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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64화


라일론의 황실에서 이드에 대한 욕심을 점점 증폭시키고 있을 때 이드는 드레인에 들어서는 첫 번째 영지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있었다.

국경을 넘은 지 사흘째 되는 거리에 위치한 영지였다.

사실 국경을 넘긴 했지만 지난 사흘 동안 드레인이 다른 나라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이드였다. 라일론과 똑같은 나무들과 똑같은 산세와 들판에 핀 꽃들과 풍경이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경과 가까운 마을에 들르고, 도시를 지나 이 영지까지 오자 그제야 라일론 제국에서 드레인이라는 나라로 넘어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들어서자 확실히 라일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부터 말투와 집의 형태까지…….

크지는 않지만 소소한 곳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서 이드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라의 구분이라는 것은 땅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국적인 것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의 다름의 차이를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돌던 이드는 나란히 앉아 있던 채이나의 갑작스런 물음에 생각들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확실히 라일론하고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 확실히 다르지. 인간이 있는 곳은 모두 조금씩 달라.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은 참 다양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그것보다 검은 어때? 쓸 만해?”

우연이겠지만 둘의 생각이 똑같았던 모양이었다.

이드는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채이나의 중얼거림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충은요. 좋은 검은 되지 못해도…… 충실한 검은 될 것 같거든요.”

이드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면서 오늘 영지의 병기점에서 사 온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전체 길이 약 일 미터 삼십에 그중 검신이 일 미터를 차지하고 있는 평범한 롱 소드 형태의 검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들른 마을과 도시에서 쓸 만한 검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이곳 영지에 도착해서야 쓸 만하다는 생각에 값을 치른, 이드의 말에 의하면, 검에 충실한 검이었다.

하지만 이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채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검과 충실한 검. 똑같은 의미인 것 같은데, 무슨 차이야?”

이드는 채이나의 질문에 곤란한 표정으로 슬쩍 그녀의 눈을 피했다.

“글쎄요. 조금 난해한 말이라…….”

정말 설명해 주기 곤란했다. 검의 기초부터 시작해서 도가의 경전까지 인용해 가며 설명해도 거의 반나절이나 설명을 해 줘야 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렇게 설명을 해도 상대가 알아들을지가 더 의문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채이나도 꼭 명쾌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는 없었는지 이드의 곤란한 표정을 보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됐다. 설명하기 곤란하면 하지 마. 대신 저 녀석이나 봐 줘.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흠, 그럼 그럴까요.”

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채이나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앞에는 한참 동안 검술 연습으로 땀을 낸 마오가 한 자루의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현재 세 사람이 나와 있는 곳은 방을 잡아둔 여관의 뒤쪽 작은 공터였다.

전날 레크널 영지 앞에서 채이나에게 약속했던 실력을 봐 주기 위해서 나선 것이다.

“좋아! 그럼 실력을 한번 볼까?”

이드는 앉아 있던 자리에다 오늘 새로 장만한 마오의 검을 기대어 놓고 어깨를 굼실거리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는지 이드와 마주 서게 된 마오는 은근히 긴장하는 투가 역력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된다는 표정도 뒤섞여 묘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 이드와 대면한 후로 또 처음 손속을 나누게 된 상황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상대는 구십 년 전부터 최강이라 불리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선천적으로 호승심이 강한 다크엘프의 피에다 부모로부터 싸우는 법을 적나라하게 익혀 온 마오로서는 흥분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오의 기분은 그가 뿜어내는 기운으로 바로 이드에게 전해졌다.

“하하…… 적당히 마음을 가라앉혀. 괜히 흥분하면 오히려 좋지 못해. 또 위험하기도 하고.”

이드는 같은 길을 먼저 가는 사람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네, 그러죠.”

마오 역시 이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 흥분되던 마음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히 말로 가능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오는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차분해진 것이다.

“헤에, 대단하네, 흥분된 마음을 단속하는 건 정도 이상의 상당한 수련을 쌓지 않으면 힘든 일인데.”

이드는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를 금세 유지하는 마오를 향해 작은 탄성을 던졌다. 하지만 곧 이드의 귓가로 그게 아니라는 채이나의 말이 이어졌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건 엘프의 특징이야. 특히 화이트 엘프와 달리 싸움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우리들은 그런 점이 더하지. 선천적인 거야, 그건.”

얼핏 다크엘프의 성격을 설명하는 말인 듯하지만 뒤집어 놓고 말하면 싸움을 위해 타고났다는 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다스리려고 명상이다, 심공(心功)이다 해서 열심히 단련하는 무인에게는 그저 한숨만 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거 부러운데요.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런 좋은 점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겠죠. 뭐 그런 건 뒤에 이야기하고. 오랜만에 몸을 풀어 볼까나? 마오.”

“네.”

성큼성큼 다가서는 이드의 부름에 마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당장이라도 사정 봐 주지 않고 시작한다고 말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마오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우선 단검은 집어넣어 둬라. 대신 몸만 사용해.”

“어, 그건 왜? 격투술에 섞어 쓰는 단검이 그 녀석 장긴데. 그걸 쓰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

이드가 약간은 이질적인 훈련 방식을 꺼내 놓자 마오보다 뒤에 앉아 있던 채이나가 먼저 의문을 표시했다.

이번처럼 대련을 통해 경험과 실력을 쌓게 해 줄 때는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가장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오의 특기 중 하나인 단검을 포기하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것은 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인 때문인지 이드의 말대로 이미 단검을 집어넣은 그였지만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쩝, 괜히 그렇게 볼 거 없어요. 별거 아니니까. 그저 기초부터 튼튼히 하려는 것뿐이라고요.”

하지만 채이나는 그 말을 듣고 더 헷갈린다는 표정이다.

“소드 마스터에게 기초를?”

이해 불능에 가까운 대꾸였다. 마오는 마나를 능숙히 다루는 소드 마스터의 단계에 있었다. 그것도 소드 마스터 중상급의 능숙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 단계에 오르려면 그동안 많은 연습과 튼튼한 기초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다시 기초를 훈련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기초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도 적당한 때가 있는 것. 무턱대고 기초를 돌아보다가는 오히려 실력이 퇴보하는 수가 생긴다.

채이나가 알기로 마오는 지금 기초를 다시 공부할 때는 아니었다.

“아, 걱정 말아요. 내가 웬만큼 알아서 하지 않을까. 게다가 내가 말하는 기초는 처음 주먹을 뻗는 법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럼?”

“말 그대로 마오 녀석 실력의 기초가 되는 격투술인 루인 피스트를 처음부터 다시 봐 주겠다는 말이네요. 루인 피스트는 마오가 가진 실력의 기본이죠.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루인 피스트를 마스터한 건 아니에요.

또 부족한 부분도 없지 않죠. 그걸 겨루면서 좀 더 보완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서 마오에게 완전히 마스터하게 만드는 게 목적인 거죠.

마오가 가진 모든 장기와 특기는 루인 피스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 루인 피스트만 익숙해지면 다른 것도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 거예요. 무엇보다 이렇게 단순하게 격투술만을 가지고 겨루다 보면 마오의 루인 피스트와 제가 전한 마인드 로드가 좀 더 쉽게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요.”

설명은 길었지만 핵심은 마오에게 가르쳐 준 금강선도, 그러니까 마인드 로드가 익숙해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마인드 로드는 이틀 전 국경을 넘던 그날 마오에게 전해 주었다. 채이나가 마오의 실력을 봐 달라는 부탁에 이드는 바로 마인드 로드부터 전수한 것이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수법이라 전하는 데 전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어진 이드의 설명에 채이나와 마오는 이번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 미리 말하지만 내가 딱히 뭔가를 가르칠 건 없어. 나는 그저 네가 가진 것들을 최대한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고, 훈련 방법을 가르쳐 줄 뿐이야.

거기에 더해 한마디 충고를 하자면 내가 사용할 격투술, 철황권을 눈여겨 잘 보라는 것뿐이야.

보크로 씨가 말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철황권이 루인 피스트에 꽤나 많은 영향을 줬으니까. 네가 노력만 한다면 루인 피스트는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

끄덕끄덕.

이드의 말에 마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어디 실력 발휘해 봐.”

“후우!”

마오는 대답 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이드를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돌진해 들어왔다. 전혀 망설임 없는 쾌속의 행동이었다.

이드는 양 주먹을 힘주어 움켜쥐며 양팔과 한쪽 다리를 앞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철기십이편(鐵器十二鞭). 내가 가진 철황권이란 것의 기초 권형(拳形)이다. 그리고 이건 거기서 다섯 번째인 삼발연경(三拔延傾)!”

이드는 확실히 들으라는 듯 초식명을 외치며 얼굴 앞으로 다가온 마오의 섬광 같은 주먹을 한쪽으로 흘리고는 앞으로 향해 있던 두 주먹과 다리를 내뻗었다.

투웅.

순간 퉁퉁 튕기는 고무 같은 느낌을 느끼면서 마오는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이드의 머리 위를 성큼 넘어가 버렸다.

마오는 반동에 의해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동안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생각할 틈이 있을 정도였다. 허공에서 몸을 바로 세우며 사뿐히 땅에 발을 내렸다. 마오의 실력이 높은 데다 엘프 특유의 균형감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이드는 방금 전과는 또 다른 자세를 취하며 빙글 웃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대충은요.”

분명 이드의 두 주먹이 내뻗은 자신의 팔과 어깨를 내리 누르고 흔들고, 한쪽 다리가 자신의 허벅지를 차 올렸다. 그리고 그 탄력으로 자신이 순식간에 허공을 떴었다. 마오는 그렇게 기억했다.

“역시 감각이 좋은걸.”

이드는 마오의 대답에 만족했다. 보통은 처음 당하는 수법이라 어리둥절할 텐데, 역시나 엘프의 감각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계속 와.”

다시 한 번 이드의 재촉에 따라 마오가 뛰어들어 왔다.

이드는 이번엔 날카롭게 파고드는 마오의 공격을 철산파고(鐵刪把叩)의 식으로 강하게 받아쳤다.

이어서 다시 마오의 공격을 흘리는 부연횡사(俯嚥橫寫)에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철사삼시(鐵蛇三矢). 그리고 다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오를 저 뒤로 낚아채 버리는 사령편(蛇靈鞭).

다시 말해 다섯 번의 수법 중 부드럽게 흘리는 유(柔)한 공력(功力)이 삼(三)에 강력한 강(强)의 공력이 일(一), 재빠른 쾌(快)의 공력이 일(一)이 되어 한 세트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진 공격들도 모두 이런 유형들이었다. 삼일일(三一一)의 한 세트를 이룬 수법들이 연이어 마오를 때리고 던지고, 흘려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던져지고 굴고 얻어터지던 마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친 숨을 내쉬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사방을 굴며 찢어지고 흙투성이가 된 옷까지 거지가 따로 없는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 빼어나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한 마오였지만 그 눈만은 오히려 즐거운 듯 투기로 반짝거렸다.

이드는 도전적인 광채가 여전한 눈을 응시하며 좀 더 열심히 두드리고 내던졌다. 그렇게 얼마간 두 사람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쉴 새 없이 반복했을까.

짝짝짝.

“자자, 오늘은 여기까지. 둘 다 그만해!”

차가운 박수 소리와 함께 채이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이 정도면 됐어. 이제 그만하자고. 시간도 늦었고. 내일 다시 출발해야지.”

이드는 여지껏 펼쳤던 동작들이 꽤 되었음에도 별일 없었다는 듯 몸을 바로 세웠다.

마오는 무릎을 짚고 잠시 크게 숨을 내뱉더니 어느 정도 회복된 듯하자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 내고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툭툭 정리했다.

이드가 슬쩍 돌아보니 어느새 두 눈에 번쩍이던 투기도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마음 하나는 자유자재로 잘 다스린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여관의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쪽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몇몇 구경꾼들과 검게 그을린 듯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마오와 손을 섞기 시작할 때가 초저녁이었으니, 약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듯 보였다. 그러자 문득 생각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밥 먹을 때가 지났군.”

마치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채이나는 깔깔 웃으며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에는 채이나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인지 따뜻한 목욕물과 여러 가지 요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런 걸 꼼꼼히 챙길 위인이 아닌데, 아마도 마오의 실력을 봐 준다고 특별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아무리 성격이 튀고 또 전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역시 어머니라는 공통분모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까? 모성이란 그게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모성이라는 것만큼 위대한 자연은 없다는 생각이 결국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었다. 모성이 없는 세상만큼 끔찍한 세상이 또 어디 있을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그 무한한 신뢰가 싹트는 것이니, 단순히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자동적인 기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덕분에 이드와 마오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흘린 땀을 시원하게 씻어 내고 또 허기진 배를 푸근하게 채울 수 있었다.

“부드러움이 아직 부족하다는 건가요? 어제의 대련.”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먹으면서 화두처럼 꺼낸 마오의 말이었다.

막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이드는 느긋하게 씹어 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드러움을 더하라는 뜻이었다. 어제 내가 말하는 부드러움을 실컷 봤으니 어때? 루인 피스트에도 더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확실히 지금의 모습보다는 자연스러워질 것 같았어요. 이드가 보여 준 수법들 중 반이 넘는 수법들이 그런 식이더군요. 흘려 넘기는. 아마 그걸 보고 훔쳐 배우라는 뜻이겠죠?”

“참고하라는 거지. 그리고 그런 걸 정확하게 사량발천근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낸다는 뜻이야.

여기서 작은 힘은 자신의 힘이고, 큰 힘이란 자신의 힘에 적의 힘을 더해서 만들어지는데, 외형보다는 그 속에 숨어 있는 힘의 운용이 더 중요한 수법이지. 기억해 둬.”

이드의 당부에 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들이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마오의 입을 채이나가 막았다.

“그만해. 아침은 안 먹을 거야? 그런 이야기는 다음 대련 때 하면 되잖아.”

채이나가 날카롭게 눈을 흘기자 마오는 바로 입을 닫았다.

채이나의 말이라면 절대 거역하는 법이 없는 마오였다. 기분까지 나빠 보이는 그녀의 말이니 어찌 말을 듣지 않겠는가.

이드는 어제의 생각이 연장되고 있었다. 모성이 자연의 가장 훌륭한 배려라면 효자는 어머니가 만든다는 것 또한 진리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맹목적인 사랑과 더불어 엄격한 교육이 곁들여져야만 마오 정도의 효자를 길러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자식 키우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게 마오의 입이 다물어지자 채이나는 같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라미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모습이 변했다?”

[꺄아! 역시 채이나. 알아봐 주네요. 정말 멋있어졌죠?]

며칠째 이드하고만 속닥거리며 별말이 없던 라미아였지만 바뀐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채이나가 무심결에 던진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지 반색을 했다.

실제 채이나의 말대로 라미아의 모습은 전날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 기본은 그대로였지만 붉고 밋밋하기만 하던 파츠 아머의 표면에 몽환적인 구름과 함께 유니콘과 드래곤의 문양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어, 확실히 라미아가 흥분하며 자랑할 만했다.

“응, 아주 아름다운데? 이드 네가 한 거야?”

“네. 정말 상당히 고생했다구요. 이 문양을 만드는데……. 정말 괜찮죠?”

솔직히 이 문양은 이드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봤던 여러 가지 작품들 중에 한 가지를 떠올려 도안의 상징물이었던 용을 드래곤으로 바꿔서 새겨 넣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문양을 정확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엄청 고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괜찮냐고 말하는 이드의 얼굴에 은근한 자신감이 감돌았다.

“응, 좋아,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느껴질 정도로 문양이 아름다워.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다.”

“뭐가요?”

“라미아의 변화 말이야. 난 네가 처음 라미아의 형태를 바꿨을 때 한 말을 듣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고생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벌써 이렇게 멋진 문양까지 새길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좀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

라미아의 변화는 채이나가 느끼는 것만큼 빠르다. 그 밋밋하던 모습을 벗고 사흘 만에 화려하게 변신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가장 반가운 것은 역시나 라미아였다.

[정말 그렇죠? 이런 식으로 능숙해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을 거라구요, 호호호!]

한껏 기대에 부푼 라미아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머릿속에 반짝거리듯 울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맑고 깊은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기대할게. 나도 네가 인간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거든.”

이드는 채이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라미아의 반응에 마음 한편으로 뿌듯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도 그때 이후로 그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서 별달리 조급함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느낀 때문이었다.

그 초연한 태도는 아마도 이드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일부러 내보인 모습일 것이었다. 그걸 그동안 이드 모르게 감추었으니 참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이드는 무의식중에 라미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라미아의 변신에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마 잠자는 시간을 조금 줄여야 할 것 같다는 다짐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이드는 지금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으로 인해 잠을 줄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

현재 이드 일행이 머물고 있는 나라는 드레인이다.

국토는 라일론 제국의 약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넓이를 가졌으며, 양 옆으로 동맹을 맺은 양대 거대 제국이 버티고 있고, 아래 위로는 시리카 왕국과 마스 왕국이 옥죄듯 자리하고 있어 대륙 중앙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형태가 드레인의 지형적 조건이 되고 있다.

드레인은 또 하나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호수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말 그대로 대륙의 수원(水原)이 죄다 모인 것처럼 방대한 호수와 강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국토의 약 이십 퍼센트 넘게 호수와 거미줄처럼 뒤얽힌 크고 작은 수많은 강줄기가 차지하고 있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아마도 드레인의 호수들이 없다면 대륙은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하는 소재로 많은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그만큼 아름답고 깨끗한 이미지로 유명한 나라가 또 드레인이기도 하다. 곳곳에 숨 쉬는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병풍처럼 펼쳐지는 수려한 풍경들과 거미줄처럼 이어진 긴 강물을 따라 깊은 숲의 비경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기묘한 경치들은 누구나 입을 모아 극찬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코스를 따라 운행하는 여객선들은 언제나 인기가 높았으며, 드레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여행하길 꿈꾸는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드에게는 일리나스에 이어 두 번째 들르게 되는 왕국이기도 했다.

이드가 혼돈의 여섯 파편과 엮이고 난 후 계속 두 제국에서만 활동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드도 제법 큰물에서만 놀았다고 해야 하나?

호수와 강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는 드레인에서도 특히 유명하고 이름 있는 호수 다섯 개가 있다.

각각 아카이아, 페링, 페니에르벨, 리틀 드레인, 블루 포레스트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섯 중 특히 유명한 두 곳이 있는데, 바로 아카이아와 블루 포레스트였다.

그 중 아카이아는 대륙 속의 바다라 불릴 만큼 규모가 대단해서 그 크기가 가히 작은 소국과 맞먹을 정도였다. 드레인뿐만 아니라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그 방대한 크기 때문에 아카이아는 시리카 왕국과 절반씩을 나눠 가져야 했던 호수다. 호수의 중간쯤을 국경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호수로 인해 국가 간 접경이 되고 있는 탓에 그 군사적인 가치가 드높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두 나라는 내륙 한가운데서 생뚱맞게 수군까지 양성해야 했다. 수군이 필요할 만큼 아카이아는 가히 작은 바다라 불릴 만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블루 포레스트였다.

이 호수는 아카이아처럼 그런 대단한 유명세를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카이아에 비해서 그렇다는 의미지 블루 포레스트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호수를 껴안고 있는 형상으로 형성된 커다란 숲과 이 숲과 호수를 자주 찾는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들 때문이었다.

이 근처에만 있으면 그 보기 어렵다는 이종족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엘프를 종종 볼 수 있는 행운이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경계해 펼쳐진 마법으로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종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블루 포레스트는 알아 둘 만한 곳이었다. 아, 그렇다고 다른 세 호수가 이 두 호수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두 곳은 이름만 많이 알려졌다 뿐이지, 정말 호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다름 아닌 나머지 세 개의 호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드 일행이 눈앞에 두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인 페링 호수였다.

페링 호수는 사시사철 잔잔한 물결과 살랑이는 바람, 그리고 석양에 붉게 타오르는 수면과 이 호수에서만 잡힌다는 세이지의 은근한 맛을 그 자랑거리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석양이 타오를 때 페링 호수의 지척에 다다른 이드 일행은 운이 좋게도 도착하자마자 페링의 자랑거리 하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전에도 봤지만…… 정말 아름답지?”

“네. 이야기하셨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워요.”

“정말 일품이네요.”

채이나의 감탄에 이어 마오와 이드가 그 붉게 타오르는 석양빛에 취해 말했다. 이에 라미아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드! 휴, 휴로 찍어요.]

라미아는 잠시 뒤면 사라질 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대로 담아 두고 싶은지 보채듯 이드를 불렀다. 라미아의 모습은 며칠이 지나자 또 약간 변해 있었다. 얼마 전 자리했던 문양이 은근한 한 폭의 산수화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라미아, 이런 건 영상으로 남겨 둔다고 그 감동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게 아냐. 보고 싶을 때 와서 보는 게 제일이라고. 나중에 인간으로 변하면 그때 일리나와 다시 오자.”

“확실히 그렇지. 이런 자연의 감동은 마법 영상 따위로는 느낄 수 없지. 그렇고말고.”

[뭐, 그럼…… 일리나를 찾은 후에 다시 오죠.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니까.]

이드의 ‘경치 제대로 만끽하는 법’에다 채이나까지 비슷한 말을 보태자 라미아는 아쉽다는 여운을 남기며 이드의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말하는 폼이 뒤에 인간으로 변해서 다시 오게 되면 기어이 그녀가 직접 사진과 동영상을 남길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안 그래도 라미아는 문득 한국에서 꽤 인기 있었던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 123곳>이라는 여행 책을 떠올렸다.

그 책의 내용 중에 있던 구포 어디라는 곳의 습지를 보면서 꼭 그런 멋진 풍경들을 찍어 보고 싶은 생각이 마침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잠시간 세 사람과 하나의 파츠 아머는 그렇게 넋 놓고 붉은 보석 같은 장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성문으로 옮겼다.

아무리 보기 좋아도 영원히 이어지는 모습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쉴 곳을 앞에 두고 노숙할 생각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