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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7화


“아아! 어렵다, 어려워…..”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던 이드는 힘 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드의 목소리에 맞추기라도 한 듯이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숲 속의 밤이라 그 웃음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드는 그 괴괴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 옆 머리맡에 기대어 놓은 라미아를 노려 보았다.

“너, 웃지 마.”

“왜요? 웃는 건 내 마음이라구요.”

“왠지 기분 나쁘게 들린단 말이야. 놀리는 것 같고…..”

“호호호…… 마음이 뒤틀린 사람은 모든 게 뒤틀려 보이는 법! 그게 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라구요.”

이드는 능청스런 말에 순간 입을 벌리고는 그대로 꽃잎과 여러 가지 풀들로 채워놓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난스런 라미아의 말이 다 맞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하!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냐구. 채이나가 같이 가야 한다는 건 이해가 가는데, 왜 걸어가야 하느냐고….”

바로 이것이었다. 라미아의 말에 따르면 이드의 마음을 뒤틀고 있는 바로 그 이유가!

낮에 채이나가 말해준 그 마을에도 그녀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채이나가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동행을 부탁할 생각이었던 이드와 라미아였기에 그녀의 말을 바로 승낙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온 채이나의 말이 이드의 마음을 홀라당 뒤집어 흔들어놓았다.

다름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가겠다는 것이다.

처음 이드는 당연하게도 그곳의 좌표를 찾아 텔레포트로 바로 날아갈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채이나의 말에 그런 계획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일리나를 찾아가 보고 싶은데, 걸어가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늦어버린 마당에 한두 달 더 늦는다고 다를 게 뭐 있겠냐는 채이나의 말에는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그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그녀와 더불어 이드와 함께 동행할 마오의 경험을 위해서라니….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고집을 부린다면 이드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강제로 납치하듯이 데려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결국 채이나의 요구를 마지못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승낙한 것과는 반대로 속은 뒤집어지는 이드이다 보니 지금 이렇게 침대 위를 신경질적으로 구르고 있는 것이다.

라미아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침대 위의 방황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또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는 없기에 라미아는 이드에게 한마디 말을 건넸다.

“이제 그만해요, 이드.”

“응?”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이드를 향해 라미아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방 안을 울렸다.

“여유를 가지라구요. 왠지 그레센에 도착하고서는 이것저것 서두르느라 허둥대기만 하고. 마음의 여유가 거의 없었다구요. 그건 평소의 이드답지 않아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차근차근 나간다는 기분으로 마음에 여유를 가져요. 채이나 말대로 이미 백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잖아요. 일리나를 찾는 일이든, 혼돈의 파편에 관한 일이든 간에 한두 달이 아니라 일이 년 늦게 알게 되더라도 바뀔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마음을 편하게….. 네?”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 낮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드에게서 천천히 길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왔다.

“후…. 하….. 후….. 그래, 네 말대로 이미 늦을 대로 늦은 후니까. 좋아, 느긋하게 가 보자고….”

좀 전과는 다르게 뭔가 침착해진 이드의 목소리였다.

라미아는 그 목소리에서 이드가 스스로 마음을 다시 잘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미아는 입가에 저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느끼며, 몸을 눕히고 있던 이드가 그대로 잠들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여행이라고 하면 현재의 평범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즐겁게 놀러 간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채이나는 모르더라도 마오에게는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이드에게도 무엇인가를 벗어난다는 의미에서라면 이번 여행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에게는 사람을 찾는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여행이 될 테니까.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가장 들뜬 이는 바로 마오였다. 그래서 출발하기도 전에 이 여행이 정말 놀러 간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정말 즐겁게 놀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사전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되었든, 그 세계가 어디이든지 상관없이 여행을 위한 사전 준비는 까다롭기도 했다.

여행 일정을 잡아야 되고, 여행 경비를 계산하고, 여행 물품을 챙기는 등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밖에서의 야영까지 고려하는 여행일 때는 신경 써야 할 여행 물품이 몇 배로 불어나는데, 거의 이사를 가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짐이 불어나게 된다.

커다란 배낭을 한 짐씩 지고 가게 되는게 보통인데, 여기서 조금의 문제라도 발생하게 되면 그 여행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을 위한 수행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수가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다. 귀족들의 경우라면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는 제 몸뚱어리 하나가 전부다.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인들이 준비하고, 귀족들을 경호하기 위한 인원까지 따라붙으면 한 번 여행이 얼마나 요란스러워 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덕분에 귀족들이 생각하는 여행이라는 단어와 일반 평민들이 생각하는 여행이라는 단어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

뭐, 그 차이를 떠나서 여행의 준비가 힘들다는 것은 다 똑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 둘 것이 있다. 바로 무슨 일에서든지 예외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바로 채이나와 마오가 그런 예외에 속했다.

“…..짐이 참 간단하네요.”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위해 집 앞에 모인 세 일행. 그 중 이드는 간단하게 짐가방 하나만을 메고 있는 마오를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런 넌 이런 짐도 없잖아.”

“전 라미아가 만들어주는 아공간이 있거든요.”

이드가 어디를 가더라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아공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져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없는 게 없는 공간이었다.

이 아공간이 있으면 여행은 그야말로 걷기 운동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템이 이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드가 조금은 여유를 부리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하자 채이나가 허공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빙글빙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중앙에서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드는 그 불꽃의 정체를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정령?”

다름 아니라 이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계약을 통해서 곧장 신세를 지고 있는 존재들…..

“그래, 이들이 있으면 준비할 게 없지. 있다면 식기와 요리재료 정도인데, 그런 건 네가 가지고 있지?”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녀의 말대로 정령만 뜻대로 다룰 줄 안다면, 아공간에 버금갈 정도로 편하긴 하다. 옷만 몇 벌 챙겨들면,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이 정령을 통해 해결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행에서 짐이 많아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물과 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네, 충분히 쓸 만큼이요. 모자라면 가는 길에 들르는 영지에서 보충하면 되니까요. 그럼 출발해 볼까요?”

“그래, 마을에도 어제 인사를 전해 뒀으니 바로 떠나자. 아들, 이건 너와 나의 첫 여행이니까 많은 걸 배워야 한다.”

이드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채이나는 마오의 손을 잡고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네, 어머니.”

이드는 조금은 특이한 두 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곧 마오의 옆에 서서 나란히 칼리의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칼리의 숲을 빠져 나온 세 일행이 숲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쯤이었다.

출발한 첫날에다 첫 식사부터 궁색하게 밖에서 하고 싶지 않다는 채이나의 말에 걸음을 서두른 결과였다.

그래서 도착한 마을은 처음 보크로와 만나게 되었던 대닉스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었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마을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채이나의 말에 따르면, 칼리의 숲에서 나는 약초와 과일, 목재들의 채집으로 살아가는 크지 않은 마을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한 세 사람은 채이나가 잡아놓은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드는 시간의 변화에 사람만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후아, 전에는 이런 길이 없었는데…. 대단한데?”

다름이 아니라 전에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만 해도 없었던, 커다란 길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길이란 것이 그저 사람이 많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넓혀진 길을 온전히 유지한 채 단순히 정비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당한 전문 인력을 투입해서 제대로 닦아놓은 쭉 뻗은 대로였던 것이다.

중원에 있을 때도 볼 수 없었던, 굳이 말하자면 지구에서 보았던 아스팔트의 고속도로를 보는 느낌을 주는 그런 대로(大路)였다. 채이나는 이 길이 제국의 수도까지 이어져 있다고 했고, 이드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나도 이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보고는 지금이 처음이야.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길이라고, 그 뒤로는 소문만 들었는데 이 길이 생기고서 진정으로 제국이 하나가 되었다고 하더라.”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서 해본 공부로 길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동이 많고, 소식이 빨리 전해질수록 사람들은 하나가 되고, 자신들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으니까요. 그럼 이 대로에 목적에 걸맞는 이름이 없을 수 없겠네요? 이 정도의 공사를 통해 건설된 데다 그런 거창한 말을 듣게 하는 길이라면 당연히 이름이 붙었겠는데…..”

그 말대로 중원이나 지구나, 웬 만큼 큰 공사로 이루어진 건축물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름이 붙었었다. 이름이 없었더라도,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는 데 대단한 역할을 듣게 하는 길이라면 충분히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명에 근거를 둔 이름은 아닐 것이다. 뭔가 거창하거나 독특한!

그런 이드의 생각에 채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응, 있어. 이름이 두 개야. 처음 이 길이 만들어질 때는 ‘제국의 길[帝國路)]’라고 불렀는데, 이 길이 가져오는 효과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부터는 이 대로를 만든 존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대부분 ‘여황의 길[女皇路]’ 이라고 불러.”

“확실히 그렇게 불릴 만하네요. 그리고 저도 여황의 길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데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한 분인 것 같아요.”

이런 대공사를 진행하려면 보통 추진력과 지도력이 아니라면 쉽지 않다는 걸, 아니 정말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드였다.

“그렇지? 뭐, 난 좀 더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지만 말야. 이 여황의 길의 주인과 조금 안면이 있거든. 어때, 누군지 알겠어?”

채이나는 맞춰 보라는 듯 빙글거리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는 그녀가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장난스런 표정을 짓자 머리를 쓸어 넘기며 끝도 없이 길게 뻗어 있는 대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길의 끝에 정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는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황이라고 해봐야 한 사람뿐이다. 그녀라면 채이나와도 친분이 있을 것이고, 이 길을 만들 정도의 능력도 있었다.

“베후이아 여황이겠죠?”

“그래, 그녀가 노년에 만들었던 길이야. 그녀는 이 길이 완성되던 날 수명이 다했지.”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더욱 여황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황의 길에 대한 실감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걸은 후부터였다.

다름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세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분주한 움직임은 이 길이 모두 초행길이 아니며, 그들이 가지고 가는 많은 물건들로 미루어 활발하게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제국을 하나로 만드는 길이라는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이전에도 상단이나 용병들이 많이 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다양한 규모로 다니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속도로 제국의 흐름이 빨라지고 있다면, 정말이지 제국이 감히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러나 그런 장관에 대한 감탄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곤혹스럽기 시작했고 이 길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그 길에는 그만큼의 많은 시선들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쳐다보고 가는 수준이라면 말도 하지 않는다. 왠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물론, 이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바로 채이나가 그 이유의 당사자였다.

보통 사람들은 귀한 것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가진다. 귀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많지 않다는 뜻 정도가 아니란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드물기 때문에 비싼 것이고, 비싸고 귀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보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히 이해가 된다.

만나보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는 다크 엘프를 만났으니 당연히 시선이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채이나가 그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를 당당하게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내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나 다크 엘프니까 봐달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행의 곁으로 바쁘게 걷고 있는 상인들과 용병들이 얼굴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요, 바쁘게 말을 타고 가던 사람들조차 말의 속도를 늦추고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일부러 천천히 구경하는 경우도 생겼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모두 채이나의 곁에 서 있던 마오의 칼날 같은 살기로 휘감긴 단검의 위협을 받고 앗, 뜨거라 하면서 도망을 쳐야만 했다.

이드는 이렇게 공연히 일어나는 긴장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행되는 상황을 보아하니, 머지않아 마오의 단검에 피가 묻어 있는 장면이 상상이 가는 것이었다. 자연히 그런 일은 한바탕 소란으로 번질 것이 뻔했다.

이드는 그것을 피해보고자 채이나에게 다른 길을 권해 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소용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귀를 가려보라고 말했다가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신체를 가려야 하느냐고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정말 갑갑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이드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나온 결과….

“이드, 이거 치사해 보이는 거 알아요?”

라미아의 말대로 이드는 어떻게 보면 일행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난 채이나와 마오의 뒤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너도 알겠지만 채이나를 달래봤는데도 듣지 않잖아. 난 구경거리가 될 마음은 없어. 그리고….. 지금처럼 소동에 휘말릴 생각은 더더욱….”

변명하듯 라미아에게 중얼거리던 이드는 슬그머니 채이나와 마오의 거리를 더욱 벌리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말을 달려 옆으로 스쳐지나갈 듯 보이던 상단과 호위 용병들이 채이나의 외모를 보고는 속도를 늦추더니, 그 중 용병 몇몇이 음침한 눈으로 채이나를 아래위로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끌 때부터 이드가 생각했던 바로 그 소란의 조짐이 보이는 듯했다.

“아아…. 여행 첫날부터 고생문이 훤하구나…….”

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마오의 단검이 어느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 어느 곳이 어디인지 자세히 알려고는 하지 말자. 다만 그 어느 곳에 단검이 도착함으로 해서 한 가문의 대가 끊겼다는 것만 알아두자.

어느 한 가문의 막을 내려버린 이틀째 되는 날, 세 사람은 레크널의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카린의 나무로 유명한 영지였던 레크널은 여황의 길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제국 전체에 알리게 되었다. 여황의 길이 영지 한 가운데로 나면서 수도와 제국의 북부를 잇는 중심지가 된 때문이었다.

덕분에 레크널은 제국의 육대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드에겐 그런 레크널의 화려한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지구의 대도시, 고도로 발전한 건축 기술로 쌓아올린 마천루 같은 빌딩들의 숲에 익숙한 이드에게 레크널의 화려함이 별로 눈에 차지 않았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그것보다는 저 사람 많은 곳에서는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주범은 당연히 옆에 서 있는 둘, 채이나와 마오가 될 것이고 말이다.

이드는 이 두 사람이 일으킬 막무가내의 사고를 생각하니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아, 정말 들어가기 싫다.”

“왜? 이틀이나 야영을 했으니, 오늘은 따뜻한 물에 느긋하게 목욕을 하면 좋지 않아?”

“좋기야 하지만…..”

댁들이 문제지. 이드는 채이나를 향해 직접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보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간단히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오늘까지 채이나에게 치근덕대다가 불구 내지는 반년 이상의 상처를 입은 사람만 스물다섯이라는 것이다. 무려 스물다섯!

시간으로 따져서 딱 이틀 만에 스물다섯 명의 애꿎은 남자들이 쓰러졌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처음 보크로와 함께 그녀와 여행하게 되었을 때 이런 문제들을 알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하기사 그때는 수십여 명이, 그것도 한눈에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으니, 채이나의 미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자, 들어가자. 이 녀석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이니까,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줘야지.”

채이나는 한껏 즐거운 미소를 띠며 마오와 이드의 손을 잡아 끌어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앞에는 검문을 하지 않는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 검문을 하진 않지만 병사들에게 얼굴은 보이고 지나가야 했고, 그 중에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은 일단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조금씩 늦어지고 있기도 했다.

헌데 막 일행들이 병사들과 잠깐 얼굴을 마주치고 들어가려는 순간 느닷없이 한 병사의 창이 일행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잠깐!”

갑작스런 제지에 일행들과 다른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병사에게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드는 앞을 막아서는 병사를 향해 물었다.

“잠깐 기다려. 아무래도 너희들에 대한 신고가 들어온 것 같으니까.”

창을 들고서 딱딱하게 내뱉는 병사의 말에 주위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지켜보던 병사들이 따라서 창을 들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병사가 성문 뒤로 뛰어갔다. 아마도 상관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뿐만 아니라 이드 일행의 뒤에서 성문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도 멀찌감치 뒤로 떨어졌다. 혹시라도 잘못 일에 휘말리면 골치가 아픈 건 둘째치고,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고라니요? 저희들은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이라구요.”

이드는 어리둥절한 상황에 병사들을 향해 당당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에도 병사들의 창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건 우리도 몰라. 하지만 신고가 들어왔으니 가만히 있어. 조금 있으면 수문장님이 나오시니까 그분이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거다.”

처음 창을 들었던 병사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콧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별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를 다 듣겠네.”

전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말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채이나였다.

이드는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상책인 채이나가 갑작스럽게 끼어들며 뇌까리자 얼른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여기까지 올 때처럼 일으킨 소동을 여기서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는 순식간에 마오를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게다가 용병도 아니고, 병사들을 상대로 한 소란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드의 생각보다 채이나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대륙 어느 나라에서 엘프를 범인으로 한 신고를 받는데?”

움찔. 이드는 채이나의 말을 듣는 순간 뒤늦게라도 그녀의 말을 막으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엘프에겐 법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드는 당장 채이나에게 물어볼 수 없는 심정에 슬쩍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마오를 바라보았다.

마침 주위를 경계하듯 돌아보던 마오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법을 이용해서 엘프를 강제로 잡아들인 경우는 있어도, 엘프가 죄를 지은 경우가 없어서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네요.]

마오의 설명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레센 대륙의 각국에서는 엘프에 대한 체포 행위를 금지시켜 놓았다. 엘프가 죄를 지을 일이 없을 뿐더러, 그런 비슷한 일이 있어도 조사해보면 모두 정당방위로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귀족의 경우 말도 되지 않는 죄명으로 엘프를 잡아들여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있어서 오히려 그런 일로 적지 않은 엘프가 피해를 보았다. 덕분에 엘프 종족과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자연히 국가에서는 그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체포는 물론 엘프에게 죄를 묻는 행위를 금지시켜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상황에서는…..

“…. 위법 행위를 하고 있는 건 당신들 같은데요. 여기 채이나가 엘프니까요.”

이드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채이나의 말을 풀어서 그들이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러자 잠시 웅성거리며 이드 일행을 살피던 병사들 중 한 명이 창을 슬그머니 내리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런 법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서로를 돌아보던 병사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들리는 말에 그들은 물론 먼저 창을 내렸던 병사까지 다시 뻣뻣하게 창을 곧추세웠다.

“뭣들 하는 거야! 우리는 명령만 들으면 되는 거라구. 거기다가 저기 엘프는 하나뿐이라고. 나머지 놈들은 잡아도 된단 말이야.”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병사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채이나와 이드까지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방금 전 채이나의 말이 틀리지 않듯이 이번엔 병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별수 없네요. 그 수문장이란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죠.”

“어쩔 수 없지, 뭐.”

양측이 서로 대치한 모습 그대로 그 수문장이란 자가 오길 기다리기를 잠시.

방금 전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병사를 선두로 십여 명의 병사들이 득달같이 뛰어나왔다.

그런 병사들의 선두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더 아머를 걸친 굵은 눈썹의 고집 세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저 남잔가 보네. 수문장이란 사람.”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봐도 일반 병사들과 옷차림이 확연히 다른 것이 좀 전의 병사가 언급한 수문장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외관으로 자신의 직급과 존재를 알린 남자는 이드와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 어깨 너머로 일행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좋아, 저놈들이다.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해!”

“이봐요!”

이드는 여차저차 사정 설명도 없이 바로 튀어나온 남자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드야 소리를 치든 말든 남자를 따라온 병사들이 일행의 뒤쪽을 막고 서서는 이미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과 함께 원진을 만들어 이드 일행을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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