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4화 : 영웅, 여기도 있다
영웅, 여기도 있다
하비(下) 서북 태산 줄기가 남으로 흐르다 문득 맺혀 이룬 어떤 산골짜기였다. 골짜기 바닥 한때는 논밭이 있었던 곳인 듯 수북한 잡초 사이로도 군데군데 논두렁과 밭둑의 흔적이 있는 제법 넓은 벌 판으로 한 무리의 인마(人馬)가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합쳐 백오십 이나 될까. 이십여 기의 기마를 앞세운 보졸들이었다. 복색으로 보 아서는 관군 같았지만 앞선 대여섯 기를 제하고는 갑주도 병장기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서라.”
갑자기 맨 앞에 선 장수가 말고삐를 당기며 나직이 외쳤다. 아직 스물서넛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청년 장수였다. 곰의 어깨에 범의 허리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날렵하면서도 굳세어 보이는 체격에 위엄 가득한 얼굴이 한눈에 비범함을 알아볼 수 있을만했다.
“한당(韓), 여기쯤이 어떤가?”
군사를 멈추고 다시 한번 주위의 지세를 살피던 그 청년 장수가 문득 곁에 선 마궁수 차림의 군관에게 물었다. 역시 스물두엇 정도 의 청년인데 한눈에 타고난 무골(武骨)로 보였다. 그도 대장을 따라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역시 적을 유인해볼 만한 곳입니다.”
그러자 청년 장수는 다시 군사들을 돌아보고 나직이 소리쳤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여기서 쉬도록 하라. 각자 병장기를 놓고 말 탄자는 말에서 내려라. 눕고 싶으면 눕고 앉고 싶으면 앉되, 눕더라 도 잠들어서는 안 되며, 앉더라도 각자의 말과 병장기로부터 떨어져 서는 안 된다. 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좋으나 취해 이곳이 싸 움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사전에 일러둔 것을 한 번 더 군사들에게 깨우쳐주는 말투 였다. 그리고 자신도 말에서 내려 마른 풀숲에 털썩 앉으며 투구를 벗었다. 멀리서 보아서는 문란하기 짝이 없는 장졸들의 휴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번득이는 눈은 끊임없이 앞 골짜기의 변화를 살피고 있 었다.
그 청년 장수의 이름은 손견堅), 전국시대의 저 유명한 병법가 (兵法家) 손무자(孫武)의 후예였다. 오군(吳郡) 부춘(春) 사람으 로, 그는 출생부터가 여러 가지 신이한 설화에 싸여 있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오국(吳國, 군이 되기 전에는 분봉국이었다)에서 벼슬하며 부춘에 살았는데, 죽어서는 그 성 동쪽을 장지(葬地)로 삼았다. 어느 날 그 무덤에 괴이한 광채가 솟아 구름을 오색으로 물들이며 하늘까지 뻗고, 주위 수십리에 가득했다. 그걸 본 마을의 나이 든 이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결코 예사 기운이 아니다. 반드시 손씨(孫氏)가 흥할 것이다.”
했다. 그 무렵 그의 어머니가 그를 뺐는데, 창자가 쏟아져 오창문 (吳昌門)에 감기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며 이웃 아낙에게 물었더니 그 아낙은 이렇게 위로했다.
“반드시 그 꿈이 좋지 않은 징조인 줄은 어떻게 알겠소?”
그러다가 아이를 낳아보니 용모가 비범하고 성정이 활발해서 안 심했다고 하는 게 그 설화의 대강이었다.
손견의 영명함이 처음으로 인근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전당(錢塘)에 이르러보니 해적들 이 지나가는 배를 털어 방금 물가에서 재물을 나누는 중이었는데 배 들이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손견이 부친에게 말했다.
“이 도적들은 가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소자가 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네가 도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부친은 그렇게 말렸으나 손견은 듣지 않고 배에서 내려 한 손으 로는 칼을 빼들고 한 손으로는 여러 병사를 지휘하는 듯한 시늉을 하며 외쳤다.
“저놈들을 모조리 사로잡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를 본 도적들은 관병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온 줄 알고 빼앗은 재물을 버려둔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버렸다. 손견은 그들을 추격 하여 괴수의 목 하나를 잘라 돌아오니 그 부친이 크게 놀랐다. 또 소 문을 들은 태수는 겨우 열일곱 살인 그를 불러 현위에 가임(假)했 을 만큼 손견은 그 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다음은 회계(會稽)의 요사스러운 도적 허창(許昌)을 친 일이었 다. 허창은 구장(句)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양명황제(陽明皇 帝)라 칭하면서 그 아들 허소韶)로 하여금 여러 현을 선동케 하니 한때 무리가 만(萬)을 넘었다. 이때 손견은 군(郡) 사마로서 정병 천 여 명을 모아 다른 주군(州郡)들과 함께 그들을 깨뜨리는 데 크게 용 명을 떨쳤다. 희평 원년(元年)의 일로 그때부터 손견은 조정에까지 알려진 주군의 관리가 되었다. 자사 장민(臧)이 손견의 공을 상주 하니 천자는 그에게 먼저 염독(鹽瀆)의 승(丞)을 제수하고, 다시 몇 해 뒤에는 우이(肝)의 승으로 옮겼다. 방금 손견이 이끌고 온 군사 는 바로 그 우이의 현군(軍)이었다.
원래 그 산은 도둑 떼가 산채를 열 만한 곳은 못 되었다. 태산의 줄 기이고 산세가 다소 험하다고는 해도 평야 깊숙이 내려온 야산에 가 까워서 지키기에도 도망치기에도 그리 이롭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 었다. 따라서 기껏해야 열 명 안쪽의 도둑들이 바위틈에 숨어 살며 지나가는 길손의 봇짐이나 터는 정도였는데, 몇 달 전 장독목(張獨 目)이란 도적 괴수가 졸개 백여 명을 이끌고 그곳에 자리 잡은 이래 차츰 세력이 불어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부근을 휩쓴 기근으로 늘어 난 유민들이 가세한 탓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다. 먹여야 할 입이 불어나자 산기 슭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길손의 봇짐을 털어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된 도적들이 산을 내려와 인근의 부호들과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 다. 산세 험한 골짜기마다 약간은 붙어 있게 마련인 산적들이라면 못 본 체할 수도 있었지만, 마구잡이로 마을을 털어 세금을 거둬들 일 재원을 고갈시키거나 경사(京師)에 유력한 족당을 가진 토호들을 건드려 조정의 문책을 당할 지경이 되고 보니 주군에서도 더는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하비 태수는 천 명이 넘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장독목이란 자는 예사내기가 아니었다. 지세를 이용한 매복계로 한 싸움에 토벌 군을 깨뜨려버렸다. 그렇게 되고 보니 난처해진 것은 하비 태수였 다. 조정이 힘이 있다 해도 불과 몇백의 도둑 떼 때문에 관군을 요청 할 수 없는 일인 데다, 자칫 잘못 보고했다가는 홍도문(弘道門, 주로 관직을 사려는 사람이 드나들던 궁성의 문)에 내놓을 관직만 늘려주기 십 상이었다. 그렇다고 수천, 수만의 대군을 풀 힘도 하비 태수에게는 없었다. 징병제가 제대로 실시될 수 있을 때 같으면 농민군 몇만은 어떻게 긁어모을 수도 있겠지만, 토지가 몇몇 부호들에 몰려버린 상 태에서는 군역을 담당한 양민의 수가 그리 많지 못했다. 방법은 모 병뿐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또 재정이 넉넉지 못했다.
그때 태수가 생각해낸 것이 우이의 승인 손견이었다. 아직 나이는 약관이지만 그 용맹은 이미 조정까지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가, 비 록 조그만 현의 승이긴 해도 휘하에는 회계 요적 허창을 토벌할 때 의 용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손견은 도적을 깨뜨린 뒤에도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용사들 을 자기가 승이 된 현의 향관(官)이나 현군으로 편입시켜 몇 년째 고락을 함께해왔다. 글을 읽은 자는 현령에게 청해서좌나 색 부, 소송과 징세를 담당)에 가임(假任)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갑졸 과 유요游, 치안을 담당)에 편입시키는 식이었는데 그 수가 백여 명 에 이르렀다. 얼핏 보아 그 백여 명은 대단한 숫자가 아닌 것처럼 보 이지만, 그들 모두가 일당백의 용사일 뿐만 아니라 작은 군사를 스 스로 부릴 만한 재주도 있어, 일이 벌어지면 아무렇게나 모병을 해 도 금세 정비된 군세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도 수천을 거느린 것 과 다름없었다.
태수의 명을 받은 손견은 기꺼이 거기에 따랐다. 그날로 자신의 오랜 부하들과 향리의 장정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군사를 합쳐 삼백 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간 그는 먼저 하비성에 들러 지난번 토벌전 에서 살아남은 장졸을 찾아 도적들의 형세와 그곳의 지리에 관해 물 었다. 패전으로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그들이라 기억에 과장도 있고 혼란도 있었으나 도적들에 관해 대강은 짐작이 갔다. 손견은 다시 날랜 부하들을 나무꾼이나 농부로 가장시켜 그 산 주위를 한 번 더 살핀 뒤에야 계책을 정하고 토벌에 나섰다. 태수가 얼마간의 병졸을 더 붙여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자신이 이끌고 온 삼백 명만 거느린 채였다.
손견이 이제 펼치려 하는 것은 일종의 유인계였다. 험한 산골짜기 에 숨어서 대항하는 도적들을 잡는 데는 그 열 배의 군세가 필요했 지만, 그들을 평지로 끌어낼 수가 있다면 반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 그가 일부러 군사들에게 문란한 휴식을 취하게 한 것도 그런 유인의 수단이었다.
도적들은 뜻밖으로 신중했다. 진작부터 손견의 군사들이 접근하 는 줄 알았을 것이련만, 한 식경이 지나도 움직일 줄 몰랐다. 뒤따라 오는 큰 군사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산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손견이 군사들을 흩어놓은 지 거의 한 시각이나 지난 뒤였다.
“이제 도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왼편의 칡덩굴 우 거진 비탈에 살기가 있습니다.”
한당이 문득 활과 화살통을 끌어당기며 손견에게 말했다. 그러나 손견은 누운 자세를 고치지 않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오른편 골짜기에도 한 떼가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엷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빨리 군사를 정돈하십시오.”
“좀더 기다려라.”
“만약 도적들이 급히 짓쳐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걱정 마라. 아직 오륙백 보의 거리가 있다. 날랜 말로 달려와도 병장기를 잡고 말에 오를 시간은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정공(公) 과 황공(公)에게도 시간을 벌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손견이 그렇게 말하자 한당도 더는 서두르지 않았다. 지난 몇 년 손견을 따라다니면서 저절로 몸에 밴 믿음 때문이었다.
한당의 자는 의공(公), 멀리 요서 영지가 고향이었다. 일찍 관내로 들어와 이리저리 흘러다니다가 열여덟 살에 손견을 만났다. 당시 손견은 회계 요적 허창을 치기 위해 의군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마 침 오군(吳郡)을 떠돌던 한당이 그의 막하를 찾아들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글은 별로 배우지 못했지만 말타기와 활쏘기에는 능하고 완 력도 남다른 데다 대도(大刀)를 잘 써서 한당은 금세 용사들 가운데 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나이가 비슷한데도 상하를 흐트리는 법이 없고, 명을 받으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니, 자연 손 견의 아낌을 받아, 그 뒤 오 년째나 손견의 좌우에서 손발이 되어 일했다.
한당은 허창이 죽은 뒤에도 손견 곁에 머물고 있는 용사들 가운 데서, 향관조차 사양하고 순수하게 손견의 사람으로만 남아 있는 유 일한 사람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대단찮은 향직(鄕 職)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손견만을 위해 일하는 쪽이 더 보람 있게 여겼다. 이 사람이라면 내 삶을 한번 의탁해볼 만하다. 그것이 손견 을 볼 때마다 느끼는 한당의 기분이었다.
“한당, 이제 말에 올라 병졸들을 정돈하라.”
갑자기 손견이 그렇게 소리치며 자신도 훌쩍 말등 위로 뛰어올랐 다. 그러자 한당이 무어라고 전할 필요도 없이 어지럽게 흩어져 쉬 고 있던 병졸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꼬나쥐고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 다. 썩을 대로 썩고 무기력할 대로 무기력한 관군으로는 믿기 어려 울 만큼 민첩한 대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차림도 겉으로는 허름한 베옷이었지만 안으로는 대개 갑옷을 받쳐 입은 채였고, 무기 도 질질 끌고 다니거나 팽개쳐두었을 때는 허술해 보였지만 힘 있게 잡고 선 걸 보니 각기 특색 있는 매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맞은편 골짜기 쪽에는 별달리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왼편 칡덩굴 우거진 비탈도, 오른편의 굽은 골짜기도 여전히 무거운 살기만 감돌 뿐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주공, 무슨 일이십니까?”
한당이 의아로운 듯 물었다. 그러자 손견은 말없이 손을 들어 맞 은편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반 길도 안 되는 떡갈나무 등걸로 덮여 있어 많은 군사를 숨기기에는 알맞지 않은 곳이었다. 그 바람에 소 홀히 보아 넘겼던 것인데 손견이 손가락질하는 걸 보니 확실히 어딘 가 이상했다. 그러나 정확히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몰라 살피고 있 는데 손견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 떡갈숲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떡갈 가지와 잎새로 몸 을 가린 적은 아마도 세 갈래 방향에서 일시에 쳐내려오거나 우리를 좀더 깊이 유인해 에워쌀 계책인 것 같다.”
“장독목이라는 자, 오랫동안 녹림(綠林)에서 지낸 자임에 틀림없 습니다. 과연 주공의 계책에 말려들지 걱정입니다.”
“만약 며칠 전 크게 관군을 물리친 적이 없었다면 그자는 결코 걸 려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들은 아직 큰 승리에 취해 있다. 이만큼이나 자중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손견은 그렇게 말하고는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 이만하면 태수님께 할 말은 있다. 도적 떼는 우리가 무서워서 깊이 숨어버렸다고 하면 된다. 알겠느냐?” 온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군사들도 정말로 싸움 한번 않고 돌아가는 것이 기쁜 것처럼 일제히 함성을 치며 기뻐했다. 거기에 맞추어 손견은 한 번 더 도적들을 격동케 했다.
“장독목과 그의 천여 졸개들은 우리 백여 명 의군이 두려워 다람 쥐처럼 바위틈에 숨어버렸다고 하자. 태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너희 들에게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계곡에 숨어 있는 도적들뿐만 아니라 멀리 산꼭대기에서 망을 보 고 있는 도적에게까지 또렷이 들릴 만큼 크고 높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함성이 일며 도적 떼가 뛰쳐나왔다. 잠깐 사이에 손견이 거느린 군사의 세 배가 넘는 인마가 골짜기와 비탈에서 뭉개져 내리듯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런 도적들을 흘끗 살 핀 손견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어 자기 군사들에게 명했다.
“겁먹은 듯한 형색으로 도망쳐라, 적을 골짜기 입새까지 바짝 끌 어내야 한다.”
이미 사전에 들은 바가 있는터라 손견의 군사들은 명령대로 움 직였다. 겁먹은 듯 우르르 계곡 바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산적 들은 거기에 더욱 기세를 올려 추격을 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황홀 한 승리의 기억에 취해 마지막까지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조심성을 완전히 팽개쳐버린 추격이었다.
손견은 한당과 나란히 군사들의 꽁무니에 붙어 말을 달리면서도 쉴새없이 반격할 곳을 가늠했다. 그런데 약간 뜻밖인 것은 적에게 오십여 기의 기마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용기백배하여 뒤쫓 으니 적의 보졸들이 완전히 평지로 들어서기 전에 적의 선두 기마와 손견의 후위가 만날 지경이 되었다.
“할 수 없다. 돌아서라. 먼저 말 탄 자들부터 떨어뜨려라.”
손견은 계책보다 앞당겨 군사를 돌렸다. 도적들을 충분히 평지로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달려오는 기세에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있는 만큼 쉽게 돌아서지는 않으리란 계산에서였다. 그러자 손견 쪽에 이 십여 기가 먼저 말 머리를 돌려 적의 기마대를 맞고, 이어 보졸들도 분분히 돌아서서 달려오는 도적 떼를 맞을 채비를 했다.
“오늘 이 적도를 뿌리 뽑고 뽑지 못하고는 오직 정공과 황공에게 달렸구나.”
손견은 한당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이어 아끼는 보검인 고정도(古 刀)를 비껴들고 달려 나가며 외쳤다.
“네놈들은 오군의 손견을 듣지 못했느냐? 누가 나의 이 칼을 받아 보겠느냐?”
그리고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몇 번 칼빛이 번득이기도 전 에 앞서 달려오던 두 명의 적도가 차례로 두 동강이 나 말 아래로 떨어졌다. 한당도 자랑하는 활솜씨로 두 명의 도적을 말에서 떨어뜨 린 후 대도를 휘두르며 적의 기마대 사이로 뛰어들었다. 나머지이 십여 기도 각기 손에 익은 무기를 휘두르며 배가 넘는 적을 마주 쳐 나갔다.
그렇게 되자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되기도 전에 이미 말 위에 남아 있는 적도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적도들도 연신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지는 동료들 때문에 반나마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너무도 급작스레 닥친 사태라 아직도 자기 편이 우세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한 데다 달려온 기세가 있어 쉽게 말 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장독목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다섯 번째의 적도를 베어 떨어뜨린 손견이 다시 산을 울릴 듯이 고함쳤다. 빨리 괴수를 베어 적의 기세를 꺾어놓자는 속셈이었다. 그때 싸우던 적의 기마대 가운데서 한 기가 손견 쪽으로 내달으며 소리쳤다.
“독목룡(獨目龍) 그분은 너 같은 애송이와 창칼을 맞댈 분이 아니 시다. 이 철극戟)이나 받아보아라.”
아마도 애꾸인 저희 두령을 외눈박이 용으로 높여 불러가며 싸움 에 앞장선 그 적도는 지난번 싸움에서 관군에게 빼앗아 입은 듯 제 법 전포까지 걸치고 있었다. 역시 관군에게서 빼앗은 듯한 양갈래 난 철극을 내뻗는데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로웠다. 그러나 손견은 코 웃음과 함께 호랑이같이 미끈한 허리를 틀어 철극을 피하더니 왼손 으로 그자의 허리춤을 낚아채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걸 보고 손견의 보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자를 멧돼지 얽듯 얽고 말았다.
그러자 드디어 말 탄 도적들은 겁을 먹고 저마다 말 머리를 돌리 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퇴각이었다. 어느새 달려온 도적 떼의 보졸 들이 거기까지 몰려와버린 탓이었다. 그들이 물러나는 길은 밀물처 럼 밀려드는 동료들을 짓밟고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때 말을 탄 채 뒤따라오는 도적 떼를 지휘하던 도적 하나가 쫓겨오는 저희 기마 대 앞으로 말을 내달리며 소리쳤다.
“도망치지 마라. 우리가 왔다. 관군은 몇 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김에 돌아서서 달아나려는 도적 하나를 창으로 찔러 떨어뜨리며 더 크게 외쳤다.
“누구든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 돌아서서 싸우라.”
손견이 고개를 들어 살피니 험상궂은 외눈의 장한(壯漢)이었다. 짐작대로라면 그자가 독목룡이라고 불리는 장독목임에 틀림없었다. 검은 준마에 의젓이 앉은 품이 제법 한 무리의 우두머리다운 위엄이 있었다.
“장독목. 게 섰거라. 너는 오군에 손견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손견은 한 소리 외침과 함께 똑바로 그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장 독목도 지지 않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정말로 겁없는 애송이로구 나. 이 독목룡이 어찌 오군의 잔나비 새끼를 알겠느냐?”
하는 호통과 함께 역시 긴 창을 내지르며 마주 말을 달려 나왔다. 그러나 미처 손견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한 마궁수 차림의 장수가 대 도를 춤추듯 휘두르며 길을 막았다.
“이놈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 네놈의 목은 내가 맡겠다.”
바로 한당이었다. 천에 하나라도 손견의 실수가 있을까 하여 스스 로 싸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맞붙는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잠깐 동안에 싸움터 가운데는 두 사람만을 위한 공터가 생겼다. 장독목은 싸움 솜씨에 있어서도 괴수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손견의 휘하에서는 가장 뛰어 난 검수(劍手)인 한당을 맞아 싸우는데도 조금도 밀리는 기색을 보 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졸개들도 다시 힘을 얻어 골짜기 사이의 좁은 평지 에서는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손견은 그런 그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한당과 협격(挾)할까 생각했으나 마음을 돌려 나머지 기마대 를 휩쓸기 시작했다. 다시 손견의 칼이 번득이는 곳에 대여섯 개의 임자 잃은 목이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워낙 수가 많은 도적 떼라 시간이 흐를수록 손견 쪽이 불리해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서편 산기슭으로 한 떼의 군사들이 고함을 치며 쏟아져 내려왔다. 처음 도적들은 자기들 뒤에서 나는 함성이라 자기 편인 줄 알았으나 그 방향을 보자 이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쪽 산 허리 쪽으로는 기수(水)가 감돌고 있어 평소에 지키는 패거리가 없는 곳이었다. 반면 손견군은 그 함성을 듣자 갑자기 힘이 두 배로 불어난 듯 도적 떼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오오, 정보()와 황개)가 때맞추어 와주었구나.”
손견도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당 쪽을 바라보았다. 장독 목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한차례 미친 듯 창을 휘둘 러 한당을 물러나게 한 뒤에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며 졸개들에게 외쳤다.
“산채로 돌아가자. 북쪽 계곡으로 물러나라.”
그리고 말굽에 졸개들이 상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급히 북쪽으로 말을 내몰았다. 우두머리가 그 꼴이니 졸개들인들 성할 리 없었다. 일시에 창칼을 내던지고 역시 북쪽 계곡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한당, 빨리 적 괴수를 쫓으라. 만약 정공과 황공이 앞을 막지 못 하면 이 도적들을 뿌리 뽑지 못한다.”
손견은 그렇게 외치며 스스로 앞장서서 장독목을 추격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서쪽 능선을 타고 내려온 관군은 마치 손 견의 그런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싸움터로 달려오는 대신 먼저 북쪽으로 달려가 좁은 계곡 입구를 틀어막아버렸다.
앞으로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도적들은 거기서 완전히 무 너져내렸다. 아직도 자기들이 머릿수로는 훨씬 우세한데도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해내는 자는 없었다. 간혹 지은 죄가 많은 자는 발악적 으로 돌아서서 관군에 대항하기도 하고 혹은 칡덩굴에 매달려 가파 른 산등성이로 달아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 려 목숨을 빌 뿐이었다.
그러나 장독목을 비롯한 몇몇 우두머리급은 달랐다. 항복해보았 자목이 남아날 리 없고, 그렇다고 말 타고 전포까지 걸친 몸으로 졸 개들처럼 칡덩굴에 매달려 가파른 비탈을 기어오를 수도 없는 그들 은 한층 흉흉한 기세로 길을 열려 들었다. 하지만 길을 막고 있는 관 군도 완강했다. 비록 기수를 건너느라 마필은 없었지만 앞선 두 장 수가 각기 쇠채찍 [鞭]긴창으로 막으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장독목과 몇몇 우두머리는 거기서 다시 한차례 선불 맞은 멧돼지 처럼 날뛰었으나 결국은 뒤따라온 손견의 협격을 받자 차례로 목 없 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황공복(黄公覆) 때맞추어 잘 와주셨오. 하마터면 도적의 괴수를 놓쳐 뒷날의 우환거리를 남길 뻔했소.”
손견은 적도들의 수급을 거두게 한 후, 서쪽 능선을 타고 온 두 장 수들 가운데 좀 나이가 젊은 쪽을 향해 그렇게 치하했다. 그의 이름은 황개로 공복은 그의 자였다. 영릉군(零陵郡) 천릉(泉) 사람이었 는데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가난하고 비 천한 중에서도 큰 뜻을 품어 범용한 이와는 벗하지 않고, 장작을 내 다 팔아 살면서도 항상 서책을 가까이하고 병법을 열심히 익혔다. 나이가 차 군리(郡吏)가 되어 손견이 염독의 승(丞)이 되었을 때는 그 역시 염독의 위尉)로 있었다. 그러나 한번 손견을 본 뒤 그의 인 품에 반하여 손견이 우이의 승으로 옮겨 앉게 되자 그도 태수에게 청을 넣어 함께 우이로 따라갔다. 참을성이 많고 생각이 깊은 데다 한 자루 쇠채찍을 잘 써, 손견도 그를 형제처럼 여기고 일생의 고락 을 함께하기로 한 사이가 되었다.
이번에 손견이 특히 오군에서부터 자신을 따른 용사들을 주어 적 의 뒤를 돌게 한 것도 그런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차가운 기수 를 건너고, 험한 절벽을 기어올라 도적들이 지키지 않는 서쪽 능선 을 타고 내리는 계책을 성공시키는 데는 오군 자제들의 익숙한 물질 외에 그의 참을성과 신중함 또한 꼭 필요한 요건이었다.
“강동(東)의 자제들이 몸을 아끼지 않아 무사히 시각에 맞게 댈 수 있었습니다.”
“강물이 차지 않았소?”
“도적을 없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에 어찌 살가죽이 찬 물에 잠 기는 걸 꺼리겠습니까? 더구나 이 개蓋)는 아직 물질이 서툴러 뗏목 을 엮고서야 기수를 건넜습니다.”
손견의 치하에 어디까지나 겸손한 황개의 답변이었다. 이에 손견 은 다시 황개 곁에 긴 창을 짚고 서 있는 다른 장수를 향했다.
“공에게 먼 길을 돌게 해놓고 곧 후회했소. 차라리 사람이 많아 도적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더라도 황공과 함께 기수를 건너게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오. 그래 도중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소?”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만 황공을 반각(刻)이나 지체케 한 죄가 있습니다. 만일 장군께서 시간을 벌어주지 않으셨다면 크게 일 을 그르칠 뻔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이의 이름은 정보, 우북평(右北平) 토은(土垠) 사 람이었다. 역시 일찍 주군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그 무렵은 황개 와 마찬가지로 우이의 갑졸을 관장하는 현위로 있었다.
손견과는 우이에서 처음 만났지만, 그 몇 년 함께 일하는 사이에 한당보다 더 충실하게 손견을 따르게 되었는데, 인물이 잘생기고 몸 가짐이 바를 뿐만 아니라 지략도 있고 무예도 능했다. 특히 한 자루 철척사모(矛)를 잘 써 황개의 쇠채찍과는 좋은 짝을 이루었다. 이번에는 황개와 달리 약간의 장정을 이끌고 험한 산길을 돌아 적의 뒤를 찌르는 일을 맡았다.
“정공은 너무 겸양이 과하시오. 어쨌든 때맞추어 모진 도적의 뒤 를 끊었으니 공의 이름을 황공복과 나란히 군공의 으뜸에 얹어 모자 람이 없을 것이오.”
“저희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우이 승께서 미리 헤아리 신 바를 크게 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정보는 끝내 그렇게 겸양을 보였다. 사실 그의 말도 전혀 근거 없 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손견이 힘만 믿고 정면으로 도적들을 쳤다 면 적지 않은 희생도 희생이려니와 이처럼 뿌리 뽑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숨어 있다가 치고 형세가 불리하면 산속으로 달아나버리는 것이 지리에 밝은 도적들이 즐겨 쓰는 계략이었기 때문이다.
손무자의 피가 그에게도 흐르는 탓인지는 몰라도 손견은 용맹과 무예에 못지않게 병법에도 밝았다. 따라서 먼젓번 관군이 실패한 까 닭을 세밀히 살핀 끝에 손견이 정한 계책은 바로 방금 도적들을 뿌 리 뽑은 그 계책이었다. 먼저 허술한 군비와 소규모의 병력으로 적 을 방심시켜 골짜기 북쪽까지 끌어낸 뒤, 역시 적이 방심하여 망보 기를 두지 않은 두 갈래 길로 소수의 정병(精兵)을 투입하여 물러날 길을 막고 앞뒤로 들이쳐 섬멸한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보통의 현 군이라면 어림도 없었지만, 허창을 토벌할 때부터 그를 따르는 장정 들을 뼈대로 한 정병을 거느린 손견이었기에 그 계책은 이뤄질 수 있었다.
먼저 날랜 말을 보내어 태수에게 첩보를 전하게 한 손견은 사로 잡은 도적들과 죽은 도적들의 목을 거둔 뒤 하비성으로 개선했다. 은근히 골머리를 앓던 도적 떼를 한 싸움에 쳐부수고 괴수의 목까 지 바치는 청년 장수에게 태수는 놀라움과 아울러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놀라움은 천여 명의 관병으로도 오히려 패했던 도적 떼를 불과 삼백의 장정으로 깨끗이 뿌리 뽑은 때문이었고, 기쁨은 세금의 근원 을 마르게 하는 우환거리를 없앰과 함께 조정의 문책도 면하게 된 데서 온 것이었다.
태수는 크게 잔치를 열어 손견의 삼백 장졸들을 위로하고 적지 않은 비단과 전곡(錢穀)을 상으로 내렸다. 그리고 덧붙여 이르기를, “그대 같은 인재를 우이 같은 작은 고을에서 썩게 할 수는 없다.
마땅히 그대의 공을 조정에 알리려니와, 위에서 허락이 있으면 그대를 이 하비의 승으로 부르리라.”
했다. 뒷날 손견에게 고향인 오군 못지않게 귀중한 근거가 되는 하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손견은 받은 비단과 전곡에 손도 대지 않고 그 싸움에서 고생한 부하들에게 고스란히 나누어준 뒤, 다음 날로 임지인 우이로 돌아갔 다. 그에게 반한 태수가 며칠 더 쉬어가기를 권해도 현의 공무를 핑 계로 마다한 것은 겸손하고 성실한 군리로서의 몸가짐이기도 했으 나, 그토록 서둘러 돌아가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들 책(策)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는 슬기롭고 아름다운 아내 때문이었다. 손견은 한번 야성에 불이 붙으면 범 같은 용맹으 로 싸움터를 누비는 장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겨우 스물셋인, 신혼과 다름없는 시절의 젊은 남편이기도 했다.
손견이 아내 오씨(吳氏)를 만난 것은 열아홉 나던 해였다. 무슨 일 인가로 전당에 들렀던 그는 오경(吳璟)이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다. 이태 전 그곳에서 꾀와 배짱으로 수적賊)들을 쫓고 빼앗긴 재물 을 찾은 일로 널리 이름을 얻은 손견과 친하고자 찾아온 협사俠) 였다. 손견도 그 인물됨이 그리 천박하지 않음을 알고 그와 사귀기 를 구태여 마다하지 않았다.
오경은 원래 손견과 마찬가지로 오군 사람이었으나 그 부친 대에 전당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아직 어릴 때 부모가 나란히 세상을 떠 나 손위 누이 둘과 외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누이가 바로 손견의 아내인 오씨였다.
오씨 역시 그때 이미 그 아름다움과 슬기로움으로 이웃에 널리 알려진 규수였는데 어느 날 오경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된 손견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생전 처음 겪는 기묘한 열병에 들떠버린 손견은 그날부터 그 동생인 오경을 통해 한번 만나 줄 것을 간청했지만 오씨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여자란 출가하기 전에는 오직 부모님의 말씀에 따를 뿐입니다. 저희 남매가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하나, 저희에게는 부모 못 지않게 돌봐주는 숙부님이 따로 계십니다. 그분의 허락이 없이는 그 어떤 분이라도 만나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우를 통한 오씨의 대답이었다. 이에 손견은 할 수 없이 부친을 졸라 그들 남매를 돌봐주는 오항(吳)이라는 이에게 정식으 로 혼담을 넣어보았다. 손견의 부친은 아들의 갑작스런 요구에 놀랐 지만, 알아보니 며느리로 삼아 모자랄 것 없는 규수였으므로 아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오항의 태도 역시 냉담했다.
“그자의 이름은 나도 익히 들었다. 하지만 온당한 이름이 못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혼자서 도적 떼 사이로 뛰어든 걸 용기로 보지 만 나는 오히려 그걸 달리 부르고 싶다. 만약 도적 떼가 어리석지 않 아 일제히 칼을 빼들고 대항했으면 어찌 됐겠느냐? 변변찮은 그 이 름은 물론 목숨조차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시의 혈기를 이기지 못해 부모에게 받은 귀한 몸을 함부로 위태로움 속에 내던지니 이는 가벼움이라 불러 마땅하다. 또 세상 사람들은 그가 도적 떼를 속인 것을 지혜로 보나 지혜와 속임은 전혀 다르다. 속임은 요행을 바라 행하는 거짓이요, 지혜는 어떤 경우에도 어그러지는 법이 없는 일의 바른 꾸밈이다. 그는 요행 거짓으로 도적 떼를 물리쳤을 뿐, 도적들 이 대항해도 이길 수 있도록 일을 꾸몄던 것은 아니다. 간사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다가 더욱 이 혼인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그 두 가지로 뜻한 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더욱 자주 그 두 가지(가벼움과 간사한 꾀)에 의지할 것이니, 그런 자에게 어떻게 네 누이를 맡기겠느냐?”
오항이 오경을 통해 밝힌 거절의 이유는 그러했다. 한편으로 지나 치게 고루한 유자의 관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이치에 닿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에 크게 노한 손견은 그 자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맹세했다. “내 반드시 이 칼로 그 늙은이의 목을 베어 오늘의 이 부끄러움과 한을 씻으리라.”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손견이고 보면 반드시 헛맹 세로 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속으로 은근히 손견을 매 부로 삼고 싶던 오경은 곧바로 그 일을 숙부와 누이에게 전했다. 그 러자 오씨는 조용히 숙부를 찾아가 말했다.
“저를 손씨가氏家)에 출가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찌하여 이 못난 질녀 때문에 화를 취하십니까?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인 듯하오니 그만 허혼(許婚)하십시오.”
“까짓 어린 것이 홧김에 하는 말을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그 일 때문이라면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소녀에게도 눈과 귀는 있습니다. 숙부님의 염려하심은 마땅하나 또한 세상은 헛된 이름을 전하는 법도 없습니다. 소녀는 그 이름에 한 몸을 맡겨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동안 생각에 잠기던 오항은 마침내 질녀의 원하는 바를 허락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막지는 않겠다. 그러나 살아가는 도중에 어 떤 불행을 당하더라도 이 아재비를 원망하지는 마라.”
실로 어렵게 이루어진 혼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부의 금실은 한층 좋았다. 어떻게 보면 성격이 거칠고 격한 손견에게 슬 기롭고 부드러운 오씨는 하늘이 정한 배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 견의 번득이는 재주와 오씨의 꼼꼼한 살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 여 그 둘의 결합에서 뒷날의 손책(孫策), 손권(孫權)같은 영걸들이 태어나게 된다.
우이로 돌아와 군사들을 흩어보낸 손견은 따로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작은 잔치를 벌였다. 이번 싸움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자기를 위 해 싸운 심복들을 위로하는 사사로운 잔치였다. 그 자리에는 오군부 터 그를 따라온 백여 명의 장사들과 한당, 황개, 정보 외에 처남 오 경과 또 한 사람의 장재(將材) 조무(祖茂)가 불려왔다. 조무는 역시 허창의 난을 진압할 때부터 손견을 따른 장수로 한 벌 쌍도(雙刀)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손견이 뽑아가버린 나머지 군사로 손견의 처남 오경과 함께 우이를 지키느라 싸움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때문 에 걱정 없이 우이를 비울 수 있었던 점에서는 그들 또한 공이 없지 않았다.
잔치를 벌인 날, 손견은 하루 종일 사졸들과 함께 어울려 아래위 없이 즐기고 놀았다. 허창을 토벌할 때도 손견이 적은 군사로 큰 공 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혈육 같은 정으로 아래위가 합심 하여 싸운 덕택이었다. 그러다가 손견을 중심으로 한당, 조무, 황개, 정보, 오경 여섯 사람만이 오붓한 술자리를 가지게 된 것은 제법 밤 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싸움에 이기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듣기에 매부께서 직접 적의 괴수를 베셨다고요?”
오경이 한 잔 가득 술을 따라 바치면서 그렇게 치하했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네. 거기다가 정공과 황공복이 이미 독 안으 로 몰아둔 쥐를 내가 잡은 셈이 되니 무어 그리 대단할 게 있겠나?”
이미 거나한 손견이 흥겨운 얼굴로 그렇게 겸양했다.
“거기다가 머지않아 하비의 승으로 가게 되신다고요?”
조무가 곁에서 거들었다. 그러나 그 말에 흥겹던 손견의 얼굴이 일시에 흐려졌다. 대답 없이 다시 큰 잔을 손수 채워 벌컥벌컥 들이 켰다. 조무가 근심스레 물었다.
“주공께서는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흥, 우이의 승으로 썩기 아까우니 하비의 승으로 부르마고? 그럼 이 손견이 겨우 하비의 승으로나 맞다는 말이냐?”
“장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비는 유서가 깊은 군국(郡國)이요,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들이 많이 모이는 서주(徐州)의 심장 같은 곳 입니다. 장군이 만족할 만큼 큰물은 아니라 해도 이 궁벽한 우이와 는 댈 바가 아닙니다.”
정보가 손견의 말에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러나 손견은 술 탓인지 한번 토한 불만을 거두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 어떤 자는 백만 전으로 태수도 사고, 어떤 자는 내시 놈의 아재비라고 상(相)을 넘보기도 하는데, 이 손견은 어찌하여 스스로 천자를 칭한 요사스런 역적 놈을 목 베고도 작은 고을의 승이란 말 이오? 거기다가 다시 도적 떼를 쓸고 그 소혈을 불사르고 왔는데 올 려 세운다는 게 겨우 하비의 승이란 말이오? 한 해에 쌀 육백석으 로 무능하고 썩은 태수의 뒤치다꺼리하며 지내란 말이오?”
그러자 한당과 조무도 주인을 따라 분개했다. 벌써 다섯 해 손견 을 따라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겨우 마궁수니 유요(游傲, 포졸 정도) 니 하는 낮은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을 새삼 돌아보게 된 탓이 었다.
“그렇습니다. 한실(漢室)은 이미 틀렸습니다.”
“차라리 골 깊은 곳에 산채나 열고 의적 노릇이나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둘 다 이미 마신 술이 있는 터라 거리낌없이 울적한 심정을 드러 냈다. 비교적 글줄이나 하는 황개가 그런 그들을 위로했다.
“옛적에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항우를 깨뜨릴 대재(大)를 지녔으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니, 겨우 연오(連, 군의 의장대 정도) 라는 하찮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하마터면 대수롭지 않은 죄에 연 루되어 우리 고조(高祖)께서 그를 알아보시기도 전에 이름 없는 귀 신이 될 뻔하였소. 두 분의 처지는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너무 상심하 지 마시고 부디 자중하시오.”
정보도 황개의 말을 거들었다.
한번 토한 불만을 거두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 어떤 자는 백만 전으로 태수도 사고, 어떤 자는 내시 놈의 아재비라고 상(相)을 넘보기도 하는데, 이 손견은 어찌하여 스스로 천자를 칭한 요사스런 역적 놈을 목 베고도 작은 고을의 승이란 말 이오? 거기다가 다시 도적 떼를 쓸고 그 소혈을 불사르고 왔는데 올 려 세운다는 게 겨우 하비의 승이란 말이오? 한 해에 쌀 육백석으 로 무능하고 썩은 태수의 뒤치다꺼리하며 지내란 말이오?”
그러자 한당과 조무도 주인을 따라 분개했다. 벌써 다섯 해 손견 을 따라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겨우 마궁수니 유요(游傲, 포졸 정도) 니 하는 낮은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을 새삼 돌아보게 된 탓이 었다.
“그렇습니다. 한실(漢室)은 이미 틀렸습니다.”
“차라리 골 깊은 곳에 산채나 열고 의적 노릇이나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둘 다 이미 마신 술이 있는 터라 거리낌없이 울적한 심정을 드러 냈다. 비교적 글줄이나 하는 황개가 그런 그들을 위로했다.
“옛적에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항우를 깨뜨릴 대재(大)를 지녔으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니, 겨우 연오(連, 군의 의장대 정도) 라는 하찮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하마터면 대수롭지 않은 죄에 연 루되어 우리 고조(高祖)께서 그를 알아보시기도 전에 이름 없는 귀 신이 될 뻔하였소. 두 분의 처지는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너무 상심하 지 마시고 부디 자중하시오.”
정보도 황개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진은 시황제(皇帝십삼 년 통치의 폭정과 수탈뿐이었지만 한은 사백 년의 문물과 은의가 있습니다. 진에 비할 바 못 됩 니다.”
“그래도 영웅이 몸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어지러움일세. 만일 한 에 희망이 있으면 한을 도와 도적을 무찌르고, 도적이 강해 한이 먼 저 쓰러지면 주인 없는 천하를 다투어보는 것일세. 민란(民亂)은 일 고 도적 떼는 날뛸수록 우리가 기다리는 때는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네.”
그 대담한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잠시 선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손견은 이미 내친김이어서인지 한층 서슴없이 속마음을 털 어놓았다.
“거기다가 더욱 때를 앞당겨주는 것은 명분의 혼란일세. 세상이 평온할 때는 지킬 대의는 언제나 외길일세.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 지면 대의도 따라서 어지러워지네. 지금도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도적들은 오히려 의를 내걸고, 당당해야 할 관리들은 거꾸로 도둑 으로 몰리고 있네. 이렇게 나가다 보면 백성들은 점점 어느 쪽에 옳 은 명분이 있는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힘이 곧 대의가 되는 시대가 오고 말 것이네. 바로 영웅들이 묶여 있던 명분의 사슬 에서 풀려나 저마다 새로운 명분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 말 일세.”
그리고 갑자기 엄숙해진 좌중을 둘러보더니, 잔마다 손수 가득 술 을 따른 후 자기 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자 이제 그런 뜻에서 함께 잔을 비웁시다. 내 지금껏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대들의 뜻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항상 나에게로 향하는 그대들의 믿음과 기대를 그렇게 해석해 왔소. 지금이라도 나와 뜻이 다른 분은 잔을 놓고 이 자리를 떠나시 오. 나는 이미 그대들을 믿었으니, 설령 그가 이 방을 나가는 길로 관가에 달려가 이 손(孫) 아무개의 두 마음을 고변해도 원망하지 않 겠소.”
그 같은 말이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잠시 놀랐던 사람들도 손견 이 그 말과 함께 훌쩍 자기 잔을 비우자 작은 망설임도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
“못난 저희들이나마 이미 장군을 마음속의 주인으로 정했습니다. 믿어주시는 것만도 황공한 터에 감히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평소에는 주종 관계를 드러내지 않던 황개와 정보까지도 드디어 그걸 제 입으로 밝혔다. 그때껏 한 사사로운 정분과 의리의 모임이 었던 손견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비로소 반드시 한의 전통적 권위에 만 의지하지 않는 군벌로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앞날이 어떤 예감으로 닿아온 것일까. 한동안 흥겹 게 술을 마시던 손견이 문득 사람을 보내 이제 겨우 두 살인 아들 책을 불러오게 했다. 오씨 부인이 달을 품는 꿈을 꾸고 낳았다는 첫 아들로 남달리 숙성해 벌써 걸음을 걷고 몇 마디 말도 웅얼거릴 줄 알았다. 손견이 그 아들을 들어 여럿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시작하나 앞길이 반드시 순탄하지는 못할 것이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아이를 부탁하오.”
이제 겨우 스물셋인 청년 장수의 말로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주공, 이 흥겨운 자리에서 그 무슨 말씀입니까?”
조무가 참지 못해 그렇게 물었으나 황개가 나서서 자칫 어두워질뻔한 자리를 수습했다.
“만일을 위한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은 항상 없는 것보다 낫소. 주공의 말을 달리 듣지 말고 우리 작은 주인이나 뵈옵시다.”
그리고 먼저 엎드려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은 황개 작은 주인을 뵙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수들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손책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