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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40화


“그럼 지금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퓨!”

페인의 지시에 옆에 서 있던 퓨의 손이 가만히 허공에서 특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였다.

파하아아아

잠시 후 손의 움직임이 멈추자 탁자 위에 놓여진 수정이 한쪽 벽을 향해 밝은 빛을 뿜으며 천천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이드와 라미아는 기대 어린 눈길로, 카제와 페인들은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여 있는 방의 창밖으로 반쪽이 삼켜진 태양이 마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 이제야 룬과의 통화가 연결된 것이었다. 점심때부터 기다렸으니 제법 오래 기다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 통화가 늦어진 이유는 이쪽에 있으니 큰소리 칠 입장도 아니었다. 그 이유란 것이 카제와 이드의 대결로 인해 생겨난 먼지 때문이니 이드와 라미아로서는 뭐라 할 상황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로 인해 뜻하지 않은 대청소를 하게 된 단원들의 눈총을 피해 회의실에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법사들과 검사를 비롯해 특수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있어서 이런 시간에나마 청소가 끝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을 터였다. 좌우간 청소가 끝날 때쯤 되어서 카제도 마음을 정리했는지 다시 편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회의실로 찾아왔고, 두 사람은 좋은 분위기로 앞서의 대결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들어선 페인에 의해 지금에야 겨우 연결이 된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새 그곳의 빛이 뿜어지는 영역 안으로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의 얼굴이 완성되어 있었다. 방의 한쪽 면을 완전히 채우는 듯한 커다란 창을 배경으로, 폭신해 보이는 하얀색 의자에 앉아 있는 부드러운 붉은 빛의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이 아름다운 십대의 소녀.

“룬 지너스……”

이드와 라미아의 입에서 동시에 작디작은 소리로 소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소녀를 마법을 통해서지만 지금에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얼굴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이드와 함께 서 있던 페인과 나머지 두 명이 벽면에 나타난 룬의 영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룬 단장님. 지그레브를 맡고 있는 페인, 데스티스, 퓨입니다.”

“네, 반가워요. 페인 씨의 큰 목소리를 들으면 항상 힘이 나는 것 같아요.”

페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룬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답했다. 룬의 외모도 그렇지만 목소리도 제로라는 큰 단체의 수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룬을 바라보는 페인 등의 시선엔 하나 가득 믿음과 신뢰가 감돌고 있는 것이 그녀가 제로 단원들에게 얼마만큼의 사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알게 해 주었다.

“허헛…… 저런 덜렁이에게 그런 칭찬을 하다니 진짜인지 안다오, 단장.”

“호호, 하지만 저는 정말 듣기 좋은 걸요. 그리고…… 그쪽 두 분. 이드 님과 라미아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마법 영상을 통해 몇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군요. 소개할게요. 아직 어리고 부족하지만 제로의 단장으로 있는 룬 지너스라고 한답니다.”

다소곳하고 품위 있게 고개를 숙이는 자세가 꼭 그레센의 귀족 영애를 보는 듯했다. 그런 룬의 자기소개에 이드와 라미아 역시 반사적으로 그레센에서처럼 격식을 차려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쪽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제로의 단장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이드라고 합니다.”

“일행인 라미아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지너스 양.”

세 사람이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카제는 페인 등에게 눈짓을 해 차를 내오게 만들었다. 사실 룬과 이드, 라미아가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도록 세 사람을 일부러 밖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그들 역시 그런 사실을 은근히 눈치 채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덕분에 회의실 안은 뜻하지 않은 정적이 머물다가 카제의 말에 의해 물러났다.

“크흠, 단장. 우선 이 두 사람이 브리트니스를 찾아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한 것이니 만큼, 단장의 분신인 브리트니스를 잠시 두 사람에게 견식할 기회를 주고 그 뒤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소?”

그의 의견에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룬이 잠시 움직여 무릎 위로 붉은색의 둔중해 보이는 검을 올려 보여 주었다.

“제 곁에 머무르며 절 지켜 주고 있는 브리트니스랍니다.”

“……그렇군요. 브리트니스……”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룬의 말을 인정한다기보다는 그녀가 가진 브리트니스가 여섯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검이 확실하다는, 또 한 번의 확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비록 통신 마법을 통해서지만 여섯 혼돈의 파편이 가진 그 묘한 느낌이 브리트니스로부터 전해져 왔던 것이다.

“분명…… 페르세르의 검이 맞아요.”

라미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라미아의 말에 살풋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 아이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 페르세르라는 검주의 이름도 있었죠. 여러분이 브리트니스의 주인을 알고 있다는 게 다시 한번 확인되는군요.”

과연 그녀는 페르세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맞추었다. 만약 라미아의 의견대로 자신들이 검주라고 속이려 했었다면 곧바로 들통 날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검의 주인과 자신들 사이가 극도로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뭐,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사실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브리트니스는 자신들과 맞서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좌우간 룬의 말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가 단호함을 담고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브리트니스는 절대…… 절대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룬이 스스로 내린 결론을 말했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고 시작한 행동이 곧바로 이 이야기의 본론을 꺼내 버린 것이었다.

“호오, 그래요. 이미 카제님께도 들어 알고 있어요.”

라미아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카제도 그랬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룬의 단호한 태도는 더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브리트니스를 건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라미아는 거기에서 룬과 브리트니스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그대로 이드에게로 흘러 들어가 이드가 한 마디 하게 만들었다.

‘뭔가 있다는 말엔 동의하지만…… 여자의 직감이라고 하긴 그렇지 않아? 라미아, 넌 원래 검이었는데……’

‘흐흥, 이드님은 제 어딜 봐서 여자가 아니라는 거죠? 제가 보기엔 어디를 보나 완!벽!한! 여자인데 말이죠. 의심스럽다 하시면 오늘 밤에 구석구석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는데…… 그럴까요?’

‘아, 아니…… 그저 그레센에서 네가 검이었다는 거지. 그저…… 그런 거야. 신경 쓰지 마. 지금은 너무나 아름다운…… 그래, 네 말대로 완벽한 여성이니까 말이야. 아하하하……’

이드는 짐짓 크게 웃어 보이며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요 근래 들어 라미아에게 계속 휘둘리는 느낌이 들어서 한마디 해 본 것인데, 잘못하다간 본전도 못 건질 뻔했다. 뭐, 이런 상황에 별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도 늘 있는 서로에 대한 애정 표현의 한 방법이니 신경을 꺼 버리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혼으로 맺어진 두 사람만의 대화. 하지만 그런 대화가 오고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룬은 방금 전의 단호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조금 전 그 말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주장하는 듯했다. 그런데 과연 이드와 라미아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들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그때 이드가 룬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뭐, 단장님의……”

“그냥 편하게 룬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 고마워요, 룬. 룬의 말은 확실하게 알아들었어요. 제로라는 단체에서 룬 양이 가진 브리트니스의 힘이 얼마나 큰지도. 하지만 내 생각엔 지금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이드의 말에는 뭐가 이어져야 할 말이 빠진 느낌을 주었지만, 그것을 느끼기 전에 옆에 있던 라미아가 그 부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들 생각엔 지금 제로가 보유한 힘만으로도 충분히 제로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더구나 몇 개월 전과는 달리 몬스터라는 특별한 전력까지 함께하는 지금의 제로에 브리트니스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요?”

한마디로 이제 쓰지도 않는 필요 없는 물건 그냥 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이드와 라미아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 현재 제로의 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타의 특별한 변수-심술쟁이 드래곤-가 끼어들지 않는 한은 필승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전력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세상일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요, 잘못 아셨군요. 몬스터들은 저희 전력이 아니랍니다.”

라미아의 말은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 룬에 의해 곧바로 부정당해 버리고 말았다.

“합쳐진 전력이라는 것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전략을 공유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몬스터들은 저희들의 전력이 될 수 없답니다. 서로의 목표한 바가 명확하게 틀리기 때문이죠. 몬스터의 목표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전멸을 위해 끊임없이 죽이는 것이고, 저희들의 목표는…… 온갖 탐욕과 욕망에 찌들어 있는 정부란 단체의 해체와 궁극적으로 모두가 좀 더 평화롭게 사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목표를 위해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죠.”

“그렇지만 지금 제로와 몬스터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특히 룬의 마지막 말은…… 분명히 저희들은 제로의 단원들이 몬스터 군단과 함께 전술적인 양상을 띠며 싸우는 것을 보았답니다. 룬이 지금 말한 사람을 살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어요.”

룬의 설명에 곧바로 맞받아친 라미아의 말대로 제로는 몬스터와 함께 인간이란 존재를 무참히 공격한 게 사실이었다. 그게 의도적인지 아닌지를 떠나 확실히 룬의 말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선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던가. 이어지는 룬의 말에 이드는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현재 제로가 몬스터와 공조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 맞았다. 단지 그러기 위해 택한 방법이란 것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랐을 뿐인 것이다.

몬스터와 함께 움직이며 제로가 하는 일은 전투와 살인이 아니라 인간이 이룩해 놓은 그 잘난 과학 문명의 파괴 활동이었다. 그리고 룬은 그런 제로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신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두 사람이 수차례 들었던 그 이야기를 말이다. 룬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말에 쉽게 수긍하는 이드와 라미아의 긍정적인 자세에 몽페랑에서의 존처럼 놀라는 표정을 했다. 존이 놀랐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도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존과는 다르게 두 사람이 이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살았고, 거기서부터 왔기 때문이라고 다소 이해해 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신의 계획이 실행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너무 심한 종족 수의 불균형과 엄청난 문명의 격차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자잘한 이유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두 가지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과학 문명의 차이는 거의 극복하기 힘든 단계에 이르러 있어 그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종족 수의 차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룬과 제로들은 생각했다.

거기까지 들은 이드와 라미아는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신이 의도한 뜻을 정확하게 짚어낸 룬과 제로들의 추리력에 보내는 박수였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와의 전쟁에 신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 자세한 속 뜻까지 알아낸다는 것은 어떤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내용은 신관들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밝혀냈다는 것은 상황을 범인 이상의 깊이로 분석해서 추리해 낸 것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정신 나간 드래곤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이들은 당장 제로를 그만두고 탐정으로 나서더라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쓸데기 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제로가 시작한 일이 과학 문명의 파괴다?”

끄덕

이드의 말에 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인류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는 첨단의 기계 문명만 사라진다면 종족 수의 차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요.”

이드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 이 지구 사람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있고 이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와 기계들만 사라진다면 이곳은 그레센 대륙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산업 혁명과 과학 발전의 과정을 무시한다면 이드가 태어난 과거의 중원과도 크게 차이 날 게 없어진다는 말이다. 굳이 찾자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보편적인 지식 수준의 차이지만, 그것도 각 종족이 가진 고유의 힘 앞에 나란히 섰을 때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지금 사람들이 가진 지식들이란 과학 문명이란 조건이 따르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배경이 없는 지금의 사람들로서는 오크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나무 몽둥이 하나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군대만 보더라도 창, 검이 아닌 여러 복잡한 공정을 거쳐 생산된 총과 폭약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기계 문명이 다시 들어서지 못하도록 꾸준히 감시만 해 준다면 차츰 그런 지식들은 퇴보되어 사라질 것이고, 백 년 정도가 흐른다면 세상은 적어도 외형적으로 그레센과 옛 동양의 비과학적인 모습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몬스터와 분쟁이 적지 않을 테니, 자연히 인구의 수도 적당한 수에 맞춰질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현재 가진 의식 수준과 두뇌 활동을 가정해 볼 때 꼭 옛날과 같진 않겠지만 말이다. 뭐, 백 년 후의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드가 듣기에 룬의 말은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룬의 가치관을 따라 제로가 실행하고 있는 일도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그럴 만하네요.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왜 다른 곳엔 알리지 않았죠? 가디언이나 각국의 정부…… 뭐, 정부와는 조금 마찰이 있겠지만, 그래도 외교적인 절차를 거쳐 설명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희생도 훨씬 줄어들 테고요.”

가만히 룬의 설명을 듣고 있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제로 내부의 대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설명이었다면 그녀의 물음은 제로의 외부적인 부분에 대한 객관적인 물음이었다. 또 룬의 설명을 듣고 잠시만 생각해보면 저절로 드는 의문이기도 했다.

“음, 그건 내가 대답해 주지.”

시종 세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하던 카제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우리 말을 믿어 줄 것 같지 않더군. 혹 가디언이라면 몰라도 우리와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정부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긴 힘들 것 같더군. 더구나 지금 사람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계 과학 문명이지. 이미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어 버린 기계들과 전기. 자네도 이 세상에 와서 봤겠지?”

“네, 확실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의 머리로 이곳에 와서 겪었던 새로운 생활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생활 중에 어느 것 하나 전기와 기계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그것들로 인해 그만큼 편하기도 했다.

“그럼 묻겠네. 자네들 같으면 그 편리한 모든 걸 포기하면 쉽게 포기할 수 있겠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누려 오던 것들을 말일세.”

“그런 편리라면…… 힘들겠죠.”

이번엔 라미아가 카제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 중으로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그래, 힘들지.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위험이 다가와도 당장의 안락함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거든. 더구나 정부의 이해를 구한다고 해도 그 많은 국민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통제하겠나. 불가능한 일이지. 후!”

카제는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에 따라 실내의 분위기 역시 묵직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닌지 룬의 말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문명을 포기한다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 인구의 수가 줄어들기 전에는 몬스터의 공격이 멈추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줘도 직접 몬스터에게 죽어 나가는 가족을 본다면…… 장담하건대 분명 다시 총을 들 겁니다.”

룬은 확신했다. 또 그것은 당연하게 예상되는 일이기도 했다. 저런 이유라면 정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 어려운 일이군요.”

이드는 룬의 말을 짧게 평했다. 상당히 힘들고 고단한 일을 자처하고 있는 제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해 보라고 박수치고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드와 라미아가 이렇게 제로를 찾은 것은 브리트니스를 회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로가 하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일이란 것은 알겠지만, 브리트니스의 회수 또한 이 세계의 흐름에 관계될지 모르는 중대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저렇게 단호히 말하는 사람을 상대로 당장 브리트니스를 내놓으라고 할 정도로 눈치 없는 이드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달란다고 줄 사람도 아니고, 눈앞에 있다고 힘으로 빼앗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서로 기분만 상할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저도 이드님 생각에 동감이에요.’

라미아의 생각이 은근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쯤에서 슬쩍 말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면 저희에 대한 제로의 쓸데없는 경계도 좀 느슨해지지 않겠어요?’

거기에다 좋은 의견까지 덧붙여 왔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크흠!”

작은 기침 한 번과 한 잔의 시원한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으로, 지금까지 팽배했던 묵직한 분위기를 정리한 이드가 말문을 열었다. 그다지 필요 없는 행동이었으나 좌중을 일단 가볍게 해 보고자 하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좋은 이야기도 좋게만 받아들이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려운 일이지만 제로는 앞으로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또 룬 양의 말대로 브리트니스도 필요한 것 같고요. 그럼 말입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제로가 이루고자 한 일이 대충 끝이 났을 때는…… 브리트니스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으음……”

“그때는 굳이 브리트니스의 힘이 필요치 않을 것 같은데……”

“그…… 그건…….”

룬은 의외로 이드의 말에 우물쭈물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이드와 라미아는 갑작스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 거대 조직의 수장답게 엄격하고 깊은 태도를 보이던 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 이런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긴 하지만 하나의 거대 조직을 이끄는 수장엔 어울리지 않는 처신이었다. 그런데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질문에 이런 반응이라니……

‘뭔가가 있다!’

이드와 라미아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외쳤다. 앞서 짐작했던 것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룬 단장.”

걱정스런 카제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룬을 불렀다.

“확실히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지?”

이드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는 제로의 지그레브 지부 건물을 슬쩍 돌아보았다.

“네, 뭔진 모르겠지만…… 룬이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도 브리트니스를 돌려줄 의사가 없다는 데는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브리트니스를 돌려달라는 이드님의 말에 각각 다르게 반응한 룬의 태도가 이상했어요.”

“음……”

이드는 라미아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던 룬을 떠올렸다. 처음 브리트니스를 돌려달라고 했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후에 제로의 일이 끝난 후에 돌려달라고 할 때는 쉽게 답하지 못하던 모습이라니…… 생각해보면 같다고 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으나 다르게 반응하니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룬을 걱정한 카제 덕분에 짧게 이어진 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서둘러 룬과의 통신을 끝내고 나와야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크게 아쉽거나 하지는 않았다. 룬을 통해 궁금해하던 몇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 외에 갑작스런 룬의 반응이나, 종속의 인장, 신탁의 내용 등에 대한 의문 사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어차피 그런 건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제로와의, 아니 룬과의 만남은 일단락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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