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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37화


차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겼던 방안은 잠시 후 페인이 차를 가져오며 다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자, 그럼 말해보게. 란 님이 가지고 계신 브리트니스가 자네들이 찾던 검인 건 확인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카제의 말에 이드는 라미아를 슬쩍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는 브리트니스를 직접 확인하고, 란이란 분을 만나 봤으면 합니다.”

이드의 말에 카제는 예상이라도 했던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분도 귀한 손님들을 만나고 싶어 하시니 쉬운 일이네. 브리트니스도 그분의 상징과 같은 검으로 언제든 그분과 함께 하니 당연히 란 님을 만날 때 볼 수 있을 것일세.”

“잘됐군요.”

이드는 그 말에 편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좀 일렀던 모양이다. 카제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눈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뽑혀진 도(刀)의 날(刃)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헌데 말이네… 자네는 정말 브리트니스를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눈으로 확인만 하면 되겠는가 말이야.”

나이란 이름의 날이 선 카제의 시선이 이드를 향했다. 카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브리트니스를 확인하는 것에서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더 바라는 것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단지 검을 한번 보기 위해서 자신들과 싸우며 찾아다녔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카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제로의 사람이 아닌 타인에게 브리트니스를 내보인다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란과 브리트니스는 제로가 가진 최고의 힘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이다.

‘흐응… 어떻할까?’

이드는 카제의 시선을 받으며 라미아를 불렀다. 두 사람 모두 카제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읽어낸 후였다.

‘이드 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전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라미아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브리트니스의 힘이 이 세계에 직접 발휘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제로로서는 절대 반갑지 않은 생각인 것이다. 이런 뜻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란을 만나기도 브리트니스를 보기도 힘들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진 커다란 힘에서 나오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 때문인지, 거짓을 모르는 엘프를 아내로 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제가 들고 있는 연륜이란 이름의 도(刀)를 피하기가 쉽지 않을 듯해서였다.

‘나도 네 말에 찬성!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지. 서로에게 진실하다 보면 신뢰도 쌓일 테고 말이야.’

이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에 라미아는 삐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 신뢰라기보단… 적의가 쌓일 것 같은 걸요.’

… 그래도 쌓이는 건 같잖아. 라미아의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말. 하지만 그대로 속으로 삼켜 버렸다. 말했다가는 라미아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이드는 잠시 떠오르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버리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따로 바라는 게 있긴 합니다.”

“으음…”

“저희는 브리트니스의 힘이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처럼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저희와 그 검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직접 이 세상에 끼어 들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알 수 없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그 말에 카제는 쓴 얼굴로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음. 앞서 라미아 양이 설명했었던 말이군.”

이드는 그렇게 말하는 카제의 목소리에서 이미 거부의 뜻이 묻어 있는 느낌을 잡아냈다. 카제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바로 란을 만나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카제가 굳은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찻잔은 어느새 탁자에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니, 우리 제로로서는 들어 줄 수 없는 말이군. 제로에 있어서 란 님과 브리트니스가 만들어 내는 힘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니까 말이네. 자네들의 뜻이 바르고 좋다는 것은 알겠지만 불가한 일이야. 또 나는 자네들에게 브리트니스의 힘을 제한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들 스스로가 말했다시피 자네들은 검의 주인을 알고 있을 뿐 검의 주인은 아니니까.”

카제가 단호한 목소리로 스스로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이드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쯧. 저분도 보기완 달리 상당히 고집이 있는 분인걸. 아무래도 앞으로 브리트니스를 보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론 힘들겠어.’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런데 저렇게 말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우리가 주인이라고 말할 걸 잘못했나 봐요.’

라미아는 아쉽다는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아니, 안 먹혔을걸. 란이란 아이가 검으로 통해 검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는데, 그 주인을 못 알아내겠어? 더구나 검의 주인이 혼돈의 여섯 파편이라는 엄청 특이한 녀석이잖아. 금방 들켰을 거야.’

라미아는 그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두 사람이 카제에게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것도 다른 차원의 사람이란 이유보다 자신들이 보인 힘과 브리트니스의 주인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 브리트니스를 소유한 제로인 만큼 전 주인의 힘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고 이드의 힘에 대해서도 보고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열심히 마음속으로 자신들만의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제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의 눈에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뜻을 이루지 못해 굉장히 풀이 죽은 것 같은 모습으로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한 쌍의 기운 없는 모습이 카제의 마음에 측은함을 자극한 것이다.

“허허허… 내가 말이 조금 과했던 듯 싶구만. 진정 귀한 손님들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는 처지에 말까지 거칠었으니. 미안하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브리트니스를 자네들에게 맡길 수는 없네. 이해해 주게나. 대신… 란 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어떤가.”

이드는 갑작스런 카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직접 만나는 것은 곤란하네. 란 님은 잠시도 브리트니스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네. 자네들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더구나 자네들의 실력은 나도 알 수 없을 정도의 현묘(玄妙)한 것이니까 말이야.”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별달리 얻는 것도 없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대화라도 가능하다니. 그녀가 신들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볼 생각이다. 그런데 그때 그런 이드의 마음속으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은 기회예요. 마법으로 통신하는 거라면 어렵긴 하지만 란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이드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카제는 그 모습이 자신의 말 때문이란 착각에 마주 허허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서로 다른 뜻이 담긴 것이지만 방안에 웃음이 흐를 때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페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방문 앞에 서 있는 그의 허리에는 귀여운 꽃무늬 앞치마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킥킥거리는 남녀의 웃음소리와 더불어 카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페인은 갑작스런 세 사람의 특이한 반응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나?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들어온 꽃무늬 앞치마. 선생님과 손님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과 함께 페인은 앞치마를 쥐어뜯듯이 풀어 등 뒤로 감추었다.

“저… 서, 선생님.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요.”

“쯧쯧쯧… 참 잘~~ 어울린다. 이놈아!”

카제의 말에 페인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보였다. 어떻게 된 것이 전날 이드를 향해 검을 들었을 때부터 하는 일마다 꼬이고 체면 구겨지는 일의 연속인 페인이었다.

이드는 제로에서의 식사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동양권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한 손님이라는 이드와 라미아보다는 카제를 신경 쓴 듯한 일식 요리들이었지만 그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맛은 이드와 라미아의 입도 즐겁게 해 주었다. 이 요리를 제로의 주방장과 페인이 같이 했다는데, 섬세함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의 어디에 이런 요리 솜씨가 숨어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는 5층에서 이곳 제로 지그레브 지부의 대장들과 같이 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이드와 카제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특히 말도 안 되는 말을 주장하던 침입자가 갑자기 귀한 손님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데스티스가 빙빙 돌려 카제에게 묻곤 했다. 하지만 카제는 그저 다음에라는 말로 모든 질문을 받아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퓨를 통해 란과의 통화(通話)를 요청한 여섯 사람이 식후의 풀린 마음을 페인의 차로 달래고 있을 때였다.

촤촤촹. 타타타탕.

날카롭게 귓가를 때리는 금속성이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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