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56화
“휴, 잘 먹었다.”
이드는 그레센에 도착한 후 가장 편안한 느낌에 젖을 수 있었고, 느긋한 마음을 반영하듯 표정마저 그렇게 보였다.
이드는 식사를 마치고는 찻잔을 들어 아직 요리의 뒷맛이 남은 입 안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너 요리 솜씨가 상당히 좋다.”
이드는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마오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의 주방장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아직 모두 아침 전이라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마오가 식장으로 들어갔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채이나는 요리와는 벽을 쌓고 사는 게 분명했다.
대신 마오의 요리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것이어서 이드도 상당히 만족한 상태였다. 채이나에게 단련된 보크로의 음식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옛집으로 돌아온 듯한 이드의 느긋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채이나였다.
“자, 배도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볼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구십 년 동안. 네가 사라지고 보크로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널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어. 어디 있었던 거야?”
이드는 그녀의 말에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야기가 조금 긴데…. 어떻게 자세하게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핵심만 간단히?”
“핵심만 간단히 해. 쓸데없는 이야기는 필요 없어.”
역시나….! 이드는 채이나의 대답을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해 두었던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에 가까운 말들을 꺼내 들었다.
“우선 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들었을 테고….. 그 뒤에 이동된 곳이 이 그레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었죠. 거기에 혼돈의 파편의 흔적도 있었고, 그걸 처리하고, 돌아올 방법을 찾았죠. 그렇게 걸린 시간이 팔 년. 그런데 막상 오고 보니 여긴 구십 년이 지났더라구요.”
“…….차원이란 말이지. 과연 찾지 못했던 게 당연하군.”
이드의 말을 다 들은 채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면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듣고서 만족한 것이다.
뭐, 이드로서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도 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런 이야기는 채이나에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직 이드가 돌아왔다는 것과 그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드는 채이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 것 같자 또박또박 힘주어 입을 열었다. 바로 이드가 며칠 동안 고민해야 했던 문제이자, 이곳으로 채이나를 찾아온 이유인 일리나의 행방과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일을 묻기 위해서였다.
“채이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쉽지만 몰라.”
“그러니까, 몰라가 일리나가….. 네?”
채이나의 대답과 함께 일리나에 대해 물으려던 이드의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말에 말이 꼬이고 말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직 제대로 묻지도 않았는데 모른다니…”
정말 묻기도 전에 천연덕스럽게 대답부터 내놓았던 채이나였다.
하지만 채이나는 그게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또 태연히 입을 열었다.
“뻔하지. 너 혼자 올 때 알아봤어. 일리나를 못 만났지?”
정확하다. 이드는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네 성격상 그레센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일리나를 찾았겠지. 그리고 찾지 못했으니 혹시나 하고 날 찾아온 것일 테고….. 만약 일리나를 만났다면 같이 왔겠지. 아니,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아올 일도 없었을걸. 안 그래?”
이드는 이번에도 채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말 눈치가 빠른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채이나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앞서 한 말로 봐서는 자신이 그레센을 떠나고 나서도 일리나와 상당히 친해진 것 같은데….
“정말 일리나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것도 없어요?”
처음 이곳으로 올 때 바로 일리나의 행방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채이나를 만나면서 혹시나 기대를 했었는데, 그 기대가 무산되자 오히려 큰 실망감이 드는 이드였다.
“너, 이미 로드의 통나무집에는 들러봤지? 거기에 없으니까 혹시나 그녀의 마을로 돌아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날 찾은 것일 거고?”
“….. 점술사라도 됐어요?”
채이나는 이드의 말에 픽 웃음을 지으며 우습지도 않다는 듯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가지고 점술사로 나서려면 굶어 죽기 딱 좋아. 이건 세월이 주는 직관력이야. 거기다 앞뒤 사정을 아는 인간이라면 대개가 짐작할 수 있는 사실들이지. 짐작 가는 곳이 없냐고 했지? 내 생각도 너하고 같아. 아마 마을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어. 시간도 적지 않게 흘렀고, 로드도 그 일로 바쁜 만큼 마을로 돌아가서 널 기다리고 있겠지.”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이 자신과 같다면 아마도 일리나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돌아가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제 채이나를 통해 일리나의 마을에 대해서 알아보는 일만 남았다.
“휴, 이제 마을만 찾으면 되는 건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채이나의 말 중에 신경 쓰이는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채이나, 로드가 바쁘다는 게 무슨 말이죠? 그녀가 바쁠 일이 없을 텐데… 거기다 그 일이라는 게…. 혼돈의 파편에 대한 건가요?”
정말 전 대륙적인 일이 아닌 이상 로드가 바쁠 이유라고는 없었다. 실제 라일로시드 가를 통해서 처음 세레니아를 찾아갔을 때도 그녀는 통나무집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드와 라미아가 알고 있는 사실도 그랬다. 로드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평생을 유유자적, 그저 다른 드래곤들처럼 살아가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일이 있을 때만 드래곤들을 지휘하는 자. 어떻게 보면 로드라는 것은 없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바쁘다니…..
이드는 자연스럽게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드래곤의 로드를 바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생각이 맞았는지, 채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네가 사라지고 나서 일이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지?”
“그렇죠. 여기 도착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됐으니까.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세 제국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서, 혼돈의 파편에 대한 처리가 잘 된 줄로만 알았는데…”
“뭐, 사정을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흠, 뭐라고 해야 하나… 아들, 한 잔 더.”
채이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궁리하듯 잠시 웅얼거리더니, 빈 찻잔을 한쪽으로 밀고는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마오를 불렀다.
“술로요?”
“응, 가벼운 걸로.”
아마 찻잔을 한쪽으로 치우는 게 음료의 종류를 바꾼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채이나는 일단 마오에게 술을 청한 후 잠시 더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어머니, 여기요.”
생각을 정리하면서 혼자 웅얼거리던 채이나에게 마오가 유리잔에 담긴 옅은 바다 빛의 액체를 건넸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특별하게 담은 엘프식 과일주인 듯했다.
“그래, 고마워.”
잔을 받아 든 채이나는 한 모금의 술을 넘긴 후 이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떠난 후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둘 게 있는데, 그건 네가 떠난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왜 아무도 모르는데요?”
“… 누구냐?”
바로 말을 이으려던 채이나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여성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마오는 벌써 단검을 한 자루 손에 쥐고 있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꽤나 놀란 모습이었다.
“라, 라미아.”
하지만 놀라기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그녀의 말에 이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라미아의 이름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바람에 사방을 헤매던 채이나와 마오의 시선이 이드에게로 모아졌다.
“라미아라는 게 방금 말한 상대야? 어디 있는 거야?”
“그, 그게…..”
이드는 채이나의 추궁에 당황스런 표정으로 슬쩍 라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시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레센을 떠나 지구로 떨어질 때까지 그녀의 존재는 비밀이었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지구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지만, 그때는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헌데 왜 지금 갑자기 그녀의 존재를 목소리로 표시했을까?
이드는 마음속 의문을 담아 라미아를 향해 흘려보냈다.
[꼭 비밀로 하고서 조용히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무슨….. 잠깐만.’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의문을 달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채이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는 마음속으로 라미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말처럼 내 존재를 비밀로 할 이유가 없다구요. 비밀로 해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저들이라면 보통 마법검이라고 해도 탐낼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이후의 문제들도 있구요.]
‘이후?’
[네, 그러니까 일리나의 마을에 대해 알아보려고 여기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그 사이 이드와 대화를 할 때 문제가 생긴다구요. 이드는 몰라도 나에겐 답답한 시간들이죠. 대화도 자유롭지 않을 테고, 또 갑자기 이드가 멍하게 있으면 채이나가 이상하게 볼 거라구요. 무엇보다 내가 언제까지 검으로 있을 건 아니잖아요.]
라미아가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이었다.
이드도 그제야 라미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한다면 라미아를 다시 인간의 상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의 힘이란 단순히 차원을 넘는 것만이 아닌, 초월 의지라고 불리는 신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시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내 존재를 알려 두자는 거죠. 그러면 편할 거 아니에요? 게다가 그렇게 해 두면 나도 답답하게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아도 된다구요.]
이드는 조목조목 그럴싸한 이유들을 들어 설명하는 라미아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듣고 있으니 그녀의 말대로 굳이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라미아의 말 중에 틀린 내용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이드는 바로 라미아를 들어 탁자 위에 검신을 올려놓고서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잠깐 의견을 나누느라고요. 소개하죠, 라미아입니다.”
순간 이드를 바라보는 채이나의 눈이 가늘어지며 이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장난하냐? 누가 그 검이 라미아인 걸 몰라?”
정말 장난이었다고 하면 반사적으로 단검이 날아올 기세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답이 늦으면 뭐가 날아와도 날아올 것 같았기에 이드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방금 말을 했던 게 여기 라미아라구요. 라미아, 채이나에게 인사해.”
이드의 말에 라미아는 바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반가워요, 채이나 씨.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라미아라고 해요.”
“에고 소드!”
라미아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채이나가 소리쳤다.
라미아의 또박또박한 음성에 그녀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한 채이나는 잠시 라미아를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이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에고 소드가 맞는 거야?”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드가 아닌 라미아로부터 들려왔다.
“조금 틀려요. 에고 소드가 만들어졌다면, 전 태어난 거예요. 영혼이라고도, 정령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정신이 있거든요.”
그 말에 채이나는 마오가 가져온 술잔의 술을 모두 들이키고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기가 막히는군. 정말 에고라니. 너,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드를 향한 채이나의 마지막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드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랬으니 말이다.
“비밀로 해서 죄송해요.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고 다닐 수 없는 사실이라서요. 시간이 지나고 친분이 생긴 후에는 비밀로 한 게 마음에 걸리고, 또 굳이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슬쩍 말끝을 흐리는 이드의 어물쩡거리는 모습에 채이나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말을 막았다.
“괜찮아. 네 말대로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이런 일은 비밀로 하는 게 좋아. 좋은 판단이야. 실제 이야기나 전설에는 많이 나오는 자아를 가진 물건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세상에 나와 있는 물건은 없을걸. 만약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부터는 정말 난리도 아닐걸. 뭐, 정말 큰일을 당할 쪽은 너에게 덤비는 놈들이 되겠지만 말이야. 그것보다 정말 에고 소드라니 내 평생에 자아를 가진 물건을 보게 될 줄이야. 아, 미안해, 물건이라고 해서.”
“괜찮아요. 그리고 절 부르실 때는 편하게 라미아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너도 이드처럼 채이나라고 불러. 아들, 한 잔 더!”
채이나는 시선을 그대로 라미아에게 두고 잔을 마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부름에 바로바로 들려왔던 대답이 이번엔 들려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오 역시 채이나와 마찬가지로 라미아를 살피는 데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채이나도 곧 그런 마오의 모습을 눈치 채고는 픽 웃었고, 잔을 내려놓고는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네가 잠깐씩 멍하니 있었던 이유가 여기 라미아 때문이었구나?”
“뭐, 그런 거죠.”
“그럼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선 건 왜지, 라미아?”
라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채이나의 물음에 이드에게 했던 말을 정리해서 다시 채이나에게 말해 주었다. 마지막 인간으로 변할 것을 대비한 이유만 빼고서 말이다.
“그래서예요. 그런데 마저 이야기 안 해 주세요? 왜 그때 있었던 일을 본인들 외에 아무도 모르는 거죠?”
“아, 맞다. 네 등장에 놀라서 깜빡했네. 그래, 왜 아무도 모르냐면 말이야. 그들이 말을 해 주지 않아서 그래.”
이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렇게 귀를 기울여 주면 말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때문에 채이나의 입에서는 그때의 사정이 술술 풀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따르면 세레니아를 비롯한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일행들이 돌아온 것은 이드가 사라진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초월적인 존재들의 전투는 쉽게 끝나려면 순식간에 끝나기도 하지만 길어질 때는 몇 날 며칠이 걸려도 승부가 지지부진할 때가 있다. 헌데 이들이 일대일로 싸운 것도 아니고, 다(多) 대 다(多)로 싸웠는데도 그날 돌아왔다는 것이다.
돌아온 그들은 보크로와 채이나를 비롯한 그레이의 일행들, 다시 말해 이드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들과 양 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핵심적인 자들을 불러 모았다.
세레니아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드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단다. 그리고 이드가 사라진 다음 순간 싸움은 그대로 멈추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승리의 카드였던 자폭의 공격과 가장 막강한 전력 중 하나인 이드가 사라지고 난 양 진영의 전투력은 큰 차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만약 싸우게 될 경우 십중팔구는 양패구상. 잘해 봐야 혼돈의 파편 하나, 둘 정도가 살아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측 모두 쉽게 부딪칠 수가 없었고, 자연히 싸움이 중지되어 버렸던 것.
하지만 언제까지 승부를 결하지 않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혼돈의 파편 쪽에서 한 가지 제의를 해 왔다는 것이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던 세레니아들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바로 귀환한 것이라고 했다.
“그 제의란 게 뭔데요?”
채이나의 이야기를 듣던 이드와 라미아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하지만 채이나는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비밀이라더라.”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세레니아는 모여든 일행들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게 했다.
그 약속이란 것들이 여러 가지로 나뉘긴 했지만, 한 가지로 확실하게 줄여 보면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황당한 약속에 모였던 사람들은 혹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라고 했다.
“저라도 그럴 것 같네요. 그들의 위험성을 잘 아는 로드가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그 제의란 게 뭐죠?”
라미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당시 채이나와 일행들이 느꼈을 생각에 동감을 표했다.
그녀의 말에 채이나는 빙글 웃고는 말을 이었다.
“글쎄, 난 아직도 그 제의라는 게 뭔지 짐작도 안 가거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가 봐. 비밀스럽게 뭔가 이야기를 더 들은 구 제국의 황제가 세레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다음 날부터 대륙은 언제 그랬느냐 싶을 만큼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면서 전쟁 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어.”
채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정말 순식간이더라. 거의 한 달 만에, 정말이지 전쟁을 하기는 한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깨끗하게 치워져 버렸는데, 그 일 때문에 온 대륙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해했는지 모르지? 항간에는 세 제국의 황제와 귀족이 모두 마황에게 홀렸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대륙의 운명이 걸렸을지도 모를 절박함이 점화의 불꽃이 되어 한순간에 타오르기 시작한 전쟁과 피비린내마저 깡그리 지워 내며 갑작스럽게 중단된 전쟁이었다.
두 상황을 본다면 그런 소문이 돌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지휘부로부터 전쟁 중단에 대한 그 어떤 공식적인 설명도 없었다니…. 믿을 수 없는 전쟁 속에서 이런 소문은 당연한 것이고,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을까. 당시를 못 보았더라도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그때 두 제국과는 달리 우리들은 흩어져 널 찾았었어.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아마 아나크렌에서 라일론으로 날려가 버린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뭐, 그런 일이 있긴 있었죠. 그때는 확실히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 놓은 에너지보다 규모가 작았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백방으로 찾아 나선 거지.”
이드를 찾아 나선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한 달 후 전쟁의 뒤처리가 끝난 두 제국에서도 이드를 찾는 일을 거들고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가 수색에 동원된 인원이 수십만 명. 각 길드에 의뢰에 움직인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모르긴 몰라도 백만이 넘어가는 엄청난 사람들이 이드 한 사람을 찾는다는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정말 사람 하나 찾는 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긴 긴 대륙의 역사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단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방이 묘연한 이드를 찾고 있는 사이 대륙에도 변화가 있었다. 바로 아나크렌과 라일론의 동맹과 상호불침번의 협상이 그것이었다.
빈번하기 마련인 약소국 간의 동맹이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세 제국 중에 두 제국의 동맹! 대륙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한 번 두 제국에 대한 소문으로 시끄러워졌다.
비밀이긴 했지만 이 협상에 세레니아가 직접 나서서 공증을 서 주었다.
“세레니아가요?”
이드는 세레니아가 일리나와 함께 자신을 찾다 말고 제국 간 동맹에 공증을 섰다는 말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채이나에게 되물었다.
“응, 이 협상이란 게 혼돈의 파편이 있는 카논의 행동을 경계하기 위한 거였거든. 네가 듣기엔 조금 거슬리겠지만, 인간들의 약속이란 게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거잖아. 그래서 세레니아가 나선 거지. 지금 당장은 혼돈의 파편을 직접 겪었으니 아무 일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시간이 지난 후, 두 나라 간에 다툼이 생긴다면 카논이 다시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대로 인간에게 있어 약속의 무게를 제대로 잴 수 있는 저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저울에 달아 볼 수 없는 약속’이 바로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무거울 때는 생명의 무게보다 무겁지만, 가벼울 때는 공기보다 가벼운 약속. 더구나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약속이란 건….. 언제든지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확실히 드래곤 로드의 이름이 그 사이에 끼어든다면, 감히 어떤 수를 쓸 생각도 못 하겠죠. 그녀의 존재는 어쩌면 신탁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으니까요.”
리드는 라미아의 말에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직접 행사하는 파괴적인 힘은 간접적이라 할 수 있는 신탁보다는 확실히 피부에 와 닿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혼돈의 파편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갑자기 그런 공증을 서다니 말이야.”
한국에서 배웠던 스무고개라는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에 빠지는 이드였다. 혼돈의 파편과는 싸우지 않고, 카논을 경계하는 데는 도움을 준다.
이드는 괜히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에다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어지럼증이 일어나 머리를 흔들었다.
채이나는 그런 이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느긋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이미 고민했던 것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이드의 모습에서 어떤 쾌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호홋, 괜히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마. 정말 답이란 건 직접 듣지 않고는 모르는 거니까. 나머지 이야기나 들어.”
거대 제국들의 협상이라는,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큰일이 있었지만, 두 제국 간에 크게 달라진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달라진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자연적인 것밖에 없었으니, 지금까지의 모습 그대로랄까. 아무튼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인원이 이드를 찾아 대륙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지 5년이나 지난 것이다.
그쯤 되자 세레니아가 이드 찾기에 관련된 모든 조직의 수장들을 모이게 해 더 이상 이 일을 지속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아예 수색을 중단시켰다.
이드가 이 그레센 대륙 안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만약 대륙 어딘가에 있었다면, 이드가 찾아와도 벌써 찾아왔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세레니아는 이때 이미 이드가 차원을 넘었을 거란 걸 짐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좌우간 그렇게 하릴없던 수색이 잠정적으로 종결나자 모두들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보크로와 나도 그때 다 헤어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 그리고 그걸로 끝. 그 뒤로는 아무하고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흐음……”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금까지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이어진 긴 시간 속의 사건들을 정리했다.
정말 궁금했던 내용들을 아주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대충은 알게 된 것이다. 이드는 그제야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레센에 돌아와서 알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소식이나,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채이나의 이야기는 마치 숨겨진 비밀을 들은 것처럼 시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듣지 못한 비밀 이야기도 곧 일리나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일리나를 만나게 해 줄 것은 바로 채이나일 테고 말이다.
“그럼 채이나? 일리나의 마을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방법….. 아세요?”
그동안 들었던 것을 차근차근 정리하는 이드를 바라보던 라미아는 그의 마지막 생각을 알아채고는 채이나를 찾아온 진짜 목적에 대해 언급했다.
라미아의 말에 이드도 다시 시선을 채이나에게 돌렸다. 채이나는 한 검의 물음과 한 사람의 시선에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잔을 들어 마오를 불렀다.
“아들! 한 잔 더.”
“네, 어머니.”
이번엔 그녀의 말에 마오가 바로 대답했다. 라미아에 대한 관찰이 끝났기 때문이다.
사실 라미아에 대한 관찰이라고 해 봤자 외관을 보는 것뿐이다. 라미아의 진실한 모습은 드래곤도 쉽게 알아볼 수 없다. 당연히 지금의 마오로서는 라미아 안에 숨어 있는 힘을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잠시 후 마오가 술을 가져오자 채이나는 잔에 따르지 않고 그것을 병째로 모두 마셔 버렸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이드가 묻는 질문마다 골치가 아픈 문제들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 라미아란 말이지. 흠, 우선은 먼저 했던 말과 똑같은 대답을 해 주지. 나도 몰라!”
여전히 장난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채이나의 대답이었다.
순간 이드는 몸을 받치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며 탁자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저, 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말투라니!
“채이나…. 장난하지 말고 대답해 줘요!”
왠지 자신을 놀리는 듯한 채이나의 얼굴 표정에 이드의 목소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더구나 그런 이드를 바라보며 빙글거리는 채이나는 더욱 짓궂어 보이는데…..
“쿡쿡…. 괜히 소리 지르지 마. 정말 모르는 거니까. 대신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어.”
‘이거나 그거나. 똑같잖아요!’
이드는 계속 말장난을 하고 있는 채이나의 말에 속으로 있는 대로 불평을 토하고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게 뭔데요?”
“그녀가 있는 마을에 대해 알 만한 곳에 물어보는 것.”
“저희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라미아가 처음 여기로 돌아왔을 때 채이나를 생각지 못하고 다른 엘프를 찾았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채이나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만만찮은 일을 잘도 생각했네. 엘프를 찾는 것도 문제지만, 설명을 하고 대답을 듣기는 더 힘들 텐데 말이야.”
“이미 충분히 어렵다는 걸 느껴봤죠. 그나저나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거예요? 마을 안에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여기 칼리의 숲에 있는 엘프들 중에 밖에 일에 대해 아는 엘프가 없어. 우리는 화이트 엘프보다 더 폐쇄적이거든.”
허기사 생각해보면 엘프를 봤다고 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엘프인 화이트 엘프를 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다크 엘프를 만난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따져 보면 보크로가 채이나와 결혼한 것은 정말 하늘의 인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리나의 마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한 엘프를….. 알고 있다는 거네요?”
채이나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라미아가 확인하듯 물었다.
채이나는 그런 라미아의 말에 이드를 슬쩍 돌아보았다.
“맞았어. 똑똑한데 그래? 어느 누구하고는 틀려.”
“호호호….. 칭찬 감사해요. 그래도 이제 그만 놀리시고 대답해 주세요.”
채이나가 또 장난처럼 내뱉은 농담에 공감을 표한 라미아가 대답을 재촉했다. 채이나가 슬슬 이드를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라미아였다.
“호호…. 그래, 알았어. 사실 엘프들 사이에도 정보가 모이는 곳이 있어. 일부러 정보를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 비해 타 지역의 엘프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자동적으로 이런저런 정보들이 수북하게 쌓인 곳이지. 그곳은 하나의 마을이라고 할 만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데, 거기에 가면 일리나의 마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거야. 마을에 고위 마족을 봉인하고 있는 곳이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좋았어!”
이드는 채이나의 말이 끝나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말대로만 되면 이제 엘프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마을로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는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일리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럼 그 마을이 있는 곳이 어디죠?”
이드는 대답만 나오면 당장 그곳으로 달려갈 것 같은 기세로 채이나에게 물었다.
채이나는 이미 마음이 붕 떠서 일리나에게로 날아가고 있는 이드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오른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뱅글 돌리며 왼쪽을 향해 가리켜 보였다. 그 뒤에 더할 수 없이 짧은 대답과 함께!
“저쪽 드레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