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8화 : 큰 별 마침내 오장원에 지다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8화 : 큰 별 마침내 오장원에 지다


큰 별 마침내 오장원에 지다

한편 스스로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나온 공명은 여 러 번 군사를 내 위병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위병은 도무지 나와 주 지를 않았다. 이에 공명은 한번 사마의를 격동시켜볼 양으로 꾀를 냈다. 아낙네들이 머리에 쓰는 건괵(中國, 부인이 상중에 쓰는 관. 평상시 의 두건이라는 설도 있음)과 역시 아낙네들의 호소, 흰 상복, 흰 빛깔 의 비단)를 큰 상자에 넣고 글 한 통을 곁들여 위병의 진채로 보냈다. 위의 장수들은 걱정스러운 대로 그 일을 감추지 못하고 상자를 지고 온 촉병의 사자를 사마의에게로 데려갔다. 사마의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부인네의 관과 옷이 들어 있고, 글 한 통이 곁들여 져 있었다. 사마의가 겉봉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대략 이런 뜻이 적 혀 있었다.

‘중달은 이왕에 대장이 되어 중원의 군사를 이끌고 와놓고도 어찌 하여 힘을 다해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하지 않는가. 굴을 파고 땅 구덩 이에 틀어박혀 칼과 화살을 피하려고만 드니 실로 아낙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이제 아낙네들이 쓰는 관과 옷을 보내니 나와 싸우지 않 으려거든 두 번 절하고 기꺼이 받으라. 그러나 아직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가슴을 지녔다면 이 글에 대한 답으로 날을 받아 나와 싸움이 마땅하리라.’


그 글을 읽은 사마의는 속으로 크게 노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공명에게 지는 것이라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명이 나를 한낱 아낙네로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형편이 이러하니 어쩌겠느냐?”

그리고 공명이 보내온 사자를 잘 대접하게 한 뒤 슬쩍 물었다.

“공명은 어떻게 먹고 얼마나 자느냐? 그리고 그가 맡은 일의 번거롭기와 단출함은 어떠하냐?”

사자가 별 생각 없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시고 밤이 늦어야 잠자리에 드십니다. 또 스무대 이상 매를 때릴 일은 모두 몸소 맡아 하시며, 잡수시는 것 은 하루 몇 홉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곁에 있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명이 먹기는 적게 먹고 하는 일은 많으니[食事煩]어찌 오래 버티겠는가!”

그 말을 듣고 돌아간 사자가 공명에게 전했다.

“사마의는 여자의 머릿수건과 옷을 받고 그 글을 읽고 난 뒤에도 별로 성내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다만 승상께서 침식을 어떻게 하시 는지, 일은 얼마나 맡고 계신지 따위만 물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대답해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깊이 탄식했다.

“그 사람은 나를 깊이 아는구나!”

거기에는 사마의를 격동시켜 싸움터로 끌어내기는커녕 자신의 실 상만 들켜버린 데 대한 후회까지 서려 있었다. 곁에 있던 주부 양옹 이 공명을 보고 간곡히 권했다.

“제가 보기에 승상께서는 몸소 모든 장부를 일일이 살피시어 꼭 그래야 할 것도 없는 일에까지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무릇 다스림 에는 중요한 게 하나 있으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래위가 서로의 일 을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안의 살림살이에 견주어 말한다면, 종놈에게는 밭갈이를 맡기고 종년에게는 밥 짓기를 맡겨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틈이 없게 함으로써 구하는 바를 모두 넉넉히 얻게 됨 과 같습니다. 집주인은 다만 가만히 들어앉아 베개를 높이고 맛난 것이나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집주인이 몸소 나서서 모 든 일을 다 하려 든다면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어지러워 끝내는 아 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 앎이 종놈이나 종년보 다 못해서가 아니라 집주인의 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옛사람 은 앉아서 도를 논하는 사람을 일러 삼공이라 하고, 짓고 행하는 사 람은 사대부라 했습니다. 옛적에 병길(丙吉)은 소가 기침하는 것은 걱정해도 사람이 길가에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진평은 자기가 쌓아둔 곡식과 돈의 양을 몰라 따로 맡은 사람이 있 다고만 했습니다(삼공이나 재상이 할 일이 아니라 하여). 그런데 지금 승상께서는 작은 일까지 몸소 맡으시어 하루 종일 땀을 흘리고 계시 니 어찌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사마의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 다.”

그러자 공명이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도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선제의 당부가 무거우니 딴 사람에 맡길 수가 없구나. 그 사람이 나같이 마음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는 수 없이 스스로 하고 있을 뿐이다.”

공명의 그 같은 말에 모든 사람이 함께 눈물을 떨구었다. 아마도 공명은 전부터 몸과 마음이 성치 못함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러 나 애써 성한 체 버텨 왔는데, 사마의가 한 말을 듣자 그날부터 겉으 로까지 성치 못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장수들도 함부로 군사를 내지 못하니 촉, 위의 싸움은 잠시 뜸해졌다.

그 무렵 공명이 사마의에게 여자들의 옷과 관을 보내왔다는 소문 은 위진(魏)의 장졸들에게 널리 퍼졌다. 장수들이 분함을 이기지 못해 사마의를 찾아보고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가 큰 나라의 이름난 장수들인데 어찌 촉인들의 그 같은 모욕을 참고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나가 싸워 적 과 결판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사마의는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내가 감히 싸우러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실은 나도 억지로 모욕을 참고 있다. 천자께서 특히 조서를 내리시어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말라 하신 까닭이다. 이제 만약 가볍게 나가 싸운다면 이는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게 된다.”

천자의 조서를 핑계로 그들을 달래보려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장 수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여기저기서 불평이 계속되었다. 사마 의가 못 이긴 체 물었다.

“그대들이 기어이 나가 싸우려 한다면 내가 천자께 상주해 허락 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나와 함께 나가 싸우는 게 낫지 않겠 는가?”

그제서야 장수들도 겨우 불평을 그치고 그 말을 받아들였다. 사마 의는 곧 표문 한 장을 써서 합비에 있는 위주 조예에게로 보냈다. 조예가 사마의의 표문을 받아 펼쳐보니 거기에는 대략 이렇게 적 혀 있었다.


‘신이 재주 없으면서 책임만 무거우니, 폐하께서 밝은 가르침을 내리시어 저희들에게 다만 굳게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 하셨습니 다. 그러나 지금 제갈량은 신에게 아낙네의 족두리와 치마저고리를 보내 신을 아낙네같이 여기니 그 부끄럽고 욕됨이 너무 큽니다. 신 은 먼저 폐하께 아뢰고 죽도록 싸워 조정의 은혜를 갚음과 아울러 우리 삼군의 욕됨을 씻을까 합니다. 실로 복받치는 분을 억누를 길 이 없어 감히 이 글을 올립니다.


조예가 그 글을 다 읽고 돌리니 여러 벼슬아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사마의가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더니 이제 무슨 까닭으로 표문을 올려 싸우기를 허락받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위위 신비가 여럿의 궁금함을 풀어주었다.

“사마의는 아마도 싸울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 틀림없이 제갈량의 모욕을 받자 장수들이 분해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표문을 올렸을 것 입니다. 폐하의 뜻을 내세워 성난 장수들을 달래려는 속셈입니다.” 

조예도 신비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신비에게 신절(信節)을 주고 위북의 진채로 보내 나가 싸우지 말라는 엄명을 전하게 했다.

사마의는 신비가 위주의 조서를 가지고 오자 장막 안으로 맞아들 였다. 신비가 조서를 읽어 위주의 뜻을 전했다.

“이제 다시 나가 싸우자고 떠드는 자는 곧 폐하의 뜻을 어기는 자이다!”

그렇게 되자 장수들도 더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마음속의 불평을 누르며 참고 지키기만 했다. 사마의가 가만히 신비에게 고마움을 드 러냈다.

“공은 참으로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구려.”

그리고 널리 군중에 사람을 보내 나가 싸워서는 아니 된다는 위 주의 명을 전하게 했다.

그 소식은 오래잖아 세작에게 탐지되어 촉장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장수들이 공명에게 그걸 알리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사마의가 삼군의 마음을 달래려고 부린 솜씨다.”

“승상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곁에 있던 강유가 물었다. 공명이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그가 별로 싸울 마음이 없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싸움을 허락받 으려 한 것은 장졸들에게 싸울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이라도 받지 않을 수가 있다’란 말 을 듣지도 못했느냐? 그런데 그는 천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위주에 게 사람을 보내 새삼 묻고 또 그 명을 받들고 있다. 이는 바로 사마 의가 조예의 뜻을 핑계로 성난 장수들을 달래려 함이 아니겠느냐? 거기다가 이제는 그 말을 우리 군중에까지 퍼뜨려 우리 군사들의 마 음까지 풀어지게 하려 한다.”

그리고 다시 사마의를 잡을 의논을 시작하는데 홀연 성도에서 비 위가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공명이 비위를 장막 안으로 맞아들이 자 비위가 말했다.

“동오와 위의 싸움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위주는 동오가 세 길로 군사를 몰아온다는 말을 듣자 스스로는 대군을 이끌고 합비 로 가고, 만총, 전예, 유소 셋에게 군사를 주어 세 갈래로 오병을 막 게 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만총은 계책을 써서 동오의 군량과 마초 및 싸움에 쓰는 기구를 함빡 태워버렸고, 오병들 사이에는 병이 돌 아 싸움은 동오에 처음부터 이롭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육손은 또 오왕과 약속하여 위병을 앞뒤에서 협공하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그 글을 가지고 가던 사자가 도중에 위병에게 사로잡히는 변고가 발생 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모든 계책이 위병에게 들켜버리니 마침 내 동오는 아무런 공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공명이 들으니 실로 기막힌 소식이었다. 동오가 위의 한 귀퉁이를 물고 늘어져 그 힘의 일부를 그리로 돌리게 해놓고, 그사이에 어떻 게 일을 이뤄가려 했는데 이제 그게 틀려버린 것이었다. 위가 온 힘 을 기울여 맞서 오면 중원을 회복한다는 건 가망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 상심한 공명은 비위의 말을 듣고 긴 탄식을 거듭하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놀란 장수들이 공명을 업어다 자리에 뉘였다. 반나절이나 있다 깨 어난 공명이 처량한 얼굴로 한탄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어지러운 걸 보니 옛날 병이 다시 도진 모양이 로구나. 이제 더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실로 걱정이다.”

그리고 밤이 되자 공명은 부축을 받으며 장막을 나가 가만히 천 문을 살폈다. 얼마나 되었을까, 그윽하게 밤하늘을 올려보던 공명은 놀라고 황황한 얼굴로 장막 안으로 들어가 강유를 찾았다. “내 목숨이 아침저녁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공명이 그렇게 탄식하자 강유가 놀라 물었다.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같이 말씀하십니까?”

“내가 삼대성(臺星)을 살펴보니 객(客)은 배나 밝은데 주성(主星)은 어둡고 흐렸다. 서로 나란히 비쳐도 그 빛이 꺼질 듯 희미하니, 그런 천상(天象)으로 보아 내 명을 알 수 있었다.”

공명이 힘없이 대답했다. 강유가 그런 공명의 힘을 돋워주듯 권했다.

“비록 천상이 그러하다 해도 하늘에 빌어 그걸 돌려놓는 법도 있 습니다. 어찌하여 그 법을 써보지 않으십니까?”

“내가 원래 기지(祈禳之法, 하늘에 빌어 재앙이나 질병 따위를 물리치는 방법)을 알고 있기는 하나 하늘이 그걸 들어줄지 모르겠구나.”

공명은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강유의 말에 힘을 얻은 듯했다. 곧 하늘에 기도드릴 채비에 들어갔다.

“그대는 갑사 마흔아홉을 골라 검은 옷을 입히고 검은 기를 들려 내 장막 밖을 돌게 하라. 나는 장막 안에서 북두칠성께 목숨을 빌어 보겠다. 만약 이레 동안 으뜸 되는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내 목숨은 열두 해[紀年]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등잔불이 꺼지면 나는 틀림없이 곧 죽고 말 것이니 쓸데없는 사람은 함부로 장막 안 에 들이지 않도록 하라. 기도에 쓰이는 모든 것은 두 명의 나이 어린 아이들을 써서 나르게 하면 된다.”

이에 강유는 공명이 시킨 대로 채비를 했다.

때는 마침 팔월 한가위였다. 그날 밤 은하수는 빛나고 이슬은 방 울방울 맑게 맺혔다. 바람 한 점 없어 깃발도 펄럭이지 않고, 조두( 斗, 군사 용구. 놋쇠로 만든 한 말들이 그릇으로 낮에는 솥으로 쓰고 밤에는 징 처럼 두드리는 데 쓴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강유는 장막 밖에서 검은 옷 입고 검은 기 마흔아홉과 함께 공명 의 기도를 지켰다. 공명은 장막 안에서 향을 사르고 제물을 차려 하 늘에 목숨을 늘여주기를 빌었다. 바닥에는 일곱 개 큰 등잔을 밝히 고 둘레에는 다시 마흔아홉 개 작은 등잔을 밝혔는데 그 한가운데 공명의 목숨을 뜻하는 주등(燈)을 세웠다. 이윽고 공명이 배축拜 祝)을 드리기 시작했다.

“양(亮)은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 숲속에 묻혀 조용히 늙으려 했 으나 소열황제로부터 삼고초려의 은혜를 입고 뒷일을 맡기는 무거운 당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위해 힘을 다 하듯, 저 또한 힘을 다해 나라를 훔친 역적을 쳐 없애기를 맹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뜻밖에도 장성(將星)은 떨어지려 하고, 받은 목숨도 끝나려 합니다. 삼가 글을 올려 푸른 하늘에 빌고 엎드려 그 자비로움을 구하오니 부디 이 목숨을 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위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주며, 옛것을 되살려 한실을 길이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한목숨을 부지 하고자 망령되이 비는 것이 아니라 실로 가슴의 충절에서 비롯된 기 도임을 하늘이여 굽어 살피소서.”

그렇게 빌기를 다한 공명은 제상 앞에 아침까지 엎드려 있었다. 오늘날의 추측대로 공명의 병명이 폐결핵이었다면 그야말로 치명적 인 무리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빌기를 마친 공명은 아픈 몸을 이끌고도 진중의 일을 돌 보기를 놓지 않았다. 끊임없이 피를 토하면서도 낮에는 싸움에 이길 의논을 거듭하고 밤에는 또 새벽까지 엎드려 북두칠성에 빌기를 그 치지 않았다.

한편 사마의는 그 무렵 제명을 핑계로 영채 안에 깊이 틀어박혀 굳게 지키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밖에 나가 천문을 한참 살 피더니 문득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얼굴로 하후패에게 말했다. “내가 천문을 보니 장성 하나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공명이 병들어 머지않아 죽을 징조다. 너는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가 서 오장원에 있는 촉진을 살펴보고 오너라. 너희들이 건드려도 병 이 달려 나와 싸우지 않으면 틀림없이 공명이 병이 난 것이니 그때는 나도 틈을 타 그들을 치겠다.”

그 말을 들은 하후패는 신이 나서 군사를 몰고 촉진으로 달려갔다.

그때 공명은 벌써 엿새째나 기도를 드리고 난 뒤였다. 아직도 주 등(燈)이 켜져 있는 걸 보자 공명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 이제 하룻밤만 더 버티면 다시 열두 해의 목숨을 얻게 된다는 희망에 차 머리를 풀고 칼을 짚은 채 빌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한밤중의 일이었다. 진채 밖에서 함성이 일어 강유가 막 사람을 보내 알아보려 하는데 위연이 나는 듯 달려와 공명의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위병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며 공명을 찾아 허둥대던 위연이 잘못 발을 옮겨 그때까지 지켜온 주등을 엎어 꺼버렸다. 그걸 본 공명이 짚고 있던 칼을 내던지며 한탄했다.

“죽고 사는 게 다 명에 달렸으니 빈다고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제서야 놀란 위연이 황황히 땅에 엎드리며 죄를 빌었다. 성난 강유가 칼을 뽑아 위연을 베려 했다. 공명이 그런 강유를 말렸다. 

“이것은 내 명이 다해 그리 된 것이지 위문장(文長)의 죄가 아니다.”

그러자 강유도 속을 누르며 칼을 거두었다. 하지만 주등이 꺼짐으 로써 공명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 자리에서 몇 차례 피를 토하더니 침상에 쓰러져 누우며 위연에게 말했다.

“이는 사마의가 내게 병이 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우리의 허실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그대는 어서 달려 나가 적을 맞으라.”

그 말을 들은 위연은 곧 군사를 이끌고 영채를 나갔다.

하후패는 위연이 군사들과 함께 달려 나오자 깜짝 놀랐다. 한번 창칼을 맞대보지도 않고 군사를 돌려 달아났다. 위연은 그런 위병을 이십리나 쫓아버린 뒤에야 되돌아왔다.

공명은 되돌아온 위연으로 하여금 전보다 한층 엄하게 본채를 지 키게 했다. 위연이 명을 받고 나간 뒤 강유가 찾아와 문안을 드렸다. 공명은 그를 침상 곁으로 불러 나직나직 말했다.

“나는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다시 일으 키려 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이 같아 이제 머지않아 죽게 되었다. 그전에 그대에게 밝힐 게 하나 있다. 나는 평생에 배운 바를 모두 적 어 스물네 편 십사만 천백 열넉 자의 책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여 덟 가지 힘써 행할 일과 일곱 가지 경계할 일과 여섯 가지 두려워할 일과 다섯 가지 겁낼 일이 모두 적혀 있다. 나는 그 책을 전하려고 여러 장수들을 살펴보았으나 오직 그대만이 그 책을 받을 만하게 보 였다. 그 책을 그대에게 남길 터이니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다루지 말라.”

바로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차례 숨을 돌린 뒤 공명이 다시 말했다.

“나는 연노弩)란 걸 만들었지만 아직 한번도 써본 적이 없다. 연노는 내가 특히 고안한 쇠뇌로 화살 길이는 여덟 치요 쇠뇌 한 벌 이 한꺼번에 열 개의 살을 날릴 수가 있다. 모두 도본을 그려 남겨두 었으니 그대가 거기 따라 만들어 한번 써보도록 하라.”

이어서 공명은 한 가지 당부를 더 보탰다.

“촉으로 드는 여러 갈래 길은 모두가 거칠고 험해 그리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음평만은 반드시 구석구석 알아두어야 한다. 그 땅은 비록 험준하기는 하나 오랜 뒤에는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강유를 내보낸 공명은 곧 마대를 불러들였다.

“너는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대로 하라.”

공명은 그 말과 함께 마대에게 무언가 귓속말로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었다.

마대가 나가자 양의가 불려 왔다. 공명은 양의를 침상 곁으로 오 게 해 비단주머니 하나를 주며 가만히 일렀다.

“내가 죽으면 위연은 틀림없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다. 위연이 모 반을 일으켜 그 싸움터에서 마주치게 되거든 그때 이 비단주머니를 열어 보라. 위연을 목 벨 사람이 절로 나올 것이다.”

공명은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대비를 마치자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공명이 다시 깨어난 것은 그날 밤이 깊어서였다. 공명은 후주에게 도 글을 올려 목숨이 오래지 않음을 알리고 그날 밤으로 그 글을 후 주에게로 띄워보냈다.

공명이 보낸 글을 받은 후주는 깜짝 놀랐다. 상서 이복(福)을 급 히 오장원으로 보내 공명을 찾아보고 문안을 드릴 겸 자세한 뒷일을 물어보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오장원에 이른 이복은 공명을 찾아보고 후주의 명을 전함과 아울러 문안을 드렸다. 공명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도중에 죽어 나라의 큰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실로 천하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내가 죽더라도 공들은 마땅히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살펴야 할 것이오. 전부터 내려오던 제도를 쉽게 바꾸어서는 아니 되며 내가 쓴 사람도 함부로 내쫓지 않도록 하시오. 나의 병법은 모두 강유에게 전했으니 그는 능히 나 의 뜻을 이어 나라를 위해 힘을 쓸 것이외다. 나는 이제 아침에 죽을 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 마땅히 표문을 남겨 그 모든 걸천 자께 아뢰겠소.”

이복은 그 말을 듣고 총총히 후주에게로 돌아갔다.

이복이 떠나간 뒤 공명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가만히 본채를 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영채들을 두루 돌아보았다. 얼굴을 스쳐가는 가을바람이 뼛속 을 뚫고 드는 듯한 한기를 일으키자 공명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다시는 싸움터에 나서서 역적을 칠 수 없겠구나! 너르고 너른 푸 른 하늘아, 너에게도 끝 간 데가 있느냐?”

그리고 오래오래 탄식하며 마지않다가 수레를 돌려 본채로 돌아왔다.

그 나들이가 해로웠는지 그 뒤로 공명의 병세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걸 느낀 공명이 양의를 불러 다시 일렀다.

“마대, 요화, 장익, 왕평, 장의 같은 이들은 모두가 충성스럽고 죽 음으로 절개를 지킬 사람들이다. 오래 싸움터를 누볐고 수고로움도 많았으니 모두를 나라가 쓸 만하다. 내가 죽은 뒤라도 모든 일은 그 전에 정한 대로 지켜나가라. 또 이번에 군사를 물릴 때는 천천히 물러나야 할 것이며 급하게 몰려가서는 아니 된다. 그대는 지모와 계략을 깊이 아는 사람인즉 여러 말로 당부하지 않아도 되리라. 강백 약은 슬기와 용맹을 갖춘 사람이니 뒤따라오며 쫓아오는 적병을 막 게 하라.”

양의가 울며 그런 공명의 명을 받아들였다. 공명은 붓, 벼루, 먹, 종이를 가져오게 해 침상에 누운 채 후주에게 남길 표문을 썼다.


‘엎드려 듣건대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겪어야 할 일이며 정해진 목숨은 바꾸기 어렵다 했습니다. 머지않은 죽음을 앞두고 남은 충성 을 다하려 마지막으로 몇 자 올립니다. 신 양은 태어남이 어리석고 옹졸한 데도 나라가 어려운 때에 병부(兵)를 맡고 중한 소임을 오 로지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북쪽의 역적을 치러 나왔으나, 공을 이루기도 전에 몸속 깊이 병이 들고 목숨은 아침저녁에 걸려, 끝내 폐하를 섬기지 못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한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해 욕심을 줄이시고, 몸을 아껴 백성을 사랑하며, 효도를 선황(先皇)께 이르도록 하시고, 어지심을 널리 세상에 베푸소서. 현량한 이를 높이 쓰심으로 숨어 지내는 인재를 뽑아 올리시고, 풍속을 두텁게 하심으로써 간악하고 요사스런 것들을 물리치소서.

신의 집에는 뽕나무 팔백 그루와 밭 쉰 뙈기[頃, 백 걸음쯤 되는 밭이 랑 백개]이 있어 자식들이 먹고 입기에는 넉넉했습니다. 신이 조정 밖에 있게 됨에 이르러는 이 한 몸에 쓰이는 것이 모두 나라에서 나 오니 따로 재산을 모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신이 죽는 날에도 안으로는 남는 베 조각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남는 재물이 없게 하여 폐하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명은 쓰기를 마친 뒤 또다시 양의에게 일렀다.

“내가 죽더라도 발상(喪)을 하지 말라. 큰 상자 하나를 만들어 그 안에 내 시체를 앉히고, 쌀 일곱 알을 그 입에 넣으며 다리 앞에 는 등잔 하나를 밝히라. 군사들은 여느 때처럼 흔들림이 없게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장성(將星)은 떨어지지 않으리니, 죽은 내 혼이 일어나 그 별을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장성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의심이 일어 가 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때 후군을 먼저 보낸 뒤 한 영채 한 영 채씩 천천히 물러나라. 만약 그래도 사마의가 뒤쫓아오면 그대는 얼 른 진세를 펼치고 깃발을 돌려세우라. 그리하여 사마의가 오기를 기 다렸다가 내가 전에 내 모양을 닮게 깎아둔 목상을 수레 위에 얹고, 또한 전에 하던 것처럼 대소의 장사들을 시켜 그 수레를 밀고 나가 게 하라. 그걸 보면 사마의는 틀림없이 놀라 달아날 것이다.”

양의는 공명이 시키는 걸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겼다.

그날 밤 공명은 다시 한번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장막 밖으로 나 갔다. 한동안 북두성을 올려다보다가 그 곁의 한 별을 손가락질하며 한스럽게 말했다.

“저게 나의 별 장성이다.”

여럿이 그 별을 보니 그 빛이 흐리고 어두우며 금세 떨어질 듯 흔 들거리고 있었다. 공명은 다시 칼로 그 별을 겨누며 입으로 무언가를 읊었다. 그리고 읊기가 끝나자 급히 장막 안으로 돌아가더니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수들이 놀라 허둥거리고 있는데 상서 이복이 다시 돌아왔다. 이 복은 공명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말을 못하게 된 걸 보고 크게 소리 내어 울며 탄식했다.

“내가 나라의 큰일을 그르쳤구나!”

그러나 공명은 얼마 안 돼 다시 깨어났다. 겨우 눈을 떠 주위를 돌 아보다가 이복이 되돌아와 침상 곁에 있는 걸 보고 힘들여 목소리를 짜냈다.

“나는 진작 공이 되돌아올 줄 알았소.”

이복이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공명에게 말했다.

“저는 원래 승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구에게 큰일을 맡겨야 하 는가를 물어보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쁘게 설 치다 그걸 여쭙지 못하고 여길 떠났기에 이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완을 나 대신으로 쓰는 게 좋을 것이오.”

공명이 미리 생각해둔 대로 밝혔다.

이복이 다시 물었다.

“장완 다음으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비위로 하여금 잇게 하면 될 것이오.”

“그 뒤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복이 한 번 더 물었으나 공명은 더 대답이 없었다. 심상찮게 느낀 장수들이 다가가 보니 이미 공명은 숨져 있었다. 때는 건흥 십삼 년 가을 팔월 열사흘이요, 공명의 나이 쉰넷이었다.

뒷날 두공부(工部, 두보는 시를 지어 공명을 노래했다.

어젯밤 별 하나 길게 진채 앞에 지더니 長星昨夜前營

이 아침 선생이 돌아가신 소식을 듣네. 訃報先生此曰傾

위엄 서린 장막에서 호령소리 안 들리니 虎帳不聞施號令

누가 다시 기린대에서 공명을 드러내리 麟臺誰復著勳名 

문하의 삼천 객 헛되이 남았고, 空餘門下三千客 

가슴속의 십만 대병도 뜻 같잖구나. 辜負胸中十萬兵

풀잎 푸르러 보기 좋고 날도 맑건만 好看綠陰淸畫裏

반겨 맞는 노랫소리 이제 다시 들을 길 없네. 於今無復迂歌聲

백낙천(天)도 또한 읊었다.

선생은 자취 감춰 숲속에 누웠으나 先生晦跡臥山林

밝은 주인 삼고초려로 찾아왔네. 三顧欣逢賢主尋

물고기 남양에 이르러 마침내 물을 얻고, 魚到南陽方得水

용이 하늘 밖을 날자 장마가 쏟아졌다. 龍飛天外便為霖

주인은 어린 자식 당부 예절 다하고 託孤旣盡慇憨禮

신하는 나라 위해 충의를 기울였네. 報國還傾忠義心 

앞뒤의 출사표 이제껏 남아 前後出師遺表

읽는 이의 옷깃 눈물로 젖게 한다. 令人一覽淚沾襟

촉에 장수교위를 지낸 요립(寥立)이란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이르기를 재주가 공명을 따를 만하다 하고 늘상 벼슬이 낮은 걸 불평 하며 공명을 원망해 마지않았다. 이에 공명은 벼슬을 떼고 문산으로 내쫓아버렸는데, 공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요립이 울며 말했다. 

“내 이제 좌임, 옷깃을 왼쪽으로 맴. 미개함 또는 서민을 뜻한다)으 로 끝나겠구나. 누가 나를 다시 써주겠는가!”

전에 죄를 짓고 공명에게 쫓겨간 이엄도 또한 슬퍼해 마지않았다. 큰 소리로 울다가 병이 들어 오래잖아 죽었다.

“공명이 다시 나를 써주어서 전에 지은 죄를 씻을 기회를 얻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공명이 죽고 말았으니 누가 나를 써주겠 는가!”

그게 죽기 전에 이엄이 뇌까린 탄식이었다. 원미지(元微, 원진, 당 의 시인)도 시를 지어 공명을 노래했다.

난세를 다스려 위태로운 주인 돕고 撥亂扶危主

어린 주인 맡기는 명예로써 받다 慇懃受託孤

빛나는 재주 관중과 악의보다 낫고 英才過管樂

묘한 계책 손자와 오자를 앞섰다. 妙策勝孫吳

늠름하구나 출사표 凜凜出師表

당당하다 팔진도 堂堂八陣圖

공과 같은 큰 덕 지닌 이 如公存盛德

예와 지금 어디에 있으리 應嘆古今無

하지만 이는 옛사람들의 감상이고 뒷날에 이르러서는 다른 이야기도 들린다.

요즈음 유행하는 민중사관은 조조를 재평가함과 아울러 유비 집 단 특히 제갈량에 대한 비판과 의심을 여러 가지로 제기하고 있다. 

‘한나라는 불한당, 모리배, 폭력배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백성을 수 탈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부도덕한 계급 집단이었을 뿐이다. 그 한나라를 뒤엎은 조조를 찬탈자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일찍이 중국의 곽말약이 그런 말을 한 이래로 복권되기 시작한 조조는 이제 혁명가 또는 민중의 대변자로 추켜세워지기까 지 한다.

그리고 거기 따라 유비 집단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가치 체계 에 고집스레 매달린 보수주의자들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한(漢)왕조 를 되일으키려고 애쓴 반동 집단으로까지 격하되며, 그 핵심 인물인 제갈량도 비슷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곧 반동 집단에 이념과 논리 를 제공한 몽상가 또는 대의보다는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가 풍부하고 지배 체제의 기반이 잡힌 위나 오보다는 후발 세력 집단으 로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택했을 뿐인 야심가로까지 비판한다. 과연 조조가 한 일 중에는 민중사적 측면에서 볼만한 게 많고, 혁 명가나 개혁자의 모습도 뚜렷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한 야심가, 독 재자, 그리고 권위주의자인 조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과연 그에게 민중적이란 말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 갈 수도 있고, 또 그 자신은 순수하게 민중적인 의지로 그 모든 일을 했다 쳐도 그의 만년이나 그의 권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위 왕조 또한 앞 세대의 부 패와 무능을 답습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조조를 무턱대고 추켜올리는 쪽도 무리가 있는 성싶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반대편에 선 제갈량에 관한 논의다. 먼저 그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논의부터 차근차근 들어보자. 요즈음의 논자들은 주로 『연의』를 통해 빛나는 제갈량의 신화들을 통속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의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는 삼분천하론(三分 下)만 해도 제갈량의 독창이라기보다는 당시 형주, 양주의 고급한 식자층에게는 간간이 얘기되던 논의 중의 하나였다고 하며, 그 한 근거로 제갈량보다 먼저 정사에서 노숙이 손권에게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한 적이 있음을 든다.

꼭 믿을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위략(魏略)』이란 책에서는 그 유명 한 삼고초려(三顧草廬)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곧 유비와 제갈량 의 만남은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갈량이 그 지방의 몇몇 선비와 더불어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은 그때 보여준 제갈량의 남다른 식견에 반한 뒤 이며, 제갈량은 다만 그 뒤에야 있은 삼고초려만을 출사표에 실어 스스로를 높였을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다음 흔히 제갈량을 세속적인 야심가로 의심하는 데 쓰는 근거 로는 관우와 형주 문제가 있다. 제갈량이 나타나기 전 유비 집단의 이인자는 어김없이 관우였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자체는 정말로 있 었는지 모르나 관우는 어쨌든 유비와 한 밥상에서 먹고 한 침상에 자는 형제와 같은 사이였고, 형주를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주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관우와의 권력 투쟁에서 제갈량이 최초로 우위를 차지 하는 것은 화용도 사건 뒤였다. 관우의 성격이나 조조의 잔존 세력 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관우에게 떠맡기고 굴복을 강요했 다는 것이다. 서천 정벌에서 관우를 뺀 것은 부득이했다 쳐도, 서천 정벌이 완료된 뒤까지 관우가 있는 형주를 소홀히 한 데서도 권력 투쟁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도 있다.

곧 형주는 촉이 중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군사적 요충인데도 관우로 하여금 거의 독립 세력으로 무리한 대 위전쟁(對魏戰爭)을 벌이게 한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 다. 관우가 서천 공략에 성공한 제갈량에 대한 경쟁 심리로 무모한 싸움을 시작했는지 정말로 제갈량이 부추겼는지가 명백하지 않고, 설령 제갈량이 도우려 해도 유언(劉焉), 유장(劉璋) 두 부자가 이십 년이나 잘 다스려 온 땅을 방금 빼앗은 뒤라 실로 그런 힘이 없었을 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의심이 가는 구석은 있다.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진수는 정사(正史)의 평에서,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웅변 (應)하는 재주나 장수로서의 지략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했고, 첫 번째 기산으로 나갈 때 위연의 제안을 물리친 것에도 다 른 해석이 있다. 촉과 위는 국력이 거의 열 배나 차이가 나서 제갈량 이 시종한 정규전보다는 위연의 제안 같은 기습이 효과를 볼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다. 가정같은 군사적 요충을 마속(馬謖) 같은 애송이에게 개인적인 신임만으로 맡긴 것도 용병술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일이며, 열세인 군사로 여러 번의 싸움에서 한결같이 정규 전만 고집하고 있는 것도 뛰어난 전략적 재능과는 멀어 보인다.

『연의』에서는 신비한 위력을 보인 팔진도라는 것도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고, 목우(牛), 유마(流馬), 연 노(連弩) 같은 무기도 개량한 공은 있을지 모르되 군사적인 천재의 근거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편이 옳다.

거기다가 『연의』에서 보이는 술사(術士)나 이인(異人) 같은 일면 은 제갈량의 신화를 더욱 신빙성 없이 만들고 있다. 그는 바람[東南 風]을 빌고, 신장(神將)을 부리며(남만에서 싸울 때), 구름을 마음대로 부르고(사마의와의 싸움), 하늘의 별을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놓는다. 그를 추키기 위한 문사)의 발상이 과학과 합리의 시대에 이르러 서는 원래 있던 제갈량의 비범함까지 의심쩍게 만들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조조를 무턱대고 민중적인 영웅으로 추켜올리는 데 무리 가 있는 것처럼 제갈량을 턱없이 깎아내리는 것도 무리이기는 마찬 가지인 성싶다. 그 첫 번째 근거는 정사에서의 비중이다. 시대가 달 라지고 사관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해 대부 분의 사서는 그 시대를 기록함에 있어 제갈량에 선주인 유비보다 많 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 진수는 바로 그 제갈량에게 죽음을 당한 진식의 아들이면서도 제갈량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겨놓고 있다.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를 따랐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지었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비록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주었으며, 교 묘한 말로 변명하려 드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벌주 었다. 작은 일을 작다 하여 포상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나쁜 짓도 작 다 하여 꾸짖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곰곰이 살펴 행하고 사 물은 그 근본을 헤아려 다스렸다. 명분을 따르되 실질도 잃지 않았 고, 거짓된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이 모두 두 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다스림과 죄줌이 비록 엄해도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씀이 공평하였으며, 경계하는 것 과 권하는 것이 뚜렷해서였다.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뛰어 난 인물이었다 할 만하다. 관중이나 소하何)에 견줄 만하다……………. 제갈량이 젊어 몰두했던 법가(家)의 한 이상을 보는 듯하다. 거 기다가 한 나라의 승상이면서 재산이 겨우 뽕나무 팔백 그루에 밭 쉰 뙈기라는 그 검소와 무욕을 상기하면, 다른 모든 걸 젖혀두고라 도 비범하고 고결한 인물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제갈량의 군사적인 재능은 틀림없이 의심스런 데가 있지만, 그 또한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먼저 염두에 둘 것은 촉의 국력에 관계된 그의 군사적인 입장이다.

통상으로 제갈량이 대위(魏戰)에 동원한 병력은 촉의 전력( 力)에 가까웠다. 사마의처럼 위의 병력 일부만 가지고 나온 경우에 는 군사적인 모험도 가능하고 기공(奇攻)도 써볼 수 있다. 그러나 자 기가 이끈 병력의 승패가 나라의 흥망과 직결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모든 작전에서 신중하고 세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이유만으로도 위연의 제안을 무시한 공명의 정당성이 발견되며 군사 적인 무능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진다.

거기다가 오히려 국력이 거의 열 배나 강한 위를 상대로 싸우면 서도 오히려 공세(攻勢)로 일관하고 있음을 보면 비범한 군사적인 재능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야심가로서 그가 받는 의심도 대개는 뒷사람의 공론인 듯한 혐의 가 짙다. 지난날의 동학(同學)들이 위나라에서 아직도 하찮은 벼슬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그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길래…”

하고 탄식했다는데, 그것은 그의 선택이 반드시 자신을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이점만을 보고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엿볼 수 있게 한다. 또 그가 권력 추구에만 급급한 야심가였다면 마침내 대 권을 잡은 뒤에는 반드시 보상 심리에 따른 행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도 그는 결백하다. 허수아비 같은 후주에게 그가 바친 충 성이나 세속적인 욕망에서 초연했던 일상생활만으로도 변호는 충분 하다.

관우와의 권력 투쟁은,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권력욕보 다는 한 법가로서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형주 문제 도 그렇다. 당시 그가 정벌을 끝낸 서촉은 유언과 유장의 이십 년 통 치가 있었던 땅인데, 특히 유언은 한때 그 덕망으로 천자에 추대될 뻔했던 인물로서 그 땅 백성들의 숭앙을 받았다. 공명이 관우를 도 우러 가고 싶어도, 있을지 모르는 유장파의 저항 때문에 함부로 서천을 비울 수가 없었다는 편이 옳다.

그의 보수적인 측면 또는 반동적인 이상에 대해서도 그리 함부로 말할 성질은 아닌 듯싶다. 보수와 진보, 혁명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 은 그 사람의 기질이나 성장 환경 또는 이념 형성 과정의 문제이지, 정부(否)나 선악(善惡)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근 이천 년 뒤의 사람으로서 오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의지해 옛사람의 이상을 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뿐더러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그 경우 대 개는 역사보다는 현실의 목적성에 기울어져 옛사람의 생각 그 자체 보다는 현재 그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거나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 기 때문이다.

뛰어난 발명가나 신비한 술사로서의 묘사도 반드시 제갈량의 면 모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무기의 우열이 전쟁의 승패에 큰 영 향을 미치는 점을 생각하면, 그게 실질적인 창안이건 다만 개량에 지나지 않건 제갈량이 그쪽에 힘을 쏟은 것은 한 군략가로서는 오히 려 당연하지 않을까.

비를 비느니 바람을 부르느니 하는 요술 같은 일도 따지고 보면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현대전에서도 장기 일기예보는 매우 중요 해서, 이차 대전 때의 몇몇 전투는 바로 그 일기예보에 승패가 달렸 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옛 중국의 병가들은 천시(天時) 또는 지리(地利)라는 이름으로 지형과 기후를 중히 여긴 전통이 있고, 제 갈량도 마찬가지여서 거기 관해 세밀한 관찰과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의 특정한 기상 상태는 단기적으로 예보가 가능했을 것이며, 그 예보를 전쟁에서 활용한 걸 신화화한 것이 『연의 에서 보는 제갈량의 신통력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실제로 적벽대전을 앞두고 그가 빌었다는 동남풍은 해마다 그 무렵 양자강 일대에 이는 무역풍의 일종이라는 말도 있다. 그 일대에서 살아온 그는 일찍이 그런 현상을 관찰해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알맞은 연출 과 함께 활용한 것이라는 게 뒷사람의 추측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제갈량의 상을 맞춰보면, 그는 군주의 뛰어난 보좌역이며 명참모, 명재상, 명문장가였고, 당대 최고봉의 병가인 동 시에 법가로서의 이상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이런 면 때문에 그의 정치 이상에 비판적이었던 곽말약도 남양에 있 는 제갈량의 초당 터에 ‘삼대하일인(三代下一人, 하, 은, 주나라 이후 최 고의 인물)’이란 친필을 남겼을 것이다.

뒷사람의 부질없는 논의는 다만 제갈량이란 흔치 않은 역사의 석 상(像)을 스쳐가는 세월의 비바람이요, 고색창연함을 더하며 쌓이 는 먼지와 이끼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