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55화
다음 날 이드는 어스름하게 동이 트는 시간에 맞춰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행동하다가는 언제 기사단에서 마중 나왔다면서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항상 만약을 준비해야 하는 것.
이드는 밖에서 지키는 기사들의 시선을 의식해 정령으로 세수를 한 것으로 떠날 준비를 간단하게 마치고, 잠시 머뭇거렸다.
라오를 향해 한마디 남겨두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전날 그레이의 후손들과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잠깐 생각이 깊어지자 혹시 그렇게 남겨놓는 말을 오해해서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결론은 계속해서 바뀌고 헷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드는 전날의 상황과 잠시 겪었던 라오의 성격을 고려해서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공연히 그러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이 정해지자 벌써부터 이드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던 라미아의 목소리가 방 안을 맑게 울렸다.
“숲 냄새 가득한 그곳으로…. 텔레포트!”
밖에 있는 기사들을 의식한 때문인지 이번의 텔레포트엔 빛이 없었다.
그저 햇살에 그림자가 사라지듯 그렇게 붉은색 섬을 품에 안은 한 사람의 인형이 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드가 라미아의 마법으로 사라진 몇 시간 후……
“으아아아악!”
악에 받친 다섯 명의 목소리가 황궁으로부터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그레이의 후예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썼지만, 이드가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은 상대.
밤새도록 이드와 라미아를 지켰지만, 정작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전날 저녁에 이미 치워져 버린 불쌍한 존재들.
바로 이드의 감시를 담당한 다섯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들 다섯은 이드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고사하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라오로부터 기합을, 그것도 가장 처절한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는 연신 신음을 대신한 악에 받친 고함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드가 이런 예상치 못한 사실을 미리 짐작했다면 라오를 향해 한마디 남기지 않았을까? 또 이들 다섯이 이드가 어떻게 떠났는지 알았다면 한마디 해 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마법으로 떠난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합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다섯 명의 기사에게 슬픈 운명을 지워 주고 새벽에 떠나온 이드는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에 아침 안개를 피워 내는 거대한 숲의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익…… 이곳도 두 배나 넓어졌는걸. 임해(林海)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겠어.”
이드는 한눈에 봐도 달라진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는 숲을 휘휘 돌아보며 발 아래 놓은 나무의 꼭대기에 가볍게 내려섰다.
경공을 사용한 이드가 내려선 나뭇가지는 가볍게 휘며 자신 위에 무언가가 올라 서 있다는 것을 표시했다.
“정말요. 마치 숲과 산이 서로를 안아 주고 있는 느낌이에요.”
라미아가 이드의 말에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보크로의 안내로 들른 칼리의 숲은 그 뒤로 자리한 두 개의 산에 안긴 형상이었는데, 지금은 숲의 규모가 두 배로 커진 때문인지 마치 숲과 산이 마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뀔 거야. 좋게든 나쁘게든…. 그보다 지금은 채이나의 집을 찾는 게 먼저겠지? 보자…. 숲이 변해서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고, 분명히 그때 숲에 들어온 방향은 저쪽이었단 말이야….”
이드는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 방향에서 숲을 향해 그대로 일직선을 그었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는 삼분의 일 지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아마….. 저쯤이었지?”
이드는 스스로의 기억력에 반문하고는 나뭇가지를 밟고 있는 발끝에 내력을 형성했다. 순간 이드의 신형이 누가 들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둥실 떠오르며, 이드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스르륵 허공을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지그에서 지낸 8년이란 시간 동안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몸속에 녹아들면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변한 부운귀령보의 모습이었다.
원근감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처음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는 손가락 하나로 가려지던 곳이 정작 가까이 다가가면 이렇게 넓어지니 말이다.
이드는 보크로와 채이나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수 킬로미터 정도의 커다란 숲 일부분을 바라보며 라미아를 찾았다.
“라미아!”
“네, 네 벌써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보채지 말아요.”
이드는 재빠른 그녀의 말에 빙글빙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칫, 내가 보채기는 언제 보챘다구…. 그보다 뭐 좀 찾았어?”
“물론이죠. 제가 누구라구요.”
“누구긴 누구야. 예쁘고 똑똑한 라미아 양이지. 그래 어디야?”
이드는 원하던 대답을 시원하게 전해 주는 라미아의 말에 한껏 반가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야말로 라미아의 대답과 동시에 목표를 향해 돌진할 듯한 코뿔소의 기세였다.
하지만 기대하던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라미아의 핀잔이 먼저 귓속을 간지럽혔다.
“가까워요. 약 오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이드, 의외로 기억력이 나쁜가 봐요.”
갑작스럽게 변한 라미아의 말투에 이드는 얘가 또 무슨 말장난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손에 들린 라미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라미아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이유가 흘러나왔다.
“집이 탐색된 곳이 저 앞이 아니라…… 이드의 등 뒤쪽이거든요.”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뒤돌아섰다. 정말 라미아가 아니었으면 엉뚱한 곳만 찾아 헤맬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흠, 저쪽이란 말이지.”
이드는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는지 바로 나무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라미아가 말한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칼리의 숲 속은 나무 위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위에서 볼 때는 푸르른 숲의 바다였지만, 막상 숲속으로 들어서니 이건 어둡고 복잡한 밤길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정말 넓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나무들도 빽빽하게 들어섰는걸요.”
이드는 라미아의 감탄하는 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서 있는 나무를 쓰다듬어 보았다.
“응, 게다가 나무도 튼튼하고, 품고 있는 기운도 맑아. 보통 이렇게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숲은 오히려 생기가 없고, 땅이 가진 양분의 급격한 소모로 숲 전체가 서서히 죽어갈 텐데…. 역시 엘프가 가꾸는 숲이라서 그런가?”
“그럼요. 괜히 엘프가 숲의 종족이라고 불리고 있을까요?”
숲의 요정. 이드는 엘프를 가리키는 그 말을 생각하고는 천천히 풍요롭고 신선한 숲 내음을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숲 속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던 이드는 숲의 나무가 단순히 빽빽하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 차이는 없지만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 간의 간격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엘프들은 숲 외곽의 나무들을 빽빽하게 세워, 일종의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저렇게 나무들이 많아서야 그 나무를 베어 내지 않고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서기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정말 엘프다운 성벽이라는 느낌이지?”
이드는 서서히 밝아 오는 아침의 가슴 두근거리는 풍경을 대할 때처럼 점점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에 취해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숲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드의 눈에 지금까지 바라보던 숲의 분위기와는 다른 무언가 어긋한 듯한 느낌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미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숲 속에서 분명하게 울려 나왔다.
“다 왔어요. 바로 저기예요. 저번에 들렀던 보크로 씨와 채이나 씨의 집.”
“그래, 이제 보여.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 그때 모습 그대로인걸?”
라미아의 말을 듣고서 좀 더 걸어 나가자 나무에 가려 있던 작은 공터와 함께 동화 속에나 나올 것처럼 아담하지만 단단한 느낌의 통나무집이 그 형체를 드러냈다.
“당연하죠.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집인걸요. 저 마법이 걸려 있는 한 상할 일은 없다구요.”
“하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년 간격으로 썩거나 벌레가 먹은 곳을 새로 손봐야 할 테니까. 보크로 씨가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
이드는 털털하다 못해 주변의 시선도 거의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활달했던 보크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끌끌 웃음을 지었다.
보크로 씨는 아직도 채이나에게 꼼짝도 못 하고 잡혀 살고 있을까?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이니 만큼 인간의 수명을 다해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지녔던 실력과 약초에 밝은 채이나를 생각해 볼 때 어쩐지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살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드의 마음에 있었다.
그 유쾌하고 웃음소리 끊이질 않던 당시의 추억에 빠진 이드에게 자신을 부르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응…..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나 봐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통나무집 바로 앞에 서서 내부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과연 라미아의 말대로였다.
“이거 설마, 세레니아나 라일로시드처럼 집을 비운 건 아니겠지?”
“글쎄요.”
벌써 두 번이나 당했던 일이기에 이드와 라미아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잠시 실례합니다.”
이드는 들어줄 사람도 없는 말을 허공에 띄우고는 단단히 닫혀 있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문을 열었다. 혹시나 하던 일의 확인을 위해서였다.
끼이이익
나무가 서로 뻑뻑하게 비벼지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집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드와 라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 톨의 먼지도 쌓여 있지 않은 거실과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선반.
척 보기에도 이 집은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이드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후다다닥
이드는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처럼 당황한 기색을 떠올리며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와서는 끼이익 소리를 내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느긋한 표정을 만들어 얼굴에 쓰고는 턱 하니 문 옆에 기대어 한껏 여유로운 모습을 연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누군가가 빠르게 이쪽, 정확하게는 이 집을 향해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무가 가득한 숲에서 이 정도 속도로 달려온다면 십중팔구 채이나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채이나가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선 걸 안다면?
“아마 보크로 씨에게 날아가던 단검이 날 향해 날아오겠지?”
“틀림없이.”
그리고 잠시 후.
터어엉
이드의 얼굴 옆으로 날아와 박히는 단검이 두 사람의 짐작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다만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네 녀석은 뭐냐?”
바로 단검의 주인이자 싸가지 없는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이 채이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게……누구래요?]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다만…….. 보크로 씨가 아는 건 확실한 것 같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그 아저씨는 탈태환골을 해도 저렇게는 안 돼요.]
‘확실히…..’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무잡잡한 피부가 매력적인 건장한 미청년.
갸름하고 선이 가는 얼굴선에 흑안석(黑眼石) 같이 반짝이는 눈빛과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살랑거리는 것이 커다란 영지로 나가면 수많은 소녀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을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런 청년의 분위기에 그 털털하고 느긋하던 보크로를 떠올릴 만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크로의 젊었을 때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되는 부분이라고는…..
“아하하하하하…… 주먹에서만은 내가 최고다!”
수련을 마치자마자 세상에 처음 나와 물정 모르고 설치는 시골 청년의 철없는 모습뿐이니…..
‘저런 얼굴과 이어 붙이긴 좀 무리지.’
이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보크로의 모습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때 콧웃음을 치는 라미아의 말이 들려왔다.
[이드, 우리 솔직해지자구요. 그게 좀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차이 같아요?]
‘…..그래, 절대 무리다.’
이드는 그렇게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는 보크로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나…. 이드는 청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상대가 누군지 묻기 전에 자신의 소개부터 먼저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뭐….. 이런 물건이 말보다 먼저 날아온 걸 보면 확실히 예의 같은 걸 차릴 것 같진 않지만 말이야.”
이드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통나무에 박힌 단검을 빼 들고는 가볍게 손에서 놀리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엘프의 땅. 저 숲 밖에 세상의 예의 따윈 이곳에선 상관없다. 더구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침입하려는 인간에게 차릴 예의는 특히나 없어.”
순간 이드는 침입이라는 말에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집 안에 들어갔었다는 것까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어설펐지만, 채이나를 대비해 연기를 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가만히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이게….. 당신 집이라고?”
이드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기댄 벽에서 등을 떼고는 일부러 자세하게 집과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드를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보던 청년의 날카로운 눈길이 꿈틀거리다 못해 확연히 찌푸려졌다. 확실히 집주인 입장에서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게….. 불만이라는 거냐?”
청년의 말에 그런 기분이 잘 담겨 있었다. 더구나 이 청년은 그런 느낌을 말로만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짝
어느새 소리도 없이 뽑혀 나온 또 하나의 단검이 그의 왼손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어제라도 던져 줄 분위기였다는 그 맹렬한 자세라니….
말보다 칼을 먼저 던진 것도 그렇고, 말 한마디에 칼을 뽑는 것도 그렇고….
‘정말 성질 하나 대단하네. 급하고, 화끈한 게….. 마치 보크로 씨와 채이나 씨의 성격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데…. 어때? 라미아.’
방금 전까지 여러 번 떠올려 보았던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의 집에 살고 있는 청년이 당연히 하나의 단어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 녀석….. 두 사람의 아들 같지 않아? 생김새도…. 채이나 씨의 느낌이 나는데.’
[정말, 생김새에 성격 그리고 쓰는 무기까지 채이나 씨를 많이 닮았군요. 맞아요, 두 사람의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하프 엘프네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프 엘프라는 확인 정도면 충분했다.
이 칼리의 숲은 다크 엘프의 영역이다. 잠시 지나가면서 쉬어 갈 수는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와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런 곳에 사는 데다 이미 주인이 있는 집에 지내고 있는 젊은이….
더구나 집의 두 주인 사이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하프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이드는 바로 입을 열었다.
“너, 채이나 씨의 아들이지?”
뭔가 따지듯이 묻는 이드의 말투가 어느새 아랫사람을 대하는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 대하는 사람이 아닌, 잘 아는 사람들의 아들로서 확실히 상하 관계에 대한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네 녀석 누구냐?”
“어이, 대답은 안 해?”
이드가 다시 대답을 재촉하자 청년은 이드를 잠시 바라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분이 내 어머니시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서 그분은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그리고 난 네 녀석을 몰라. 세 번째 묻는 거지만, 네 녀석은 누구냐?”
이드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청년의 대답에 빙글 웃으며 손에 가지고 놀던 단검을 청년을 향해 던져 주고는 입을 열었다.
“네 부모님과 잘 아는 사람. 오랜만에 일이 있어서 두 분을 만나러 왔지.”
이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잘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듣는 쪽에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불만이 있었던가?
차창……. 까가가가각……
칼날이 서로 비벼지는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이드가 던져 준 단검이 청년의 단검에 맞아 되날아 왔다.
그것은 처음 던져 낸 단검과는 달리 엄연한 살기가 묻어 있었으며, 정확하게 이드의 얼굴을 향해 화살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직접 손으로 던져 낸 것도 아니고, 그저 단검으로 되튕겨 낸 것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놀랄 만한 실력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드는 생각도 못한 그의 갑작스런 공격에 깜짝 놀라며 손가락을 놀려 단검의 날 끝을 잡아 내며 소리쳤다. 그의 단검 실력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더 놀랐던 것이다.
단검보다 더 빠른 이드의 동작에 청년은 경계 레벨을 몇 단계나 상승시켰다. 그에 따라 바로 전투에 돌입할 듯 몸을 낮추고 당장이라도 뛰어 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 역시 보는 눈이 있기에 가볍게 단검을 잡아 낸 이드의 최소화된 동작에서 상대의 실력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아 본 것이다.
자신의 준비가 모두 끝나자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지난 오십 년간 숲 밖을 나가신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난 쭉 어머니와 함께 있었지. 만약 어머니가 너 같은 꼬마 녀석과 안면이 있다면, 당연히 나도 널 알고 있었어야 해.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널 몰라!”
“아!”
이드는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긴 한숨이었다. 그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충분히 상대가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확실히….. 이드를 보고 나이가 많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죠.]
라미아의 말대로였다.
뿐만 아니라 이드의 현재 외모는 처음 그레센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그레센을 떠난 지 팔 년이 넘었는데도, 전혀 나이가 든 모습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의 내력과 그레이드론과의 융합으로 육체가 완벽하게 형성된 때문이었다. 이미 그레센으로 넘어올 때 커야 할 건 다 컸던 이드였기에 그 최고의 상태로 육체의 노화가 멈춰 버린 것이다.
사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드도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펐다. 늙지 않아 좋긴 하지만, 앞으로 나이만큼의 대접을 받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너 같은 녀석이 오십 년 이상 살았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거냐?”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쨌든 대답은 해야 할 일이었기에 이드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기운 빠진다는 표정으로 삐딱하니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
“그런 뜻으로 말한 거라고. 정확하게는 오십 년이 아니라, 너희 부모님들과 만나는 건 구십 년 만이다. 혹시 들어본 적 없냐? 이드라는 이름 말이야. 아니면,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보크로 씨의 성격상 그런 큰일에 대해서는 네 녀석에게 이야기해 주셨을 것 같은데…. 역시 그런가 보지?”
이드는 말을 하는 도중에 요상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보크로 씨가 그의 아들에게 그때 있었던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게 이드의 말을 믿기는 힘든지 처음부터 이드를 다시 살피는 모습이었다.
상대가 관찰하는 태도로 변하기 시작하자 이드는 라미아는 물론 아공간에서 일라이저도 꺼내 들어 그의 눈에 잘 보이도록 흔들어 보여 주었다.
자신이 검을 쓰는 모습을 몇 번 보았던 보크로라면 분명히 검에 대한 이야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드가 그레센에서 사용한 검이라고는 단 둘. 라미아와 일라이저뿐이었다.
청년은 이드와 두 검을 번갈아 가며 잠시 바라보더니 좀 더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풀었다.
“확실히 듣긴 했지만….”
“거, 의심이 많은 녀석이네. 자, 이거면 어때?”
이드는 말을 늘이는 청년이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을 짓자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취을난지(就乙亂指)의 수법으로 던져 냈다.
단검술에 대해서는 별달리 아는 것이 없는 이드였기에 지법을 단검에 응용한 것이다. 헌데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임기응변이라 할 수 있는 그 수법은 비도술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드가 던진 단검이 마치 술 취한 나비처럼 어지럽게 날아가 정확하게 청년의 허리에 걸린 검집을 찾아 들어간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청년은 침묵했다. 그가 어머니께 배운 단검술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허공에서 왔다 갔다 움직인다니… 더구나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반응하지도 못할 엄청난 스피드였다.
물론 그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이드에겐 이것이 어디까지나 지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좌우간 그 한 번의 기죽이기 겸 실력 증명을 보여 준 단검술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제가 미처 못 알아보고 실례를 했습니다.”
청년은 갑자기 태도가 바뀌더니 함께 깊이 허리를 숙였다.
방금 전까지 거칠게 나오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강자에게 숙이는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그런 솔직한 모습이었기에 오히려 보기에 좋았다.
이드는 그게 또 어색하기도 했던지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야. 그 상황이면 누구나 그렇게 나오지.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이름이….”
“마오 베르라고 합니다. 편하게 마오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이드는 마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 뒤의 집을 뒤돌아보았다.
“상당히 오랜만이야. 이곳을 온 건. 여기에 들른 것도 딱 한 번뿐이었거든. 거기다 두 분에게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 생겼을 줄은 몰랐지. 덕분에 좋은 단검술을 봤지만 말이야.”
이드의 말에 마오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더구나 아까 전 단검술 같은 건 생각도 못 해 본 일입니다.”
“훗, 신경 쓰지 마. 그건 단검술이 아니니까. 그보다 두 분은?”
이드의 물음에 순간이지만 마오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는 건강하십니다. 요즘은 주로 마을에 계시죠. 하지만 아버지는 삼 년 전에….”
이드는 그런 마오의 모습에서 그가 흘려 버린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살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 한편으로 섭섭하고, 슬픈 느낌이 들었다. 비록 오엘에게서 누이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신이 알고 있던 이가 죽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후, 실수로 흘려 버린 구십 년이 아쉽구나.”
이드는 자신이 차원 이동을 할 때 설정하지 못한 시간이 정말 아쉬웠다.
그때 잘만 했다면 일리나를 바로 만났을지도 모르고, 보크로를 비롯한 모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바보짓인 거 알죠?]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생각과 마음이 같지 않아서 그렇지만 말이다.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나 봐….”
“아뇨. 벌써 삼 년 전 일이라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머니를 찾아오셨다고 하셨지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를 모셔 오겠습니다.”
이드는 뭔가 보크로에 대해서 더 말을 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지난 일을 꺼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부탁할게.”
마오는 이드가 그렇게 말을 하자 바로 자리에서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드는 멀어져 가는 마오의 기척을 느끼며 공터 중간에 덩그러니 생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나무를 베어 내면서 의자로 쓸 요량이었는지 사람이 앉기 딱 알맞은 높이로 만들어진 데다 맨들맨들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아마 이것도 보크로가 다듬었을 것이다. 설마 보크로가 있는데 채이나가 손수 다듬었을까. 세월이 여기 그루터기에도 많이 흘렀다는 흔적처럼 거무스레했고, 이드는 그러면서도 거친 바람에 반들거리는 표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쓸어 보았다.
이드는 자리에 앉더니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는 보크로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채이나가 오기 전에 그에 대한 아쉬운 감정을 깨끗이 털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채이나의 성격상 여태껏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겠지만, 괜히 보크로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뭐, 이드가 나타나는 것 자체가 보크로에 대한 추억의 한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쓸쓸한 바람이 공터를 휩쓸고 가고 그 자리가 더욱 황량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감정 정리를 끝내고 얼마쯤 기다렸을까.
처음 마오가 다가올 때와 같이 또 다른 느낌의 바람이 스치는 듯한 두 개의 기척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부스럭거리며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 떠났던 마오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첫 만남 때 얼굴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는 채이나였다.
세상이 다 변해 버린 듯한 구십 년의 세월을 그 어디 한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때 그 모습이라니…
요정족이니, 영원의 종족이니 하는 말로 불리는 이들이지만, 정말 이때만큼 그 말이 실감 난 적은 처음이었다.
“이야, 채이나. 정말 오랜……우아아!”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채이나에게 걸어가던 이드는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단검에 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진짜 생각도 못한 공격이었다.
더구나 마오보다 두 단계 정도 뛰어난 공격이라니…..
“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채이나!”
오랜만에 겪는 당황스러움에 이드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져 나왔다.
“너무 늦었잖아, 임마!”
찔끔
이드는 자신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그녀의 박력과 분위기에 밀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 그게 일이 꼬여서…”
이드는 그녀의 윽박지르듯 나오는 큰 소리에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채이나에게 이런 변명을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생각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채이나를 바라보던 이드는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반가움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눈가의 물기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채이나의 눈길에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의 행방을 걱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이 연관된 보크로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여러 말이 필요가 없다. 이드는 채이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하지만 이렇게 돌아왔다구요.”
이드는 뭔가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말하며 고개를 들어 채이나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잘 돌아왔어, 라고 한마디 해 주었을 그런 상황이었고, 또 그런 것을 기대한 이드의 미소였다.
하지만 상대는 보크로를 쥐고 흔들던 다크 엘프 채이나였다.
“너…. 잘도 웃는구나. 널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었는지 아냐? 이놈아!”
욕이 끝나는 동시에 또다시 단검이 허공에서 번뜩였다.
이드는 이번에는 크게 몸을 숙여 단검을 피했다. 괜히 단검을 잡거나, 간발의 차로 피하는 건 오히려 그녀의 성격을 긁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짧지만 보크로와 채이나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보크로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몇 번 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 보크로는 아마도….
“미안해요. 저도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다구요.”
그저 있는 대로 숙이고 들어가는 방법으로 대응했었다.
“노력했다는 게 백 년의 세월이야, 이 바보야!”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검증된 방법이라서 그런지 효과는 확실했다. 두 번이나 더 날아오는 단검을 피하며 싹싹 빌어야 했지만 말이다.
“뭐, 우선은 이걸로 봐 주마. 하지만 정말 온 마음을 다해 널 기다리고 있는 그녀는 쉽지 않을걸?”
채이나는 쏘아보는 시선으로 일리나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 말에 이드는 정말 할 말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내가 죄인이요, 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물론이죠. 언제든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하고….. 아들!”
채이나는 이드의 대답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는지 날카롭게 빛나던 눈길을 거두고는 마오를 불렀다.
“예, 어머니.”
채이나의 부름에 한쪽에서 두 사람 간의 독특한 상봉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마오가 빠르게 다가왔다.
“이야기하면서 마실 차를 좀 준비해 줄래?”
“그러죠.”
마오는 채이나의 말에 마치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는 부하처럼 움직였다.
헌데 그런 관계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여태껏 쭉 그래 왔던 것 같아 보였다.
이드는 모자지간치고는 좀 독특하다 싶은 두 사람을 보고는 채이나의 시선을 피해 마음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채이나답다고나 할까. 보크로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확실히 자신의 아래에 두고 있는 확고한 모습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채이나는 큰 걸음으로 마오가 열어 놓고 들어간 문으로 들어서면서 이드를 불렀다.
“안 들어올 거야?”
“아, 아니요. 들어가야죠.”
사실 속으로 채이나의 흉을 본 것이나 다름이 없던 이드는 그녀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발길을 옮겼다.
채이나는 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를 던지고는 휙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 어쨌든… 잘 돌아왔다.”
이드는 갑작스런 말에 순간 멍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마음으로부터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그레센은 오자마자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왠지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같은 장소지만 다른 시간대는 그 역시 다른 장소나 마찬가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런 위화감이 확 풀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정말 내가 있을 곳으로,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아늑하고 편안함.
“넵! 돌아왔습니다.”
이드는 힘차게 채이나의 말에 대답하고는 기분 좋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