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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70화


  • 강력한 결계와 함께 시온 숲으로 광범위하게 이어져 있어 누구도 그곳을 엘프들의 숲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에엔자아앙!”

요정의 숲을 나선 지 3일째.

요정의 숲과 가장 가까운 영지에 들어선 이드와 채이나 그리고 마오는 영지에 들어선 지 이십 분 만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영지를 뛰쳐나와야 했다.

아니 도망 나왔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물론 이드 일행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달리면서도 한 번씩 들어서 보고 있는 구겨진 종이 쪼가리.

거기에는 상당히 뛰어난 솜씨로 이드와 채이나, 마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 인상보다 못 그리지도 않았고, 잘 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그림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그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 아래위로 적힌 글과 숫자들이 문제다. 몇 자 되지 않는 이 그림 포스터의 정체.

바로 현상범 수배 전단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천문학적인 숫자. 50000골덴.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일단 손에 쥐게 되면 자신은 물론 몇 대의 자손까지 떵떵거리며 편히 살 수 있는 돈. 그런 엄청난 돈이 상금으로 걸렸다.

그런 돈 앞에서는 전문적인 현상금 사냥꾼이나 용병, 병사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농부들까지 농기구를 들고 무조건 이드 일행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들을 무턱대고 죽일 수 없는 세 사람은 도망치는 것밖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곧 일리나를 만날 수는 있지만, 편하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 이드였다.

“이런 수작까지 부리다니. 그래, 두고 보자. 라일론!”

이드는 손에 쥔 현상금 수배 전단을 구겨 쥐고는 내던졌다. 이드의 손을 떠난 전단은 땅에 구르다 멈췄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보이는 부분의 글씨는 이랬다.

죄목 : 라일론 제국의 귀족 살해 혐의

제국이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 치사한 일이다, 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라일론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은 저런 전단을 뿌리기는커녕 만들어 낼 계획조차 없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이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면 이 일은 오히려 은밀하게 진행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현상금까지 내걸고 노출시키는 것은 보통 저급한 머리가 아니고서는 낼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라일론은 포스터를 유포한 집단의 정체를 자체적으로 알아보았고, 그 배후에 드레인 왕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해 드레인을 추궁할 수 있는가!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싸움은 자신들이 벌였지만 드레인의 영토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것은 오히려 라일론 제국을 피해자로 보고, 가해자인 이드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알아서 기느라 하는 일에 라일론 제국으로서는 되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이걸 따지고 든다는 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먹힐 수 없는 것이었다. 드레인의 내막을 알 수 없는 라일론 제국으로서는 공연히 앞서간 드레인의 행동으로 이런 낭패가 생긴 꼴이라며 애를 태웠다.

설사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고 해도 불리한 상황은 여전할 것이었다. 오히려 라일론 자국의 의도만 노출시킬 가능성이 컸기에 상황을 확대할 수도 없었다. 황당하고, 난처한 지경이 꼭 이런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일 것이다.

더구나 죄목은 테이츠 영지에서의 전투를 위해 내세웠던, 자국의 귀족을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한 병력의 파병이란 것이었으니…….

가장 답답한 건 우리 라일론이다.

다시 이드 일행을 만나게 된다면 라일론 제국은 이렇게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몰랐다.

“그래 어떻게 되었소?”

교묘한 수를 써 양쪽을 모두 피해자로 둔갑시킨 드레인의 왕궁에서는 조심스럽게 결과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드레인의 국왕 레오나움 루리아였다.

“다행히 생각했던 대로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오.”

듣고 싶었던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에 레오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의 작은 개인 서재에서의 한숨이라 국왕과 함께 자리한 다섯 귀족의 귀에도 한숨 소리가 잘 들려왔다.

“그럼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레오 국왕은 이번 작전을 함께 계획하고 만들어 낸 다섯 대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국왕을 포함한 이들 여섯은 은밀히 테이츠 영지에 숨어든 첩자를 통해 테이츠 영지에서 있었던 이드와 라일론 제국 간의 일을 전해 듣고 이번 일을 치밀하게 꾸민 것이다.

첩자가 전해 준 내용으로 인해 결론 내려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참으로 컸다.

그 의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커서 보통 때라면 꿈에서도 대항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라일론 제국에게 죄를 씌우게까지 만들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그만 자신들의 편을 들어 준다면 라일론 제국도 별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들이 모두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꼭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 준다고 볼 수는 없었다. 막강한 병력을 보유한 라일론도 지금까지는 실패하고 있는 일이다. 여기에 쏟아붓고 있는 제국의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면서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공할 시에 돌아올 어마어마한 효과를 계산해 실패할 시에 닥칠 또 어마어마한 피해를 각오하고 일을 벌인 국왕이었다.

“그와 저희 군대의 전투입니다. 확인해 본 결과 그는 마스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서 마스로 향하는 코스를 계산해 마주치기 적당한 곳에 이미 부대를 배치시켰습니다.”

이 드레인의 여섯 지배자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흔히 말하는 진부한 상황하에 벌어지는 인연의 우연성이라고 할까?

이들은 이드와의 전투에서 자신들이 철저하게 라일론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점만을 가장 크게 부각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드에게 공격한 것이 본의가 아니었으며 힘이 없어 억울하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기록에 따른 마인드 마스터와 이드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그런 약하고 불쌍한 모습이 그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호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좀 황당한 결론이 나온 때문이었다.

일단 그렇게 호감을 심어 준 상태에서 자신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설명하고,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다며 결사의 각오로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잘하면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조금만 삐끗하면 라일론 제국에 의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완전 파탄의 가능성이 함께 공존하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해서 여기 모인 여섯은 열심히 이드의 순수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움직이기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신은 이들 여섯의 얌체 같은 속마음이 싫었는지 그들의 기도를 싸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이드는 채이나에게 텔레포트의 사용을 허락받고, 바로 마스로 날아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드레인의 여섯 지배자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어떤 심정인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애초부터 마인드 마스터 후예의 동정심을 끌어낸다는 황당한 발상 자체도 문제였지만 왕국의 사활을 걸고 치밀하게 준비해 둔 계획이 완전 무위로 돌아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함의 연속에 불과했고, 그래서 이건 완벽한 해프닝을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이들 여섯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라일론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의심할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드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도 제국은 충분히 한 곳으로만 몰입되어 있었고, 바쁘고 힘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드가 드레인에서 떠난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도 더 이상 드레인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어 버린 것이다. 드레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안전하게 잊혀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그렇게 둘로 늘어났던 이드 일행 추적팀은 다시 하나가 되는 듯싶었으나, 곧 새로운 경쟁자가 출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라일론 제국은 추적 와중에 이를 감지하게 되었다.

드레인은 너무 약해서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했던 반면 이번에 등장한 경쟁자는 그 가진 바 힘이나 은밀성이 제국의 추적팀에 못지않아 제국의 긴장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드 추적 활동에 뛰어들게 된 자들은 라일론에 비해 늦은 대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그것을 바로바로 모종의 장소로 보내고 있었다.

직접 부딪치지 않는 대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방법은 그야말로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전법밖에는 없었다. 단 한 번의 타격이나 계기로 상황을 완전히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그들은 불철주야 은밀하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드 일행이 마스에 들어선 지 일주일째 되는 날.

그들이 머물고 있는 여관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추적자들은 또 새로운 보고를 위해 통신구에 마나를 집중했다.

“마인드 로드, 응답 바랍니다. 후계자에 대한 사십두 번째 보고입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추적에 지친 듯 갈라진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인 이 추적자는 수정구를 들고 피곤한 얼굴로 상대의 응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검게 칠해진 수정구로부터 이상하게 변형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하세요. 후계자를 쫓는 늑대.”

“후계자와 그 일행을 마스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라일론에 올라간 보고대로 마법을 사용해서 이동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직까지 마인드 마스터의 검을 확인해 보지 못했으며, 기록에 따른 마인드 마스터의 수법들도 확인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번에도 확인하는 데까지 진행되지 못한 관계로 다시 후계자의 정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합니다. 이상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를 보지 않은 이상 그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는 신중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얼마나 치밀한 추적자들인지를 알 수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저희는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몸을 아껴 가며 수고해 주세요. 당신의 실력을 믿겠습니다.”

짧게 오고 간 몇 마디 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가 들어가 있어 생각을 깊게 해 볼 수밖에 없는 대화였다.

알 수 없는 자들의 대화 이후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이드는 자신의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은밀히 따르고 있는 제국의 병력과 미지의 단체에 대해 생각했다.

라일론 제국이 당연하게도 자신을 쫓을 것이란 것을 알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헌데 얼마 전부터 자신을 쫓는 자들 중에 전혀 다른 이상한 자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든가 첩첩산중이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추적에 있어서는 라일론 제국보다 능숙하지 못했지만, 가진 바 실력은 제국보다 뛰어나다. 이드는 그렇게 단정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드에겐 그들의 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드가 걱정하는 것은 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일리나의 마을까지 가게 될 경우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을 위험한 사태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채이나가 도보를 고집한다고 하지만 이들을 달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굳힌 이드는 그대로 채이나를 찾아가 그녀를 설득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채이나가 양심상 같은 상황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눈앞에 마스와 아나크렌의 국경이 보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그녀의 고집을 꺾거나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이드였지만 이번엔 일리나가 눈앞에 있어서 기합을 가득 넣고 채이나와 마주섰다.

흔히 하는 말처럼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

이드의 말은 한참을 이어졌다. 그가 생각하는 좋지 못한 가능성도 연이어서 설명했다.

그 뒤를 라미아가 받쳐 주며 열심히 채이나에게 텔레포트할 것을 주장했다.

거진 한 시간을 매달렸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허락을 받아 냈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일리나를 들먹이는 이드의 말에 질렸다는 듯, 한편으로는 갸륵하다는 다소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 채이나가 일리나의 마을에 대한 정보를 드디어 털어 놓았다.

이제야 겨우 일리나의 마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위치를 전해 듣는 그 순간 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텔레포트 마법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평가되는 게이트의 마법.

라미아는 혹시나 남을지 모를 텔레포트의 흔적을 걱정해서 채이나가 말한 일리나의 마을까지 공간을 넘어 버리는 게이트를 열어 버린 것이다.

세 사람이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자 푸른 물결처럼 빛나던 둥그런 게이트도 스르륵 허공중으로 녹아들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자들은 사라지는 게이트와 함께 자신들의 의식이 함께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던 목표가 눈앞에서 졸지에 사라져 버린 때문이었다.

또 그를 놓쳐 버림으로 해서 떨어질 상부의 불벼락을 생각하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까지 한꺼번에 덮쳐 와 정신적 쇼크로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여지도 없었지만 말이다.

추적자들은 망연자실 잠복하던 장소를 떠나지 못한 채 상부의 내려오지 않을 지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드의 기세에 밀려 일리나가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해 입을 열어 버린 채이나의 말에 따르면 일리나의 마을인 푸른 나무 마을은 흔히 몬스터의 숲이라고도 부르는 시온 숲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보통 알려지기로는 시온 숲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으므로 이것은 거의 진실처럼 여겨졌다.

완전히 미지의 땅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 본 자가 없고, 갔다고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허황된 전설이나 신비로운 이야기도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온전히 무(無)에 가까운 땅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상당한 미개척 지역이 시온 숲과 해안가 그리고 페이라 산맥의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그 어떤 인간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태고의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강력한 결계와 함께 시온 숲으로 광범위하게 이어져 있어 누구도 그곳을 엘프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 숲을 지키기 위해 펼쳐져 있는 결계의 마법에 걸려 숲을 헤매다 그대로 시온 숲으로 유인되어 죽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으니 말이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 사실이긴 하지만 구십여 년 전, 숲을 지키는 결계가 아주 약해져 제대로 결계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곧 보수된 결계는 예전의 힘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며 지금까지 숲을 지켜 내고 있었다.

시온 숲의 어느 입구 부근.

파아아아

강렬한 마나의 돌풍과 함께 생겨난 푸른 물빛의 거울 같은 작은 공간의 일렁임이 생겨났다.

그 푸르른 공간은 마나의 폭풍과 함께 부풀어 오르더니 주위의 쓸모없는 돌이나 물건들은 저 뒤로 날려 버리며 하나의 게이트로서 완성되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숲 언저리에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

푸른빛으로 만들어진 게이트에서 이내 장신의 늘씬한 세 인형이 걸어 나왔다.

몽환적인 빛무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그림자로 보아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섞인 일행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 함께 사라지며, 빛에 가려졌던 세 사람의 얼굴이 온전히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 일리나의 마을로 게이트를 연 이드와 채이나, 마오였다.

그 중 급한 마음에 가장 먼저 게이트로 들어섰던 이드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의 입구 부근이다.

이드의 눈에는 은근히 부근을 가로지르는 결계의 힘이 보였다.

“결계야. 가까이 있는 시온 숲의 몬스터와 갑작스런 인간의 침입을 막아 내는 게 목적이지. 미치광이처럼 돌진해 온 그 미친 마법사의 일 이후에 펼쳐진 마법이라고 하더라. 저 결계 때문에 마을로는 직접 이동이 불가능해서 여기서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해.”

“……결계는 어떻게 열고요?”

이드는 채이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평소보다 조금 빠른 박동을 보이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저 결계 때문에 게이트도 이런 곳에 열었다면서 어떻게 결계를 지나갈 것인가?

“조금 걸어야지. 듣기로는 이 결계를 따라 산맥 방향으로 오 킬로 정도를 걸어가면 결계의 입구가 있대. 거기엔 항상 그곳을 지키고 있는 푸른 나무 마을의 엘프가 있고.”

끄덕

“좋아요. 그럼 거기로 가죠.”

이드는 가볍게 숲을 들이쉬고는 결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채이나는 그런 이드의 뒤를 따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긴장…… 되나 보지?”

“그래 보여요?”

되묻는 이드의 말에 채이나는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 긴장돼요.”

“걱정 마. 그녀는 널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엘프는 상대가 날 떠나지만 않는다면 원망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대신 그녀를 만나면 따뜻하게 안아 줘.”

뭔가 의미 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뒤이어 잔잔한 노래 같은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드의 마음을 달랬다.

일리나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라미아는 이드가 마음을 다잡고 일리나와의 만남을 잘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걱정 마. 잘할 테니까. 라미아.”

라미아의 목소리로 마음을 달래며 얼마나 걸었을까.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채이나가 말하던 결계의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오 킬로미터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결계의 입구는 도착하는 순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 일반 집의 문 같은 작은 문을 시작해서 성문에 이르는 크기를 가진 다섯 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입구였다.

그러나 세 사람 중 누구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결계의 작은 입구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그 앞에 가만히 선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시선을 멀리 두고 있는, 섬세한 선을 가진 아름다운 한 여성 때문이었다.

지구로 간 후 단 한시도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그 얼굴의 주인공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얼굴보다 더욱더 깊어진 눈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여성.

시간이 얼마가 지나더라도 어제 본 것처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선명한 상대.

“……일리나.”

저절로 흘러나온 여성의 이름이었다.

그랬다. 마치 이드가 사라진 후부터 줄곧 그를 기다렸다는 듯 결계를 열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여인은 바로 이드가 그렇게 찾고자 애를 썼던 일리나였다.

일리나가 자신을 부르는 이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기쁨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서 와요, 이드.”

다가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서로를 느낀다는 확신으로 깊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몇 발짝을 더 걸어가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호들갑스럽게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없는 가운데 두 사람의 분위기는 가히 극과 극을 이루고 있었다.

가만히 선 채로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드를 반겨 주는 일리나, 그런 일리나와 대조적으로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미안한 심정이 되어 무슨 말부터 꺼내 놓아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이드…….

이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도 일리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만히 이드를 향해 열려 있던 일리나의 시선이 그의 눈길을 담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보름 전…… 채이나 씨의 연락을 받은 날부터 매일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매일 당신을 기다리며 얼마나 두근거려 했는지 당신은 아실까요? 잘 돌아왔어요, 이드.”

이드는 그녀의 말에 질끈 눈을 감았다.

채이나의 말을 듣고 보름 전부터 기다렸다는 말.

아니다. 그녀가 기다린 시간은 백여 년에 가까운 길고 긴 시간이었다.

외롭고, 지루한 기다림이었을 테다.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시간이었을 테다.

다시 눈을 뜬 이드는 일리나를 따뜻하게, 또 마음속 깊이 사과하며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이드를 살짝 미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두 연인이 하고 있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던 채이나였다. 그녀의 보채는 손이 어서 안아 주지 않고 무엇 하냐고 말하는 듯했다.

그 긴 시간 동안 기다린 그녀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듯.

이드는 자신을 재촉하는 채이나를 살짝 돌아보고는 천천히 일리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일리나에게 가까워지는 이드의 머릿속으로 그레센에 도착해 처음 일리나를 만난 순간부터 시작해 지구로 떠나기 전의 그녀의 모습이 무수히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서너 걸음 가량의 공간을 두고 마주 섰을 때 이드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일리나의 모습은 한 가지였다.

이드가 라일론으로 날아간 후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우는 얼굴로 자신에게 안겨 들던 그녀의 모습.

일리나는 가만히 다가오는 이드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벌써 보름 전에 이드가 온다는 걸 알고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들뜬 심정을 차분히 억누르며, 수시로 솟구치는 열망을 다듬었던 마음인데, 막상 이드를 보고 있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드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서 있는 데도 초인적인 힘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지금이라도 뛰어오르며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데…….

잠시 후 이드가 자신의 앞에 섰을 때.

일리나는 어쩐지 이드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절로 배시시 웃음이 묻어 나온다.

“다리에 힘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달려가지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의 웃음을 따라 웃었다.

“다행이죠. 그랬다면 내가 얼마나 더 안절부절했을까요. 게다가 당신이 기다린 만큼 이번엔 내가 다가갈 차례니까요.”

이드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을 이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와의 거리를 없애고는 가만히 그녀를 가슴 한가득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가만히 그녀의 허리와 가슴을 팔에 안았다.

“너무 기다리게 했죠? 나…… 이제 돌아왔어요.”

“……어서 오세요.”

이드의 말에 가만히 화답하는 일리나의 팔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드는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자 정말 그레센에 돌아왔구나 하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단 한 번도 그레센으로의 귀환을 느껴 보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진정한 만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무수한 모험과 여행의 끝자락에서 다시 일리나를 만났다.

이 연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여행의 처음에 있었던 풍경이 잠시 흐릿한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일리나를 통해 다시 환기되는 그레센 최초의 기억들은 다행히도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었다.

다시 모험은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이드 자신은 이 불가피한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중원으로 귀환하는 데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모험, 혹은 여행!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처럼 자신도 거기 있을 뿐이었다.

(『이드』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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