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0화 : 연못을 떠나 대해로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0화 : 연못을 떠나 대해로


연못을 떠나 대해로

옛 제나라 동쪽 고당현의 벌판에 사오천의 병마가 몇 달째 조용 히 머물러 있었다. 바로 공손찬의 요청을 받아 원소를 견제하고 있 는 유비의 군사들이었다. 비록 동탁의 중재로 군사를 거두기는 했지 만 원소와 공손찬은 이미 하늘을 함께 일 수 없는 사이가 된 뒤였다. 유비는 군막 앞에 나와 멀거니 산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도 깊어 마을 뒷산에는 복사꽃이 환했다. 복사꽃을 보자 유비는 문득 처음 관우, 장비와 만나 형제를 맺던 탁현의 복사 꽃핀 동산이 떠올랐다. 벌써 구 년, 그사이 수많은 싸움터를 헤매었 고,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어섰으나 아직도 그는 떠돌이 객장(客將) 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처지에 생각이 머물자 유비는 새삼 기분이 울적해졌다.

“운장과 익덕은 어디 있느냐?”

유비는 시중드는 군사를 불러 물었다. 그동안 말없이 자기를 따라준 그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자신의 울적한 회포도 풀겸해서였다. 

“두 분 장군께서는 조금 전 진채를 둘러보러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부름을 받은 군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돌아오거든 즉시 내가 찾는다고 일러라.”

유비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대여섯의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그때 황건의 난리를 만나 몸을 일으킨 이들은 그사 이 모두 한 군국(郡國)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원소는 기름진 기주를 차지했고, 원술은 회남에 자리 잡았다. 조조는 연주의 주인이 되었 고, 공손찬은 북방의 여러 군(郡)을 거느린 강자였으며, 비록 죽었으 나 손견 또한 한 군의 태수였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도 조그만 고을 의상(相)으로 남의 부림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가 유비를 더욱 울적하게 만드는 것은 형제같이 지내온 공 손찬의 변화였다. 북으로는 요동 오환(烏丸)을 지배하고 남으로는 산동까지 세력이 뻗을 만큼 힘이 자라자 공손찬은 차츰 교만하고 조 심성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 같은 변화는 유비를 대하는 태도에도 미 쳐, 전에는 형제처럼 가까이하면서도 예를 잃지 않더니 그 무렵 들 어서는 잘해야 객장 대접이요, 때로는 바로 막장(幕將)부리듯 했다. 하지만 유비는 쓸데없는 울적함에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았다. 기다 린다. 오래 참고 기다린다. 그러면 언젠가는 때가 오리라. 천성이 느 긋하고 매사를 좋게만 보는 유비는 곧 그렇게 중얼거리며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술과 안주를 내오너라.”

시중 드는 군사에게 그같이 말한 뒤 아끼는 축(筑,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을 꺼냈다. 음률을 좋아하는 그가 자주 즐기지는 못하지만 군막에까지 가지고 다니는 악기였다.

줄을 가다듬은 유비는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큰 바람 읾이여, 구름 높이 나는도다 大風起兮雲飛揚

널리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威加海內兮歸故鄕

맹사를 얻어 천하를 평안케 하리 安得猛士兮守四方

근심이나 한탄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호쾌한 목소리였다. 미처 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군막을 들치며 관우와 장비가 들어왔다. 

“그 노래는 고제(高,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가 아닙니까?” 

글을 아는 관우가 약간 어이없는 눈길로 물었다. 유비가 천연스레 축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왕자(王者)의 호기가 넘치는 노래일세.”

그러자 비로소 장비도 그 노래에 대해 들은 게 기억나는지 불퉁 거리며 반문했다.

“고제께서 이미 천하를 평정하신 뒤 고향에 돌아가 부르신 그 노 래가 자기 땅 한치 없이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형님과 무슨 상관이 슈?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때 고제께서는 이미 육순을 넘기신 때였다. 하지만 내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셋, 아직도 긴 세월이 남았다. 더구나 고제께서는 이 나이엔 아직 사상(上)의 정장에 지나지 않으셨느니라. 거기에 비하 면 나의 군상은 오히려 너무 벼슬이 높지 않으냐?”

“그래서 허구한 날 집 지키는 개새끼처럼 빈 들판에서 오지도 않 는 원소나 기다리고 있단 말씀이오?”

말투로 보아 이미 불평이 찰 대로 찬 장비였다. 그때 관우가 엄한 목소리로 장비를 꾸짖었다.

“익덕, 형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일이 그렇지 않소? 난데없 는 상전 하나 만들어 그 명령에 여기 이렇게 죽치고 앉았기 벌써 몇 달째요? 하다못해 황건의 잔당이라도 찾아 나서는 게 옳지 이게 무 슨 꼴이오?”

장비가 퍼붓듯 대꾸했다. 그걸 유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달랬다. 

“익덕, 네 말도 옳다. 내가 노둔해서 자네들 고생이 많은 줄은 안 다. 하지만 조급히 군다고 될 일은 아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마침 날라져 오는 술과 안주를 보며 한층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자네들이 울적할 것 같아 술과 안주를 마련케 했 으니 오늘은 마음껏 마셔 울적함을 씻어내게 그리고 우리 셋이 함 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 보면 좋은 길도 있을 것이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비였다. 거기다가 정에 약해 유비가 부드럽게 달래자 금세 심술이 풀어졌다. 환한 얼굴로 탁자 모퉁이에 자리 잡자 관우도 말없이 따라 앉았다.

“공손태수와는 십여 년을 형제처럼 지내왔고, 그 또한 이제는 한 지역의 웅자(者)가 되었으나, 우리가 몸담기에 넉넉한 물은 못 되 는 것 같네. 실은 나도 그걸 울적해하던 참이라네. 그러나 달리 생각 해봐도 좋은 방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난감하이.”

한차례 술이 돈 뒤 유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비가 대뜸 대답했다.

“우리도 조조처럼 황건의 잔당들을 쓸어 힘을 키우면 어떻겠습 니까?”

“조조는 이미 태수란 벼슬이 있었고 군사들도 수만이나 되었지만 매우 힘든 싸움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한낱 군(郡)의 상(相) 이요, 기껏해야 오천 남짓한 병력으로 무얼 한단 말인가?”

“그럼 우리도 주위를 둘러보고 적당한 주군을 골라 빼앗읍시다. 원소, 원술이 그랬고, 조조도 처음부터 조정에서 받은 벼슬은 아니 잖습니까?”

“그것도 아니 되네. 우선 나는 그들만 한 재주와 힘이 없거니와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중요한 건 대의야. 힘과 술수로만 남의 기업을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할 뿐더러 천하 사람들의 신망을 잃게 되는 첩 경이지.”

그 말에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관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의아닌 것을 취하기보다는 아무것 도 가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게 되니 남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뿐이란 결론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장비가 다시 심통을 부리려 할 때였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 급히 고했다.

“장군을 뵙고자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더냐?”

“북해 태수 공융이 보낸 사람이라 하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들라 하여라.”

북해 태수 공융이란 이름을 듣자 유비가 안색을 고치며 사자를 들게 했다.

잠시 뒤에 나타난 사람을 보니 온몸이 피와 땀에 젖고 먼지를 뒤 집어쓴 청년 장수였는데 얼굴은 낯설었다.

“문거(擧, 공융의 자)가 그대를 보냈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대는 뉘시오?”

“저는 동해의 태사자(太史慈)란 하찮은 사람입니다. 북해 태수 공 융과는 골육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니나 특히 의기가 서로 맞아 걱정과 괴로움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태수께서 매우 큰 어려움에 빠져 있기로 그분을 위해 특히 장군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공북해가 어려움에 빠져 있다니 무슨 일이오?” 

“지금 황건의 한 우두머리 관해管)란 자가 오만의 무리로 북해 를 에워싸고 급한 공격을 퍼부어 성의 위태로움이 아침저녁을 다툴 지경입니다.”

그리고 태사자는 공융의 편지를 내어줌과 함께 북해의 사정을 자세히 말했다.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다. 북해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황 건적의 우두머리 관해가 갑자기 무리 오만을 이끌고 북해성을 향해 밀고 온다는 전갈을 받은 공융은 급히 군사를 수습해 성을 나갔다. 관해가 무리 앞으로 말을 몰고 나와 자못 위엄 있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 북해는 양식이 넉넉한 곳이다. 곡식 만석만 빌려주 면 즉시 군사를 물리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성을 깨뜨려 늙고 젊 고를 가리지 않고 아무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태수는 어쩌겠는가?” 

실로 눈 아래 사람이 없는 듯한 태도요, 요구였다. 성난 공융이 소 리 높여 꾸짖었다.

“나는 대한의 신하로서 이 땅을 지키고 있는 태수다. 어찌 도적의 무리에게 곡식을 바쳐 평온을 사겠느냐!”

그 말에 관해도 성이 나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관 해가 똑바로 공융에게 달려드는 걸 보고 공융 쪽에서는 장수 종보 (宗寶)가 또한 창을 끼고 말을 달려 마주쳐 갔다. 그러나 종보는 관 해의 상대가 못 되었다. 몇 번 창칼을 나누기도 전에 관해의 한칼을 맞고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바람에 기가 꺾인 공융의 군사들 은 어지러이 쫓기면서 성안으로 숨었다.

관해는 무리를 나누어 사면으로 북해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늦추 지 않았다. 성안에 갇힌 공융은 울적하고 근심스러웠다. 그때 성안 에는 서주 태수 도겸이 보낸 미축糜竺)이란 이가 와 있었는데 그 또 한 답답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이었다. 간신히 하룻밤을 지탱한 공융은 성 위로 올라가 적세를 살폈다. 사방을 수풀처럼 덮고 있는 것이 적의 기치 창검이 요, 메뚜기 떼처럼 흩어져 있는 것은 적의 병마이니, 느는 것은 근심 과 불안뿐이었다. 그런데 돌연 성 밖에 한 장수가 창을 휘두르며 말 을 달려 적진 가운데로 뛰어드는 게 보였다. 왼쪽을 찌르고 오른쪽 을 후비며 똑바로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무인지경 가듯 했다.

“성문을 여시오.”

이윽고 성문 아래 도달한 그 장수가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 러나 공융은 그 장수가 누구인지 몰라 감히 성문을 열지 못하다가, 그가 다시 밀려온 적병 수십 명을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서야 급히 성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성안으로 들어온 장수의 이름은 태사자 요, 자는 자의(義)라 했다. 원래 동래 황현(縣) 사람으로 용맹과 무예가 뛰어난 장재였는데, 그의 노모가 북해성 밖 이십 리쯤 되는 곳에 살고 있어 공융이 매양 곡식과 피륙을 보내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태사자는 요동 지방에 나가 있었으나 그 사람됨이 비범함을 전 해 들은 공융은 얼굴도 못 본 태사자를 흠모하여 그의 노모를 보살 펴왔다.

“노모의 명을 받들어 태수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태사자는 자신을 밝힘과 아울러 그렇게 말하며 공융에게 공경의

예를 다했다.

이미 그의 뛰어난 무예를 직접 확인한 뒤인지라 공융은 몹시 기뻤다. 태사자를 무겁게 여겨 두터이 대하며, 갑옷과 안장을 내려 그 정을 표했다. 태사자가 감격해 받으며 말했다.

“제게 군사 천 명만 빌려주시면 성을 나가서 도적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대가 비록 씩씩하고 날래나 적의 세력이 워낙 크니 가볍게 나가서는 아니 되오.”

공융이 조용한 어조로 말렸다. 그러나 태사자는 더욱 호기롭게 청했다.

“아닙니다. 노모께서는 태수의 은덕에 감복해서 이 태사자를 특히 여기로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도적들의 에워쌈을 풀어드리지 못한 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가 노모를 뵙겠습니까? 원컨대 한바탕 결사 전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러자 공융은 문득 다른 한 가지 방책이 생각난 듯 이야기를 딴 쪽으로 끌어갔다.

“내가 듣기에 유현덕이 당세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했소. 마침 그 가 지금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고당에 머물러 있다 하 니 만약 그의 구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포위는 절로 풀릴 것이오. 다 만 근심되는 것은 도적들이 겹겹이 성을 에워싸고 있어 사자로 갈 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태사자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곧 투구 끈을 여미며 결연히 말했다.

“태수께서 글을 써서 주시면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그제서야 공융도 기뻐하며 유현덕에게 보내는 글 한 통을 닦아서 태사자에게 내주었다. 태사자는 갑옷으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 허리에는 활과 살을 찬 채 창을 잡고 말 위로 올랐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며 태사자가 홀로 말을 달려 나오는 걸 보자 에워싸고 있던 도적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지(池)가까이 있 던 도적의 장수 하나가 졸개 수십 명을 이끌고 앞을 가로막았다. 그 러나 태사자는 입 한번 열지 않고 잇달아 대여섯을 창으로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니 도적들은 놀라 길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우두머리 관해는 한 사람이 성을 나와 길을 앗고 있다는 말 을 듣자 반드시 구원을 요청하러 가는 사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스 스로 수백 기를 몰고 급하게 뒤쫓아 여덟 방향으로 태사자를 에워쌌 다. 그러나 태사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창을 말 안장에 걸더 니 활을 꺼내 살을 먹였다. 시위 소리와 함께 여덟 갈래로 날아간 화 살은 단 한 대도 빗나감이 없었다. 다가드는 자마다 급소에 화살을 맞고 말 아래로 떨어지니 겁을 먹은 도적의 무리는 아무도 다가들지 못했다.

“그래도 공북해가 세상에 유비 있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공융의 글과 태사자의 말로 그 같은 북해의 사정을 알게 된 유비 는 그렇게 말하며 곧 관우와 장비에게 군사를 움직일 준비를 하게 했다.

“만일 그사이 원소가 움직이면 공손찬에게는 뭐라 하시겠습니까?” 

관우가 그런 유비에게 신중하게 물었다.

“이곳 일은 잠시 청주 자사 전해 (田楷)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없겠네. 우선은 공문거(擧)의 일이 급하네.”

유비는 그렇게 대답하며 군사 삼천을 이끌고 북해로 떠났다.

공융融)은 노나라 곡부 사람으로 공자의 이십 대 손 태산도위 공주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는데, 나이 열 살 때 하남윤 이응(膺)을 찾았다. 이응은 소위 청의파(淸派)의 우두머 리 되는 선비로 그때 이미 세상에 널리 깨끗한 이름을 얻고 있었다. 거기다가 벼슬이 하남윤이니 어린아이가 찾는다고 문지기가 쉽게 들여보내줄 리가 없었다. 그때 공융이 가로막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우리 집과 하남윤의 댁과는 오랜 세교(世)를 맺어왔소 들여보 내주시오.”

그 말을 들은 문지기는 아무리 어린애라 해도 그대로 돌려보낼 수 가 없었다. 공융을 이응에게 데려가 들은 대로 말했다. 이응이 보니 얼굴도 낯설고 이름도 처음 듣는 어린 소년이라 이상한 듯 물었다. 

“너는 우리 집과 세교가 있다 하였지만 도대체 너희 조상 누가 우 리 조상과 친하였단 말이냐?”

그 말에 공융이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예전 공자께서 노자께 예를 물으셨다니, 저와 사군(君)이 어찌 여러 대를 알고 지낸 집안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즉 이응의 성이 노자의 성과 같음에 의지해 꾸며댄 말이었다. 비 록 어린아이의 말장난일지 모르나 이응은 공융의 재주를 기이하다 여겼다.

그때 마침 대중대부 진위(陳)가 찾아오자 이응은 공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참으로 기동(奇童)일세.”

그러나 진위는 공융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천하의 이응에게 대수롭잖은 말장난으로 크게 칭찬받은 어린 것에 대한 시기까지 겹쳐 비꼬인 어조로 대꾸했다.

“어릴 때 총명하면 어른이 되어서는 반드시 총명해지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공융은 되받아 말했다.

“그 말이 옳다면 대부께서는 어릴 때 틀림없이 총명하셨던 모양입니다.”

진위로서는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걸려든 셈이었다. 허허거리며 이응의 말에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자라면 당대의 큰 인물이 될 것일세.”

그 뒤 공융은 중랑장이 되었다가 거듭 벼슬이 올라 북해 태수에 이르렀다. 태수가 되어서도 손님이 찾아오는 걸 몹시 좋아해 항상 말하곤 했다.

“자리에는 귀한 손님이 가득하고, 술독에는 술이 비지 않는 게 내 가 가장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 공융과 유비와의 인연은 그리 깊지 못했다. 지난번 관 동의 제후들이 일어나 동탁을 칠 때 열일곱 갈래 제후 가운데 하나 로 참가해 공손찬을 따라온 유비와 인사를 나누었을 뿐, 다시 몇 년 이나 내왕이 없다가 갑작스레 구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었다.

여느 사람이라면 공융의 그 같은 요청이 좀 엉뚱스러웠겠지만 유 비는 오히려 그게 더 기뻤다. 사사로운 정분에 의지하지 않고도 공 융 같은 천하의 재사가 자기를 믿어줄 만큼 세상에 자신이 알려진 셈이기 때문이었다.

유현덕이 관, 장두 아우와 태사자, 그리고 삼천 군마를 재촉해 북 해에 이르자 도적의 우두머리 관해가 먼저 맞았다. 멀리서 구원군이 이르는 것을 보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어 마주쳐 온 것이었다. 제딴 에는 성안의 군사와 연결되기 전에 하나씩 나누어 깨뜨리려는 심산 같았다.

듣기와는 달리 구원군이 겨우 삼천인 것을 알자 관해는 이내 마 음을 놓았다. 북해성을 포위하는 데 이만을 남겨둔다 해도 자신에게 는 구원 온 군사의 열 배가 넘는 병마가 있었다. 이에 관해는 여러 말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진 앞에 나와 선 유현덕을 향해 똑바로 말 을 몰아 덮쳐갔다. 태사자가 그런 관해를 향해 말 머리를 돌려 세울 때 관운장이 먼저 말을 달려 나가 관해를 맞았다.

관운장과 관해의 말이 서로 어울릴 무렵 양군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비록 도적의 우두머리라 하나 과연 관해는 용 맹을 뽐낼 만했다. 관운장과 어울려 수십 합을 버티는데 자못 그 광 경이 볼만했다.

하지만 그도 끝내 관운장의 적수는 못 되었다. 갑자기 관운장이 청룡도를 일으켜 세우는가 싶더니 길게 흰 무지개를 그리며 후리는 곳에 관해의 몸이 두 동강 나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태사자와 장비가 각기 말을 내어 창을 휘두 르며 적진으로 돌입했다. 현덕 또한 군사를 몰아 그들을 따르며 죽 이니 비록 머릿수가 많다 하나 도적의 무리가 견뎌낼 재간이 없었 다. 금세 대오가 흐트러지고 군령이 상하로 이르지 못했다.

공융도 성 위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관우, 장비 형제와 태사자가 싸우는 모습이 마치 양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와도 같았다. 종횡으로 치달으며 베고 후리고 찌르고 후비는데 아무도 당하지 못했다. 

“성문을 열어라.”

힘을 얻은 공융이 그렇게 영을 내리며 성안의 병마를 이끌고 달 려나왔다. 앞뒤에서 적을 맞자 아무리 수가 많은 도둑의 무리지만 마침내 견뎌내지 못했다. 태반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고 나머지는 거미 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유비를 성안으로 맞아들인 공융은 예를 마치자마자 크게 잔치를 열어 유비와 아울러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유공(劉公)께서 때맞추어 와주지 않으셨다면 이 북해 땅은 도적의 소혈이 될 뻔하였소.”

한차례 술이 돈후 공융이 새삼 그렇게 감사한 뒤 다시 정색을 하며 덧붙였다.

“이제 이 북해 땅은 평온해졌으나 아직 이 공아무개의 근심은 걷히 질 않았소. 실은 공을 청한 것도 황건의 무리 때문만은 아니었소…………..?”

“아니, 그럼 아직도 태수를 괴롭히는 무리가 남았단 말씀이십니까?”

“이 일은 나의 사사로운 청이 아니라 남아라면 의(義)를 짚어나 서야 할 일이외다. 바로 서주(徐州)의 도공조(陶恭祖, 도겸)를 구하는 일이오.”

그러자 유비도 고당에 둔치고 있을 때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도 겸의 수하 장수가 조조의 부친 조승과 그 일가 사십여 명을 죽인 까 닭에 성난 조조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유비는 속으로 그 싸움을 안타깝게 여겼으나 둘 다 아는 사이라 어느 한쪽을 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서서 말릴 만한 힘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 싸움의 후문을 듣기도 전에 공융의 구원 요청을 받고 달려와 그 뒤가 궁금한 때였다. 

“이 비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도공조에게 어려운 싸움이 되리 라는 짐작은 합니다만, 자세한 경과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태수 께서는 더 들으신 게 있으신지요?”

“조조는 순욱과 정욱에게 군사 삼만을 주어 견성, 범현, 동아 등 근거가 되는 땅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는 하후돈, 우금, 전위를 선봉으로 삼아 서주를 향했습니다.”

“그렇다면 전력을 들어 서주를 치려는 셈이군요. 서주에서는 어떻게 eo응했습니까?”

“유공도 아시다시피 도공조는 원래가 인의의 선비라 무비(武備)가 그리 대단하지 못했소. 겨우 구강 태수 변양이 오천 군사로 서 주를 도운다고 나섰으나 그마저도 하후돈에게 길이 끊겨 아무 소용 이 없게 되고 말았소이다.”

“도공조가 인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어쩌다가 조조의 부친과 일가 권속을 죽이게 되었소?”

“들어보면 실로 그 내막이 딱하오.”

공융은 그렇게 말한 뒤 갑자기 영을 내렸다.

“가서 미공)을 들게 하라.”

그러자 기다릴 것도 없이 한 사람의 훤칠한 선비가 들어오며 말했다.

“사람을 멀리 보낼 건 없네. 일찍부터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말투로 보아 공융과는 막역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미축(糜竺), 동해 구현 땅 사람으로 자는 자중 이라 했다. 그의 집은 대대로 큰 부호였는데, 평소 부리는 이와 손님 을 합쳐 만 명 [客萬人] 가재누억(家財累億)이라 할 정도였다.

한번은 낙양에 가서 장사 일을 끝낸 뒤 수레를 타고 돌아오는데 길가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여인이 수레에 태워주기 를 청했으므로 미축은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수레에서 내려 걷기 시 작했다. 그런데 오래잖아 자기 때문에 걷는 미축에게 미안한지 여인 이 자꾸 함께 수레에 오르기를 청했다. 아무도 없는 수레 안에 여인 과 둘이 앉는 것은 예가 아니라 여겨 걷던 그였으나 여인이 자꾸 권 하니 수레에 아니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레에 오른 뒤에도 시종 단정히 앉아 음란한 눈길 한번 여인에게 건네는 일이 없었다. 그의 인품이 단정하고 깨끗하기가 그와 같았다.

몇 리 가지 않아 수레에서 내린 여인은 미축에게 감사에 덧붙여 놀라운 말을 남겼다.

“나는 남방의 화덕성군(火德星君, 불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번에 옥 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그대의 집을 불지르러 가는 길이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예를 다해 대해주는 데 감격하여 그 일을 미리 말해주 는 것이오. 되도록 빨리 돌아가서 재물을 건져내도록 하시오. 나는 밤중에 그대의 집에 이를 것이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연히 사라졌다. 크게 놀란 미축은 집으로 달려가 집 안에 있는 재물들을 급히 끌어냈다. 오래지 않아 과연 부엌에서 불이 일더니 집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서까래 하나 남지 않고 모두 타버렸다. 미리 알고 재물들을 꺼내지 않았던들 하 루 사이에 거지가 될 뻔했던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미축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전처럼 재물에 매 달리지 않았다. 돈과 곡식을 흩어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구제 하고, 향리를 위해서도 물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소문이 태수 도겸의 귀에 들어가니, 그 또한 어진 사람이라 그 같은 미축을 보아 넘기지 않고 불러들여 별가사로 삼았다. 그러다 가 조조의 대군이 서주로 밀려들자 도겸을 위해 옛 친구 공융에게 구원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서주의 하찮은 아전바치 미축이 저희 사군(君)을 위해 유상공 (劉相公)께 문후 드립니다.”

그는 잔치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유비에게 길게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비였다. 미축의 번듯하고 구김 없는 모습을 보자 지난날 조자룡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되었다. 분 명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온 사람 인 듯한 익숙함과 친근감에 더하여 까닭 모르게 혈육의 정까지 느껴 졌다. 유비는 절로 부드럽고 밝은 얼굴이 되어 그런 미축의 예를 받 고 난 뒤 물었다.

“방금 공태수(太守)로부터 서주의 일을 듣고 있던 참이오. 그런 데 어째서 도공조 같이 어지신 분이 남의 일가를 몰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셨소?”

그 말에 미축이 잠깐 민망한 빛을 띠더니 차분하게 일의 내막을 밝혔다.

“우리 사군께서는 조승과 일족 사십여 명이 서주 땅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친히 주의 경계까지 나가 맞아들이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틀이나 잔치를 벌여 환대하시고 떠날 때는 성 밖까지 배웅하시면 서 특히 도위 장개張)에게 군사 오백을 주어 그들을 호위케 하셨 습니다. 조조와는 지난날 관동의 기의 때 함께 말 머리를 나란히 하 고 동탁과 싸운 정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또 그가 산동 일대 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는지라 가까운 땅의 임자로서 그와 우의를 두 텁게 해두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비 땅에 이르러 갑작스런 큰 소나기를 만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들은 조 일 가와 함께 가까운 산사로 피했으나 그사이 몸이 함빡 젖고 추위에 떨게 되어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거기까지 얘기하던 미축은 다시 생각해도 한스러운지 가벼운 탄 식까지 곁들이며 계속했다.

“장개란 자는 본시 황건의 여당(餘黨)으로 우리 서주에 투항해 도 위 자리에 올랐는데, 부하들의 불평이 커지자 슬며시 마음이 인 것 같습니다. 조숭 일가가 따르는 수레만도 백여 대나 될 만큼 재물 을 싣고 있는 걸 보고 그동안 감추고 있던 도둑의 본색이 고개를 든 데다, 황건이 다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그들을 죽이고 도망쳐 도 갈 곳이 많으리란 생각에서였습니다.”

유비는 거기까지만 들어도 나머지는 절로 알 것 같았다.

“도공조께서 사람을 잘못 고르셨구려.”

“그렇습니다. 놈들은 그날 밤 삼경에 조승 일가를 모조리 죽이고 백여 대의 수레에 실은 금은보화를 털어 산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고 합니다. 조숭의 아우 조덕은 진작에 칼에 맞아 죽고 조숭도 첩과 함께 뒷간으로 숨어들었다가 거기서 장개의 졸개들에 베임을 당했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도공조의 잘못만은 아니지 않소? 칼로 사람을 죽였다 해서 그 칼을 만든 대장장이까지 벌한다면 세상에 성 한 사람이 어디 있겠소? 자사께서는 오히려 잔치까지 벌여 조숭일 가를 환대하지 않았소?”

“그런데 조조는 그 죄를 우리 자사께 물어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대군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을 점령하면 군사건 백성 이건 모조리 죽여 분을 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문득 유비의 머리에는 지난날 조조가 여백사(呂) 일가 를 몰살시킨 일이 떠올랐다.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천도(天道)가 멀다 하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소. 아마도 그 일은 지난날 그가 죄 없는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킨 응보 같소. 그 런데 그 뒤 싸움은 어떻게 되었소?”

“조조는 ‘보수설한(報雪恨, 원수를 갚고 한을 씻음)’ 네 글자를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서주로 물밀듯 밀어 왔습니다. 우리 자사께서는 먼저 진두에 나가 조조에게 앞뒤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히 화호(和 好)를 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호령 한마디로 하후돈을 내보내 우리 사군을 베려드니 우리 쪽에서는 조표가 달려 나가 싸움이 일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때 갑자기 미친 듯한 바람이 일며 모래가 날고 돌이 굴러 눈코를 뜰 수 없게 된 탓에 양편 모두 군사를 물렸지 만, 우리 서주병은 조조의 날래고 강한 청주병에게 적수가 되지 못 합니다. 간신히 성안으로 돌아오시기는 해도 지금 우리 사군께서는 스스로 몸을 결박지어 조조에게 항복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구하려 드실 지경으로 낙담해 계십니다. 제가 조조로 하여금 죽어도 장사 지낼 땅이 없도록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쳐 사군을 달래두고 왔습니 다만 실로 근심입니다.”

그렇게 말을 맺은 미축은 다시 한번 간곡한 눈길로 유비를 바라 보았다. 그때 곁에 있던 공융이 거들었다.

“어떻소? 유공께서는 도공조와 죄 없는 서주 백성들이 한가지로 조조의 칼에 어육이 나는 꼴을 보고만 계시겠소?”

“뜻밖에도 도공조 같은 어진 군자가 허물도 없이 어려움을 겪는 군요…….”

유비는 그렇게 동정하면서도 선뜻 도겸을 구하러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공융이 속이 타 따지듯 물었다.

“공은 한실의 종친으로서 이제 조조가 죄 없는 백성을 죽이고 자 신의 강함에 의지해 약한 이를 괴롭히는데도 어찌 나와 함께 구하려 들지 않으시오?”

당연히 앞장설 줄 알았던 유비가 머뭇거리는 데 대한 실망까지 담긴 물음이었다. 그제서야 유비가 천천히 그 까닭을 밝혔다.

“감히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비는 군사가 적고 장수가 모자라 가볍게 움직였다가 서주에 도움도 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 의 비웃음만 사는 게 두렵습니다.”

그러자 공융은 한층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겸을 구하려 드는 것은 예부터의 정의 때문이기도 하지 만 또한 대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오. 그런데 어찌 공은 그 대의를 생 각하는 마음이 없으시오?”

공융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현덕도 더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말을 흐린 것은 도겸을 구하러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벼슬도 낮고 힘도 없는 그를 대등하게 대해주는 공융에 대한 일종의 겸손이 었을 뿐이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태수께서 먼저 가십시오. 나는 공손찬에게로 가서 병마 몇 천을 더 빌린 뒤 곧 뒤쫓겠습니다.”

“공은 결코 실언해서는 아니 되오.”

그래도 못 미더운지 공융이 다시 다짐했다. 유비가 옅은 웃음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공께서는 이 비를 어떻게 보십니까? 성인께서 이르기를 사람은 모두 죽게 되어 있되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自古皆有死人無信 不立]고 하였습니다. 이 비는 군사를 빌리건 못 빌리건 반드시 서주 에 갈 것이오.”

그제서야 공융도 믿는 얼굴이었다.

이에 공융은 그날로 미축을 서주로 돌려보내 자신과 유비가 구하 러 간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고, 자신은 곧 서주로 떠날 병마를 수습 했다. 그때 태사자가 작별을 고했다.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태수를 돕고자 왔으나 다행히 이제 걱정 거리가 없어졌으니 저도 이만 떠나볼까 합니다. 양주 자사 유요繇)는 저와 같은 고향 사람인데 사람을 보내 부르니 아니 가볼 수가 없습니다. 뒷날 다시 뵙겠습니다.”

공융은 그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으나 태사자는 그마저 받지 않고 노모에게 돌아갔다. 노모가 일의 전말을 듣고 기뻐해 마지않았다. 

“네가 공태수에게 은혜를 갚았다니 실로 기쁘구나!”

태사자는 그런 노모를 북해에 남겨두고 다시 유요를 바라 양주로 떠났다.

공융이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구원하러 떠날 즈음 유비도 공손찬 의 근거지에 이르렀다. 유비가 공손찬에게 서주를 구할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자 공손찬이 물었다.

“조조와 자네는 원수진 일도 없는데 어찌하여 어렵게 군사를 빌 려가며까지 도겸을 위해 힘을 쓰려 드는가?”

“제가 이미 허락한 일이니 어길 수 없습니다.”

유비는 다른 설명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긴 말을 않아도 공손찬 이 군사를 빌려줄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 무렵 공손찬은 원술과 손을 잡고 원소와 조조의 드러나지 않은 연결에 대항하고 있었다. 직접 조조와 원한을 맺은 적은 없으나 원소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 서 조조는 분명 적이었기에 유비가 그와 싸우는 걸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과연 공손찬은 못 이긴 체 허락했다.

“보졸 이천을 빌려줄 테니 일이 그러하다면 가보게.”

생각보다 적은 군사였지만 유비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다만 조자룡을 딸려주기를 청할 뿐이었다.

“그리하게.”

공손찬은 그것도 선선히 허락했다. 조자룡 또한 그 무예는 인정하지만 어쩐지 깊은 정이 가지 않아 한구석에 처박아둔 장수였기 때문 이었다.

유비는 이천 보졸보다 조자룡 한 사람 빌린 것을 더욱 기쁘게 여 겼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공손찬 앞을 물러나기 바쁘게 본래 이끌고 있던 삼천 군마를 관운장과 장비에게 딸려 전부로 삼고 새로 빌린 이천 보졸은 조자룡에게 주어 후부를 삼은 뒤 서주로 향했다.

한편 서주로 돌아간 미축은 북해 태수 공융이 구원을 온다는 소 식과 함께 유현덕도 뒤따라 오리라는 걸 전했다. 그 무렵 미축과 같 이 구원을 청하러 갔던 진원룡(陳元龍, 진등)도 청주 자사 전해가 구 원을 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전해 역시 공손찬의 세력 아래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공손찬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 었다.

그러자 도겸도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조조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들 삼(三)의 군마가 온다면 그럭저럭 서주를 지켜낼 것도 같았다.

과연 다음 날로 공융의 병마와 전해의 병마가 서주성 밖에 이르 렀다. 그러나 둘 다 조조의 기세가 사나운 걸 꺼려 멀찌감치 산 아래 진을 치고 감히 가볍게 다가가지 못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못하기는 조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두 갈래 의 구원군이 이르는 걸 보자 그 역시 군세를 나누어 만일에 대비할 뿐, 서주성 공격을 계속하지 못했다.

유현덕이 도착한 것은 그렇게 양편이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였다. 공융이 자기를 보러 온 현덕에게 말했다.

“조조의 군사는 수가 많고 날랠 뿐만 아니라 조조 또한 군사를 잘 부리니 가볍게 싸워서는 아니 되겠소. 먼저 그 움직임을 자세히 살 핀 뒤에 군사를 내보내야 할 것이오.”

조조군의 기세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유비가 그런 공융의 움츠 러든 기세를 나무라듯 한 계책을 내놓았다.

“태수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다만 성안에 식량이 떨어져 서주 가 오래 견디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운장과 조자 룡에게 사천 군마를 딸리어 공태수의 휘하에서 서로 돕게 하고, 저 와 장비는 일천 군마와 함께 조조의 진영을 뚫고 서주성 안으로 들 어가 도태수와 앞뒤를 의논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융이 들으니 약간 위험이 있기는 하나 자신의 소극적인 계책보 다는 나을 듯싶었다. 이에 기꺼이 동의하고 전해를 만나 서로 기각 지세(拾角之勢, 뒷발을 잡고 뿔을 누름. 앞뒤에서 억누름)를 이룬 뒤 관운 장과 조자룡의 군사는 양끝에서 변화에 응하게 했다. 잘못되어 유비 가 싸움에 지더라도 조조의 대군이 승세를 타고 자기들의 본진까지 휩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 같은 대비가 마무리된 것을 보자 유비와 장비는 일천 군마를 이끌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조조의 진영 일각으로 뛰어들었다. 갑작 스런 돌진이라 그곳에는 절로 혼란이 일었다. 그 혼란을 틈타 유비 의 일천 군마가 그대로 뚫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며 한 떼의 마보군이 장수 한 명을 옹위하고 나타나 길을 막았다.

“어느 미친 놈들이 감히 이곳을 몰래 뚫고 가려 드느냐?”

말고삐를 당기며 그렇게 소리치는 것은 다름 아닌 조조의 장수 우금이었다. 그를 보자 장비는 대꾸도 않고 똑바로 장팔사모를 휘두 르며 덮쳐갔다. 장비와 우금의 말이 서로 마주치며 두 사람의 병기 가 불을 뿜었다.

그렇게 몇 합 어우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유비가 쌍고검을 빼들 고 주춤한 일천 군마를 휘몰아 일시에 돌진했다. 그렇게 되자 우금 의 군사들이 먼저 기세에 눌려 흩어지고 우금도 마침내는 장비의 기 세를 당하지 못해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비가 그 뒤를 따르며 길을 막는 족족 창으로 찔러 떨어뜨리고 다시 그 뒤를 현덕의 일천 병마가 성난 물결처럼 따르니 조조의 군 사들은 감히 막을 생각을 못했다. 그 틈을 탄 현덕의 병마는 어렵잖 게 서주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성 위에서 ‘평원(平原) 유현덕’이라 크게 쓴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걸 보고 도겸은 급히 문을 열게 했다. 현덕이 무사히 성안으로 들어 가니 도겸은 반갑게 그를 맞아 자사부(刺史府)로 안내했다. 그리고 서로 만나는 예를 다하기 무섭게 잔치를 벌여 현덕을 대접하는 한편 따라온 병마에게도 술과 고기를 내려 수고를 위로했다.

도겸은 원래가 문약한 선비에 가까웠다. 난세를 만나 간신히 한 조각 땅을 지키고는 있으나 사방에 널린 적들과 싸워 이겨 마침내 살아남기에는 부족함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비를 만 나보니 그 모습과 태도가 헌앙(軒昻)하고 말과 뜻이 활달한 게 영웅 의 기상이 있었다. 그라면 넉넉히 서주를 지키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도겸이 유비를 그날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관동 의기의 때 공손찬을 따라온 걸 본 적이 있으나, 그때는 공손찬의 부 장쯤으로 여겨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비 자신도 어딘가 설익고 덜 다듬어진 듯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만나보니 이게 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이에 도겸은 은근한 기쁨까지 느끼며 미축에게 서주 자사의 패인 (牌印)을 가져오게 하여 유비에게 넘겨주려 했다.

“공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러십니까?”

너무도 생각 밖의 일이라 유비가 놀라며 물었다. 도겸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지금 천하는 어지럽고 천자의 위엄은 제대로 떨쳐지지 못하고 있으니 공은 한실의 종친으로 마땅히 힘을 다해 기울어져가는 사직 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오. 이 늙은이는 나이 많고 무능한 주제에 서 주를 맡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제 공을 보니 바른 주인을 만난 듯하오. 공은 사양 말고 이 서주를 받아 작게는 고을 백성을 편히 살 게 하고 크게는 이 땅을 바탕으로 사직을 일으키시오. 이 겸(謙)은 스스로 표문을 써서 공을 자사로 삼도록 조정에 상주(上)하겠소.” 

진정이 배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비는 더욱 놀랐다. 벌떡 자리 에서 일어나 도겸에게 두 번 절한 후에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를 곁 들여 말했다.

“유비가 비록 한실의 후예라 하나 공은 적고 덕은 엷어 평원의 상(相)이란 벼슬도 오히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다만 대의를 위해 공을 돕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공께서 이처 럼 말씀하시니 그것은 바로 이 유비가 이 땅을 삼킬 뜻이 있는 것으 로 의심하고 계시다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저에게 그 런 불측한 마음이 있다면 결코 저 하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입 니다.”

그렇게 말하는 유비 또한 진심이었다. 대저 가장 못한 치자(者) 는 주색과 재물을 탐하고, 그 윗길은 땅을 탐하며, 가장 나은 치자는 사람을 탐한다고 한다. 유비는 그 한 예를 원소에게서 보고 있었다. 원소가 기주를 빼앗기 전에는 천하에서 누구보다 명망 높은 인물 가 운데 하나였으나 기주를 빼앗자마자 흔한 야심가의 무리 가운데 하 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록 기름지고 넓은 땅은 얻었지만 사람[ᄉ 은 잃고 만 셈이었다. 유비는 사람을 잃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도 큰 것을 잃는 것이라는 걸 본능으로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도 도겸은 자기 뜻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이것은 이 늙은이의 진심이오. 결코 공의 생각하는 바와는 같지 않으니 부디 사양 말고 받으시오.”

그렇게 간곡히 말하며 두 번 세 번 자사의 패인을 내밀었다. 유비 가 기어이 받으려 들지 않자 미축이 곁에서 둘에게 권했다.

“지금 적군이 성 아래 이르렀으니 마땅히 의논해야 할 일은 적을 물리칠 계책입니다. 그 일은 뒷날 평온한 때를 기다려 다시 의논함 이 옳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조조를 물리치는 일입니다.”

유비도 대뜸 그렇게 찬동했다. 그러자 도겸도 그 말이 옳다 여겼는지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유비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제 생각에는 먼저 조조에게 글을 보내 화해를 권해보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만약 조조가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때 군사를 내 물 리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도겸이 가장 바라는 해결책이었다. 이에 기꺼이 유비의 말을 좇으니, 유비는 성안과 성 밖 세 곳의 우군 진채 에 그 뜻을 전하여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조조에게 글을 써 보냈다.


‘유비는 관외(外)에서 공을 뵈온 뒤로 그 이고 사는 하늘이 각기 달라 오래도록 존안을 뵙지 못했습니다. 이에 문안을 드림과 아울러 한 가지 간곡히 권하고자 합니다. 지난번 존부(尊父)이신 조후(曹侯, 조승을 높여 부른 말)의 일은 장개란 자가 흉악하여 저지른 일이옵고, 도공조(陶恭祖)에게는 허물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밖으로는 황 건의 남은 무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안으로는 동탁의 남은 무리가 다시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먼저 조정의 일을 급하게 여기시고 사사로운 원수 갚음은 뒤로 미루도록 하십시오. 서 주에서 군사를 물리시어 나라를 어려움에서 건져낸다면 이는 서주 를 위하여 다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천하를 위해서도 더할 나위 없 는 다행이 될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조조는 왈칵 성이 났다.

“유비가 대체 어떤 놈이길래 감히 내게 이런 글을 보내 화해를 권한단 말이냐? 더군다나 이 글 가운데는 은근히 비꼬고 놀리는 구석 까지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글을 가져온 사자의 목을 베고 힘을 다해 성을 공격하 라는 명을 내렸다. 곽가가 그런 조조를 말렸다.

“유비는 멀리서 구원을 와서도 먼저 주공께 예를 다하고 다음에 싸우려는 여유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마땅히 좋은 말로 답 을 보내 유비가 마음을 놓게 하신 뒤 갑작스레 군사를 내어 성을 공 격하시면 성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난 중에도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조조는 유비의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여 머무르게 해놓고 답서에 써 보낼 글을 의논했다. 한참 그 의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본거지인 연주에서 유성마流 星馬)한 필이 나는 듯 달려와 급한 소식을 알렸다.

“큰일 났습니다. 여포가 연주를 급습하여 빼앗고 그 여세를 휘몰 아 복양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조조는 크게 놀랐다. 자칫하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전에 근거지 부터 잃어버릴 판이었다.

“연주를 잃어버리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 어쩔 수 없이 거기부터 먼저 되찾아야겠다.”

그때 곽가가 다시 권했다.

“이제야말로 주공께서 유비에게 마음껏 인정을 베푸실 때입니다. 유비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체하고 군사를 물려 연주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그 말을 따라 유비에게 좋은 말로 답을 보내고 그날로 진채를 뽑아 연주로 달려갔다.

사자가 서주성 안으로 돌아와 도겸에게 조조의 글을 바치니 도겸 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곧 사람을 보내 성 밖에 있는 공융과 전해, 관운장, 조자룡 등을 불러들여 크게 잔치를 벌였다. 그토록 두렵던 조조가 깨끗이 물러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잔치가 끝난 뒤 도겸은 다시 서주 물려주는 일을 꺼냈다. 현덕을 끌어 상좌에 앉힌 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여럿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늙고 두 아들은 재주가 없어 나라에서 받은 중임을 감 당할 수가 없으니 이 서주는 임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소이 다. 그런데 내가 보니 여기 이 유공(公)은 제실의 종친일 뿐 아니 라 덕이 높고 재주가 많아 가히 서주를 다스릴 만한 그릇이오. 이에 유공에게 서주를 넘기려 하니 여러분들은 증인이 돼주시오.” 

그러고는 다시 유비를 향해 간곡히 말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서주를 맡아 이 늙은이로 하여금 한가로이 병이나 다스리게 해주시오.”

그러나 유비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공문거擧, 공융)의 영을 받아 서주를 구하러 온 것은 대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까닭 없이 주인 있는 땅을 차지하면 세 상사람들은 이 유비를 불의한 인간이라 배척할 것입니다.”

“지금 제실은 토막이 나고 나라는 뒤집힌 거나 다름없어 공을 세 우고 큰일을 이루기에는 정히 좋은 때입니다. 서주는 재화가 풍성할 뿐만 아니라 호구가 백만이나 되니 한번 근거로 삼을 만한 땅입니다.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미축이 곁에서 도겸을 대신해 다시 권하고 진등陳登)도 거들었다. “도(陶)자사께서는 병이 잦으시어 일을 보살필 수 없으시니 명공 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유비가 이번에는 딴 사람을 들고 나왔다.

“원공로(公路, 원술)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의 후예로서 세상의 인 심이 그리로 쏠리고 있습니다. 마침 그가 있는 수춘성도 이곳에서 가 까우니 그에게 양보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공융이 받았다.

“원술은 무덤 속의 오래된 뼈다귀나 다름없는 사람이오, 입에 담 을 필요조차 없소이다. 오늘 일은 하늘이 유공에게 서주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으니 받지 않으시면 뒷날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다.”

그때 도겸이 다시 유비에게 눈물까지 보이며 말했다.

“그대가 이걸 받지 않고 떠나면 이 늙은이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 할 것이오!”

“도공께서 저처럼 바라시니 형님께서 거두시지요.”

“우리가 억지로 뺏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스스로 물려주겠다는 데 그렇게 굳이 사양하실 건 뭐요?”

관우와 장비도 참지 못해 한마디씩 했다. 그런 두 아우를 유비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은 이 형을 불의에 빠뜨리려 드느냐!”

그제서야 유비의 뜻이 굳음을 안 도겸은 패인을 거두고 가까운 소패에라도 머물러 서주를 지켜주기를 청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권하자 유비도 그것만은 승낙했다. 이튿날 조자룡과 빌린 보졸 이천을 함께 공손찬에게로 돌려보낸 그는 두 아우와 더불어 자신의 삼천병마를 이끌고 소패성에 자리 잡았다. 얼핏 보아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그것은 기실 유비가 공손찬의 그늘을 벗어남을 뜻하 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생각하면 공손찬은 유비란 용이 자란 연못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연못은 다 커버린 유비에게는 너무 좁았다. 그가 구만리 창천으로 솟구치기 위해서는 몸과 뜻을 더 키울 보다 깊고 넓은 바다가 필요 했다. 그 바다로 가기 위해 유비는 먼저 공손찬이란 연못에서 빠져 나와야 했다. 소패는 물론 서주조차 그 같은 바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곳이 그 바다로 가는 한 물줄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