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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67화


  • 이처럼 제국의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운명이 그들을 점점 탐욕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고 있었다.

이백 개의 검이 뽑히는 소리는 바로 앞에서 듣는 커다란 종소리와 같이 자극적이면서 거슬렸다.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이 검을 꺼내자 나람 역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순간 이드의 입에서 그게 뭐냐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뻔했다.

나람의 손에 들린 검…….

그 검에는 희한하게도 검의 가장 중요한 검신이 없었다.

검신이 없는 검이라니!

그게 어디 검인가. 더구나 저 이상하게 큰 검병은 뭔가?

하지만 그 엉뚱한 생각은 잠시만 지속될 뿐이었다. 상대를 웃기려는 게 아니라면 저 검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며 가만히 검을 살핀 이드의 눈에 특이한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그것은 마법에 의한 마나의 흐름이었다.

‘마법검? 무슨 마법이지?’

검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동시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답 또한 동시에 나왔다.

“검이여!”

나람의 몸 안의 마나를 고조시키는 우렁찬 음성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검에 내력이 흐르기 시작하자 흐릿한 회색빛 그림자와 함께 마치 신기루 마냥 손잡이의 크기에 딱 맞는 거대한 대검(大劍)의 검신이 생겨난 것이다.

그냥 보기에도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길이와 어른의 손으로 한 뼘은 되어 보이는 폭을 가진 거검(巨劍).

[저 검에 걸린 마법은 축소 마법 말고는 없어요. 보통 때는 마법에 의해서 검신이 아주 작은 쌀알 크기 정도가 되어 숨어 있다가 내력으로 마법을 제어하고 시동어를 외우면 다시 본래의 크기를 회복하는 거죠.]

검에는 거의 필요가 없는 마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법이라면 딱히 마법검이라고 불릴 것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 거대한 검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법을 건 이유가 이해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저 거대한 검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법을 건 이유가 이해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저 덩치 큰 녀석을 들고 다니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테니 말이야. 그런데 저런 검을 쓰는 걸 보면 강렬한 패검(敗劍)을 쓰는 모양인데.”

전형적으로 크고 무거운 검을 사용하는 경우는 그 사용자가 선천적으로 힘이 월등히 강한 자들이었다. 베기보다는 검에 실리는 힘으로, 부딪히는 것을 통째로 부수어 버리는 무식한 검. 이드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검이었다.

“기대되는걸.”

이드는 호기심 어린 말을 중얼거리면서 함께 강렬하게 휘도는 무형의 기운을 끌어 올려 몸과 검에 실었다.

십이대식을 제외한 이드가 가진 검술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강검류(强劍流)인 무형검강결(無形劍强結)의 공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우우웅.

이드의 손에 들린 롱 소드 위로 은빛 무형검강이 투명한 그 모습을 보였다.

한쪽은 뜻밖의 요란함으로, 한쪽은 은밀한 느낌까지 주며 양측이 서로에 대한 준비가 끝나자 순간이지만 이드를 중심으로 폭풍 전야와 같은 괴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아아아아.

어느 순간 미묘한 마나의 흐름과 함께 주위의 공기가 뒤집어지듯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기동.”

그리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나람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의 입에서 일제히 똑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그 무게를 더해 갔다.

“웃, 중력 마법인가?”

이드는 몸에 실리는 무게를 느끼자 주위에 펼쳐진 마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몸에 천천히 실려 오는 무게감으로 보아 들어가는 마나의 양에 따라 중력이 높아지는 고중력 마법인 게 분명했다.

이드는 가중되는 중력에 대항해 그만큼의 공력을 몸에 더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중력의 크기에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드는 왜 갑자기 이런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람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작전대로 간다. 공격의 주공은 내가 한다.”

나람은 크게 소리치며 손에 든 대검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에 따라 거대한 부채를 부치는 것처럼 큰 바람이 일어났다.

나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이드는 그 모습에 오히려 고개가 갸웃했다. 저 모습 어디에도 중력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라미아?”

이드는 반사적으로 마법에 익숙한 라미아를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마법구 때문이에요. 방금 ‘기동’이란 말이 시동어고요. 효과는 사용되고 있는 중력 마법에 대한 왜곡과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를 비롯한 특정한 종류의 보조 마법들이에요.]

“과연…… 그런 건가. 이쪽을 빠르게 만들고, 상대는 느리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실력과 숫자로 극복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우겠다는 거군. 그럴듯해. 역시나 제국다워. 돈도 많지, 저런 비싼 걸 수백 개씩이나 만들어 쓸 생각을 다 하고…….”

희한하게 지금 상황보다 수백 개의 마법구를 만들어 내는 데 들었을 비용을 더 신경 쓰는 이드였다.

[에구, 지금 그게 문제에요. 우선 앞을 보라구요.]

라미아의 핀잔과 함께 나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랜드의 실력을 보여라!”

고함 소리와 함께 나람이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이드를 향해 검을 휘둘러 왔다. 첫 공격치고는 너무나 대담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워낙 강맹해 단순히 기세가 대담하고 허점이 많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공격이었다.

구우우웅.

이드의 머리를 향해 내려찍는 거검에서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짙은 회색의 검강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이드는 그런 거대한 검과 그 검을 쥔 당사자를 보며 순간 머릿속으로 한 단어만이 떠올랐다.

‘무식하다. 검도, 사람도, 공격 방식도.’

하지만 그런 엉뚱한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이드의 몸은 자동적으로 상황에 맞추어 검을 흔들었다.

강가에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검을 따라 수십의 은백색 강기들이 뻗어 나가며 차례차례 떨어지는 회색빛 거검과 부딪쳤다.

무형검강결의 첫 번째 초식인 무극검강의 한 수였다.

쿵 콰콰콰콰쾅.

터무니없을 만큼 요란스럽게 첫 부딪침이 불꽃을 튀자 뒤이어 수십 차례의 폭음이 하나처럼 들리도록 엄청난 속도로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런 식으로 이어진 수십 번의 부딪침은 한순간에 공중에서 떨어지는 나람의 공격력을 무위로 돌려 버리고, 잠깐이지만 그를 허공에 멈춰 버리게 만들었다.

“무형일절(無形一切)!”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이드의 손에 들린 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며 반달형의 강기를 날렸다.

강기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이 금방이라도 나람의 허리를 두 동강 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았으면 라일론의 검이란 허명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공격하라, 검이여!”

나람은 허공을 향해 소리치며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그 큰 검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나람의 거대한 검은 마법검이었다. 나람의 시동어와 함께 거대한 검신은 모습을 감추고, 한순간에 사라진 검신의 무게만큼 힘을 얻은 나람의 신형이 재빠르게 회전하며 무형일절의 검강을 피해 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던 검의 마법을 적절히 사용한 절묘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이드는 상대의 적절한 방어에 감탄하며 마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람의 공격 명령에 이드의 양 옆과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서 검기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세 방향을 가득 메우는 검기의 공격에 이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무형기류의 방어식을 펼쳐 냈다. 후광처럼 은백의 기운이 등 뒤를 뒤덮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된 공격이었을까.

한 발 앞으로 나선 이드를 향해 허공중에 회전하며 떨어지던 나람의 공격이 곧장 이어졌다.

“검이여!”

허공에서 회전하며 빨려들 듯 떨어지는 몸과 함께 갑자기 나타난 거검의 검강이 사선을 그리며 흔들림 없이 이드를 베어 들어왔다. 나람과 기사들의 공격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그야말로 산뜻한 공격이었다. 이걸 보면 앞서 무식하다 했던 말은 철회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큭, 그래도 여전히 무식한 공격이야.”

이드는 대기를 찍어 누르는 나람의 공격을 주저앉듯이 몸을 낮추고 유수행엽의 신법으로 검이 베어 오는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피했다.

동시에 머리 위로 거검이 강풍을 일으키고 지나가자 그대로 몸을 띄우며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나람은 아직 검을 거두지 못해 말 그대로 성문 만한 빈틈이 생긴 상태.

이드의 검은 기세 좋게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시 터져 나오는 나람의 고함 소리가 있었다.

“공격, 검이여!”

나람의 고함과 동시에 이드의 등 뒤로 수십의 검기가 날아들고 나람은 몸을 숙이며 가벼워진 검을 이드의 가슴으로 향한 채 외친다.

“검이여!”

“시끄러워!”

퍼엉.

순간 앞뒤로 공격을 받게 생긴 이드는 짜증이 울컥 치미는지 고함과 함께 허공으로 휘둘러진 검강을 공기 중에 터트리며, 그 반발력으로 몸을 돌려 검기의 뒤쪽으로 몸을 뺐다.

이드의 그 적절한 임기응변은 같은 편의 검기와 검강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레이트 소드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검이여!”

또다시 울리는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손잡이만 남은 검을 들고 검기를 회피하는 나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마주보게 된 두 사람이었고, 처음과 똑같이 마주 서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열리는 나람의 입.

“검이여!”

“흐아.”

다시 그 큰 검신을 내보이는 거검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검이 아니라 계속해서 ‘검이여!’를 외쳐 대는 저 나람의 목소리가 짜증이 났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당당하고 단단해 보이던 위용은 어디 가고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싸움은 뭐란 말인가.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무겁고 단단하던 기세는 완전히 잊혀졌다.

저렇게 초식명도 아니고 똑같은 말을 소리 높이 지르며 싸우는 상대는 처음이다. 도대체 저 소리가 몇 번째인가?

[쿠쿠쿡…… 일곱 번째요.]

웃음기 섞인 라미아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장난기가 어렸다. 그걸 굳이 일일이 세고 있었나 보다.

‘저거 어떻게 안 될까?’

[호호‥‥ 왜요. 사일런스라도 걸어 드려요?]

‘하아, 됐다. 그보다 이 중력 마법은 해결 못 하는 거야? 그다지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신경에 거슬리는데……’

아마 그레이트 소드만 되어도 중력 마법의 은근한 위력을 두고 그저 신경에 거슬린다는 소리는 못 할 것이다. 또 그런 실력밖에 되지 않는다면 제국이 의도한 대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상대의 빠르기에 패배하고 말 것이었다.

[좀 시간이 걸려요. 꽤나 신경을 쓴 마법인지 마나 공급을 위한 마나석과 마법의 유지를 위한 마법진, 그리고 발동시키는 마법사가 다 따로 떨어져 있어요.

거기다 교묘하게 마나를 비틀어 모습까지 감추고……. 과연 그랜드 마스터를 앞에 두고도 당당해할 만한 마법진이에요. 아마 이드가 저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난 후에나 파해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냥 이드의 실력으로 밀고 나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

라미아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잘 만들어진 마법진임에는 틀림없었다. 칭찬해 줄 만하다. 다만 그 효과가 그랜드급에겐 거의 소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주 선 나람 역시 그런 사실을 몸으로 느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가 본 이드의 움직임은 중력 마법으로 느려졌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그대에겐 이 중력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랜드 마스터인 때문인가, 아니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데가 특별한 것인가?”

“첫 번째라고 할까요. 그랜드의 경지에 접어들면 이 정도 중력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지요. 많이 약했어요, 강도가.”

“으음.”

친절하게 대답하는 이드의 말에 나람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믿었던 마법진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대의 실력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할 것은 당연했다.

이쯤에서 물러서야 한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다시 한 번 내 검을 받아보게. 모두 검을 들어라.”

귀를 후벼 파듯 우렁차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기사들의 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드는 방어진을 따라 민첩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나람을 마주 보았다. 방금 공격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누구를 목표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람과 여기 기사들은 강력한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그저 소드 마스터에 불과하지만 나람과 함께 공격에 들어갈 경우 또 하나의 그레이트 소드가 손을 더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중원의 진법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나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우렁우렁 울리는 것도 이들에게 상황에 맞게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검이여!”

여덟 번째 똑같은 단어를 외치는 나람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검신을 감추고 공격을 시작할 모양이었다.

힘을 앞세운 단순한 검술이지만 저렇게 검신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다 보니 상당히 예상하기 힘든 괴상한 검법이 되어 버렸다.

중요하게 보지 않던 마법을 적절히 잘 사용한, 흔들리지 않는 검로를 가진 괴상한 검법.

하지만 이드는 이번엔 그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서기로 했다.

라미아의 말대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빠르게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저도 이번엔 얌전히 당신의 검을 기다릴 생각은 없어서 말입니다.”

이드는 공격할 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주먹처럼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나람을 마주 보면서 은색으로 빛나는 검에 내력을 더했다.

부우우웅.

집중되는 내력이 강해지자 주위의 마나를 밀어내며 진동을 시작하는 은백의 검강.

그 눈부신 동작에 나람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외쳤다.

“모두 검을 들어라.”

“늦었습니다. 생각은 좋았지만 실전이 부족했습니다. 마법진도 약했고, 지금처럼 주공이 아닌 주위의 기사들에 대한 공격에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리고 약속했지요. 이번에 오면 누구든 생명을 거두겠다고.”

이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극을 땅으로 하고 몸을 허공에 띄운 채 회전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내력의 집중으로 그 크기를 더한 은백의 검강에 마치 작게 축소된 바나나 크기의 무형일절의 검강이 사방을 가득 메우며 생겨났다.

그 연속 동작에 거의 본능적으로 이어질 공격이 어떤 형태인지 눈치 챈 나람은 공격을 포기하고는 검을 앞으로 하고 뛰어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기사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최선의 모습이었다.

“조를 이뤄 방어하라. 검이여!”

“조금 늦었습니다. 무극연환일절(無極連環一切)!”

키유후우우웅.

마치 부메랑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사방을 메우는 순간 수십의 은백색 반달형 강기들이 기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작지만 그 가진 바 힘과 날카로움은 변하지 않는 강기였다.

무형검강결의 일 초인 무극검강과 이 초인 무형일절이 합쳐진 이드의 여섯 번째 초식 무극연환일절의 결과물이었다.

그 강기들이 기사들의 검기와 부딪히는 순간!

귀가 멍멍한 폭음과 함께 그에 맞먹는 기대한 고함 소리가 이드의 귓가를 울렸다.

쿠쾅 콰콰콰쾅.

“흐아아압, 질주하라 워 타이거!”

콰롸콰콰.

나람의 외침에 뒤이어 작은 강기의 파편을 뚫고 이드를 향해 달려드는 회색빛 검강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회전하고 있는 이드의 몸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 몸을 돌리면 피할 수 있는 공격.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이, 제삼 이어질 강기의 공격을 이어 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기사들을 지키기 위한 방어를 위한 공격!

이드는 그런 나람의 뜻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뜻 존중해 주지요. 무형대천강!”

이드는 가슴을 중심으로 몸과 검의 위치를 바꾸며 밀려드는 회색빛 검강에 은색으로 물든 검을 경쾌하게 휘둘렀다.

콰아앙.

한 번의 커다란 소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을 덮고 있던 먼지와 이어지던 소음들을 날려 버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기사들의 패잔한 모습.

얼핏 보아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기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중엔 이미 목숨을 잃은 기사도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소드 마스터 수준의 기사들이었지만 검기와 검강의 차이는 이렇게 도저히 그 간극을 메울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기사들이 몸을 피한 듯 보였다. 보조 마법이 가득 걸려 있는 마법구 덕분이라고 봐야 했다.

무엇보다 이드의 여섯 번째 초식은 나람에 의해 완전히 펼쳐지지 못했다.

나람은 마치 땅에 박힌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표정조차 거의 변화가 없었다. 어찌 보면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망연자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지금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선택의 상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결단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후. 그만하지. 우리가 패했네.”

이드와 처음과 같은 거리를 둔 채 마지막 결단에 앞서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나람이 마침내 말했다. 그는 포기했다는 듯 그 거대한 거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승패의 결과를 확실하게 인식한 것이고, 그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 것이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결정이 빠르시군요. 코널이란 분은 모든 기사가 쓰러질 때까지 지켜보셨는데 말이죠.”

나람은 이드의 평가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기사이고, 나는 군인이다. 또 그때는 죽은 자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망자가 나왔다. 무엇보다 가망성 없는 전투로 국가의 전력을 깎아 먹는 것은 군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지.”

‘그러니까 군인과 기사의 차이란 말이지. 그런데…… 전투 중에는 그게 그거 아닌가?’

그래도 명예와 실리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드는 나람이 했던 말을 가만히 되뇌며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하도록 하죠. 저 역시 더 이상 피 보기를 좋아하지는 않으니까요.”

“좋네. 그럼 가시게. 우리가 패했다. 길을 열어라.”

패배를 말하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깃든 힘은 여전했다.

눈앞에 벌어진 결과에 기사들도 불만 없이 검을 집어넣고 대로의 길을 열었다.

앞뒤로 기사들이 막고 있던 길이 커다랗게 열렸다.

원래 목적지인 선착장으로 향해도 되고, 다시 되돌아가도 될 것이었다.

기사들이 물러나자 라미아는 채이나와 마오를 보호하고 있던 마법을 풀었다.

이드가 싸우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방어막을 공략하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모습에 긴장했던 두 사람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이드에게 다가왔다.

“수고했어. 어디 다친 덴 없지? 내가 벌인 일 때문에 네가 다친 걸 알면 일리나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전투를 끝낸 이드에게 슬쩍 농담을 건네는 채이나였다.

“글쎄요. 그렇지 않더라도 제가 일러줄 생각인데요. 이 고생 다 채이나의 탓이라고요, 후훗.”

이드는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검을 거두고 있는 나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검이여.”

“……라일론과 두 번째의 전투였습니다. 대충 제 힘은 확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웬만한 전력으로는 절 제압하긴 불가능할 겁니다. 이쯤에서 저와의 일을 끝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겹게 이어지는 한 단어에 잠시 멈칫거린 이드는 말을 이었다. 정말 라일론과 묶인 이 고약하고 지겨운 인연을 그만 끝내고 싶은 이드였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바람과는 달리 나람의 고개는 단호하게 내저어졌다.

“그건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자네의 진가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옛날 마인드 마스터가 전한 몇 가지 수법으로 아나크렌이 가지게 된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본국 역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아나크렌에게는 행운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게는 불행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본국과 인연을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그 힘이 다른 나라와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은 우리 제국만 이런 불안감에 시달리겠지만, 장차 사태는 어떤 식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라일론은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고…… 그리고 위험한 일이지.”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전한 몇 가지 무공이 이런 일이 되어 자신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드였다.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이러한 인과응보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아나크렌에 전해진 것은 다른 곳에도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공작이 익히고 있는 마인드 로드는 아나크렌에 전해진 오리지널입니다.”

“맞네. 아나크렌에서 나온 것은 이 마인드 로드와 몸을 움직이는 법, 두 가지뿐이지. 정말 중요한 검술과 몇 가지 중요한 수법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것은 고스란히 아나크렌의 커다란 힘이 되고 있지.”

이드는 나람의 말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수법들은 아마도 시르피에게 전했던 백화검무를 포함한 풍운십팔봉법, 용형구식과 몇 가지 보법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계속 아나크렌, 아나크렌 하시는데, 두 제국은 엄연히 동맹을 맺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가 그 힘을 가지고 싶은 거다. 아나크렌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싶으니까. 그리고 비록 드래곤에 의해 맺어졌지만. 나라 간의 동맹이다. 그 동맹이 과연 얼마나 갈까. 자네는 인간의 약속을 얼마나 믿을 수 있다고 보는가. 무엇이 그 약속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결론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말은 동등한 힘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나크렌을 압도하는 힘!

라일론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이처럼 제국의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운명이 그들을 점점 탐욕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고 있었다.

인간이 만드는 평화는 오로지 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전쟁사가 곧 인간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게 또한 인간이라는 종족의 운명인가.

‘젠장!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당장 고민해서 나을 만한 답은 없어 보였다. 이드는 몇 마디 욕설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는 나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 두십시오. 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 잘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피를 보기도 원치 않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명백히 밝힌 이드는 나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채이나, 마오와 함께 그를 스쳐 지나갔다.

이드를 선두로 한 세 사람이 향하는 곳은 이곳 진영에 있는 선착장 쪽이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선착장은 역시나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간간이 보이던 수군들과 경계병들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영에서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이런 곳에 사람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그 말은 곧 배를 운행할 사람도 없다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게 된다면 테이츠 영지에서 운행하는 민간용의 배를 타야 하는데 이런 문제를 일으켜 놓고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떤 사전 약속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라일론 제국에서 원하는 대로 일행들을 유인해 준 테이츠 영지였다.

이드 일행을 발견하면 당연히 싸움을 걸어 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힘은 그 쓰일 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선한 힘이다. 그러나 다시 무의미한 힘이 행사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과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만다.

다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설사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전투라고 해도 그리고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정체조차 모호하다 해도 이 소식은 다시 드레인의 왕궁으로 전해질 것이다. 적이 적을 낳는 것이다.

“라일론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거기에 드레인까지 더할 수는 없지.”

이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착장에 매어진 다섯 척의 배들 중 가장 작고 날렵해 보이는 배를 골라 성큼 올라탔다.

세 사람 모두 배를 몰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타고 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겐 배의 조정을 대신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이나, 로이콘! 이리 와서 우리를 좀 도와주겠니?”

바로 정령들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이드와 채이나가 나서서 소환한 물과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세 사람은 능숙한 뱃사람 못지않게 배를 몰아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이 배를 끌어주고, 물의 정령이 물길을 잡아 준다. 여유로운 배의 운항은 한참 갑갑하던 이드의 마음을 조금씩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이드가 시원한 호수의 바람을 맞으며 착잡한 마음을 식히고 있을 때, 드레인의 수도 루리아에 있는 왕궁에서는 이드가 결코 원하지 않던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바로 이드를 중심으로 한 수군 진영에서 있었던 치열하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강대한 힘을 앞세운 라일론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드레인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라일론의 총사령관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 전투였다. 적 생포 작전이라지만 그 적이 왜 적으로 규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타국의 군대가 진입하는 걸 허용할 때는 불가피하게 감시가 붙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군대가 들어오는 목적조차 명확하게 알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 역시 조건에 들어 있다면 손 놓고 환영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적이 내 땅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나라가 어찌 온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감시자들이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되었고, 전투 상황은 전투 종료와 동시에 왕궁에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드레인의 지배자들은 라일론과 같은 결론 하나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란 말이지.”

드레인의 왕궁을 조용히 울리는 그 무시무시한 말은 이드와 라일론에겐 불행이었고, 가만히 숨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던 드레인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절대적인 행운의 찬스였다.

나람의 말대로 이드의 존재는 어떤 나라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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