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2화 : 서주는 봄바람만
서주는 봄바람만
각기 자기 군사를 먹이는 일이 바빠 조조와 여포가 싸움을 쉬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서주에서 미미한 풍운의 조짐이 일었다. 나이 예 순셋에 접어든 서주목 도겸(陶謙)이 갑작스레 병을 얻은 게 발단이었 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차도는커녕 병이 점점 깊어가기만 하자 도 겸은 종사인 미축과 진등을 불러 뒷일을 의논했다.
“나는 재주와 덕이 모자라 성한 몸으로도 이 땅과 백성들을 지키 기 어려운 터에 이제 모진 병까지 얻어 일어날 가망이 없으니 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동에는 조조가 아비의 원수 갚음을 구실로 눈에 불을 켜고 있고, 북에는 원술이 오래전부터 이 땅을 넘보고 있 는 데다 도적들은 사방에서 일어나 위세를 자랑하고 있는 지금, 가 죽으면 우리 서주는 그대로 저들의 염치없는 각축장이 되고 말 것이오. 그 틈바구니에서 고초당할 백성들을 생각하면 나는 죽어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소. 이에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두 분을 청했거니와 혹 두 분께서는 이 서주의 뒷일을 생각해보시었소? 만 일이 땅과 백성을 보존할 계책이 있다면 거리낌없이 말해주시오. 나는 공들의 윗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힘없고 어리석은 늙은이로서 묻고 있는 것이오.”
그렇게 묻는 도겸은 실로 인인군자(仁人君子)라 불릴 만한 인품이 었다. 그가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미축이 조용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조조의 군사가 물러간 것은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를 들 이친 까닭입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또 관동 일대에 큰 흉년이 들어 여포와의 싸움마저 쉬고 있지만 내년 봄이면 조조는 반드시 이 서주 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원술보다 더 두렵고 황건이나 흑산 의 무리보다 더 급한 게 바로 그 조조입니다. 이제 사군(君)을 이 어 서주를 맡아 머지않아 닥칠 조조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이는 다만 소패에 머무르고 있는 유현덕뿐입니다. 당장의 세력은 조조에 비할 바 못 되나, 군사는 한결같이 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 맹스런 두 의동생도 같은 날 죽기로 맹세한 사이라 합니다. 그에게 서주의 재물과 백성을 맡기면 틀림없이 그는 새봄이 오기 전에 조조 를 이길 만한 군사를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진작에 그걸 알아보고 현덕에게 서주를 넘겨주려 하였소.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두 번씩이나 내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않 았소?”
도겸이 어둡고 무거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미축이 다시 대답했다.
“그때는 사군께서 몸이 성하신지라 현덕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군의 병이 무겁고 깊으니 그 핑계로 그에 게 서주를 맡기시면 현덕도 더는 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도겸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떠올랐다. 그 같은 난세에는 찾기 어려울 만큼 밝고 어진 인물이었다.
“얼른 소패에 사람을 보내 유현덕을 들라 이르시오. 군무(軍)에 관한 일을 의논할 게 있다고 하면 그도 거리낌없이 달려올 것이오.”
도겸은 그렇게 말해놓고 지쳤는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실 미축 과 진등을 부른 것도 죽음의 예감에서였다.
도겸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은 현덕은 관, 장두 아우와 수하 수십 기만을 이끈 채 서주성으로 달려왔다. 도겸은 현덕과 두 아우를 병 실로 청해 들였다. 그리고 현덕이 문안의 예를 마치기 바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현덕 공을 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다. 이 늙은이의 병 이 이미 깊고 무거워 아침저녁을 다투게 되었으니, 만 번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한실의 땅을 무겁게 여기시고 그 백성을 가엾게 보시어 이 서주의 패인(牌印)을 받아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늙은 이는 죽어도 편하게 눈감을 수 있을 것이오……………”
“자사께는 두 분 아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왜 아드님께 서주를 잇게 하지 않으십니까?”
도겸의 간곡한 목소리 못지않게 진정으로 사양하기 위한 유비의 반문이었다. 도겸이 더욱 간곡하게 말했다.
“맏이 상이나 둘째 응(應) 모두 재주가 모자라 그 중임을 맡길 수가 없기 때문이오. 이 늙은이가 죽더라도 현덕 공이 가르치고 깨 우쳐주시고, 결코 주의 일을 맡게 해서는 아니 되오.”
그제서야 유비도 도겸의 진심을 알 것 같았다. 어지러운 시대에 자기 힘 밖의 중임을 맡는 것은 그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을 괴롭히 게 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제 한 몸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걸도 겸은 근심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유비도 도겸의 두 아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한 주를 맡아 난세를 이겨 나가기에는 너무 문약해 보였다.
“그렇지만 이 비 한 몸으로 어떻게 서주를 맡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비로소 유비가 반승낙의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라도 유비의 마 음이 변할까 두려운지 도겸이 급히 한 사람을 추천했다.
“내가 부리던 이로 공을 도와 일할 만한 이가 한 사람 있소이다. 북해 사람으로 이름은 손건(孫乾)이요, 자를 공우(公)라 하는데 종 사로 쓸 만하오……”
거기서 도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는 노력으로 지나치게 기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그러다가 한 참 뒤에야 간신히 숨을 모아 곁에 있던 미축에게 말했다.
“유공(公)은 당세의 인걸이오. 그대는 잘 섬기도록 하시오.”
유비에게 다짐을 받는 대신 미축에게 하는 당부였다. 그래도 유비는 선뜻 도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차피 서주가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헤아린 뒤의 겉꾸밈이건 진정한 겸양에서 우러난 일이건 마찬가 지로 놀라운 자제력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기름진 수백 리의 땅과 백만의 인구-큰 뜻을 기르던 저잣거리의 임협(俠)시절은 물론, 도원의 결의로 몸을 일으킨 후 이리저리 떠돈 그십 년 동안, 얼마나 절실하게 원했던 기업이었던가.
유비가 기어이 서주를 받으려 하지 않자 도겸은 답답한 듯 손으 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힘을 모아 자기의 뜻이 진정에서 우러난 것임을 밝히려 한 것이었으리라. 작은 성하 나도 힘으로 빼앗거나 피를 흘리며 주고받던 후한 말의 난세에서는 달리 그 예를 찾기 힘든 그림 같은 정경이었다.
도겸이 죽자 미축과 손건을 비롯한 크고 작은 주리(州吏)들은 먼 저 서주성 안에 상사를 알림과 아울러 애곡의 예부터 치렀다. 그리 고 예를 마치자마자 서주의 패인을 유비에게 바쳤다.
유비는 그래도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튿날은 서주의 백성 들이 떼를 지어 자사부 앞에서 엎드려 곡하며 빌었다.
“유사군(君)께서 우리 서주를 다스려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보다 못한 관우와 장비도 두 번 세 번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를 권 했다. 그래도 유비는 몇 번이고 사양을 거듭하다가 해질녘에야 마 지못한 듯 서주의 패인을 받아들였다.
만약 그 같은 겸양이 하나의 책략이었다면 실로 무서운 책략이었 다. 있을지 모르는 몇 안 되는 반대자들까지도 시시각각 배가되는 백성들의 열기에 자신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중 심리의 묘한 상승 작용과 스스로를 자제하고 기다리는 시간의 힘을 유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일단 패인을 거두자 유비는 신속하게 서주의 관부부터 정 비했다. 도겸의 말대로 손건과 미축을 종사로 삼아 자신을 돕게 하 고 진등(陳登)도 막관(幕官)으로 곁에 머물러 있게 했다. 그런 다음 소패에 있던 자신의 군마를 서주성으로 불러들여 서주의 본부 군마 와 합친 뒤 관우와 장비에게 군무를 다스리게 했다.
그다음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군사를 엄히 단속해 민폐를 없이하고 좋은 말로 방을 내걸어 백성들의 마음을 편 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죽은 도겸의 장례에 성의를 다함으로써 생전에 도겸이 백성들로부터 받던 우러름과 믿음도 거두어들였다. 자신은 물론 군사들까지 자식의 예로 상사에 임하게 하고, 크게 제 물을 벌여 장례를 마친 뒤에는 황하가의 볕 바른들에 묻어 신종(愼 , 상사를 정중히 함)의 예를 다했다.
이때 조정은 이각과 곽사가 잡고 있어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다. 가까운 관동이나 기주에도 힘이 미치지 못하는 마당에 멀리 서주의 일로 까다롭게 따질 여유가 없었다.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천하는 도 겸의 유표(遺表)와 함께 서주가 이미 유비의 세력 아래 안정되었다 는 소식을 듣자 아무런 반대 없이 유비를 서주목으로 인정했다. 사 방에서 이는 도적들과 가까이서 틈만 있으면 장안을 노리는 제후들 에게 지쳐 있는 이각과 곽사에게는 별탈 없이 서주가 도겸에게서 유 비로 넘어간 것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도겸이 죽고 유비가 뒤를 이어 서주목이 되었다는 소식은 견성에 있는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나는 아직 선친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유비 그자는 화살 반 개 를 허비한 공도 없이 앉아서 서주를 얻다니! 내 반드시 먼저 유비를 죽이고 다시 도겸의 시체를 토막 지어 선친의 크신 한을 풀리라.”
조조는 그렇게 외치며 이를 갈았다. 그런 조조의 가슴속에는 유비 에 대한 뿌리깊은 경계와 까닭 모를 호승심이 함께 불타올랐다. 처 음 광종)에서 촌뜨기 의군 대장으로 만났을 때는 물론 관동의 기의 때 함께 동탁과 싸우는 동안, 다른 제후들은 모두 유비를 공손 찬의 부장(副將)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나 조조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한껏 몸을 낮추어도 무슨 환한 빛처럼 그 주위에 어리 는 위엄과 까닭 없이 사람을 끄는 부드러운 힘은 자신의 지략이나 원 소의 가문에 못지않은 재산임을 조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코 공손찬의 아랫사람이 아니다……………….’
조조는 그 같은 느낌으로 한낱 현령에 지나지 않는 그를 굳이 제 후의 말석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전한 경제(景)의 현손이란 이유 를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삼백 년이 넘는 지난 일이요, 또 경제는 유독 자손이 많아 진위마저 가리기 어려운 혈통이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의 서주 정벌 때 뜻밖에도 도겸을 편든 유비의 글을 받자 조조는 다시 한번 자기가 본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 했다. 아직도 유비가 거느린 군사의 태반은 공손찬에게 빌린 것이며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찬의 세력 아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말하 는 태도는 이미 자기와 동등한 자리에서 주는 충고나 다름없었다. 방금도 조조는 여러 장수와 모사들이 보고 있는 앞이라 성난 기색으로만 유비를 욕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하는 말은 달랐다.
‘유비, 그대는 짐작대로 공손찬이란 연못을 빠져나왔다. 다른 사 람은 몰라도 나는 그대가 마음대로 사해를 누비게 된다면 마침내 한 마리 용이 되어 구만리 창천으로 치솟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조조가 휘젓고 날 하늘이 없어진다. 나 는 그대를 일찌감치 없애거나 아니면 공손찬보다는 몇 배 넓은 내 호수에 가두어둬야겠다. 결코 마음대로 사해를 누비며 커다란 교룡 (蛟龍)으로 자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조조에게도 아직 유비를 가둬놓을 만한 호수가 마련 되어 있지 않았다. 간신히 마련한 한 조각 호수마저 여포란 괴물의 기습을 받아 태반이 휩쓸린 처지였다. 비록 불같은 호령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그날로 서주를 향해 진군하라고 재촉은 하면서도 마음속 은 두렵고 암담하기만 했다.
그때 돌연한 진군령(進軍令)을 듣고 놀라 달려온 순욱이 말렸다.
“지난날 고조(高祖, 유방)께서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관중(關中)을 지키셨고 광무제(光武帝, 후한의 유수)께서는 하내(河內)를 근거로 중 히 여기셨습니다. 모두 뿌리를 깊이 하고 바탕을 굳건히 하셔서 거 기 의지해 천하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땅들은 나아가면 쉽 게 적을 이길 수 있고 물러서면 굳게 지킬 수 있어, 수고로운 가운데 도 마침내 천하를 가지런히 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명공께서 근 거로 삼으신 연주와 황하, 제수濟)의 땅은 천하의 요지요, 지난날 의 관중이나 하내와 같은 땅입니다. 이제 서주를 취하시려 함에 있 어 이곳에 군사를 많이 남기면 그곳에서 쓸 군사가 모자랄 것이요,
이곳에 군사를 적게 남기면 여포가 그 빈틈을 노려 쳐들어올 것이니 이는 곧 연주를 모두 잃게 되는 걸 뜻합니다. 만약 명공께서 서주를 빼앗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로 돌아오시렵니까? 듣기에 지금 서주는 도겸이 비록 죽었으나 유비가 이어 굳게 지키고 있고, 또 백성들은 이미 유비를 깊이 따라 그를 위해 죽도록 싸울 것이라 합니다. 명공 께서 이 연주를 버리고 서주를 취하는 것은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 을 취함이요, 줄기를 버리고 잔가지를 취함이며, 평안함과 위태로움 을 바꾸는 격입니다.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다시 한번 깊이 헤아려 결정하십시오.”
조조 또한 그걸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나 름대로 군사를 움직여야 할 까닭은 있었다.
“나도 그 점을 헤아리지 못한 바는 아니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소. 아다시피 올해는 메뚜기 떼의 피해로 관동에 큰 흉년이 들 어 군사를 먹일 양식이 모자라오. 먹일 수도 없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이렇게 지키기만 하는 것도 종내에는 좋은 계책이 못 될 것이오. 선친의 원수 갚음도 급하거니와 서주의 풍족한 곡식 또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오.”
그러나 순욱은 그것도 이미 생각해둔 바 있는 모양이었다. 조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뜻 대꾸했다.
“그렇다 해도 동쪽 진(陳)의 땅을 공략하는 편이 낫습니다. 군사를 먹일 양식은 여남과 영주 땅에서 구하십시오.”
“그곳에서 어떻게 이 대군을 먹일 양식을 구할 수가 있겠소?”
“황건의 남은 무리인 하의(何儀)와 황소) 등이 그곳의 주군을 노략질해 쌓아둔 금과 비단이며 곡식이 산과 같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적의 무리이니 깨뜨리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식량을 빼앗 아 우리의 삼군을 기른다 해도 조정은 조정대로 기뻐할 것이요, 백 성들은 백성들대로 좋아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에도 맞는 일 이니 서주를 치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옳은 의견을 들으면 선뜻 고집을 버릴 줄 아는 것이 또한 조조의 장점이었다. 순욱의 말이 옳다고 여기자 조조는 기꺼이 생각을 바꾸 었다. 조조는 하후돈과 조인에게 넉넉한 군사와 곡식을 남겨 여포에 대비케 하고 자신은 다시 앞장서 군사를 이끌고 견성을 나섰다. 동 쪽의 옛 진 땅을 정벌해 근거도 넓히고 군량도 얻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서주를 향해 일었던 풍운은 다시 서주를 비켜갔다. 유 비는 잠시 조조를 근심하지 않고 도겸의 좋은 다스림을 이으면서 아 울러 자신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 무렵의 서주에 분 바람이 있다 면 그것은 다만 어느새 삼십 대 중반으로 접어든 유비를 뒤늦게 스쳐간 봄바람뿐이었다.
그해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미축이 자기의 저택에다 크게 잔치를 열고 유비를 비롯한 대소의 관원을 청했다. 유비는 기꺼이 응했다. 관우, 장비와 손건, 진등 및 몇몇 주리(州)를 이끌고 미축의 집에 서 하루를 즐겼다.
날이 저물고 대소의 관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할 무렵이 었다. 관우, 장비 두 아우와 함께 돌아가려는 유비의 옷깃을 미축이 끌었다.
“사군께서는 잠시 더 머물러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못 은근한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미축의 청이라 유비도 잠자코 인도하는 대로 따랐다. 원래 미축의 집은 대대로 살아온 큰 저택이었지만, 몇 년 전 갑작스런 불로 타버려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그 후에 전보다 검소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꾸민 앞 뒤 뜰이나 연못가의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런 대로 운치가 살 아 있었다.
미축이 유비를 인도해 간 곳은 바로 ‘미가(家)의 화각(畵閣)’이 라 하여 한때는 인근에서 널리 이름을 얻었던 연못가의 정자였다.
“어서 드십시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계집종들이 황송스러운 듯 맞아들이는 정자 에 오르니 따로 좋은 술과 안주가 한 상 가득 마련되어 있었다.
“명공 같은 영웅을 사군으로 모시게 되니 이 미아무개의 광영이 올시다. 일생을 주인으로 받들어 변치 않음으로써 세상에 난 보람을 삼을까 합니다.”
관우, 장비가 양쪽에 시립한 가운데 유비가 자리를 잡자마자 미축 이 큰 잔에 향기로운 술을 가득 부어올리며 말했다. 유비가 흔쾌히 잔을 받으며 겸양의 소리를 했다.
“공과 같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에게 이 비가 어찌 주인이 될 수 있겠소? 다만 곁에서 나의 어리석고 둔함을 너그러이 깨우치고 가르쳐주기를 빌 따름이오.”
“옛말에 이르기를 겸양이 지나쳐도 예가 아니라 했습니다. 이 축 (竺)은 북해에서 처음 사군을 뵈올 때부터 주인으로 섬겨보기 원이 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하늘과 사람의 뜻이 아울러 이렇게 명공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으니 오직 죽을 때까지 변치 않기를 빌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축과 처음 만났을 때 유비가 느꼈던 묘한 감정은 그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도겸도 정이 엷고 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미축은 유비를 가까이하게 되면서부터 서주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라 여겼 다. 틈날 때마다 유비를 치켜세우고, 지쳐 있는 도겸에게 서주를 유 비에게 양보하도록 은근히 부추겼다. 그리고 도겸이 그 말을 실제로 꺼내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유비를 권했다.
생각하면 미축은 유비와 동향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동문에 서 수학한 일도 없었으며 함께 전장을 누빈 적도 없었다. 실로 그들 의 만남은 숙명적인 어떤 힘에 끌린 것으로, 유비로 보면 그야말로 처음 얻은 신하였다. 관우와 장비가 있기는 해도 그들과는 아직 유 협 집단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준 혈연관계일 뿐이었다.
“미공(公)께서 이 몸을 그토록 생각해주니 감격할 따름이오. 명 분이야 어떠하건 아무쪼록 나를 덕 없다 저버리지 말고 깨우쳐주 시오.”
그래도 유비는 겸손한 자세를 허물지 않고 말을 받더니 한 잔 가 득 술을 부어 미축에게 되돌리며 말했다.
“자, 미공도 한잔 받으시오. 넘치는 것은 내 정으로 여겨도 좋소이다.”
이에 미축은 공손히 잔을 받아 비웠다. 이미 하루 종일 마신 뒤라 몇 잔 들지 않아 자리는 다시 흥겨움에 싸였다. 정자 아래서는 사죽(竹)이 자지러지고 아리따운 계집종의 춤까지 곁들여졌다. 그렇게하여 제법 밤이 깊었을 무렵 미축이 문득 엉뚱한 말을 했다.
“사군께서는 우리 서주에 오신 지가 오래고 이제는 이곳을 근거 로 자리 잡게 되셨건만 가솔들을 모시지 않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 라 듣기로는 평원 땅에도 가솔이 없었다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고향 탁현에 버리고 온 노모는 이리저리 떠돌며 받들어 모시지 못하는 사이에 돌아가셨소이다. 실로 밝은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소. 또 떠도는 중에 아내라고 맞아들인 아낙이 있었으 나 역시 연전에 자식 하나 없이 죽고 말았소이다.”
유비는 늘 하던 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노모의 일은 진정이고, 아 내의 일은 서른 몇이 되도록 처자가 없는 것에 대해 구구이 설명하 는 게 싫어 꾸며댄 말이었다. 그러자 미축이 돌연 정자 아래로 소리 쳤다.
“아무도 없느냐? 가서 작은 아가씨를 모셔 오너라!”
그리고 잠시 뒤 계집종들의 부축을 받아 나타난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
“이 어른께 인사 올려라. 우리 사군이시요, 당금에는 둘도 없는 영 웅이시니라.”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나 유비는 취한 중에도 황망히 젊은 여인의 절을 받았다.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요염한 아리따움은 아니었 으나 은은하면서도 귀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고운 아미에 까닭 모를 그늘을 드리우는 한 가 닥 수심과 호리호리한 몸 전체에서 풍기는 어떤 처연함이었다.
“천한 계집이 삼가 문후 드립니다.”
그사이 공손히 절을 마친 소녀가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그 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홍조를 띠었다. 미축이 그 말을 이어 유비에 게 뜻밖의 소리를 했다.
“제 미천한 누이옵니다. 모습이 추하고 제대로 가르치지는 못했으 나 심사는 악하지 아니합니다. 곁에 거두시어 기추箕, 쓰레받기와 비. 여기서는 남의 처첩이 되어 섬김)의 일에나 써주신다면 저 한 몸뿐만 아니라 우리 미가의 광영이겠습니다.”
“과분하신 말씀이오. 지금 임시로 서주를 맡아 있을 뿐 오갈 데 없는 떠돌이 신세에 어찌 서주의 미씨 같은 호족의 귀한 규수와 짝 할 수 있겠소? 잠시 술자리의 우스갯소리라 해도 이 유아무개는 감 당키 어렵소이다.”
원래 색(色)을 싫어하지 않는 성품이라 속으로는 은근히 기뻤으 나 유비는 점잖게 사양했다. 역시 서른이 넘도록 홀아비로 지내며 자기를 따르는 관우와 장비를 보아서도 선뜻 승낙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그러나 미축의 말은 더욱 간곡했다.
“이는 감히 형제의 의로 맺어질 길은 없으나 그래도 좀더 사군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 축竺)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부디 물리치지 말고 거두어주십시오.”
그때 곁에 있던 장비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유비에게 권했다.
“형님, 그만 허락하십시오. 이제 서주 같은 기업(基業)을 얻으셨으니 후사를 생각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유비는 꾸짖듯 장비에게 대답했다.
“서주는 덕 있는 이가 올 때까지 내가 잠시 맡아 있을 뿐 어찌나 의 사사로운 기업일 수 있겠느냐? 또 설령 그렇다 한들 한 조각 기업 을 얻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어찌 처자를 거느리는 것이겠느냐?”
무슨 일이든 때가 온다고 허겁지겁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되기까지 기다리는 유비의 느긋한 성품 그대로였다.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면서도 그는 익은 감이 떨어 지듯 자연스레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기다리는 것은 아직도 말없이 있는 관우의 권유였다.
과연 관우도 오래잖아 입을 열었다.
“평원에 있는 감씨댁(甘氏宅) 소저를 큰 형수님으로 모신다면 하 필 미공의 청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익덕의 말처럼 이제는 후사를 돌아보아야 할 때도 되었습니다.”
의를 중요하게 아는 관우로서는 비록 아녀자와의 약속일지라도 저버릴 수 없다 하여 먼저 평원의 감소저를 상기시킨 것이었지만, 뜻은 장비와 같은 권유나 다름없었다. 그제서야 유비도 못 이기는 체 미축에게 승낙의 말을 했다.
“대답이 구차하여 정실이 죽었다 하였으나 실은 내게 이미 아낙 될 사람이 있소. 고이 기른 영매를 하찮은 유아무개의 첩으로 내주 는 게 거리끼지 않으신다면 나 또한 공의 청을 마다할 구실이 없구 려. 먼저 평원의 그 사람을 맞은 뒤에 날을 받아 공께 청혼함이 옳겠 소이다.”
하지만 인연이 되느라 그랬던지 미소저와의 일은 그리 시일을 끌 필요도 없었다. 잔치가 있고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주아에 나가 있는 유비에게 사람이 와서 알렸다.
“평원의 감가장(家)에서 왔다는 수레 몇 채가 소패를 거쳐 부 중에 이르렀습니다. 사군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놀라 달려가 보니 다름 아닌 감소저 일행이었다. 몇 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유비가 소패에 근거를 얻었단 말을 듣고 먼저 그 리로 달려갔던 듯했다. 부모를 졸라 혼수와 폐백까지 싣고 험한 길 을 헤쳐갔던 것인데, 그때 유비는 이미 서주를 얻어 거기 없었다. 이 에 감소저도 곧 서주로 오려 했으나 노독(毒)으로 여러 날 몸져눕 는 바람에 늦어진 것 같았다.
“만약 장군께서 아직도 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신다면 첩 은 장군께 버림받은 걸로 알고 이만 세상을 하직하려 했사옵니다.”
그게 감소저가 눈물 섞어 말한 그 갑작스런 출현의 설명이었다. 그러잖아도 그녀를 맞으러 평원으로 사람을 보내려던 유비는 진심 으로 기뻤다. 관우와 장비도 이제는 그때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앞 장서 크게 잔치를 열게 한 뒤 형수의 예로 공경하며 맞아들이니 이 가 곧 감부인(夫人)이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유비를 만났던 감부인은 그때 이미 스물 대여섯의 난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기품 있게 자라 부중의 내사(事)를 처리함에 빈틈이 없었다. 유비와 한 자리에서 자고則同床] 깨어나서도 곁을 떠남이 없는[侍立終日] 유 협 시절부터의 습관에 젖어 있는 관우와 장비를 꺼리기는커녕 그녀 또한 남편의 친혈육처럼 여겼고, 얼마 뒤 유비가 다시 미축의 누이 를 맞아들였을 때 또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아황(皇)과 여영(英, 둘 다 요임금의 딸로 나란히 순임금에게 출가하여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함)의 일이 어찌 옛사람의 아름다운 얘기일 뿐이리오.”
그렇게 말하며 미부인(人)을 맞아들인 그녀는 피를 나눈 아우 처럼 사랑하였다. 실로 뒷날 소열황후(昭烈皇后)로 추존받아 모자람 이 없는 부덕(婦德)이었다.
서주에 그같이 봄바람이 겹치고 있는 동안 조조는 황건적들과의 싸움에 한창 힘을 쏟고 있었다. 먼저 옛 진(陳) 땅을 공격하여 평정 한 조조는 곧 황건의 본거지인 여남과 영주로 밀고 내려갔다.
황건의 우두머리 하의와 황소는 조조의 군사가 이르렀음을 알자 무리를 모아 맞으러 나왔다. 양쪽의 군사가 부딪친 곳은 양산(山) 이라는 곳이었다. 조조가 보니 적병의 머릿수는 많지만 여우 떼나 개떼[狐狗]같아서 대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강한 활과 쇠뇌를 쏘아 붙여라.”
조조가 그렇게 영을 내렸다. 곧 조조의 진중에서 어지럽게 살이 날아 겁 없이 몰려오는 도적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전위는 어디 있는가? 가서 도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라!”
갑작스런 화살비에 그러지 않아도 흐트러져 있던 황건적의 대오 가 더욱 흐트러지는 걸 보고 조조가 다시 매섭게 영을 내렸다. 전위 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도적의 우두머리 하의는 부원수 하나를 내보내 전위를 맞게 했다. 말이 좋아 부원수지, 그저 저희끼리 힘자랑 끝에 조금 낫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천하의 맹장 전위를 당해낼 턱이 없었다. 미처 세 합을 어우르기도 전에 부원수란 자는 전위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모두 달려 나가 도적들을 잡으라.”
조조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삼군을 들어 일시에 황건적을 쳤다. 이래저래 기세가 꺾인 도적들은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 도망치기에 만 바빴다. 조조는 그런 황건적을 쫓아 양산을 지난 뒤에야 군사를 멈추고 진채를 내렸다.
이튿날은 황건적의 또 다른 우두머리인 황소가 스스로 대군을 이 끌고 마주쳐왔다. 하의와는 달리 제법 기세 좋게 달려와 둥글게 진 을 치는 꼴이 무언가 믿는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조조는 가소롭다는 눈길로 도적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둥글 게 진을 벌이기 무섭게 한 장수가 진문을 나왔다. 말[馬]도 없이 쇠 몽둥이를 질질 끌며 나오는데 머리에는 누런 수건이요, 몸에는 풀빛 나는 옷을 걸치고 있다.
“내가 절천야차(夜叉, 하늘을 끊는 악귀)로 불리는 하만(何曼)이 다. 누가 나와서 나와 한바탕 붙어보겠느냐?”
양군의 한가운데에 이르러 쇠몽둥이로 땅바닥을 쿵쿵 치며 소리 치는 품이 힘깨나 쓰는 자인 성싶었다. 그 꼴을 보자 심사가 틀렸는 지 조홍이 범 같은 소리와 함께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칼을 빼들고 달려 나갔다.
곧 두진(陣) 가운데서 조홍과 하만의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 졌다. 굵은 쇠몽둥이가 휙휙 하늘을 가르고 칼이 현란하게 빛을 뿜으며 얽혀들었다. 실로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듯한 장관이었다.
하늘을 끊는 악귀란 별호가 어울릴 만한 하만의 솜씨였다. 조홍같 이 뛰어난 무예로도 쉰 합을 넘겼건만 베어넘길 수가 없었다. 조홍 은 힘으로는 쉬이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꾀를 냈다. 거짓으로 힘이 달 리는 척 칼을 끌고 달아나니 더욱 기가 오른 하만이 고래고래 소리 치며 쫓았다.
몇 발 안 가 조홍을 따라잡은 하만이 쇠몽둥이를 번쩍 추켜들었 다. 내려치기만 하면 조홍은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될 순간이었다. 홀연 조홍의 몸이 훌쩍 솟구치더니 재빨리 뒤집히며 한칼로 쪼개듯 하만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땅에 내려섬과 아울러 다시 한칼을 후리 니 하만은 자기가 왜 그런 꼴을 당하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놀 란 혼이 되어버렸다.
조홍이 쓴 것은 타도배감(刀背, 칼을 끌고 달아나다 뒤돌아 쪼갬) 이라는 무서운 검법이었다.
조홍이 보기 좋게 하만을 거꾸러뜨리는 걸 본 이전이 때를 놓치 지 않고 말을 몰아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진작부터 적장 황소를 눈 여겨보고 있다가 승세를 타고 똑바로 그를 향해 내달았다. 황소가 원래 그리 허약하지는 않았으나 태산같이 믿던 하만이 어이없이 두 조각 나고, 이제는 또 이전이 성난 표범처럼 달려드니 겁부터 먼저 났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데 어느새 뒤따라온 이전이 손 을 뻗어 그를 사로잡아버렸다.
하만이 죽은 뒤에 황소까지 사로잡히는 꼴을 보자 황건의 무리들 은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그런 도적떼를 조조의 대군이 뒤따르며 죽이니 순식간에 들판은 시체로 덮였다. 그들이 노략질해 모아두었던 산 같은 곡식이며 금과 비단이 그대로 조조의 손에 들어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황소의 군이 완전히 뭉그러져버리자 홀로 남은 하의는 조조와 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겁 먹어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수백 기를 이끌고 갈파(坡)를 향해 달아났다.
그런데 갈파에 이르러 한 산길을 지날 때였다. 산 뒤에서 갑자기 한 떼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사는 키가 여덟 자요, 허리통 이 몇 아름이나 되는데 손에는 큰 칼을 잡고 있었다. 하의가 창을 휘 두르며 달려 나갔으나 어림도 없었다. 창과 칼이 한번 어우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의는 사로잡혀 장사의 옆구리에 끼인 채였다. 대장 이 그 꼴이 난 판에 졸개들이 싸워볼 엄두가 날 리 만무였다. 한결같 이 말에서 내려 항복하자 장사는 그들을 모조리 결박지어 갈파 산중 으로 끌고 들어가버렸다.
조조의 장수 전위가 하의를 뒤쫓아 갈파 산길에 이른 것은 한참 뒤였다. 뒤쫓던 하의 대신 웬 낯선 장사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길 을 막았다.
“웬놈들이냐? 너희 역시 황건적이냐?”
전위가 물었다. 장사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황건적 수백 기는 모두 내게 사로잡혀 지금 우리 마을에 묶여 있다. 누굴 보고 황건적이라 하느냐?”
“그렇다면 어찌 내게 바치지 않는가?”
전위가 약간 성난 기색으로 꾸짖듯 말했다. 장사가 피식 웃더니 빈정거렸다.
“네놈이 누구길래 그따위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느냐? 만약 네놈에게 내 손에 있는 이 칼을 빼앗을 재주만 있다면 두말 없이 바치마.” 그 말에 전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좋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
그 한마디와 함께 쌍철극을 내뻗으며 그 장사에게 덤벼들었다. 장 사 또한 큰 칼을 휘둘러 전위와 맞붙었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 지는 듯한 싸움이 벌어졌다. 쌍철극과 큰 칼이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 용처럼 요란한 소리와 빛을 뿜는 동안 진시에서 오시(午, 오 후 한 시경)까지 반나절이 흘러갔다.
“목이 마르구나. 좀 쉬었다 싸우는 게 어떠냐?”
아직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알아볼 수 없는데 장사가 갑자기 그 렇게 소리쳤다. 전위 역시 반나절이나 싸우고 난 뒤라 목이 말랐다.
“좋다.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말아라.”
“너나 도망치지 마라.”
전위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장사는 자기편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전위도 자기편 쪽으로 돌아와 목을 축였다.
정말로 장사는 오래잖아 다시 말을 몰아 나왔다. 전위도 지지 않 고 달려 나갔다. 그렇게 새로 시작된 싸움은 해 질 녘까지 계속됐다. 실로 무서운 장수들이었다. 그러나 타고 있는 말이 지쳐 둘 다 제대 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더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었다.
“말이 지쳤다. 오늘은 이만 싸우는 게 어떠냐?”
이번에는 전위가 먼저 휴전을 청했다. 비록 무장이기는 하지만 조조 밑에서 몇 년 싸우는 동안 어느새 인재에 대한 안목이 생긴 전위였다. 그 낯선 장사가 적이라 하나 설령 자기에게 힘이 있다 해도 죽 이기에는 아깝다는 마음이 들던 차에 말이 핑계가 되어준 것이었다.
“좋다. 내일 다시 싸우자.”
장사도 기꺼이 응했다. 그도 은근히 전위의 쌍철극에 감탄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칼을 거두기 무섭게 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가버 렸다.
전위는 그곳에 군사들을 머물게 하고 사람을 급히 조조에게 보내 그 일을 알렸다.
“무어야? 전위와 하루 종일 싸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장사가 있다고?”
천하에 전위를 당할 자는 없다고 믿어온 조조는 놀란 외침과 함 께 군사를 몰아 달려왔다. 제 눈으로 그 무서운 장사를 보고자 함이 었다.
이튿날이 되자 장사는 과연 다시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다. 조조가 가만히 살피니 위풍이 늠름한 게 범상찮은 장수감이었다. 속으로 은 근히 기뻐하며 전위에게 알렸다.
“오늘은 거짓으로 싸움에 진 척하며 물러나게.”
조조에게는 이미 마음속에 따로 세워둔 계책이 있는 듯했다. 그걸 짐작한 전위는 충실하게 조조의 명을 따랐다. 한참 싸우다가 힘이 부치는 듯 진문 쪽으로 쫓겨 들어왔다.
장사는 그런 전위를 쫓아 거침없이 진문으로 달려들었다. 조조는 군사들에게 활을 쏘게 하여 그가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뒤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쫓기듯 군사를 오리 뒤로 물렸다. 그리고 상대가 이긴 줄 알고 기뻐하고 있을 때 몰래 큰 함정을 판 뒤 그 안에 수십 명의 구수, 사람을 말에서 끌어내리거나 사로잡을 때 쓰는 쇠갈퀴를 든 군사)를 감추었다.
이튿날이 되자 장사는 더욱 위세 좋게 조조를 향해 싸움을 걸어 왔다. 조조는 다시 전위를 시켜 백여 기를 이끌고 나가 그를 맞게 했 다. 장사가 전위를 가리키며 비웃었다.
“싸움에 져서 쫓겨난 놈이 감히 다시 나서다니!”
그리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 나와 전위에게 덤벼들었다. 전위는 몇 합 싸우는 체하다가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날 처럼 조조가 일러준 대로였다.
전위가 달아나는 걸 보자 장사는 더욱 호기가 솟았다. 전날 달아 난 것은 좀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나 그날 또 달아나는 걸 보니 아무 래도 힘이 저만 못해 쫓겨가는 것만 같았다.
이에 장사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전위를 쫓기 시작했다. 한참 뒤 쫓다 보니 달아나는 전위가 어찌 된 셈인지 길을 휘돌아 장사가 똑 바로 달리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는 곳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실은 그것이 속임수였다. 급하게 말을 달려 이제 막 전위 를 사로잡게 되었다 싶은 순간 갑자기 발 아래가 꺼지며 장사는 말 을 탄 채 깊은 함정으로 떨어졌다. 장사가 놀라 급히 몸을 솟구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함정 속에 미리 숨어 있던 구수들이 개미 떼처럼 달려들어 장사를 멧돼지 옭듯 옭고 말았다.
군사들은 환성과 함께 꽁꽁 묶은 장사를 끌고 조조에게로 갔다.
큰 공을 세웠으니 듬뿍 상을 받으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조는 성난 목소리로 군사들을 꾸짖었다.
“네놈들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느냐? 내가 이분 장사를 모셔오 라 했지 언제 오라지어 끌고 오라 하였더냐? 모두 물러가라. 귀한 손을 욕되게 하였으니 네놈들은 군율로 다스리리라!”
그리고 군사들이 어리둥절한 채 쫓겨나가자 한달음에 달려 나가 장사를 묶은 밧줄을 손수 풀어주며 은근하게 말했다.
“전위로부터 장사의 얘기를 듣고 한번 뵙기 소원이었소. 자, 이리 앉으시오.”
장사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조금 전에 쫓겨나간 군사들이나 마찬 가지였다. 멀거니 조조를 건너다보기만 했다. 조조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사의 관향은 어디며 존성대명은 어떻게 쓰시오?”
“나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허저()라 하며 자는 중강仲)으로 씁니다.”
그제야 장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우리가 쫓던 도적들을 어찌하여 잡아가셨소?”
“사방에 도적이 일어도 관군이 지켜주지 못하매 나는 일족 수백 명을 모아 마을에 튼튼하게 성벽을 쌓고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나가 는 중입니다. 어찌 도적들이 지나가는 걸 그냥 보아넘기겠습니까?”
“그럼 정말로 하의와 그 수하 수백 기를 모두 사로잡으셨단 말씀이오?”
“저희 마을에 가면 묶인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전위의 말이 어김없구려. 그렇다면 전에도 여러 번 도적들을 쳐부순 적이 있겠소이다.”
조조가 슬쩍 추켜주자 허저는 은근히 힘자랑을 시작했다.
“몇 번 있지요. 한번은 도적떼가 저희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 세력 이 대단했습니다. 저는 마을 사람들에게 시켜 팔매질할 돌을 많이 모아두게 하고 기다리다가 도적들이 오자 팔매질을 시작했지요. 던 지는 돌마다 어김없이 도적들을 거꾸러뜨리니 마침내 도적들도 겁 이 나는지 물러가더군요.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희 마 을에 곡식이 떨어져 도적들과 잠시 화친하고 저희들이 밭 갈던 소와 그들이 가진 곡식을 바꾸기로 약조를 맺었지요. 그런데 쌀을 받고 소를 주었으나 도적들이 그만 소를 놓치는 바람에 소들이 다시 마을 로 돌아와버렸습니다. 내가 그중 두 마리의 꼬리를 잡고 백여 발자 국을 끌어다 도적들에게 내주었더니 도적들이 놀라 소도 받지 않고 달아나버리더군요. 그리고 도적들은 그 뒤 두 번 다시 우리 마을에 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 장사라면 나도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소. 실로 하늘이 주신 힘이오.”
그렇게 한차례 치켜세우더니 이어 간곡히 권했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대하니 더욱 감격스럽소. 어떠시오? 공을 중하게 쓸 것이니 나를 도와 싸워보지 않겠소?”
잡혀 죽는 줄만 알았던 허저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권유 였다.
“제가 바라던바올시다.”
허저는 그렇게 대답하고 일족 수백 명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그를 도위(都尉)로 삼고 후한 상을 내려 그의 공을 치하한 다 음 사로잡힌 황건의 우두머리 황소와 하의의 목을 베어 여남과 영주 의 평정을 끝냈다.
‘이제는 서주를 가로챈 귀 큰 녀석이다!’
자기의 군사들을 먹일 양식을 넉넉히 마련하고 견성으로 돌아오면서 조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