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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1화


“이드, 일어나요. 그만 일어나라니까요.”

노곤한 느낌에 빠져 있던 이드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햇살이 반짝이며 온통 시야를 점령하고 있는 은색의 빛나는 머리카락. 그리고 라미아의 얼굴이었다. 어제도 이랬고, 그저께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처럼 아침을 맞았던 것이 멍한 정신 중에 기억난 이드는 약간은 몽롱한 미소와 함께 라미아의 얼굴을 당겨 그녀의 입술에 아침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브리트니스의 일을 처리한 지도 이제 제법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햇수로는 8년이고, 이 세계로 온 지는 9년이 되고 있었다. 마지막 지너스의 봉인을 나오는 데는 4개월이 걸렸다. 일 년이나 그저 기다릴 수 없어 생각나는 대로 느긋하게 봉인을 공략한 덕분에 단 4개월 만에 봉인의 힘을 다한 것이었다.

봉인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오엘을 찾았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거의 반년이나 늦어버렸기에 두 사람은 그녀를 만나보고 가장 먼저 사과부터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한국으로 왔고, 이드가 라미아에게 약속한 대로 가이디어스 근처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몬스터로 인해 가이디어스 근처의 집은 구하기 어려웠고, 있어도 그 가격이 상당했지만 연영과 가디언이 나서준 덕분에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집이 마련되고, 두 사람이 들어서게 되자 그 집은 자연스럽게 신혼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항상 함께 하는 두 사람이었고, 느긋하게 세상을 즐기는 두 사람이었기에 주위에서는 너무나도 부러워했다. 그 집에서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생활하는 도중 몇 번 가까운 곳까지 몬스터의 습격이 있을 경우 나서기도 했다. 가디언과 연영에게는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두 사람에게 별달리 도움을 요청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디언은 가디언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제로는 제로대로 모든 세력이 새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여유로움 속에서 느긋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몬스터와 사람, 마법과 과학이 사라지고, 변하고, 융합하는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았다. 드워프의 연구 자료를 가지고 차원이동 마법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상당히 여유로우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만족스러운 8년을 보낸 것이다.

아,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이드가 라미아를 자신의 반려로 받아들인 것이다. 집을 산 지 2년이 지나고 3년째가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이어진 것이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고, 편히 반겨주는 집이 있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3년 동안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드가 그레센에서 맞아들인 일리나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책임감에 이드가 라미아를 쉽게 허락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하자면 그것도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자신의 반려! 누굴 먼저 취하든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먹는 데 2년이 걸린 것이다. 아니, 영원을 함께할 두 사람이었기에 이드가 라미아를 취하는 일은 이미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확정된 사실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늦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여튼 여자와 관련해서는 무엇이든 상당히 느린 이드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라미아가 이드의 이름에 님자를 붙이지 않게 되었다.

이드는 한여름의 느긋한 햇살을 받으며 라미아와 함께 옥상의 구름 침대에 대롱대롱 누워 있었다. 이미 펴놓은 파라솔이 적당량의 햇살을 가져다주어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드는 그 편안한 기분과 몸으로 전해져 오는 라미아의 기분 좋은 체온을 만끽하며 활발하게 돌아가는 도시를 나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8년 간 몬스터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누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그 사이에 세상은 스스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균형을 잡아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몬스터를 겁내서 가디언 본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도 어느새 몬스터와 바뀌어버린 세상에 익숙해진 것이다.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진리에 익숙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파내 써서 고갈되어 가던 자원들도 전부 다시 채워졌다.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라미아를 한 팔에 안은 채 다시 움트는 세상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드의 입에서 문득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런 풍경도 나쁘지 않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룬이나 브리트니스가 나서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알아서 자기 갈 길을 찾아가는 거겠지. 세상을 흐르게 만드는 자연의 섭리와 같이….. 저절로 흐르는 것. 괜찮군. 좋은….. 느낌이야.”

누군가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떠오른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을, 그 말을 하는 이드의 기분을, 그 말을 하는 이드의 뜻을 정확하게 들은 존재가 있었다. 아니 물건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팔찌. 모든 일의 원흉이랄 수 있는 팔찌가 9년 만에 이드의 말에 깨어나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핫, 정말 엉뚱한 때 엉뚱하게 반응을 한단 말이야.”

정말 생각지도 않은 때에만 반응을 하는, 요상스런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겪은 일이기도 했다. 이드는 이번엔 또 어디냐는 심정으로 라미아를 안고서 팔찌에서 일어날 강렬한 빛을 기다렸다. 헌데 이번에는 팔찌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눈부시도록 강렬한 빛도 없었고, 엄청난 기운의 흡입도 없었다. 다만 백색과 흑색, 청색으로 은은히 빛나던 팔찌가 빛으로 변해서 흩어지고 뭉치는 장엄한 모양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색다른 광경에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순간! 이드의 머릿속으로 아니, 저 깊은 마음속으로 두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세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능을 허락받은 자. 섭리의 흐름을 인식한 자. 세상을 끌어안은 자. 이제 그대에게 권능이. 이제 그대에게 축복이. 이제 그대에게 자유가. 그대에게 영광된 칭호를. 그대는 이제 자유로운 여행자.]

화아아아아

목소리가 그치자 그때까지 산란을 계속하던 삼색의 빛이 하나로 섞이며 이드의 가슴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치 물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 듯 그렇게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드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빛은 이드의 영혼 속에서 하나의 언어가 되고, 하나의 문장이 되고, 하나의 증표가 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이드는 그것이 그렇게 되는 동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을 그대로 전해 받은 라미아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우, 좀 더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싶었는데…. 에효, 어쩔 수 없죠 뭐.”

이제 이곳을 떠날 때라는 이드의 생각을 전해 받은 라미아였다. 그녀는 바로 체인지 드레스의 마법으로 이드와 자신의 옷을 여행복으로 바꾸고 휴와 일라이져를 챙겨 들었다. 두 사람이 챙길 것이라곤 이것이 전부였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어느새 만들어졌는지 빛으로 형상을 이룬 커다란 문이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받아들며 그 문을 바라보았다.

“여행자라. 훗, 그동안 마법을 연구한 게 바보 같은 짓이었네. 이렇게 쉽게 차원 간의 이동을 허락받을 줄이야…. 자, 그럼 떠나 볼까? 라미아, 그레센으로!”

자유로운 여행자라는 칭호로 인해 차원 이동의 자유를 얻은 이드였다. 하지만 아직 중원으로 갈 수는 없었다.

“네. 일리나도, 세레니아도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레센의 ‘일’을 처리해야 이드님의 누님들께 인사드릴 수 있잖아요.”

그렇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아직 중원으로 갈 수 없는 이드였다. 이드는 라미아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빛으로 만들어진 문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그레센 대륙이 있는 곳으로….”

이드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 문은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강렬한 빛으로 두 사람에게 대답했다. 헌데 빛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던 두 사람 중 갑자기 이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앗! 자, 잠깐! 이동 시간점을 고정시키는 것 깜박했다.”

놀란 목소리가 쩌렁쩌렁거리며 사라지는 빛의 문 바깥까지 울려 나왔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 뒤를 따라 라미아의 투덜거림이 들려오며 빛의 문이 완전히 형체를 감추었다.

“정말! 이드 바보!”

온통 푸르고 푸른 세상이다. 푸르면서도 투명하고 그래서 더욱 높아 보이는 하늘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거나 아니면 가슴에 품은 듯한 바다의 짙푸른 빛이 어울려 온 세상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 사이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처도 없이 아무런 구속도 없이 간간히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과 투명한 바람뿐.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자연의 호흡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완전한 세상 속 한가운데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는 이드는 천혜의 광경을 그렇게 넋 놓고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연신 머릿속을 쨍쨍거리며 울려 오는 라미아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걸 깜빡할 수 있는 거에요. 도대체가 차원 이동을 한다는 사람이 차원 간의 시간점은 물론이고, 공간점을 고정시키는 걸 잊어 먹다니…. 그건! 땅 속 한가운데로 텔레포트해 가는 바보 마법사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이라구요, 알아요?]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이드는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이 자리에서 실감하고 있었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광경마저 보이지 않게 하는 저 무지막지한 소음 공해! 다다다 따지고 드는 것이 영락없이 덜렁대는 남편에게 바가지 긁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고 이어지는 라미아의 질책에도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백 번 생각하고 따져 봐도 자신이 잘못한 게 너무도 확실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드에게 허락된 여행자란 칭호와 차원 이동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한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신들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능력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초월적인 능력인 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라미아가 이드에게 따지고 드는 차원 간의 시간점과 공간점이 그것이다. 서로 다른 차원 사이에는 신이라 해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차원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의미한다. 생태계와 종족은 물론 자연환경과 시간의 흐름까지 달리 하는 것이다. 때문에 차원을 넘을 때는 미리 두 차원 간의 시간의 흐름을 조절해야 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 조정에 따라 현재 차원에서의 십 년을 저쪽 차원의 일 초라는 시간에 끼워 맞출 수도 있고, 백 년의 시간 흐름에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차원 이동으로 도착할 장소를 지정하는 행위였다. 차원이란 것이 손바닥만 한 동네 이름도 아니고, 그 광대한 하나의 세상 속에서 당연히 도착해야 할 곳을 정확히 지정해야 하는 것이다. 막말로 광대한 우주 한가운데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텔레포트와 비슷하면서도 더욱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차원 이동이었다. 헌데…. 덜렁꾼으로 전락하고 만 이드는 바로 그 중요한 시간점과 공간점의 설정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꿀꺽하고 차원 이동을 감행했으니…. 정말 라미아에게 어떤 쓴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레센에 제대로 떨어진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치자면, 그건 다행 수준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딘지 모를 바다 한가운데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변한 우주 공간이나 땅 속에 비한다면 그것만큼은 또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레센 대륙이 이 별 안에 존재하는 이상 텔레포트로 이동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죠. 어떤 덜렁대는 누군가가 시간점을 정하지 않은 통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혹시 알아요? 높이 솟아 있어 우러러보던 산이 사라져 있고, 평지가 융기해 산으로 바뀌었을지….. 안 그래요? 이드.]

이 또한 라미아의 말대로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이드와 라미아가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이드로서는 별달리 말대꾸도 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아하하하…. 그렇지.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거야. 저기 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이드는 앉은 자세 그대로 쓰윽 돌아앉았다. 그곳에는 이미 수백 미터 앞까지 접근한 배가 있었고, 그것은 흔히 일반적인 여객선이라고 하는 것보다 2배쯤 규모가 커 보였다. 갑판 위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옷을 차려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대부분 난간으로 붙어 있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모두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는 이드를 구경 나온 것 같아 보였다. 그 배는 이드가 차원 이동을 끝마치고 바다에 떨어졌을 때 저 수평선 끝에서 작은 점으로 다가오고 있던 배이기도 했다. 이드와 라미아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저 배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이, 바다 위에 앉아 있는 자네, 괜찮나?”

잠시 후 이드의 바로 코앞까지 스르르 밀려온 배 위에서 선원으로 보이는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상체를 쑥 내밀며 소리쳤다. 그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왠지 정겹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레센 대륙의 공용어였다. 이드는 사내가 구사하는 언어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레센 대륙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하…. 뭐,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별문제 없는 것 같네요.”

이드는 농담조로 물어오는 선원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자 얼굴을 내민 선원 옆으로 사십대쯤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중년인이 웃으며 나타났다.

“후하하하하…. 재미있구만. 별문제도 없다니…. 그럼 우린 그냥 가도 되려나?”

긁적긁적

이드는 중년인이 장난스레 묻자 라미아가 짧게 손질해 준 머리카락을 뒤적이며 한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그대로 되지만….. 이왕이면 다른 곳으로 좀 자리를 옮겨 보고 싶은데요. 태워 주시겠습니까?”

“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젊은 사람이 맨몸으로만 바다에 떠 있길래 용기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넉살도 꽤 좋은데…. 좋아, 뱃삯만 낸다면 내 태워 주지. 돈이 없더라도 걱정 마. 일거리도 충분하거든.”

“아아….. 걱정 마시고 태워 주세요. 특실을 빌릴 테니까요.”

중년의 남자는 이드가 연신 장난을 치거나 허풍을 떠는 것처럼 들렸는지 다시 한 번 와하하 웃고는 줄사다리를 늘어트려 주었다. 이드는 그 줄을 잡고 배에 올랐다. 그저 가볍게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괜히 갑판에 나와 구경하는 탑승객들에게 경계심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드가 올라선 배의 규모는 밑에서 볼 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갑판을 넓히면서도 안전한 항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선 기술이 역시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 배 한 척만으로도 그레센 대륙의 조선 기술이 그다지 낙후되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넓은 갑판 중간중간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와 테이블들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서거나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지금 막 갑판에 올라선 이드를 일제히 향해 있었다. 망망대해를 지나는 따분한 뱃길 여행 중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표류자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다면 이대로 항구에 닿는 일 말고는 별일이라고 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낯선 표류자라니. 그만큼 흥미가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료한 지금 이 작고 느닷없으며, 흔하지 않을 일은 그들에겐 더없이 흥미로운 사건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배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잘생기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이드의 외모에 그들의 눈길은 더욱더 집요하게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보통은 부담스러울 그런 시선들이지만 이드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이드는 갑판으로 나와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곧 그들의 시선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저런 걸 일일이 신경 써서는 하등에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드는 방금 전 사다리를 내렸던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의 중년인은 언뜻 봐서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인데도, 드러난 구릿빛 팔뚝이라든가 상체가 탄탄한 것이 마치 단련된 전사를 연상케 하는 것이지 결코 좋은 시절 다 보낸 중년의 남자로 보이게 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다른 선원들의 신체 역시 강건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말한 것처럼 한여름 배 위의 선원들은 모두 거친 바다 사나이였던 것이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바다 위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이드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중년의 남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감사할 필요 없어. 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거든. 언제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안 그래?”

“당연하죠.”

주위에 있던 선원들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바다에서 배를 타는 사람인 이상 언제 사고로 바다를 표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아, 하지만 뱃삯은 받을 거야. 구해 주는 건 구해 주는 거고, 배를 타는 건 타는 거니까 말이야. 안 그러냐?”

대놓고 뱃삯을 요구하는 말에 주위에 서 있던 선원들에게서 다시 한 번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왁자한 웃음이 그치자 중년의 남자는 이드를 향해 자신을 카슨이라고 소개했다. 또 이 배의 부선장 겸 갑판장이라고 직책도 알려 주었다. 배의 이름은 홀리벤으로, 섬나라인 하루카의 시겔 항에서 출발해 일리나스국의 코리엔 항으로 가는 항로를 타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군요. 그럼 카슨 씨라고 불러 드리면 되겠군요. 전 이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그냥 갑판장이라고 부르면 되네, 이드 군. 그런데….. 어쩌다 여기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 중인가? 듣기로는 허공에서 빛과 같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던데 말이야.”

카슨은 슬쩍 손을 들어 돛대 위를 가리켜 보였다. 그것에는 검은색의 건강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이십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 돛대 꼭대기에 만들어진 망대에서 아래쪽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남자가 수평선 끝에서 차원 이동을 끝내고 나타나는 이드를 확인한 듯싶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일을 꽤 정확히 확인하다니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이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라미아에 의해서 풀렸다.

[하프 엘프라서 보통 사람보다 시력이 훨씬 좋은 거예요. 엘프 특유의 기운이 약하게 묻어나요.]

“하프 엘프?”

이드는 무심코 라미아의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을 들은 카슨의 눈빛은 슬쩍 진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음,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군. 맞아, 엘프의 피가 섞인 덕에 시력이 굉장히 좋지. 더구나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눈이 좋거든. 덕분에 간신히 수평선에서 생겨난 빛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본인 앞에서 하프 엘프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사실 그레센 대륙에 있는 하프 엘프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 노예로 잡혀 온 엘프에게서 태어나고 있었다. 서로의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는 하프 엘프는 극히 적다는 말이었다. 망대 위의 남자 역시 그런 경우일 것이다.

“아까 우리가 접근했을 때 꽤 당황스러운 장면이더군. 추락한 여파로 이미 죽은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물 위에 편하게 앉아 있었으니 말이야. 그런 능력으로 봐서는 아마도…… 마법사 같던데, 나이는 어리지만…. 맞나?”

망대 위를 쳐다보던 이드는 이어진 카슨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마법을 배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쓰자면 쓰지 못할 것도 없으니 마법사가 맞기도 했다.

“네. 그리 좋은 실력은 아니고, 마법보다는 정령술이 더 익숙하지만… 맞습니다.”

“이야, 역시 대단한데. 이렇게 젊은 마법사라니 말이야.”

카슨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이 약간은 달라진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표류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젊고 잘생긴 마법사의 용모를 확인하였으니, 새삼스러워질 만도 하였다. 그런데 보통의 뱃사람 경우엔 미신을 쉽게 믿기 때문에 마법사나 정령술사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대형 여객선에서 일하는 만큼 귀족을 호위하는 마법사나 여행하고 있는 마법사를 많이 만나 본 모양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드가 카슨을 바라보고 있자, 카슨은 곧 이드를 너무 한 곳에 세워 두었다고 생각했는지 선원들을 각자의 자리로 쫓아내고는 이드를 선실로 안내했다.

“이거 물에 빠졌다 올라온 사람에게 너무 꼬치꼬치 물었구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가세. 내가 선실을 안내해 주지. 네 놈들은 빨리 제자리로 가서 일하지 못해!”

홀리벤호는 대형 선박인 만큼 갑판을 비롯해 선실로 이어지는 복도 역시 비좁지 않고 큼직큼직했다. 덕분에 흔들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전혀 배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레센 대륙의 조선 기술이 낙후되지 않았다기보다는 꽤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해양 지배에 대한 각 제국들의 경쟁도 치열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렇게 무엇이든 널찍널찍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배 안에 있으면서 가장 싫은 것은 비좁은 데서 오는 갑갑함이고, 그 다음은 할 일이 없어 견디기 어려운 지루함이기 때문이었다. 이드 옆에서 걷던 카슨도 배 안을 두리번두리번 관찰하는 이드의 그런 호기심 어린 생각을 눈치챘는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슨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보통 홀리벤호를 탑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철컥

“이 방에 머물면 되네.”

카슨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라미아와 함께 살던 집의 작은 방 크기만 한 선실이 보였다. 단단해 보이는 침대와 벽에 밀착되어 고정된 테이블이 있는 선실이었다.

“헤, 깨끗하네요. 보통 배보다 선실도 크고…..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 특실도 좋은데요. 구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구조되었다는 것보다는-엄밀히 말하면 구조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그것보다는 필요했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운 이드였다. 이드는 지금까지 쓸 일이 없어서 아공간에 처박아 두었던 금화를 라미아에게 받아 카슨에게 내보였다. 카슨은 잠시 멀뚱멀뚱 금화를 쳐다보다가 예의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자네가 그랬지. 음….. 과연. 우리 배에서 일하진 않아도 되겠어. 하지만 아쉽게도 특실은 안 되겠는걸. 이미 다 차 있는 상태라서 말이야. 귀족들은 좋고 나쁜 것보다는 우선 비싼 걸 선호하는 법이거든. 덕분에 자네는 여기 2등실을 쓸 수밖에 없어. 더구나…. 우리 뱃사람은 말이야, 표류하던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 전통이 있단 말이지. 그럼 저녁 식사 때 부르러 오지. 편히 쉬고 있게나.”

그 말을 듣고 있던 이드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런 전통이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럼 난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그냥 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시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카슨은 사례를 하려는 이드의 말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얼른 문을 닫았다.

“이거 참.”

이드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대 가에 앉았다. 어딜 가든 이런 인정을 베푸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기압 상태로 뾰로통해 있는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태연하고 여유로운 꼴을 마냥 보아 주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대륙력과 날짜는 물어보지 않으시는 거죠?]

날카로운 라미아의 목소리에 이드는 슬그머니 입가에 떠올렸던 미소를 지웠다.

“하하하…. 깜빡했어. 워낙 시원시원하게 건네 오는 말에 휘둘려서 말이야. 뭐, 저녁에 물으면 되니까 걱정 마.”

이드는 짐짓 호기롭게 과장된 동작으로 지껄이며 허리에 채워져 있던 라미아를 끌러 눈앞에 들어 올렸다.

“하!”

잠시 라미아를 바라보던 이드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밑도 끝도 없는 이드의 말 속엔 풀리지 않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눈앞에 둔 것 같은 답답함과 고민이 한껏 묻어 있었다. 이드가 뜬금없이 중얼거리자 그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라미아가 퉁명스레 물었다.

[뭐가요?]

항상 이드를 대할 때면 나긋나긋하기만 하던 라미아가 평소의 라미아였다. 그리고 이곳 그레센에 도착하고 난 후부터 이미 그런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 라미아는 현재의 라미아였다. 뭐, 취향에 따라서는 그런 모양도 귀엽게 봐 줄 사람도 있겠지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대하는 이드로서는 적잖이 곤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드는 그에 대해 달리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라미아가 이렇게 틱틱대는 이유는 이드가 모조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잖아.”

그리고 지금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본래 사람은 짜증이 나면 어떤 일에도 일단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을 가진 라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몰라요. 흥!]

차가운 콧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라미아의 반응이었다. 이거야 원. 이드는 라미아의 좀처럼 풀릴 줄 모르는 냉담함에 힘이 빠지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문제는 지금 무엇보다 빨리 풀어야 할 시급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이그, 지금 그렇게 삐져서 등 돌리고 있을 때냐? 왜 네가 다시 검으로 되돌아갔는지 알아봐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거 아니냐고!”

그랬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게 바로 라미아의 변화였다. 지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라미아가 그레센에 도착하는 순간 다시 검의 모습으로 변화해 버린 상황.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사실 그레센의 바다 위에 떨어지면서 라미아가 다시 검으로 돌아갔을 때 이드나 라미아 둘 다 꽤 허둥댔던 것이 아니다. 지구에 있을 때 혹시 그레센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면 라미아가 사진에 집착하며 잔뜩 찍어둔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생각해 보는 것과 직접 현실로 당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더구나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았던 수년간의 지구 생활로 인간의 형상인 라미아가 더 익숙해져 버린 둘이었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서 라미아가 검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듯이, 라미아를 다시 인간으로 변하게 만들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고, 마침 이드를 향해 홀리벤이 접근해 오면서 당시에는 이 라미아의 문제를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여유가 생긴 지금은 라미아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답답하네….”

웬만한 일은 쉽게 쉽게 최대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 생각하는 이드였지만 그로서도 라미아의 변화와 재변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지금처럼 고민해 보기는 중원에서 이곳 그레센 대륙으로 떨어지고 난 후 팔찌를 바라보며 돌아갈 방법을 궁리하던 때 이후일 것이다. 그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드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자신의 반려로 인정한 라미아를 마냥 검으로만 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좀 더 이드의 속마음을 들춰 보자면 계속해서 틱틱거리는 라미아의 신경 쓰이는 태도와 그에 따라붙는 머리 지끈거릴 정도의 잔소리가 무서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좌우간 지금 가장 해결이 다급한 문제는 바로 라미아의 인간화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이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미아는 계속 이드의 말에 청개구리 심보로 냉랭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본인의 일인 만큼 가장 속이 타고, 그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그녀의 앙칼진 태도에 이드로서는 갑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분히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해도 모자랄 판에…..

“라미아…… 라미아….. 제발 진정하고 상황 좀 풀어 보자. 나보다 머리 좋은 네가 그렇게 흥분하면 인간으로 다시 변하는 게 늦어질 뿐이라고…..”

이드는 말투를 바꾸어 어린아이 달래듯, 이제는 이드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라미아를 향해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말에 되돌아온 라미아의 대답은 앞서와 똑같은….

[베에, 흥!]

짜증이 가득한 투정이었다. 그렇지만 라미아는 역시 라미아였다. 이드의 말을 무시하는 반응과는 달리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라미아의 검신이 이드의 맞은편 선실 바닥에 얌전히 내려섰던 것이다. 틱틱거려도 이드의 말이라면 무시하지 못하는 라미아. 이런 걸 언행불일치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굳이 그런 걸 말해 다시 라미아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는 이드였다.

“그래, 우리 천천히 생각해 보자. 우선 네가 생각해 본 거 있지? 말해 봐.”

[…….우리라고 해 놓고선 왜 저보고 말하라고 그래요?]

역시 순순히 답이 나오진 않는다. 이드는 라미아가 진정하려는 것 같다가 다시 튕기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듯 검신을 톡톡 두드려 주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보다는 우리 라미아가 더 똑똑하니까 그렇지. 자….. 말해 봐. 생각해 봤지?”

아주 라미아를 달래는 데 선수가 된 이드의 말투였다.

[…….그럭저럭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종합해서 추리는 해 봤어요.]

“그래서?”

[그러니까 아무래도 제가 다시 검으로 모습이 변해 버린 이유는요……]

“이유는?”

이드는 이어질 라미아의 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그녀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지구와 그레센이라는 차원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

[…..]

“……야!”

이드는 한순간 힘이 빠져 기우뚱하는 몸을 겨우 바로 하고는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선실 바닥에서 흔들흔들거리는 라미아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그런 건 나도 말할 수 있다고…….”

이드는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붙잡고 라미아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실었다.

한참 전부터 삐져서 퉁퉁거리는 라미아의 반응을 고분고분 받아 주기만 하던 그였기에 쌓였던 게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지만 그런 이드의 시선은 본 척도 않는 라미아였다. 그러고 보니 검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추가로 이제까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던 말싸움을 전적으로 계산해 보자면….. 거의 모두가 라미아의 승리였다. 백 퍼센트에 가까운 승률을 보유한 셈이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미아가 했던 말은 이드 역시 생각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이동했을 때 라미아가 사람으로 또는 검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그런데 라미아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라미아의 툴툴거리는 반응에는 다급함이 거의 없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만한 무엇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무엇이 이드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한 지경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라미아로부터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이드가 라미아에게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말싸움은 시작해 보기도 전에 이드의 패배로 결정이 났다는 것도 분명했다. 잠시 진땀을 흘리며 라미아를 어르고 달랜 끝에 이드는 라미아가 말한 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들으세요. 제가 정리한 바로는 지구와 그레센 두 세계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지구와 그레센, 각각의 차원이 나를 바라보는, 그러니까 일종의 시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각차?”

[네. 설명하자면 좀 더 복잡하겠지만 쉽게 말하면 시각차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그레센이라는 대륙이 속한 차원은 원래 제가 태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검의 모습으로 저를 본 것이고, 이곳과는 전혀 다른 지구라는 별에 속한 차원은 저를 인간으로 본 거죠.]

“음……”

이드는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지구로 가면서 인간으로 변했던 것도 그런 차원 간의 시각차가 차원 이동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나타난 것이란 생각이에요.]

원래 차원 이동이라는 것이 텔레포트와 비슷하긴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어디까지나 전혀 다른 마법인 것이다. 이 차원에서의 육체를 소멸시키고, 다른 차원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롭게 태어나는 재탄생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경이로운 현상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구성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육체일 뿐 영혼이나 마나 등의 근원적인 힘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 영혼과 영혼이 지닌 힘을 보고서 차원은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재구성해 내는 것이다. 그 기준은 거의 모든 차원들이 비슷비슷했다. 이드가 중원에서 그레센으로 다시 지구로 이동하면서 몸이 그대로인 점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라미아에 한해서 그 차원 간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그레센이 속한 차원은 라미아의 태어날 때 모습부터 이드와 계약을 맺고, 지구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기에 검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지구는 달랐다. 지구가 속한 차원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와 같은 라미아였다. 하지만 차원을 넘어 이동되어 온 존재이기에 차원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영혼의 격을 살피고 가진 바 힘을 측정해서 그에 어울리는 몸을, 인간의 육체를 라미아의 영혼에 입혀 주었다. 다시 말해 지구가 속한 차원은 라미아의 영혼에 어울리는 형태를 인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지구로 이동했을 때 라미아가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그레센으로 돌아온 지금 원래의 라미아를 기억하고 있는 이곳의 차원은 그녀에게 검의 모습을 다시 입혀 주었다. 다시 말해 검으로 변한 지금, 라미아의 본래 모습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 된다.

“헤에, 그럼….. 방법을 찾기보다는 네가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게 맞는 일이겠구나.”

라미아의 설명을 듣고 난 후의 이드의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말만 바뀌었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그런 마법에 관계된 쪽으로는 별로 자신이 없는 이드였다. 슬쩍 라미아에게 이 일을 전부 떠넘기기로 몰래 마음을 먹은 이드였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잘도 알아냈네. 지구에서 네가 인간으로 변했던 이유를 전혀 몰랐었잖아. 정말 대단해. 이번엔 어떻게 된 거야?”

이드는 자신의 생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또, 궁금함을 풀기 위하여 칭찬을 곁들여 다시 라미아를 불렀다. 그 말에 라미아는 기가 살았는지 땅에 서 있던 몸체를 허공으로 붕 뛰어 올리며 많이 풀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헴, 제가 이드를 통해 세상의 흐름에 접속해서 얻어낸 결과를 다시 정리하고 추리한 거라구요.]

이게 무슨 소리? 이드는 가볍게 던진 물음에 생각도 못한 답이 나오자 느긋하고 장난스럽던 기분을 싹 지워 버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날 통해서 진리에 접속하다니.”

세상의 큰 흐름이란 다시 말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순리이며, 모든 것의 진리이다. 그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흥, 흥, 원래 알려고 하면 이드가 훨씬 더 빨리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드는 그것도 몰랐죠? 하여간 이쪽으로는 통 관심이 없다니까.]

쫑알쫑알…… 라미아는 허공에 둥둥 떠서는 이드의 물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크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초기에 말을 잘 듣더니 반려로 인정한 후부터 왠지 처음의 순종적이고 귀엽던 특징이 많이 사라진 라미아였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잖아. 라미아,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드는 이번엔 저절로 올라가는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고, 그건 라미아를 윽박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 때문에 라미아의 삐침이 더해지더라도 원하는 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드의 생각일 뿐이다.

똑 똑 똑

잘 마른 나무를 두드리는, 부드럽게 귀를 자극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는 그 소리에 막 꺼내려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라미아도 테이블로 날아 내렸다. 이런 속에서 마법검이란 사실을 들키면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엉뚱한 사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드는 라미아가 테이블 위에 놓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선실 문 쪽으로 향했다.

“네, 누구십니까?”

대답과 함께 이드가 연 문 앞에는 저녁 식사 때 보자던 카슨이 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헌데 그는 이드가 문을 열었는데도, 별다른 말도 없이 이드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드는 그런 카슨의 행동에 가볍게 헛기침으로 그의 주의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흐흠, 저녁 때 오신다더니….. 무슨 일이세요.”

카슨은 이드의 말에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 안을 훔쳐보다니 말이다.

“어엇, 미, 미안하게 됐네. 선장이 자네를 찾으러 왔기에, 데리러 왔는데….. 방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구만. 미안하네.”

카슨은 쭈뼛거리더니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드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당당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이드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카슨과는 달리 이드는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라도 혼자 들어간 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면 궁금해할 테니 말이다.

“아,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전 괜찮으니까요.”

“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정말 누구와 대화를 나눈 건가? 자네 목소리밖엔 들리지 않던데….”

이드의 말에 금세 얼굴을 펴는 카슨이었다. 당당한 풍채라기보다는 단순해 보이는 덩치였다.

“정령입니다. 잠깐 저와 계약한 정령과 대화를 나눴죠. 그런데….. 어디서부터 들으신 거에요?”

이드로서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차원이라느니, 진리라느니, 인간으로 변하는 거니 하면서 정령과의 대화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걱정은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카슨이 걱정 말라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인 것이다.

“아하하하…… 공연히 걱정할 필요는 없네. 들은 게 없으니까. 마침 문 앞에 도착하니까 안에서 자네가 고함지르는 게 들리더구만. 그래서 바로 노크를 한 거지. 아니었으면 그냥 문을 열었을 텐데 말이야.”

“쩝, 그것도 손님한테는 실례일 텐데요.”

“뭐, 그런가. 참, 선장이 기다리겠구만. 같이 가세.”

이드는 카슨의 말에 테이블에 놓인 라미아를 쓱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전하고는 문을 닫았다.

‘금방 부를 테니까 아공간에 들어가 있어.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괜한 걱정이겠지만, 혹시라도 이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도둑이라도 들면 곤란하다. 물론 라미아를 도둑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라미아가 마법검이라는 것이 들통난다는 게 말이다. 보나 마나 라미아가 도둑을 튀기거나 구워 버릴 테니까.

[네, 하지만 바로 불러야 돼요. 아니면, 그냥 뛰어 나가 버릴 거예요.]

‘쿠쿡….. 알았어.’

이드는 귀엽게 느껴지는 라미아의 위협에 웃음으로 답하고는 카슨과 함께 홀리벤의 선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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