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3화 : 누운용 엎드린 범
누운용 엎드린 범
술잔은 노래로 마주해야 하리. 對酒當歌
우리 살이 길어야 얼마나 되나. 人生幾何
견주어 아침 이슬에 다름없건만 譬如朝露
가버린 날들이 너무 많구나. 去日苦多
하염없이 강개에 젖어보지만 慨當以慷
마음속의 걱정 잊을 길 없네. 憂思難忘
무엇으로 이 걱정 떨쳐버릴까. 何以解憂
오직 술이 있을 뿐이로다…………… 唯有杜康
(杜康, 옛적 술을 잘 담그던 사람)
은은한 칠현금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낭랑했다. 낙양성 북쪽의 한 저택 후원이었다. 가을바람 서늘한 곳에 술상을 벌여 놓고 두 청년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 곁에서 칠현금을 뜯고 있는 것 은 불려온 듯한 유녀(遊女)였다.
방금 노래를 부른 청년은 스물두셋쯤 되었을까. 눈에 띄게 잘생기 지는 않았지만 몹시 강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길고 여윈 얼굴 에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는 이따금씩 쏘아내듯 빛이 번득였고, 쭉 뻗은 콧날과 엷으나 붉은 입술도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었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징이 되는 것은 예측할 수 없게 뒤바뀌는 표정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어딘가 냉혹하고 비정한 인상을 주지만 한번 얼굴을 펴고 웃으면 아무리 성난 사람이라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소탈하고 천진해 보였다. 슬픔에 잠기면 얼굴에 어둠 이라도 끼듯 보는 사람마저 까닭 없이 어두운 기분에 젖어들게 되었 고, 한번 화를 내면 그 얼굴은 그대로 열화 덩어리로 보였다.
그런데 방금 노래를 마친 그의 얼굴은 금세 눈물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조(曹操), 자는 맹덕(孟德)으로 패국(沛國) 초현(譙 사람인데 스무 살 남짓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그 무렵은 낙 양 북부도위(北部都尉)란 벼슬을 살고 있었다.
“아만阿瞞, 조조의 어릴 때 이름) 형, 가락이 너무 처량하구려.”
조조가 노래를 부를 동안 큰 잔으로 거푸 술을 들이켜던 맞은편 청년이 그렇게 말했다. 조조의 두 배는 됨직한 떡 벌어진 체격에 구 레나룻이 거뭇거뭇한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따위, 한눈에 힘꼴깨나 쓰는 장사로 보였다.
어릴 적 이름인 아만으로 조조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 피붙이이거 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 같았다.
“원양(元), 너는 이 썩은 세상이 보이지 않느냐? 어버이인 임금 이 자식인 신하를 오히려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같은 세상에 어찌 즐거운 노래가 나오겠느냐?”
임금이 신하를 아버지라 부른다 함은 영제(靈)가 열 명의 세력 있는 내시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장(張)을 아부(阿父)라고 부르 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부란 아버지나 숙부를 정답게 부르는 말로서, 환관들의 농간에 넘어간 황제가 그만큼 그들을 믿고 의지한 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그 일만이 아니었다. 석 달 전영창(永昌) 태수 조앵(曹)이 당고의 화를 입은 청의(淸議)들을 위한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이 너무 곧고 절실해서 기분 이상한 데다 십상시의 충동질이 있자 노한 황제는 조앵을 잡아 감 옥으로 보낸 뒤 때려죽이게[]했다. 뿐만 아니라, 당고의 화에 관련되었다가 복직된 자는 물론 그 아비와 자식, 형제까지 벼슬을 사는 자는 모조리 내치라는 명을 내려 한 가닥 조정에 남아 있던 맑 은 기운마저 쓸어내버렸다.
“그렇다면 까짓 불알 없는 내시들을 확 쓸어버릴 궁리는 않으시 고 천하의 아만 형답지 못하게 무슨 궁상맞은 노래시오?”
조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은편의 덩치 큰 사내는 술잔으 로 상을 탕탕 내리쳐가며 호쾌하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하후돈(夏侯惇), 원양이란 자를 쓰며 조조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고향 친구 였다. 열다섯 살 때 스승을 욕하는 자를 그 자리에서 때려죽일 만큼 힘이 세고 성격이 거칠어 초현 사람들은 한결같이 두려워했으나 어 찌 된 셈인지 먼 친척 형뻘인 조조에게는 순하기가 양 같았다.
하후돈은 조조가 한때 저잣거리의 협객들과 어울려 다닐 때는 충 실한 그의 주먹 노릇을 하다가 조조가 효렴으로 뽑히어 낙양으로 올 라오자 그도 따라와 조조의 집에서 기식하고 있었다. 무예가 출중한 그라 원한다면 하급 무관 자리는 언제든 얻을 수 있었지만, 왠지 그 는 조조 아래서가 아니면 일하려들지 않았다. 조조도 굳이 그에게 하찮은 벼슬자리를 권하려들지 않는 대신 그에게 병서를 구해주어, 그 무렵은 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원양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사람은 출신을 배반해서는 못 쓰 는 법이다.”
조조가 문득 엄한 얼굴이 되어 하후돈을 나무랐다. 하후돈도 그 말을 듣자 무안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양 자를 든 집[養家]이라 하나 조조의 집안이 바로 자기가 욕한 불알 없 는 내시 놈들인 환관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조조에게 조부가 되는 조등(曹騰)부터 살펴보자.
『후한서(後漢書)』「환자열전(宦者列傳)」은 조등에 관해 이렇게 적 고 있다.
‘조등의 자는 계훙(季興)이요 패국(國) 초현 사람이다. 안제( 帝) 때 황문종관(黃門從官)이 되었는데, 등태후(鄧太后)는 그가 젊으면서도 근후함을 보고 아직 동궁이던 순(順)의 글동무가 되도록 하고 특별히 아꼈다. 순제가 즉위하자 그는 소황문(小黃門)으로 중 상시가 되었고 환제(桓)가 즉위한 뒤에는 비정후(費亭侯)에까지 올랐다.
등은 벼슬에 오른 지 삼십여 년, 네 황제를 섬기면서도 그릇됨이 없었다. 그가 추천한 사람은 진류(陳) 땅의 우방(虞)과 변소(邊 韶), 남양(南陽) 땅의 연고(延固)와 장온(張溫), 홍농(弘) 땅의 장환 (張奐), 영천(川) 땅의 당계전(堂谿典) 등인데 한결같이 당대의 명 사들이었다.
한번은 촉군(蜀郡) 태수가 등에게 계리(吏)를 통해 뇌물을 바쳤 는데, 익주(州) 자사 추고秋)가 도중에 그 편지를 손에 넣어 태 수와 함께 등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말하기를,
“편지는 밖에서 저절로 온 것이니, 등에게는 죄가 없다.”
하며 추고의 상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은 추고를 원망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좋은 관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사람들 이 모두 그 같은 태도를 아름답게 여겼다. 뒷날 사도(司徒)의 자리에 까지 오른 추고도 손님이 오면 말하곤 했다.
“오늘 이 몸이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른 것은 오로지 조상시 [曹 騰, 조등]의 힘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한서』를 지은 이가 위(魏)를 계승한 진(晋, 東 晋) 사람임으로 해서 조조를 위한 곡필의 의심을 받고 있다. 특히 조 등이 대장군 양기(梁冀)와 손을 잡고 환제를 세워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진 것이나, 그럼에도 그 후 양씨 일족이 죄를 쓰고 몰살될 때 는 교묘히 몸을 빼내 살아남아 영달을 누린 걸 보면 그의 비상한 임 기응변의 재능과 아울러 음험한 책략이나 술수까지도 짐작게 한다. 조조의 아버지 조(曹)은 그런 조등의 양자였다. 한나라 초기 에는 환관의 봉작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순제 때 손 정(孫) 등이 반정(反正)에 성공하여 열후(列侯)에 봉해진 뒤 환관 도 양자를 얻어 가문을 잇게 할 수 있었다. 원래 조숭은 하후씨(夏侯 氏) 출신이며 하후돈, 하후연 등이 조조의 생가 사촌형제들이란 말 이 있으나, 조홍(曹洪), 조인(仁) 등이 역시 조조의 사촌형제로 기 록되어 있는 걸 보면 조숭이 조씨(曹氏)가 된 것은 더 윗대의 일인지 도 모른다.
그런 조의 벼슬에 대해서는 나중에 일억만 전(錢)을 써서 태위 (太尉)에 오른 것 외에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승 자신은 환관이 아니고, 태위는 삼공에 드는 높은 벼슬이었으나 조조에게는 일생의 상처와도 같은 황문(黄門, 환관 집안 출신 또는 탁류라는 낙 인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조조가 하후돈에게 상기시킨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나라를 근심 해도 그 가장 큰 원인인 환관을 드러내놓고 욕하는 것은 도리어 누 워서 침 뱉는 격이 되니 거기에 조조의 아픔이 있었다. 잠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조조는 이내 얼굴을 풀며 힘 있게 덧 붙였다.
“거기다가 내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말에 하후돈도 무안함을 털어버리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노래를 마저 들려주십시오.”
“아직 다 짓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노래가 결코 나약한 탄식에 젖은 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한 구절만 더 들려주겠다.”
그리고 술 한 잔을 훌쩍 비운 조조는 손바닥으로 상 모서리를 쳐가며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푸르른 그대의 옷깃 青青子衿
아득히 그리는 이 마음 悠悠我心
오직 그대로 하여 但爲君故
이리 생각에 잠겨 읊조리네. 沈吟至今
사슴의 무리 슬피 울며 呦呦鹿鳴
들의 쑥을 뜯는구나. 食野之苹
내게 귀한 손님이 오면 我有嘉賓
거문고와 피리로 반기리…………… 故瑟吹笙
“전보다는 형님다운 기개가 조금 살아났습니다. 왜 마저 짓지 않
으십니까?”
듣기를 마친 하후돈이 조르듯 물었다.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아직 내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그렇게 대답하며 찬 기운이 돌듯 맑은 늦가을의 하늘을 아득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기다리는 귀한 손이 그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기나 하듯.
전통적인 또는 기성의 권위가 낡고 부패하여 흔들리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지식인 계층이다. 그들의 섬세한 감각은 일반 민중들이 아직 그 흔들림을 느끼기도 전에 벌써 붕괴의 예감에 떨며 괴로워한다.
이때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 나는 전통의 권위를 옹호하려는 쪽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의지해온 권위가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그 회복에 몸과 마음 을 바친다. 동양에서 각 왕조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충신 열사가 그들이며, 서양의 개혁기에도 또한 어김없이 나타나는 극단 한 반동주의자가 그들이다.
다른 하나는 전통의 권위로부터 탈주하는 쪽이다. 그들 중에 야심 과 능력을 겸비한 자는 스스로 새로운 권위가 되어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나름대로 선택한 새로운 권위 를 위해 낡은 권위를 타도하는 데 앞장선다. 그들을 지배하는 열정 의 근원은, 자기들의 권위가 새로움이며 그 선택이 모험이라는 점으 로서, 좋은 뜻으로는 혁명가이고 나쁜 뜻으로는 반역자라 불리는 이 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그들 탈주한 지식 계급 또는 대항정영(對抗精英, 대항 엘리트)의 유형이다. 혁명을 향한 열정과 재능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대략 네 가지가 되는데, 그 첫 번 째는 열정도 재능도 없이 혁명에 참가한 자들이다. 이들은 머릿수를 채우는 데는 혁명에 도움을 주지만,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는 점에서는 없는 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 사소한 이해나 은원(恩怨)에 휩쓸려 혁명에 가담하거나 반체제의 선전에 충동되어 모인 일시적인 다중 의 대부분이 이들이다.
두 번째는 혁명 운동에 필요한 재능, 즉 음모와 조직과 선동의 능 력은 있으나 열정과 그에 따르는 신념이 없는 부류이다. 이들은 혁명 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일을 한다. 그러 나 기성의 권위가 뜻밖으로 완강하게 버티거나 거세게 반격해오면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대항 집단에 입히게 된다. 거사 직전의 밀고, 결정적인 시기의 변절 따위가 이들의 솜씨이며, 때로 이들에게 있어 서 반항은 혁명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조건으로 기성의 권위체제에 수용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세 번째는 앞서와 반대로 혁명에 필요한 재능은 없고 열정만 있 는 부류이다. 이들은 모든 혁명 운동에 있어서 힘의 원천이며 마지 막 보루다. 그러나 또한 가장 많이 희생하면서도 가장 적게 얻는 것 이 이들이다. 어떤 혁명에서도 그 과일은 이들의 것이 되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들에게 돌아가는 유일한 과일인 공허한 말의 성찬조차 도 누구에겐가 가로채이고 만다.
마지막이 열정과 재능을 한 몸에 모두 지닌 경우이다. 이들이야말 로 모든 대항 집단의 핵심 세력이 되며 미래의 새로운 권위가 될 가 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이들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권위의 틀인 제도를 위주로 한 혁명으로 사회를 밑바닥에서 부터 뒤엎는 극단한 양상을 보이는 한편, 다른 하나는 권위의 담당 자를 위주로 하는 경우로 담당의 정당성만 확보되면 그전의 제도를 계승, 답습하는 부분적인 혁명이 되고 만다.
이러한 구분은 물론 엄격한 서구식의 혁명 개념에는 맞지 않을는 지 모른다. 뒤의 경우, 즉 동양형의 혁명은 결국 자기가 쓰러뜨린 왕 조와 비슷한 새 왕조를 여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그나마도 어리석은 후계자와 그를 둘러싼 권력 장치의 무능 및 부패로 세월이 갈수록 혁명이란 말에는 어울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 이 몸을 일으킬 때보다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또 실제로도 어느 정 도 그 꿈을 실현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 역시도 혁명가들이다.
혁명이란 말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붙는 민중을 끌어대 봐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동양의 어떤 태조(太祖)가 민중의 지지 없이 새 왕조를 열 수 있었을 것인가.
하지만 그런 동양적인 혁명가들 가운데 한층 억울한 것은 찬탈자 란 이름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은 살아서는 끊임없이 충의를 앞세운 반동 세력의 도전을 받고, 죽어서는 아름답지 못한 이름에 시달린 다. 그들이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는 것은 양위(位)를 받는 순간까 지도 충성을 다짐하고 마지막 정적을 없앨 때까지도 자기가 말살시 키려는 그 권위에 의지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찬탈자로 태어나 는 자가 따로 있지 않을 바에야 어느 시기까지의 충성은 진정한 것 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끝내 그 낡은 권위에 절망한 나머 지 찬탈자의 길을 갔다면 반드시 그만을 나무랄 수도 없으리라. 또 자기가 말살할 권위를 끝까지 이용한 것도 그렇다. 그만큼 전통적인 권위가 갖는 상징적인 힘을 잘 알았다는 뜻에서 역시 비범이라고 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청년 조조를 사로잡고 있는 열정은 나날이 쇠약해지는 한조 를 향한 충성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까마득한 조상인 상국(相) 조 참(曹參)으로부터 할아버지 조등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문에 내려진 한조의 은혜는 우악(優渥)스런 것이었다. 거기다가 사백 년의 세월 이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가슴속 깊은 애정도 조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조조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임협(俠) 시절을 청산하 고 처음 낙양의 북부도위에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오색으 로 칠한 몽둥이를 성문 좌우 십여 장(丈)에 벌려 세우고 수하 관원 들에게 말했다.
“도성의 성문은 대궐의 외문(外門)이다. 이곳이 허술하면 마침내 도적은 금문(禁門)도 업신여기게 된다. 앞으로 정한 시각 이외에 이 문을 드나들면 누구든 이 몽둥이로 때려죽일 것이다.”
그런데 몇 달 뒤에 영제의 총애를 받는 십상시 가운데 하나인 건 석(蹇碩)의 아재비 되는 자가 그걸 어기고 밤중에 그 문을 지나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상시인 조카를 믿고 한 짓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용서하지 않았다.
“국법을 시행하는 데 어찌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게 했다. 다음 날 건 석이 그걸 알고 눈물로 영제에게 조조를 참소했으나 워낙 잘잘못이 뚜렷한 일이라 황제도 조조를 벌할 수 없었다.
그 일로 인해 조조의 매서운 이름은 낙양에 떠들썩하게 알려졌으 나, 한때 할아버지의 동료였던 환관들에게는 공적이 되었다. 한번은 중상시 장양의 방에 사사로이 들어갔다가 장양이 던진 손창에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황문 출신이란 점에서 조조는 그들을 드러내놓고 공 격할 수는 없었다. 자칫 조상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출신 을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워줄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에게는 위로도 있었다. 탁류인 환관들에게서는 미움 을 받는 대신 청의들에게는 차츰 인정을 받게 된 일이 그랬다. 처음 조조가 효렴에 뽑히어 낙양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그들은 조조를 돈 으로 효렴의 자리를 사온 환관의 자식이라 깔보았다. 그런데 가까이 서 대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강직함과 과단성 못지않게 임기응변에 재능이 번득였고, 학문도 그들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더욱 조조의 성가를 높여준 것은 이른바 청의의 한 사 람인 태위 교현橋玄)의 인물평이었다. 그는 조조의 상을 유심히 살 핀 뒤에 말하였다.
“나는 천하의 명사들을 많이 보았지만, 자네만 한 상(相)은 아직 없었네. 부디 스스로를 중히 여기게. 그리고 나는 이미 늙었으니 뒷 날 뜻을 이루거든 내 처자를 잘 돌봐주게.”
교현은 도둑이 어린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재물을 요구하자, 재물을 내주는 것은 간특한 도둑을 기르는 일이라 하여, 군사를 풀어 아들 을 죽게 하면서까지 도둑을 잡을 만큼 강직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 다. 매달 초하루[月旦]마다 낙양의 명사들과 모여 앉아 당시의 인물 들을 평가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걸 월단평(月旦)이라 하여 귀담아 듣고 높이 쳤다. 그 교현이, 더구나 삼공의 한 사람으로서 약관의 조조를 그렇게 평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의들로부터 조금씩 호감을 사자 조조는 그들과 손을 잡고 기우 는 한실(漢室)을 바로잡을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이제 조(曹)의 상소 사건으로 실낱같이 맥을 이어오던 청의가 다시 비로 쓸리듯 벼 슬길에서 쫓겨난 참이었다.
“원양, 우리 모든 일 걷어치우고 다시 초현으로 내려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조가 다시 하후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하후돈이 조조의 참뜻을 몰라 얼른 대답을 못하자 덧붙였다.
“날랜 말에 좋은 사냥개나 데리고 산과 들을 누비던 그때가 그리우이.”
조조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지난 삼 년 그는 힘을 다해 불의 며 불충과 싸웠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옳은 선비는 모두 떠나가고 간사한 환관들의 참소만 남은 조정에 홀로 남겨졌을 뿐이 었다. 십 년은 더 늙어 뵈는 조조의 얼굴이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제서야 하후돈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거리낌없이 취하고, 흥에 겨우면 시문이나 읊조리고, 작은 힘을 믿고 약한 이를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주먹으로 통쾌하게 벌을 주 고…….”
“그 어떤 것도 군자가 깊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형님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일껏 벼슬길에 오르셔놓고 이제 겨우 삼 년도 안 돼 그만두시겠다니 무슨 아녀자 같이 약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술기운 탓인지 조조는 쓸쓸한 감회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아아, 묘재, 하후연의 자), 인[曹仁], 자원(遠, 허유의 자), 모두 잘 있는지…….”
그렇게 고향 땅에 남아 있는 옛 친구들을 그리다가 문득 유녀에게 소리쳤다.
“금(琴)을 뜯으라. 오늘은 달이 뜰 때까지 마시라.”
조조의 종제 조홍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였다. 역 시 조조와 함께 패국 일대를 주먹으로 휩쓸던 무골(武骨)로 하후돈 처럼 낙양으로 따라와 식견을 넓히는 한편 조조의 손발로 일하고 있 었다. 그날도 당인(人, 당고의 화에 연루된 선비)들을 또다시 내친 데 대한 시정의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 좀 늦게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 나 그는 시정의 동정을 전하기에 앞서 놀라운 소식부터 알렸다.
“형님, 얼마 전 거리에서 여남원가의 자제들을 만났습니다.”
그 말에 울적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조조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원본(本初, 원소의 자)가 이 낙양에 왔단 말이냐?”
“네. 종제 되는 원술(袁術)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청쇄문(靑瑣 門)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공로(公路, 원술의 자)까지…………… 그래, 너를 알아보기나 하 더냐?”
“몹시 반겼습니다. 그렇잖아도 형님께 기별을 못해 걱정이었는데 요행 만나게 되었다더군요.”
“그러고는?”
“숙부께 문안 올리는 즉시로 이리 달려오겠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반갑다. 정말 때맞추어 온 귀한 손님이다. 이게 몇 년 만이냐…………….”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소리쳐 가복을 불렀다.
“오늘 저녁 귀한 손님이 오게 되었으니 특별히 술상을 보아두어라.”
그리고 다시 하후돈, 조홍과 유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도 각기 돌아가거라. 나는 원본초가 올 때까지 여기서 홀 로 있겠다.”
그들이 모두 물러가자 조조는 정자 난간에 기대 원소를 생각했다. 금세 그의 준수한 얼굴과 늠름한 자태가 떠올랐다. 사세(四世, 사대) 에 오공(公)을 냈다는 명문의 후예로, 그의 고조부 원안(袁安)은 장제 때 사도(司徒)를 지냈고, 증조부 원경(袁京)은 촉군(蜀郡) 태수, 종증조부 원창(袁敞)은 사공(司空)을 지냈다. 조부 원탕(湯) 역시 벼슬이 태위에 이르렀는데, 아버지 원봉(袁逢)은 그 셋째 아들 로 역시 공(公)에 올랐다. 그러나 원소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일찍 죽은 백부 원성(成)의 양자가 되어 그 뒤를 잇게 되니, 나기 도 전에 아비를 잃은 꼴이 되어 특히 증조부와 조부 이공(公, 원소 의 할아버지와 종조부)의 사랑을 받았다. 스물도 채 안 된 원소를 낭 (郞)을 삼아 좌우에 두었다가, 스물을 넘기기 무섭게 복양(濮陽)의 장(長)을 제수받게 해준 것이 그 사랑의 표시였다. 원소 또한 그들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아 약관에 벌써 깨끗한 이름을 널리 얻고 있 었다.
조조와 원소가 처음 만난 것은 조조가 한창 분방한 생활을 즐기 고 있던 열여덟 살 때였다. 주먹과 분탕질로 몇 년 패국 일대를 휩쓸 고 다니다 낙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자마자 둘은 곧 십년지기처럼 친하게 되었다. 하나는 오랜 명문의 후예요, 하나는 탁류인 환관 가문 출신이지만 남다른 포부와 씩씩한 기개에 서로 뜻이 잘 맞았던 듯하다.
원소와 함께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리자 문득 조조의 입가에 가벼 운 웃음이 어렸다. 원소는 집안에서는 양가의 자제였지만 조조와 어 울리면 곧잘 저잣거리의 어떤 무뢰배에 못지않은 장난을 치기도 했 다. 언제나 예의범절에 얽매여 지내는 원소에게는 그런 것에 구애받 지 않는 조조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만큼, 조조 또한 근엄한 가문에서 자라난 공자(公子)를 저자 바닥으로 유혹해내 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우연히 시집가 는 색시의 가마를 보게 된 그들은 그 색시를 훔쳐다 겁탈하자는 데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 원하면 거의 안 되는 것이 없는 명문 부호의 아들들이 가져볼 수 있는 호기의 일종으로, 반드시 그들의 방탕이나 악성과 연관지을 수만은 없는 장난이었다.
새색시의 가마를 따라가며 궁리를 거듭하던 그들 둘은 드디어 한 꾀를 생각해냈다. 가마가 들어가는 집까지 확인하고 다시 마을 어귀 로 나온 그들은 혼례식이 한창 진행될 때를 기다려 그곳에 있는 짚 더미에 불을 지른 뒤, 헝클어진 머리와 풀어진 옷자락으로 헐레벌떡 잔칫집으로 뛰어들어가 외쳤다.
“비적이다. 대량산(山) 도둑 떼가 내려왔다!”
그렇게 근처에서 잔인하기로 이름난 도둑들의 이름을 팔았다. 혼 례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놀란 사람들은 허겁지겁 사 방으로 흩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입구에서는 연기가 치솟고, 달 려온 두 젊은이는 헝클어진 머리에 풀어헤친 옷자락이 영락없이 도 둑 떼에게 쫓겨온 듯 보였다. 거기다가 쳐들어온 도둑 떼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잡듯 끊어놓는다는 그 무서운 대량산 패거리가 아닌가. 그 틈을 타 조조와 원소는 놀라 기절한 신부를 업고 사람들이 간 쪽과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을을 몇 발 벗어나기도 전에 뜻 아니한 일이 벌어졌다. 짐승을 잡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일 부러 파놓은 것인지 아니면 저절로 생긴 구덩이인지는 모르나 한 길 이 넘는 구덩이에 원소가 빠져버린 게 그랬다. 원소가 다시 나오려 고 했지만 사방이 가시덩굴로 둘러막혀 있어 손댈 곳이 없었다.
그사이 속은 것을 알아차린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손에 손에 쇠 스랑이며 몽둥이를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조조는 들쳐 업 고 있던 새색시도 팽개치고 원소를 끌어내려 하였으나 역시 가시덩 굴 때문에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거기서 다시 조조는 한 꾀를 생각 해냈다.
“사람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몰려오고 있네. 잡히면 꼼짝없이 비 적으로 몰려 맞아 죽을걸세.”
조조는 먼저 원소에게 그렇게 겁을 주어놓은 다음 몰려오는 사람들 쪽을 향해 소리쳤다.
“도둑이 여기 있다! 신부를 겁탈하려고 한다!”
그러자 정말로 다급해진 원소는 아픔도 잊고 가시덩굴을 휘어잡아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나중에 원소의 손을 보니 마치 고슴도치 등처럼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뒤로도 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어울렸다. 그러다가 깨달은 바 있어 조조가 먼저 가재(財)를 뿌려 효렴 벼슬을 산 뒤 낙양 북부도 위가 되고, 이어 원소가 복양의 장이 되어 떠남으로써 둘의 왕래는 잠시 끊어졌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열정은 무엇이었던가. 원소와의 이일 저일을 회상하던 조조는 문득 그 자유분방하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열 두엇부터 스물이 되던 때까지 그는 실로 자신도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휘몰려 보냈다. 어떤 때는 병서에 미치고, 어떤 때는 시사(詞) 에 미쳤으며, 무예에 미치고, 싸움에 미치고, 속이고 놀리는 일에 미 치고, 여자에 미치고, 춤과 노래와 술에 미치고, 사냥에 미쳤다. 잠시 라도 무엇엔가 미치지 않고는 몸과 마음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 다. 그의 내면을 뜨겁게 휘몰고 있는 그 정체 모를 불꽃을 알 리 없 는 사람들에게는 방탕이요, 타락이요, 행악으로밖에 비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 바람에 미움도 많이 사고 의혹도 많이 샀다. 특히 어릴 때부터 한 숙부에게 미움을 받아 자칫하면 부자간의 의마저 상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숙부가 조조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형인 조에게 나쁘 게만 일러바친 탓이었다.
조조는 숙부와 아버지를 이간시켜 자신에 대한 험담을 아무런 효 과 없이 만든 일을 떠올리고 다시 한번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열너댓 살 때의 어느 날이었다. 뜰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고 있는데 그 숙 부가 못마땅한 얼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조조는 갑자기 한 꾀 를 생각해내고 활을 내던지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간질병 환자의 흉내를 내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놀란 숙부가 뛰어들어가 형에게 그 일을 고했음 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조숭이 놀라 달려왔을 때 조조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옷에 먼지 하나까지 털어낸 뒤 단정한 차림으로 활쏘기에 열중 하고 있었다.
“제가 언제 그런 모진 병을 앓았습니까? 언제나 저를 못마땅히 여 기시는 숙부님께서 또 지어낸 말이겠지요.”
그것이 의아해 묻는 아버지 조승에게 한 조조의 대답이었다. 그러 자 그 뒤부터 조숭은 아들에 관한 아우의 험담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다.
“나는 다만 스스로를 지키려 했을 뿐인 것을…………….”
조조는 아직도 서먹한 기색이 있는 아버지와 숙부 사이를 생각하고 새삼 미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중얼거렸다.
“사람은 어떤 경우이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이어 조조는 그 시절의 패거리들을 떠올렸다. 함께 데리고 온 종 제 홍(洪)과 하후돈 외에 종제 인(仁), 하후연, 악진(樂進), 이전(李 典), 허유(許) 등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 는 조인, 무골이면서도 침착한 하후연, 체격은 작으나 당차고 불 같 은 악진, 배움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즐기던 이전, 사람은 경박해도 재주는 빼어난 어릴 때부터의 친구 허유, 모두가 형제보다도 더 정답고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그러다가 조조는 문득 현실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 사소하고 부질없는 열정들을 모두 합쳐 세월과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가 치 있는 일에 바치고자 나는 그 잔치 같은 나날과 정다운 벗들로부 터 떠나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충과 의였다. 어렸을 적에는 그 낡은 가르침이 어리석게 보인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이루어져버린 세상 에서는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살이의 덧없음을 이겨나갈 수 있는 보람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 삼 년 나는 무엇을 얻었 는가…………….
원소가 종제 원술과 함께 조조를 찾은 것은 해가 저문 뒤였다. 조 조는 오후 내내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의 울적함을 털어버리고 반갑게 그들 종형제를 맞았다.
언제 봐도 미장부(丈夫)요 늠름한 원소의 풍채였다. 그에 비하 면 나름대로는 어지간한 원술조차도 어딘가 뒤틀리고 비뚤어져 보 일 정도였다. 그 원술에게조차 용모에 대해서는 은밀한 열등감을 느 끼는 조조로서는 원소의 그같이 빼어난 용자가 언제나 사세오 공이라는 그 가문 못지않게 쓰라린 열등감의 원인이 되곤 했다. 지 난날 조조가 이따금씩 원소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곤 한 것은 어쩌 면 그런 열등감에서 비롯된 공격 심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두 사람의 우의가 상하는 법은 없었다. 원소는 원 소대로 조조의 활달한 기상과 남다른 임기응변의 재능, 박람강기 (博覽强記)등을 높이 사고 있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도 아직은 두 사람의 이상과 경륜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심하는 바가 같았으며, 기뻐하는 바가 같았고, 가고자 하는 길과 이르고자 하는 데가 같았다.
그런 두 사람에 비하면 원술은 아무래도 한걸음 처지는 인상이었 다. 그 역시 원소와 비슷한 시기에 알게 되었고 또 그때 이미 그는 협행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얻고 있었으나, 조조는 진작부터 그의 좁은 국량과 얕은 안목을 보고 깊이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원술 또한 종형에 미치지 못해 조조가 자기보다 못한 점은 얕보았고 나은 점은 시기했다. 거기다가 원소도 종제보다는 조조를 높이 쳐 자연 원술은 두 사람의 교분에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그쳤다.
“그래 천하에 맑은 이름이 드높은 복양의 장께서 임지를 두고 낙 양엔 어인 행차신가?”
조조는 수인사가 끝나고 자리를 정하기 바쁘게 원소에게 그렇게 물었다. 원소도 빙긋 웃으며 조조의 말을 받았다.
“낙양 북부도위의 매서운 이름은 멀리서도 들었네. 그래 십상시의 아재비를 때려죽인 오색 몽둥이는 아직 건재한가?”
“원본초의 성원 덕택에 무사하다네. 복양은 어떤가?”
“나는 장 노릇을 그만두었네.”
“그럼 이공(公)께서 자네를 경직(京職)으로 불러들이신 건가?”
“자모(母)께서 자리보전을 하고 계시네. 그동안 못 다한 자식의 도리나 할까 하고……………”
“그렇지만 본초, 자네 같은 인재가 탕재나 달이며 집안에 박혀 있
어도 좋은 세상 같지는 않은데….”
“고을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푸는 것도 좋은 일이네만, 뿌리의 깊은 병을 두고 잎과 잔가지만 보살펴 어찌 그 나무를 살릴 수 있겠나?”
“뿌리의 깊은 병이라면……?”
조조는 마음속에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렇게 물었다. 그때 곁에 있던 원술이 결기 서린 목소리로 원소를 대신했다.
“재주 하나로 낙양성을 떠르르 울리게 한 맹덕(德)이 어찌 그건 모르시오? 지금 세상이 천자의 것이오? 제후의 것이오? 백성들의 것이오?”
“그야 그 모두의 것이 아니겠소?”
조조는 가까스로 민망스런 기색을 숨기면서 그렇게 반문했다. 그 러나 원술은 그런 조조에 아랑곳없이 내뱉었다.
“틀렸소이다. 지금 천하는 수염 없는 내시 놈들의 것이오. 내 십상 시의 하나인 후람(侯覽)을 예로 들겠소. 후람 일가가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큰 저택이 전국에 모두 삼백팔십여, 그중에 대궐이 무색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것이 열여섯이나 되오. 또 땅은 천경(頃, 약 삼백 만 평)에 금은이 오백 근, 비단이 만 필이나 되오. 천자도 부럽잖을 재물인데, 그런 큰 후람이 대궐 안에만도 열 명, 작은 후람은 대궐 바깥에 수십 수백이 되오. 어찌 이 천하를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소?”
그 작은 후람 가운데는 조조의 부친 조숭 같은 이도 들 터였다. 그 러나 원술은 제 열에 받쳐 결연히 덧붙였다.
“이제 급한 것은 먼저 그 수염 없는 내시 놈들부터 쓸어버리는 일이오. 본초 형은 숙모님의 병환을 핑계대고 계시지만 실은 그 일을 위해 복양의 장을 내던지고 낙양성으로 돌아오신 것이오. 이 원술도 부족하나마 힘을 다해 본초 형을 도울 것이오.”
조조의 감정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태도였다. 그때 원소가 훤한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그런 원술을 나무랐다.
“너는 나이 스물을 넘기고도 여전히 말을 제대로 못하는구나. 환 관이라고 어찌 하나같이 후람의 무리뿐이겠느냐? 멀리는 태사공( 史公, 사마천), 용정후(龍亭侯, 채윤) 같은 이가 있고 가까이는 비정후 (費)같은 분이 있지 않느냐?”
비정후는 바로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다 음 원소는 민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조조를 향했다.
“아우 공로가 혈기가 지나쳐 말을 함부로 한 것 같소. 맹덕은 너 무 괘념치 마시오.”
그러자 조조가 얼굴을 활짝 펴며 껄껄 웃었다.
“공의(公) 앞에서는 사(私)를 죽여야 하는 법이지. 내 이미 천하 인(天下人)이고자 하면서 어찌 원공로의 의분을 허물하겠나? 오히려 본초가 그렇게 말해주니 감격할 따름일세.”
너무 희비의 엇갈림이 빠른 데다 웃음소리가 높고 가벼워 뒷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간사하다는 평까지 들은 조조 특유의 감정처리였다. 원술도 그제서야 조조 앞에서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 었던지 머뭇머뭇 사과했다.
“바른말 한 죄밖에 없는 영창(永昌) 태수 조앵이 맞아 죽고, 다시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던 청의들이 모조리 쫓겨난 걸 보고 그만 내 가 너무 격했던 것 같소. 맹덕, 너무 껴듣지 마시오.”
그때 마침 술상이 들어와서 자리는 별 어색함 없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것으로 벌써 원씨(氏) 형제들의 심상찮은 변화를 직감했다.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으면서 그 변화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동정하며 강개에 젖어갈수록 원술은 거침이 없어졌다. 평소에는 금기로 되어 있는 제실(帝室) 자 체에 대한 불만도 서슴없이 털어놓았고 때로는 십상시보다도 그들 의 농간에 놀아나는 어리석고 무능한 황제를 서슴없이 매도하기까 지 했다. 입이 무겁고 속이 깊은 원소도 그날만은 이상했다. 간간 원 술의 지나침을 억누르기도 하고 말머리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도 했 지만, 내심으로는 원술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한 증 거가 어지간히 술이 오른 뒤에 원소가 불쑥 한 말이었다.
“상(商, 은나라)은 성탕(湯)같은 성인의 치세를 물려받았으나 목 야(牧野)한 싸움에서 천하를 주(周)에게 물려주었고, 항우는 능히 진(秦)을 멸했으나 마침내는 우리 고조(高祖, 유방)에게 천하를 내주 지 않을 수 없었네. 맹덕은 그 까닭이 어디 있다고 믿는가?”
갑작스러운 물음이긴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원소의 눈길에는 은밀히 조조를 살피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모르는 체 대답 했다.
“그거야 인의와 덕에 있지 않겠나? 주나라는 이미 천하를 셋 중에 둘이나 손에 넣고서도 오히려 상나라를 섬겨 그 포학무도함이 그치 기를 기다렸고, 우리 고조께서도 먼저 입관(入關)한 공이 있으나 항 우에게 몸을 낮추어 오히려 천하를 양보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주(紂, 은나라 마지막 천자)가 포학무도함을 그치지 않으니 하늘은 가죽 띠에 그 뜻을 밝혀 [] 무왕(武王)으로 하여금 주()를 치게 했고, 항우는 망령되이 자신을 높여 천하를 돌보지 않으니 마침내 우리 대 한(漢)에게 천하가 넘어온 것일세.”
“맹덕은 참으로 제왕 되는 이가 그 한 몸에 지닌 덕만으로 천하를 얻었다고 믿는가?”
그렇게 묻는 원소의 눈길은 한층 세밀하게 조조를 살피고 있었다. 조조도 대강 원소의 뜻을 짐작했으나 짐짓 천연스레 대답했다. “그렇네. 그 덕을 믿고 모여드는 백성들의 힘이 바로 천명(天命) 아니겠는가?”
그러자 원술이 갑자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형명(名)과 법술(法術)을 중시하고 병가에 밝기로 이름난 맹덕 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째 믿기어지지 않는구려. 내 보기에 백성들 이 따른 것은 그 덕이 아니라 힘이었던 것 같소만………….”
“원공로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백성들이 상나라를 버리고 주나라를 따른 것은 문왕(文王), 무왕 (武) 두 대에 걸쳐 쌓인 주의 힘을 택한 것이요, 항우를 버리고 우 리 고조를 따른 것은 장량(張), 한신(韓信), 소하蕭何)등으로 드러 나는 힘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오.”
자못 거침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조조를 한층 놀라게 만든 것은 그런 원술의 말을 받는 원소였다.
“아우는 힘을 오병(五兵)과 삼군(三軍)만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어찌 백성들이 의지하고자 하는 바가 그뿐이겠는가? 나는 이 몇 해 복양의 장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이 무엇에 가장 끌리기 쉬운가를 직접 보았네. 따뜻이 입히고 배불리 먹여주는 자, 그가 헐벗고 굶주린 백 성들이 가장 우러르며 따르는 자일세. 오병과 삼군을 위주로 하는 자를 따르는 백성은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부류인데, 이런 세 상에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네.”
실로 원소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사세오 공의 명문에 나서 학문과 안목을 길러온 그가 의식(衣食)을 덕(德)에 앞세운 까닭이었다. 약관에 벌써 학덕을 겸비하고 관한 군자의 풍 도가 있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그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현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안연(顔淵, 『논어』의 편명)편에서 공자가 다스림의 요체로 지적한 식(食)·병(兵)·신(信) 가운데서, 신은 백성들 쪽에서는 믿음이지만 다스리는 이 쪽에서는 덕이라고 해석했네.”
조조는 묘하게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계속하여 물었다. 공자는 자공貢)에게 다스림의 요체로 그 세 가지를 말하 고 그 가운데서 믿음[信]을 가장 높이 치고 있었으나, 조조는 오히려 그것을 태평성대에나 들어맞을 치세(世)의 공론(公論) 정도로만 여겨온 터였다. 그러나 원소는 거꾸로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 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슴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건 너무 고루한 유자(儒者)들의 해석일세. 우리가 이미 백성들 을 앞세웠으니 아우 공로가 말한 병(兵)도, 내가 말한 의식(衣食)도 모두가 백성들 쪽에서 본 그 신(信)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네. 그리고 그 경우에 덕(德)은 오직 평온한 치세에나 백성들이 그 믿음의 대상으로 택하리라는 게 내 숨김없는 믿음일세.”
그 말을 듣고서야 조조는 확실하게 옛 친구의 변모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한 지방 관리로서 그가 백성들 사이에서 본 것 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몇 년 전 유가의 이상으로만 세 상을 바라보던 그 순진무구한 귀공자는 아니었다.
그가 본 백성들의 질곡과 한나라 황실의 부패 및 무능은 그의 혈 관에 피가 되어 흐른다고 해도 좋을, 대를 잇는 충성심에 깊은 상처 를 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원소의 변화에 비하면 불경(不敬)이라고 해도 좋을 원술의 다음 말조차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렇소. 사실 따지고 보면, 백성들의 충성이란 것도 자기가 나라 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오. 믿음이라고 그 충성과 다를 리 있겠소? 그럴진대 골짜기마다 생업에 뜻을 잃고 떠도는 유민(流 民)들이 가득하고 논두렁 밭두렁을 베개 삼아 굶고 병들어 죽은 시 체들이 즐비한 이런 세상에 어찌 형체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 덕 같 은 것으로 백성들의 믿음을 살 수 있겠소?”
“그렇소이까? 민생의 어려움이 그토록 심하단 말씀이오?”
“금문(門) 가까이 있다 보니 맹덕의 밝은 눈과 귀까지 가리워진 모양이구려. 비하여 말하면 지금 세상의 어둡고 탁함이 걸(桀), 주 ()의 시대에 비하여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얘기가 거기까지 발전하자 조조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자리가 은밀하고 세 사람이 허물없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자칫 말이 새어나가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로가 강개하는 바를 들으니 실로 이 몸의 가슴도 울분으로 차 오. 하지만 그럴수록 젊은 우리가 힘을 합쳐 간사한 역적들을 내치 고 쓰러져가는 한조(漢朝)와 도탄에 빠진 창생을 구해내야 하지 않 겠소?”
조조가 대강 그렇게 원술을 달래고, 이어 원소도 술기운에 말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던지 사촌아우의 과격한 말을 가로막았다. “맞다. 우리가 한 말은 그저 탁상(卓上)의 영웅론(英雄論), 지금의 세상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로는 너무 무엄한 데가 많다. 맹덕의 말 이 옳다. 공로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라.”
그리고 조조를 향해 술잔을 쳐들며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맹덕도 이제 시국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드세. 몇 년 만의 이 자리를 쓸데없는 강개로만 채울 수야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이제 한번 부중(中)으로 들어가면 가자(慈)께서 다시 쾌차하실 때까 지는 입에 술잔을 댈 수 없는 처지라네.”
하지만 술자리가 파하고 그들 원가의 형제가 돌아간 뒤 조조는 한층 더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울적해졌다. 술자리에서의 일시적 인 감정을 토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조조가 어떤 육감으로 느끼는 것은 그들 형제가 다시는 한조를 위해 묘당(廟堂)으로 돌아오지는 않으리란 것이었다.
거기서 조조는 새삼 자기가 택한 길을 되돌아보았다. 점점 거나해 지는 취기 가운데서도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글러버린 길을 골라 고집스레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일었다. 그러나 조 조는 일생을 남에 대한 의심으로 고통당했지만 자신을 향한 믿음에는 별로 흔들림이 없던 사나이였다. 텅 빈 술상에 혼자 남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특유의 차고 조용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사백 년의 세월이 가진 힘을 안다. 나는 그 힘을 거 스르기보다는 그 힘에 의지해 내 뜻을 이루리라. 나는 결코 한실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한 달 뒤 고향인 패국 초현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조조는 그것을 그저 어지러운 세상에 흔히 떠도는 황 당무계한 유언(流言) 정도로 생각하고 달리 듣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의 행동과 신념은 오직 한(漢)에 대한 충성심에 바탕하고 있을 뿐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