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7화 : 꾸미는 건 사람이되 이루는 건 다만 하늘일 뿐
꾸미는 건 사람이되 이루는 건 다만 하늘일 뿐
장호와 악침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빼앗은 목우와 유마를 이끌 고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사마의가 살펴보니 정말로 살아 있는 말 이나 소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사마의 또한 기뻐해 마지않으 며 멀리 있는 공명을 향해 중얼거렸다.
“네가 이 법을 써서 만들었다면 난들 쓰지 못할 게 무엇이겠느냐?”
그러고는 곧 솜씨 좋은 장인 백여 명을 불러들여 끌어온 목우와 유마를 뜯어보고 꼭 그대로 만들게 했다. 장인들이 공명이 만든 것 과 똑같은 크기와 너비와 두께로 나무를 깎아 맞추니, 보름이 되자 이 천여 대의 목우와 유마가 만들어졌다. 모두 곡식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사마의는 진원장군 잠위(岑威)를 불러 명했다.
“너는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목우와 유마를 부려 농서에서 군량 을 날라 오너라.”
잠위가 그대로 하자 위군도 그날부터 힘들이지 않고 농서에서 군 량을 날라 먹게 되었다. 촉진과 마찬가지로 위의 장졸들도 한결같이 그 일을 기뻐해 마지않았다.
한편 공명에게로 돌아간 고상은 위병들이 목우와 유마 대여섯 대 를 뺏어간 일을 알렸다. 공명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것들이 그렇게 뺏어가기를 바랐다. 몇 필의 목우와 유 마를 잃었으나 걱정할 건 없다. 오래잖아 우리는 군중에 쓰일 것들 을 숱하게 얻을 것이다.”
“승상께서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듣고 있던 장수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공명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사마의는 틀림없이 내가 만든 대로 목우와 유마를 만들어 쓸 것이다. 그때 내가 다시 계책을 베풀겠다.”
그러나 장수들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살피러 간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위병들이 수많은 목우와 유마를 이끌고 농서에서 군량과 마초를 날라오고 있습니다.”
공명이 더없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정말로 내 헤아림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그러고는 곧 계책에 들어갔다.
공명은 먼저 왕평을 불러 분부했다.
“그대는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위병처럼 꾸며 밤중에 몰래 북원을 지나라 위병에게 군량을 옮기는 군사라고 속이고 슬그머니 적의 군 량 옮기는 군사들 틈에 끼어들었다가, 군량을 운반할 때 위병을 죽 여 흩어버리고 그들의 목우와 유마를 뺏어서 몰아오라. 북원을 지나 오게 되면 반드시 위병이 나타나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때는 목 우와 유마의 몸속에 있는 혀를 비틀어놓으면 된다. 그리되면 목우와 유마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그것들을 버려두고 그저 달 아나기만 하라. 뒤쫓아온 위병들은 목우와 유마를 되찾은 것만도 다 행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끌고 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당겨도 끌려 오지 않고 밀어도 나아가지 않으면 당황하게 마련일 것인데, 그때 내가 다시 군사를 보내겠다. 너희들도 되돌아서서 내가 보낸 군사들 과 함께 위병을 쫓아버린 뒤 목우와 유마의 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오너라. 그러면 위병들은 틀림없이 놀랍고 괴이쩍게 여길 것이다.”
왕평이 나가자 공명은 다시 장의를 불렀다.
“너는 오백 군사를 데리고 가 육정육갑(甲)의 신장(神將)처 럼 꾸며라. 귀신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섯 가지 물감으로 얼 굴을 칠해 하나하나가 무섭고 야릇한 모양을 내도록 해야 한다. 그 런 다음 모두 한 손에는 수놓은 깃발을 들고 한 손에는 보검을 잡게 하며 또 허리에는 불이 잘 붙게 하는 물건을 넣은 호로병을 차게 한 뒤 산기슭에 숨어 있으라. 목우와 유마를 앞세운 위병들이 이를 때 를 기다려 한꺼번에 뛰쳐나가 불을 질러대면 위병들은 놀라 흩어질 것이다. 그때 그들이 버리고 간 목우와 유마를 이끌고 돌아오면 된 다. 위병들은 너희들이 귀신인 줄 알고 두려워서 감히 뒤쫓지 못할 것이다.”
그런 명을 받자 장의도 곧 그걸 지키러 장막을 나갔다. 공명은 그 다음으로 강유와 위연을 불러 분부했다.
“그대들 둘은 같이 군사 만 명을 이끌고 북원으로 가서 목우 유마 를 뺏어오는 우리 군사를 맞으라. 적이 뒤쫓으면 싸워 지켜야 한다.”
다음은 요화와 장익이 불려왔다. 공명은 그 둘에게도 할 일을 주 었다.
“너희 둘은 오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사마의가 오는 길을 끊으라.” 마지막으로 불려온 것은 마대와 마충이었다. 그 두 사람은 군사 이 천을 거느리고 위남으로 가서 싸움을 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위장 잠위가 군사들을 이끌고 목우와 유마 를 몰아 군량을 운반해 가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앞에 우리가 군량 옮기는 걸 지켜줄 군사들이 와 있습니다.”
잠위가 다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정말로 자기편 군사였다. 이에 위병들은 아무 걱정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양쪽 군사가 합 쳐질 무렵해서였다. 홀연 함성이 크게 일며 자기편이라고 믿었던 군 사들 뒤편에서 병이 쏟아져 나왔다.
“촉의 대장 왕평이 여기 있다. 목숨이 아까우면 모두 항복하라!”
앞선 장수가 군량 나르는 위병들을 덮쳐오며 소리쳤다. 그 뜻밖의 변괴에 위병들은 미처 손발 놀릴 틈이 없었다. 태반은 허둥대다 촉 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잠위가 겨우 남은 군사를 다잡아 맞서보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 었다. 왕평의 한칼에 목이 떨어지니 졸개들은 그대로 흩어져 달아났다. 왕평은 그들이 버리고 간 목우와 유마를 끌고 촉진으로 향했다.
큰 힘들이지 않고 첫 단계는 성공한 셈이었다.
쫓겨간 위병이 그다음 일을 되도록 도왔다. 겨우 목숨을 건져 가 까운 북원의 저희 진채로 달려간 그들은 곽회에게 군량 빼앗긴 일을 급히 알렸다.
놀란 곽회가 황망히 군사를 내 군량을 되찾으러 왔다. 왕평은 군 사들을 시켜 목우와 유마의 혀를 돌려놓은 뒤 싸우는 체하며 달아나 고 달아나는 체하며 싸우는 식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뒤쫓지 말라! 군량을 찾았으니 돌아가자.”
곽회가 그런 영을 내리고 목우와 유마를 찾은 걸로 만족하며 돌 아가려 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모두 덤벼들어 밀고 당기며 법석을 떨어도 목우와 유마는 꼼짝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잘 굴러가던 목우와 유마가 움직이지 않자 곽회는 놀랍고도 괴이쩍게 여겼다. 그러나 군량을 그대로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일이라 애꿎은 군사들만 몰아대고 있는데 갑자기 북소리 나팔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퍼졌다.
뒤이어 사방에서 함성이 일며 두 갈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강 유와 위연이 이끄는 병이었다. 거기다가 달아나던 왕평도 되돌아 서서 덤비니 곽회 혼자서는 그 세 갈래 군마를 당할 길이 없었다. 얼 마 안 돼 형편없이 뭉그러진 군사들과 함께 되돌아서 달아났다.
왕평은 군사들을 시켜 목우와 유마의 혀를 제자리로 돌려놓게 한 다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곽회가 멀리서 그걸 보고 다시 군사를 몰 아 뒤쫓으려 했다. 그때 문득 산 뒤에서 구름 같은 연기가 일며 한떼의 신병이 뛰쳐나왔다. 두 손에 깃발과 칼을 들었는데 그 차림이나 모양이 괴이쩍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모두 목우와 유마를 미는 군사들을 도와 바람처럼 멀어져
가니 보고 있던 곽회는 쫓을 마음이 싹 가셨다.
“저것은 틀림없이 귀신이 병을 돕고 있는 것이다!”
곽회가 놀란 나머지 그런 소리를 했다. 군사들도 그걸 보자 두렵 기 그지없어 누구도 촉병을 뒤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무렵 북원의 군사들이 싸움에 져서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소식은 사마의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마의는 놀라 군사를 이끌고 북 원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길을 반도 가기 전에 홀연 한소리 포 향이 울리며 두 갈래 군마가 뛰쳐나왔다. 미리 산기슭 험한 곳에 숨 어 기다린 듯한데 그들의 함성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사마의가 놀라 살펴보니 앞세운 깃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장 요화’, ‘한장 장익’.
사마의가 군사들을 꾸짖어 싸워보려 했으나 이미 겁먹은 군사들 이라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한바탕 짓이겨져 군사들을 모두 잃고 홀몸이 되어 빽빽한 숲속으로 달아났다.
장익은 뒤처져 군사를 거두고 요화는 앞서서 그런 사마의를 뒤쫓 았다. 요화가 뒤쫓으며 보니, 사마의가 놀란 끝에 정신이 어지러워 나무 한 그루를 뱅뱅 돌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요화는 말을 박차 달려가 한칼에 사마의를 베어버릴 양으로 힘차 게 내리쳤다. 그러나 아직도 사마의의 운이 다하지 않았던지 칼은 사마의를 빗맞혀 나무등걸에 깊숙이 박혔다. 요화가 힘들여 칼을 뽑고 다시 사마의를 뒤쫓으려 했으나 그때 이미 사마의는 저만큼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요화는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그런 사마의를 뒤쫓았다. 하지만 곧 사마의의 자취를 잃어버리고, 겨우 그 숲 동쪽에서 땅에 떨어진 금 투구 하나만 찾았을 뿐이었다. 바로 사마의가 쓰고 있던 투구였다. 요화는 그 투구가 동쪽에 떨어진 것을 보고 사마의가 동쪽으로 달아난 것이라 짐작했다. 곧 동쪽으로 말을 달려 뒤쫓았다. 그러나 실은 그때 사마의는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일부러 자기 투구를 동쪽에 버려놓고 그 반대편으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요화는 한 마장이나 뒤쫓았지만 사마의의 자취는 끝내 찾을 길 없었다. 마음만 급해 바삐 말을 몰다가 한군데 골짜기 어귀에서 뜻 밖에도 강유를 만났다. 강유를 만나고 난 뒤에야 헛짚은 걸 안 요화 는 하는 수 없이 강유와 함께 공명이 있는 진채로 돌아갔다.
오래잖아 장의가 빼앗은 목우와 유마를 이끌고 돌아왔다. 거기 실 린 곡식만도 만석이 넘었다. 요화는 주워온 사마의의 금투구를 바 쳐 그날의 으뜸가는 공으로 기록됐다. 위연은 힘든 싸움을 치렀건만 자신이 요화에게 뒤진 게 분했다. 함부로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으나 공명은 짐짓 모르는 체했다.
한편 자기 진채로 돌아간 사마의는 더욱 괴로웠다. 엄청난 군량을 빼앗긴 데다 적지 않은 군사까지 꺾이고 자신은 목숨마저 위태로웠 으니 장졸들을 마주보기가 난감할 지경이었다. 그때 마침 사신이 와 서 천자의 조서를 전했다.
‘동오가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쳐들어와서 조정은 싸워 막기로 의논을 모았다. 앞으로 적지 않은 인마와 물자가 동오와의 싸움에 돌려질 것인즉 경은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말라. 촉과의 싸움은 동오를 물리친 뒤에라도 늦지 않으리라.’
그런 내용을 읽은 사마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날부터 도랑 을 깊이 파고 흙벽을 높여 들어나앉아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않 았다.
그 무렵 위와 동오의 싸움은 제법 그럴듯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위주 조예는 손권이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그 또한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막기로 했다. 곧 유소(劉)는 군사 를 이끌고 가서 강하를 구하게 하고, 전(田)는 양양을 구하게 하 고, 조예 자신은 만총과 함께 합비를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만총이 먼저 소호구에 이르러 강물 맞은편 언덕 쪽을 바라보니 싸움배가 즐비하게 늘어서고 기치가 자못 엄숙하게 휘날렸다. 만총 이 중군으로 돌아가 위주를 찾아보고 아뢰었다.
“오나라 것들은 우리가 멀리서 온 것을 깔보고 아직 방비가 제대 로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밤 그 빈틈을 타 저들의 수채를 급 습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짐의 뜻과 같소.”
위주도 대뜸 그렇게 찬성하고 곧 용맹이 뛰어난 장수 장구(張)를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군사 오천을 이끌고 불지를 기구를 갖춰 호구를 따라가며 공격하라.”
그리고 만총은 오천 군사로 동쪽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서 오군의 진채를 들이치게 했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장구와 만총은 각기 오천 군사를 이끌 고 가만히 호구 쪽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오병의 경계가 허술해 들 키지 않고 수채 부근에 이를 수 있었다. 거기 힘을 얻은 위병은 함성 과 함께 오병의 영채로 뛰어들었다.
자다가 일을 당한 오병들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나니 위병들은 사방에 불을 질러 수많은 싸움배와 군량 이며 마초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때 오병을 이끌고 있던 것은 제갈근이었다. 용케 목숨을 건져 싸움에 진 군사들을 이끌고 면구로 물러났다. 위병도 급하게 뒤쫓지 않고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제갈근이 싸움에 져서 면구로 쫓겨갔다는 소식 은 오의 대도독 육손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육손은 별로 걱정 하는 기색 없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는 주상께 표문을 올려 신성을 에워싸고 있는 우리 군사로 하 여금 위병이 돌아갈 길을 끊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내가 대군을 이끌 고 위병의 정면을 들이치면 그것들은 머리와 꼬리를 돌볼 틈이 없어 북소리 한 번으로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 손권에게 올릴 표문을 썼다. 쓰기를 마친 육손은 벼슬이 낮은 장수 하나를 뽑아 그 표문을 신성에 있는 손권에게 갖다 바치게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 심부름꾼이 나루터를 건너다가 숨어 있던 위병들에게 사로잡힌 일이었다. 군사들이 그를 끌고 돌아 가 위주 앞으로 데려갔다. 그 품 안에서 육손이 쓴 표문이 나왔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읽기를 마친 위주는 감탄부터 먼저 했다.
“동오의 육손은 참으로 놀라운 헤아림을 지녔구나!”
그리고 그 오병을 가두게 한 뒤 유소에게 명을 내려 뒤로 덮칠 손 권의 군사를 빈틈없이 막을 수 있도록 채비하게 했다.
한편 면구로 쫓겨가 있던 제갈근은 첫 싸움에 크게 진 것보다 더 큰일이 생겼다.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군사와 말들이 병에 걸려 자 빠지는 일이었다. 견디다 못한 제갈근은 편지 한 통을 써서 육손에 게 보내며 군사를 물려 오나라로 돌아갈 의논을 했다. 읽기를 마친 육손이 글을 가지고 온 군사에게 말했다.
“상장군께 가서 내게 따로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하라.”
이에 제갈근에게 돌아간 사자는 육손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 나 제갈근은 그 말만으로는 답답했다. 육손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나 해보려고 그 사자에게 물었다.
“육도독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던가?”
“군사들을 시켜 영채 밖 들판에 콩과 팥을 심게 하는 걸 보았을 뿐입니다. 도독 스스로는 장수들과 함께 진문 밖에서 활쏘기를 즐기 고 계셨습니다.”
제갈근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영문 모를 짓거리가 무엇때문인지 알고 싶어 이번에는 그 스스로 육손의 영채로 달려갔다.
“지금 위는 조예가 몸소 나와 그 세력이 매우 큽니다. 도독께서는 어떻게 막으시겠습니까?”
제갈근이 육손을 보고 그렇게 물었다. 육손이 소리를 죽여 일러주었다.
“내가 얼마 전에 사람을 주상께 보내 표문을 올린 적이 있소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사람이 적병에게 붙들려 일전 꾸며놓은 계책이 적의 손에 들어가버렸소. 이미 우리의 계책을 안 이상 적도 거기에 넉넉한 방비를 하고 있을 터, 싸워봐야 무슨 이득이 있겠소? 차라리 이만치서 물러남만 못할 것이오. 그래서 이미 주상께 새로운 표문을 올려 천천히 군사를 물리기로 말을 맞춰놓았소이다.”
“이미 그런 뜻이 있으시다면 어서 빨리 군사를 물리실 일이지 어 찌 이리 늑장을 부리십니까?”
제갈근이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렇게 물었다. 육손이 빙긋 웃으며 그 까닭을 밝혔다.
“우리 군사를 물리려 한다면 반드시 천천히 움직여야 할 것이오. 지금 만약 급하게 물러나면 위병은 반드시 그 기세를 타고 뒤쫓을 것인즉, 이는 바로 싸움에 지는 길을 스스로 마련하는 격이 되고 마 오. 그러니 자유(子瑜)께서도 싸움배를 재촉해 거짓으로나마 맞서려 는 듯 보이게 하시오. 나는 짐짓 인마를 양양 쪽으로 몰고 나가 적으 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 한 뒤에 천천히 강동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 리 되면 위병은 우리를 함부로 뒤쫓지 못할 것이외다.”
그러자 제갈근도 비로소 육손의 속셈을 알았다. 그 계책대로 따르기로 하고 자기 영채로 돌아가기 바쁘게 싸움배를 물에 띄웠다. 곧 덤벼들 듯하면서 실은 돌아갈 채비를 하는 셈이었다.
육손도 곧장 계책에 들어갔다. 전에 없이 대오를 정돈하고 고함 소리로 기세를 높이며 느닷없이 양양 쪽으로 밀고 들었다. 세작이 이내 그걸 살펴 위주에게 알렸다.
“오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땅히 그 움직임에 맞설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첫 싸움에 이겨 기세가 잔뜩 올라 있던 위의 장수들은 그 말을 듣 자 모두 나가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육손의 놀라운 재주를 잘 알 고 있는 위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손은 꾀가 많은 사람이다. 우리를 꾀어내기 위한 계책일지도 모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그 말에 장수들도 슬며시 겁이 나 더는 우겨대지 않았다.
며칠 뒤였다. 다시 세작이 알려왔다.
“동오의 세 갈래 군마가 모두 물러갔습니다.”
위주 조예는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곧 군사를 풀어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게 했다. 얼마 뒤에 정말로 오병들이 모두 물러갔다는 게 밝혀졌다. 그제서야 위주는 탄식했다.
“육손이 군사를 부리는 솜씨는 손자, 오자보다 뒤지지 않겠구나! 그가 살아 있는 한 동오를 쳐 없애기는 어렵겠다.”
그러고는 장수들을 풀어 험한 길목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대군 을 이끌고 합비로 돌아가 그곳에서 있을지 모르는 뜻밖의 변고에 대비했다.
한편 기산의 공명은 사마의가 싸움을 받아주지 않자 오래 거기 머물며 싸울 수 있는 방도를 마련했다. 싸움이 길어짐에 따라 필요 한 군량을 본국에서 날라오지 않고 그곳에서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둔전법(法,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공명은 그곳의 논밭을 모두 거두어 촉군이 그중 하나를 가꾸고 그곳 백성들이 나머지 둘을 가꾸는 식으로 나눈 뒤 군사들과 백성들 이 서로 넘나드는 일이 없게 했다. 노는 군사들로 농사를 짓게 해 군 량을 얻기 위함이었으나, 그곳 백성들로 보면 그보다 더 너그러운 대접이 없었다. 모두가 위의 다스림을 받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농 사에 힘과 정성을 쏟았다.
세작으로부터 그 소문을 들은 사마사가 아비 사마의를 찾아보고 말했다.
“지난번에 병은 우리 군량을 많이 뺏어갔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는 위빈에서 우리 백성들을 괴롭힘 없이 농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곳에 오래 버티면서 싸우기 위한 계책임에 분명하니 이는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무슨 까닭으 로 그 꼴을 보고만 계십니까? 공명과 날짜를 정해 한바탕 싸움으로 자웅을 가리지 않고 어찌하여 진채 안에만 앉아 계십니까?”
제법 사람을 충동하는 데가 있는 말이었으나, 사마의는 별로 흔들 리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주상의 명을 받들어 굳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그때 다시 군사 하나가 뛰어들어와 알렸다.
“위연이 전에 도독께서 잃은 금투구를 쓰고 진채 앞에 나타나 욕 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곁에 있던 장수들이 모두 분한 기색을 나타내며 나아 가 싸우려 들었다. 사마의가 웃으며 그들을 말렸다.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어지럽히게 된다 했다. 오직 굳게 지키는 게 으뜸이니 모두 그리 알라.”
그러자 장수들도 성을 가라앉히고 움직이지 않았다.
위연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가 받아주 지 않으니 어쩌는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욕만 퍼부어대다가 투덜 거리며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사마의가 끝내 싸우려 들지 않는데도 공명은 별로 초조해하는 기 색이 없었다. 오히려 사마의를 끌어내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듯 엄청나고도 끔찍한 매복의 준비부터 시작했다.
“너는 그곳에다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영채 안에는 깊은 구덩 이를 이어 판 뒤 마른 섶이며 짚 검불과 불 붙기 쉬운 물건들을 함빡 쌓아두라. 또 그 골짜기 둘레의 산꼭대기에는 마른 풀과 나뭇가지로 움집 같은 것을 많이 세워두라. 그러나 더욱 마음 쓸 것은 지뢰이다. 골짜기 안팎에 지뢰를 넉넉히 묻어 불만 붙이면 온통 불바다가 될 수 있게 해야 된다.”
공명은 먼저 호로곡에 있는 마대를 불러 그렇게 이른 뒤 귓속말 로 다시 당부했다.
“그 일이 끝나면 호로곡 뒷길을 막아버리고 골짜기 입구에 남 모르게 숨어 있으라. 그러다가 사마의가 그곳으로 쫓아 들어오거든 얼른 지뢰를 터뜨리고 쌓아둔 마른 땔감들에 일제히 불을 붙여라.”
그런 다음 골짜기 입구에 군사를 하나 세워 낮에는 칠성기(七星 旗)를 가지고 신호하고 밤에는 등불 일곱 개로 신호하게 했다. 마대 가 명을 받고 나가자 공명은 그다음으로 위연을 불러들였다.
“너는 군사 오백을 이끌고 위병의 진채로 치고 들되 오직 사마의 가 싸우러 나오도록 꾀어내는 데 힘을 쓰라. 이겨서는 아니 되고 오 히려 거짓으로 진 체하며 끌어내는 게 좋으리라. 그리하면 사마의가 반드시 뒤쫓아올 것인데 그때 너는 칠성기가 보이는 곳으로 달아나 라. 밤이면 등불 일곱 개가 비치는 곳으로 달아나면 된다. 그렇게 사 마의를 꾀어 호로곡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를 사로잡을 계책 은 내게 따로 있다.”
공명이 그렇게 영을 내리자 위연은 곧 군사를 이끌고 위병의 진 채로 달려갔다. 공명은 다시 고상을 불러 일렀다.
“너는 목우와 유마를 이삼십 마리나 사오십 마리씩 떼를 지어 거 기에 곡식을 싣고 산길을 오락가락하라. 그러다가 위병이 덤비거든 그대로 빼앗겨버리는 게 네가 공을 세우는 길이다.”
알쏭달쏭한 명이었으나 고상도 그대로 따랐다. 공명은 그 뒤에도 기산에 있는 군사 하나하나에게 일을 주어 떠나보냈다. 겉으로는 그 대로 농사를 지으며 버틸 것처럼 꾸미고 있어야 할 그들이 받은 명 은 이랬다.
“너희들은 위병들이 와서 싸움을 걸거든 거짓으로 져주어라. 그러 나 사마의가 스스로 나오거든 모두 힘을 합쳐 위남을 공격하고 그 돌아갈 길을 끊으라.”
공명은 모든 장졸에게 할 일을 정해 준 뒤 스스로는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상방곡, 곧 호로곡에 진채를 내렸다.
그 무렵 위군 측에서도 때맞추어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싸움도 없이 몇 날을 보내자 좀이 쑤신 하후혜와 하후화가 사마의를 찾아보 고 말했다.
“요즈음 촉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농사를 지으면서 곳곳에 영채를 세워 오래 버틸 계책을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쳐 없애지 않고 편안히 날짜만 끌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적은 뿌리 가 깊어지고 껍질이 굳어져 나중에는 흔들어 뽑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별로 신통히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또한 틀림없이 공명의 계책일 것이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불퉁거렸다.
“도독께서 이렇게 의심만 하시고 계시다가는 언제 적을 쳐 없애 겠습니까? 우리 형제가 힘을 다해 싸워 죽음으로 결판을 내고 나라 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후 형제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사마의도 더 말리기 어려웠다.
“꼭 그렇다면 너희 두 사람이 길을 나누어 가서 싸워보도록 하라.”
그렇게 출전을 허락하자 하후혜와 하후화는 각기 오천 군사를 이 끌고 진채를 나섰다. 사마의는 움직이지 않고 그들이 보내올 소식만 기다렸다.
하후혜와 하후화는 길을 나누어 병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얼마 가기도 전에 병이 한 떼의 목우와 유마를 이끌고 오고 있는 게 보 였다. 두 사람은 한꺼번에 그 촉병을 덮쳤다. 촉병은 놀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내빼기에 바빴다. 그 바람에 그들이 끌고오던 목우와 유마는 모조리 위병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하후혜와 하후화는 빼앗은 목우와 유마를 이끌고 영채로 돌아갔 다. 사마의를 찾아보고 갖은 말로 저희 공을 스스로 추키고 허풍을 떨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다시 영채를 나간 하후 형제는 이번에는 백여 명의 병을 사로잡았다. 그들 역시 사마의에게로 끌고 가 공을 자 랑했다. 사마의는 끌려온 촉병들을 통해 허실을 알아내고 싶었다. 먼저 그들에게 잡혀온 경위를 물었다. 촉병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공명은 도독께서 굳게 지키실 뿐 나와 싸우시지 않자 저희에게 모두 흩어져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군량을 만들어 오래 견디며 싸울 작정인 듯합니다. 저희들은 그 바람에 각기 흩어져서 밭을 갈다가 뜻밖에도 이렇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여러 말 없이 그들을 모두 놓아주게 하였다. 하후화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그들을 죽이지 않습니까?”
“저따위 이름 없는 졸개들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놓아 주어 촉병들로 하여금 위나라 장수들이 너그럽고 어질다는 걸 알게 하느니만 못하다. 이렇게 적의 싸울 마음을 없애는 게 바로 여몽이 형주를 뺏을 때 쓴 계책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장수들에게도 두루 알리게 했다.
“앞으로도 촉병을 사로잡아 오거든 모두 좋게 돌려보내주라. 그렇게 하는 것도 공인 만큼 두텁게 상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되니 모든 장졸이 그 말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아직 그 병들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더 지켜보리라 하 고 하후혜와 하후화를 거듭 내보냈다.
공명은 그런 사마의를 꾀어내기 위해 끈기 있게 계책을 펼쳐나갔 다. 고상으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는 척 목우와 유마를 끌고 상방 곡으로 끊임없이 오가게 했다.
하후혜와 하후화는 그런 고상의 군사를 갑자기 덮쳐 보름 만에 잇달아 여러 번을 이겼다. 믿지 않던 사마의도 촉병이 거듭해 패하 는 걸 보자 조금씩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자기 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싶어 은근히 기뻐하며 기다리는데 어느 날 또 수십 명의 병이 잡혀왔다.
사마의가 그들을 불러 물었다.
“공명은 지금 어디 있느냐?”
“제갈승상은 지금 기산에 계시지 않고 상방곡 서쪽 삼십 리쯤 되 는 곳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상방곡으로 매일 군량을 날라야 하는 것은 실로 그 때문이올시다.”
잡혀온 촉병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사마의는 다시 한동안 그들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은 뒤에 그들을 놓아 보내주게 했다. 촉병들이 나가자 사마의도 드디어는 싸 울 마음이 생겼는지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공명은 지금 기산에 있지 않고 상방곡에 있다 한다. 그대들은 내 일 일제히 힘을 합쳐 기산의 대채를 빼앗도록 하라. 나는 뒤에서 접 응하겠다.”
무슨 속셈에서인지 사마의는 그렇게 영을 내렸다. 장수들은 모두 그 명에 따라 이튿날 있을 싸움 채비에 들어갔다.
“아버님은 무슨 까닭으로 오히려 뒤편을 맡아 치려 하십니까?”
이미 대군을 내기로 해놓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사마의가 이상했 던지 사마사가 아비를 찾아보고 그렇게 물었다. 사마의가 차근차근 까닭을 일러주었다.
“기산은 촉인들의 근본이 되는 곳이다. 만약 우리 군사가 공격하 는 걸 보면 반드시 모든 영채에서 달려와 구원하려 들지 않겠느냐? 그때 나는 상방곡을 빼앗아 거기 있는 군량과 마초를 불질러버리려 한다. 그리되면 적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볼 틈이 없어 어김없이 대패하고 말 것이다.”
사마사는 그 말에 엎드려 감복했다. 사마의는 곧 군사를 내어 나 아가며 따로이 장호와 악침에게 각기 오천 군사를 주어 위급할 때 뒤에서 응하게 했다.
그때 공명은 상방곡에서 몸을 빼내 기산 위에 앉아 있었다. 군사 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가만히 내려다보니 위병들이 삼천 명 오천 명 씩 줄을 지어 차례로 올라오는 게 기산의 대채를 뺏으려 드는 게 틀 림없었다. 공명은 가만히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만약 사마의가 스스로 나오거든 너희들은 얼른 위병의 진채를 덮쳐 위남을 뺏어버려라.”
이에 장수들은 모두 그에 따른 채비를 갖추고 사마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위병들이 기산으로 몰려들자 촉병들은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대채를 구원하러 가는 시늉을 했다. 사마의는 병이 모두 기산으로 몰려가는 걸 보고 얼른 두 아들과 중군을 몰아 상방곡으로 달려갔다.
위연이 상방곡, 곧 호로곡 어귀에서 사마의를 기다리고 있다가 위 병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자 말을 달려 나갔다. 위연이 보니 앞선 장수는 틀림없이 사마의였다.
“사마의는 달아나지 말라!”
위연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가 소리쳤다. 사마의도 지지 않고 창 을 끼고 달려 나가 곧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그러나 미처 세합 을 넘기기도 전에 위연이 갑자기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마의가 기세를 타고 위연을 뒤쫓았다. 위연은 미리 들은 대로 칠성기가 보이는 곳으로만 말을 몰았다. 사마의는 장수가 위연 하나 뿐인 데다 뒤따르는 군마까지 그리 많지 않아 마음 놓고 뒤쫓았다. 그 왼쪽에는 사마사가 붙어 서고 오른쪽에는 사마소가 붙어 서서 아 비를 지키며 일제히 밀고 나갔다.
이윽고 위연은 군사들과 함께 어떤 골짜기로 쫓겨 들어갔다. 바로 공명이 마대를 시켜 사마의를 사로잡을 갖가지 설비를 갖춰둔 상방 곡이었다.
사마의도 낯선 골짜기를 만나자 그냥 뒤쫓기가 꺼림칙했다. 먼저 군사 몇을 골짜기 안에 들여보내 살펴보게 했다.
“골짜기 안에 복병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산비탈에 풀로 엮은 움막 들만 여기저기 눈에 띄었습니다.”
이윽고 돌아온 군사들이 그렇게 골짜기 안의 형세를 알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군량을 쌓아놓은 곳일 것이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인마를 휘몰아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움막들은 모두 마른 풀더미였고, 마땅히 보여야 할 위연과 그 졸개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는 게 아무래 도 이상했다. 덜컥 의심이 든 사마의가 두 아들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만약 적이 군사를 내 골짜기 어귀를 막아버린다면 어찌하겠느냐?”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며 산 위에서 불덩이가 한 꺼번에 쏟아져 내려와 골짜기 입새를 불길로 막아버렸다.
놀란 위병들이 달아나려 해보았으나 앞이 막힌 골짜기라 길이 있 을 턱이 없었다. 거기다가 산 위에서는 불화살을 쏘아대고 골짜기 바닥에서는 지뢰가 터져 움막 안에 가득 든 마른 풀더미에 옮아 붙 으니 순식간에 골짜기는 큰 아궁이처럼 변해갔다.
사마의는 놀란 나머지 손발조차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허둥지 둥 말에서 내려 두 아들을 쓸어안고 크게 소리쳐 울었다.
“우리 삼부자가 이곳에서 함께 죽게 되었구나!”
그런데 그 무슨 하늘의 조화일까, 갑자기 한차례 미친 듯한 바람 이 일더니 하늘 가득 검은 구름이 덮었다. 이어 한소리 천둥과 함께 동이로 들이붓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골짜기 가득 타오르던 불은 금세 꺼지고 지뢰도 비에 젖어 더는 터지지 않았다. 공명이 펼쳐둔 모든 화기(火器)가 아무런 쓸모 없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걸 본 사마의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소리쳤다.
“이때를 틈타 뛰쳐나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려 하느냐? 어서 골짜기 밖으로 물러나라!”
그리고 힘을 다해 길을 열고 상방곡을 빠져나갔다. 뒤따라오던 장 호와 악침도 각기 이끌고 있던 군사를 몰아 그런 사마의를 구해냈다. 그때 상방곡에 남아 있던 촉장은 마대였다. 사마의가 빠져나가는 걸 뻔히 보면서도 워낙 거느린 군사가 적어 뒤쫓지를 못했다. 그사 이 사마의 부자와 장호, 악침은 군사를 하나로 합쳐 황황히 위남의 대채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마의가 위남에 이르러 보니 뜻밖에도 대채는 촉병에게 빼앗긴 뒤였고, 곽회와 손례는 부교 위에서 촉병과 싸우고 있었다. 사마의는 이끌고 있던 군사를 휘몰아 곽회와 손례를 도왔다. 그렇게 되자 촉병도 못 견뎌 물러났다. 사마의는 부교를 불태워 끊어버리고 위수 북쪽 언덕에 의지해 다시 영채를 세웠다.
한편 기산의 촉채를 치고 있던 위병은 사마의가 크게 싸움에 지 고 위남의 영채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자 놀라고 어지러워졌다. 얼 른 물러나려는데 사방에서 촉병이 몰려나와 치고 들기 시작했다. 그 러잖아도 어지러워져 있던 위병들은 그 뜻 아니한 공격에 견뎌내지 못했다. 크게 뭉그러지니 다친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요,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위병은 위 북에 있다는 저희 진채를 바라고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달아났다.
공명은 기산 위에서 사마의가 위연에게 속아 상방곡 입구로 들고, 골짜기 안에서 한 줄기 불빛이 높이 솟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이 제야말로 사마의를 잡았다 싶어 가슴 두근거리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에서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져 솟은 불길조차옮겨 붙지 못함을 보자 가슴이 무거웠다. 잠시 후 말 탄 군사 하나가 상방곡에서 달려와 걱정하던 소식을 공명에게 전했다.
“사마의 부자는 소나기의 도움을 입어 모두 골짜기 밖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탄식했다.
“일을 꾀하는 건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事在人 成事在 天]. 억지로는 할 수 없구나.”
공명 쪽으로 봐서는 실로 무심하기 그지없는 하늘이었다. 그러나 그 하늘의 도움으로 위북의 진채로 살아 돌아간 사마의도 한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목을 어루만지며 상방곡에서의 그 끔 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각 진채에 영을 내 렸다.
“위수 남쪽의 진채와 목책은 이미 모두 잃었다. 스스로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 덤벙대며 나가 싸운 탓이다. 이제 다시 장수들 중에 나 가서 싸우자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으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리라!”
혼이 나기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사마의의 말이 옳음 을 알고 그 영을 받들어 굳게 지킬 뿐 함부로 나가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정사와 『연의 사 이의 거리이다. 우선 『연의에서는 공명이 기산으로 진출한 게 여섯 번으로 되어 있지만 정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네 번뿐이다. 또 『연의에서 공명의 눈부신 계략으로 주도되는 싸움들도 정사에서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으며, 장합이 화살을 맞고 죽은 일 정도가 확인 될 뿐이다. 상방곡의 지뢰 같은 것은 전혀 기록에 없고 도사나 요술 쟁이 같은 공명의 모습은 온전히 허구로 보인다. 아마도 이전처럼 새롭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데다 싸움은 국가 간의 정 규전에 지루한 대치의 연속이라,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보다 많은 허구가 동원된 듯하다.
어쨌든 그렇게 양군이 싸움 없이 맞서고 있던 어느 날 곽회가 사 마의를 찾아보고 말했다.
“요사이 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게 알맞은 땅을 골라 영채를 옮기고 거기 자리 잡을 생각인 듯합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만약에 공명이 무공산으로 나와 그 산에 의지해 동쪽을 엿본다 면 우리는 모두가 위태롭게 된다. 그러나 위남으로 가 서쪽으로 오 장원(五丈原)에 이른다면 그때는 우리에게 아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곧 군사를 풀어 공명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피게 했다. 오 래잖아 풀어놓은 군사들이 알려왔다.
“공명은 병을 이끌고 오장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는 손으로 이마를 치며 기뻐했다.
“모두가 우리 대위(魏) 황제의 크신 복이로구나!”
사마의는 그런 외침과 함께 새삼 전령을 돌려 각 진채의 장수들에게 당부하게 했다.
“모든 장수들은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말라. 적은 머지않아 저절로 변란이 일 것이다.”
뒷날로 미루어보면, 정말로 한 나라(즉, 진(晋))를 열 기틀을 마련 할 비범한 인물다운 헤아림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