 있는 검의 이름이죠. 헌데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룬이란 아가씨가 가진 검의 이름이 똑같더군요. 그래서 확인하려는 거죠. 그리고 할 말은… 직접 보게 됐을 때 말하죠.”

하지만 이런 이드의 말에 상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니, 별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과 어이없음이란 감정이 그들이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태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브리트니스. 그들 역시 룬이 항시도 손에서 쉽게 놓지 않는 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듣기로 엄청난 힘이 깃든 검이라는 말도 있었다. 헌데 지금 눈앞의 소년이 그 검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 검은 그분의 것이에요.”

테스티스가 나지막이 경고하듯 이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룬은 여신이며, 구원자였다. 투시 능력을 가지고 국가에 잡혀 들어가 온갖 치욕을 당하고 결국엔 투시에 집중하기 위해서 두 눈까지 멀어서 작은 골방에 갇혀 있을 때, 그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다름 아닌 룬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이면서도 빛을 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헌데 그런 룬이 남의 물건을 자기 것처럼 사용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녀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특히 요즘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어 룬의 말을 따르지 못한 것 때문에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인데, 거기다 이드의 말을 들었으니 마음의 상처 위로 소금을 뿌린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드는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슬쩍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 룬인가 하는 여자아이와 뭔가 상관이 있는 모양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름이 똑같다는 것은 그냥 흘릴 수 없거든요. 게다가 똑같은 검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도 확인이라고 한 거고요.”

확실히 이드는 룬의 검이 그녀의 소유가 아니란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제야 테스티스의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함부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우리가 비록 지금의 제로와 같이 행동을 하진 않지만, 그대도 제로의 당당한 대원이니까요. 룬 님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참지 않아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마 이 여성도 룬이란 아이가 나라에 잡혀 있는 것을 구해 준 경우일 것이다. 이 과도한 충성심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때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의 감각 안에 은밀히 움직이는 마법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드는 좀 더 그 기운에 관심을 기울이자 그 기운의 출처와 도착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퓨라는 마법사에게서 출발해 페인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메세지 마법이네요.’

라미아의 말이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호로가 말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유가 바로 그의 메세지 마법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페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퓨를 대신해 질문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할 말이란 건 또 뭐지? 알 수 없을까?”

“죄송하지만 그건 직접 묻고 싶은데요.”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름 아닌 신이 드래곤에게 내려준 계시의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인데, 그걸 말하게 되면 자신도 드래곤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알리게 된다면 알게 되는 사람을 최소로 하고 싶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테스티스가 확인을 하듯이 이드를 향해 물었다.

“물론이죠. 전 검의 확인과 한 가지 의문뿐이죠. 정말 그것만 확인하면 그만인걸요.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 후~ 좋아요. 연락은 해 주겠어요. 룬 님께서 가지신 브리트니스가 룬 님의 소유라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 또 당신의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서요. 하지만 룬 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실지는 장담하지 못해요.”

끄덕끄덕.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외엔 이야기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월요일 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페인이 마지막으로 ‘캐비타’의 문을 나서며 이드를 쓱 돌아보았다.

“이걸로 신세는 갚은 거다. 그리고 월요일 날 오면 그 버서커를 쓰러트린 실력 한번 보자고.”

“고마워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카운터에 있는 전화로 코제트를 불러냈다. 가게의 문을 닫기 위해서였다. 이미 가게의 거의 모든 운영을 맡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코제트가 가게로 왔을 때 이드와 라미아는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집에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모습이 된 건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코제트는 양팔로 배를 감싸 안고는 핼쑥한 얼굴로 식탁에 엎드린 것이다. 그녀의 말로는 소화제를 먹고 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뱃속에서 전쟁이 터진 듯 요동을 친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드와 라미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가게 안을 치워야 했다. 마법과 정령을 이용한 가게 정리. 코제트는 아픈 와중에도 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는지 아픈 몸을 이끌고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마법과 정령술을 가르쳐 달라고 때를 쓰기 시작했다. 아까 식당에서 센티를 대하는 것을 보면 꽤나 강단이 있는 듯한 그녀였다.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후~ 지그레브를 떠날 때까지 꽤나 시달리겠구나.’

‘어쩔 수 없죠. 그냥 포기하고 한번 가르쳐 보는 수밖에요.’

그 후 이드는 코제트를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드와 라미아는 아침부터 코제트와 센티에게 시달려야 했다. 코제트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이드들을 맞은 것은 코제트 못지않게 엉망인 센티였다. 그녀는 욕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헤롱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체했는지 소화제도 소용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토해내는 두 여성이다. 소화제가 가진 바 약효를 발휘하기도 전에 다른 것들과 함께 몸 밖으로 쫓겨나 버리기 때문이었다. 약효가 뱃속에서 제대로 흡수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코제트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없을 뿐 별일 없을 줄 알았던 그녀도 센티가 토해대는 소리에 입을 막고 그대로 욕실로 달려가 버린 것이다. 므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어쩌지, 어쩌지를 연발하며 발을 구르기만 했다. 이드와 라미아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화제 역할을 하는 마법이 있을 리 없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내력 운기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떤 할 일 없는 마법사와 무림인이 그런 수법들을 만들어 내겠는가. 그 순간에 하나라도 더 마법을 배우고 말지. 덕분에 그녀들은 그날 밤늦게까지 그렇게 고생하다가 겨우 속이 진정되어 잠들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아침으로 내어진 것은 묽은 스프 한 그릇. 침대에 앉아 겨우 스프를 들이키고 어느 정도 힘을 차린 두 여성이 찾아간 것이 다름 아닌 이드와 라미아였다. 두 여성은 어제 자신들의 고생을 이드와 라미아에게 돌린 것이다. 또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말에 반응한 페인의 행동 때문에 체하게 됐으니까 말이다. 특히 센티의 경우, 이드와 라미아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검이 뽑혀 버리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냐며 따지는 통에 이드와 라미아는 진땀을 빼며 그녀들에게 자신들이 지그레브를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의 내용은 페인들에게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코제트와 센티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몰랐던 사실들에 놀랐다. 가디언들이 어떻게 결성됐는지, 정부에서 봉인 이전부터 그들의 존재를 알고서 이용했는지 등의 말에 놀라 버렸고,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정부란 단체에 분노했으며, 가디언들을 동정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직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과연 이런 설명에 코제트와 센티는 이드와 라미아에게 따지던 것도 잊고서 그저 놀랐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서였다. 존과의 약속도 있어서 나이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저 젊은 여성이 제로란 단체의 주인이란 것에 두 사람은 놀란 표정은 이런 것이다. 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로는 전 세계의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서 밀리지 않았던 단체였으니 말이다. 이야기를 마친 이드와 라미아는 두 사람에게 이야기의 비밀을 부탁했고, 코제트와 센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드와 라미아를 괴롭힌 덕분에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자신들이 함부로 떠들고 다닐 내용이 아니란 것을 그녀들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이드와 라미아가 시달리는 게 끝난 게 아니었다. 체한 것 때문에 일어난 분노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놀라운 이야기에 사라져 버렸지만, 전날 마법과 정령으로 인해 깨끗하게 치워지는 가게의 모습에 코제트가 마법과 정령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 것이었다.

원래는 식당에 나가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이럴 시간도 없겠지만, 전날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식당엔 일주일 간 휴업에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누가 사람이 죽었던 곳에 쉽게 들어가려 하겠는가. 때문에 사람들의 뇌리에 그 생각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문을 열려고 한 것이다. 사실 ‘캐비타’ 식당 정도의 명성과 지명도를 가졌기에 일주일로 끝난 것이지, 보통의 식당의 경우 문을 닫거나 몇 달간의 휴업에 들어가는 게 정상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이드와 라미아는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마법과 정령술을 가르쳐 달라고 달려드는 코제트 때문에 계속 시달려야 했지만 말이다. 도대체 체해서 헤롱거리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끈질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는 중에 며칠의 시간이 후다닥 흘러가 버렸다. 5일이라는 시간은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짧은 시간이고, 누군가에게 붙잡힌 사람이라면 길게만 느껴질 시간. 이드와 라미아는 이 중 후자에 속했다. 다름 아니라 코제트 때문이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떨어지지도 않은 채 마법과 정령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는 코제트 때문에 이드와 라미아는 5일의 시간이 그렇게 느리게 느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매달리는 코제트가 존경스러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식당을 꾸려나갈 생각인 코제트로서는 식당을 청소하면서 보여 주었던 마법과 정령들의 능력이 너무도 탐이 났다. 자신이 익히기만 한다면, 요리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종업원의 수를 줄일 수도 있으며, 가게의 청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란 것이 코제트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작 식당 경영을 위해 마법과 정령술을 익히려는 코제트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라미아가 그녀를 가르쳐 보기로 하고 코제트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코제트는 스스로 손을 들고 마법에서 물러났다. 그 엄청난 수식의 계산과 이 세상의 글씨가 아닌 듯한 희한하게 생긴 룬어들. 스스로도 공부를 못 한다고 생각지 않는 그녀였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이드의 정령술에 대한 설명과 소환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소환에 들어갔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마나가 너무 작은 데다, 친화력도 별로인지 운디네가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려다 돌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정령들은 인기척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정령술이 쉽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뒤로 코제트는 정령술에 매달려 버렸고, 자연스레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령술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이드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편하게 지내던 이드와 라미아에게 제로의 실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몽페랑의 패배 소식이 전해졌다. 제로의 실력을 구경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의 습격 덕분이었다. 몬스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고서, 소수로 도시를 공격하는 행위는 줄었지만, 가끔 한 번씩 해 오는 공격은 아주 강력했다. 오크와 트롤, 오우거까지 팀을 짜서 가해 오는 공격은 꽤나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제로는 그런 몬스터들을 도시 외곽에서 처리했고, 이드와 라미아는 그 모습을 본 것이다. 페인의 검강과 그와 함께 몸으로 직접 움직이는 서른 명 남짓의 검사들의 힘. 이드는 그 모습에 이들이 가디언들보다 정예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배에 이르는 몬스터를 상대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전투 중에 생각도 못 했던 존재들이 몇 섞여 있다는 점에서 이드와 라미아는 놀랐다. 조금 뻣뻣한 몸짓으로 몬스터를 잡아 찢어 버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인형. 그것은 다름 아닌 강시, 참혈마귀들이었다. 정말 요즘엔 잊고 지내던 녀석을 생각도 않은 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 뒤 집에 돌아갔을 때 델프 씨에게서 상인들에게 실려 온 몽페랑의 패배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인간들이 밀렸던 전투였단다. 전투 초반부터 찾아온 위기에 엄청난 능력을 가진 가디언이 나서서 해결을 했지만 그뿐, 그 일이 있은 다음 날부터 차차 밀리기 시작한 가디언과 군은 결국 나흘을 더 버티다 패배했다는 것이다. 전투 초반에 나왔던 엄청난 능력의 가디언도 그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단다. 이 대목에선 이드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전에 몽페랑의 시민들을 뒷문으로 모두 피신시켜 시민들이 몬스터에 의해 학살되는 것은 피했다는 것뿐. 지금 몽페랑은 폐허와 다름이 없다는 소식이었다.

월요일의 아침이다. 바로 페인들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어느 정도 해가 달아올랐다고 생각될 때 이드는 간단히 몸을 풀고서 라미아와 함께 제로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월요일 날 제로가 사람들을 맞는 것은 동쪽과 서쪽의 도시 외곽에 건물들 중 동쪽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다. 그 위치는 센티로부터 전해들은 두 사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월요일의 거리는 특히나 더 바쁘고 복잡했다. 하지만 외곽으로 빠질수록 그 복잡함은 한산함으로 변해 갔다. 제로가 사람들을 맞는 곳은 도시 외곽의 건물 중 동쪽에 자리 잡은 6층짜리 빌딩이다. 센티로부터 그 위치를 전해들은 두 사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월요일의 거리는 특히나 바쁘고 복잡했다. 그러나 외곽으로 빠질수록 그 복잡함은 놀라울 만큼 한산함으로 변해 갔다. 제로가 머물고 있다는 건물은 도시의 끝부분에 붙어 있었다. 하얀색의 깔끔한 건물과 그곳 앞쪽에 마련된 넓은 연무장. 아마도 이 연무장 때문에 도시의 외곽에 제로가 자리를 잡은 듯했다. 연무장은 담장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무릎 정도 높이의 흙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곳의 입구엔 한 사람이 밝은 평복을 입은 채 긴 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경비인 듯했지만 짐작이 맞을지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이드는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센티 누나가 경비 같은 건 없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라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연무장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경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저희들 때문에 그런 거겠죠.”

라미아의 짐작은 정확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창에 기대어 있던 경비를 서던 제로의 대원이 자세를 바로하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세 분이 5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꾸벅 숙여 알았다는 표시를 해 보이고는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연무장 여기저기에 몇 명의 제로 대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이드와 라미아가 들어서는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건물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바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5층에 도착하자 계단의 끝에 제로의 대원인 듯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었다.

“따라오게.”

단 한마디를 던진 그는 5층에 만들어진 여러 방 중 하나의 방 앞에서 방문을 열어 주었다. 방안은 손님을 접대하기 만들어진 듯 꽤나 안정적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 중앙에 길다란 소파가 양쪽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문을 등지고 있는 의자에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이드와 라미아는 열어 준 문을 통해 소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페인이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아.”

“고맙습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의 말에 소파에 앉았다. 세 사람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페인과 테스티브의 옷차림이 바뀌었을 뿐이다.

“차를 드릴까요? 아니면 음료수?”

테스티브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제로의 대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실 것이 있으면 시키라는 것이다.

“아니요. 감사하지만 생각이 없네요.”

이드의 대답과 함께 곧바로 방문이 닫혔다.

“그럼 저번에 말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죠. 괜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우선 룬 님께 연락이 되어서 이드 군이 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을 물어봤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우선 답부터 할게요. 룬 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검은 당신께서 우연히 얻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검의 주인 또한 따로 있다 하셨어요.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엔 그 주인이 없어 룬 님께서 허락을 받지 않고 무례하게 함부로 사용하고 계시다구요. 하지만 진정 이 세상의 물건은 아니라고. 이 세상엔 검의 주인이 없다고 하셨어요.”

“…..”

“안됐지만 이드 군이 찾는 물건이 아니군요.”

하지만 이드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라미아와 함께 마음속으로 열심히 룬이 했다는 말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도 신비한 듯한 이야기이며, 마치 신화 속 신에게 받아 든 신검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말이란 게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다르게 들리는 것. 차원을 건넌 이드와 라미아에겐 저 말이 차원을 넘어 온 검이라고 들렸다. 다른 사람에게 막연하게 신비하게 들릴 말들. 이 세상의 검이 아니라는 것. 주인이 따로 있지만, 이 세상엔 없다는 것.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에겐 그것들 모두가 차원과 관계되어지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의 검이 아닌 다른 차원의 검. 이미 혼돈의 파편이란 검의 주인이 있다. 이 차원엔 혼돈의 파편이 없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던 브리트니스가 맞는 것 같지?’

‘저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밖에 생각 안 돼요. 물론 다른 의미로 이 세상이란 말을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브리트니스가 그 브리트니스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는 건 사실이네요.’

‘… 더욱더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

그 말에 라미아가 슬쩍 이드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죠.’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잔잔히 잠든 수면과 표정의 테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세 분은 룬이란 분이 가지고 계신 브리트니스라는 검을 직접 본 적이 있나요?”

그 말에 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인 그인지라 가장 검에 관심을 가진 듯했다.

“물론. 그 검은 이미 룬 님의 분신이지. 룬 님을 뵐 때 본 적이 있다.”

“혹시 말입니다. 그 검이 전체적으로 붉은색에 황금빛이 녹아든 듯한 검신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흠칫.

이드의 말과 함께 페인을 비롯한 세 사람의 몸이 움찔했다. 특히 그 잔잔해 보이던 테스티브의 얼굴에는 폭풍우가 일어난 듯 잔잔한 경련이 일어났다. 당연했다. 아직 그 누구도. 제로의 대원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브리트니스. 그 검의 검신이 바로 이드가 말한 것과 똑같은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 맞는가 보군요. 제가 찾는 검도 그런 색입니다. 또 날카롭다기보다는 무겁고 무딘 느낌의 커다란 검이죠.”

이드의 말이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가만히 앉아 있던 페인의 검이 푸른색 검강을 머금고 뽑혀져 나왔으며, 가만히 앉아 있던 테스티브의 들려진 양손에서는 엄청난 압력의 물리력이 발휘되었다.

“미안하군. 파이어 크라벨!!”

“하아아압!!!”

쿠콰콰콰쾅!!!

두 사람의 기합성을 뒤따라 굉렬한 폭음과 함께 5층의 벽면 한쪽이 터져 나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