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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2화


홀리벤은 보기 드문 대형 선박임과 동시에 보기 드문 형태의 배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여타의 배들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크기와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는데, 배의 앞 부분인 선두를 시작으로 배의 중앙 부분까지는 넓게 트여 있어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공간이 되어 있었고, 그 중앙에서부터 선미까지는 마치 수도의 대형 목조 저택을 가져다 놓은 듯한 사 층 높이의 선실들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미 부분이 지나치게 무겁고 크게 생긴 배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의 다른 배들의 배의 무게를 생각해서 만들기 때문에 만들어 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다. 하지만 홀리벤은 주 고객이 귀족과 상인이란 것과 그 크기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굉장히 돈이 많이 들어간 배였다. 덕분에 배의 곳곳에 마법적 기술이 들어가 있었고, 이 배의 무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덕분에 이렇게 무게 균형을 무시한 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안전 역시 튼튼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기사 귀족들이 주로 애용하는 배이니 어찌 허술하겠는가 말이다.

홀리벤의 선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해 주는 카슨의 말에 이드는 홀리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처음 선실에서 라미아와 대화하던 중 느껴지던 은은한 마나의 기운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다 왔구만. 여기서 선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네.”

카슨이 이드를 안내한 곳은 홀리벤에서 제일 높은 사 층에 자리한 커다란 문 앞이었다.

“네, 저기 카슨 씨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요. 지금이 대륙력으로 몇 년이었죠?”

대륙력은 그레센 대륙이 대륙이라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용되어 온 시간을 재는 역법이자, 그레센 대륙이 가진 대략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응? 그러니까.. 보자, 허헛 갑자기 물으니까 헷갈리는군. 그러니까 지금이 아마, 대륙력 5711… 년인가?”

카슨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오히려 물음을 던진 이드를 바라보며 되묻고 있었다. 하기사 귀족도 아닌 그저 뱃사람인 카슨이 대륙력을 신경 쓰고 있을 일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드는 그런 카슨의 물음에 슬쩍 그의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저도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마 11년이 맞지 않을까요?”

“…. 자, 들어가지.”

슬쩍 흘려 넘기는 이드의 말에 카슨은 못 들은 걸로 하고는 선실의 문을 열었다.

“선장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원래 노크를 하고 해야 하는 말을 문부터 열고 하는 카슨이었다. 상하 관계가 분명한 곳에서는 크게 호통을 칠 일이다. 그러나 정작 안에서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수고하셨어요. 들어오세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답을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카슨의 뒤에 서 있던 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장이… 여자? 그것도 젊어?’

일반적으로 배의 선장이라고 하면 경험이 많은, 다시 말해 나이 많은 남자가 대부분이다. 능력 좋은 젊은 사람이 선장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거의가 남자다. 헌데, 홀리벤처럼 큰 배의 선장이 여자라니. 그것도 분명히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능력에 따라 크게 남녀의 구분이 없는 기사나 마법사와는 달리 배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선장이 여성인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인데, 이 홀리벤의 선장이 젊은 아가씨인 것이다.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슨을 따라 들어선 선실은 저택의 서재와 접객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선실의 가운데 놓여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인이라기보다는 아직은 소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방금 전 카슨의 말에 대답한 사람도 두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 선장이지?’

순간 두 여인을 보고 있던 이드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한쪽은 남성풍의 가벼운 정장을 걸친 긴 머리의 소녀였고, 한쪽은 심플한 선이 돋보이는 드레스를 걸친 짧은 커트의 발랄해 보이는 인상의 소녀였다. 하지만 이드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긴 머리의 소녀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제가 이 배 홀리벤의 선장 피아 테스티아예요. 표류 중이었다고 들었어요. 큰일을 당하셨군요.”

피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홀리벤의 선장은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첫 만남에서 잘 하지 않는 행동을 쉽게 하는 피아였다.

“이드 휴리나입니다. 저야말로 홀리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드는 대답과 함께 피아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었다. 휴리나. 언제인지 쓰게 될 일이 있으면 쓰려고 준비해 둔 성이었다. 중원에서 태어나면서 가졌던 원래 이름인 예천화에서 성인 밝을 예를 밝음을 뜻하는 고대 엘프의 언어인 휴리나로 바꾼 것이다. 이드의 또 다른 반려인 일리나가 엘프라는 것을 생각해서 일부러 엘프의 언어를 택했다. 엘프의 언어가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다며 라미아가 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리나의 성인 세레스피로도 엘프의 고어로 숲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레센 대륙에서 제대로 성을 밝혀 본 적이 없었던 게 맘에 걸렸던 이드였다. 뭐, 그때는 중원으로 돌아가는 문제로 이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휴리나라면… 뜻을 모르겠지만, 고대어인 것 같군요. 고대어로 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긴 어려운 일인데, 운이 좋았군요. 앉으세요.”

뜻을 알 수 없는 휴리나라는 성에 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드와 카슨에게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카슨 씨께 전해 듣기로는 휴리나 씨는 정령술사시라구요.”

피아는 카슨에게 전해 들은 말로 말문을 열면서 미리 준비해 놓은 듯 한 잔씩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향긋한 향의 이름 모를 음료수였다.

“네, 자랑할 실력은 되지 못하지만 좋은 친구들을 가졌죠. 그리고 편히 이드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군요.”

“그럼, 그러죠. 저도 피아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뱃사람이다 보니, 성으로 불리는 건 답답하게 들리거든요. 호호호.”

낭랑하게 웃어 보이는 피아의 말에 이드 옆에 앉은 카슨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스스로 용감한 바다의 사나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인 만큼, 뱃사람들은 거의 다 첫 인사를 나눈 후에는 바로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이드 씨를 부른 데는 큰 이유는 없답니다. 단지 저희 홀리벤에서 처음으로 맞은 표류자이기에 제가 보고 싶었거든요. 또 갑작스러운 손님이신 만큼 미리 만나 보는 것이 제 일이기도 하구요. 편히 쉬시게 하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세요.”

양해해 달라는 말과는 달리 피아의 태도는 당당했다. 이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이나 성별을 떠나 한 배의 선장은 선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상대가 가진 힘을 파악하고, 그 상대의 위험성을 알아본다. 그것이 배의 안전과 승객의 안전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선장의 일이고, 지금 피아가 이드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점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물에서 건진 사람이 해적인지, 또는 대륙에서 수백 명을 죽이고 바다로 탈출한 위험 인물일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놈들이라면 정말 물에서 건진 사람이 보따리 내놓으란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도 있는 일이다. 피아는 그것을 미리 파악해 보겠다는 것이다. 드넓은 바다에 떠 있는 좁은 배 안에서의 생활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배에는 많은 수의 귀족들이 타고 있었다. 혹여 그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십중팔구 이 홀리벤호와 관계된 곳은 망하고, 책임자는 목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아니요. 당연한 일인걸요. 양해랄 것도 없죠.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부담 가지지 마시고 물어보세요.”

이드는 편히 말을 늘이며 음료수 잔을 들고는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대었다. 상대가 좋은 모습으로 나오면 이쪽에서도 좋은 행동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이드는 정중한 피아의 태도에 질문하기 편하도록 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실, 무슨 일을 저지를 맘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긴장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이 이드 옆에 앉은 백전노장의 카슨과 피아였다. 그들이 보기에 이드에게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이어지는 질문들은 가벼운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출신이신가요?”

“일리나스의 켈빈 출신이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악명 높은 시온 숲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 제가 첫 발을 디딘 곳이죠.”

이드는 처음 그레센 대륙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리며 그 중 사람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의 지명을 말했다.

“켈빈이라면 저도 가 본 적이 있죠. 특히 마법학교 때문에 이름이 높은 곳이죠. 듣기로는 마법으로 바다에 떨어지셨다던데… 그곳의 학생이신가요?”

정령사에 마법으로 바다에 떨어졌으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마법보다는 정령술 쪽이 좋아서요. 공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라면 이미 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죠. 사실 원래 목적지가 아나크렌의 수도였는데, 공간 이동을 맡은 녀석이 바보같이 실수를 한 덕분에… 제가 요 모양 요 꼴이 됐죠.”

아아… 이건 완전히 누워서 침 뱉기잖아.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는 이드였다.

‘쿠후후후…. 맞아요. 바보 같은 누구누구 덕분이죠.’

거기다 옆에서 속을 긁어 대는 사람까지 있으니… 이드는 이마 한 쪽에 살포시 일어나는 핏줄을 겨우 진정시키며 가늘게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라미아, 너….’

‘쿄호호호.’

사실 전이었다면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 라미아와 이드는 단절되어 있어야 했지만, 서로의 영혼이 더욱 단단하게 맺어진 지금은 아공간을 넘어서도 충분히 교감이 가능했다. 덕분에 더욱 피곤해진 것은 이드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뭘 하시나요? 정령술사라고 하시던데… 검도 가지고 계시구요. 혹, 어디에 소속된 기사신가요?”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카슨에게 이드의 처음 모습을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또 정령술을 사용할 줄 안다면 나이나 검 실력에 상관없이 기사단의 정식 기사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니요. 딱히 하는 일은 없습니다. 스승님께 물려받은 것이 있어 생활은 풍족하거든요. 가끔 수련을 위해 용병 일을 하기는 하지만… 뭐, 지금은 그저 할 일 없는 한량이죠. 하하하.”

“쿠쿡…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무슨 일로 아나크렌에 가시나요?”

이드는 피아의 마지막 질문에 자세를 바로 하고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만날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일리나라고… 저의 반려가 될 여인이죠. 그녀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반려. 아내. 연인. 이 단어들이 뜻하는 바는 거의 조금씩 틀리지만 한 가지는 똑같다. 바로 사랑하는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이런 말들은 공통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묘한 흥미와 함께 가슴 한쪽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전해 준다. 특히 그런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여성이라면 그 반응은 두세 배는 기본으로 크게 나타난다.

그 증거로 이드를 호기심과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살피던 두 여성의 눈에 금세 호감이 떠올랐다. 몇몇 질문들로 이드에 대한 경계가 풀렸다지만 아직 호감을 가질 수는 없을 텐데, 반려라는 한마디로 좋은 점수를 왕창 따 버린 것이다. 로맨스를 꿈꾸는 여인들 특유의 심성이 많이 작용한 것일 테다. 덕분에 그 뒤로 선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말을 꺼낸 반려, 일리나와 이드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서 곤란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잠시 후, 카슨의 도움으로 두 여성의 질문 공세를 빠져나온 이드는 피아로부터 저녁 식사의 초대를 받고 선실을 나올 수 있었다.

“푸~ 힘들다. 이건 정말 전투가 따로 없네…”

피아가 있는 선실과 꽤나 떨어진 이드는 질렸다는 듯이 머리를 뒤쪽으로 쓸어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하… 다 그런 거야. 말로 여자들에게 이기려면 안 되지. 원래 그런 이야기는 듣기는 재밌어도 당사자는 진땀이 흐르는 거야. 뭐… 그런 것도 내 나이가 되면 다 자랑거리가 되지만 말이네. 나도 왕년엔 여기저기 날 기다리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고, 내 시간 되면 이야기해 주지.”

역시 저 나이 때의 중년은 능글맞다. 확실히 이드는 여성들의 수다에서 건져 주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카슨도 처음엔 이드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고 있었던 듯하다. 이드는 곧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듯한 카슨을 무시하고는 마지막에 피아에게서 들었던 말을 생각했다.

“5717년…”

좀 더 정확하게는 대륙력 5717년 한창 더운 여름인 8월 10일. 이드가 던진 지금의 시간에 대한 피아의 대답이었다. 그 중얼거림에 이드의 옆에 서 있던 카슨의 얼굴이 슬쩍 찌그러지더니 슬쩍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드의 질문에 그가 답했던 5711년과는 무려 6년의 차이. 이드가 거기에 동조하긴 했지만 쪽팔렸을 것이다. 이드는 그런 카슨의 뒷모습을 보며 킥킥 웃음을 흘리고는 배정받은 선실의 문을 열며 머릿속으로 라미아를 불렀다.

‘들었지, 라미아? 5717년이야. 우리가 그레센을 떠난 후 얼마나 지난 거야?’

’93년이요. 우리가 차원 이동을 했을 때가 대륙력 5624년 10월 3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따지면 92년하고도 10개월 만에 다시 그레센에 돌아온 거예요.’

라미아는 대답과 함께 다시 선실 중간에 스르륵 모습을 나타냈다.

“백 년이 가까운 시간이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변한 곳이 많겠지?”

이드는 갑갑해지는 마음에 입고 있던 옷의 목 부분을 잡고 늘였다.

‘글쎄요. 하지만 별나게 크게 변해 버린 곳은 없을 거예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이야 엄청나게 변했겠지만, 다른 곳들은 큰 변화가 없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너무 긴 시간이잖아.”

이드는 기운 없는 말과 함께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기다리는 이란 말과 함께 떠오른 얼굴. 바로 일리나였다. 아무리 엘프라 하지만 구십 년이란 시간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 구십 년이란 시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기간이다 보니, 더욱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리나에게 미안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기운은 다름 아닌 라미아가 가장 잘 알아 주고 있었다.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꽤 긴 시간이긴 했지만, 엘프에게는 십 년이나, 백 년이나 그게 그거라구요. 더구나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요.”

라미아는 가벼운 말투로 이드를 위로했다. 생각을 전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벼운 마법과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드가 너무 기죽어 있는 듯해서였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포근히 안아 주었을 텐데…

‘어휴~ 빨리 인간의 모습을 갖춰야 하는데…’

라미아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빨리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지금이라도 찾아 봐요.”

“응?”

간단하게 들리는 라미아의 말에 누워 있던 이드가 고개를 들어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시선에 이번에도 목소리를 만들어 말을 했다.

“이드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 않으니까요. 대부분 그대로 있을 거란 말이죠. 한번 가 봤던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라던가, 로드가 머물던 별장이라던가요. 그것도 아니면 아무 드래곤이라도 찾아서 족쳐 보면 로드의 근황은 나오니까요.”

“푸훗… 그래, 그래도 되겠네.”

이드는 잘 나가다가 끝에서 과격해진 라미아의 말에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라미아의 말대로 움직일 때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대륙의 정세 정도는 알고 움직여야지. 혼돈의 파편과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리고… 네가 말했던 그 진리와의 접속이란 말도 들어봐야겠고….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거기에 널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읏차!”

이드는 누워 있던 몸을 가볍게 일으켜서는 라미아를 붙잡고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정답. 맞았어요. 상품을 드릴까요? 호호호…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좀 쉰 후에 해요. 조금 머리 아픈 이야기니까. 더구나 좀 있으면 식사할 시간이잖아요.”

라미아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방 안에 비쳐 드는 햇살의 양이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더구나 한창 이야기 중에 식사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식사 전에 잠깐 배 안이나 둘러보기로 할까?”

“야호~ 하지만 저도 같이 데리고 가셔야 해요.”

“물론.”

이드는 라미아에게 대답하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을 털어 버리고 선실 문을 나섰다. 한 손에 라미아의 부드러운 붉은색 검집을 따뜻하게 잡고서 말이다.

홀리벤은 보통의 배의 배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 독특한 형태의 배이다. 하지만 홀리벤에서 볼 것이 겉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의 독특한 모습만큼이나 독특한 기능을 한 가지 가지고 있었다. 바로 반 잠수함 기능이었다. 그게 뭔 말이냐 하면 배를 갑판 부분까지 물속에 잠기게 가라앉힌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바닷물 표면과 갑판의 높이가 같아진다는 것으로, 보통의 배라면 그대로 꼬로록 가라앉는 수준으로 물속에 잠긴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당연하게 배에 여러 가지로 적용된 마법들 때문인데, 중력 마법으로 배의 무게를 더해 가라앉히고, 배의 선두와 후미를 잇는 삼각형 형태의 실드 마법으로 바닷물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이다. 보통의 배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기능이 홀리벤엔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능이 배에 설치된 것은 승객들의, 정확하게는 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항해를 하는 홀리벤인 만큼 바다에서 큰 파도를 만나거나 폭풍을 만나는 일이 많다. 사실 바다에서 폭풍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자칫 잘못하면 배가 그대로 뒤집히거나 조난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반 잠수함 기능이 있으면 그런 걱정이 필요 없다. 아무리 강한 폭풍우라도 무거운 힘으로 배를 가라앉혀 놓으면 무게 중심이 가라앉아 파도에 의한 흔들림이 최소화되어, 뒤집힐 걱정이 없고, 높은 파도도 실드에 막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도에 쓸려가거나 부서지는 일이 없다.

아니, 더 나아가 실드 마법으로 안전이 확보된 폭풍우 속의 갑판은 귀족들의 색다른 구경거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워낙 귀족들을 많이 태우는 홀리벤이라 그들의 안전을 궁리하던 선주 측이 만들어 낸 방법이었는데, 막상 사용된 후에는 그것이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어 더욱 많은 귀족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좋은 상품이 된 경우였다.

“확실히… 일부러 이 배를 탈 만한 좋은 구경거리긴 해.”

쿠르르르….

실드 마법에 부분적으로 사일런스 마법이 가미된 덕분에 은은히 들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드는 눈앞의 장관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옅은 푸른색이 흐르는 투명한 실드 마법 위로 부서져 내리는 하얀 파도들과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어 모든 걸 휩쓸어 버릴 듯하던 파도가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린 날 쏟아지는 빗속에 우산을 들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느낌이랄까? 이런 모습은 중원은 물론,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장관이었다. 정말 앞서 말한 대로 일부러 돈 내고서라도 보러 올 만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그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이드와 마찬가지로 많은 귀족과 승객들이 홀리벤의 갑판에 나와 폭풍우 속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귀족들의 모습에 순간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있었던 이름만 저녁 식사지 사실은 귀족들을 위한 선상 파티에 초대됐었던 이드였다. 그리고 자신은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지만, 귀족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계속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헌데, 그렇게 늦게까지 흥청거렸던 그들이 다시 아침부터 갑판에 나와 있는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아침까지는 약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지만, 그것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시간인데, 저 귀족들은 파티에 지치지도 않았는지 갑판에 나와 앉아 격렬히 춤추는 바다를 감상 중인 것이다.

‘정말 체력들도 좋지…’

혹시, 요즘 귀족들의 덕목 중에는 체력 단련의 항목도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엉뚱한 생각도 드는 순간이었다. 뭐, 사실은 이들이 너무나 파티에 익숙해진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무엇이든 몸과 생활에 깊이 파고들어 익숙해지면 크게 힘들지 않는 법이다. 실제로 체력이 좋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드는 이 체력 좋은 귀족들의 모습에 슬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파티에서 저들에게 시달린 것이 생각난 때문이었다. 이 배에 타고 있는 귀족들은 그 출신들이 각양각색으로 두 제국과 왕국들의 귀족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모두 휴양지로 유명한 섬나라 하루카에서 휴식을 즐기고 돌아들 가는 길인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여러 나라의 귀족들이 이렇게 모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파티를 통해 서로 친분을 쌓기 위해 열심히들이었다. 거의 이삼 일 꼴에 한 번 열리는 그 파티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어제의 이야기 주제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로 표류자 이드였던 것이다. 슬슬 배 여행이 지겨워질 때 나타난 표류자. 거기다 정령을 다룰 줄 알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나이도 어렸다. 귀족들, 특히 여자들이 씹어 대기엔 아주 특상의 주제였던 것이다.

차라리 들리지 않는다면 모를까, 빵빵한 능력 덕분에 듣지 않으려고 해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그 소근거리는 소리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좀 한다 하는 귀족들은 아예 대놓고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 대니… 이드로서는 아까 라미아가 가자고 할 때 이 배를 떴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가 밀려오던 순간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급히 자리를 피했었던 그였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귀족들이 모였으니… 원래 귀족들이야 뭐라고 하건 신경 쓸 이드도 아니었지만, 이 좁은 배 안에서 생활하려면 웬만해서는 부딪히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행동은 한 발 늦은 듯했다.

“아라… 여기 있었군요.”

막 돌아서려는 이드를 향해 걸어오며 말을 건네는 두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네. 피아 씨도 나와 계시는군요. 그리고… 레이디도 나오셨군요.”

두 여인. 아니 여인이라기보다는 아직 소녀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두 소녀는 다름 아니라 전날 접객실에서 만났던 두 여성이었다. 어제와 같은 가벼운 남성복 차림의 피아와 그와 비슷한 차림을 한 짧은 머리의 소녀. 첫 만남에선 소개받지 못하고 파티에서 피아에게 소개받은 소녀지만 생각나지 않는 이름에 이드는 레이디란 말로 어물쩍거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보기에 어설펐는지 피아와 단발의 소녀는 서로를 보며 쿡쿡 웃고는 입을 열었다.

“호호호… 당연하죠. 이런 폭풍 속인데 나와 봐야죠. 참, 나나는 제가 어제 소개했었죠.”

빙글 웃으며 나나라는 이름의 단발 소녀의 어깨를 쓰다듬는 피아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슬쩍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자신을 우습다는 듯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나나의 이름을 잊은 것을 안 것이다.

“하핫… 그렇네요. 제가 당연한 말을 했군요. 피아 씨는 이 배의 선장이나 당연히 나와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괜히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피아와 나나는 괜히 놀릴 생각은 없는지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이 배에는 선장이 두 명이거든요.”

“선장이 둘이요?”

피아는 갑판이 내려다보이는 삼층 선실의 난간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슨 아저씨요. 그분이 갑판장님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저를 포함한 이 배의 모두가 또 한 명의 선장으로 생각하고 있죠.”

“그 아저씨가요?”

이드가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되묻자 피아와 나나가 호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때는 털털해 보이시지만 경험이 많으신 분이죠. 저도 바다와 배에 대해서 많이 배우긴 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죠. 특히 이런 날씨에는 저보다 아저씨가 더 믿음직하죠.”

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꼭대기 층을 가리켜 보였다.

“지금도 아저씨가 키를 잡고 계세요.”

“헤에~”

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피아와 시선을 함께 했다. 하지만 달리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카슨을 대하는 선원들과 피아의 행동에 믿음이 실려 있는 듯도 했다.

“나중에 잠시 보러 가 봐야겠군요.”

“그러셔도 될 거예요. 그런데 이드 씨는 배에서 내리면 목적지가 아나크렌이 되는 건가요?”

이미 어제 했던 말이라 이드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는 그 모습에 나나의 곁으로 가서 그녀를 안아 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드 씨께 나나의 호위를 부탁해도 될까요? 일리나스의 수도까지요.”

배가 정박할 항구에서 아나크렌까지 가기 위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거치게 되는 곳이 바로 일리나스의 수도 아루스한이다. 거기다 서로 구해 준 은혜도 있겠다, 대충이지만 성향도 보았겠다. 특히 정령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활용도가 대단히 높다. 누가 보던 간에 호위로 쓰기에 딱이다. 피아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드는 무척 친해 보이는 두 여인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며 도로록 눈을 굴렸다.

“…글쎄요.”

하지만 이드로서는 별달리 부탁을 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피아에겐 미안하지만 라미아가 있는 이드로서는 괜히 아루스한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라미아가 없어서 가고자 하면 다른 것 다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이드였다. 괜히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딱히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도 없었다. 굳이 이 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대륙까지 이동할 수 있는 이드였던 것이다. 이 배를 타서 건진 것이 있다면 이 폭풍우 속의 장관과 대륙의 정세에 대한 정보 정도? 더구나 이드에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빨리 일리나를 찾아보는 것. 괜히 이런 일에 길지는 않지만 시간을 뺏길 생각이 없었다.

“후~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여행 경로가 다를 것 같군요. 저는 최대한 빠른 길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에? 하지만… 가장 빠른 경로라도 수도를 거쳐야 하잖아요?”

이드가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피아가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몇 가지 빠른 경로들도 모두 수도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항구에서 아나크렌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일 생각이거든요.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면서 간간히 날아도 갈 생각입니다. 미리 말한 것처럼 정령의 친구거든요.”

그 말에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피아와 나나가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 물 위에 편히 앉아 있었던 것처럼 정령을 이용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경로는 크게 자이가 나지 않지만 날아서 간다니…”

그 말처럼 날아간다면 동행이 불가능 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구해 주셨는데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는 군요.”

“아니요. 괜찮아요. 연인을 맞이하기 위해 서두르는 분을 붙잡을 순 없죠. 피아가 부탁을 드리긴 했지만 이미 고용해둔 호위로도 충분하니까요.”

이드의 말에 나나가 방글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이드가 빠르게 이동하는 이유가 연인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뭐, 그것이 정답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이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선실로 향했다. 나름대로 잘 대해 주었던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고 나니 그냥 있기에 좀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큼… 이거… 그냥 이 배를 나가야 할까나?”

이드는 라미아가 전날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더구나 항구까지는 앞으로 육일이나 남아 있었다. 아무리 피아와 나나가 괜찮다고 했지만, 거절한 입장에서는 영 뭔가 찝찝하다. 거기다 지금 이 배에서 머무는 것도 공짜이다 보니 심정적으로 불편한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생각은 그대로 라미아에게 전해져 갔다.

“그럼 괜히 눈치 보지 말고 바로 텔레포트 할까요?”

이제 주위에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만들어 말을 하는 라미아였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괜히 여기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겠지.”

“옛써! 그럼 언제 출발해요? 지금 바로 갈까요?”

당장이라도 떠나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라미아의 말이였지만,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있다가. 이 폭풍이 지나가면… 그때 출발하자.”

“쿠훗… 그래도 조금 신경이 쓰이시나봐요.”

“어쨓든 좋은 인연이니까.”

이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선실에 나있는 작은 창을 통해 폭풍우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말마따나 좋은 인연이었던 만큼 이 폭풍이 무사히 지나가는 것까지는 보고 떠날 생각인 것이다. 세상일이란게 다 그렇지만 아무리 튼튼한 배라도 한 순간의 방심으로 끝장이 날 수도 있는 것인 만큼, 혹시라도 그런일이 일어난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까 갑판에서 본대로라면 오후쯤에는 폭풍이 완전히 지나갈테니까 오늘 내로 출발할 수 있을거야.”

그 말에 라미아가 기분좋다는 뜻으로 그 자리에서 통통 튀어올랐다.

“호호호. 좋았어요. 지구든 그레센이던 간에 배여행은 지루하단 말예요.”

이드는 중얼거리는 라미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배여행이란게 즐거운건 딱 하루 뿐이고, 그 후로는 지겨운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폭풍은 서서히 잦아들며 사라졌다. 이드가 혹시나하고 걱정하던 일 없이 무사히 폭풍을 지난 것이다.

폭풍이 지나갈 동안 선실에 머물러 있던 이드는 부드럽게 변한 바람을 따라 갑판으로 나와 크게 기지게를 켰다.

그런 이드의 눈에 폭풍으로 인해 깨끗하게 씻겨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폭풍속의 스릴넘치는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저녁해에 물든 깨끗한 하늘도 전혀 그에 뒤지지 않는다.

“정말 한폭의 그림같아.”

이드는 수평선과 맞다은 하늘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정말 그림으로 한 장 남겨두는게 어때요?]

라미아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말하는 이드의 말에 뭐 어려운 일이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드의 눈앞으로 작은 빛이 일렁이며 둥근 아공간으로의 구멍을 형성했다. 곧이어 그 구멍에서 은색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이드는 갑작스런 라미아의 말과 행동에 가만히 서있다 반사적으로 떨어지던 물건을 받아들였다.

“… 휴?”

흰색과 검은색이 들어간 은색의 네모난 물건. 바로 다용도 미니컴퓨터 휴였다. 그레센으로 돌아올때 라미아가 가장먼저 챙겨들었던 물건이고, 거의 항상 라미아의 손에서 반짝이던 물건이었다. 휴를 사용한지 몇 년 뒤에 안 사실이지만 라미아는 휴로 사진을 곁들인 그림일기까지 쓰고있었다. 아마 지금 이걸 내놓은 것도 그렇게 좋은 관경이라며 사진으로 남기란 뜻일게다. 하지만 이드는 별로 그러고 싶은 맘이 없었다.

“됐어. 다음에 너하고 일리나하고 같이 와서 보는게 좋겠다.”

이드는 생각없다는 듯이 휴를 가볍게 등뒤로 던져버렸다.

[흐음… 그것도 좋겠네요. 그런데 휴를 좀 더 살살 다룰수 없어요? 함부로 던지면 부서진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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