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8화 : 큰 도적은 죽었으나
큰 도적은 죽었으나
여포도 왕윤의 뜻을 읽은 것 같았다. 문득 차고 있던 칼을 빼더니 자신의 팔뚝을 찔렀다. 그리고 거기서 솟는 붉은 피를 손바닥에 찍 어서 하늘과 왕윤에게 맹세했다.
“만약 이 여(呂)아무개에게 딴 뜻이 있다면 귀신과 사람이 아울러 이 피가 시궁창에 썩어 흐르는 걸 보게 될 것이오!”
그제서야 왕윤도 여포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한실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된다면 이는 모두 장군께서 베푸신 바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선 이 일이 절대로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 록 하십시오. 늙은 도적을 죽이는 일은 때를 보아 따로이 계책이 세 워질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 은밀한 연락을 끊지 말고 기다립시다.”
“사도께서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가까운 날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윽고 여포도 개연히 그 의견에 따르는 말을 남기고 왕윤의 집을 나갔다.
왕윤은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전부터 서로 뜻이 통하는 복야사 손 서(瑞)와 사교위 황완)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둘 다 조정 의 원로라 할 만한 이들이었다.
왕윤이 그들에게 그간의 경위를 말하고 의견을 묻자 먼저 손서가
입을 열었다.
“사도께서 종사를 바로잡을 큰 기틀을 마련하시고 계신 줄도 모 르고, 우리는 동탁, 여포의 무리와 가까이하시는 것만 두고 근심하 였소. 말씀을 듣고 보니 속 좁고 미련함이 부끄러움과 아울러 홀연 한 계책이 떠오르는구려.”
“무엇이오?”
“방금 주상께서는 환중(中)에서 일어나시었소. 말 잘하는 사람 을 골라 미오로 보내 폐하께서 의논할 일이 있다 하고 동탁을 부르 는 한편, 여포에게는 천자의 밀조를 주어 갑병을 거느리고 조문 앞 에 숨어 있다가 동탁이 들어오면 쳐죽이게 하는 것이오. 늙고 둔한 머리로는 이게 가장 좋은 계책인 듯싶소.”
“그렇지만 누가 감히 미오로 가서 동탁을 꾀어올 수 있겠소?”
황완이 근심스런 얼굴로 끼어들었다. 손서는 거기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해둔 게 있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포와 같은 고향 사람에 기도위로 있는 이숙(李)이란 자가 있소. 일찍 동탁의 수하가 되어 여포를 정원에게서 유인해 오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동탁이 그 벼슬을 높여주지 않아 마음속으로 원망을 품고 있소이다. 만약 이 사람을 보낸다면 아직 그를 자기의 사람 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동탁은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왕윤이 선뜻 손서의 의견에 찬동하고 황완도 달리 반대가 없어 셋은 그렇게 의논을 마치고 헤어졌다.
이튿날 왕윤은 다시 여포를 불러 조정 대신들이 그의 뒤를 받쳐 주고 있음을 알리고, 이어 이숙 끌어들일 일을 의논했다. 여포가 선 선히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지난날 나로 하여금 정건양(T 建陽)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오게 한 것도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만약 이번 일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먼저 그자를 목 베겠습니다.”
왕윤이 들으니 비록 여포의 말이나 또한 그럴듯했다. 이에 곧 이 숙에게 사람을 보내 그리로 불러들였다. 얼마 뒤 이숙이 의아로운 얼굴로 나타나자 여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난날 공이 나를 설득하여 정건양을 죽이고 동탁에게 투항하게 하였소. 그런데 이제 보니 동탁은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 들을 학대하여, 죄악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매 사람과 귀신이 함께 분해하고 있소. 이에 조정의 원로 대신들과 의논하여 동탁을 죽이고 자 하는 바, 공도 그 일에 나서주셨으면 하오. 만약 공이 천자의 조 서를 받들고 미오로 가서 동탁을 입조케 하면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숨어 기다리다가 그를 죽일 작정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둘 모두 힘 을 다해 넘어지는 한실을 붙든 충신이 될 것이오.”
그러자 이숙은 한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뜻 응했다.
“나 역시 그 늙은 도적을 없애고 싶어한 지 오래이나 다만 같은 마음으로 일할 사람이 없는 걸 한탄해왔을 뿐이외다. 이제 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바로 하늘의 뜻인가도 싶소. 이숙이 어찌 감 히 두 마음을 품을 리 있겠소?”
그리고 화살을 분질러 자기의 뜻에 거짓이 없음을 밝혔다. 곁에서 보고 있던 왕윤이 넌지시 거들었다.
“만약 공께서 이 일을 훌륭히 해내시기만 한다면 벼슬 높지 못함 을 무엇 때문에 근심하시겠소?”
동탁에 대한 이숙의 앙심이 벼슬 높여주지 않은 데 있는 걸 알아 서 한 말이었다. 이숙은 그 말에 더욱 힘이 났다. 잘만 되면 원한도 풀고 벼슬도 올라갈 수 있으니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 이숙은 수십 기를 이끌고 미오성 앞에 이르렀다. 사람이 와서 천자의 조서가 내렸다는 말을 하자 동탁은 사자를 불러들이게 했다. 사자로 들어와 절을 하는 걸 보니 다름 아닌 이숙이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로 조서를 내리셨느냐?”
이숙이 자기 사람이라 칙사를 맞는 예도 않고 동탁이 물었다. 이 숙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오래 편찮으시다가 요즘 쾌차하시매, 환중에 미루어두 신 일을 문무 대신들과 논의하시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태사 께 제위를 선양하시는 일이옵니다. 서둘러 입조하셔야 될 줄로 아옵 니다.”
그러면서 비슷한 내용의 조서를 내놓았다. 오래전부터 은근히 꿈 꾸어 오던 일이었으나 너무 갑작스럽고 쉽게 때가 오니 동탁은 기쁜 마음보다 의혹이 먼저 일었다. 사람이 없다, 없다 해도 아직 완고한 원로 대신들이 몇몇 버티고 있는 조정에서 어찌 그 같은 일이 그토 록 갑작스럽고 쉽게 결정났는지 궁금했다.
“얼른 믿기지 않는구나. 왕윤의 뜻은 어떻더냐?”
동탁은 초선 때문에 그 무렵 들어 무척 가깝게 여겨진 왕윤의 동 태부터 물었다. 이숙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왕사도께서는 사람을 시켜 태사께서 보위를 물려받으실 수선대 (受禪臺)를 쌓아놓고 주공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야 어떠하든 왕윤쯤 되는 원로 대신이면 남의 이목도 살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나서서 특별히 대까지 쌓고 자기를 기다 린다니 조정의 분위기는 대강 짐작이 갔다. 그제서야 동탁은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드러냈다.
“간밤 꿈에 용 한 마리가 내 몸에 감기더니 이제 이 기쁜 소식을 듣는구나.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그렇게 말하며 사양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 한번 나타냄 없이 미 오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거기서 동탁은 또 하나의 큰 실수를 저질렀다. 친위대랄 수 있는 비웅군(飛熊軍) 삼천과 이각, 곽사, 장 제, 번조 네 장수를 미오에 떼어놓고 온 일이었다. 선위를 받으러 가 는 경사스러운 길까지 살벌한 창검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는 이숙의 말을 받아들인 탓이었다.
“내가 제위에 오르면 마땅히 너를 집금오로 삼으리라.”
오히려 이제는 문덕(文德)을 앞세우라는 이숙의 진언에 그같이 때늦은 약속까지 했다. 이숙이 벌써 신하의 예를 하며 그런 동탁에게 감사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때 동탁에게는 나이 아흔이 넘은 노모가 있었다. 서둘러 장안으 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동탁이 작별 인사를 드리려 하자 물었다.
“얘야, 너 어디를 가느냐?”
“한나라 조정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님께서는 머지않아 태후마마 가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선인에게이건 악인에게이건 어머니의 정만은 다르지 않았 다.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그 불길한 예감 이 없겠는가.
“내가 요사이 자꾸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좋은 징조가 못 되는 것 같아 두렵구나.”
주름진 얼굴 가득 근심스런 빛을 띤 채 말했다. 그러나 이미 사신 과도 같은 방심에 사로잡힌 동탁에게는 노모의 그 같은 말도 좋은 뜻으로만 들렸다.
“장차 국모가 되실 터인데 어찌 놀라운 조짐이 없겠습니까? 너무 심려 마시고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허허거린 뒤 다시 초선에게도 가서 선위의 조서를 받은 일과 아울러 실천될 리 없는 약속까지 했다.
“내가 천자가 되면 너를 반드시 귀비로 삼으리라.”
초선은 대개 일의 내막이 짐작되었으나 내색은커녕 누구보다 기뻐 하며 동탁의 품 안으로 달려들어 또 한차례 동탁의 얼을 빼놓았다.
동탁은 이미 천자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우며 미오성을 떠났다.
비록 비웅군과 이각, 곽사 등 네 장수는 남겨두었으나 그래도 수레 를 호위할 갑사들과 사사로이 쓰는 대소의 문무 가신들이 앞뒤를 따 르니 제법 거창한 행렬이었다.
하지만 몇 년이나마 천하를 그의 손에 맡긴 탓인지 하늘도 동탁 의 파멸에 무심치는 않았다. 기세 좋은 동탁의 행렬이 장안을 바라 고 떠난 지 삼십 리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동탁이 타고 있던 수레바퀴가 와지끈 부러져 내려앉았다. 먼 길을 가다 보면 있을 수 도 있는 일이어서 동탁은 별 생각 없이 수레를 버리고 말을 탔다. 그 런데 그 말이 또 미친 듯 울부짖으며 고삐와 재갈을 끊고 길길이 뛰 었다.
그제서야 동탁도 슬며시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이숙에게 물었다.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말이 재갈과 고삐를 끊어버리니 이 무슨 조짐인가?”
“태사께서 한의 천하를 물려받으시니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 꾸신다는 뜻인 듯합니다. 수레바퀴가 부러진 것은 태사의 수레바퀴 를 버리시고 천자의 옥련(玉)으로 바꾸신다는 뜻이며, 말이 재갈 과 고삐를 끊은 것 또한 태사의 마구를 버리고 천자의 황금안장에 오르시게 됨을 뜻함 아니겠습니까?”
혹시라도 동탁이 행렬을 미오로 돌릴까 봐 겁이 난 이숙이 재주 를 다해 그렇게 꾸며댔다. 동탁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믿고 행렬 을 재촉했다.
장안과 미오가 겨우 백오십 리 길이나 행렬을 지어서 하루에 왕복하기에는 멀었다. 이숙이 미오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이 있어, 동 탁이 좌우를 재촉했으나 그날로 장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늘이 보여준 두 번째 조짐은 도중에서 하룻밤을 쉰 동탁의 행 렬이 이튿날 다시 길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홀연 미친 듯 바람이 일고 어둑한 안개가 하늘을 덮었다. 어제의 일로 우쭐해 있던 동탁 이었지만 그걸 보니 또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소심해 보이는 게 싫은지 대범한 체 이숙에게 물었다.
“이것은 또 어떤 상서로운 조짐인가?”
이숙이 다시 둘러댔다.
“주공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것은 용이 등천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반드시 붉은빛과 자주색 안개가 일어 천위威)를 더욱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광풍과 어두운 안개가 정말로 붉은빛과 자줏빛 안개로 비치는지 동탁은 또한 기뻐하며 더는 의심하지 않고 말을 달 렸다.
장안성 밖에 이르자 전과 다름없이 횡문 밖까지 백관들이 모두 늘어서서 마중했다. 그런데 한 사람 이유만이 보이지 아니했다. 병 을 얻어 며칠째 집 밖을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의 그 같은 공교로운 발병도 동탁으로 보면 또 다른 불운이었다. 그만 성했더라 도 동탁이 그토록 감쪽같이 왕윤의 계략에 넘어가도록 보아 넘기지 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동탁은 곧바로 성안에 있는 승상부중으로 갔다. 막 자리를 잡고 앉는데 여포가 들어와 경하를 올렸다. 한때는 초선 때문에 그에게 창을 던진 적까지 있었으나, 그 초선은 미오로 데려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이제는 또 천 자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마음이 한껏 관대해졌다. 친아들 대 하듯 다정한 눈길로 여포의 하례를 받은 뒤 말했다.
“내가 구오(五)의 자리에 오르면 너로 하여금 천하의 병마를 다 스리게 하마.”
여포는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지만, 역시 황공스런 표정으로 감사 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하늘만이 아니라 사람 가운 데도 더러는 진심으로 동탁을 아끼고 위하는 이가 있었던 듯했다. 승상부는 이미 여포의 엄명을 받은 군사들로 에워싸여 있어 직접 동 탁을 만날 길이 없게 되자 수십 명 인근 마을 아이들의 동요에 실어 은근히 위험을 알렸다.
천리의 풀, 푸르고 푸르건만 千里草 何靑青
열흘을 넘겨서는 살지를 못하네. 十日上 不得生
그날 밤 동탁이 이숙과 마주 앉아 있는데 그런 아이들의 노랫소 리가 거듭하여 들려왔다. 가락이 슬프기 짝이 없는 데다 초저녁부터 거듭 들리니 동탁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저 동요를 지은 이는 무슨 뜻이 있는 듯한데 너는 그 길흉을 어떻게 보느냐?”
이숙이 속으로 곰곰 헤아려보니 천리초(千里)는 동(董)의 파자(破) 십일상(日上)은 탁(卓)의 파자라 곧 동탁이 죽는다는 뜻이었다.
“역시 유씨()가 망하고 동씨(董氏)가 흥한다는 뜻입니다.”
얼른 그렇게 동탁을 안심시켜 놓고 가만히 그 자리를 빠져나와 군사들을 시켜 노래하는 아이들을 쫓아버리게 했다.
하지만 왕윤과 여포를 중심으로 한 계략의 낌새를 알고 동탁에게 알리려고 애쓴 것은 그날 밤 동요를 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동탁이 여포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로 들어갈 무렵이었다. 앞뒤를 에워싼 군사들의 창검 사이로 한 도인이 괴상한 차림으로 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푸른 도포에 흰 수건을 쓰고 손에는 긴 장대를 들었 는데 그 끝에는 한 길이나 되는 헝겊이 묶여 있었다. 이숙이 보니 형 겊에는 입구(口)자 두 개가 좌우 양쪽에 하나씩 씌어 있었다. 입 구자 둘을 더하면 다름 아닌 여(呂) 자라, 동탁에게 여포(呂布)를 조 심하라고 깨우쳐주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동탁도 그걸 보았으나 원래 머리가 밝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운 이 다했는지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숙에게 물었다.
“저 도인이 무슨 뜻으로 저러고 서 있느냐?”
이숙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태연히 대답했다.
“미친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무사들을 시켜 그 도인을 멀리 쫓아버리게 했다. 여포와 이숙의 엄명을 받은 군사들 때문에 동탁에게 접할 길이 없어 멀리서나마 위험을 경고하려 했던 그 도인은 깊이 탄식하며 그 자리를 떠 났다.
그 뒤로는 별다른 일이 없어 행렬은 그럭저럭 조당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조복을 갖춰 입고 길에 늘어서서 동탁을 맞아들였다. 이숙은 그때부터 보검을 빼들고 수레를 밀 듯하며 나아갔으나 동탁 은 호위를 위한 것이려니 하며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북액문(門)에 이르러 따라온 군사들을 모두 물리쳐 문 밖에 있게 하고 스무남은 명만 수레를 몰게 하여 들어가게 할 때도 동탁 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진(何)의 일이 몇 해 되지 않건만, 여 포가 따르고 있음을 동탁은 믿은 것이었다.
그런데 궐문 안으로 들어가니 왕윤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한결 같이 칼을 빼들고 전문(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이 상한 낌새를 느낀 동탁이 놀라 이숙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칼을 빼들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그러나 이숙은 대답 없이 수레만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동탁이 섬뜩하여 다시 물으려는데 왕윤의 외침이 이숙의 대답을 대신했다.
“나라를 훔치려던 큰 도적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미리 숨어 있던 백여 명의 무사가 우르르 달려 나오더니 창이며 칼로 동탁을 일시에 찌르고 베었다. 원래 의심이 많은 동탁 은 항상 조복 밑에 갑옷을 받쳐 입고 다녔다. 가슴을 찔렸으나 별로 상함이 없이 수레에서 굴러떨어지며 소리쳤다.
“내 아들 봉선이는 어디 있느냐?”
수레를 따르던 여포가 이내 그 소리에 달려왔지만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친다. 동탁은 어명을 받으라.”
한소리 외침과 함께 방천화극을 번쩍 들어 갑옷 밖으로 드러난 동탁의 목을 찔렀다. 동탁은 어떻게 자기가 죽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비명조차 변변히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위세에 비해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여기서 잠시 돌아볼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정사의 기록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서(史書)에는 왕윤의 연환계連環)나 초선(貂蟬)의 이 름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포와 동탁의 사이가 벌어진 중요한 이유 중에 여자가 들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동탁이 항상 여포에 게 자기가 거처하는 중각(中閣)을 지키게 하였는데 여포가 동탁의 비첩 하나와 사사로이 정을 통해 그 일이 들킬까 봐 두려워하던 중 왕윤의 설득을 받고 동탁을 죽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평소 아랫사람의 실수에 관대하던 동탁이었다면 여포도 그렇게까 지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전에 이미 작은 실수로 자기에게 창까 지 던진 동탁이라 여포로서는 용서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리라. 거기 다가 정적으로서의 미움까지 겹쳐 마침내 여포는 극단적인 배반으 로 나가게 된 듯하다.
동탁의 숨이 끊어지자 이숙은 재빨리 그 목을 잘라 손에 들었다. 여포가 그 곁에서 왼손으로 창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가슴에서 조서 를 꺼내 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폐하의 조칙을 받들어 역적 동탁을 죽였다. 그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동요하지 마라!”
그러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장수와 벼슬아치들이 일시에 만세를 불러 동탁의 죽음을 기뻐했다.
일단 자리가 수습되자 여포가 다시 소리쳤다.
“동탁을 도와 백성을 학대한 자로는 이유가 있다. 다른 이는 용서해도 그만은 용서할 수 없다. 누가 가서 잡아오겠느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숙이 나서서 스스로 가기를 청했다. 마치 이제는 여포의 가신이 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미처 영을 받고 떠나기도 전에 함성 이 들리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이유의 종들이 이미 이유를 잡아 이리로 끌고 오고 있습니다.” 그 주인 동탁과 마찬가지로 이유 또한 부리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해 달아날 궁리조차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묶여 온 것이었다. 이유 가 끌려 들어오자 왕윤이 영을 내렸다.
“저놈을 저잣거리로 끌고 나가 목을 베어 그 주인 동탁의 목과 나란히 걸게 하라.”
이에 그들 주종(從)의 목은 나란히 저잣거리에 내걸리고 시체는 그 곁에 버려졌다.
동탁은 원래 살찌고 기름진 몸이었다. 비록 목이 잘린 시체가 되 었으나 몸의 기름기까지 빠져나갈 리 없었다. 시체를 지키던 군사 하나가 심지를 배꼽에 박아 불을 켜니 그 기름기가 흘러내려 땅을 적실 정도였다. 지나가는 백성 치고 그 목을 향해 주먹질을 휘두르 거나 시체를 밟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윤은 다시 여포와 황보, 이숙 등에게 군사 오만을 주어 미오성으로 보냈다. 동탁의 재산을 거두어들임과 아울러 동탁 밑에 빌붙어 못된 짓을 한 자들과 피붙이를 처단케 했다.
이때 미오성에는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동탁의 심복 장수들이 악명 높은 비웅군 삼천을 중심으로 적잖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 나 동탁이 이미 죽고 여포가 대군을 이끌고 오는 중이란 소문을 듣 자 겁부터 났다. 한번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한 채 밤을 틈타 비웅 군을 이끌고 양주로 달아나버렸다.
아무도 가로막는 사람이 없는 미오성에 들어간 여포는 먼저 초선 을 찾았다. 초선 또한 여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왕에 다시 씻 기워 깨끗해질 수 있는 몸이 아닐 바에야 차라리 젊고 잘생긴 여포 가 나았다. 거기다가 동탁은 죽었지만 아직은 여포를 실망시킬 때도 아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그동안의 회포를 푸느라 좌우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사이 황보숭은 미오성 안에 끌려와 있던 양가의 자녀들을 모두 풀어주고, 동탁의 친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게 했 다. 동탁의 노모가 죽은 것은 물론이요, 아우 동민과 조카 동황도 모 두 목이 잘리었다.
그다음 동탁의 가산을 거두어들여 보니 우선 황금이 수십만 냥에 백금은 수백만 냥이었다. 비단과 보석이며 값진 기명(器)은 헤아 릴 수 없었고 쌓아둔 곡식 또한 태산 같았다.
황보숭과 여포는 그 모든 일을 끝낸 뒤 장안에 있는 왕윤에게 결 과를 알렸다. 왕윤은 크게 공을 치하하고 잔치를 베풀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따로 도당(都堂)에 자리를 마련하여 백관들과 함께 술잔을 들며 한실의 회복을 기뻐했다.
그런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홀연 사람이 와서 알렸다.
“동탁의 시체를 저자에 버려두었던바, 그 앞에 엎드려 크게 곡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왕윤이 소리쳤다.
“동탁이 나라의 큰 죄를 짓다가 죽임을 당해 아래위 모두 기뻐해 마지않는데 누가 감히 그 시체 앞에서 곡을 한단 말이냐? 이리 잡아 들여라!”
대국(大局)을 주재하는 왕윤의 명이라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무사 들이 달려갔다. 얼마 뒤 잡혀온 자를 보니 놀랍게도 시중 채옹(蔡邕) 이었다. 여러 벼슬아치들이 한결같이 놀란 얼굴로 채옹을 바라보고 있는데, 왕윤이 매섭게 꾸짖었다.
“동탁은 역적으로 이제 죽임을 당했으니 나라의 큰 다행이라 아 니할 수 없다. 그런데 너는 한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역적들을 위해 곡을 하니 어찌 된 일이냐?”
왕윤의 서릿발 같은 꾸짖음에 채옹은 자기 죄를 순순히 인정하며 빌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역시 대의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 나라를 등지고 역적 동탁을 좇을 리 있겠습니까? 다만 한때 그의 지우(知 遇)를 입은 적이 있어 그 정을 생각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곡 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의지해 대역죄인의 시체에 곡을 한 죄가 큼은 스스로도 잘 아오나, 바라건대 공께서는 너그러이 살펴주십시오. 발꿈치를 베고 서인(庶人)으로 내치시더라도[首則足],
목숨을 부지하여 짓고 있는 한사(漢史)만 마치게 해주신다면 이 옹 (邕)으로서는 더 큰 다행이 없겠습니다.”
원래 채옹이 동탁 아래 벼슬을 하게 된 것은 강압에 못 이긴 탓이 었으나, 그래도 한번 벼슬에 나아가자 동탁은 한 달에도 세 번이나 벼슬을 높여줄 정도로 그를 끔찍이 여겼다. 이 은혜에다 문사의 감 상이 겹쳐 비참하게 버려진 동탁의 시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비록 죄가 크다 해도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채옹의 재 주였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벼슬아치들은 힘을 다해 그를 구 하려 애썼다. 태부 마일제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가만히 왕윤을 달랬다.
“백개, 채옹의 자)는 실로 세상에서 보기 힘든 재주를 가졌습 니다. 만약 한사를 마칠 수 있게 해준다면 정성을 다해 그 일을 훌 륭히 끝낼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그는 효행이 빼어나 널리 알려진 터이니, 만약 그를 죽였다가는 인망을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왕윤은 듣지 않았다.
“지난날 효무제(武帝)께서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사기(史記)』 를 짓게 했더니 그는 오히려 효무제를 비방하는 글을 세상에 남겼소 이다. 지금 국운이 쇠미하고 조정이 어지러운 때에 아첨만 일삼는 신하가 어린 임금 곁에서 붓을 들게 한다면 반드시 우리를 헐뜯게 될 것이오. 일찍 죽임만 못하오.”
그렇게 매몰차게 마일제의 권유를 뿌리쳤다. 마일제는 더 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말없이 왕윤의 곁을 물러났다. 그리고 다른 벼슬아치들에게 가만히 그의 독선을 근심했다.
“왕윤은 뒤가 없겠소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착한 사람은 나라의 기강이요, 글을 짓고 쓰는 일은 나라의 전고(典考)라 했소. 그런데 이제 왕윤은 채옹을 죽여 나라의 기강이 될 만한 인물을 없앰과 아 울러 전고가 될 글조차 남기지 못하게 만드려 드니 그 운이 오래가 기를 어찌 바라겠소?”
그래도 왕윤은 기어이 채옹을 가둔 뒤 목을 매달아 죽이게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대부치고 울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뒷사람 도 논하기를 채옹이 동탁을 위해 운 것은 옳지 못하나 왕윤이 그를 죽인 것 또한 심하다 했다.
어쨌든 채옹을 죽인 것을 마지막으로 조정은 왕윤을 중심으로 구 (舊)대신들의 손 아래 들어간 듯보였다. 여포의 야심 또한 만만치 않 았으나 아직은 동탁의 뒤를 넘볼 처지가 못 되었다. 오히려 동탁 아 래서 저지른 일로 새삼 중론의 공격이나 받지 않을까 삼가고 삼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탁이 죽은 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불 씨는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동탁이 기르던 장졸 들이었다. 그 무렵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네 장수는 비옹군 삼천과 그동안 모은 동탁의 졸개들을 이끌고 섬서(陝西)로 도망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소동을 일으키려 든 것은 아니었다. 동탁 의 참혹한 최후에 질린 그들은 먼저 사람을 장안으로 보내 표문을 올 리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왕윤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탁이 그토록 날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네 놈이 도운 탓이다. 지금 비록 천하에 대사령赦令)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는 중이 나그네 놈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왕윤은 그렇게 주장하며 사자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원래 싸움을 알지 못하는 문신인 그에게 그들 넷이 거느린 군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장안에서 쫓겨난 사자는 이각과 곽사 등에게 들은 대로 전했다. 이각이 풀이 죽어 나머지 셋에게 말했다.
“용서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으니 할 수 없이 각자 달아나 살 궁리 를 해야겠네.”
나머지 셋도 달리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이각의 말에 묵묵히 동 의하며 침울해져 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사 가후賈)가 입 을 열었다.
“장군들이 만약 군사를 버리고 홀로 도망다닌다면 정장, 작은 마을의 이장 정도) 따위라도 장군들을 잡아 묶을 수 있을 것이오. 적당 한 구실로 섬서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지금 거느린 군마를 보태 크 게 일을 꾸며봄만 같지 못하외다. 그 군사로 장안으로 쳐들어가 동 태사의 원수를 갚고, 일이 잘되면 조정을 받들며 천하를 바로잡을 수도 있소. 만약 이기지 못하면 도망은 그때 가도 늦지 않소이다.”
이각을 비롯한 네 사람이 들으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별로 지략에 밝지 못한 무장들이라 어떻게 군사를 모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 다. 비록 그 땅이 동탁의 근거지이긴 하나 워낙 동탁의 악명이 높아 그의 원수를 갚는다거나 천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따위로는 사람 이 모일 것 같지 않았다.
“왕윤은 성격이 편협하고 부정하니 그러한 점과, 이 지방은 동태사가 근거하던 곳이란 점을 이용하면 될 것이오.”
가후가 그렇게 말하며 한 꾀를 일러주었다. 역시 될성부른 꾀였 다. 이에 이각을 비롯한 네 사람은 다음 날부터 군사들을 풀어 무시 무시한 소문을 퍼뜨렸다.
“왕윤은 이 땅이 동탁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이 땅 사람들을 모 조리 죽여 없애려 한다.”
“곧 장안에서 대군이 와 이곳을 쓸어버린다더라.”
이런 소문들이 양주에 나돌자 사람들은 모두 놀랍고 두려웠다. 동 탁을 위해 꼭 한번 한 채옹까지 죽일 만큼 매몰찬 위인이니 능히 그 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양주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걸 보고 다시 이각의 무리는 선동했다.
“헛되이 죽을 바에야 우리를 따라 난리를 일으키는 게 어떠냐? 잘 되면 동태사의 원수도 갚고 벼슬과 재물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귀가 솔깃했다. 그날부터 줄을 지어 이각 과 곽사 등의 군문으로 몰려드니 그렇게 모인 군사가 며칠 안 돼 십 만이 넘었다. 일을 시작하기는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과 근심이 남아 있던 이각, 곽사의 무리도 군사가 그같이 모이자 부쩍 힘이 솟았다. 장제, 번조와 더불어 각기 길을 나누어 장안으로 쳐들 어갔다.
도중에 동탁의 사위 우보가 군사 오천을 이끌고 와 함께 장 인의 원수를 갚으러 가기를 청했다. 이각, 곽사의 무리는 더욱 힘이 났다. 곧 우보의 군사를 합친 뒤 그를 전구로 삼고 한층 기세 높게 장안으로 휘몰아갔다.
동탁의 잔당인 그들이 군사 십여 만을 모아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장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왕윤도 그 소식을 듣자 겉으로 보 이던 위세와는 달리 은근히 근심이 되었다. 믿느니 여포뿐이라 곧 그를 불러 의논했다.
“사도께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쥐 같은 무리들이 수 가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나가 단숨에 뭉개놓고 오 겠습니다.”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여포가 그렇게 말하며 싸우러 가기를 스 스로 원했다. 왕윤은 마음이 든든했다. 이튿날로 조회에 붙여 그 출 전을 허락하니 여포는 급히 긁어모은 군사 몇 만에다 이숙(李肅)을 데리고 적을 맞으러 나갔다.
이숙이 선봉을 맡아 나아가다 적의 선봉인 우보와 만났다. 이숙이 군사를 몰아 힘껏 부딪쳐가니 우보는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한 싸움 에 져서 달아났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낮의 승리에 취해 이숙이 방심 하고 있는 틈을 타 우보가 야습을 했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이숙 의 군사들은 어지럽게 흩어져 삼십 리나 쫓긴 뒤에야 겨우 수습이 되었다. 군사를 헤아려보니 절반이 꺾여 있었다.
이숙은 더 싸울 힘이 없어 여포에게로 돌아갔다. 여포는 이숙이 첫 싸움에 지고 군사를 반이나 잃었다는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네놈이 어찌 우리 군사의 예기를 꺾느냐?”
여포는 그렇게 이숙을 꾸짖은 뒤 좌우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이에 이숙의 목은 한 싸움에 진 죄로 군문 높이 걸리었다. 생각하면 어이없는 이숙의 죽음이었다.
여포와 한 고향에서 자라 먼저 그를 동탁에게로 꾀어갔고, 다음에 는 그의 말에 따라 동탁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그였다. 이제 동탁을 죽여 부귀영화가 눈앞에 이르렀는가 싶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여포 에 의해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오랜 친구라면 친구요, 동지라면 동 지인 이숙을 그토록 쉽게 죽일 수 있는 여포 또한 그 일을 통해 의 리 없고 무정한 사람됨을 잘 보여주었다.
이숙을 죽인 다음 날 여포는 군사를 내어 우보와 맞섰다. 천하의 여포에게 우보 따위가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우보는 싸움 같은 싸 움도 해보지 못하고 여포에게 여지없이 패해 달아나버렸다. 간신히 이각의 진중으로 돌아가 숨을 돌린 우보는 심복인 호적아(胡赤兒)를 불러 가만히 의논했다.
“여포가 용맹하고 날래니 아무래도 대적해낼 것 같지가 않다. 이 각 등 네 사람을 속이고 진중에 감추어둔 금은보석을 훔쳐 몇 사람 만 데리고 달아남만 못하리라 네 생각은 어떠냐?”
호적아 또한 우보 곁에서 여포의 용맹에 혼쭐이 난 터라 생각이 우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꺼이 우보를 따라 이각의 진채에 감 추어진 금은보석을 훔쳐낸 뒤 졸개 서넛과 함께 진채를 버리고 달아 났다.
그리하여 그들 일행이 어떤 물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적아는 훔쳐 내온 그 금은을 혼자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곰곰 궁리를 해보니 곧 좋은 꾀가 떠올랐다. 우보를 죽여 그 목을 여포에게 바치 면 훔쳐내 온 재물은 자기가 차지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포에게는 상까지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에 호적아는 우보를 죽여 그 목을 가지고 여포를 찾아갔다. 그 런데 일은 호적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포가 의심스런 얼굴로 투항해 온 까닭을 묻자 그때껏 따라온 졸개들 가운데 하나가 나서서 고자질을 했다.
“호적아는 장군께 충성을 바치자고 우보를 죽인 게 아닙니다. 다 만 그가 지닌 금은보화를 빼앗기 위해 우보를 죽였을 뿐입니다.”
그 말에 노한 여포는 그 자리에서 호적아를 죽여버렸다. 제딴에는 주인을 배반한 더러운 종놈을 죽인다는 자못 의기로운 결정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으로만 뭉친 무리 의 특징이다. 동탁과 이유가 각기 그 아랫사람들의 배반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은 이미 보았거니와 호적아의 일은 더욱 한심한 배반 의 연쇄로 이어졌다. 먼저 우보가 이각을 배반했으며 다시 호적아가 그 우보를 배반했으며 이제는 그 졸개들이 또 그 호적아를 배반한 것 이다. 대저 무리를 이룸에 반드시 대의가 필요한 까닭이 이에 있다. 우보가 죽어 전구가 없어진 이각의 군사들을 향해 여포는 호적아 를 죽인 그날로 진군을 서둘렀다. 오래잖아 이각의 본진이 나타났 다. 그걸 보자 여포는 미처 진열을 가다듬을 틈조차 주지 않고 똑바 로 군사를 부딪쳐갔다. 그 자신이 맨 앞에서 적토마에 높이 올라 방 천화극을 휘두르며 나아가니 이각이 당해낼 길이 없었다. 금세 이각의 본진은 쑥대밭이 되고 장수와 군사는 아울러 여포의 군사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날 이각은 오십여 리나 쫓긴 뒤에야 간신히 작은 산에 의지해 보니 열에 일고여덟이상하거나 흩어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혼자 서는 아무래도 여포와 더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안 되겠다. 곽사, 장제, 번조 세 장군을 모셔오너라.” 그리고 그들 세 장수가 모이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여포가 비록 용맹스러우나 지모가 모자라는 위인이니 크게 두려 워할 건 없소이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골짜기 입구를 지키며 내일 그를 꾀어내 싸움을 돋울 터이니 곽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치시오. 이는 옛적 월(越)이 항우를 괴롭히던 법으로, 징을 치면 군사를 내몰고 북을 두드리면 군사를 거두어 여포를 우리 둘 사이에 묶어둘 수가 있소이다. 그사이 장제와 번조 두 장군은 길을 나누어 급히 장안을 치면 저것들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구하지 못하는 형국 이 되어 반드시 크게 패하고 말 것이오.”
우선은 자신의 대패를 얼버무리고 나머지 셋의 힘을 한군데로 모 아쓰기 위함이었으나 이각의 그 같은 계책은 자못 그럴듯했다. 동탁 의 그늘에 묻혀 기껏해야 동탁의 충실한 개처럼 알려져온 터이지만 이각 또한 범상한 장수는 결코 아니었다. 나머지 셋도 병법을 조금 씩 아는 자들이라 금세 그 계책을 따르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걸 알 리 없는 여포는 곧 이각을 쫓아 그 산 아래에 이르렀다. 그런데 겁을 먹고 도망칠 줄 알았던 이각이 오히려 골짜기를 가로막 고 싸움을 돋워오지 않는가. 성난 여포는 앞뒤 돌볼 것도 없이 똑바로 군사를 몰아 이각을 잡으러 갔다. 이각은 몇 번 싸우는 체하다가 곧 산 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포는 급히 말을 몰아 그런 이각을 쫓았으나 산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지는 바람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 군사를 돌리려는데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곽사의 군사들이 갑자기 후진을 들이쳐 우리 군사들이 크게 동 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여포는 급히 군사를 돌려 곽사와 싸우러 갔 다. 그러나 미처 여포가 그곳에 이르기도 전에 북소리가 크게 나며 곽사의 군사들은 물러가버렸다. 여포는 한숨을 내쉬며 수습하려 했 다. 그때 다시 급한 외침이 들렸다.
“이각의 군사들이 다시 몰려옵니다!”
여포는 쉴 틈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이각을 맞으러 갔다. 그러나 미처 이각의 군사들과 창칼을 맞대기도 전에 다시 등 뒤에서 곽사의 군사들이 덤벼들었다. 그래서 곽사에게로 향하면 곽사는 다시 북소 리 징소리로 군사를 거두어버리고……
여포는 화가 나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그렇게 되고 보니 어 쩔 도리가 없었다. 이각과 곽사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헛되이 기 력만 소모했다. 싸우려야 싸울 수도 없고 쉬려야 쉴 수도 없는 괴로 운 상황이었다.
여포가 그 미칠 듯한 싸움에 며칠이나 질질 끌려다니고 있을 때 갑자기 장안에서 비마(飛馬)가 달려와 전했다.
“장제와 번조 두 역적의 괴수가 장안을 침범하여 지금 도성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여포는 정말로 급했다. 장안이 떨어지면 모든 것은 끝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천자가 도적들의 손에 떨어지 면 자신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쫓기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군사를 돌려라. 천자가 계신 도성을 지켜야 한다.”
여포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정신없이 군사를 장안으로 돌렸다. 이 각과 곽사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급하게 군사를 몰아 여 포를 쳤다. 싸울 마음이 없는 여포가 다만 장안을 바라고 도망치니 장안에 이르는 동안에 거느린 인마의 태반이 꺾이고 말았다.
장안성 아래에는 적군이 구름처럼 모여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 포는 그 군사를 뚫고 장안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몇 번을 싸 워도 이롭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조급한 여포가 한층 군사들을 혹 독하게 몰아붙여 그게 또 많은 군사를 잃게 했다. 여포를 두려워하 는 군사들이 적병에게 투항해버린 까닭이었다. 이래저래 성안으로 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느느니 근심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장안성에는 동탁의 잔당 중에 이몽蒙) 과 왕방(王)이란 자가 사면을 받아 남아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전 세가 자기들 편에 유리하게 여겨졌다. 서로 의논하여 바깥의 도적들 과 내응하기로 하고 네 대문을 일제히 열어젖혔다.
열린 네 성문으로 이각, 곽사, 장제, 번조가 각기 한 무리의 군사 를 이끌고 짓쳐들어오니 장안성은 주인 없는 집과도 같았다. 여포 는 혼자서 좌충우돌 분전했지만 워낙 적군의 수가 많아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장안성을 단념한 여포는 수백 기를 거느리고 급히 청쇄문 밖으로 갔다. 사도 왕윤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전세가 급합니다. 사도께서는 어서 말 위에 오르십시오. 함께 관을 벗어나 따로 좋은 계책을 꾸미심이 낫겠습니다.”
여포는 왕윤을 보고 말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왕윤은 무겁 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사직을 지켜주는 혼령이 있어 나라가 평안해진다면 이는 내가 바라는 바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이 왕윤은 다만 나라에 몸을 바쳐 죽을 뿐, 어려움을 만나 구차히 목숨을 도모하지는 않겠소이 다. 장군은 뒷날 관동의 제공(公)을 만나거든 나를 대신해 지난날 의 기의에 감사의 뜻과 아울러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한층 더 힘써 달라고 전해주시오. 그럼 잘 가시오.”
그러고는 여포가 두 번 세 번 권해도 끝내 청쇄문을 내려오지 않 았다. 이때 이미 각 성문에서는 불꽃이 하늘을 찌르고 성안에는 함 성과 비명이 가득했다. 할 수 없이 여포는 왕윤을 버려두고 그대로 장안성을 떠났다. 가족들과 새로 얻은 초선도 돌볼 틈이 없이 백여 기만 이끌고 관을 벗어난 것이었다.
여포마저 달아나자 이각과 곽사는 더 두려울 게 없었다. 대병을 풀어 마음껏 장안성을 노략질했다. 태상경 충불(种拂), 태복 노규(魯 植), 성문교위 최열(崔烈) 등 충신 여남은 명이 그 통에 나라를 위해 죽고, 수많은 군사들도 동탁의 잔당에게 목숨을 잃었다.
난군들은 드디어 천자가 있는 내정을 둘러쌌다. 일이 그토록 급해지자 황제를 모시던 신하가 황제께 권했다.
“폐하께서 몸소 나서시어 저들을 달래봄이 어떠하는지요? 저들이 비록 역적의 졸개들이라고는 하나 폐하의 엄명이야 어찌 감히어 기겠습니까?”
이에 헌제는 몸소 선평문 위로 올라갔다. 이각과 곽사는 멀리서 선평문 문루(門樓)위로 누런 일산(日, 자루 긴 해가리개)이 나타나는 걸 보고 천자의 황개라 짐작했다. 군사들을 멈추게 한 뒤 크게 만세를 불렀다. 거기에 힘을 얻은 헌제는 문루에 의지한 채 큰 소리 로 물었다.
“경들은 한마디 주청조차 없이 장안으로 뛰어들었으니 도대체 무 엇을 하고자 함인가?”
이각과 곽사가 나란히 얼굴을 들고 천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동(董)태사는 폐하의 충성스런 신하였사오나 왕윤에게 까닭 없 이 모살되었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특히 동태사의 원수를 갚고자 달 려왔을 뿐 감히 모반을 일으킬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왕윤만 내어 주신다면 곧바로 군사를 물리겠습니다.”
천자가 들으니 기가 막혔다. 목에 칼끝이 닿은 것과 같은 형국이 어서 그들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충신을 역적의 손에 내주어 죽게 할 수도 없었다. 천자가 잠시 말문이 막혀 무어라 대답 을 못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왕윤이 나섰다.
“신은 원래 사직을 위해 역적을 죽이는 꾀를 내었으나 뜻밖에도 그 잔당의 세력이 강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되 폐하 께서는 못난 신을 애석히 여기어 나랏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제가 내려가 저 두 도적을 만나보겠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목소리였다. 천자는 다시 궁리를 짜보았으나 이미 왕윤을 구할 길은 없었다. 차마 그 뜻을 허락하지도 말리지 도 못하고 문루 위를 서성거릴 뿐이었다.
왕윤은 천자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문루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왕윤이 여기 있다! 이 왕윤을 누가 찾느냐?”
이를 본 이각과 곽사가 달려와 칼을 빼들고 꾸짖었다.
“동태사께 무슨 죄가 있기로 네놈이 함부로 죽였느냐?”
“역적 동탁의 죄는 하늘을 채우고 땅을 덮을 만하니, 어찌 말로 다하겠느냐? 그놈이 죽던 날 장안의 뭇 백성들이 서로 경하했거늘 유독 너희만 그 일을 듣지 못했더란 말이냐?”
왕윤이 꼿꼿하게 맞섰다. 곽사가 다시 그런 왕윤에게 물었다.
“태사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 사면을 허락 지 않았느냐?”
“역적 놈이 왜 이리 말이 많으냐? 오늘 이 왕윤에겐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왕윤이 더욱 소리 높여 이각과 곽사를 꾸짖어 죽음을 재촉했다. 이에 이각과 곽사는 왕윤을 누각 아래로 끌어내 죽이고, 사람을 보 내 그 가족까지 몰살시켰다. 일찍이 왕윤이 채옹을 죽일 때 마일제 가 한 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었다. 비록 정의일지라도 지나치게 독선에 흐르면 화가 따른다는 이치를 마일제는 이미 헤아리고 있었 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