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1화 : 복양성의 풍운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1화 : 복양성의 풍운


복양성의 풍운

영웅이란 인격의 이름인가 행위의 이름인가. 또 영웅은 시대의 산 물인가, 아니면 시대가 영웅의 산물인가. 그리고 영웅이란 한 시대 를 주도하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인간인가, 아니면 단순한 선구자에 불과하거나 많은 동시대인의 업적을 한 개인의 이름 아래 묶은 관념 의 덩어리인가. 이 같은 논의는 오랫동안 되풀이되어왔고, 아직도 그 결론은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바 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보면 어떤 특정한 시기에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또한 비상한 노력으로 그 시대의 난점을 해결해나 가는 인간의 존재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시대의 산물이나 단순히 동시대인의 업적을 결합한 추상적인 실체가 결코 아닌, 생동하는 인 격체로서의 영웅이 그러하다.

따라서 비교적 근대에 들어서서 대두된 전체주의적 영웅관은 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개인주의적 영웅관을 온전히 극복해낸 것 같지는 않다. 시대가 그의 출현에 없어서는 안 될 배경 이 되어주었고, 그 시대를 함께 산 민중들의 업적이 부당하게 그의 이름 아래 흡수된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영웅이란 말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개인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 영웅이란 인격의 이름이며 시대의 피동적 산물이 아니 라 능동적 주체이며, 다수인의 가상적 총체가 아니라 역사적이면서 도 구체적인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시대의 상황이나 이름없 는 동시대인의 노력만으로 영웅을 정의하려 드는 것은, 피동적이거 나 무의식적인 것으로 능동적이면서도 주체적인 것을 설명하려 드 는 무리한 논리로만 여겨진다.

그런 뜻에서 후한말은 앞뒤의 그 어떤 때보다 요란한 영웅들의 시대였다. 한 땅에 기대 또는 한 무리를 이끌고 일어난 이들은, 시대 의 상황이나 그를 옹위한 무리의 절실한 요구와의 끊을 수 없는 연 관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뛰어난 능력과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복수 개념과 가장 친하기 힘든 것이 또한 영웅이란 말이 다. 극히 희귀한 실례를 제외하면 한 시대는 한 영웅만을 가지기를 원한다. 여기서 마치 물로 쌀과 돌을 일어[]내듯 투쟁에 의한 선별 작업이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동양에서는 흔히 그것을 일러 풍운이라 부른다.

돌이켜보면 후한말의 풍운은 황건적의 거병으로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몇 년간은 명분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 서도 한이란 정통의 권위에 의지한 쟁투였다. 그 권위에 도전할 힘 을 기르기 위해 사투를 벌인 것은 아무래도 관동(關東)의 기의 (起)가 와해된 뒤의 일로, 진정한 천하쟁패의 풍운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라 함이 옳을 것이다.

군량의 싸움이 목적이 된 연주 자사 유대와 동군 태수 교모 (喬)의 싸움을 비롯해 기주를 둘러싼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 원소 와 원술의 반목, 유표와 손견의 싸움, 그리고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 고 내세우고 있는 조조와 도겸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각기 이런저런 구실은 있으나 이미 어디에서도 의전(義戰)은 없었다. 아직 감추어 져 있기는 해도 천하쟁패의 야심말고는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는 크고 작은 풍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풍운은 서주에서 자 리를 옮겨 조조의 근거지에 가까운 복양 땅에서 다시 거칠게 일기 시작한 것이다.


서주 자사 도겸이 까닭도 모르고 기뻐하고 있는 사이에 서주로부 터 군사를 물린 조조는 신속히 연주를 향해 달려갔다. 이때 여포는 이미 연주뿐만 아니라 복양까지 떨어뜨린 뒤였다. 다만 견성(城), 동아(東), 범현(范세 성만이 순욱과 정욱 두 모사의 재주에 힘 입어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주의 경계까지 나와 조조를 맞은 것은 지키던 성을 여포에게 빼앗기고 떠돌던 조인과 조홍이었다. 여러 차례 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여포에게 쫓기던 나머지 조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조조를 만나기가 무섭게 지난 일을 늘어놓았다.

“자네들 같은 맹장이 미련한 여포 하나를 막아내지 못해 이같이 낭패를 당했다니 실로 알 수 없는 일이네.”

조조는 그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 다. 용맹은 여포에게 뒤질지 몰라도 꾀나 슬기로는 각기 여포를 앞 서는 조홍과 조인이었다. 그들이 든든한 성에 의지해서도 여포를 당 하지 못했다니 얼른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조홍(曹)이 분한 듯 말했다.

“여포 그놈에게 진궁(宮)이 붙어 갖은 꾀를 다 짜내고 있습니다. 순욱이나 정욱 같은 이도 지키기에 급급할 지경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사정을 알 만했다. 그리고 상처와도 같은 옛 일과 아울러 서주로 군사를 내기 얼마 전 한 세객으로 자기를 찾아 왔던 진궁을 떠올렸다. 그때 진궁은 동군의 종사(從事)로 있으면서 도겸을 위해 조조를 달래러 온 적이 있었다.

조조는 말없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그가 괘씸했으나 동탁에게 쫓 기던 자기를 살려준 은혜 또한 커서 아니 만나볼 도리가 없었다. 거 기다가 그를 통해 조금이라도 서주의 사정을 알 수 있다면 서주를 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은원이 묘하게 얽힌 두 사람 사이건만 조조에게 예를 올리는 진 궁의 표정은 얄미우리만큼 태연했다. 그러나 더욱 조조의 심기를 건 드린 것은 예를 마치자마자 입을 연 그의 말이었다.

“제가 듣기로 이제 명공(明公)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향하셔서, 존부(父)의 원수를 갚고자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까지 모조 리 죽이시려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일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 어 특히 몇 마디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도겸은 어진 사람 이요, 군자라 불릴 만큼 이익을 위해 대의를 잊는 무리와는 다릅니 다. 존부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장개가 악해서이지 도겸의 죄는 아 닙니다. 더군다나 그 서주의 백성들이야 명공과 무슨 원수 진 일이 있겠습니까? 그들을 죽이시는 것은 결코 의로운 일이 못 됩니다. 바 라건대 명공께서는 부디 세 번 헤아려 일을 행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그런 진궁의 어조에는 어딘가 여백사 일가의 일을 은근히 상기시키는 데가 있었다. 이에 크게 성이 난 조 조는 그를 꾸짖어 물리쳤다.

“그대는 전에 나를 버리고 가놓고 이제 무슨 얼굴로 다시 찾아왔 는가? 도겸이 내 가족을 모두 죽였으니 나는 마땅히 그 원한을 씻으 려는 것뿐이다. 비록 도겸을 위해 나를 달래러 왔으나 내가 어찌 그 대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헛되이 혀와 목청을 수고롭게 하지 말 고 이만 물러가시오.”

그러자 진궁도 어쩔 수 없는지 더 조르지 않고 물러났다. 뒤에 듣 기로 그는 더 이상 도겸을 대할 면목이 없어 진류 태수 장막(張邈)에 게로 가버렸다고 했다. 장막의 아우 장초(張超)와 교분이 있어 그리 로 의지하러 갔다는 것인데, 이제 난데없이 여포의 사람이 되어 나 타났으니 조조에게는 실로 뜻밖이었다.

원래 여포와 진궁이 만난 경위는 이러했다.

이각과 곽사의 반격을 견디지 못해 장안을 버리고 나온 여포가 처음 몸을 의탁해 간 곳은 남양의 원술에게로였다. 그러나 원술은 여포의 사람됨이 배반을 잘하고 정한 마음이 없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포는 다시 원소에게로 갔다. 원소 역시 여포를 믿지 않기 는 원술과 다름없었으나 그래도 그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 이었다. 여포의 무예와 용맹이 아까워 받아들여 객장(客將)으로 머 물게 했다.

하지만 원소에게서도 여포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때마침 다시 일 기 시작한 흑산적의 우두머리 장연(燕)을 함께 칠 때까지는 좋았 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상산에서 장연을 깨뜨려 우쭐해진 여포가 그 자신이 주인이나 된 듯 원소의 수하 장수들을 오만하게 대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원소 또한 그리 너그러운 사람이 못 되니 그런 여포를 살려두려 하지 않았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여포는 다시 장(張)이란 이에게 몸을 의 탁해 갔지만 거기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전에 방서(舒)란 자 가 이각과 곽사 몰래 여포의 처첩을 장안성 안에 감추어주었다가 여 포에게로 보낸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 그 일이 탄로나 다시 여포를 궁하게 만들었다. 이각과 곽사는 방서를 목 베고 장양에게 글을 보 내 여포를 죽이라고 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시 목숨이 위태롭게 된 여포는 이번에는 진류 태수 장막에게 의지해 갔다. 그때 마침 도겸에게 돌아갈 면목이 없어진 진궁이 장 막의 아우 장초와 나란히 나타났다. 진궁은 여포가 장막에게 의탁하 러 온 걸 보자 문득 한 계책이 떠올랐다. 장막에게 예를 마치기 바쁘 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한의 천하는 무너지고 영웅들은 다투어 일어나는 판에 태수는 천리의 땅과 수많은 백성을 거느렸으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 의 부림을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한 일이 아니겠소?”

진궁은 먼저 그렇게 장막을 격동시킨 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지금 조조는 서주를 치고자 대군을 일으켜 연주는 가위 비어 있 는 것이나 다름없소. 거기다가 당세에는 그 용맹을 당할 자가 없는 여포까지 태수의 막하에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 할 수 있소이다. 여포와 함께 연주를 치도록 해보시오. 만일 연주만 얻게 된다면 한번 큰일[伯業]을 꾀해볼 수도 있을 것이오.”

장막도 들어보니 귀가 솔깃했다. 곧 여포에게 군사를 주어 연주를 치게 했다. 자기의 본거지에 대한 조조의 대비가 소홀했던 것은 아 니었으나 워낙 천하의 여포에다 모사 진궁까지 붙어 있으니 조홍과 조인이 견뎌내지 못했다. 순욱과 정욱이 지키는 세 성을 제하고는 연주에 속한 모든 군과 현이 여포의 말발굽에 짓밟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조조는 그 같은 경과를 다 알고 난 뒤에도 크게 낙담하지 는 않았다.

“비록 여포가 용맹하고 진궁이 붙어 있다 하나, 위인이 워낙 무모 하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소.”

그렇게 말하여 먼저 군사들을 안심시킨 뒤에 진채를 세우고 여포 와 싸울 의논을 했다.

조조가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는 소식은 여포의 귀에도 들어갔다. 뜻밖에도 조조의 움직임이 빨라 벌써 그 군사가 등현을 지났다는데는 적지 않이 놀랐으나, 지난번에도 한번 조조를 크게 쳐부순 적이 있는 여포라 아직 얕보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조금도 망설이거나 두 려워하는 기색 없이 설란과 이봉(李) 등을 불러 영을 내렸다. “나는 오래전부터 너희 둘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군사 일만을 줄 테니 이 연주성을 지켜보아라. 나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앞서 나 가 조조를 깨뜨려버리겠다.”

영을 받은 두 장수는 곧 성을 지킬 채비에 들어가고 다른 장수들 은 여포를 따라 출전할 채비에 들어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진궁 이 급히 여포에게 달려가 물었다.

“장군은 연주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나는 복양에 군사를 머물게 하여 이 연주성과 아울러 솥발과 같 은 형세를 이루고자 하오.”

여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진궁이 답답한 듯 말했다. 

“아니 됩니다. 설란은 결코 연주를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 다는 차라리 이 책이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남쪽으로 백팔십 리 쯤 가면 태산의 험한 길이 나옵니다. 그곳에 날랜 군사 만 명을 숨겨 기다리면 연주가 떨어졌다는 말에 놀란 조조는 필시 군사의 행군 속 도를 배로 늘려 달려올 것입니다. 그런 조조의 군사가 길을 반쯤 지 났을 때 급히 들이치신다면 한 싸움으로 넉넉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채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복양으로 군사들을 내는 것은 달리 좋은 계책이 있기 때문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딴에는 이미 결정이 서 있는 듯했다. 거기다가 아직 서로 만난 지 오래 안 되는 터라 진궁도 굳이 자기 생각만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이에 진궁의 꾀는 쓰이지 않고, 여포는 설란에게 연주를 지키 게 한 뒤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복양으로 떠났다.

진궁의 예측대로 조조의 군사는 과연 태산의 험로를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군사를 멈추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적 의 복병이 있을까 두려운 지세입니다.”

모사 곽가가 험한 길에 접어들기에 앞서 조조를 깨우쳤다. 조조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여포가 꾀가 없어 설란 같은 자로 연주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복양으로 갔소. 그렇게 병략에 어두운 자가 어떻게 이곳에 군사를 매복시킬 줄 알겠소?”

아마도 여포가 복양으로 가는 걸 보고 이미 진궁의 꾀가 쓰이지 않고 있음을 짐작한 것 같았다. 마음 놓고 태산의 험로를 지난 뒤 조 인에게 일군을 떼어주어 연주를 치러 보내고 자신은 곧바로 여포를 향해 달려갔다.

진궁은 조조의 군사가 쉽게 태산을 지났다는 말을 듣자 몹시 애 석했다. 그러나 어쨌든 여포와 함께 싸우는 중이라 그 군사가 그대 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조조의 군사는 먼 길을 와 피곤해 있으니 급히 싸우는 게 이롭습니다. 싸움을 늦춰 저들에게 기력을 되찾을 여유를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진궁은 다시 계책을 짜내 여포에게 권했다. 그러나 여포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나는 한 필의 말로 천하를 종횡해온 사람이오. 어찌 조조 따위를

걱정하겠소! 그가 진채를 세울 때까지 기다렸다 사로잡아도 늦지 않 을 것이외다.”

그런 여포에게는 아직도 조조가 애송이로만 보였다. 자신은 이미 동탁 아래서 제후의 열에 올라 천하를 호령할 때도 조조는 아직 서 생의 티를 벗지 못한 교위에 지나지 않았다. 기껏 한다는 짓이 단도 를 품고 동탁을 찌르려는 따위 하찮은 자객의 흉내나 내다가 그마저 도 실패해 쥐새끼처럼 달아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열일곱 갈래[ 路] 제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했던 것은 이런저런 명분으로 모여든 그들의 머릿수와 기세였을 뿐, 조조 는 여전히 풋내기 의병 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원소처럼 가문이 좋 고 인망이 두터워 맹주로 추대되지도 못했고, 손견처럼 용맹이 뛰어 나 선봉을 맡은 적도 없었으며, 공손찬처럼 좋은 막장(幕將)을 두어 전국의 변화를 주도한 적도 없었다.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군사로 동 탁을 뒤쫓다가 자신에게 여지없이 패해 목숨만 겨우 건져 달아나지 않았던가…………….

덕분에 복양에 이른 조조는 아무 어려움 없이 진채를 내리고 지 친 군사들을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군사들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렸다 싶자 비로소 장졸들을 이끌고 싸움하기 좋은 벌판 을 골라 전열을 벌였다.

먼저 태세를 갖춘 조조는 문기 아래로 말을 몰고 나와 여포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군데 둥글게 진세를 이룬 곳에 적토마에 높이 오른 여포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사이에 얻은 여덟 장수였다. 첫 번 째는 안문 마음 땅의 사람으로 자를 문원)이라 쓰는 장요(張遼) 였고, 그다음은 태산 화음 땅 사람으로 자를 선고(宣高)라 쓰는 장패 (臧)였는데 둘은 각기 여섯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학맹(郝萌), 조성(性), 위(魏續), 후성(侯成), 송헌(憲), 성렴(成)이 그들로 외양들이 자못 씩씩했다. 그 뒤에는 다시 오만 군사가 늘어서 있는 데 북소리가 천지를 떨어 울리는 듯했다.

“나는 일찍부터 네놈과 원수 진 일이 없는데 네놈은 어찌하여 내 땅을 빼앗으려 드느냐?”

생각보다 호대한 여포의 군세에 기죽지 않으려는 듯 조조가 먼저 여포를 가리키며 소리 높이 꾸짖었다. 여포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한실의 땅이라면 그 땅에 사는 자는 누구든 몫이 있게 마련이다. 너는 어찌 이 땅이 네 것이라고만 우기느냐?”

여포의 둔한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응수였다. 그 러나 아무래도 길게 말하다 보면 까닭 없이 남의 땅을 빼앗은 자기 에게 불리할 줄 알았던지 여포는 그 말에 이어 대뜸 곁에 있던 장패 에게 소리쳤다.

“너는 나가서 저 애송이를 사로잡아 오너라!”

장패는 영을 받자 두말 없이 말을 달려 나가 싸움을 돋우었다. 조 조 쪽에서 악진이 창을 들고 마주쳐 오자 곧 둘 사이에 한바탕 사나 운 싸움이 일었다. 말이 엇갈리고 창을 주고받기를 서른 합이 넘도록 좀처럼 승부가 가려지지 못했다.

보고 있던 하후돈이 싸움을 돕고자 말을 박차며 나갔다. 여포 쪽에서는 다시 장요가 달려나와 하후돈을 맡았다. 또 한 쌍의 좋은 적

수였다.

그러나 성미 급한 여포는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한가롭게 기다 릴 수가 없었다. 분연히 방천화극을 꼬나들고 말을 달려 나오니 그 기세에 눌렸는지 악진, 하후돈이 모두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 작했다. 그렇게 되면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수 를 따라 밀리는 조조의 군사를 힘이 난 여포의 오만 군사가 뒤쫓으 며 죽이니 조조는 삼십 리나 쫓긴 뒤에야 간신히 군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여포가 스스로 군사를 거둬간 덕택이었다.

한 싸움에 크게 진 조조는 진채에 돌아오자마자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으고 여포를 꺾을 계책을 의논했다. 우금이 나서서 한 계책을 말했다.

“제가 오늘 산 위에서 바라보니 복양 서쪽에 여포의 진채 하나가 있는데 군사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그곳을 지키 는 장수 또한 우리가 싸움에 져서 쫓겨갔다는 말을 들은 터라 오늘 밤은 틀림없이 야습에 대비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이끌고 그 진채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그곳을 빼앗는다면 우리 군 사는 다시 힘을 얻게 되고, 여포의 군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될 터이 니 어김없는 상책일 것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 밤 안으로 마보군 이만을 뽑고 조 홍, 이전, 모개, 여건, 우금, 전위 여섯 장수를 앞세워 사잇길로 나아가게 했다.

이때 여포는 진중에서 잔치를 열어 장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궁이 문득 무얼 생각했는지 근심스런 얼굴로 여포에게 말

했다.

“서쪽에 있는 진채는 우리에게 매우 요긴한 곳입니다. 혹시라도 조 조의 야습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것들은 오늘 한 싸움을 크게 져 쫓겨갔는데 어떻게 감히 우리 를 넘볼 수 있겠소?”

여포가 태평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진궁은 한층 정색을 하 고 대답했다.

“조조는 군사를 매우 잘 부리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대비 하지 않는 틈을 노려 공격해올 것이니 미리 방도를 취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모에 어두운 여포라지만 그래도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 은 사람이었다. 진궁이 거기까지 말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 다. 그 자리에서 고순, 위속과 후성 세 장수에게 한 떼의 군사를 딸 려 서쪽에 있는 진채를 지키러 보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조조는 저물 무렵 여포의 서쪽 진채에 이르기 무섭게 사방으로 군사를 돌입시켰다. 원래 많지 않던 여포의 군사라 조조의 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니 조조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포의 진채 하나를 빼 앗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사경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조조 쪽이 승리에서 온 방심에 빠져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 여포가 보낸 구원병이 고순을 앞세우고 짓쳐들어왔다. 조조는 스스로 군마를 이끌고 고순 의 군사들을 맞아 싸웠으나 어두운 밤중이라 혼전이 되고 말았다.

양편 군사가 적인지 저희 편인지 분간할 수 없게 얽힌 채 싸우는 동안에 날이 훤히 밝아왔다. 갑자기 서쪽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더 니 군사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고했다.

“여포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조조는 깜짝 놀랐다. 애써 빼앗은 진채를 버리고 급히 군사를 돌 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순과 위속, 후성이 이끄는 군사들이 승세 를 타고 그런 조조를 뒤쫓았다. 그러나 더욱 기막힌 것은 어느새 달 려온 여포가 길을 막는 것이었다.

우금과 악진이 나란히 말을 달려 나가 여포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 했다. 당황한 조조는 그 싸움을 끝까지 지켜볼 경황도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데 산그늘에서 홀연 한 떼의 군사가 길 을 막았다. 놀라 살피니 왼쪽에는 여포의 장수 장요가 서 있고 오른 쪽에는 장패가 서 있었다. 조조는 여건과 조홍을 내보내 싸우게 하 였으나 기세가 기세인지라 싸움은 이롭지 못했다.

이에 조조는 다시 그곳을 버려두고 서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쪽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함성이 천지를 진동 하면서 한 떼의 군마가 이르는데 앞선 것은 학맹, 조성, 성렴, 후생 네 장수였다. 그때껏 조조 가까이에 남아 있던 장수들이 죽을힘을 다해 그들을 가로막고, 조조 또한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딱딱이 소리를 군호로 앞에서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구할 이 없느냐?”

빠져나갈 데가 없어진 조조는 절망적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 쳤다. 그때 말 탄 군사들 뒤에서 한 장수가 뛰쳐나왔다. 다름 아닌 전위였다. 그는 손에 한 쌍의 쇠창(쌍철극)을 들고 말에서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서며 크게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쌍철극을 말안장에 걸고 던질 수 있는 짧은 창 십여 개 를 모아 쥐면서 따르는 군사에게 말했다.

“만일 적이 등 뒤 열 발자국 안으로 들어오거든 나를 불러라.” 전위는 그 말과 함께 조조 앞에 서서 화살을 무릅쓰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걸 본 여포의 군사 수십 기가 말을 달려 쫓아왔다. 말 탄 사람과 걷는 사람의 경주이니 사이가 금세 가까워질 것은 뻔 한 이치였다. 곧 몇 기가 전위의 등 뒤 열 발자국 안으로 들어왔다. 

“열 발자국 안입니다.”

뒤따르던 군사가 전위에게 알렸다. 그러자 전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말했다.

“다섯 발자국 안으로 들어오거든 내게 일러라.”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을 짧은 창으로 쳐내느라 뒤를 돌아볼 틈 이 없었던 것이다. 조조 부근에는 아직도 지키는 군사가 많았으나 다시 오래잖아 여포의 기마 몇 기가 전위의 등 뒤 다섯 발자국쯤 되 는 곳까지 이르렀다. 이번에는 좀 다급해진 목소리로 영을 받은 군 사가 소리쳤다.

“장군, 다섯 발자국 안입니다.”

그러자 전위는 힐끗 돌아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짧은 창을 연달아 날렸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등 뒤 다섯 발자국 안으로 들어왔 던 여포의 군사들은 모두 말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달려온 기세가 있어 뒤따라 몇 기가 더 뛰어들었으나 그들의 운 명도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위의 손에서 짧은 창 하나가 없 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씩 피를 쏟으며 말 위에서 떨어지니, 잠 깐 사이에 여남은 명이나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본 여포의 군사들은 얼이 빠져 모두 달아나버렸다.

뒤따르던 적이 모두 도망친 걸 안 전위는 그제야 다시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말 등에 걸어두었던 자신의 쌍철극을 휘두 르며 앞으로 내딛자 학명을 비롯한 여포의 네 장수도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수들이 이미 막지 못하는데 졸개들이 어떻게 전위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앞을 가로막던 여포의 군사들마저 겁 을 먹고 흩어지니 마침내 전위는 길을 열어 조조를 위급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조조가 온전히 사지(死地)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 다. 뒤이어 이곳저곳에서 흩어졌던 장수들이 하나씩 둘씩 주인을 찾 아들자 힘을 얻은 조조는 다시 본진으로 돌아갈 길을 앗기 시작했으 나, 오래잖아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호랑이 울음 같은 고함 소 리가 들렸다.

“조조, 작은 도적은 달아나지 말라!”

조조가 전위의 구함을 받아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여포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급히 뒤쫓아 온 것이었다.

이때는 장졸들의 인마가 한결같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웬만한 장수들의 얼굴에도 각기 도망쳐서 목숨이나 건지고 싶어 하는 기색 이 역력했다. 조조까지도 한번 싸워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황망히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그대로 가면 조조의 군사는 여지없이 뭉그러지고 조조마저 여포 에게 사로잡힐 판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보살핌이라도 있었던 것인 지 갑자기 남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왔다. 본진을 지키던 하후 돈이 해가 기울도록 조조가 돌아오지 않자 남은 군마를 이끌고 구원 을 온 것이었다.

하후돈은 곧바로 여포에게 달려들어 한바탕 큰 싸움을 벌였다. 여 포가 비록 무예가 빼어나다 하나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싸운 뒤라 기 력이 몹시 떨어져 있었다. 하루를 푹 쉬고 뒤늦게 달려온 하후돈을 맞으니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큰 비까지 퍼붓듯 쏟아지 자 양편은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채로 돌아갔다.

간신히 본진으로 돌아간 조조는 먼저 전위에게 큰 상을 주고 그 를 영군도위로 삼았다. 그리고 하후돈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과 사졸 들에게도 각기 그 곳에 따라 비단과 금을 내려 위로했다.

그 무렵 자신의 진채로 돌아가 있던 여포는 진궁을 불러 조조를 깨뜨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덕택에 서쪽 진채를 지 켰을 뿐만 아니라 조조까지 사로잡을 뻔하고 보니 새삼 진궁이 돋보 였던 것이었다. 여포가 자신을 믿기 시작하자 진궁도 힘이 났다. 사 람이 좀 단순하고 지모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잘만 돕고 이끌면 여포 를 통해 어떻게 자기의 뜻을 펴볼 길도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진궁은 진작에 생각해둔 계책 하나를 여포에게 펼쳐보였다.

“복양성 안에 전씨(田氏) 성을 쓰는 부호가 있는데, 집안에서 부리 는 종만 천 명이 넘는 군(郡)의 큰 호족입니다. 그를 시켜 조조의 진 중에 글을 보내게 하되, 내용은 온후께서 잔포(殘暴)하고 어질지 못 해 백성들의 마음속에 원한이 커지자 여양으로 옮기시려 한다고 알 려주게 하십시오. 그리고 복양성은 고순을 남겨 지키게 하고 있으나 밤을 틈타 군사를 내면 자기는 성안에서 응접하리라고 쓰게 하십시 오. 꾀를 부리기 좋아하는 조조라 그 글을 받으면 틀림없이 응할 것 입니다. 그때 그를 성안으로 꾀어들여서 네 성문에 불을 지르고 바 깥에는 복병을 숨겨두면 조조가 비록 하늘로 솟고 땅을 가르는 재주 가 있다 한들 어찌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들어보니 훌륭한 꾀였다. 곧 진궁의 말을 좇아 부호 전씨 를 불러들여 진궁이 말한 대로 하도록 했다. 여포의 다스림 아래 있 는 처지라 전씨도 그런 여포의 명을 어기지 못했다.

전씨의 밀서를 지닌 사람이 조조의 진중에 이른 것은 두 번씩이 나 싸움에 진 조조가 울적해 있을 때였다.

“복양성 안의 부호 전씨가 몰래 사람을 보내 밀서를 전해왔습니 다.”

“이리 가져오너라.”

내심으로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조조가 그 밀서를 받아 펼치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 여포는 이미 여양으로 떠나고 성안은 가위 비어 있다 할만합니다. 장군께서는 급히 오셔서 이 성을 거두도록 하십시오. 저는 마땅히 성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성 위에 의자를 크게 쓴 깃발 을 내걸면 그게 곧 때를 알리는 암호가 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읽기를 마친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하늘이 내게 복양성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밀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두텁게 상을 내리는 한편 군사를 움직일 준비에 들어갔다. 여포의 계략임을 조금도 의심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여포의 됨됨이와 그토록 단 수 높은 계략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여겨진 탓이었다. 유엽이 그 런 조조를 일깨웠다.

“여포가 비록 꾀 없으나 진궁은 지모가 있는 인물입니다. 이 일에 속임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반드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공 께서 정히 가시겠다면 군을 삼대로 나누어 두 부대는 성 밖에 매복 해외응케 하시고 한 부대만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게 좋겠습 니다.”

기쁨으로 들떠 있는 가운데도 조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군대 를 셋으로 나누어 복양성으로 향했다.

성 아래에 이르자 조조는 먼저 성벽 위를 살폈다. 과연 성문 위에 ‘의(義)’자를 크게 써둔 백기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밀서 에 씌어 있던 대로라 조조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거기다가 더욱 조조의 마음을 놓게 한 것은 정말로 여포가 보이 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낮이었다. 조조의 군사가 온 줄 알고 갑자기 성문이 열리며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데 전군은 후성이 이끌고 있고 후군은 고순이 이끌고 있었다.

조조는 곧 전위를 내보내 후성을 잡게 했다. 원래 후성은 전위의 상대가 아니었다. 몇 합 어우르지도 못하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 기 시작했다. 전위가 그를 쫓아 적교(吊橋) 부근까지 이르니 후군을 맡고 있던 고순도 당해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성을 나왔던 여포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성문 앞에는 크 게 혼란이 일었다. 그때 성안에서 군사 차림을 한 몇 사람이 그 혼란 을 틈타 조조의 진중으로 뛰어들어 조조 보기를 청했다.

조조가 만나보니 전씨가 다시 보낸 사람이었다. 그가 밀서를 내놓 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밤 초경에 성 위에서 징소리가 나는 걸 신호로 군사를 진발 시키십시오. 저는 마땅히 성문을 열어 장군의 군사를 맞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조조는 됐다 싶었다. 하후돈으로 하여금 한 무리의 군사와 함께 왼편을 맡게 하고 조홍에게는 오른쪽을 맡긴 뒤, 스스로 하후연, 악 진, 이전, 전위 네 장수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전이 다시 한번 걱정스런 얼굴로 조조에게 권했다.

“주공께서는 성 밖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저희들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꾸짖듯 대답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나가려 들겠느냐!”

실로 나아갈 때는 앞장을 서고 물러날 때는 뒤에 처지는 맹장의 기백인 동시에 조조로 하여금 그토록 잦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한 통솔의 요체이기도 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전씨가 약속한 초경이 되었을 무렵 조조 는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로 갔다. 아직 달이 뜨지 않아 어 두운 성 아래에서 기다리는데, 홀연 성문 위에서 징소리와 소라 소 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수많은 횃불이 피어올랐다. 이어 성문이 크게 열리고 적교도 조조의 군사를 손짓하듯 내려졌다. 모든 것이 전씨가 밀서에 써보낸 대로였다.

조조는 더 망설일 것 없이 군사를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전씨 의 사람들이 내응한다고는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주아(州衙)에 이 르도록 가로막는 군사 하나 없었다. 그제서야 조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급히 말 머리를 돌리며 소리쳤다.

“적의 계략이다. 어서 군사를 물려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조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아 안에서 방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홀연히 네 성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어 북과 징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군사들의 함성이 강물 을 뒤집고 바닷물을 끓게 하듯 터져나왔다.

조조가 아뜩한 정신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 거리에서는 장요 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 나오고 서쪽에서는 장패가 달려 나왔다. 겁 먹고 혼란된 조조의 군사들이라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조조 역시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북문 쪽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나 미처 북문에 이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학맹과 조성(性)이 나타나 한차례 조조의 얼을 빼놓았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많 은 군사만 꺾인 채 조조는 황망히 남문을 향해 말 머리를 돌렸다.

그새 뒤를 따라붙은 고순과 후성이 다시 조조의 군사를 덮쳤다. 크게 성난 전위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그 둘을 맞았다. 쌍철 극을 휘두르며 부딪쳐가는 그 기세가 얼마나 위맹(威) 한지 고순과 후성은 겁부터 먼저 났다. 두어 번 창칼을 맞댄 뒤 거꾸로 달아나 성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쫓아 적교에까지 이른 전위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주위 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모시고 있던 조조가 보이지 아니했다. 이에 전위는 몸을 돌려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문께에 들어서자마자 이전 과 부딪치듯 만났다.

“주공께서는 어디 계시오?”

전위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전 역시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또한 찾고 있으나 뵈지 않는구려.”

“당신은 성 밖으로 나가 구원을 재촉하시오. 나는 성안으로 들어 가 주공을 찾아보겠소.”

전위는 그렇게 말하고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안 을 뒤져도 조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전위는 다시 여포 의 군사들을 뚫고 성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성 밖 물가에서 역시 조조를 찾고 있는 악진을 만났다.

“주공은 어디 계시오?”

악진이 물었다. 전위가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성 안팎을 오가며 찾았으나 아직 뵙지 못했소.”

“그럼 함께 치고 들어가 주공을 구합시다.”

악진이 창을 꼬나쥐며 말했다. 이에 두 사람은 다시 말 머리를 나 란히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성문께에 이르니 성 위에서 화포가 거세게 퍼부어 악진은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전위 혼자 연 기와 불 사이를 뚫고 성문 안으로 뛰어들어 이곳저곳을 뒤지듯 조조 를 찾았다.

한편 조조는 전위가 고순과 후성을 쫓아 남문 밖으로 나가버리자 벌 떼처럼 몰려 길을 막는 여포의 군사들 때문에 남문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말 머리를 돌려 북문을 가는데 방천화극을 끼고 말을 달려오는 여포와 똑바로 마주치고 말았다. 조조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에 채찍을 가해 급하게 여포를 스쳐갔다. 그런 여 포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곧 조조를 뒤쫓아 와 화극으로 조조의 투 구를 치며 물었다.

“어이, 조조는 어디 있는가?”

아마도 조조를 자기편 졸개로 안 것 같았다. 조조는 가슴이 철렁 하는 가운데도 정신을 가다듬어 자기가 가는 곳과 반대쪽을 가리키 며 대답했다.

“저 앞에 누런 말을 타고 있는 자가 그놈입니다.”

조조의 천연덕스런 말에 속은 여포는 곧 조조가 가리킨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여포가 떠나기 무섭게 조조도 말 머리를 돌려 이번 에는 동문으로 달렸다.

“주공!”

갑자기 한 장수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나타나 조조를 불렀다.

다름 아닌 전위였다. 조조는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전위는 조조를 옹위한 채 닥치는 대로 적을 찌르고 베며 한 가닥 혈로(血路)를 뚫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워 마침내 길이 열리고 둘 은 성문 부근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성문에는 불길이 맹렬하 고, 성벽 위에서 던지는 마른 풀더미에 불길은 부근까지 번지고 있 었다. 도저히 뚫고 나갈 성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성안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위가 앞장서

며 말했다.

“주공, 제가 이 불길을 헤쳐보겠습니다. 바짝 뒤따르십시오.” 그리고 쌍철극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불더미를 헤치며 앞으로 내달았다. 조조도 정신없이 그런 전위를 뒤따랐다.

그러나 간신히 성문께에 이르렀는가 싶을 때였다. 불타던 성문이 우지끈 내려앉으며 불붙은 대들보 하나가 똑바로 조조의 말 엉덩이 를 덮쳤다. 비명과 함께 말이 쓰러지면서 조조는 땅에 떨어졌다. 불 붙은 대들보를 손으로 밀어 간신히 타 죽는 건 면했지만 그 바람에 조조는 수염과 머리칼을 다 태우고 여기저기 화상을 입었다.

전위가 말 머리를 돌려 그런 조조를 구하려 할 때 마침 하후연이 나타났다. 둘은 힘을 합쳐 조조를 일으키고 불구덩이 속에서 빼냈 다. 그리고 하후연의 말에 조조를 태운 뒤 넓은 길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어지럽게 뒤섞여 싸우는 동안에 날이 훤히 밝았다. 그제야 사방을 분간할 수 있게 된 조조는 두 장수의 목숨을 건 구함에 힘입 어 간신히 자신의 진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여러 장수들이 찾아와 문안을 드렸다. 조조가 앙연히 웃으며 소리쳤다.

“내가 잘못하여 그 하찮은 여포 놈의 계책에 걸렸구나. 반드시 이

빚을 갚으리라!”

그러고는 다시 여포 깨뜨릴 의논을 했다. 곽가가 조조의 의중을 살핀 듯 나직이 말했다.

“계책은 되도록이면 속히 베푸시는 게 낫습니다.”

곽가는 조조가 앙연히 웃는 걸 보고 그의 마음속에 이미 계책이 서 있는 걸 꿰뚫어본 것이었다. 과연 조조는 곽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께 마음속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내가 거꾸로 적의 계책을 좀 이용[將計就計]해야겠다. 간밤에 내가 불에 데어 오경쯤에 죽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하 라. 여포가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성을 나와 공격할 것이다. 그때 나는 마릉산(山)에 복병을 두었다가 여포의 군사가 반쯤 지나갔 을 적에 들이치면 놈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실로 좋은 계책입니다.”

곽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조조는 곧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발상을 하고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두 군사가 싸우면 반드시 첩자가 있게 마련이다. 조조가 죽었다는 말은 곧 복양성 안에 있는 여포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가 온몸이 불에 덴 채 본진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간밤 조조의 처지가 꼭 죽게 된 것을 잘 아는 여포인지라 그 말을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되는 대로 군사를 점고하여 조조의 진채가 있는 마릉산으로 달려갔다. 딴에는 이 기회에 조조의 세력을 뿌리 뽑자는 생각이었다.

여포의 군사가 마릉산을 반쯤 지나 저만큼 조조의 진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사방 에서 함성과 함께 복병이 일어났다.

“속았구나!”

여포는 그렇게 외쳤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간밤 조조에게 준 빚을 톡톡히 돌려받은 뒤 간신히 복양성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리고 조조의 꾀에 질렸는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다시는 나와 싸 우려 들지 않았다.

싸움은 자연 길게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해따라 메뚜기 떼가 크게 일어 벼를 모두 먹어치우는 바람에 관동 일대에는 쌀 한 섬에 전(錢) 오십 관이나 되도록 값이 치솟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만 큼 흉년이 들었다. 그렇게 되니 조조도 군량이 없어 싸울 도리가 없 었다.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견성으로 돌아가니 이로써 복양성의 풍운은 잠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