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5화 : 장성(將星)은 강동에 지고
장성(將星)은 강동에 지고
그 무렵 원술은 자기의 근거지인 남양으로 내려가 힘을 기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땅에 비해 지나친 대군을 거느리려 하니 모든 게 모자랐다. 종형인 원소가 새로이 넓고 기름진 기주(冀州)를 얻었다는 소문을 듣자 우선 급한 말부터 얻으려 했다. 남양 부근에 는 좋은 말이 나는 곳이 없어 기병을 기르기 어렵다는 사정과 함께 말천 필만 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기주가 비록 좋은 북쪽 말이 나는 지방과 가까우나 말이 급하기 는 원소도 원술이나 다름없었다. 지난번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가장 위협을 느낀 것이 공손찬의 강력한 철기대였기 때문이었다. 소견머 리 없는 아우의 턱없는 요구에 원소는 벌컥 화까지 내며 사자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속 좁은 원술이 그 같은 종형의 사정을 이해할 리 없었다. 가슴 깊이 원소의 인색함을 원망하며 앙심을 품으니 그때부터 원래도 겉보 기처럼 다정하지 못하던 원소, 원술 종반 간은 남과 다름없이 되고 말았다.
원술이 말 다음으로 급한 것은 군량이었다. 가까운 데를 둘러보니 형주가 넉넉해 보여 곧 자사 유표에게 군량 이십만 섬만 꾸어달라고 졸랐다. 유표가 호인이라고는 하지만 되돌려 받을 가망이 별로 없는 곡식을 그렇게 많이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원술의 청을 점잖게 거 절하자 원술은 또한 유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기주의 원소라면 종형일 뿐만 아니라 길이 멀어 쉽사리 일을 벌 일 수 없지만 가까운 형주의 유표라면 문제는 달랐다. 원술은 원소 가 공손찬을 이용해 기주를 손에 넣은 꾀를 자기도 한번 써볼 양으 로 가만히 손견에게 밀서를 보냈다.
‘전일 유표가 공의 길을 끊고 괴롭힌 것은 내 형 본초가 시켜서 한 짓이외다. 이제 본초와 유표는 몰래 내통하여 강동을 빼앗을 궁 리를 하고 있소. 만약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유표를 친다면 나는 공 을 위해 기주의 본초를 치겠소이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지난 원수를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은 형주를 얻게 되고 나는 기주를 얻게 될 것이오. 결코 그르침이 없게 하시오.’
뜻으로 보면 손견의 힘을 빌어 원소와 유표 두 사람에 대한 앙심 을 한꺼번에 풀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원술이 노린 것은 유표뿐이었다. 유표와 손견을 싸움 붙여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득을 보 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원소와 원술 종반 간이 불목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데다 지난번 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표에게 당한 욕을 분히 여기고 있던 손견이라 아무 의심 없이 원 술의 충동질에 말려들고 말았다.
“좋은 기회다. 유표 그놈이 지난날 내가 돌아오는 길을 끊고 나를 괴롭혔는데 이 틈에 그때 원수를 갚지 않고 언제 갚겠느냐.”
손견은 원술의 밀서를 읽자마자 황개와 정보, 한당 세 장수를 러놓고 그렇게 말하며 유표를 칠 의논을 했다. 그러나 침착하고 분 별 있는 정보가 나서서 그런 손견을 말렸다.
“원술은 속임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 일도 유표에게 군량 이십 만 섬을 꾸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그 앙갚음을 하려고 꾸몄을 것 입니다. 믿을 말이 못 되니 먼저 사람을 풀어 자세히 살핀 뒤에 군사 를 일으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손견은 혈기가 지나치고 직정적인 사람이었다. 새삼 유표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이미 마음을 정한 뒤라 그런 정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지난 원수를 갚고자 할 따름이다. 어찌 원술 따위의 도움을 바랄까 보냐!”
그렇게 소리친 뒤 바로 군사를 일으켰다. 먼저 황개를 강가로 보 내 전선을 띄우게 하고, 병장기와 군량이며 마초를 싣게 했다. 그리 고 큰 배에는 싸움말을 태운 뒤 그날로 강을 거슬러 형주로 향했다. 강에는 형주에서 온 세작, 첩자)들이 널려 있어 그 소식을 탐지하자마자 나는 듯 유표에게 전했다. 손견이 갑작스레 대군을 일으켜 형주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자 유표는 크게 놀랐다. 곧 장수들과 모사들을 불러놓고 손견 막을 일을 상의했다.
“강동 손견이 지난날의 원혐을 풀려고 대군을 일으켜 형주로 오 고 있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세상이 다 알아주는 맹장 손견이 온 힘을 다 들여 설욕하고자 한 다니 유표로서는 자못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장수 괴량이 일어나 씩씩하게 말했다.
“손견이 비록 그 용력으로 다소간 이름을 얻고 있다 하나 크게 근 심하실 것은 없습니다. 황조(黃祖)로 하여금 강하의 군사들을 이끌 고 앞장서 막게 하고, 주공께서 몸소 형주와 양양의 병마를 들어 뒤 를 받치신다면, 강을 거스르고 호수를 건너느라 피로하고 지친 손견 의 군사들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유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강하 를 지키던 장수 황조에게 손견의 군사를 막게 하고 자신도 대군을 일으켜 몸소 그 뒤를 받쳐주기로 했다.
이때 손견은 세 아내에 여섯 아들과 한 딸이 있었다. 첫째 오부인 소생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가 책(策)으로 자가 백부(伯)였으 며, 둘째가 권(權)으로 자가 중모(仲謀)요, 셋째가 익(翊)으로 자가 숙필叔), 넷째가 광(匡)으로 자는 계좌)였다. 또 오부인의 동 생을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낭(郞)이요 자가 조안(早安)이며 딸은 이름이 인(仁)이었다. 거기다 가 유씨(兪氏) 부인을 보아 아들 하나를 더 얻으니 이름은 소(韶)요자는 공례(禮)였다.
손견이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떠나려 할 즈음하여 아우 손정靜)이 그 조카들을 데리고 형 앞에 나와 다시 한번 손견을 말리려 들었다.
“지금 동탁이 나라의 대권을 오로지하고 있고, 황제는 나약하여 그를 억누르지 못하니, 해내海內)가 크게 어지럽습니다. 영웅들이 각기 땅을 갈라 한 조각씩 차지하고 있어 다툼이 그치지 않는 터에 다만 강동만이 형님이 계셔서 평온합니다.
그런데 이제 형님께서는 작은 원한을 풀고자 큰 군사를 일으키시 니 마땅한 일이 못됩니다. 바라건대 이 어린것들을 보셔서라도 마 음속의 분을 푸시고 다시 한번 가다듬어 생각해보십시오.”
강동을 비우다시피 하여 군사를 일으킨 형의 마음을 어린 조카들 을 앞세워 돌려보려는 것이었으나 손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엄한 얼굴로 아우의 심약함을 나무랄 뿐이었다.
“나는 장차 천하를 종횡하려는 사람이다. 어찌 원수를 두고도 갚 지 않을 수 있느냐? 만약 이번에 이 쥐 같은 유표놈을 살려둔다면 앞으로도 나를 거스르기를 겁내지 않는 무리가 자주 나타날 것이다. 너는 여러 말 하지 말라.”
그러자 맏아들 책이 일어나 말했다.
“아버님께서 반드시 가셔야 한다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때 손책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아버지 손견에게서 강인한 근골 을 이어받은 데다 어머니 오부인의 아리따움까지 더하여 빼어난 용 자(容)를 지니고 있었다. 강동 사람들은 그 이름보다도 ‘손랑(孫郞)’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한결같이 사랑했는데, 어릴 적부터 아 버지와 그 장수들 아래서 창검을 익혀 이제는 한 장수로도 힘과 무 예에 모자람이 없었다. 태몽이나 상에 있어서는 둘째 권이 더 귀하다 는 말이 있었지만 손견은 그런 책을 훨씬 사랑하였다.
맏아들이 스스로 출전하기를 청하자 손견은 흐뭇했다. 나이 마흔 이 넘어도 자식은 어려 보이는 게 부모 마음이라 하나 손견이 그 말 을 듣고 살피니 손책도 이미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열일 곱에 단신으로 전당호의 수적들을 무찌르고, 열여덟엔 회계의 허창 (許昌)을 치기 위해 의군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장하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한번 싸워보아라.”
손견은 기꺼운 마음으로 손책의 종군을 허락했다. 이에 손책은 갑 주와 병기를 갖추고 싸움배에 올라 번성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편 유표의 명을 받아 강하를 지키던 황조는 손견의 배들이 거 슬러 올라오는 대강 연변에다 궁노수를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안 돼 과연 손견의 전선들이 줄을 이어 나타났다. 황조는 미리 숨겨둔 군사들을 시켜 어지러이 활과 쇠뇌를 쏘아 붙였다.
때아닌 화살비에 손견의 군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때 손견이 칼 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모두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뱃전에 몸을 숨겨 화살을 피하고 배 는 그대로 저어나가라. 적이 더 많은 활과 쇠뇌를 쏘도록 충동해야 한다.”
군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 말을 따랐다. 뱃전이나 배 안에 숨은 채 함성만 지르며 강을 오르내리기를 사흘에 수십 번이었다.
강동의 군사들이 수전에 능하다는 걸 잘 아는 황조는 감히 배를 내어 덤벼볼 생각은 못하고 손견의 전선들이 나타날 때마다 애꿎은 활과 쇠뇌만 미친 듯 쏘아댔다. 그러기를 사흘에 수십 차례나 했으 니 화살이 견뎌내지 못하는 건 정한 이치였다.
마침내 화살이 다하여 강을 오르내리는 손견의 전선들을 멀거니 보고만 있을 때 손견이 다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뱃전에 박히고 배 안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 모아라.”
군사들이 그대로 하니 모은 화살이 십여 만이었다. 그제서야 군사 들도 손견의 뜻을 알고 감탄했다.
“지금부터 저쪽 강 언덕에 배를 댄다. 먼저 활을 쏘아 숨어 있는 적을 쫓아버려라.”
화살을 다 거둬들인 뒤 손견이 드디어 황조의 군사들이 매복해 있던 강변을 가리키며 공격령을 내렸다. 손견의 군사는 사흘이나 강 을 오르내리다 보니 적군이 어디 숨어 있는지 훤히 아는 데다 공짜 로 얻은 화살만도 십여 만이었다. 황조의 군사가 숨은 곳을 향해 흔 전만전 소나기처럼 화살을 퍼부어대니 황조의 군사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원래 배를 대고 군사들이 뭍에 오를 때 들이쳐야 하건만 화 살에 쫓기어 그대로 강 언덕을 내주고 말았다.
그 틈을 탄 손견은 빈 강 언덕에 배를 대고 군사 한 명상하지 않 은 채 병마와 양초(糧草)를 뭍에 내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상륙 작 전의 가장 힘든 고비를 단숨에 넘겨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손견의 신속한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채를 세우지 말라. 공복, 황개의 자)과 덕모(德, 정보의 자)는 각기 한 무리를 이끌고 똑바로 황조의 영채를 치도록 하라. 뒤는 의공, 한당의 자)과 내가 받치리라.”
마땅히 진채를 열어야 하건만 그렇게 싸움을 재촉했다. 명을 받은 정보와 황개가 각기 일군을 이끌고 질풍처럼 황조의 본진을 짓밟아 가고 그 뒤를 한당이 이끄는 손견의 중군이 이었다.
뭍에 내리자마자 영채도 세우지 않고 똑바로 달려들 줄은 몰랐던 황조는 그 기습에 크게 낭패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뭉그러 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급하게 쫓기다 보니 원래 의지했던 번성으로 돌아갈 틈조차 없었다. 손쉬운 대로 부근의 등성으로 쫓겨 들어가서 야 간신히 패군을 수습했다.
손견의 추격은 집요했다. 황조의 영채를 짓밟고 번성을 손에 넣은 뒤에도 멈추지 않고 급한 추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황개를 번성에 남겨 성과 배들을 지키게 하고, 군사도 나누어야 하는 동안 등성으 로 쫓겨 들어간 황조도 한숨을 돌렸다.
“적은 며칠이나 배 위에서 보낸 데다 급한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 쳐 있다. 무작정하고 성안에서 지키기보다는 나가서 싸우자. 반드시 어제의 패전을 설욕할 수 있을 것이다.”
수습한 자기 군사에다 등성을 지키던 군사들을 합치고 보니 다시 한번 싸워볼 만한 머릿수가 되자 황조는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이끌 고 성을 나왔다. 하도 어이없이 진 싸움이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 은 것도 그의 무모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황조가 등성 앞 들판에 진세를 벌였을 무렵 손견도 군사를 이끌 고 그곳에 이르렀다. 황조의 진세가 자못 정연한 것을 보고 이번에는 손견도 진을 벌이게 했다.
대강 진세를 갖춘 뒤 손견은 말을 몰아 문기 아래로 나갔다. 그곁에는 화려한 갑옷에 번쩍이는 투구를 쓴 손책이 창을 끼고 서 있었다.
손견이 진문 앞에 나서는 걸 보고 황조도 두 장수를 좌우에 세운 채 자신의 진문 앞으로 말을 몰아나왔다. 두 장수 중 하나는 강하 사람 장호(張)요, 다른 하나는 양양 사람 진생(陳生)이었다.
“강동의 쥐 같은 도적놈아, 네 어찌 감히 한실 종친의 땅을 침범 하느냐?”
황조가 채찍을 들어 손견을 가리키며 소리 높여 꾸짖었다. 제법 늠름한 모습에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더 장해 뵈는 것은 그 곁 에 서 있던 장수 장호였다.
“누가 저 옥새를 훔친 도적놈을 잡아오겠느냐?”
손견을 꾸짖은 뒤 좌우를 둘러보며 묻는 황조의 물음에 장호는 큰 칼을 비껴들고 거침없이 말을 달려 나왔다.
장호가 달려 나와 싸움을 돋우자 손견 쪽에서는 한당이 영을 받 을 새도 없이 마주 나갔다. 장호의 병장기가 칼인 걸 보자 역시 큰 칼을 잘 쓰는 한당이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두 마리의 말은 양군 가운데서 거세게 부딪쳤다. 잠시 휘황한 칼 부림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호는 한당의 맞수로는 부족했 다. 두 말이 어울렸다 갈리기 서른 번도 못 돼 장호의 칼이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진생이 그걸 알아보고 말을 달려 나와 장호를 도우려 했다. 아버지 곁에 섰던 손책이 그런 진생을 용서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창을 가만히 기대 놓고 활과 화살을 집었다.
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간 손책의 화살은 어김없이 진생의 이마 한가운데에 가 박히고 진생은 한마디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힘에 부치는 싸움을 끌어오던 장호는 자기를 도우 러 오던 진생이 죽는 꼴을 보자 크게 놀랐다. 손발이 말을 듣지 않고 칼놀림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한당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소리 우 렁찬 기합과 함께 큰 칼로 내려찍으니 장호는 머리통이 짜개져 뇌수 를 쏟으며 또한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손견의 군사들이 함성과 함께 황조의 진 채를 밀고 들어갔다. 특히 정보는 진작부터 황조를 살피고 있다가 가장 앞서서 그를 쫓았다.
눈앞에서 두 장수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걸 본 데다 정보 가 눈에 불을 켜고 자기를 향해 달려드니 황조는 두려움에 질려 얼 이 빠졌다. 그저 한목숨 구하는 것만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남의 눈 에 띄는 투구부터 벗어던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말까지 버린 채보 졸들 사이로 숨어들어 달아나버렸다.
또다시 손견의 큰 승리였다. 손견은 마음껏 황조의 군사들을 죽이 며 그 뒤를 따라 대강(江)의 지류인 한수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 기서부터 유표의 근거지인 양양성이 가까워 가벼이 움직일 수 없었 다. 사람을 보내 황개로 하여금 모든 배와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으 로 올라오도록 했다. 힘을 한군데로 모아 유표와 결전을 할 심산이 었다.
그럴 즈음 보졸들 틈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황조는 약간의 군사들을 수습해 유표에게로 갔다. 싸움에 진 것을 변명하자니 가장 좋은 길은 손견의 군세를 과장하는 것뿐이었다.
“손견의 군사가 어찌나 많고 날랜지 소장으로서는 당할 길이 없 었습니다. 주공께서 십분 헤아려주십시오.”
황조의 그 같은 말을 들은 유표는 또다시 놀랐다. 급히 괴량을 불 러 손견을 막을 일을 의논했다. 괴량이 황조의 패전에 약간 풀이 죽 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막 싸움에 진 뒤라 군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만 성 밖의 도랑을 깊이 하고 보루를 높이어 손견의 날카 로운 칼끝을 피하는 길뿐입니다. 그런 다음 몰래 원소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하면 손견은 스스로 에움을 풀고 물러날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지극히 소극적인 전법이었다. 그때 곁에 있던 장군 채모(蔡瑁)가 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자유, 괴량의 자)의 말은 우직하고 졸렬한 계책입니다. 적의 군사가 지금 성 아래 이르렀고, 머지않아 그들의 군선도 강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이르게 된 마당에 어찌 두 손을 모으고 죽기만을 기 다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바라건대 군사를 이 끌고 성을 나가게 해주십시오. 손견과 한바탕 겨루어보겠습니다. 성 안에 숨어 지키는 일은 그 뒤에라도 늦지 않습니다.”
들으니 괴량보다는 장수다운 말이었다. 괴량도 이미 자신의 계책 이 절반이나 깨어진 뒤라 그런지 심하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이에 유표는 불안한 대로 채모에게 군사 만여 명을 딸려 다시 한번 성을 나가 싸우게 했다.
양양성을 나온 채모는 성 밖 현산(山) 어귀에 진을 치고 손견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잖아 손견은 승세를 탄 군사들을 이끌 고 기세 좋게 밀고 들어왔다. 멀리 한수에는 황개가 이끄는 선단이 강을 덮듯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채모는 조금도 움츠러듦이 없이 말을 몰고 진문 앞에 나 와 손견의 대군을 맞았다. 손견이 그를 알아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자는 유표의 처남이 된다고 들었다. 전실(前室)이 죽은 뒤에 얻 은 후실(室)의 오라비가 된다 하니, 산 채로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젊은 후실에게 빠져 있는 유표를 달래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누가 저 자를 사로잡아 오겠느냐?”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정보가 쇠자루 달린 창을 비껴들고 말을 박차며 소리쳤다. 채모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 싸웠으나 무예가 정보에 미치지 못했다. 몇 합 어우러보지도 못하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 했다. 그러지 않아도 손견의 군사들에게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형주 군사들이었다. 대장이 도망치자 한번 싸워볼 생각도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손견의 군사들이 그런 그들을 뒤쫓으며 죽이니 시체가 들판 에 즐비하였다.
채모가 군사 태반을 잃고 간신히 양양성 안으로 쫓겨 들어갔을 때였다. 그제서야 힘을 얻은 괴량이 유표에게 말했다.
“채모는 옳은 계책을 마다하고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이토록 패하고 말았습니다. 아까운 군사들만 죽였을 뿐만 아니라 성안 백성 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렸으니 마땅히 군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유표의 면전에서 자기에게 면박을 준 데 대한 앙심까지 실린 말 이었다. 그러나 유표는 새로이 채모의 누이를 후처로 맞아 정을 쏟 고 있는 터라 차마 채모를 벌줄 수 없었다. 다만 좋은 말로 괴량을 달래 농성할 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한편 채모의 패군을 쫓아온 손견은 그대로 양양성을 에워싸고 맹 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유표가 십 년 선(善)의 여력을 모아 고치고 높인 양양성이었다. 성벽이 두껍고 높기가 여느 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성안에는 아직 적지 않은 군사가 있 고 백성들도 한마음으로 유표를 따르니 손견이 용맹하고 그 군사가 아무리 충성스럽다 해도 쉽게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고 미친 듯한 바 람이 일더니 중군의 ‘수’자기가 부러졌다. 대장을 상징하는 깃 발인 만큼 예삿일이 아니었다. 음양을 짚을 줄 아는 한당이 조용히 손견에게 말했다.
“중군의 수자 기가 부러진 것은 좋은 징조가 못 됩니다. 잠시 군 사를 돌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시 배포가 크고 속기(俗忌)에 구애받지 않은 손견이 그 말을 들 을 리가 없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한당의 권유를 한마디로 물리쳤다. “우리는 몇 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지금은 양양성을 우려빼는 것 도 아침 아니면 저녁의 일이 되었다. 그런데 한낱 바람에 깃대가 부 러진 일로 어찌 군사를 되돌릴 수 있겠느냐? 살핌이 많으면 근심도 많다더니 의공이 바로 그러하구나.”
손견이 그렇게 나오니 한당도 더는 권하지 못했다. 사기를 중히 여기는 진중이라 쓸데없이 불길한 말을 거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조짐은 천문에도 비친 모양이었다. 그날 밤의 일이 었다. 손견이 더욱 급하게 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근심에 젖은 채 홀 로 있는 유표를 괴량이 찾았다. 사실 괴량은 장수라기보다는 모사에 가까웠다. 무예도 범상치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식이 있고 천문 과 지리에도 밝았다. 초저녁부터 성루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더니 무 엇을 보았는지 은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제가 천상(天象)을 보니 장성 하나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있는 곳으로 헤아리건대 손견의 별임에 틀림없습니 다. 주공께서는 급히 원소에게 글을 보내 도움을 청하십시오. 어쩌 면 손견을 죽이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표는 그런 괴량의 말이 얼른 믿어지지 않았으나 손견에게 나쁜 조짐이라니 우선 반가웠다. 거기다가 원소에게는 어차피 도움을 청 해야 할 처지이니 구태여 괴량의 계책을 물리칠 필요는 없었다. 그 러나 원소에게 보낼 글은 써도 겹겹이 에워싼 손견의 군사들을 뚫고 나갈 일이 꿈 같았다.
“누가 손견의 에움을 뚫고 이 글을 원소에게 전하겠느냐?”
유표가 궁리 끝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여러 장수가 모두 대답이 없는데 한 젊은 장수가 씩씩하게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유표가 반가운 마음으로 보니 여공(呂公)이란 아장(牙將)이었다.
유표는 몇 번이나 그의 장한 기상을 치하하고 후한 상을 약속한 뒤 원소에게 보낼 글을 맡겼다.
여공이 막 성을 나서려 할 때 괴량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대가 죽기를 두려워 않고 성을 나서려 하나 그전에 먼저 내계 책 하나를 들으시오. 나갈 때 군마 오백을 데리고 가되 반드시 활을 잘 쏘는 이들을 데려가시오. 그리고 무사히 적진을 뚫고 나가거든 바로 기주로 닫지 말고 현산으로 들도록 하시오.
손견은 성정이 강급하니 그대가 뚫고 나간 걸 알면 반드시 앞장서서 그대를 쫓을 것이오. 그때 그대는 군사 백 명을 풀어 산위 로 올려 돌을 모아두게 하고 백 명은 활을 들고 숲속에 숨어 있게 하시오. 현산은 지세가 묘해 매복에 알맞은 곳이 여럿 있을 것이오. 매복이 끝난 다음 손견의 군사들이 그곳에 이르면 너무 빨리 달 아나서는 아니 되오. 될 수 있으면 길을 돌고 이곳저곳에서 적을 격 동시킨 뒤 궁노수를 숨겨둔 곳으로 유인해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적이 그곳에 오면 돌과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 붓도록 하시오. 잘만 되면 손견도 잡을 수 있소.
만약 우리 계책대로 되어 크게 이기게 되거든 연주호포(連珠號砲) 를 울려 신호를 하시오. 그러면 성안에서도 급히 군사를 이끌고 나 가 그대들과 접응하겠소. 그러나 적이 따라오지 않거나 따라와도 우 리 계책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길을 재촉해 원소에게로 가시오. 오늘 밤은 달이 그리 밝지 않으니 해가 지는 대로 곧 성을 나서도 될 것이오.”
실로 두 수를 한꺼번에 보는 절묘한 계책이었다. 그걸 들은 여공은 힘이 났다. 그저 한목숨 건져 원소에게 위급을 고하는 것만이 다행인 초라하고 불안한 길이 아니라, 잘만 되면 원소의 도움 없이도 강한 적을 깨뜨릴 수 있는 길인 까닭이었다.
여공은 괴량의 계책을 자세히 머릿속에 담은 뒤 해가 지기 무섭 게 나섰다. 특별히 활 잘 쏘는 이들로만 골라 뽑은 오백을 거느리고 가만히 동문을 연 뒤 질풍처럼 손견의 진중을 뚫고 나갔다.
날이 저물자 잠시 공격을 그치고 장막으로 돌아와 쉬고 있던 손 견은 갑작스런 함성과 함께 수많은 병마가 내닫는 소리를 듣고 놀라 좌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성안에서 한 떼의 군마가 갑자기 동문을 열고 달려 나와 현산 쪽 으로 달아났습니다.”
잠시 뒤에 돌아온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손견은 문득 유표와 원소가 손을 잡고 자기를 치려 한다는 원술의 편지가 떠올랐다. 현산은 북쪽에 있으니 틀림없이 다급한 유표가 원소에게 구원을 청하러 보낸 것이라 여겨 갑주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말 위에 올랐다.
서둘러 쫓다 보니 손견을 뒤따르는 것은 서른 몇 기밖에 되지 않 았다. 유표의 사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군사를 모을 틈은 고사하고 항상 곁에다 두는 장수들조차 제대로 데려가지 못한 때문이었다.
손견이 현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여공은 이미 알맞은 곳을 골라 매복을 끝내놓고 있었다. 한쪽은 작은 숲이요, 다른 쪽은 가파른 벼랑인 소로로, 벼랑 위에는 바윗덩어리에 군사 백 명이 숨고 숲에는 활과 쇠뇌를 가진 군사 백 명을 숨게 했다.
그런 다음 여공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산자락으로 와 느릿느릿 행군을 했다. 손견의 말이 빨라 홀로 앞장서서 달리다 보니 저만치 그런 여공의 병마가 보였다. 기어코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손견은 혼 자라는 것도 잊고 크게 외쳤다.
“멈춰라! 쥐 같은 무리가 감히 어디로 달아나느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장은 오히려 말 머리를 돌려 손견에게 부딪 쳐 왔다. 손견이 조금만 침착했어도 여공이 자기를 유인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으련만 하늘이 정한 운수는 어쩔 수 없었다. 손견 은 용맹을 뽐내며 한칼에 여공을 찍어버릴 듯 덮쳐갔다.
여공은 계책대로 맞아가는 것이 은근히 기뻤다. 싸우는 둥 마는 둥 한 합을 부딪고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앞서가는 졸개들의 뒤 를 따랐다. 손견은 더욱 마음이 급했다. 여전히 뒤따르는 군사가 하 나도 없다는 걸 잊은 채 여공을 쫓기에만 바빴다.
오래잖아 도망치던 여공은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손견도 멈추 지 않고 말을 몰아 그 뒤를 쫓았다. 그런데 한군데 벼랑 곁으로 난 산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앞서가던 여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손견은 여공이 산 위로 달아났다고 여기고 자신도 급하게 말을 산 위쪽으로 돌려세웠다.
홀연 한차례 징소리가 나더니 산 위에서 집채 같은 바위가 아래 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속에서는 화살이 비처럼 손견 의 머리를 덮어씌웠다. 어떻게 피해보려고 할 틈도 없이 손견은 화살에 맞고 바위에 깔린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머리가 부서져 뇌장 腦)이 흘러나오고 사지는 으깨어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이 서 른일곱, 한창 세력을 키워 가슴속의 큰 뜻을 막 펴보려 하던 손견은 그렇게 어이없이 꺾여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섬뜩하게 떠올릴 일은 지난날 그가 원소와 유표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한 맹세이다. 만약 전국 옥새를 가졌다면 화살과 돌 아래 죽으리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궁한 처지에 몰린 나머지라고는 하지만 망령되이 하늘에 대고 거짓 맹세를 한 죗값이라 말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풀이가 될는지.
손견을 죽인 여공은 뒤이어 나타난 손견의 수하 서른 기까지 모 조리 죽인 뒤에야 괴량과 약속한 연주호포를 놓았다. 손견을 죽인 이상 두려워할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포소리를 들은 성안에서는 괴월과 황조, 채모 세 장수가 각기 한 떼의 병마를 거느린 채 쏟아져 나왔다. 손견이 없는 데다 갑작스레 형주 군사들이 거센 기세로 쏟아지자 강동의 군사들은 큰 혼란에 빠 졌다. 연이은 승리에 따른 방심도 그 혼란을 키운 원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손견을 따라다니며 단련된 장졸들이라 그런지 역시 강동의 군사는 달랐다. 까닭 모르게 사기가 오른 적의 강습에 도 불구하고 각기 자리를 지키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수가에서 수군을 이끌고 전선을 지키던 황개는 갑작스레 손견 의 진채에서 크게 함성이 일고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나자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겼다. 데리고 있던 수군들을 이끌고 급히 손견의 본 진 쪽으로 달려갔다.
황개가 간신히 손견의 진채에 이르렀을 때는 마침 성안에서 쏟아져 나온 황조의 군사들이 기세 좋게 중군 쪽으로 밀려들 때였다. 쇠 채찍을 휘두르며 밀려드는 적을 막으려고 나선 황개의 눈에 앞장서 서 말을 달려오는 황조가 들어왔다.
“이놈, 내 쇠채찍을 받아보아라.”
황개가 졸개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똑바로 황조에게 말을 몰아 가며 소리쳤다. 황조도 피하지 않고 창을 휘둘러 대적해왔다. 그러 나 승세만 믿고 방심한 것은 황조의 불행이었다. 두 합을 채우지도 못하고 황개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보의 분전도 황개에 못지않았다. 손책을 보호하며 길을 앗다가 마침 현산에서의 크나큰 소득에 마음이 부풀어 손견의 본진으로 뛰 어드는 여공을 만났다. 아직 자기 주인 손견을 죽인 것이 바로 그라 는 걸 모르는 정보였지만 곧바로 말을 몰아 여공을 덮쳤다. 들뜬 마 음에 여공도 그대로 정보의 창을 맞았으나 처음부터 무리한 상대였 다. 몇 합을 넘기지 못하고 정보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지니 애써 세운 큰 공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당과 다른 장수들도 각기 힘을 다해, 형주군과 강동군의 싸움은 시작 이래 가장 격렬한 것이 되었다. 강동의 군사들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손견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난전 중이라 알려질 틈도 없었거니와, 유표 쪽도 아직은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양쪽의 대군은 그렇게 밤새도록 싸우다가 날이 밝은 뒤에야 각기 군사를 물렸다. 유표의 군사들은 성안으로 되돌아가고 손견의 군사 들은 배와 수군의 진영이 있는 한수 가에까지 밀려나 난군을 수습했다.
간신히 군사들을 한수 가에 정돈한 뒤에야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적의 매복에 걸려 돌과 화살 아래 죽은 것을 알았다. 군사들이 부서 지고 으깨진 손견의 시체를 찾아왔으나 목은 잘려 성안의 유표에게 바쳐진 뒤였다.
손책이 목 없는 아버지의 시체를 놓고 슬피 목놓아 우니 그 참혹 한 정경에 여러 장수들과 사졸들도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손책은 언제까지나 슬픔에만 빠져 있는 나약한 소년은 아니었다. 강 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견의 맏아들이요, 역시 뒷날 소(小)패왕이 라 불릴 만큼 영웅의 기상이 있었다. 한차례 호곡이 끝난 뒤에 앙연 히 하늘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아버님의 시신이 적의 손에 있는데 어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오!”
이어 손책은 여러 장수들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 다시 유표와 싸울 일을 의논했다. 생각이 깊고 근후한 황개가 일어나 손책을 달 랬다.
“작은 주인, 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게 사람의 날입니다. 또 군 자의 복수는 백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우 리 군사는 주공을 잃은 데다 간밤의 싸움에 밀려 사기는 떨어지고 몸은 모두 지쳐 있습니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데다 높고 든든한 성에 의지하고 있는 적과 싸우기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고정하십 시오.”
“그럼 장군께서는 목 없는 선고(先考)의 유체를 안고 강동으로 돌아가잔 말씀이오? 내 무슨 낯으로 어머님과 아우들을 대하며, 또 강 동 사람들은 나를 어찌 보겠소? 옛말에 아비를 죽인 자와는 한 하늘 을 이지 않는다 했거늘, 아비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도 어찌 이 대로 버려두고 갈 수가 있단 말이오?”
“싸우지 않고도 주공의 머리를 되찾을 방도는 따로 있습니다. 제 가 어젯밤 적장 황조를 사로잡아 두었는 바, 듣기로 그자는 유표가 아끼는 장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사람을 성안으로 보내 일시 화평을 맺으시고, 황조와 주공의 머리를 바꾸자 하시면 유표는 반드 시 거기에 응할 것입니다.”
그런 황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리(軍)로 있는 환해桓楷 가 나서서 말했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와 유표는 전부터 아는 사람이니 저를 사자로 삼아 성안으로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유표를 달래 돌아가신 주공의 시신을 온전히 하겠습니다.”
비록 나이 어리고, 부친을 잃은 슬픔과 원한으로 격앙돼 있기는 하지만, 손책 또한 그들의 권유를 물리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그 일을 허락했다.
손책의 허락이 있자 환해는 그날로 양양성 안에 들어가 유표를 만났다. 환해의 말을 들은 유표는 별다른 주저 없이 거기에 따랐다.
“죽은 문대(文臺, 손견의 자)의 머리는 이미 관에 담아 간직해두었 소. 빨리 황조를 풀어주면 돌려드리겠소이다. 그런 다음 양쪽 모두 군대를 물리고 다시는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아직도 손견이 강동에 쌓아둔 기반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유표로서는 당장 귀찮은 싸움을 끝내게 된 것만이 반가웠다.
환해는 거듭 유표의 너그러움에 감사한 뒤 다시 손책의 진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때 뒤늦게야 그 일을 전해 듣고 달려온 괴량 이 큰 소리로 유표에게 말했다.
“주공, 아니 됩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강동에서 왔다면 군사 한 사람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먼저 환 해를 목 베시고 따로 계책을 세워 저들을 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유표가 난색을 지으며 멀거니 괴량을 보았다. 그의 말이 옳다 해도 이미 허락한 일이라 뒤집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런 유 표를 깨우치듯 괴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손견은 이미 죽고 아들들은 모두 어립니다. 그 허약한 틈을 타 급히 강동으로 군사를 내시면 북소리 한번으로 그 넓고 기름진 땅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 힘을 기 를 수 있도록 버려둔다면 뒷날 강동은 반드시 우리 형주의 큰 걱정 거리가 될 것입니다.”
살핌에서도 헤아림에서도 괴량은 확실히 뛰어난 모사였다. 그러 나 유표는 그를 제대로 쓸 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유가(儒家的) 인의와 작은 인정에 얽매여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그렇지만 황조가 저들 손에 사로잡혀 있으니 어찌 차마 버릴 수 있는가?”
“무모한 황조를 버려 강동을 얻을 수 있다면 안 될 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괴량이 한층 답답한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유표는 기어이 듣지 않았다.
“황조와 나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온 사이다. 그를 버리는 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환해는 무사히 돌아가고, 약조대로 손견의 목과 황조는 맞바꿔졌다.
손책은 선부의 영구를 앞세우고 강동으로 돌아가 곡아(曲阿)의 들 에 장사지냈다. 그런 다음 무리를 이끌고 강도에 머무르며 몸을 굽 혀 어진이와 학식 있는 선비를 맞아들이고 사방의 호걸들을 대접하 니 차차 세력이 불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