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화 : 가자, 낙양으로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화 : 가자, 낙양으로


가자, 낙양으로

낙양 북쪽 천삼백 리에 자리 잡고 있는 평원군(平原郡)은 성시에 는 호(戶) 십오만에 인구 백만을 넘는 군국(郡國)이었다. 평원성은 그 군국에 딸린 아홉 성 가운데 하나로서 평원현의 치소(治所) 이기 도 했는데, 기름진 들판을 가로지른 독마하(篤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평원성에 한 마장쯤 떨어진 독마하 남쪽의 한 들판에서는 군 사들의 조련이 한창이었다. 보군과 기마대 합쳐 한 삼천이나 될까, 대단한 군사는 아니었으나, 한 개 현에 속한 군사로는 좀 많았다. 원 래 현위에 속한 갑사들 외에 향리의 의용군을 더해 머릿수를 불린 듯했다. 황건의 잔당이며 새로 일기 시작한 흑산적(山賊)의 무리 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고을마다 나름의 무력을 갖출 필요가 많은 때라고는 하지만, 그 조련 또한 멀리서 보기에도 어떤 위압감을 느낄만큼 엄정했다.

벌판 아래쪽 기병들이 말타기와 말 위에서의 창싸움을 익히는 곳 은 먼지가 자옥이 피어올라 그 내닫고 부딪힘이 치열함을 보여주었 다. 위쪽 보졸들이 조련을 받고 있는 곳도 열에 들떠 어지럽기는 마 찬가지였다. 대(隊, 가로줄. 대개 스무 명)와 오(伍, 세로줄. 대개 다섯 명) 를 이루고, 진陣)을 짰다가 흩어지는가 하면 단병접전(單戰)을 익히느라 창칼을 맞대고 땀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조련을 지휘하는 이들이었다. 현위나 사마 (司馬)등의 군리(郡吏)가 아니라 마궁수와 보궁수란 하급 사관이었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도 지휘가 어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기병을 조련시키는 마궁수는 다름 아닌 관우였고, 보졸들을 조련 시키고 있는 보궁수는 장비였다. 장거張), 장순(張)의 난을 진압 하는 데 세운 공으로 평원의 현령이 된 유비를 따라와 그곳을 근거 지로 군사를 기르고 있었다.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너희만을 높일 수 있겠느냐? 또 높인다 한 들 현리가 높아야 얼마이겠느냐?”

유비는 그같이 말하며 그들을 하급 군관의 자리에 두었으나 워낙 무예가 출중한 데다 현령과 한 상에서 먹고 한방에서 잠자는 의형제 들이라 아무도 그런 관우와 장비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 거기다가 관우와 장비도 하찮은 벼슬 따위는 별로 안중에 두지 않아 이태가 되어도 여전히 마궁수요, 보궁수였다.

관우와 장비는 무엇보다도 평원현이 유비가 전에 벼슬을 살았던 그 어느 고을보다 크고 사람과 물산이 넉넉해 힘을 기르기에 좋다는 점을 기뻐했다. 유비를 도와주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멀지 않다는 것 도 여러 가지로 유리했다. 공손찬은 유비의 벼슬길을 힘써 주선했을 뿐만 아니라, 마필이며 병기까지 대주어 유비가 군사를 기르는 데 보탬을 주었다. 마음속으로는 유비를 자기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조련은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가 솟을수록 열기를 더해갔 다. 그런데 점심 나절이 되면서 보졸들 쪽이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 작했다. 이상히 여긴 관우가 자신이 맡아 조련하던 기병들을 잠시 쉬게 하고 보졸들 쪽으로 가보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장비가 보이 지 않았다.

“장장군께서는 얼마 전 성안에 들어가신 후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관우의 물음에 장비를 모시는 사졸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장비 가 없어졌다면 뻔한 일이었다. 또 어디에선가 동이째 술을 퍼마실 것이라 짐작하니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특히 관우가 걱정하는 것은 그 얼마 전부터 나타난 변화였다. 한 동안 술까지 절제하면서 군사를 조련하는 일에 열중하던 장비가 갑 자기 다시 술을 퍼마시고 거칠고 사납게 굴기 시작했다. 무언가 유 비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나 평소에도 저잣거리와는 먼 관우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늘은 반드시 까닭을 알아야겠다.’

관우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자신이 맡은 군사들을 조련하려고 돌아왔다. 하지만 종내 장비의 일이 마음 놓이지 않았다.

장비가 머리끝까지 술이 올라 비척거리며 조련 장소에 다시 나타 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할 때였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곳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똑바로 관우에게로 왔다.

“장비, 대낮부터 웬 술인가?”

관우는 장비가 비척이며 오는 걸 임시로 세운 장대(將臺) 위에서 내려다보며 소리쳐 꾸짖었다. 그러나 장비는 대답 대신 곁에 선 ‘영 (令)’자기를 뽑아들더니 나무젓가락 부러뜨리듯 팔뚝만 한 그 깃대 를 부러뜨려 팽개쳤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놀란 관우가 장대에서 뛰어내리며 호통을 쳤다. 그제야 장비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관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 다 치우시오. 이따위 짓이 무슨 소용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지러운 천하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 하고자 힘을 기르는 것이거늘 네가 그걸 몰라 묻느냐?”

“어지러운 천하? 으하하하… 도탄에 빠진 백성, 으하하하…….” 

장비는 무엇이 우스운지 고개를 젖히고 질그릇 깨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빈정거리듯 되물었다.

“그래, 이 삼천 군사를 길러 무얼 하시겠단 말씀이오? 이 보궁수와 거기 선 마궁수를 이끌고 태산에 들어가 산채라도 여실 작정이오?” 

“닥쳐라. 병(兵)이 어찌 수(數)일 뿐이겠느냐? 거기다가 세상을 구 할 큰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시는 형님이 계시지 않느냐?”

“세상을 구할 큰 뜻이라, 도대체 누가 그런 뜻을 품고 있단 말이오?”

그런 장비의 두 눈에는 단순히 술 탓만도 아닌 어떤 광기가 번뜩 였다. 관우도 그걸 알아보고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가 취했다고는 하나 까닭 없는 망발은 않을 줄 믿는다. 말해보 아라. 도대체 왜 그러느냐?”

“에잇, 내 입으로 말하기조차 부끄럽소. 도대체 근래에 큰형님이 이 조련장에 나온 게 몇 번이나 되오?”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은 나와보시지 않느냐? 공무에 바쁜 분이 시다.”

“흥, 부자 놈들 술자리에는 매일 나갈 수 있어도 여기는 사흘에 한 번이란 말이오? 그것도 슬쩍 코빼기만 내보이고…”

“닥쳐라,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형님이야말로 똑똑히 알고나 계시우. 자칫하면 우리는 다시 탁현 으로 돌아가 돗자리 장수의 아우로 돗자리 짐이나 지고 다닐 팔자가 된단 말이오. 아니면 부잣집 청지기나 되거나…………….”

확실히 뼈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장비에게 주사가 있다는 걸 잘 아는 관우였지만, 그 같은 장비의 말을 듣자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떠들어서는 안 될 종류의 잘못에 유비가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 취했구나. 먼저 돌아가거라. 저녁에 조용히 얘기하자.” 

생각 깊은 관우가 더욱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장비를 달랬다. 장비도 더는 뻗대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들어가 잠이나 잘 작정이오. 형님이나 열심히 해보슈.”

그런 말과 함께 비척거리며 성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장비가 돌아간 뒤 관우는 한동안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 았다. 짐작대로 장비는 무언가 유비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음에 틀 림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우도 의심을 품고 그 무렵의 유비를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그가 술과 음악을 좋아하고 사냥이나 연회를 즐기는 것은 관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관우와 장비를 함께 데려가고 싶어 하고 같이 즐기려고 애썼는데, 그 무렵 들어서는 좀 이상했다. 밤마다 부호들의 초대를 핑계로 숙소를 나갔다가 날샐 무렵에야 새 벽 이슬에 젖어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그들 의 삶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을 천연스레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벌써 모두들 서른이 넘었구나. 이렇게 떠돌다가 제사 차려줄 자 손이나 얻을 수 있겠느냐?”

남아 대장부의 입신(立身)을 기껏 처자를 거느리는 일로 바꾸어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군사들을 조련하는 데 쏟는 힘과 정성도 처음 현령으로 평원에 이르렀을 때와는 달랐다.

“이제야 겨우 발붙일 곳을 얻었구나.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르기에는 알맞은 땅이다.”

그런 말로 현령이 된 다음 날부터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조련을 시작한 유비였다. 황건의 잔당들과 흑산(黑山)의 무리로부터 고을을 지킨다는 구실이었지만, 그 일에 쏟는 유비의 정성은 실로 놀라운 바 있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을 백성들이라 조세가 제대로 걷힐리 없었으나 유비는 현(縣)의 모든 경비를 줄일 수 있는 한까지 줄여 군량에 충당하고, 때로는 자신의 봉미(米)까지도 그쪽으로 돌 렸다. 경내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간곡히 도움을 청했고, 멀리 공 손찬에게 서찰을 보내 마필과 병장기를 빌려 오기도 했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그 같은 정성을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감 추어진 대망에 쏟는 열정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그렇게 기른 군사 들로 천하를 위한 웅비(雄飛)의 바탕을 삼으려는 걸로 짐작한 것이 었다. 그런데 조금 전 장비가 지적한 것처럼 그 무렵 들어 유비는 그 일에조차 시들한 태도를 보여왔다. 현청의 공무가 끝나기 바쁘게 조 련장으로 나와 남은 해를 두 아우와 함께 보내던 그가 사나흘에 한 번씩, 그것도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 뿐이었다.

한번 의심스런 눈으로 보자 대범한 관우에게도 이상한 일이 한둘 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 조련에 마음을 쏟을 수 없게 된 관우 는 서둘러 조련을 끝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장비는 그들이 기거하는 현청의 객사에서 술에 곯아떨어져 코를 골고 있었다. 성안으로 돌아와서도 술을 몇 동이나 더 퍼마시고 유 비를 찾아 한차례 소동을 떤 뒤에야 쓰러져 잠들었다는 게 현리들의 말이었다.

“형님은 어디 계시냐?”

관우가 그중의 하나에게 물었다. 항상 유비 곁에서 일을 보는 그 현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감씨() 장원으로 가셨습니다.”

감가장이라면 관우도 알 만했다. 부근의 이름난 부호로 이라면 일전에도 군량으로 적지 아니한 곡식을 보낸 토호의 저택이었다.

“언제 돌아오신다더냐?”

“아마 그곳에서 날을 샐 것입니다.”

“감씨 댁의 연회는 늘 밤을 새느냐?”

“대개 그러합니다.”

그 말투가 좀 이상했지만 고지식한 관우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객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코를 고는 장비 곁에서 병 서를 읽으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장비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깨어났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관우가 읽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그러나 장비는 대답도 없이 뜰로 나가더니 잠시 후에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와 도리어 관우 에게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소?”

“그렇다네. 감씨 장원에 가셨다더군.”

“그건 이미 잘 알고 있소.”

장비는 그렇게 내뱉더니 주섬주섬 행장을 꾸렸다. 장비가 하는 양

을 보고 놀란 관우가 물었다.

“아니, 장비, 지금 뭘 하는가?”

“큰형님은 이미 틀렸소. 나는 떠나겠소.”

“형님이 이미 틀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또 떠나면 도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냐?”

“그럼 이거나 읽어보슈. 그리고 뜻이 정해지거든 함께 떠납시다.”

갑자기 장비가 품에서 봉서 한 장을 관우에게 내주며 울적하게 말했다. 낮의 광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관우는 놀 란 눈으로 그런 장비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봉서를 폈다.


‘조조 등은 삼가 대의를 짚어 널리 천하에 고하노라.

동탁은 하늘과 땅을 아울러 속이고 나라를 망하게 하여 임금을 죽 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 금(禁)을 더럽히고 아래로 죄 없는 백성 들을 잔학하게 죽이니, 그 죄악이 실로 해를 가리고도 남을 만하다. 이에 전차의 밀조를 받들어 크게 의병을 일으켜, 우리 화하華夏, 중국을 높여 부르는 이름)를 깨끗이 하고 흉악한 무리를 베어 없애고자 한다. 바라건대 무릇 대한(大漢)의 신자(臣)된 이는 모두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함께 공분을 씻고, 위태로운 왕실과 백성을 아울러 구하도록 하라. 격문이 이르는 날로 속히 받들어 행함이 옳으리라.’


바로 진류(陳留)땅의 조조가 각지로 띄워 보낸 격문 가운데 하나 였다.

“장비, 이걸 어디서 얻었느냐?”

읽기를 마친 관우가 놀라 물었다.

“오늘 아침 큰형님의 서안(위에서 우연히 보았소. 큰형님은 그걸 읽고도 우리에게 말씀조차 않으시고 이제껏 시골 부잣놈의 술 잔치에서 흥청거리고 계신 거요. 이 장비의 무식한 눈에도 이거야말 로 천하를 위해 떨치고 일어날 좋은 기회이건만 큰형님은 팽개치고 있단 말이오.”

그제야 관우도 장비가 노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격문을 본 것이 오늘 아침이라면 아직 형님의 뜻을 함 부로 넘겨짚을 수가 없지 않으냐?”

관우 또한 유쾌할 리 없으나 워낙 장비가 성급하게 나오는 바람 에 우선 기세라도 꺾어두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타일렀다. 그러나 장 비는 그 말에 더욱 화를 냈다.

“형님은 눈도 귀도 없소? 지난 몇 달 큰형님이 어떻게 지냈으며 어떻게 우리를 대했소? 그게 큰 뜻을 품은 영웅의 노릇이오? 거기 다가…….”

“또 무엇이냐?”

“정말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소. 지금 큰형님이 앞뒤 없이 흠뻑 빠져들어 있는 것은 여색(色)이오. 사냥도 술잔치도 아니란 말이 오. 아시겠소?”

“여색이라니? 도대체 어떤 여인이 그토록 형님을 홀렸단 말이냐?”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관우가 다시 놀라 되물었다. 평원 땅에 와 서도 저자의 건달들과 어울려 퍼마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장비라 거리의 소문에 밝았다. 그러나 항상 근엄하게 객사를 지키는 관우의 귀에는 그런 거리의 소문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뒤이은 장비의 대 답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바로 그 감가 놈의 딸년이오. 그 돼지 같은 놈이 딸년을 시켜 큰 형님을 홀렸단 말이오. 딴에는 든든한 사위 하나 두겠다는 수작이겠 지. 두고 보시오. 머지않아 형님은 재물 많은 감가 놈의 사위가 되어 기름진 배나 쓸고 있을 것이오. 그 밑에서 청지기 노릇이나 할 의향이 없으시거든 나와 함께 떠납시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람을 잘못본 것 같소.”

장비는 그렇게 말하며 행장을 들고 방을 나설 채비를 했다. 관우가 다시 말했다.

“옛부터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다. 설령 형님께서 여자를 가까이한 게 사실이라 한들 그게 무슨 허물 될 일이 있느냐? 더구나 감씨댁 아가씨라면 이 고을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딸이니 욕될 것도 아니잖느냐?”

“대장부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허물이 아닌 줄은 나도 알고 있소. 허물은 여자의 치마폭에 감싸여 큰 뜻을 잃는 것이오.”

“그럼 형님이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이냐?”

“정말 참 답답하우.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육 년 전 처음 탁군(涿 郡)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가 어땠소? 비루먹은 것까지 합쳐 말이 겨 우 백 필, 군사는 오백을 넘지 못했소. 그런데 지금은 말이 천 필에 정병(精)이 오천은 되오. 거기다가 동탁의 농권(弄權)도 황건의 피 해에 못하지 않건만 큰형님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소. 그분은 이미 천하를 잊은 사람이오!”

그 말에는 관우도 잠시 대답이 궁해졌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 몇 달의 유비는 무엇에 취한 사람 같은 데가 있었다. 힘을 기르는 일 뿐만 아니라 자기들 형제를 대하는 것도 건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 껴질 정도였다. 관우가 대답이 없자 장비가 한층 기세를 올렸다. 조 조의 격문을 흔들어보이며 다시 관우를 충동했다.

“기주(冀州)의 원소가 심상치 않다더니 이제는 조조 따위도 이렇게 나서는데 큰형님은 도대체 뭐요? 하찮은 필부도 피가 끓는 이 격문을 보고도 계집의 지분 냄새만 탐하고 있으니 끝장이라고밖에 는 달리 어떻게 보겠소? 형님 공연히 허송세월 하지 말고 같이 떠납 시다.”

그러면서 막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갑자기 관우가 벽력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 장비야,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갑자기 왜 그러시오?”

장비가 불퉁한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관우가 벽에 기대둔 청룡도를 잡으며 꾸짖었다.

“네놈이 떠나기 전에 먼저 의를 저버린 죄부터 물어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지난날 도원(桃園)에서 형제가 될 때 무어라고 맹세하였느냐? 한 날한시에 태어나지 못했으나 죽기는 한날한시이기를 원하지 않았느 냐? 누구든 그 의를 저버리면 하늘과 사람에게 함께 베임을 당하게 해달라고 빌지 않았느냐?”

“그건 다르오. 의를 저버린 건 큰형님이오.”

“이놈, 성현께서도 남의 아래가 되어 윗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 는 법이라 하셨다. 거기다가 아직 형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일은 없지 않느냐?”

“그럼 어떤 것이 저버리는 것이란 말이오?”

관우의 기색이 워낙 엄중하니 장비가 좀 수그러들며 대꾸했다. 관우가 더 크게 꾸짖었다.

“바로 너같이 떠나는 놈이다. 형님의 뜻도 알아보지 않고 제 좁은 소견만 믿어 함부로 떠나려드니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정히 떠나려거든 먼저 이 청룡도부터 꺾고 떠나거라!”

그러면서 관우는 정말로 한칼에 베어버릴 듯이 청룡도를 쳐들었 다. 관우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장비도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청룡 도가 두렵기보다는 육 년이나 한상에서 먹고 한방에서 자는 동안에 저절로 생겨난 믿음 때문이었다. 관우가 그러는 데는 반드시 근거가 있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형님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그냥 무한정 기다리시려우?” 

장비가 행장을 놓고 침상에 걸터앉으며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 로 관우에게 물었다. 관우도 다시 청룡도를 벽에 기대놓으며 조금 풀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형님의 뜻을 알아야겠네.”

“만약 그게 내가 본 대로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깨우쳐드려야지.”

“그래도 듣지 않으시면?”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네. 하지만 내 짐작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네.”

그러더니 갑자기 나갈 채비를 했다.

“가세, 형님을 뵈어야겠네. 감가장은 잘 아나?”

“몇 번 지나친 적이 있소.”

장비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실은 현청만큼이나 장원 안을 잘 알고 있었다. 이어서 무언가 투덜거리면서도 앞장을 섰다.

형제가 밤길을 헤쳐 감가장에 이르니 몇 군데 밤새 밝혀두는 등(外燈)을 빼고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장비의 짐작대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은 아니었다.

“이쪽이 후원이오. 감가의 딸이 거처하는 곳이오.”

주인을 불러 유비를 찾으려는 관우를 말린 장비가 어둠 속에서 길을 인도하며 속삭였다. 정말로 감(甘)소저가 거처하는 방에는 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건 형님의 말이로군.”

관우가 후원 으슥한 곳에 매어져 있는 말 한 필을 보고 중얼거렸다. 장비가 물었다.

“큰형님을 어떻게 부르시겠습니까?”

“밤이 깊은데 어찌 큰소리로 수선을 피울 수 있겠나? 기다리세.”

“여기서 큰형님이 밤을 새우시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래도 기다리세.”

관우는 그렇게 대답한 뒤 가볍게 탄식했다.

“그간의 우리 허물도 적지는 않은 것 같으이. 언제나 남 앞에서는 우애로운 체 충성스러운 체 형님을 시립하면서도, 정작 위태로운 곳 에는 홀로 계시게 했으니………… 만약 그동안에라도 형님에게 무슨 변 괴가 있었다면 어쩔 뻔했나?”

결코 입으로만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그런 관우의 태도에 장비 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더는 관우를 조르지 않았다.

정월이라 밤 날씨는 차고 매서웠다. 반각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의 수염에는 하얗게 서리가 맺혔다. 다행히 유비는 오래잖아 감소저의 방을 나왔다. 자정이 별로 넘지 않은 무렵이었다.

“아니 자네들 웬일인가?”

별 생각 없이 말 있는 데로 가던 유비가 어둠 속에 굳은 듯 서 있 는 두 사람을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장비에 앞질러 관우가 대답했다. 

“근간에 자주 형님의 주변을 비워두었습니다. 모두가 못난 아우들의 불충입니다.”

조금도 원망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유비가 잠시 말이 없더니 온화하게 대답했다.

“내가 작은 일로 자네들에게 근심을 끼쳤나 보이. 부끄럽네. 날이 차가우니 이만 돌아가세.”

그러고는 성큼 말 위에 올랐다. 관우와 장비도 각기 묶어두었던 말을 끌어내어 유비를 따랐다. 셋은 말없이 밤길을 달렸다. 성미 급 한 장비가 몇 번인가 무슨 말을 꺼내려 했으나 그때마다 관우가 기 침 소리로 입을 막았다.

현청의 객사로 돌아온 유비는 가벼운 술상을 차리게 한 뒤 관우 와 장비를 마주했다. 그런데 불빛에 드러난 유비의 옷이 이상했다. 왼쪽 소맷귀가 한 자나 잘려져나가 있었다. 먼저 그걸 본 장비가 놀 라 물었다.

“큰형님, 어쩌다가 왼쪽 소맷귀가 잘려져 나갔습니까?”

“자네들이 이미 알아버렸으니 이제 말하겠네. 실은 오늘 감소저와 작별을 하고 오는 길이라네.”

유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나 장비가 알아듣기에는 넉넉지 못했다.

“감소저와 작별하는데 왜 소맷귀는 잘리셨습니까?”

“잘린 게 아니다. 내 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기에 스스로 소매를 잘라 내 뜻이 굳음을 알렸을 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우가 물었다.

“어디를 가시려고 그토록 매정한 작별을 하셨습니까?”

“너무 이 어리석은 형을 시험하려 들지 말게. 아우들의 걱정을 난들 왜 모르겠나? 하지만 이제는 마음 놓게.”

유비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어 장비에게 일렀다.

“너는 즉시 내 방으로 가 탁자 위에 있는 봉서를 가져오너라.”

그 말에 장비가 움찔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소매에서 조조의 격문을 꺼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봉서라면……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 그게 어찌 네 손에 있느냐?”

유비가 놀란 눈길로 그렇게 묻다가 이내 모든 걸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실로 부끄러우이. 아우님들의 근심이 그토록 컸는지 몰랐네.”

“그럼 큰형님께서도 이미 조조와 함께 낙양으로 갈 결심을 하셨습니까?”

장비가 기쁨과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가야지. 필부라도 의를 보면 따라나설 것인데, 우리가 가지 않고 어쩌겠느냐? 거기다가 이제는 약간의 군사도 있으니 적으나마 천하 를 위해 보탬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애써 군사를 기른 것도 이 런 때를 위해서가 아니었겠느냐?”

유비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장비가 주르르 달려가 유비 앞에 엎드렸다.

“형님, 이 못난 아우를 꾸짖어주십시오.”

화도 잘 내지만 감격도 잘하는 장비였다. 고집 못지않게 뉘우침도 빨라 조금 전에 유비를 욕한 일이 견딜 수가 없었다. 왕방울 같은 두 눈에 눈물까지 가득한 채 잘못을 빌었다. 뒤이어 관우도 장비와 나 란히 엎드렸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유비가 황망히 엎드려 마주 절을 한 뒤 두 아우를 일으켰다. “실은 술상이 들어오면 두 아우님께 내가 엎드려 잘못을 빌려고 했었네. 그런데 오히려 잘못을 비니 실로 이 어리석은 형은 몸둘 바 를 모르겠네.”

그런 유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감격으로 새로워진 그들 삼형제는 저 도원에서 처음 맺어진 날처 럼 밤새워 마시며 의기를 돋우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그동안 기른 오천의 병마로 조조가 기다린 다는 진류의 들을 향해 출발하려는데 현리 하나가 달려와 유비에게 고했다.

“지금 수많은 대군이 이리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놀란 유비가 날랜 병사를 시켜 알아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북평 (北)태수 공손찬의 군사들이었다. 그사이 유비는 동문수학의 정 만으로는 다 덮을 수 없는 신세를 공손찬에게 지고 있었다. 평원령(平原令)이 된 것으로부터 군마와 병장기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그의 도움을 받아온 터라 그냥 앉아서 기다릴 처지가 아니었다. 관우 와 장비만을 딸린 채 급히 말을 달려 공손찬을 맞으러 나갔다. 

“현제(賢)가 어찌 알고 이렇게 몸소 달려왔는가?”

“아우는 형의 덕택으로 이곳 평원을 맡게 되었고, 그 뒤로 마필이 며 군자에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형께 서는 역적 동탁을 치기 위해 의로운 군사를 이끌고 계시는데 이아 우가 어찌 달려와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는 자기 얘기는 쏙 뺀 채 그렇게 대답한 뒤 공손찬을 성안으로 청했다.

“천하의 공도(道)를 지체케 할 수는 없는 일이나, 아직 가셔야 할 길은 멀고 날은 이미 다 되어가니 오늘 하룻밤은 저희 고을에서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비가 공손찬을 반가워한 까닭은 그동안의 정분 외에도 더 있었 다. 곳곳의 제후들이 조조에게 호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겨우 수천의 군사를 거느린 일개 현령인 유비 정도로는 독자적인 세력이 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신속臣屬)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겐가 객장 (客將) 노릇을 해야 할 처지였는데, 그런 사람으로는 공손찬이 가장 알맞았다.

조조와 원소도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그 밑에서 객장 노릇을 하 는 것은 자칫 신속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만큼 유비에게 박 힌 그들의 인상은 강했다. 그러나 공손찬이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될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재주를 낮게 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만큼 그를 잘 안다는 뜻이었다. 그 출발이 순수하게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미 유비에게도 뒷날 보여준 그의 삶에 일치하는 어떤 뚜렷한 내심의 길이 결정된 것임이 분명했다.

공손찬도 선선히 유비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아도 굳이 길 을 평원현으로 잡은 것은 유비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성 밖 들판에 군사들을 머물게 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현청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 었다.

그날 밤이었다. 현덕은 여전히 속마음을 숨긴 채 크게 술자리를 벌여 공손찬을 대접했다. 공손찬도 별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기 꺼이 술자리에 앉아 유비와 쌓인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동안 환담을 나누던 공손찬이 그림자처럼 유비 곁을 떠나지 않 는 관우와 장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장비는 전에 탁령(涿令)을 지낼 때 유비의 청으로 죽을 목숨을 살 려준 적이 있건만, 그때는 그저 먼빛으로 보았을 뿐인 데다 그동안 세월이 지나고 또 장비의 차림도 저잣거리 건달의 마구잡이 차림에 서 비록 하급이나마 사관의 복색을 하고 있어 얼른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쪽은 관우이고 저쪽은 장비로, 모두 제 의형제들입니다.”

유비도 구태여 아름답지 못한 장비의 옛일을 들추고 싶지 않아 그렇게만 대꾸했다. 끝내 장비를 알아보지 못한 공손찬이 감탄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함께 황건적을 무찔렀다는 그 용사들인가?”

“사실 제가 세웠다는 공은 모두 이 두 아우의 힘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어떤 자리에 있는가?”

“관우는 마궁수이고 장비는 보궁수로 있습니다.”

그러자 공손찬은 심중의 말을 꺼낼 좋은 기회를 발견한 듯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실로 영웅을 흙 속에 묻어두었다 해도 지나치는 말이 아닐세! 차 라리 나와 함께 가세나 이미 들었겠지만 지금 나라를 어지럽히는 동탁을 치고자 천하의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켰네. 자네도 이 하찮은 벼슬자릴랑 집어던지고 함께 힘을 합쳐 역적을 치는 게 어떤가? 이 는 기울어지는 한실을 붙드는 일일세.”

유비로서도 은근히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러나 짐짓 겸양을 보 았다.

“천하 영웅들이 모이는 곳에 저같이 변변찮은 자가 어찌 감히 끼 어들겠습니까? 벼슬도 하찮고 군사도 적으니 자칫 세상의 웃음거리 만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네. 실은 내가 굳이 이곳을 지나게 된 것도 자네를 의 중에 두었기 때문일세. 자네 벼슬이 낮다지만, 그래도 한실의 종친 (親)이 아닌가? 또 군사가 적다 해도 자네가 처음 의군을 일으킬 때와는 댈 수 없을 것일세. 이름 없는 향리의 장정 몇 백으로 황건의 우두머리를 목 벤 자네 아닌가?”

그런 공손찬의 권유에도 유비는 거듭 겸양의 말로 물러서기만 했 다. 유비의 까닭 모를 겸양에 어리둥절해 있던 장비가 불쑥 말했다.

“그때 내가 동탁 도적놈을 죽이려 할 때 가만두었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관우도 옆에서 거들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병마를 수습해 앞장서야 합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못 이긴 채 공손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형께서 이 비를 그토록 높이 보아주시니 실로 감격이올시다. 삼 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에 공손찬은 크게 기뻐했다. 만약 유비가 먼저 나서서 따르 기를 청했다면 그렇게까지는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덥석 유비의 손을 움키며 말했다.

“고맙네. 현제가 저기 두 분 아우님들과 함께 전봉(前鋒)을 맡아준 다면 우리만으로 곧장 낙양으로 진격해도 되겠네.”

이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그동안 기른 오천의 병마를 이끌 고 공손찬의 군사들과 합류했다.

진류의 들에 이르니 열일곱 갈래 길로 제후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제일진은 후장군(後將軍) 남양(南陽) 태수 원술(袁術)이요, 제이진은 기주 자사 한복(韓馥)이요, 제삼진은 예주(州) 자사 공주 ( 제사진은 연주자사 유대岱요, 제오진은 하내(河 요, 內)태수 왕광(匡)이요, 제육진은 진류 태수 장막(張邈)이요, 제칠 진은 동군(東郡) 태수 교모(喬瑁)요, 제팔진은 산양(山陽)태수 유유 (劉遺)요, 제구진은 제북상(相) 포신(信)이요, 제십진은 북해(北 海)태수 공융(孔融)이요, 제십일진은 광릉陵)태수 장초(張超)요, 제십이진은 서주(州) 자사 도겸(陶謙)이요, 제십삼진은 서량(西凉)태수 마등(馬騰)이요, 제십사진은 북평 태수 공손찬이요, 제십오진은 상당(上黨)태수 장양(張楊)이요, 제십육진은 장사 태수 손견(孫堅)이 요, 제십칠진은 발해 태수 원소였다.

열일곱 갈래 길로 모여든 제후들의 군사가 각기 이르니, 부근 삼 백여 리는 근왕(勤王)의 의군들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그러나 머릿 수만 많고 의기만 장할 뿐, 좌우로는 연결이 잘 안 되고 상하로는 질 서가 없었다. 이에 조조는 소와 말을 잡고 제후들을 청한 뒤 군사를 몰아갈 계책부터 논의했다.

먼저 하내 태수 왕광이 나서서 말했다.

“이제 우리는 대의를 받들어 모였소이다. 그러나 군사들은 각기 이끄는 이가 다르고 떠나온 곳이 달라 힘을 합치기 어렵소. 먼저 맹 주盟)를 세우고 모두 그 영을 받기로 하면 좌우로는 연결이 되고 상하로는 질서가 있어 비로소 단합된 힘을 보일 수 있을 것이오. 진 병은 그 뒤의 일이외다.”

그러자 조조가 그 말을 받았다.

“옳으신 말씀이오. 실은 제가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소이다. 여기 원본(本初)는 사세오공(四世五公)의 가 문으로 오래 거느려온 관리들이 많고, 또 한의 이름난 재상의 후예 이기도 합니다. 우리 맹주로 모자람이 없으리라 여겨 감히 추천합 니다.”

실로 사(私)를 잊은 제의였다. 원소가 황급히 일어나 사양했다.

“저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저보다 더 덕이 많은 분을 맹주 로 뽑아야 합니다.”

원소 역시 아직은 야심보다 근왕의 대의에 더 충실하였다. 뒤이은 제후들의 권유에도 두 번 세 번 사양했다. 그러다가 제후들이 한결같이 원소가 아니면 안 된다고 추대하자 마지못해 맹주가 되는 일에 동의했다.

원소의 승낙이 있자 이튿날 제후들은 삼층으로 단을 쌓고 사방에 다섯 색의 기를 세운 뒤, 단 위에는 대장의 권세와 위엄을 상징하는 백모(白旄, 얼룩소의 꼬리로 장식한 지휘기), 황(黃鉞, 금으로 장식한 도끼, 역시 지휘권을 상징), 병부(兵符), 장인(將印)을 얹었다. 그리고 원소에 게 단 위에 오르기를 권하니, 원소는 칼을 차고 옷매무새를 가다듬 은 뒤에야 단 위로 올랐다. 원소가 격식에 따라 향을 사르고 두 번 절한 뒤 맹약의 글을 읽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한실이 불행하여 황실의 기강과 법통을 잃으니, 역적 동탁이 그 틈을 타 지존을 해하고 백성을 학대한 지 이미 오래다. 이에 원소 등 은 나라까지 잃게 됨을 두려워하며 널리 의병을 모아 국난에 대처하 려 한다. 우리 동맹군은 마음을 합치고 힘을 다하여 신하 된 자의 절 의를 지키고 결코 두 가지 뜻을 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목숨을 떨어뜨리고, 남겨 기를 것이 없게 하 리니,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조종(祖宗)의 밝은 영령이시여, 이 뜻을 굽어살피소서.’


읽기를 마친 원소는 미리 마련된 백마(白馬)의 피를 찍어 맹세하 는 순서를 마쳤다. 원소가 단을 내려오자 제후들은 다시 그를 부축하여 윗자리에 앉히고, 나머지도 벼슬과 나이에 따라 두 줄로 자리 를 잡고 앉았다.

몇 차례 술잔이 오간 뒤 조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맹주가 정해졌으니 각기 그 명에 따라 움직여 함께 나라를 구할 뿐입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으로 우리 서로간의 강약을 헤아리 고 견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사로이는 소시(少時)부터의 친구이나 맹주가 된 원소를 존중하 여 조조는 공손히 의견을 냈다. 원소가 엄숙하게 그 말을 받았다. 

“원소가 비록 재주 없으나 이미 공들의 추대를 받아 맹주의 자리 에 오른 몸이오.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허물이 있으면 벌을 내릴 것이외다. 나라에는 형벌이 있고 군에는 기율이 있는 법이니, 각기 마땅히 지켜 어기고 범함이 있어서는 아니 되오.”

맹주다운 의젓함이었다. 명문의 공자로서 남을 부리고 위엄을 갖 추는 일에 익숙한 그였기에 한층 자연스러웠다. 모든 제후들이 그런 원소의 말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오직 명하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러자 다시 원소는 대장으로서의 군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내 아우 원술은 군량과 말먹이 풀을 맡아 여러 영에 맞추어 대도 록 하라. 또 따로 한 사람을 뽑아 선봉으로 사수관으로 달려가 싸움 을 돋우고, 나머지는 각기 험한 곳에 진을 쳐 뒤를 받치도록 해야 겠소.”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이나 거침없는 원소의 군령이었다. 그 군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장수가 일어나며 씩씩하게 말했다.

“이 견(堅)이 감히 앞장서기를 청합니다.”

모두 보니 장사 태수 손견이었다. 아우 원술을 통해 그를 잘 아는 원소가 기뻐하며 허락했다.

“문대(文臺)가 용맹스러우니 마땅히 그 일을 할 만하다. 가서 사수 관을 깨뜨리도록 하라.”

이에 손견은 자기가 이끌고 온 군마를 이끌고 사수관으로 달려갔 다. 그의 휘하에는 허창, 허소의 난 이래 그를 따르는 용사들을 뼈대 로 한 만여 명의 장사병(兵) 외에도 이제는 완연히 그의 팔뚝이 나 허리 같은 사람이 된 황개, 한당, 정보, 조무 네 장수가 따르고 있 었다. 황건란(黃巾亂)과 구성(區星)의 난을 거치는 동안 하나같이 범 같은 용장으로 자라난 네 사람이었다. 특히 정보의 철사모(鐵蛇矛) 와 황개의 쇠채찍 [鐵鞭]과 한당의 큰 칼[]]과 조무의 쌍칼[雙]] 은 이미 널리 이름을 얻고 있어 나란히 손견을 용맹을 뒷받침했다. 그 같은 손견의 군사가 사수관을 향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관을 지키던 동탁의 장수는 더럭 겁이 났다. 살별처럼 빠른 파발마 [流星馬]를 달려 낙양에 있는 동탁의 승상부에 위급을 알렸다.

동탁은 스스로 대권을 잡은 뒤 나날을 술과 잔치로 보내고 있었 다.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은 종종 그 획득한 과정보다 획득한 뒤의 처리에서 결정되는 수가 있다. 부당하게 권력을 탈취했더라도 그 뒤 의 업적이 볼만한 경우와 정당하게 권력을 승계했더라도 그 뒤의 통 치가 실패로 끝난 경우 가운데서 역사가 편드는 것은 대개 앞의 경 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탁은 불행히도 부당하게 권력을 탈취하여 부당하게 사용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말았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대신 잔인과 부패와 탐락(樂), 자기 도취 따위 이른바 권 력의 치욕에 먼저 빠져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동탁이다 보니 사위이자 모사인 이유로부터 급보를 받자 크 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근왕의 의 병들을 막을 의논을 했다. 먼저 동탁에게서 온후(溫侯)로까지 높임 을 받은 여포가 나서서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관 밖의 제후들 따위는 이 여포에게는 풀이나 지푸라기 같은 것들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아버님의 범 같은 군사들을 제게 맡겨주신다면, 그것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성문에 높이 매달겠습니다.”

동탁에게 몸을 의탁한 이래 이렇다 할 공도 없이 두터운 대접만 받아 은근히 조급하던 여포였다. 공을 세울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앞서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여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 포의 등 뒤에서 한 사람이 내달으며 크게 소리쳤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割鷄焉用牛刀]? 그것들 을 깨뜨리는 데 온후께서 수고스럽게 친히 납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맡기셔도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 제후들의 목을 잘라 오겠습 니다.”

동탁이 보니 키가 아홉 자요, 호랑이 몸에 이리의 허리며 표범의 머리에 원숭이 팔을 한 장수였다. 원래 관서 사람으로 그 이름을 화 웅이라 했다. 동탁은 그의 씩씩한 말을 듣자 몹시 기뻤다. 효 기교위로 삼은 뒤 마보군 오만과 함께 부하 장수 이숙(李肅), 호진(胡軫), 조잠(趙) 등을 딸려 그날 밤으로 사수관으로 향하게 했다.

이때 제북의 상(相)으로 근왕의 의거에 참가한 포신(鮑信)이란 이 가 있었다. 일찍이 후군(軍)교위로 원소와 왕윤에게 동탁을 죽이 자고 의논하다 두 사람이 모두 듣지 않자 태산에 숨어버렸던 사람이 었다. 동탁 쪽에서도 마주 군대를 보내왔다는 말을 듣자 슬며시 군 공이 탐이 났다. 남몰래 아우 포충을 불러 말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한 싸움이라지만 첫 공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 지 않다. 네게 군사 삼천을 줄 터이니 지름길로 가 먼저 사수관을 빼 앗아라.”

이에 포충은 제 죽을 줄도 모르고 손견보다 한발 앞서 사수관에 당도하여 싸움을 걸었다.

화웅이 관 위에서 보니 대단찮은 잡병 삼천이었다. 대군을 동원할 것도 없이 철기(鐵騎) 오백만 이끌고 나는 듯 관 아래로 덮쳐왔다. 형의 말만 믿고 기고만장하여 달려왔던 포충은 화웅의 그 같은 기세 에 더럭 겁부터 났다. 급히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 였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라.”

화웅은 우레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똑바로 포충에게 달려와 큰 칼을 내질렀다. 포충은 제대로 막아보지도 못하고 화웅의 한칼질에 목을 잃고 말았다. 장수를 잃은 군사들에게 싸울 마음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거기다가 화웅의 군사들은 철갑을 갖춘 기병이요, 포충 의 군사는 대개가 보졸이니 비록 수가 많다 해도 상대가 못 되었다. 화웅은 한 싸움을 크게 이겨 수많은 장교들을 사로잡고 포충의 목을 얻은 뒤,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포충의 목과 승전보를 올렸다.

동탁은 화웅을 장하게 여겨 다시 그를 도독으로 높였다. 결국 포신 은 지나치게 군공을 탐하다가 오히려 아우의 목만 적의 전리품으로 내준 꼴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손견은 그것도 모르는 채 네 장수와 휘하의 군마를 이끌고 뒤늦게 사수관 앞에 이르렀다.

“악을 돕는 필부야, 어찌 빨리 나와 항복을 않느냐?”

관 위를 바라보며 그렇게 꾸짖는 손견의 모습은 정말로 늠름했다. 번쩍이는 은갑옷은투구에 붉은 머리싸개를 하고 한 자루 고정도(古 錠刀)를 비껴든 채 화려한 갈기를 한 말[花鬚馬]위에 앉은 품이 마 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같았다.

“이번에는 제가 저것들을 깨뜨리고 오겠습니다.”

화웅의 부장(副將) 호진(胡軫)이 나서서 그렇게 청했다. 첫 싸움에 이긴 뒤라 손견조차 대단찮게 비친 모양이었다. 화웅도 두말 없이 오천 군마를 내주며 관을 나가 적을 맞게 했다.

“누가 나와 싸워보겠느냐?”

호진은 그렇게 외치며 곧바로 손견을 취하려 들었지만, 장한 것은 용기뿐이었다.

“제가 저놈의 목을 주워오겠습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철사모를 들고 나온 정보와 몇 합 겨루기도 전 에 목줄기가 찔려 말에서 떨어졌다. 놀란 것은 전날 이긴 것에 간이 부풀었던 그의 오천 졸개들이었다. 사태가 뭉그러지듯 관 안으로 도 망쳤다.

손견이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을 몰아 관으로 덮쳐갔다. 하지만 워낙 높고 견고한 관의 성벽이었다. 거기다가 포충이 설 건드려놓아 대비까지 단단했다. 관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지니 아무 리 용맹한 손견이라 해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군사를 돌려 양 동(東)에 진을 세웠다.

손견에게 한번 뜨끔한 맛을 본 뒤라 그다음부터는 화웅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견도 화웅의 오만 대군이 지키는 사수 관을 힘으로 우려뺄 만한 재주는 없었다. 별수없이 후진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니 싸움은 자연 시일을 끌게 되고, 싸움이 시일을 끄니 가지고 온 군량과 마초가 곧 동이 났다.

이에 손견은 사람을 원술에게 보내어 군량과 마초를 청했다. 원술 의 아랫사람 가운데 하나가 원술에게 가만히 말했다.

“손견은 강동(東)의 맹호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싸움을 이 겨 낙양을 손에 넣고 동탁을 죽인다면 마치 늑대를 없애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양초(糧草)를 보내주지 마십 시오. 그리하면 손견의 군사는 반드시 지게 될 것이니 화근도 절로 뽑히게 되는 셈입니다.”

원술 또한 그리 소견이 넓은 편이 못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견 이 먼저 공을 세운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그런 말을 들으니 대 의보다 사감이 앞섰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군량과 마초를 보내 주지 않았다.

원술이 손견의 군공을 시기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었다. 따지고 보니 제후들 가운데 가장 밀접한 것은 원술과 손견이었다.

원술이 원소나 조조처럼 동탁의 해를 두려워하여 남양(南陽)으로 도 망쳐 온 뒤 맨 먼저 손을 잡은 것은 손견이었다. 그때 손견은 이미 장사 태수로서 힘이 인근 주군을 떨게 할 정도였다. 형주 자사 왕예 (王叡)가 무례하다 하여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우른 뒤 남양까지 노리 고 있었다. 이때 원술은 손견과 힘을 합쳐 남양 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을 손에 넣었다. 손견이 얻은 것은 원술의 표문에 의해 죄가 공 으로 바뀌고 오히려 파로장군(破虜將軍)이 제수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술이 근거로 생각하는 남양과 손견이 근거로 삼고 있는 강동 일대는 너무 가까웠다.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는 데다 손견의 군공까지 높아지니 원술로서는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차에 아래서 그렇게 진언하니 좁은 소견에 그대로 따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