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41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로란 단체가 하는 일이 헛일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가만히 룬과의 대화를 정리하던 이드는 갑작스런 라미아의 말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희생을 줄이겠다고 힘들게 뛰어다니는 제로를 보고 자신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라미아였기에 그녀의 느닷없는 말이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또로록
이드의 말에 라미아는 밤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에 예쁘게 반짝이는 눈을 굴렸다. 대답할 말을 정리하는 듯하던 그녀는 곧 옆에서 걷고 있던 이드의 한쪽 팔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단순히 상황만 놓고 봤을 때 그렇다는 거예요. 솔직히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잖아요. 괜히 제로가 나서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요.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제로가 바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거잖아요. 몬스터와 같이 움직였으니 전 세계인의 적이 된 거나 다름없는데……”
라미아의 생각은 시각에 따라 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로는 지금 단체의 목적보다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희생을 줄이는 일이지. 그걸 헛일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고귀한 일을 제로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인간과 몬스터의 역사가 다시 써질 경우 크게 왜곡될 수도 있었다. 어느 한 편의 영웅은 다른 한 편에서 악마로 둔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혹은 양쪽 모두에서 부정되는 역사도 없지 않았으니.
“하지만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죽을 사람과 살아남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과학자는 당연히 기계와 함께 몬스터의 중요한 목표일 테고, 사람들도 적당한 수로 적당히 흩어 놓지 않으면 다시 기계를 만들어 낼 테니 그렇게 못할 정도로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제로가 지금 하는 일은 별로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잖아요?”
“…… 단순히 숫자로 따지자면 그렇지. 그러나 무엇보다 목적에 맞추어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계획 자체가 망상이라고 봐야 해. 그건 인간, 혹은 몬스터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건 할 만한 일인 거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일이고.”
이드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라미아에게 말했다.
“알아요. 그래도 괜히 헛고생하는구나 싶어서…… 또 몬스터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만! 거기까지.”
이드는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라미아의 말을 한 손을 들어 끊었다. 그냥 뒀다가는 이 밤이 새도록 제로에 대한 문제로 웅얼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였다.
“제로는 제로고, 우린 우린 거야. 우리들이 직접 도와줄 것도 아닌 이상 제로의 일로 더 이상 머리 쓸 필요는 없지 않겠어?”
분명히 선을 그은 이드는 자신의 팔을 안고 있는 라미아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한쪽 눈을 깜박여 보였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귀여운 짓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 세계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한 두 사람인 만큼 이드의 말처럼 제로의 일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헤헷…… 알았어요. 그럼 제로 이야기는 여기서 접기로 하고, 빨리 센티네 집으로 돌아가죠. 코제트도 집에 있을 테니까 뭐 좀 맛있는 것 만들어 달래서 먹어요, 우리.”
“호, 그거 좋은 생각인데. 코제트의 요리 솜씨는 확실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늘도 맑고 말이야. 어때?”
“마음대로 하세요. 이드님이 걷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요? 대신 전 아니니까 이드님이 업어 주세요.”
“뭐?”
유난히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던 이드는 갑작스런 라미아의 요구에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잖아요. 이드님은 걷고 싶고, 전 아니니까 이드님이 업어 주셔야죠. 그리고 오랜만에 이드님 등에 업혀 보고 싶기도 하고요. 헷……”
라미아는 뾰족이 혀를 빼물며 애교를 떨었다. 그게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밤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몰려들게 만들었다. 그런 라미아의 애교엔 이드도 별수 없기에 가만히 등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냐. 엎혀.”
“얏호! 자, 가요. 이드님……”
센티의 집으로 돌아온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집에서 며칠 더 머물렀다. 제로와 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확보했으니 바로 떠나도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심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센티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녀가 심법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게 가능해졌을 때 떠나겠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센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웬만큼 심법을 운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던 센티는 두 사람이 더 남으려고 하는 데는 심법 때문이 아닌 코제트의 요리를 더 맛보기 위해서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센티가 눈을 흘기며 추궁하는 것에 먼 산 바라보듯 하며 회피했다. 물론 센티로서도 속으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더 흐르고 센티가 심법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두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맺었던 지그레브를 떠났다. 떠나는 두 사람을 센티네 가족들이 나와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해 주었다.
지그레브를 떠난 이드와 라미아는 다음 목적지를 이드의 고향, 중국으로 잡았다. 라미아가 자신했던 대로 룬과의 통신 중에 통신지를 추적한 그녀가 룬의 위치를 중국에서 찾아낸 덕분이었다. 바로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소형 도시 규모의 넓이를 뒤져봐야 하겠지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던 것에 비한다면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쯤이 적당할 것 같은데. 이동하자, 라미아.”
이드는 주위를 돌아보며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했다. 지금 두 사람은 지그레브로 들어서는 길에서 한참을 벗어난 곳에 서 있었다. 지그레브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던 둘은 사람들의 괜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은 것이다.
“참, 그런데 오엘은 어떡하죠? 연락 온 일만 보고 바로 가겠다고 했었는데……”
이드의 말에 미리 계산해 놓은 좌표를 설정하고 텔레포트를 준비하던 라미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면 너비스 마을을 나선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가지 일만 보겠다고 오엘을 데리고 나온 지가 얼추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 런던에 가볍게 내려놓고 연락 한 번 해주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걱정하고 기다릴 그녀에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일은 본 것은 아니다. 변명이긴 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것도 연락받은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인 것이다.
“아차, 깜박하고 있었네.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공연히 미안한걸. 그럼 중국으로 가기 전에 기다리지 말라고 소식이라도 전해 줘야 할 텐데…… 이거 세르네오가 있는 본부에 다시 가야 되려나?”
긁적긁적
이드는 곤란하거나 멋쩍어 할 때의 버릇대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엘이 머물고 있는 런던 가디언 본부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디언 본부를 찾아야 할 테고, 연락이 쉬우려면 아무래도 세르네오가 머물고 있는 본부로 향하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음…… 그것보다 한국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 어차피 중국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생각인걸.”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반색하며 이 세계에 처음 와서 만난 얼굴들을 생각했다. 특히 같이 생활했던 연영과 반 친구들 그리고 염명대 가디언들의 얼굴들이 웃는 낯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레센 대륙에서 처음 만난 그들처럼 이 세계의 첫 인연들이 보고 싶다는 감정이 솟구치자 이드는 바로 라미아의 말에 동의했다. 덕분에 텔레포트 좌표는 순식간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좌표는 알고 있어?”
“맡겨 두시라고요. 다름 아닌 제가 생활했던 곳을 모를까 봐서요.”
라미아는 자신 있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시동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낭랑하니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도 오랜만에 볼 사람들 생각에 기분이 좋은 듯했다.
“텔레포트! 가자, 학교 가디언으로……”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대공격! 원인도 그렇다고 뚜렷한 타개책도 알 수 없는 대규모 몬스터들의 돌발적인 움직임은 그렇지 않아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다. 어떤 형태든지 전쟁이라 이름 붙여진 전투 행위를 위해서는 그 긴박한 상황과 조건에 맞춰 이것저것 필요한 물자며 동원되는 인력 등 함께 따라 움직이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세상의 전쟁은 고대전과 양상이 판이해 금속, 화학, 섬유, 전자까지 모든 산업이 합쳐지고 공유되어 다양하게 섞인 거대한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으니 현기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은 전장이 따로 없이 경계마저 모호한 데다 처절한 국면이 있었다. 불시에 공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시가전의 양상이 두드러져 생활 터전이 졸지에 사라지기도 했다. 인간들 간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인 전쟁이 아닌, 오로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어지는 절박한 전쟁인 만큼 혼란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미증유의 전쟁 속을 가장 숨 가쁘게 누비는 사람들이라면 전장에 투입되는 사람들일 테고, 그 중에서도 대 몬스터 전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디언들은 최전선의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그들은 몸이 세개라도 모자랄 정도이며,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시로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었다.현재 이 지구의 인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자들은 누가 뭐래도 이들 가디언들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전투요원 가디언들만큼이나 바쁘고 분주한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가디언 양성학교인 가이디어스였다.
가이디어스에 머무르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가 능력자였다.이곳에서는 그 능력의 크고 작음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특히 지금과 같은 혼전 속에서는 보통사람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 능력을 조금이라도 지녔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던 가디언 본부드르이 요청에 의해 학생들이 나서게 된 것이다.어쨋든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점에거는 분명하였다.기준 군대의 가공할 화력마저 통하지 않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능력자들의 힘은 절대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한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가이디어스에서는 총 학생수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천여명을 헤아리는 인원이 빠져나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학교는 어떻게 보면 썰렁했도, 또 어떻게 보면 언제 투입될지 모른다는 긴장 속에서 수련의 열기로 뜨겁기 그지 없었다.
진지하고 열띤 수련의 기운이 뻗어 나오는 가이디어스 건물 정면에 위치한 넓은 운동자.
파아아앗
그 한가운데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한 덩이의 빛이 주변을 휘몰아쳤다.
실제로 빛덩이를 중심으로 뽀얀 먼지가 회오리치면서 빛덩이의 외곽을 딸 솟구쳐 멋진 장관을 연출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운동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없어 그 멋진 장면을 구경한 이는 거의 없었다.다만 지겹도록 반복되는 수없에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몇몇의 학생만이 갑작스런 상황에 눈을 치뜰 뿐이었다.
“휴, 먼지.근데 어떻게 이번엔 정확하게 땅에 텔레포트 됐네.항상 몇 미터 위에 텔레포트 되더니……”
빛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이드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자신과 라미아 주위에 떠도는 먼지를 잠재웠다.
“당연하죠.여긴 좌표를 알아온 게 아니고, 제가 있던 곳을 기억해서 온 거니까요.이게 다 제 실력이라구요.”
“아…… 아……”
“뭐예요.그 못 봐주겠다는 불성실한 태도는……”
“원래부터 네가 대단하단 건 잘 아니까 그렇지.그나저나 왜 학생들의 기운이 반으로 줄어들어 있는 거지?”
이드는 가이디어스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꽃같은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가이디어스에서 꽤 오래 생활했던 만큼 이드는 가이디어스가 가지는 그 기운의 크기를 대충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그 기운이 거의 절반가량 낮아져 있는 것이었다.한번 찬찬히 바로보는 것만으로 이드는 가이디어스의 학생들 절반이 가이디어스에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일별만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긴 했지만 이드의 경지가 경지이다 보니 가능한 측량법이었다.또 가이디어스의 학생들도 자신들의 능력을 갈무리 하는 데 미숙해서 그 기운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죠.그래도 어두운 기운이 없는 것ㄹ 보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요.들어가 보면 알겠죠.어서 들어가요.연영 언니 얼굴도 봐야죠.”
라미아는 이드의 팔을 잡아끌며 곧바로 가이디어스의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로 향했다.
그녕의 말대로 감지되는 기운은 어둡기보다는 오히려밝은 데가 있었다.이드도 별걱정 없이 라미아가 이끄는 대로 교무실로 향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오랜만에 가이디어스를 둘러보며 학생수를 제외하면 전혀 바뀐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당장 걷고 있는 복도만 해도 너무나 익숙할 만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곳을 나선 것이 일, 이년이나 된 것도 아니고 보면 뭐 달라질 것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또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곳 중의 하나가 학교와 같은 단체생활을 하는 곳이니까 말이다.바뀌어 봤자 복도에 걸린 그림이나 계절에 따라 바뀌는 화분이 전부일 것이다.
꼭 하루만에 온 것처럼 익숙한 복도를 걸어 교무실 앞에 선 두사람.
너무도 당당하게 교무실 문을 드르륵 열어젖히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 그…… 그래”
갑작스럽게 등장한 라미아.그녀의 당당한 인사에 압도된 교무실은 고작 더듬거리는 대답이 나올 뿐 대체로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두 사람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연영을 필두로 이드와 라미아를 알아본 선생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사람을 반겨주기 시작했다.
가이디어스 시절,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외모 덕분에 두 사람을 모르는 선생님들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연영은 오랜만에 돌아온 두 사람이 정말 반가웠는지 둘을 꼭 끌어안으며 슬쩍 눈물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잘 왔어.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 한마디 연락도 없고 말이야…… 훌쩍……”
그, 그랬던가? 이드는 라미아 쪽을 슬쩍 한 번 바라보고는 연영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미안해요, 누나. 그래서 이렇게 찾아 왔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울지 마, 언니”
“칫, 울기는 누가 울었다고…… 그래도 너희들 정말 나쁘다. 어떻게 연락 한 번 없었냔 말이야.”
연영은 라미아의 말에 슥슥 눈가를 가볍게 비비고서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대신 그 손을 허리에 척하니 걸치고 정말 화났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자 이드는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강하게 나오는 여성에게 약한 데다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면 그런 이드를 위해 나서 주는 정의의 사도가 있었으니……
“언니, 그만 화 풀어. 자주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했었잖아.”
그 이름하여 라미아였다. 연영은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양 눈썹을 지그시 모으며 기억을 뒤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찾은 것이 없는지 다시 뾰족한 눈길로 되돌아갔다. 연락 받은 걸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라미아는 그럼 그렇지, 하는 심정으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털털하지만 가끔 덜렁대는 연영의 성격에 아마도 연락받은 것을 까먹었을 것이다.
“언제?”
역시나
“언제긴! 이전에 직접 연락하진 못했지만 가디언 연락망으로 간단하게 잘 있다고 전했잖아.”
“그…… 그랬었…… 니?”
이번에는 오히려 라미아가 당당하게 나오자 연영은 허리에 올라가 있던 양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라미아의 눈을 피했다.
“분명히! 언니 또 까먹었지?”
“아니, 그렇기보다는…… 너희들이 너무 연락을 안 해서 그렇지……”
당당히 추궁하던 위치에서 뭔가 웅얼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초라한 위치로 떨어져 버린 연영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된통 당하고 있는 것이랄까. 그러나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나선 데는 어디까지나 반가운 마음과 자주 연락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것. 라미아도 그것을 알기에 곧 다그치는 듯하던 과장된 자세를 풀고 다시 한번 연영을 안아 주었다.
“쯧쯧…… 중요할 때 덜렁거린다니. 그래도……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렇게 서로에 대한 진한 애정이 담긴 인사를 나눈 세 사람은 다른 선생님들을 뒤로하고 조용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좀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연영은 휴게실에서 이드와 라미아가 한국을 떠난 후 수개월 동안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주로 두 사람과 관련된 제로의 일과 현재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드와 라미아는 가이디어스의 학생 수가 반으로 줄어 버린 이유에 대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흐응…… 그래서 가이디어스의 기운이 반으로 줄어 있는 거구나.”
가디언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던 세르네오의 볼썽사나운 꼴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이디어스까지 동반해 바빠진 줄은 알지 못했던 이드였다. 그만큼 전투의 빈도가 높아졌다는 것이고, 동원되는 인력도 더 많이 필요해졌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좀 그런걸. 바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몬스터와의 전장에 학생들을 내보낸다는 거 너무 무리하는 게……”
가이디어스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각자가 가지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 그 능력의 크기에 따라 평가하고 말하는 곳이 가이디어스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가이디어스가 다름 아닌 가디언을 배출해 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여기 가이디어스의 학년 배정과 진급은 나이나 가이디어스에서 생활한 기간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오로지 각자가 가진 실력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덕분에 나이가 많음에도 저학년에 머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단숨에 고학년으로 진학하는 학생이 있다. 이드와 라미아가 편입할 때 한 학년을 건너뛴 것도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디언을 지원하기 위해 나선 가이디어스의 학생 중에는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년, 소녀’도 끼어 있다는 말이 된다. 이드는 연영의 이야기에서 바로 그 점에 생각이 닿았던 것이다. 아직 자신조차 온전히 추스르지 못할 아이들. 아직 전장의 피비린내를 맡기에는 너무 어린 그들. 그리고 정립되지 않았을 혼란스런 가치관. 그들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고통을 목격하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참담한 기분을 느끼게 한 것이다.
강호의 가치관이 아닌 이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통해 이드는 전투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어린 학생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연영은 이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녀석. 역시 내 제자답다. 그런 기특한 생각도 다 하고.”
‘에이, 그건 아니다.’
연영의 말을 부정하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이드의 머릿속을 울렸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묵묵히 동의하며 이어질 연영의 설명을 기다렸다.
“아무리 위급하다고 해서 실전에 아이들을 보내는 데 아무 준비 없이 보내겠어?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갔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백프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했으니까. 노출될 수 있는 모든 위험 상황에 대한 특수 훈련까지 거쳤고, 무엇보다 그런 위험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가디언의 보호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거야. 나는 그 아이들보다 오히려 너희들 걱정을 더 했다구. 자, 다들 안심하라고.”
연영의 얼굴엔 자신 있다는 표정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실제로 파견된 학생들에겐 가디언과 군에서도 최대한 후방 지원에만 국한해 참여시키고 있었다. 학생의 신분인 만큼 피해 상황이 속속 학교로 전달될 텐데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피해 정보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말은 시원시원하게 하지만 선생님으로서 그 누구보다 심각하게 느끼고 있을 연영의 심려를 이드는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드는 피식 웃으며 슬며시 머리 위에 머물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 내렸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일이었다. 마치 그런 이드의 행동을 놀리는 듯이 연영이 이드의 머리에 다시 손을 턱 하니 올려놓은 것이다.
“훗! 그런데 여긴 갑자기 웬일이야? 다른 이야기 한다고 왜 왔는지를 아직 못 들었는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화제를 바꾸는 연영의 얼굴엔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특히 그 미소는 라미아를 향해 더욱 얄미운 모습을 보였는데, 마치 네 장난감을 잠시 빌린다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장난감은 이드였다.
“뭐, 별거 아니야. 지나가는 길에 가디언 쪽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른 거니까.”
연영의 도발에 라미아는 바싹 이드 곁으로 다가 앉으며 단호한 손길로 연영의 손을 이드의 머리에서 걷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에 흐트러진 이드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영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능청스런 눈길과 함께 다시 이드의 머리를 노리고 연영의 손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 볼일이 뭐냐구.”
다시 올라온 연영의 손에 라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꽤 강렬한 눈길이지만 그 정도의 압력으로 연영의 손을 밀어내긴 힘든 것 같았다. 라미아를 향한 능청스러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여전히 그녀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팽팽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었다.
“저기…… 두 사람 다 손 좀 치워주지……”
자신의 머리를 제멋대로 차지하고 놀고 있는 네 개의 손바닥을 느끼며 이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간단히……
“별거 아니야. 잠깐 가디언의 연락망을 빌릴까 해서 들른 거니까.”
“흐음…… 그럼 역시 당분간 머물 건 아닌가 보네.”
무시당했다. 이렇게 되면 몇 번을 말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터. 차라리 알아서 치워 줄 때까지 기다리자. 이드는 자신의 머리 위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거침없이 누비고 있는 네 개의 손에 대해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드가 포기한 자신의 머리 위로 네 개의 손바닥이 수시로 겹치고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두 여자의 대화는 계속 오고 갔다. 그래서 가이디어스를 찾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앞으로 중국으로 향할 것이란 말까지 오가고 있었다.
“그렇구나. 뭐, 말을 전하는 것 정도라면 여기서도 가능한데. 명색이 가디언 양성 학교니까 말이야.”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가디언 양성뿐 아니라 직접 몬스터와 싸움을 벌이는 학생들이 살고 있는 가이디어스인 만큼 가디언 본부와의 연락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부로 가려는 목적은 연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연락을 하든 그거야 상관없지만…… 가디언 본부엔 가 볼 생각인걸. 언니 얼굴도 봤으니 본부에 들러서 염명대 사람들도 만나 볼 생각이거든.”
염명대와는 연영만큼이나 두 사람과 인연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함께 임무를 받아 싸우기까지 했던 전우이지 않은가 말이다.
“흐응…… 염명대라. 하지만 지금 가도 만나기 어려울 텐데……”
“알아,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다는 거.”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그것보다는……”
“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 푸웁…… 푸웃……”
끝을 흐리는 연영의 말에 그때까지 나 몰라라 하고 있던 이드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 덕분에 그의 머리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개의 손이 자연스럽게 얼굴을 덮어 버렸고, 마침 입을 열고 있던 이드의 입으로 손가락이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연영과 라미아가 서둘러 손을 떼긴 했지만, 이드의 입안에 짭짤한 맛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별 상관없다는 듯 이드가 연영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런 이드의 재촉에도 연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애매한 태도를 보면 확실히 뭔가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연영에게 모아졌다. 두 시선 가운데에서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던 연영이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비밀이다.”
“응.”
“아직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까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응, 응.”
“아직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는 일이야. 잘 들어. 놀라운 일이지만 얼마 전에 드워프가 발견됐어.”
잔뜩 분위기를 잡아 목소리까지 낮춰 가며 꺼낸 연영의 말이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연영의 얼굴에 뿌듯한 만족감과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가 알려 준다는 우월감과 만족감. 자신이 그 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놀라게 될 상대의 반응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랐다면 연영은 상대를 확실하게 잘못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레센에서 이미 질리도록 만나고 결혼까지 약속한 이종족이었다. 아니, 그레센에서의 경험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엘프에 드래곤까지 만난 이드와 라미아였다. 지금 드워프가 아니라 인어 공주가 나타났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나 시큰둥한 이드와 라미아의 반응이었다. 연영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반응에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어이, 어이. 그래서가 뭐야, 그래서가? 몬스터가 아닌 문명을 가진 이종족이 나타났어! 드워프가 나타났다니까!”
“알아, 방크 말했잖아. 그럼 그 드워프 때문에 염명대가 바쁜 거야?”
“끄응……”
연영은 묘한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퉁명스런 반응이라니. 자신은 그 사실을 듣고 얼마나 놀라서 만나고 싶어 했는데. 그런데 저런 별것 아니라는 반응이라니. 왠지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래. 염명대가 지금 드워프를 가드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너희들 너무한다. 놀라야 하는 거 아냐? 드워프가 나타났다는데 말이야.”
이드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연영의 말에 라미아를 돌아보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놀란다라…… 흐음, 누나. 나도 놀랄 만한 소식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우리가 영국에 있을 때 엘프 마을에 들른 적이 있거든?”
순간 뚱한 표정이던 연영의 눈이 차츰차츰 커지더니 이내 퉁방울만 해지면서 입이 쩍 벌어지고 목에서부터 시작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마디로 놀랐다는 말이다.
“에엑! 에…… 엘프? 엘프라니…… 엘프 마을? 정말이야? 정말 거기 가 봤어?”
“응! 놀랐지?”
“다, 당연하지. 드워프뿐만 아니라 엘프라니…… 그런 설 왜 이제 말해?”
“누나 놀란 얼굴 보려고. 이런 게 놀란 얼굴이구나. 뭐, 다음에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면 지금 누나처럼 놀라 주지.”
“……”
빙글빙글
연영은 이어지는 이드의 말과 방실거리는 라미아의 얼굴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 이것들이 감히 날 놀려!”
연영은 금방 달려들 기세로 주먹을 내질렀다. 지금 이드의 반응을 봐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약간 덜렁대는 성격이긴 하지만 평소 같으면 속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담담한 두 사람의 반응과 엘프라는 말에 쉽게 넘어가 버린 것이 실수였다. 특히 엘프는 평소 연영이 가장 만나 보고 싶어 하던 이종족이었다. 숲의 요정으로 표현되며, 공인된 아름다움을 가진 종족. 현재 드워프가 모습을 보인 상태라 정말 엘프가 나타났을 수도 있겠다 싶어 혹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감히 선생님이자 누나인 자신을 놀리다니……
퍽퍽퍽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 죽어랏!”
“우왁…… 왁! 잠깐, 잠깐만. 왜 때리는데?”
이드는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연영의 주먹을 잡아채며 짐짓 억울하다는 듯 연영을 흘겨보았다. 물론 이드나 연영이나 서로 날뛰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드의 얼굴이 더욱더 가증스러워 보였다. 그 얼굴에 확 한 방 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두 손을 이드에게 꼼짝없이 잡혀 있는 상황. 연영은 잠시 뾰족한 시선으로 이드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이드의 이마에 머리를 들이받아 버렸다.
쿵
“아욱! 이 돌머리. 설마 네가 날 속여 먹은 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훗, 아쉽지만 난 돌머리가 아냐. 그리고 내가 언제 속여 먹었다고 그래?”
당연하게도 돌머리는 아니었다. 단지 금강불괴와 같은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춘 탓에 엄청나게 단단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 코피라도 나 보라고 들이받았던 연영의 엉뚱한 공격에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도록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정확히 15초…… 17초 전에 네가 엘프가 나왔다는 걸로 날 놀렸잖아.”
아직 연영이 들이받은 머리가 서로 닿아 있는 탓에 한 치 앞에 놓인 연영의 눈이 희번뜩거리는 게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보였다. 우스꽝스럽기도 한 실랑이라 이드는 장난을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놀리는 재미도 여간 좋은 게 아니지만, 여기서 좀 더 나갔다간 이 자세 그대로 그녀에게 물어뜯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 분명히 놀리긴 했었지. 하지만…… 속인 적은 없다구. 엘프 이야기는 진짜야.”
“정말?”
초롱초롱
이드의 말을 재차 확인하는 연영의 눈빛은 왕자님을 만나기 전의 들뜬 소녀와 같이 반짝거렸다.
“물론. 엘프 마을에도 들러 봤어.”
“후와, 정말이라니. 드디어 엘프를 직접 보는구나! 언제? 언제 만나 본 거니? 마을은 어딨어? 정말 엘프들이 예뻐?”
엘프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황홀경에 빠져 있던 연영은 곧 용의자를 수사하는 형사처럼 엘프와 관련된 사항들에 관해 속속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드는 연영의 태도가 워낙 열렬하고 진지해 저도 모르게 미랜드 숲의 엘프들에 대한 이야기를 꼼꼼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엘프들이 아직 인간과 만날 때가 아니라고 말한 때문이었다. 물론 연영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말해 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다.
“후와! 나도 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을 왜 우린 아직 모르고 있었지?”
아직 얼마 동안이나 여기 이세계에 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과 라미아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거처 정도는 마련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남의 집이나 여관, 호텔을 옮겨 다니며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레센에서와는 달리 혼돈의 파편에 연관되어 바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으니, 그저 다시 한번 팔찌가 변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