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7화 : 두 이리 연환계에 걸리다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7화 : 두 이리 연환계에 걸리다


두 이리 연환계에 걸리다

“그 일이라면 이곳은 크게 떠들 곳이 못 되오이다. 제초사(草舍) 에 가서 조용히 말씀드리겠소.”

왕윤이 문득 안색을 바꾸고 여포에게 말했다. 긴히 할 말이 있다 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풀에 다시 화가 치솟은 여포였으나 그 같은 왕윤의 표정을 보자 무턱대고 고함만 칠 수는 없었다. 까닭이나 알 고 보자는 듯 움키고 있던 왕윤의 옷깃을 놓고 뒤를 따랐다. “장군은 어찌하여 이 늙은이만 괴이하다 여기시오?”

자기의 집에 이르러 말을 내린 왕윤은 여포를 후당으로 인도한 뒤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누가 와서 그러는데, 사도께서 친히 전거를 내어 초선을 승상부 로 보냈다 했소. 그렇다면 그게 무슨 까닭이오?”

여포가 아직 화가 덜 풀린 목소리로 왕윤의 물음을 받았다. 그러자 왕윤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장군이 몰라 하시는 말씀이오. 아무려면 이 늙은이가 장군을 욕되게 할 리가 있겠소?”

“그럼 무엇 때문이오?”

“일은 이렇게 되었소이다. 어제 이 늙은이가 조당에 있는데 태사 께서 볼일이 있으니 내 집으로 오시겠다 하셨소. 그래서 준비를 갖 추고 기다리고 있자니 태사께서 정말로 찾아와 함께 술잔을 나누다 가 불쑥 말씀하셨소. ‘내가 듣자니 이 댁에 초선이라는 여아가 있어 우리 봉선(奉先)이에게 시집 보내기로 허락했다는데 그게 정말이시 오? 나는 아무래도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특별히 와보았소. 내 며 느리 될 그 아이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소. 태사께서 그렇게 말씀하 시는데 이 늙은이가 어찌 거스를 수 있겠소이까? 할 수 없이 초선을 불러내어 태사께 절하며 뵈옵게 하였던바 태사께서는 한동안 그애 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씀하십니다. ‘오늘이 마침 좋은 날이니 내가 돌아갈 때 이 아이를 데려가 우리 봉선이와 짝지어주겠소. 그러니 장군도 생각해보시오. 다른 사람도 아닌 태사께서 친히 오셔서 그렇 게 말씀하시는데 망설일 게 무엇이겠소? 곧 수레를 준비시켜 그 아 이를 승상부로 보낸 것인데, 그게 어떻게 잘못 전해진 모양이오.”

여포가 듣고 보니 왕윤이 그른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거기다가 동탁이 초선을 데려간 것도 자기와 혼인을 시키기 위함이라 하지 않는가. 이에 단순한 여포는 오히려 머리를 조아리며 왕윤에게 사죄 했다.

“이 포(布)가 어리석어 잠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내일 매를 지고 와서 사도께 죄를 빌겠습니다.”

거기다가 왕윤이 또 한 번 초를 쳤다.

“장군의 부중으로 보낼 딸아이의 장렴, 경대) 등이 약간 있 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빨리 보내도록 하겠소이다.”

다시 말해 혼수감은 직접 여포에게로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더욱 왕윤을 의심할 수 없게 된 여포는 거듭 앞날의 장인에게 감사하고 왕윤의 집을 물러났다.

그 길로 돌아간 여포는 밤새도록 뜬눈으로 동탁의 부름을 기다렸 다. 왕윤의 말대로라면 동탁은 그날 밤 안으로 자기를 불러 초선과 짝을 짓게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날이 훤히 밝도록 동탁은 여포를 부르지 않았다.

그제서야 여포는 더럭 의심이 났다. 날이 밝는 대로 자기의 방을 뛰어나가 동탁이 기거하는 중당(中堂) 쪽으로 가보았다. 아직 새벽 이라 사방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더욱 수상쩍어 여포는 곧장 중 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에는 일찍 깨어난 동탁의 시첩 몇이 서성 거리고 있었다.

“태사께서는 어디 계시냐?”

여포는 그들에게 다가가 누구에게 할 것도 없이 물었다. 그 가운 데 하나가 입을 비쭉이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태사께서는 새로운 계집 하나를 얻어 함께 잠자리에 드신 뒤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에 여포는 이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한 번 더 확인할 양으로 버럭 소리를 질러 물었다.

“그 새로운 계집이 누구라더냐?”

“저희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이름만은 태사께서 초선이라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일은 끝내 마음 조이던 대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 간 여포는 솟구치는 분노로 눈앞이 다 캄캄했다. 아무리 호색한 동 탁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은 명색 그 아들이고 초선은 며느릿감이 아 닌가.

이에 분노로 눈이 먼 여포는 곧바로 동탁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방 뒤꼍 난간 쪽에 숨어 방 안을 훔쳐보았다.

그때 초선은 이미 일어나 창가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더럽혀진 몸을 슬퍼하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빗질을 하고 있 는데, 문득 창 아래 못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고요한 물결에 비치는 인물을 살피니 몸집이 크고 머리에는 속발관 (東冠)을 얹은 것이 바로 여포 그 사람이었다.

뒷문 곁에 바짝 붙어선 것으로 보아 방 안을 훔쳐보고 있는 게 틀 림없다고 생각한 초선은 이때라 여겼다. 두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슬픔과 근심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결코 자기의 신세를 기뻐하는 이의 자태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다시 향라 수건을 꺼내 두 눈 을 찍었다. 처음에는 시늉이었으나 가만히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생 각하니 정말로 눈물이 났다.

그 모양을 훔쳐보고 있던 여포는 괴로웠다. 특히 그 눈물이 자신 을 향한 것이란 짐작이 들자 동탁에 대한 분노는 한으로 뼈에 사무쳤다.

하지만 여포 또한 한때나마 대국(大局)을 주도한 인물이라, 몸을 움직임이 가볍지 아니했다. 당장 뛰어들면 동탁 하나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뒤가 막연했다. 서량에서 따라온 동탁의 심복 장수들과 모사는 하나로 뭉쳐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달려들 것이 고, 동탁에게 빌붙어 해놓은 짓이 있으니 조정의 옛 신하들은 그들 대로 자기를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기 십상 이었다.

거의 본능과도 같은 감각으로 그런 자신의 처지를 짐작하고 있는 여포는 거기서 일단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참담한 기분이었으나, 그래도 초선의 슬퍼하는 모습은 한 가닥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그 녀에게까지 배신당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중당을 나선 여포는 한동안 부중을 쏘다녀 어느 정도 마음을 가 라앉힌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그때는 동탁도 자리에서 일어나 중당 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여포를 보고 물었다.

“밖에 별일이 없느냐?”

“아무 일도 없사옵니다.”

여포는 시무룩이 대답하고 여느 때처럼 동탁 곁에 시립하고 섰다. 그때 마침 음식상이 들어왔다. 동탁의 늦은 아침이었다. 동탁이 먹 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걸 보고 여포는 가만히 눈길을 돌려 침실 쪽을 훔쳐보았다. 분명 그 안에 있을 초선의 자태를 발을 통해서나 마 보고 싶어서였다.

그 같은 때만 기다리고 있던 초선이 그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수놓은 발 저편에서 오락가락하며 한동안 여포의 애간장을 녹인 뒤에 슬몃 발을 들어 반쯤 얼굴을 내밀었다. 여포를 건너보는 눈길에는 무어라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정이 실려 있었다. 애틋한 그리움 이 있는가 하면 한없는 슬픔도 섞여 있고, 은은한 원망이 비치는가 하면 아득한 대로 기다림도 어려 있었다.

그런 초선을 바라보는 여포는 그 또한 형언할 수 없는 감회로 정 신이 아뜩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먹는 일에만 마음을 쏟고 있 던 동탁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다. 여포와 초선의 눈길이 심상 않다 싶자 문득 마음속에 의심과 질투가 일었다.

“봉선은 무얼 그리 얼빠진 듯 보고 있는가? 다른 일이 없거든 나 가보아라.”

울컥 치솟는 노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 자 여포는 한층 동탁이 미웠다. 남의 여자를 가로챈 주제에, 하는 기 분으로 앙앙불락快不樂)하여 물러났다.

그 뒤 동탁은 한 달이 넘도록 방 밖을 나오지 아니했다. 초선의 미 색에 취하다 보니 나라 다스리는 일도 뒷전인 모양이었다. 밤낮으로 침실의 휘장을 드리우고 초선의 몸을 탐하며 지냈다.

아무리 정력이 남다른 동탁이라 하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늙은 몸 에 배겨날 리 없었다. 오래잖아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 나 죽을 병은 아니라는 걸 알고 초선은 그날부터 옷의 띠를 푸는 일 도 없이 동탁 곁에 붙어서 지극히 간호했다. 왕윤을 위해 뜻한 바를 이루려면 여포 못지않게 동탁에게 사랑과 믿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 이었다.

그 같은 초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동탁은 오히려 병난 것이 기쁠 지경이었다. 그 지극한 간호를 진심에서 우러난 것으로 본 동탁 은 한층 더 깊이 초선을 사랑하고 믿었다.

마음속으로는 분한을 품고 있으나 동탁이 병들어 누웠다는 말을 듣자 여포 또한 아니 가볼 수 없었다. 내키지 않는 발길을 떼어 동탁 이 거처하는 중당으로 갔다.

여포가 문안을 갔을 때 동탁은 마침 잠들어 있었다. 할 수 없이 깨 어나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침상 저쪽에서 초선이 반나마 몸을 내보 이며 여포를 바라보았다. 여포가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초선의 고운 얼굴을 살피니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초선은 그렇게 여포의 눈길을 끈 뒤에 곧 손을 들어 자기의 가 슴을 가리켰다. 그리어 이어 동탁을 가리킨 뒤 가만히 도래질을 쳤 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수정 같은 눈물이 샘솟듯 솟고 있 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여포의 가슴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마음에도 없 는 동탁을 섬기고 있는 초선의 괴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종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했다.

그때 공교롭게도 잠든 것 같던 동탁이 눈을 떴다. 잠든 가운데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뜬 것인데, 여포가 보이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무엇에 홀린 듯 한쪽으로만 눈이 쏠려 있는 여포가 심상 찮았기 때문이었다. 동탁이 슬쩍 몸을 뒤쳐서 그쪽을 보니 생각대로 초선이 거기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휘장 뒤로 사라져버렸다.

“이놈, 네가 감히 내 애희(愛姬)를 희롱하다니…..”

화가 치솟을 대로 치솟은 동탁은 앞뒤 없이 여포를 꾸짖었다. 얼떨떨해 있는 여포를 끌어내게 하였다.

“앞으로는 저놈을 다시는 이 당 안으로 들이지 말아라.”

초선의 눈물에 넋을 잃고 있다 갑작스레 그 꼴을 당한 여포는 무 안한 얼굴로 그곳을 쫓겨나왔다. 초선을 빼앗긴 것만도 분한데 여럿 앞에서 욕까지 보게 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커가는 분노와 원 한으로 이를 갈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동탁의 모사 이유를 만났다. 

“여장군의 안색이 전에 없이 어둡소이다. 무슨 일이 있으시오?” 

여포의 화난 모습을 심상치 않게 여긴 이유가 넌지시 물었다. 여 포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제 이 여포도 돌아가야 할 때가 된 모양이외다. 이공도 잘 있으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태사께서는 장군을 기둥이나 대들보 처럼 여기시며 친아들보다 더 사랑하시는데.”

“바로 그 태사께 쫓겨났소이다. 다시는 부중에 들이지도 말라고 좌우에 엄명을 내리셨소.”

“더욱 모를 일이오. 태사께서 차마 그러셨을 리가 없소.”

동탁과 여포 사이가 벌어지면 큰일이라 생각한 이유가 황급히 그 까닭을 물었다. 여포는 몇 번이나 어긋진 대답으로 퉁을 놓다가 마 침내 그 까닭을 말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비통한 탄식까지 덧붙였다. “비록 첩이라 하나 혼인을 언약한 여자를 빼앗긴 데다 이제는 뭇 아랫것들 앞에서 쫓겨나는 욕까지 당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승상부를 돌아다닐 수 있겠소!”

이유가 듣고 보니 실로 예삿일이 아니었다. 대저 계략이라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 거기에 대응해 펼치는 꾀요, 계략에 밝다는 것 은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밝게 읽을 줄 안다는 뜻도 된다. 비록 좋은 꾀보다는 나쁜 꾀를 더 자주 내는 이유지만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 는 데는 역시 남달랐다. 남자를 갈라놓는 데는 아름다운 여자를 쓰 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계교가 없다는 걸 잘 아는 그로서는 그대로 보 아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좋은 말로 여포를 달래둔 뒤 곧바로 동탁을 찾아갔다.

“태사께서는 천하를 얻고자 하시면서 어찌 작은 잘못으로 그토록 온후를 꾸짖으셨습니까? 만약 저 사람이 마음이 변한다면 대사는 그대로 어그러지고 말 것입니다.”

이유가 그렇게 말하자 동탁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난 공뿐만 아니라 앞으로 웅지를 펴기 위해서도 여포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조금 전의 그 맹렬한 분노도 잊고 황망히 이유에게 물 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면 좋겠느냐?”

“내일 아침 여포를 불러들이시어 금과 비단을 내리시고 좋은 말로 어루만져주십시오. 그는 단순한 사람이라 그렇게만 해도 달리 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동탁은 이유의 말을 옳게 여겼다. 다음 날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러들이고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어제는 내가 병중이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함부로 말하다 네 마음을 상케 한 것이니 너무 새겨듣지 말라.”

그리고 황금 열 근과 비단 스무 필을 내렸다. 여포도 별로 고집부리지 않고 동탁의 뜻을 받아들이니 일은 얼른 보아서 원만히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귀신 같다는 이유도 그 일에서는 헤아리지 못한 게 있었 다. 그 하나는 여포가 초선에게 품은 열정의 크기였다. 겉으로 드러 난 것 외에 깊은 내막을 모르는 이유는 그것이 젊은 여포의 일시적 인 혈기라 생각해 그 정도로 달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하나는 초 선의 정체였다. 그저 좀 행실이 나쁜 시첩으로만 보고, 그 일 뒤로는 조심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듯이 보이는 겉과는 달리 여포의 가슴속에 있는 열정의 불길은 갈수록 세차게 타올랐다. 몸은 동탁의 좌우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초선에게로만 달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초선 의 드러나지 않은 유혹도 집요했다. 먼빛으로라도 여포의 눈길을 의 식하면 어떻게든 어김없이 그 마음을 흔들어놓고 말았다.

그런 내막이니 만큼 일이 다시 터질 것은 정한 이치였다. 동탁의 병이 나아 조당에 들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하루는 동탁이 헌제(獻)와 함께 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제 나 창을 잡고 동탁을 호위하던 여포였으나 동탁이 천자와 함께이니 그날만은 곁에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대전 밖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초선이 생각났다. 천자와 동탁의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 틈을 타서 초선과 단둘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여포는 더 참지 못하고 화극(畵戟)을 낀 채 대궐을 빠져나와 말 위에 올랐다. 급한 마음으로 모니 말은 나는 듯 달려 승상부에

이르렀다. 문 앞에 말을 맨 여포는 초선을 찾아 똑바로 후당으로 뛰어들었다.

“장군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초선이 짐짓 놀란 체 물었다. 여포가 불타는 듯한 눈길로 초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대를 만나고 싶어서 억지로 틈을 냈소.”

“태사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는 지금 폐하와 말씀을 나누는 중이오. 어쨌든 묻고 싶은 게있소…….”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쌓인 여포였다. 언제 동탁 이 어전을 나와 자기를 찾을지 모르는 일이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급한 얘기부터 꺼냈다. 초선은 긴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앞뒤를 짐작 할 만했다. 교태로운 눈짓으로 여포를 호려 넋을 뺀 뒤 속삭이듯 말 했다.

“장군은 후원에 있는 봉의정(鳳)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그곳 은 후미진 곳이니 번다한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곧 그 리로 가겠습니다.”

그러자 여포는 여전히 창을 낀 채 후원으로 달려갔다.

여포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정자 아래 구부러진 난간에 기대 기 다리기 한참 만에 새롭게 단장을 마친 초선이 나타났다. 꽃밭을 가 로지르고 버들가지를 헤치며 나타나는 초선의 모습은 월궁선녀(月 仙)가 하강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고왔다.

여포는 그 같은 초선을 동탁에게 가로채인 게 새삼스레 한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여포를 격동시킨 것은 여포의 소매를 잡고 흐느 끼며 털어놓는 초선의 하소연이었다.

“제가 비록 친딸은 아니었지만 왕사도께서는 그와 다름없이 사랑 해주셨습니다. 한번 장군을 뵈옵고 쓰레받기나 비[箕, 기추. 아내가 스스로를 낮춰 하는 말]처럼 장군의 사람이 되어 일생 곁에서 모실 것 을 허락받으니 첩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 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동태사가 옳지 못한 마음을 품고 첩을 장군 께 넘겨준다고 속여 이리로 데려온 뒤 이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 다. 하오나 첩이 깊은 한을 품고서도 죽지 못한 것은, 장군께 이 억 울한 사정 한마디 여쭙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게 되는 일이 두려워서 였습니다. 다행히도 욕을 참고 살아 견딘 보람이 있어, 이제 이렇게 장군을 뵈옵게 되니 첩의 바람은 이로써 모두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 습니다. 이 몸은 비록 더럽혀져 장군 같은 영웅을 다시 섬길 수 없게 되었사오나, 바라건대 장군 앞에서 죽어 생전에 우러르고 그리던 뜻 이나 밝히고자 할 따름입니다. 부디 장군께서는 만수무강하시고 무 한한 복록을 누리시옵소서.”

말을 마친 초선은 홀연 구부러진 난간을 기어오르며 꽃이 핀 연 못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여포가 황망히 그런 초선의 옷자락을 잡 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대의 매운 뜻은 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소. 다만 함께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을 뿐이오.”

그러는 여포의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샘솟듯 했다. 그에게도 처첩이 있었으나 이름 없던 무장 시절에 얻어 배움과 예절이 없거나 아 니면 동탁의 수하에 든 뒤 힘과 위세로 억눌러 뺏은 여자들이었다. 한번도 여인과 진실되고 애틋한 정을 나누어본 적이 없는 여포에게 초선은 첫정이나 다름없었다. 그 초선이 죽음으로 진심을 밝히려 드 니 여포가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초선은 짐짓 여포의 손을 뿌리치고 죽기만을 고집했다. 

“첩은 이 세상에서는 장군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는 몸이옵니다. 다만 다음 세상을 기약할 따름입니다.”

“아니오. 만약 이 세상에서 그대를 아내로 삼지 못한다면 나는 결 코 영웅이 되지 못할 것이오!”

여포가 한층 격앙되어 소리쳤다. 그제서야 초선은 한동안 눈길로 여포를 올려다보다가 애원하듯 말했다.

“첩은 하루를 일 년같이 여기며 기다리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하루속히 구하여주옵소서.”

초선이 그렇게 뜻을 바꾸는 걸 보자 여포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 다. 그러나 안심이 되기 무섭게 동탁 생각이 났다. 언제 어전을 물러 나와 자신을 찾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 어찌 그걸 모르겠소? 하지만 아무런 말 없이 이리로 온 길이 라 동탁 그 늙은 도적이 의심할까 두렵소. 이만 가야겠소.”

여포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초선이 참으로 바라는 것은 동탁이 의심을 하고 급히 돌아와 두 이리 사이가 완전 히 벌어지게 되는 일이니 여포를 그대로 놓아 보낼 리 없었다. 옥으 로 깎은 듯 고운 손을 들어 여포의 옷깃을 잡으며 원망스러운 듯 속살거렸다.

“장군께서 이토록 그 늙은 도적을 두려워하신다면 첩이 어찌 밝은 날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늙은 도적이 원체 세력이 커서 조속히 도모하기는 어렵소. 천천 히 좋은 계책을 세워 도모할 것이니 기다려주시오.”

초선의 충동질에도 불구하고 여포는 그렇게 말하며 창을 들고 떠 나려 했다. 더 강하게 충동질하지 않고는 잡아둘 수가 없을 것 같았 다. 이에 초선은 이번에는 약간 빈정대는 듯한 말투까지 섞어 여포 의 남다른 자부심을 건드렸다.

“첩은 비록 규중 깊이 있으나 장군의 높으신 이름은 우레가 귀를 떨쳐 울리듯 들었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당세에 으뜸가는 인물이라 하였는데 오히려 남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장군께서 그러하니 아무래도 첩이 밝은 해를 보기는 그른 것 같아 실로 아뜩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여포가 목석이 아닌 다음에 야 어찌 격동되지 않으랴. 얼굴 가득 부끄러움이 떠오르는 것도 잠 시, 이내 오기가 불끈 치솟았다.

“알겠소. 늙은 도적이 의심한들 이 여아무개를 감히 어쩌겠소?”

그렇게 내뱉고는 다시 창을 기댄 뒤 초선을 껴안았다. 초선이 기 다렸다는 듯 여포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향그러운 여인의 살 내음에 여포는 더욱 황홀하여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그대를 얻는 일에 어찌 시각을 지체하겠소?”

그리고 좋은 말만 골라 초선을 어르고 달래었다. 연못의 꽃그늘 사이로 비친 두 사람의 끌어안고 기대앉은 모습[偲偲倚倚]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편 동탁은 전에 올라 황제와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고개를 돌 려 전 아래를 보니 거기 있어야 할 여포가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좋은 얼굴로 대해도 속으로는 여포에 대해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던 동탁은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하던 얘기를 맺고 헌제 앞을 물 러나온 뒤 수레에 올라 승상부로 달렸다.

짐작대로 문 앞에 여포의 적토마가 매어져 있었다.

“여포는 어디 있느냐?”

동탁이 벌써부터 노기 서린 음성으로 문지기에게 물었다. 문지기가 두려움에 질려 대답했다.

“온후께서는 후당으로 드셨습니다.”

여포가 후당으로 들어갔다는 말만 듣고도 동탁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벽력 같은 고함으로 좌우를 물리치고 혼자 후당으로 뛰어들어갔 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후당 안에서는 여포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에 동탁은 초선을 불렀지만 그녀 역시 그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초선은 어디 있느냐?”

동탁은 불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시첩 하나를 잡고 물었다. 그 시첩이 야릇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초선은 뒤뜰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동탁은 미친 듯 후원으로 달려갔다. 얼마 찾지 않아 봉의정 아래서 서로 얼싸안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남녀를 보았 다. 바로 여포와 초선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두 사람이 얼싸안고 있는 꼴을 본 동탁은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그런 동탁의 눈에 언뜻 봉의정 한 모 퉁이에 기대어져 있는 여포의 화극이 비쳤다. 성난 동탁은 비명인 지호통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그 화극을 잡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천하고 무엇이고가 없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초 선이었고, 여포는 그 초선을 훔치려는 가증스런 정적일 뿐이었다. 초선에게 홀려 있던 여포에게도 동탁의 성난 외침은 들렸다. 얼른 초선을 놓아주며 돌아보니 동탁이 살기 띤 얼굴로 화극을 들고 다가 오고 있었다. 그 기세에 크게 놀란 여포는 초선에게 한 장담도 잊고 급히 몸을 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동탁이 화극을 든 채 그런 여포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 포는 듣지 않은 체 도망치기에만 바빴다. 젊고 날랜 여포가 힘을 다 해 뛰니 늙고 비둔한 동탁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죽어라!”

한소리 고함과 함께 동탁은 느린 몸 대신 들고 있던 화극을 여포 에게 던졌다. 손에는 아직도 옛적 젊은 시절의 가락이 남아 화극은 똑바로 여포의 등줄기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무예라면 당대에서 둘째가라고 해도 서러워할 여포가 아닌가. 힐끗 돌아보며 날아오는 화극을 주먹으로 가볍게 쳐 날려버렸다. 뒤따라간 동탁이 다시 땅에 떨어진 화극을 집어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여포가 멀리 달아나버린 뒤였다.

그래도 동탁은 단념 않고 여포를 쫓았다. 그런데 막 원문(園門)을 나설 무렵이었다. 누군가 급하게 원문 안으로 달려오다가 동탁과 세 차게 부딪쳤다. 갑자기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진 동탁이 간 신히 정신을 차려 상대방을 보니 다름 아닌 모사 이유였다. 아무리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그의 꾀를 빌고 있는 이 유인지라 동탁도 그에게까지는 화극을 들이대지 못했다.

이유도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황급히 동탁을 일으켜 세운 뒤 가 까운 서원으로 부축해 갔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왔느냐?”

서원에 자리 잡고 앉은 뒤에도 한동안이나 숨만 허덕거리던 동탁 이 아직 노기 서린 음성으로 이유에게 물었다. 이유가 약간 질린 얼 굴로 대답했다.

“조금 전 부중으로 들어오다가 태사께서 크게 노하셔서 여포를 찾아 후원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뒤따라 달려 가는데 여포가 뛰어나왔습니다. 태사께서 자기를 죽이려 하신다는 게 여포의 말이었습니다. 더욱 놀란 저는 태사의 노기를 풀고자 허 둥지둥 후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앞뒤를 살필 겨를이 없어 그만 태사께 부딪고 만 것입니다. 실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일 놈은 네가 아니다. 여포 그놈이 내가 사랑하는 계집을 희롱 했다. 그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동탁은 새삼 분통이 터지는 듯 이까지 부득부득 갈며 맹세했다.

이유는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이라 생각했다. 문득 안색을 갖추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됩니다. 태사께서는 저 절영지회(絶纓之會)를 잊으셨습니까?” 

이유의 그 같은 어조는 대개 중요한 진언(言)이 있을 때에 쓰는 것이었다. 자주 그런 진언에 힘입어 어려운 고비를 넘겨온 동탁은 거기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노기를 누르고 가만히 이유의 말을 되 씹어보았다.

절영지회, 다시 말해 갓끈[]을 끊고[]노는 잔치란 초(楚) 장 왕의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때 초장왕이 여러 장 수들과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잔치가 한창 흥겹게 어울릴 무렵 갑 자기 바람이 불어 방 안의 불이 일시에 꺼져버렸다. 그 틈을 타 장웅 (蔣雄)이란 장수 하나가 왕이 사랑하는 시녀의 입술을 범하자 그녀 는 그의 갓끈을 끊어 쥐고는 가만히 왕께 그 일을 알렸다. 불만 켜면 갓끈이 끊긴 자가 바로 감히 왕의 애희(愛姬)를 희롱한 자라는 게 드 러날 판이었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큰 소리로 모두에게 갓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다. 따라서 다시 불을 켜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가 갓끈을 뗀 뒤라 누가 그런 무엄한 짓을 했는지 드러나 지 않았다. 하지만 장웅은 그런 왕의 너그러움에 깊이 감복되어 뒷 날 초나라가 진나라와 싸울 때에 이르러 그 은혜를 갚았다. 진군(秦 軍)에게 패한 왕이 위급에 빠져 있자 목숨을 내던져 왕을 구한 일이 그랬다.

동탁이 비록 학문이 없는 무장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고사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아 불쾌한 목소리로 이유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나더러 초장왕의 흉내라도 내라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장웅은 결국 진병(秦兵)에 의해 곤경에 빠진 초장왕 을 죽을 힘을 다해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이제 천하를 다투시려는 태사께서 보시면 초선은 한낱 계집에 지나지 않으나 여포는 심복의 용맹한 장수입니다. 만약 이 일을 기회로 태사께서 여포에게 초선을 내리신다면 여포 또한 그 은혜에 감격해서 죽음으로 보답할 것입니 다. 바라건대 태사께서는 거듭거듭 헤아려주십시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초선에 대한 애착을 쉽게 떨치 지 못한 동탁은 한동안이나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네 말이 옳은 듯하다. 마땅히 그리해야 할 일이다.”

“역시 이 나라의 상보(尙)다우신 말씀이십니다. 천하를 위해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게 되었으니 무어라 경하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탁이 뜻밖에도 쉽게 마음을 돌리자 이유는 기쁜 얼굴로 그렇게 동탁을 추켜세우고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유는 헤아리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다름이아니라 초선의 마음속에 숨겨진 칼날이었다.

“너는 어찌하여 여포 그놈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느냐?”

이미 여포에게 내리기로 마음을 정하였으나 그래도 한 가닥 남은 미련으로 동탁이 초선을 불러 그렇게 묻자 초선이 문득 흐느끼며 대답했다.

“태사께서 잘못 아시고 계십니다. 실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네 이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잡아뗄 작정이냐?” 

동탁은 초선의 그 같은 부인이 은근히 반가우면서도 짐짓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그러자 초선은 한층 애처로이 흐느끼며 꾸며댔다. 

“이미 첩을 버리시고자 하시는 터에 구구한 말이 무슨 소용이겠 습니까만 행여 더러운 혐의라도 벗을까 하여 소상히 말씀드리겠습 니다. 짧으나마 베풀어주신 정에 기대어 바라건대, 부디 번거롭다 물리치지 마시고 들어주시옵소서. 조금 전 첩이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자니 난데없이 여포가 뛰어들어왔습니다. 놀라 피하려는데 그가 자기는 태사의 아들이니 피할 게 무어 있느냐며 창을 든 채 봉 의정까지 따라왔습니다. 그제서야 첩은 그의 마음이 더러운 욕심으 로 차 있음을 알아보고 욕을 면하고자 연못에라도 뛰어들어 자진 盡)코자 했으나 그 짐승 같은 자가 어느새 첩을 붙잡아 껴안고 놓아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 같은 생사지간에 태사께서 오셔 이 천한 목 숨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듣기에 나쁘지 아니했다. 세상에 다시 없는 꼴불견이 계집에게 버림받은 사내인데 초선의 말이 동탁을 그 꼴불 견에서 구해주었다. 따라서 동탁은 그 일을 그만 따지기로 하고 아 주 너그러운 체 초선에게 물었다.

“어쨌든 여포가 너를 탐하는 것은 분명하니 너를 그에게 주어야 겠다. 네 뜻은 어떠냐?”

초선은 소스라치듯 놀라더니 이내 크게 목놓아 울며 부르짖었다.

“첩의 몸은 이미 귀인을 섬겼거늘 어찌 갑자기 가노(奴)에게 내리려 하십니까? 첩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천한 종놈에게 욕을 보지 는 않겠습니다!”

말뿐이 아니었다. 초선은 그 말을 맺음과 아울러 발딱 몸을 일으 키더니 벽에 걸린 보검을 내려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누가 보아도 거짓으로 꾸며 하는 짓거리 같지가 않았다. 그걸 본 동탁은 놀랍고 기뻤다. 급히 초선의 손에서 칼을 뺏어 던지고 두 팔로 싸안으며 달 랬다.

“내가 지나쳤다. 잠시 너를 놀렸을 뿐이니 진정해라.”

그런 동탁의 어조에는 이미 조금 전의 노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초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탁의 품에 안긴 채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더욱 애절하게 흐느끼다가 문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것은 틀림없이 이유란 자의 꾀일 것입니다. 그자와 여포는 원 래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 여포의 음욕을 채워주고자 나를 태사께 얻 어낼 꾀를 이와 같이 낸 것입니다. 실로 태사의 체면뿐만 아니라 제 목숨까지도 돌아보지 않은 더럽고 못된 꾀입니다. 첩은 반드시 그자 의 고기를 생으로 씹겠습니다!”

적어도 자신에 관한 한 이유의 어떤 말도 소용이 없도록 그렇게 미리 방패막이를 해두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초선의 진정을 드러 낸 것으로 본 동탁은 그 같은 초선이 귀엽기만 했다. 더욱 힘주어 그 녀를 껴안으며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내가 차마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그러나 초선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 갑자기 몸을 떨며 동탁의 품을 파고들었다.

“천한 몸이 비록 태사의 두터운 사랑을 입고 있으나 아무래도 이 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됩니다. 오래 있다 보면 반드시 여포에게 해 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부디 헤아려주옵소서.”

마치 매에 쫓겨 겁먹은 새가 날갯죽지를 파들거리며 숨어드는 시 늉이었다. 동탁은 그런 초선의 등을 쓸어주며 안심시켰다.

“아무려면 그럴 리야 있겠느냐? 걱정 마라. 내일 미오성으로 돌아 갈 때 너를 데려가마. 거기서 함께 즐기며 살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나를 믿어다오.”

동탁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속사정 을 알 리 없는 이유는 다음 날 날이 새기 바쁘게 찾아와 동탁을 재 촉했다.

“오늘이 마침 날이 좋으니[辰]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는 게 어떻 겠습니까? 이미 그에게 내리시기로 결정 보신 이상 하루라도 빨리 보내 그를 어루만져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새 동탁의 말은 달라져 있었다.

“글쎄 그것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여포와 나는 아비 자식이라…………… 어째 선뜻 내리기가 쉽지 않구나. 당장은 내가 그의 죄를 따지지 않 을 것이니 너는 우선 그런 내 뜻을 그에게 전하고 좋은 말로 달래놓 아라. 그 뒷일은 따로 의논하는 게 좋겠다.”

그 말에 이유는 아차 싶었다. 동탁이 원래 변덕이 심한 줄은 알지 만, 하룻밤 새 그토록 달라진 것은 틀림없이 초선의 농간이란 짐작 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사께서는 지금 한낱 여자의 말에 홀려 있으십니다.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천하 대사를 위해 다시 한번 깊이 헤아리십시오.”

이유가 급히 그렇게 동탁을 깨우쳤으나 동탁은 이미 다시 초선에 게 흠뻑 빠진 뒤였다. 돌연 낯색까지 변하며 이유를 꾸짖었다. 

“너라면 네 아내를 여포에게 내주겠느냐? 초선의 일은 두 번 다시 말하지 말라. 만약 또다시 입을 여는 날이면 그 목을 어깨 위에 남겨 두지 않으리라!”

동탁의 고집 또한 잘 아는 이유인지라 그렇게까지 나오자 더는 자기 뜻을 내세울 수 없었다. 말없이 동탁 앞을 물러나오기는 해도 생각할수록 앞날이 두려웠다. 하늘을 우러르며 깊이 탄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한낱 계집의 손에 죽게 되었구나!”

그제야 이유는 초선의 정체가 짐작되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활 시위 거리를 벗어난 새였다.

동탁은 한번 먹은 자신의 마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그날로 미오 성으로 돌아간다는 영을 내렸다. 동탁의 수레가 승상부를 나서자 백 관들은 전처럼 횡문(門)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들 속에는 물론 뜬눈으로 그 밤을 지새운 여포도 들어 있었다.

초선이 수레 안에서 가만히 내다보니 여포가 모여선 백관들 틈에 서 핏발 선 눈으로 수레마다 안을 훔쳐보고 있는 게 보였다. 또한 놓 쳐버릴 수 없는 호기라 여긴 초선은 넓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거 짓으로 통곡하는 시늉을 했다. 마침내 눈길이 초선이 탄 수레 안에 머물자 그 꼴을 본 여포는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비친 초선은 동탁의 위세에 눌리어 통곡하며 끌려가는 가련한 소녀였다.

그러나 당장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여포였다. 수천의 장졸이 동 탁의 수레를 호위하고 있으니 동탁을 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그를 죽인다 해도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들 그들 수천을 감당할 자신이 없 었다. 다만 망연히 바라다보고 있는 사이에 초선이 탄 수레는 멀어 져 갔다.

여포는 조금이라도 초선의 수레가 끼어 있는 행렬을 더 오래 보 고자 가까운 흙언덕으로 말을 몰았다. 언덕 위에 오르자 고삐를 당 겨 말을 멈추고 하염없이 미오로 가는 행렬을 바라보는데 그나마도 이내 수레바퀴가 일으키는 자옥한 먼지 속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여포는 그 먼지 속에 묻혀간 초선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리고 자기 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오냐, 내 꼭 너를 구하고 말리라…….’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며 누군가가 점잖게 물었다.

“온후께서는 어찌 태사와 함께 미오로 가지 않으시고 이곳에서 멀리 바라보며 탄식만 하고 계시오?”

여포가 놀라 그 사람을 보니 다름 아닌 사도 왕윤이었다. 모든 잘 못은 동탁에게 있지 그를 원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는 여포이니 굳이 그를 피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오히려 때가 때인지 라 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여포와 예를 나누기 무 섭게 왕윤이 다시 물었다.

“이 늙은 것이 몸에 병이 나 얼마간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은 바람에 장군을 뵈온 지도 오래된 것 같소이다. 오늘 태사께서 미오 성으로 돌아가신다기에 억지로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왔다가 장군을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구려. 그런데 무슨 일이 있길래 장군은 이 곳에 홀로 남아 탄식만 하고 계시오?”

“이 모두가 공의 따님 때문입니다.”

여포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 말에 왕윤은 짐짓 놀라는 시늉을 하며 되물었다.

“이 몸의 딸 때문이라니? 초선이 어찌 되었다는 것이오? 아직도 장군께 가지 않았단 말씀이시오?”

“내게 오기는커녕, 동탁 그 늙은 도적놈의 총애를 받은 지가 오래되오!”

여포가 비분에 차 대답했다. 왕윤은 더욱 놀란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 여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세상에 어찌 그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소이까?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소이다.”

“안됐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포는 그렇게 허두를 뗀 뒤 앞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차례로 왕윤에게 일러주었다. 하늘을 우러르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며 듣던 왕윤은 여포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사가 참으로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구려!”

이윽고 그렇게 탄식한 왕윤은 문득 여포의 소매를 끌며 넌지시 말했다.

“갑시다. 그 일은 제 집에 가서 의논하는 게 좋겠소.”

여포도 울적하던 터라 순순히 왕윤을 따랐다.

집에 돌아온 왕윤은 우선 은밀한 방으로 여포를 인도한 뒤 술을 갖추어 위로했다. 몇 잔 술이 들어가자 한층 비분에 젖은 여포는 조 금 전에 빠뜨렸던 봉의정에서의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초선을 만 난 일에서부터 동탁이 나타나 창을 던지던 때까지 하나하나 얘기하 고 있는 여포의 눈길에는 어느새 흉흉한 불꽃이 일고 있었다. 

“태사가 내 딸을 욕보이고 또 장군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천하가 크게 비웃을 것이외다. 태사가 아니라 이 왕윤과 장군을 비웃을 것 이오. 그러나 이 왕윤은 늙고 힘없는 무리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소 이다. 다만 애석한 것은 장군 같은 세상을 뒤덮을 만한 영웅도 마찬 가지로 그 더럽힘과 욕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오.”

왕윤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렇게 충동했다. 그러자 하늘을 찌를 듯한 노기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여포는 주먹으로 상을 치며 무언 지 알아듣지도 못할 고함을 질러댔다. 왕윤이 급히 그런 여포를 말 렸다.

“늙은 것이 잘못 입을 놀린 것 같소. 아무쪼록 장군은 노여움을 푸시오.”

여포가 화를 낸 것이 동탁을 욕한 때문으로 오인하는 체하며 다시 한번 여포를 격동시킨 것이었다. 여포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맹세하거니와 내 반드시 그 늙은 도적을 죽이고 이 욕을 씻을 것 이오!”

기다리고 기다려온 여포의 그 같은 말이었으나 왕윤은 짐짓 황망하게 여포의 말을 막으며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은 그만 입을 다무시오. 그 화가 이 늙은 것에게 미칠까 두렵소이다.”

여포가 더욱 흉흉한 기세로 소리쳤다.

“대장부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집 삼아 살면서 어찌 남의 아래 오래 눌려 지내리오!”

그제서야 왕윤도 여포의 뜻이 이미 정해진 걸 알았다. 슬쩍 여포를 부추겼다.

“하기야 장군의 재주로 동태사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한스럽기는 할 것이오.”

“그래서 그 늙은 도적을 죽이고자 하나 명색이 아비와 자식이라 뒷사람들이 욕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여포가 더욱 엄청난 소리를 했다. 여포가 제 입으로 동탁을 죽일 일을 말한 바에야 왕윤도 더 망설일 게 없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장군은 원래 성이 여(呂)씨고 태사는 동董)씨 요. 거기다가 이미 동태사는 장군께 창을 던진 일이 있다는데 창을 던질 때에야 무슨 부자의 정이 있었겠소?”

왕윤이 이렇게 말하자 여포도 문득 봉의정의 일이 떠오른 듯 분 연히 소리쳤다.

“참으로 귀한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사도께서 말씀해주시지 않 았더라면 이 어리석은 포는 크게 그릇 생각할 뻔했습니다.”

그와 같이 여포의 뜻이 동탁을 죽이는 것으로 굳어진 것을 본 왕 윤은 드디어 적극적인 설복에 들어갔다. 전과 달리 정색을 하고 위엄 있게 말했다.

“이미 장군의 뜻이 그러하다니 이 윤도 숨김없이 말하겠소이다. 만약 장군께서 무너져가는 한실을 떠받쳐 충신이 된다면 장군의 큰 이름은 청사에 올라 빛날 것이요, 그 향기가 백세를 이어 그윽할 것 이외다. 그러나 동탁을 도와 반신이 된다면 더러운 이름으로 역사를 적는 붓끝에 올려져 그 고약한 냄새가 만 년을 풍길 것이오.”

여포는 왕윤의 말을 듣자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며 대답했다. 

“이 포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사도께서는 너무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포는 아직도 왕윤이 자기를 설복하려 드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까지 하며 그렇게 말했다.

얼른 보면 여포의 그 같은 자세가 지나쳐 보이지만 사실은 그만 한 까닭이 있었다. 여포에게는 진작부터 동탁을 죽일 마음도, 또 우 선은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먼저 불 안한 것은 뿌리 깊은 동탁의 세력이었다. 여포는 동탁의 병권 일부 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 아래 장수들은 대개 서량에서부터 동탁을 따라온 심복들이었다. 여포가 동탁의 신임을 받고 있을 때는 그들의 복종을 기대할 수 있지만 동탁을 죽인 뒤에도 그들이 여포를 따라주 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거기다가 미오를 지키고 있는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의 네 장 수와 그 휘하 수만 장졸은 용장 정병이면서도 평소에는 거의 여포와 무관했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명분이었다. 여포의 여느 때 행동이 공명정대하고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살 만했다면 동탁을 죽인 것이 곧 의가 되고 공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동탁의 적대 세력이 모두 풍 쳐 여포의 뒤를 받쳐준다면 동탁의 잔당들도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못했다. 양부 정원(原)을 죽이고 동 탁 쪽으로 간 것부터가 그렇지만 그 뒤는 더욱 나빴다. 동탁의 가장 충실한 개가 되어 온갖 흉포하고 잔인한 짓을 도맡아 해온 바람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동탁에 버금가는 미움을 받아온 때문이었다. 설 령 여포가 그럴듯한 대의를 내세워 동탁을 죽인다 해도 사람들이 믿 어주지 않으려니와 그를 떠받들어줄 리는 더욱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 왕윤과 손을 잡는다면 일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왕윤 자신도 곧고 충성되기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지만 구(舊)조정 대신 가운데서도 원로라는 점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서서 조정 대신들의 손발로서 동탁을 죽인 것으로 해준다면 그때 는 아무도 명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당장 동탁의 자리를 잇 지 못하는 것이 여포는 아쉬웠으나 그 일은 따로 때를 기다려볼 수 도 있었다.

여포가 너무 쉽게 몸까지 굽혀 거듭 뜻이 굳음을 보여주자 왕윤 은 다시 못 미더운 기분이 들었다. 짐짓 몸을 도사리는 체 한 번 더 여포를 떠보았다.

“장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만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큰 화 만 부르게 될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오.”

은연중에 말 이상의 어떤 결의의 증거를 보여달라는 요청이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