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2화 : 세 번째로 기산을 향하다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2화 : 세 번째로 기산을 향하다


세 번째로 기산을 향하다

한편 오주 손권은 촉에 청해 위로 군사를 내게 해놓고 자신은 이 렇다 할 싸움 없이 형세만 살피고 있었다. 하루는 신하들과 조회를 하고 있는데 풀어놓은 세작이 돌아와 알렸다.

“촉의 제갈승상이 두 번에 걸쳐 출병한 바, 이에 맞서 싸운 위의 도독 조진은 많은 군사를 잃고 장수마저 죽게 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신하들은 한결같이 손권에게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기를 권했다. 그러나 손권은 아직도 중원을 도모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장소가 들 어와 말했다.

“요사이 듣자니 무창 동산에 봉황이 날아오고 대강에서도 황룡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합니다. 주공의 덕은 요, 순과 짝할 만한 데다 문무에 아울러 밝으시니 제위에 오르셔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제위에 오르신 뒤가 좋겠습니다.”

그러자 많은 관원들도 장소를 따라 권했다.

“자포(布)의 말이 옳습니다. 따라주옵소서.”

이에 손권도 슬며시 마음이 움직였다. 그해 사월 병인일에 무창남교에다 축대를 쌓고 제위에 오르기로 정했다.

정한 날이 오자 신하들은 손권을 청해 황제의 자리로 오르게 하고 연호를 황무(武) 팔년에서 황룡(黃龍) 원년으로 고쳤다. 이제 천자 는 세 사람이 되어 진정한 삼국 시대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손권은 그 아버지 손견을 무열황제로 추존하고, 그 어머니 오씨는 무열왕후로, 형 손책은 장사(長沙桓王)으로 추존했다. 그리고 그 아들 손등을 황태자로 책봉한 뒤, 제갈근의 맏아들 제갈각(諸葛恪) 은 태자좌보로, 장소의 둘째 아들 장휴(休)는 태자우보로 삼았다. 제갈각의 자는 원(元)이라 하며, 키가 일곱 자에 매우 총명하 고 사람의 말을 잘 받아넘기는 재주가 있었다. 손권은 그를 몹시 사 랑하였는데 그 까닭은 제갈각이 어려서부터 보인 남다른 총명과 재 치에 있었다.

제갈각이 여섯 살 때 일이었다. 하루는 그 아버지 제갈근을 따라 동오의 잔치 자리에 끼어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손권은 제갈근 의 낯이 긴 것을 보고 우스개 삼아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오게 한 뒤 그 노새의 얼굴에다 분필로 제갈자유(諸葛瑜)라 쓰게 했다. 그걸 본 벼슬아치들은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제갈근도 손권이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라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린 제갈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앞으로 달려 나 가더니 분필을 집어 ‘지로 ‘두 자를 노새의 얼굴에다 더 써넣 었다. 합치면 ‘제갈자유지로(諸葛瑜之驢이니 곧 ‘제갈근의 노새’란 뜻이 된다. 아버지가 노새가 되는 욕을 재치로 면하게 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겨우 여섯 살 난 그의 재치에 놀라 마지 않았다. 손권도 그를 기특히 여겨 정말로 그 노새를 제갈근에게 내 렸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벼슬아치들을 모아놓고 크게 잔치를 벌였는데 손권은 제갈각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앉은 모든 관 원들에게 술 한 잔을 권하게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잔을 올려가던 제갈각이 장소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것은 늙은이를 대접하는 예가 아니다.”

장소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받지 않았다. 그걸 본 손권이 제갈각에게 물었다.

“네, 자포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제갈각은 다시 장소 앞으로 가서 말했다.

“옛적 강상보(尙父, 강태공)는 나이 아흔에 이르러서도 장수의 모 월(旄鉞)을 잡고 늙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오는 싸 우는 날[臨陣之]에는 선생을 뒤에 모셔두고 술 마시는 날[飮酒 ]에는 선생을 앞에 모십니다. 어찌 어른 대접을 않는다 할 수 있겠 습니까?”

그렇게 되자 장소는 대답할 말이 없어 억지로 술잔을 받았다. 손 권은 그런 제갈각을 사랑하여 진작부터 무겁게 써오다가 그때에 이르러 태자를 보필하게 한 것이었다.

장소는 오랫동안 오왕을 도와 그 서열은 삼공의 위였다. 이에 손 권은 그를 보아 그 아들 장휴를 또 태자우보로 삼았다. 그밖에 손권 은 고옹을 승상으로 세우고, 육손은 상장군(上將軍)으로서 태자를 도와 무창을 지키게 했다.

제위에 오른 손권이 건업으로 돌아가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위를 치자고 나섰다. 그러나 장소만은 손권을 말렸다.

“폐하께서 아직 보위에 오르신 지 오래지 않으니 가볍게 움직여 서는 아니 됩니다. 마땅히 글을 닦고 힘을 기르며, 학교를 늘려 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케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서천으로 사신을 보 내어, 촉과 동맹을 맺고 천하를 나누어 가지신 뒤, 천천히 위를 도모 하도록 하십시오.”

손권도 수성(成)의 달인답게 그런 장소의 말을 받아들였다. 곧 사신을 촉으로 보내 후주를 만나보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일을 알리 게 하였다.

손권이 제위에 올랐다는 소문은 그가 보낸 사신보다 먼저 후주의 귀에 들어갔다. 후주는 곧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런 손권 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물었다.

“손권은 함부로 천자를 참칭한 자이니 마땅히 그와의 맹호(盟好) 를 끊어야 합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다만 장완만이 그들과 다른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이 일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사람을 승상에게 보내 물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후주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곧 한중에 사람을 보내 공명에게 그 일 을 묻게 하였다. 며칠 안 돼 공명의 대답이 성도에 이르렀다.


‘…..예물을 갖춘 사신을 오로 보내 손권의 즉위를 축하해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아울러 육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도 록 청해주십시오. 만약 그렇게만 되면 위는 틀림없이 사마의를 보내 육손과 맞서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마의가 남쪽에서 동오와 싸우게 된다면 저는 다시 기산으로 나가 장안을 노려볼 수 있습니 다…….’


그런 내용이었다. 후주는 그런 공명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태위 양진(楊)에게 명하여, 좋은 말과 옥띠, 보배로운 구슬과 금은을 싸 들고 오로 가서 손권의 즉위에 하례를 올리게 했다.

양진은 시킨 대로 동오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보고 예물과 국서를 올렸다. 이 바란 것 이상으로 예를 갖추어 축하를 해주자 손권은 몹시 기뻤다. 크게 잔치를 열어 양진을 잘 대접한 뒤 촉으로 돌려보 냈다.

양진이 건업을 떠나자 손권은 곧 육손을 불러 물었다.

“촉에서 말하기를 날을 정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자 하는 데 백언(伯)은 어떻게 보시오?”

“그것은 공명이 사마의를 두려워해서 짜낸 꾀입니다. 우리가 사마 의를 잡고 있는 동안 장안을 어찌해보겠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미 함께 손잡고 일하기로 해놓고 그 청을 아니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선 겉으로라도 크게 군사를 일으킬 듯한 형세를 지으며 병이 거 기 따라 움직이는 걸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명이 위를 들 이쳐 위가 매우 급해질 때 우리가 그 빈틈을 노려 치고 나간다면 중 원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육손이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손권이 들어보니 그게 옳은 듯했 다. 곧 형주, 양양 각처의 인마를 훈련하게 하면서 날을 골라 군사를 일으키려는 듯 꾸미게 했다.

한편 한중으로 돌아간 양진은 오가 촉의 청을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이에 공명은 세 번째로 출사할 뜻 을 굳혔으나 아무래도 진창을 지날 일이 걱정이 되었다. 가만히 사 람을 풀어 진창의 형세를 알아보게 되었다.

오래잖아 반가운 소식이 왔다.

“진창성의 학소는 병에 걸려 매우 위중합니다.”

그 소식에 공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대사를 이룰 수 있겠구나!”

그러면서 위연과 강유를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 둘은 군사 오천을 이끌고 밤낮없이 똑바로 진창성으로 달 려가라. 가서 불길이 이는 게 보이거든 힘을 다해 성을 공격하라.” 

위연과 강유는 그 갑작스런 명에 어리둥절했다. 그 굳은 진창성에 서 불길이 인다는 게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 다 공명에게 되물었다.

“언제까지 떠나야 됩니까?”

“사흘 안으로 모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채비가 갖춰지면 나를 찾아볼 것도 없이 바로 떠나거라.”

이에 두 사람이 물러나자 공명은 다시 관흥과 장포를 불러 귓속 말로 무언가를 일러주었다. 공명의 밀계를 받은 두 사람 역시 곧 한 중을 떠났다.

그때 곽회는 학소의 병이 깊다는 소문을 듣자 진창이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른 장합을 만나 의논했다.

“학소의 병이 깊다니 장군이 가서 그와 자리를 바꿔야겠소. 나는 천자께 표문을 올려 이 일을 말씀드린 뒤에 따로 가겠소.”

장합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로 군사 삼천 을 이끌고 학소를 대신하러 진창으로 달려갔다.

그 무렵 학소의 병은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그날 밤도 정신 없이 앓고 있는데 문득 병이 성 아래 이르렀다는 말이 들렸다. 

“모두 성에 올라가 적을 막아라!”

학소가 급히 명을 내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네 성 문에 불이 일며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학소는 그 소리를 듣자 놀란 나머지 병으로 실낱같이 남아 있던 목숨이 끊어졌다. 병은 큰 힘 안들이고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연의지만 이 학소란 인물을 그토록 볼품없이 죽 이는 것은 좀 지나친 듯싶다. 그는 제갈량의 십만 대군을 작은 진창 성에서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진창성을 뺏기고 놀라서 죽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갈량이야말로 그가 병들어 죽은 뒤에야 진창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다른 기록으로는 임종 때도 아들에게 이런 멋 진 유언을 남기고 있다.

“나는 장수로 일생을 살았으나 그게 썩 좋은 일은 아니었던 듯싶 다. 나는 종종 무덤을 파헤쳐 거기서 나오는 돌이나 나무토막을 성 을 공격하는 데 썼다. 따라서 깊이 묻는다고 죽은 이에 큰 도움이 되 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당부한다. 부디 내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라. 사람은 그때그때 맞추어 살아가면 되는 법, 죽음도 크게 두려워할 건 못 된다. 좋은 자리가 따로 없고 정한 방위가 따로 없으니, 내 무 덤은 동서남북 어디든 네 맘대로 써라.”

이 얼마나 탈속한 유언인가. 그 몇 마디만으로도 그의 사람됨과 삶을 짐작할 듯하다.


한편 위연과 강유는 밤낮 없이 달려 진창성에 이르렀으나 성 아 래서 살피니 겉보기부터가 이상했다. 그 삼엄하던 진창성에 깃발 하 나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놀랍고도 의심스러웠다. 감 히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살피기만 하는데 문득 한소리 포향이 들리 더니 성벽 사면에 일제히 깃발이 세워졌다. 이어 윤건에 깃털부채 들고 흰 도포 입은 사람이 성벽 위에 나타나 소리쳤다.

“그대들 둘은 어찌 이리 늦는가?”

두 사람이 놀라 쳐다보니 바로 공명이었다. 두 사람은 황망히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승상의 계책은 귀신도 놀랄 것입니다!”

공명은 성문을 열게 하여 두 사람을 들이고 자신이 먼저 진창을 차지한 경위를 밝혔다.

“나는 학소의 병이 위독함을 알아냈으나 그래도 그대들에게 사흘 안으로 달려가 성을 뺏으라는 영을 내렸다. 여럿의 마음이 풀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흥과 장포에게 군사를 점고 한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나아가게 했다. 물론 나도 그 군사들 틈에 섞여 있었다. 우리가 밤을 틈타고 내닫기 를 곱절로 하여 진창성 아래로 밀어닥치자 적은 워낙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미처 저희 군사를 모을 틈이 없었다. 거기다가 내가 먼저 성 안에 들여놓은 세작들이 불을 지르고 함성을 질러 안에서 도우니 위 병들은 놀라고 겁먹어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된 데는 학소 가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도 있었다. 원래 군사란 으뜸되는 장수가 없으면 절로 어지러워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 덕분에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 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그 뜻 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고 준비 없는 곳을 친다[出其不其無備] 고 했는데, 이번에 내가 쓴 계략이 바로 그것이다.”

위연과 강유는 그 말에 다시 한번 감탄해 땅에 엎드렸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몰기는 해도 공명은 학소가 죽은 걸 가엾게 여겼다. 그 처자로 하여금 학소의 영구를 모시고 위로 돌아가게 함 으로써 그의 충성을 기렸다. 비록 방향은 달라도 인간의 변함없는 신념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감동적인 법이다.

공명은 다시 위연과 강유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들 둘은 갑옷도 벗지 말고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산관으로 달려가라. 관을 지키던 자들은 이미 우리 군사가 이른 걸 알면 반드시 놀라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늑장을 부리면 위병이 먼저 관에 이르러 그 뒤에는 빼앗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에 위연과 강유는 조금도 지체 않고 산관으로 달려갔다. 과연 관을 지키던 위병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모조리 달아났다.

관 위에 오른 두 사람이 잠시 갑옷을 벗고 쉬고 있는데, 문득 관 밖에서 먼지가 자옥이 일며 위병이 달려왔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 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승상의 귀신 같은 헤아림은 실로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그리고 급히 망루에 올라가 보니, 앞서 오는 것은 위장 장합이었다. 위연과 강유는 곧 군사를 나누어 험한 길목을 지켰다. 장합은 촉 병이 이미 산관을 차지하고 길목을 지키는 걸 보자 늦었음을 알았 다.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곱게 물러가도록 놓아둘 위연이 아니었다. 군사를 이끌고 장합의 뒷덜미를 후리니 그 한바탕 싸움으로 죽은 위병은 머 릿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진창을 지키려고 달려왔던 장 합은 여지없이 져서 장안으로 쫓겨갔다.

장합을 멀리 쫓고 산관으로 돌아온 위연은 곧 사람을 공명에게 보내 경과를 알렸다. 공명은 스스로 앞장서서 군사를 휘몰아 진창 야곡으로 나온 뒤 건위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 뒤를 다른 촉병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서 나아갔다.

공명이 막힘 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주는 대장 진 식(陳)에게 명해 공명을 도우러 떠나게 했다. 공명은 대군을 휘몰 아 다시 기산으로 나갔다. 세 번째로 밀고 나온 기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눈여겨보아둘 사람은 진식이다. 진식은 나중 공명에게 죄를 얻어 허리가 잘려 죽는데, 정사 『삼국지』를 지은 진 수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그가 위의 정통성을 이은진(晋)의 신하였 기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삼국 가운데서 정통을 위 에 두고 역사를 기술한 것과 특히 공명의 인물평에 인색한 것은 모두 그 아비의 죽음에 서린 한 때문이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산에 이르러 영채를 세운 공명은 여럿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는 두 번이나 이 기산으로 나왔으나 이렇다 할 이득을 얻지 못 했다. 이제 다시 이곳으로 왔으니 위나라 사람들은 틀림없이 전에 싸워 재미를 본 곳에서 다시 우리와 싸우려 들 것이다. 따라서 저들 은 내가 옹성과 미성 두 곳을 뺏으러 들 줄 알고 그곳에다 군사를 보내 막으려 들 것이나 내 뜻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 무도와 음평은 우리 한에 이어져 있어, 그 두 곳을 차지하면 또한 위병의 세력을 나 누어버릴 수 있을 듯하다. 누가 가서 그 두 곳을 빼앗아보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강유가 얼른 그렇게 나서고 이어 왕평도 따라나섰다.

“저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공명은 그들이 나서자 기꺼이 허락했다. 강유에게만 명의 군사를 쪼개주며 무도를 치게 하고 왕평에게도 만 명의 군사를 주어 음평을 치게 했다.

그 무렵 장안으로 쫓겨 돌아간 장합은 곽회와 손례를 만나보고 말했다.

“진창은 벌써 적에게 떨어졌고 학소는 죽었소. 산관 또한 이미 촉병이 들어 있었소. 이번에도 공명이 다시 기산으로 나와 길을 나누어 밀고 들어오고 있소.”

그러자 곽회가 몹시 놀라며 걱정을 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명은 틀림없이 옹성과 미성을 뺏으러 들 것이오!” 

그런 다음 장합을 장안에 남겨 지키게 하고 손례는 옹성을, 자신 은 미성을 도와 지키려고 밤길을 달려갔다. 낙양으로 표문을 올려 일이 급함을 알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곽회가 올린 표문이 낙양에 닿은 것은 위주 조예가 조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근시가 들어와 아뢰었다.

“진창성은 떨어졌고 학소는 죽었으며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나 왔는데 산까지 이미 병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 위급한 소식에 조예는 몹시 놀랐다. 그런데 다시 만총이 표문 을 올려 알려왔다.

“동오의 손권이 망녕되이 황제를 칭하고 촉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지금 육손을 무창으로 보내 인마를 조련하며 쓰일 때를 기다리게 하 고 있는데 아침이 될지 저녁이 될지 모르나 쳐들어올 것은 틀림없을 듯합니다.”

촉만 해도 걱정인데 오까지 덤비려 한다는 말을 듣자 조예는 더 욱 정신이 없었다. 놀라고 당황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안 될 지경이었다.

조진은 그때까지도 병이 낫지 않아 사마의를 불러들인 조예가 물었다.

“촉과 오가 서쪽과 남쪽에서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사마의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동오는 결코 군사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 어떻게 그걸 아시오?”

조예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마의가 자신있게 말했다.

“공명은 일찍이 유비가 효정에서 오에 당한 욕을 갚으려 하고 있 으니, 결코 오를 삼킬 뜻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다만 중원이 빈 틈을 타고 저희를 칠까 봐 잠시 동오와 동맹을 맺었을 뿐입니다. 육손 또 한 그런 공명의 뜻을 알고 있어, 겉으로만 군사를 일으키려는 체하 고 있을 뿐, 실제로는 가만히 앉아서 싸움 구경이나 할 작정이겠지 요. 폐하께서는 동오를 막을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촉 만 물리치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예는 비로소 얼굴이 밝아졌다.

“경은 참으로 높은 식견을 가지셨소!”

그렇게 사마의를 추켜주고 난 뒤 그를 대도독으로 삼고 농서의 모든 군마를 맡기며 제갈량을 막으라 했다.

그때 대장인은 아직 앓아 누워 있는 조진에게 있었다. 조예는 그걸 사마의에게 넘겨주기 위해 근시에게 명했다.

“조진에게 가서 총병장인(總兵將印)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사마의가 근시를 얼른 가로막았다.

“제가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조예는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사마의가 하는 일이라 말리지 않았다.

조예 앞을 물러나온 사마의는 곧 조진의 부중으로 갔다. 먼저 사 람을 들여보내 자신이 온 걸 알리고 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가 조진 을 만났다. 문병 온 사람처럼 차도를 묻고 난 사마의가 불쑥 물었다.

“동오와 서촉이 힘을 합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제갈량 은 기산까지 나와 진채를 벌이고 있는데 공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조진이 놀라 말했다.

“내 병이 심하다고 집안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은 듯싶소이다. 그 런데 나라가 그토록 위급한데도 어찌하여 중달을 도독으로 삼아 촉 병을 물리치게 하지 않는 것이오?”

“저는 재주가 적고 아는 게 얕아 그런 자리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마의가 짐짓 그렇게 겸손을 떨자 조진이 좌우를 보고 소리쳤다.

“어서 장인을 가져다가 중달에게 드려라.”

“도독께서는 그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다만 도독의 한 팔이 되어 돕고자 할 따름입니다. 감히 그 장인은 받을 수가 없습 니다.”

사마의가 한층 몸을 낮추며 그렇게 사양했다. 조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목청을 높였다.

“무슨 소리요? 중달이 만약 이 일을 맡아주지 않으면 이 나라는 위태롭게 되고 마오. 내 비록 병든 몸이지만 천자를 찾아뵙고 중달 을 천거하겠소!”

그제야 조진의 진심을 안 사마의가 반쯤 털어놓았다.

“실은 이미 천자의 은명이 계셨습니다. 다만 이 사마의가 감히 받들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말에 조진이 기쁜 낯빛을 지으며 권했다.

“그렇다면 어서 그 명을 받으시오. 중달이 그 일을 맡아주면 넉넉 히 촉병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다시 장인을 사마의에게 건네주었다. 사마의는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척 받아들이고 조진의 부중을 나왔다. 사마 의의 빈틈 없는 처신이 대강 그와 같았다.

사마의는 위주를 하직하고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달려갔다. 때는 촉한 건흥 칠년 사월이었다. 그 무렵 공명이 이끄는 촉의 대병은 기 산 아래 세 군데에 진채를 벌이고 위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장안에 이른 사마의는 장합을 선봉으로 삼고 대능(戴)을 부장으 로 딸린 뒤, 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기산으로 달려갔다. 기산 부근에 이르러 사마의가 진채를 세운 것은 위수 남쪽이었다.

곽회와 손례가 진채를 찾아오자 사마의가 물었다.

“그대들은 병과 맞서보았는가?”

“아직 그래 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사마의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촉병은 천리를 달려왔으니 빨리 싸우는 게 이롭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싸움을 걸지 않는 데는 반드시 무슨 꾀가 있기 때문이다. 농 서 여러 곳에서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가?”

곽회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이미 세작을 풀어 각군 여러 곳을 알아보게 했는 바, 밤낮없이 잘 지키고 있어 아직 별탈은 없는 듯싶습니다. 다만 음평과 무도 두 곳만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거기다. 제갈량은 그 두 곳을 노리고 있음에 틀림 이 없다. 나는 사람을 보내 제갈량에게 싸우자고 할 터이니 그대들 은 샛길로 급히 달려가 그 두 곳을 구하도록 하여라. 적병의 뒤를 들 이치면 그들은 절로 어지러워질 것이다.”

이에 곽회와 손례는 각기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농서 샛길로 음 평과 무도를 구하러 달려갔다. 사마의에게 받은 계책대로 촉병의 등 뒤를 후려치기 위함이었다. 가는 길에 곽회가 손례에게 물었다. 

“중달을 공명과 견주어보면 어떻다 생각하시오?”

“공명이 중달보다 훨씬 낫지요.”

손례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나 곽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명이 비록 중달보다 낫다 해도 이번만은 아닐 듯하오. 이번 계 책은 중달이 남보다 훨씬 슬기롭다는 걸 뚜렷이 드러내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만약에 촉병이 정말로 그 두 성을 공격하고 있다면 우리가 그 뒤를 들이칠 것이니 어지러워지지 않고 어쩌겠소?”

그러면서 아는 체 떠들고 있는데 문득 앞서 살피러 갔던 군사들 이 돌아와 알렸다.

“음평은 이미 왕평의 손에 떨어졌고 무도 또한 강유가 차지해버렸습니다. 병은 이 앞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례가 곽회를 돌아보며 말했다.

“병은 이미 성을 차지해놓고 뭣 때문에 밖에다 군사를 벌이겠 소? 틀림없이 무슨 속임수가 있는 듯하니 얼른 물러나는 게 낫겠소.” 

곽회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막 군사를 물리라는 영을 내리려는 데 한 소리 포향이 들리더니 산 뒤에서 한 갈래 군마가 쏟아져 나왔 다. 앞세운 깃발에는 ‘한 승상 제갈량’이란 글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깃발뿐만이 아니었다. 군사들 한가운데로 네 바퀴 수레가 굴러 나 오는데 그 위에는 정말로 공명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 공명 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선 것은 관흥과 장포였다.

곽회와 손례는 공명을 보자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공명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곽회와 손례는 달아나지 말라! 사마의 따위가 세운 계책이 어떻 게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 그는 매일 사람을 내게 보내 싸움을 걸 어오면서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너희들을 보내 우리 군사의 등 뒤를 치려 했다. 그러나 음평과 무도는 이미 우리가 뺏었고 너희 둘만 오 히려 에워싸였다. 어서 항복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그 군사로 나와 결판이라도 내보겠다는 것이냐?”

곽회와 손례는 그 같은 공명의 말에 더욱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왕평과 강유가 군사 를 휘몰아 덮쳐왔다.

앞에서는 또 관흥과 장포가 군사들을 이끌고 밀려들었다.

촉의 네 장수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앞뒤에서 들이치니 위병들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이내 쇠막대기를 맞은 질그릇처럼 되어 사방 으로 흩어졌다. 곽회와 손례도 급했다. 말을 버리고 산등성이로 기어 달아났다.

그걸 본 장포가 말을 몰아 그들을 뒤쫓았다. 그러나 그것도 장포 의 운인지 뜻밖에도 일이 잘못되어 사람과 말이 한 덩어리로 계곡에 떨어졌다. 뒤따르던 군사들이 급히 구해보니 머리가 깨져 있었다. 공명은 사람을 시켜 장포를 성도로 돌려보내고 거기서 다친 곳을 치 료하게 했다.

한편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난 곽희와 손례는 사마의를 찾아보고 알렸다.

“무도와 음평 두 군은 이미 적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명은 우리가 가는 길에 미리 군사를 감추어두었다가 앞뒤에서 짓 두들겨 우리 군사는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저희들도 말을 버리고 걸어서야 겨우 도망쳐 올 수 있었습니다.”

낮이 없어진 사마의가 좋은 말로 두 사람을 위로했다.

“이번 싸움에 진 것은 그대들의 죄가 아니다. 공명의 재주가 나보 다 앞섰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군사를 이끌고 다시 미성과 옹성으로 돌아가 그곳이나 굳게 지키도록 하라. 결코 나와 싸워서는 아니 된 다. 내게 적을 쳐부술 계책이 이미 서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이에 곽회와 손례는 다시 미성과 옹성을 지키러 돌아갔다. 두 사 람이 떠난 뒤 사마의는 다시 장합과 대능을 불러 말했다.

“지금 공명은 음평과 무도를 얻었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채 안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두 사람은 각기 만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오늘 밤 몰래 촉병의 진채 뒤로 가서 한꺼 번에 덮치라. 나도 군사를 이끌고 촉진 앞에 가 있다가 병이 어지러운 기세가 보이면 군사를 휘몰아 짓쳐들겠다. 양편 군사가 앞뒤에서 힘 다해 들이치면 그 진채를 뺏기는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가 만약 그 땅의 산세만 차지하게 된다면 적을 무찌르는 데 어려울 게 무어 있겠는가?”

이에 두 사람은 명받은 대로 떠났다. 대능은 왼쪽으로, 장합은 오 른쪽으로 샛길을 따라 병의 진채 뒤 깊숙이 다가간 뒤 그날 밤삼 경무렵 큰 길가에서 다시 만나 군사를 합치고 병의 진채를 들이 치기로 했다.

그런데 행군을 시작한 지 삼십 리도 되기 전이었다. 전군이 갑자 기 나아가기를 그만두었다. 장합과 대능이 이상히 여겨 달려가보니 수백 대의 수레가 마른 풀을 가득 실은 채 막고 있었다.

“이는 틀림없이 적의 준비가 있다는 뜻이오. 어서 군사를 물려 온 길로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장합이 그렇게 말하고 군사들에게 급히 영을 내렸다.

“어서 모두 물러나라! 온 길로 되돌아가도록 하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갑자기 온 산중이 환하게 불이 켜지며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미리 숨어 기다리던 촉병들이 사방에서 뛰쳐 나와 장합과 대능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말았다.

공명이 기산 위에 높이 앉아 그런 장합과 대능에게 소리쳤다. 

“장합과 대능은 내 말을 듣거라. 사마의는 내가 무도와 음평으로 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느라 영채 안에 없을 줄 알았을 것이 다. 그 바람에 너희 둘을 보내 우리 진채를 급습하게 했지만 실은 그 게 바로 나의 계책에 걸린 것이다. 너희 둘은 별로 이름 없는 아랫장수이니 죽이지는 않겠다.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 말에 장합은 몹시 성이 났다. 자기가 떨어진 처지도 잊고 공명 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너는 일찍이 산골에 살던 촌놈으로 갑자기 높은 자리에 앉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느냐? 감히 우리 대국을 침범하고도 어찌 그따위 되 잖은 소리를 떠들어대느냐? 내 만약 너를 사로잡기만 하면 만 토막 으로 부수어놓고 말겠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마치자 정말로 창을 끼고 말을 몰아 공 명이 있는 산 위로 치달았다. 산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쏟아졌 다. 그 바람에 산 위로 오를 수 없게 된 장합은 말을 박차고 창을 휘 둘러 저희 군사를 에워싸고 있는 촉병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장합이 워낙 무서운 기세로 설치자 촉병들은 아무도 그를 막아내 지 못했다. 다만 약한 대능만 에워싸고 괴롭힐 뿐이었다.

장합은 에움을 뚫고 나왔으나 함께 온 대능이 보이지 않았다. 아 직도 촉병들 속에 갇혀 있음을 알고 다시 몸을 돌려 두꺼운 에움을 헤치고 들어갔다. 이윽고 장합은 대능까지 구해가지고 병 한가운 데서 벗어났다.

공명은 산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장합이 수많은 병 사이를 오가 며 싸우는 양을 눈여겨보았다. 싸울수록 용맹스럽고 돋보이는 그를 한동안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곁의 사람에게 말했다.

“일찍이 장익덕이 장합과 크게 싸웠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 두 장합을 놀랍고 두렵게 여겼다. 이제 보니 정말로 그 용맹을 알 만 하다. 저 사람을 오래 살려두면 반드시 우리 촉에 해로움을 끼치겠다. 내 마땅히 죽여 없애 뒷날의 걱정거리를 없애리라.”

그러고는 군사를 거두어 영채로 돌아갔다.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 였으나 실제로 공명의 그 같은 말은 오래잖아 지켜지게 된다.

한편 사마의는 그때 병의 진채 앞에 이르러 군세를 벌이고 기 다렸다. 장합과 대능이 뒤를 쳐 촉병이 어지러워지면 앞에서도 몰아 칠 작정이었으나 일은 뜻 같지가 못했다. 촉진은 조용하고 오히려 장합과 대능이 낭패한 얼굴로 달려와 알렸다.

“공명이 미리 알아차리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대패하여 군사만 잃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공명은 실로 귀신과 같은 사람이로구나. 잠시 물러나 다시 때를 찾아보는 게 낫겠다.”

그러고는 급히 영을 내려 대군을 돌렸다.

본채로 돌아간 사마의는 다시 공명과의 싸움에서 이득을 본 전략대로 장졸들을 다잡았다.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말라!”

공명이 먼 길을 와서 언제나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노린 평범 하면서도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한편 싸움에 크게 이긴 공명은 거기서 얻은 것들을 모아들였다. 창칼이며 이런저런 기구에 말과 마구 따위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공명은 그걸 모두 진채로 옮기게 하고 다음 싸움에 들 어갔다.

사마의가 헤아린 것처럼 촉은 빨리 싸워 결판을 낼수록 이로웠다.

그러나 다음 싸움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위연을 보내 사마의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보름이 지나도록 맞서주지를 않았 다. 그리하여 제갈공명의 세 번째 기산행(山行)도 다시 지구전으 로 들어서고 말았다.

어떤 이는 공명의 군사적인 재능을 대단찮은 것으로 평가하는 이 유를 바로 그런 정공법(正法)에 두고 있다. 전쟁이란 우연과 행운 의 요소에도 많이 좌우되건만 공명은 조금도 그런 요소에 도박을 걸 어보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완벽하게 갖추어진 정면 승부로 나아가 려 하다 보니 위에게 시간을 주게 되고, 끝내는 위와 촉이 가지는 기 본적인 국력의 차이에 밀리게 되고 만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공명의 전술적 입장은 사마의나 조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위는 장수들이 싸움에 져도 그 빈 곳을 메울 인력과 물자를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 와 비교해 그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국력의 촉은 인력과 물자의 동 원에 한계가 있었다. 곧 공명이 이끈 군사가 촉의 모든 전력이고, 그 붕괴는 바로 촉의 붕괴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군사를 이끌고 어찌 모험이나 도박을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