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4화 : 벌벌 떠는 동오(吳)의 산천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4화 : 벌벌 떠는 동오(吳)의 산천


벌벌 떠는 동오(吳)의 산천

대군이 막 움직이려 하는데 장포가 들어와 선주를 뵙고 아뢰었다. 

“오반이 거느린 군마가 모두 이르렀습니다. 소신이 그 군마를 이 끌고 선봉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주는 그런 장포의 뜻을 장하게 여겼다. 두말 않고 선봉의 인수 를 장포에게 내렸다. 장포가 그걸 받아 꿰어차려는데 다시 한 소년 장수가 뛰쳐나오며 분연히 소리쳤다.

“그 인수는 내게 넘겨라!”

선주가 놀라 보니 그는 바로 관흥이었다. 장포가 어림없다는 얼굴로 그런 관흥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 인수를 받았다. 어찌 이걸 내놓으라 하느냐?”

“아니 된다. 네가 무슨 재능이 있다고 감히 그같이 어려운 일을 맡으려 하느냐?”

관흥이 다시 그렇게 따지고 들었다. 장포가 지지 않고 맞섰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우고 익혔다. 활쏘기라면 내 화살은 단 한 발도 빗나감이 없다.”

그때 선주가 나서서 말했다.

“다투지 말라. 정히 그렇다면 짐이 조카들의 무예를 보아 그 낫고 못함에 따라 정하리라.”

하나는 관공의 아들이요, 하나는 장비의 아들이니 어느 쪽도 편들 기 어렵거니와, 실로 조카들의 무예가 어느 만큼이나 되는지도 궁금 해서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장포는 군사 하나를 시켜 백 걸음 밖에 기를 하나 걸고 거기에 붉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게 했다.

“그럼 내 솜씨를 보아라!”

장포가 관흥에게 소리치고 시위에 살을 먹이더니 연이어 석 대를 날렸다. 화살은 셋 다 붉은 동그라미를 꿰뚫었다. 그 놀라운 솜씨에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관흥 은 달랐다.

“그따위 붉은 동그라미를 맞히는 게 무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느냐?”

그렇게 빈정거리며 활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관흥의 머리 위로 기러기가 한 때 줄을 지어 날고 있었다.

관흥이 그 기러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저 기러기를 쏘겠다. 앞에서 세 번째 놈을 쏘아 떨어뜨릴 테니 잘 봐두어라.”

그러고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시위 소리에 이어 정말로 세 번째 기러기가 살을 맞고 떨어졌다. 그걸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입 을 열어 관흥의 기막힌 솜씨를 찬탄했다.

화가 난 장포가 말에 뛰어오르더니 아버지가 쓰던 장팔사모를 비 껴잡고 관흥에게 소리쳤다.

“네 감히 나와 무예를 겨뤄보려느냐?”

관흥도 지지 않고 말에 뛰어오르더니 역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 은 대도를 꼬나들고 말을 박차 나왔다.

“네가 창을 쓴다면 난들 왜 칼을 쓸 줄 모르겠느냐? 덤빌테면 덤 벼 보아라!”

관흥이 그렇게 소리치자 장포도 눈을 부릅뜨고 창을 꼬나 잡고 덤볐다. 둘의 창칼이 막 얽히려 할 때 선주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두 아이는 함부로 굴지 말라!”

그 소리에 관흥과 장포가 황망히 말에서 뛰어내려 창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선주가 엄하게 그들을 나무랐다.

“짐은 탁군에서 너희들의 아버지와 의를 맺어 일생 피를 나눈 형 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마땅히 형제의 의가 있건 만, 어찌 서로 힘을 합쳐 아비의 원수를 갚을 생각은 않고 쓸데없이 다투어 대의를 잃으려 하느냐? 아버지의 상을 당한 지 아직 얼마 되 지 않는데 이 모양이니 뒷날은 더하겠구나.”

“잘못했습니다. 미련한 저희를 벌해주십시오.”

두 사람이 두려운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빌었다. 그제서야 선주가 낯빛을 풀고 물었다.

“너희들 중 누가 더 나이가 많으냐?”

“제가 관흥보다 한 살이 더 많습니다.”

장포가 그렇게 대답했다. 윗대는 관공이 장비보다 너댓 살 위였으 나 관공이 아내를 늦게 얻은 바람에 아랫대에서는 뒤바뀌게 된 것이 었다. 그 말을 들은 선주는 관흥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포를 형님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리고 아우의 예로 장포에게 절하게 했다. 이에 형제가 된 두 사 람은 화살을 꺾으며 길이 서로 돕고 구해주기를 맹세했다.

선주는 오반을 선봉으로 세우고, 관흥과 장포는 곁에서 어가를 지 키게 한 다음 대군을 물과 뭍으로 한꺼번에 나아가게 했다. 배와 말 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동오로 짓쳐드는 기세가 마치 성난 물결 같 았다.

한편 장비의 목을 베어 동으로 달아난 범강과 장달은 손권을 만 나 그 목을 바치고 자기들이 찾아오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혔다. 듣 기를 마친 손권은 두 사람을 물러나 쉬게 한 뒤 여러 벼슬아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지금 유비는 제위에 오른 뒤 칠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우 리 동오를 치러 오고 있소. 그 세력이 매우 크니 실로 위태롭다 할 것이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소?”

그 말을 들은 벼슬아치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가 낯빛이 변해 서 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 속에 있던 제갈근이 문득 앞으로 나가 결연히 말했다.

“이 몸은 군후의 녹을 먹은 지 오래면서도 아직 이렇다 할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저로 하여금 가서 주(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남은 목숨을 걸고 이해로써 그를 달래, 두 집안이 화평 을 되찾고 함께 조비를 치도록 만들어보겠습니다.”

손권이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갈량의 형이라 은근히 기대가 생겼다. 곧 그 청을 들어 제갈근을 사자로 선주에게 보냈다.

때는 장무 원년 팔월이었다. 선주의 대군은 기관 어름에 이 르렀고, 선주 자신의 어가는 백제성(城)에 머물렀다. 그러나 앞 선 부대는 이미 천구(川口)까지 나가 있었다.

어느 날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하나가 들어와 선주께 아뢰었다. “오나라에서 제갈근을 사자로 보냈습니다.”

선주는 만나보지 않아도 제갈근이 왜 왔는지 알 만했다. 굳은 얼 굴로 제갈근을 들여보내지 말라 했다. 황권이 곁에 있다가 아뢰었다. 

“제갈근의 아우는 우리 촉의 승상입니다. 그가 왔을 때는 반드시 그럴 까닭이 있을 것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그를 만나지 않으려 하 십니까? 마땅히 불러들여 그의 말을 들어본 뒤, 따를 만하면 따르되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그의 입을 빌려 손권이 제 죄를 알게 하면 되 지 않겠습니까?”

선주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곧 제갈근을 성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제갈근이 들어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선주가 대뜸 물었다.

“자유께서 멀리서 오신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외다. 무슨 일이오?”

“이 몸의 아우는 오래 폐하를 섬겨온 바라, 거기 의지해 감히 몇마디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제갈근이 그렇게 대꾸하자 선주가 다시 물었다.

“할 말이란 무엇이오?”

“바로 형주의 일입니다. 지난날 관공께서 형주에 계실 때 우리 오 후(吳侯)께서는 여러 차례 화친을 빌었으나 관공은 들어주지 아니했 습니다. 또 그 뒤 관공께서 양양을 쳐서 빼앗았을 때는 조조가 여러 차례 오후께 글을 보내 형주를 빼앗으라 권했으나 오후께서는 역시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몽이 관공과 사이가 나빠 제멋대로 군 사를 일으켜 크게 일을 그르쳐놓고 말았습니다. 오후께서는 후회해 도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이니, 이는 모두가 여몽의 죄이지 우리 오 후의 허물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그 여몽마저 죽어 원한도 이미 끝났다 할 수 있습니다. 손부인 일도 그렇습니다. 손부인께서 는 폐하를 잊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갈 것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제 오후께서는 이 몸을 사자로 삼아 손부인을 돌려보내드리고, 아울러 관공과 익덕을 해치고 우리에게로 항복해 온 촉의 장수들도 폐하께 묶어다 보내시려 합니다. 또 형주도 옛정으로 촉에 되돌리 고, 길이 동맹을 맺어 함께 조비를 쳐 없애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 다. 폐하께서는 부디 그 같은 뜻을 저버리시지 마시고, 우리와 힘을 합쳐 조비의 제위를 찬탈한 죄를 물으시고 그릇된 대통을 바로잡도 록 하십시오.”

제갈근의 그 같은 말에 선주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희 동오는 내 아우를 죽여놓고 이제 와서 감히 교묘한 말로 나 를 달래려 드느냐!”

그러나 제갈근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아니올시다. 저는 일의 크고 작음과 무겁고 가벼움을 가지고 폐 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한조(漢朝)의 황숙이 되시면 서도 한제(漢)가 이미 조비에게 옥좌를 빼앗겼건만 그 역적을 쳐 없애려 하지는 않으시고, 성(姓)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귀하신 몸을 움직여 몸소 대군을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큰 의를 버리고 작은 의를 고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중원은 이 나라의 땅이요, 장안과 낙양은 모두 대한(漢)을 일 으켜 세운 곳이나, 폐하께서는 그쪽을 버려두시고 다만 형주만을 다 투고 계십니다. 이는 바로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잡으시 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폐하께서 제위로 나아가심을 보고 반드시 한실을 되일으키시고 한의 산하를 되찾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위는 그냥 두시고 오히려 우리 오를 치려 하시니 크게 그릇됐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선주는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아우를 죽인 것들하고는 함께 하늘을 이지 않으리라! 짐으로 하여금 군사를 물리게 하려 한다면 짐을 죽이지 않고는 안 될 것이 다. 승상의 낯을 보아주지 않았더라면 먼저 그대의 목을 베었을 터 인즉, 그대는 어서 돌아가라. 돌아가서 손권에게 목을 씻고 죽음을 기다리라 이르라!”

그렇게 제갈근을 꾸짖어 내쫓았다. 제갈근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동오로 돌아갔다.

한편 제갈근이 촉으로 떠나간 뒤에 여러 날이 돼도 돌아오지 않 자 장소가 손권을 찾아보고 은근히 걱정하는 말을 했다.

“제갈근은 병의 세력이 큼을 보고 거짓으로 사자가 되어 오를 버리고 촉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번에 그는 틀림없이 돌아오지 않 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권은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와 자유는 생사로도 바꿀 수 없는 맹세를 한 바 있소. 내가 자 유를 저버리지 않으면 자유 또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지난 날 자유가 시상에 있을 때, 공명이 오로 찾아온 걸 보고 나는 자유에 게 공명을 붙들어보라 한 적이 있소. 그때 자유는 내게 말하기를 ‘제 아우는 이미 유비를 섬기고 있습니다. 의란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아 즉, 아우는 아무리 붙든다 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주공을 버리고 가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그 말만으 로도 귀신의 밝음을 능히 꿰뚫을 만한데 이제 어찌 촉에 항복할 리 있겠소? 나와 자유는 사람과 사람의 사귐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맺 어져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로는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외다.”

그러는데 문득 제갈근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손권이 장 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시오, 내 말이 어떻소?”

그러자 장소는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며 손권 앞을 물러났다. 뒤이어 들어온 제갈근은 손권에게 선주가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을 전했다. 손권이 크게 걱정하는 빛으로 탄식했다.

“일이 그러하다면 우리 강남이 실로 위태롭게 되었구나!”

그러자 계하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자신 있게 소리쳤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이 위태로움을 넉넉히 풀어낼 수있을 것입니다.”

손권이 반갑고도 놀라와 그를 보니 그는 중대부 조자(趙)였다.

“그대는 무슨 좋은 계책이 있는가?”

손권이 그렇게 묻자 조자가 말했다.

“주공께서는 그저 표문 한 장만 지어 저를 사자로 위에 보내주시 면 됩니다. 제가 조비를 이해로 달래 위로 하여금 한중을 치도록 만 들어보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촉병은 절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 을 것입니다.”

그러자 손권의 낯빛이 문득 흐려졌다.

“그 계책이 좋기는 하오마는 경이 가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소. 결코 동오의 기상을 떨어뜨려서는 아니 되오.”

손권이 그렇게 말하자 조자가 결연히 다짐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동오의 기상을 떨어뜨리는 일이 있으면 차라리 강에 몸을 던져버리겠습니다. 그래 놓고도 무슨 낯으로 강남의 사람 들을 대하겠습니까?”

그제서야 손권도 안심한 듯 그의 계책을 따랐다. 스스로를 신하라 낮추어 부르고 조비의 구원을 비는 표문을 지어 조자에게 주며 허도 로 가게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허도에 이른 조자는 먼저 태위 가후를 비롯한 위의 벼슬아치들부터 찾아보았다. 그들의 마음을 사 조비를 달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조자로부터 여러 가지 동오의 사정을 들은 가후는 이튿날 조비를 찾아보고 아뢰었다.

“동오에서 중대부 조자를 보내 표문을 올려왔습니다.”

“그것은 병을 내쫓아달라는 것일 테지.”

조비가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곧 조자를 불러들이게 했다. 불려간 조자는 계하에 엎드려 손권이 써 올린 표문을 조비에게 바쳤다. 표문을 읽은 조비가 조자에게 슬몃 물었다.

“그대의 주인 오후는 어떤 사람인가?”

“밝고 어질며 슬기롭고 큰 뜻을 품으신 가운데도 계략을 아는 분입니다.”

조자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조비가 빙긋 웃으며 핀잔처럼 말했다. 

“경은 주인을 추켜세움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신이 지나치게 추켜세운 게 아닙니다. 오후께서는 노숙을 대수롭 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찾아내 무겁게 쓰셨고, 여몽을 졸개들 틈에 서 뽑아 장수로 세우셨으니 이는 곧 밝음이요, 우금을 사로잡았으나 죽이지 않고 위로 돌려보냈으니 이는 어짊이며, 형주를 빼앗으면서 도 군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슬기로움이요, 삼강 (三江)에 근거하여 천하를 범처럼 노리고 있으니 이는 그 뜻이 큼이 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제는 폐하께 몸을 굽혔으니 계 략을 안다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실상이 그러한데 어찌 밝고 어 질며 슬기롭고 뜻이 큰 가운데도 계략을 아는 분이라 할 수 없겠습니까?”

조자가 그렇게 늘어놓자 조비는 다시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학문을 아는가?”

이번에도 조자는 말 떨어지기 바쁘게 주워섬겼다.

“오후께서는 강 위에는 만 척의 배를 띄워놓고 뭍에는 갑옷 두른 군사 백만을 거느리셨습니다. 어진 이를 쓰고 일 잘하는 이를 부릴 줄 알며 뜻은 천하를 경략하는 데 있으시나,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또한 널리 책을 읽으십니다. 지나간 일들을 적은 책을 두루 읽으시 어 그 큰 줄거리를 짚고 계신 바, 서생들이 좋은 글귀나 뒤적이고 아 름다운 말이나 되뇌는 것과는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은근히 조비가 글 잘 짓는 것까지 빗대 말하며 제 주인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에 조비는 그쪽을 더 캐묻지 않고 다시 다른 걸 물었다. 

“짐은 오를 쳤으면 한다. 그대의 생각에는 될 성부른가?” 

엉뚱한 물음이었지만 이번에도 조자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큰 나라에 작은 나라를 칠 만한 군사가 있다면 작은 나라에는 또 그걸 막을 만한 계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는 위를 두려워하는가?”

“갑옷 두른 군사가 백만이요, 강물은 못처럼 땅을 둘러 지켜주고 있습니다. 오가 두려워할 게 무엇 있겠습니까?”

“동오에 대부(大夫)와 같은 사람은 얼마쯤 있는가?”

“총명이 매우 뛰어난 이는 팔구십 명쯤 되고, 저 같은 무리는 수레로 나르고 말로 되어야 할 만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엉뚱하다 싶을 문답이 거기까지 이르자 드디어 조비도 감탄의 말을 내쏟았다.

“사자로 사방을 다녀도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더니 그대가 바로 그런 사람이로구나. 훌륭하다!”

그러고는 곧 태상경 형정(邢貞)에게 명해 손권을 오왕(吳王)에 봉 하고 구석(錫)을 더한다는 조서를 쓰게 했다.

조자는 조비의 은혜에 감사하고 성을 나갔다. 대부 유엽이 조비를 보고 일깨워주듯 말했다.

“이제 손권이 와서 스스로 항복한 것은 촉병의 세력이 큼을 보고 두려워진 까닭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촉과 오의 싸움은 하늘이 그들을 망하게 하려는 것인 바, 폐하께서는 이때를 놓치지 마시고 상장한 사람을 뽑아 군사 수만을 이끌고 강을 건너 오 를 치도록 하십시오. 촉은 밖에서 치고 위는 안에서 치면 오나라는 보 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가 망하면 촉도 외로 워 도모하기 쉬울 것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손권이 이미 예를 갖춰 짐에게 항복했는데도 짐이 그를 친다면 천하 사람들이 짐에게 항복하려는 마음을 해치게 될 것이오. 그대로 항복을 받아들여줌만 못할 듯하오.”

조비가 그렇게 대꾸했다. 그래도 유엽은 미덥지 않은지 다시 권했다.

“손권이 비록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다 하나 그의 벼슬은 기껏 이미 망해버린 한의 표기장군 남창후에 지나지 않습니다. 벼슬이 낮 으면 기세가 약해지고, 중원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나 이제 왕위를 내리시면 달라집니다. 왕이라면 폐하보다 겨우 한 계단 아래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의 거짓 항복에 속아 그 벼슬을 높이고 봉토를 늘려주는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짐은 오나라도 돕지 않고 촉도 돕지 않을 것이오. 오와 촉이 군사를 내어 싸우는 걸 보고 있다가 만약 하나가 망하고 하나만 남으면 그때에야 군사를 낼 작정이오. 하나 남은 걸 없애는 게 무에 어렵겠소?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더 이러니저러 니 말하지 마시오.”

조비는 그렇게 유엽의 입을 막고 태상경 형정을 불러 조자와 함 께 오로 가도록 했다. 손권을 오왕에 봉하고 구석을 더한다는 조서 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손권은 위로 조자를 보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연일 백관을 불러놓고 촉병을 막을 의논을 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위(魏) 조비가 자신을 왕에 봉한 다는 조서와 함께 사자를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마땅히 멀리 나가 맞아들여야 할 사자라 그 채비를 하려는데 고 옹이 손권을 말렸다.

“주공께서는 지금도 상장군 구주백(九州伯)을 떳떳이 내세우고 계 십니다. 한을 찬탈한 위제에게서 새삼 봉작을 받을 까닭이 어디 있 습니까?”

“옛적 패공(公) 유방도 항우가 주는 봉호를 받은 적이 있소. 모 두가 그때그때 형편에 따른 것인데 구태여 주겠다는 봉호를 마다할 까닭도 없지 않소?”

손권은 속 좋게 고옹의 말을 받아넘긴 뒤 백관을 이끌고 성을 나가 조비가 보낸 사자를 맞았다.

형정은 손권이 몸소 성 밖까지 나와 자신을 맞아주자 위나라의 사신으로 은근히 으스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수레가 성문을 들 어섰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아니꼬운 꼴을 참지 못한 장소가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예는 공경함이 없어서는 아니 되고 법은 엄숙함이 없으면 아니 된다. 너는 감히 스스로를 높고 크게 여겨 거들먹거리는데, 강남에 는 그런 너를 벨 칼 한자루도 없는 줄 아느냐.”

그제서야 놀란 형정은 급히 수레에서 내려 손권을 보았다. 손권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그런 형정과 수레를 나란히 하고 성안으로 들 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수레 뒤에서 문득 한 사람이 목놓아 울며 말했다. 

“우리가 주공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몸을 바쳐 위를 아우르고 촉을 삼켜야 했건만 그러지 못해 이런 꼴을 보게 되는구나. 주공으 로 하여금 남의 봉작을 받게 하니 이 얼마나 욕된 일이냐!”

여럿이 그쪽을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서성이었다. 이래저래 정신이 번쩍 든 형정은 속으로 가만히 감탄했다.

‘강동의 장수와 벼슬아치들이 모두 이러하니 오래 남의 밑에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런 여러 가지 소동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기쁜 듯 조비가 내린 왕호를 받았다. 그리고 문무 관원들의 하례가 끝난 뒤에는 좋은 옥 과 아름다운 구슬 따위로 예물을 갖추어 사은의 뜻을 전할 사신까지 조비에게 보냈다. 실로 굽히고 젖히는 일에 능한 수성(守)의 명인다웠다.

하지만 그걸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꺼진 것은 아니었다. 오 래잖아 풀어놓은 염탐꾼들이 달려와 급한 소식을 전했다.

“주 유비는 본국의 대병에다 만왕(王) 사마가(沙摩)의 번 병(兵) 수만과 동계(洞溪)에 있던 한나라 장수 두로(杜路), 유녕(劉 寧)의 두 갈래 군사까지 합쳐 물과 뭍 두 길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가운데 물길로 온 적군은 이미 무구(巫 口)에 이르렀고, 뭍으로 오는 적군은 이미 자귀歸)에 이르렀다 합 니다.”

조비가 비록 왕호는 내렸으나 정작 필요한 군사를 움직여주지 않 으니 손권은 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문무 관원들을 불 러 모아놓고 물었다.

“병의 세력이 그토록 크다 하니 이제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러나 관원들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말없이 서로 쳐 다보기만 했다. 답답해진 손권이 큰 소리로 탄식했다.

“주랑()이 죽은 뒤에는 노숙이 있었고, 노숙이 죽은 뒤에는 여 몽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여몽이 죽고 나니 나와 걱정을 나눌 사람 은 아무도 없구나!”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소년 장수가 뛰어나오며 분연히 소리쳤다.

“신이 비록 나이 어리나 약간의 병서를 읽었습니다. 바라건대 제게 군사 몇만만 주신다면 나아가 병을 쳐부수겠습니다.”

손권이 보니 손환(孫桓)이었다. 손환의 자는 숙무(武)로 그 아비의 이름은 하였다. 원래 유씨(兪氏)였는데 손책이 그를 몹시 사 랑하여 손씨(孫氏) 성을 내렸으므로 모두 일가처럼 여겼다.

손하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손환은 그 맏이였다.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익혀 언제나 손권을 따라 싸움터를 누비며 여러 가지 놀라운 공을 자주 세웠다. 벼슬은 무위도위(武衛都尉)로 그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손권은 반가우면서도 미덥잖아 물었다.

“너는 어떤 계책으로 이기겠느냐?”

“제게는 좋은 장수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이(李異)요 하나는 사 정(謝)인데, 둘 다 만 명을 당해낼 만한 용맹이 있습니다. 제게 군 사 몇만만 딸려주시면 그 둘과 더불어 나아가 유비를 사로잡아 오겠 습니다.”

손환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손권이 그래도 마음 놓이지 않는지 바 로 허락하지 않았다.

“조카가 비록 영용하다 해도 나이가 너무 없다. 따로이 나이든 장 수가 곁에서 도와야만 될 것이다.”

손권이 그렇게 말하자 호위장군(虎威將軍) 주연이 나섰다.

“바라건대 신을 작은 장군님과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힘을 합쳐 유비를 사로잡아보겠습니다.”

그제서야 손권도 출병을 허락했다. 수륙의 군사 오만을 골라 내어주며, 손환은 좌도독이 되고 주연은 우도독이 되어 그날로 나아가게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먼저 병의 움직임을 살피러 보냈던 군사가 되돌아와 손환에게 알렸다.

“병이 이미 의도에 이르러 진채를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환은 이만 오천 군마를 이끌고 의도 언저리로 가 영채 셋을 나누어 세우고 병에 맞섰다.

한편 장 오반은 선봉이 되어 서천을 나온 뒤로, 이르는 곳마다 모두 스스로 항복해 오는 바람에 칼에 피를 묻힐 것도 없었다. 그러 다가 의도에 이르러서야 손환이 이끄는 오병을 보고 얼른 선주에게 그걸 알렸다.

이때 선주는 자귀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성부터 먼저 냈다. “손환 따위 어린것이 어찌 감히 짐에게 맞서려 든단 말이냐!” 그러자 곁에 있던 관흥이 아뢰었다.

“이왕에 손권이 어린애를 장수로 뽑아 보냈으니 폐하께서도 굳이 대장을 골라 보내실 게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보내 그 어린것을 사로잡아 오도록 해주십시오.”

“좋다. 짐은 진작부터 너의 씩씩한 기상을 보고 싶었다.”

선주도 기꺼이 허락하고 관을 먼저 보냈다. 관훙이 선주에게 절 하고 막 떠나려는데 장포가 뛰어나오며 졸랐다.

“역적을 치려고 이왕에 관흥을 먼저 보내시기로 하셨다면 신도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두 조카가 나란히 앞장을 선다면 매우 뜻있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삼가고 조심하여 그르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선주도 기꺼이 허락했다. 이에 두 사람은 선주에게 엎드려 절하고 나란히 선봉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손환은 촉의 대군이 이르렀단 말을 듣자 여러 진채의 군사를 모 두 합쳐 맞싸우러 나왔다. 양쪽 군사가 둥글게 맞서 진세를 이룬 가 운데 손환이 먼저 나섰다. 이이, 사정 두 장수를 거느리고 문기(門) 아래 서서 촉군의 진채를 바라보니 한꺼번에 장수 둘이 나란히 말을 몰아 나오는 게 보였다. 둘 다 은투구 은갑옷에 흰 전포 입고 흰 깃 발을 앞세운 채였다. 약간 앞선 것은 장포로 한 길 여덟 자의 정강으 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고, 그 뒤의 관훙은 큰 칼을 차고 있었다. 

“손환, 이 더벅머리 어린 놈아.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아직도 감히 천병(天兵)에게 맞서려 하느냐!”

장포가 손환을 보고 크게 소리쳐 꾸짖었다. 손환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네 아비가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는데 이제는 또 네가 와서 죽여 달라고 아우성이로구나. 너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모 르느냐?”

그 소리를 들은 장포는 분노로 두 눈이 뒤집혔다. 대꾸고 뭐고 없 이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박찼다. 손환의 등 뒤에 있던 사정이 달려 나가 그런 장포를 맞았다.

두 장수가 어울렸다 떨어지기를 서른 번쯤 했을 때 마침내 힘이 달린 사정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정이 달아나는 걸 본 이이가 급 히 말을 달려 나가 큰 쇠도끼를 휘두르며 뒤쫓는 장포를 막았다.

다시 장포와 이이의 싸움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둘 다 어지간해 스무 합이 지났으나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때 오군(吳軍)의 비장(裨將) 가운데 담웅(譚雄)이란 자가 있었다. 장포가 날래고 굳세 이이가 이겨내기 어려울 것 같자 슬며시 활을 들어 화살 한 대를 날 렸다. 화살은 바로 장포가 탄 말에 가서 꽂혔다. 아픔을 이기지 못한 말이 길길이 날뛰며 본진으로 돌아가다가 미처 진문에 이르기도 전 에 땅바닥에 쓰러졌다.

말이 쓰러지니 말등에 앉았던 장포가 성할 리 없었다. 땅에 떨어 져 말과 함께 뒹굴었다. 그걸 본 이이는 옳거니 했다. 급히 장포에게 로 말을 몰아가 큰 쇠도끼를 쳐들었다. 장포의 머리를 한 도끼에 쪼 개놓을 작정이었으나, 문득 한 줄기 붉은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먼저 땅에 떨어진 것은 그 자신의 목이었다.

이이의 목을 벤 것은 관흥의 큰 칼이었다. 관흥은 장포의 말이 화살을 맞고 되돌아오는 걸 보자 거기 탄 장포가 걱정돼 맞으러 나 갔다. 그러다가 이이가 뒤쫓아오는 걸 보고 한칼로 죽여 장포를 구 했다.

자기편 장수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오군이 흔들릴 것은 정한 이 치였다. 관흥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휘몰아 덮치니 손환은 그 기세를 막아내지 못했다. 한바탕 싸움에 크게 지고 북과 징을 울 려 군사를 물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손환은 어제의 패배를 씻으려는 듯 다시 군사 를 이끌고 나와 싸움을 걸었다. 관흥과 장포가 한꺼번에 손환을 맞 으러 나갔다. 그중에서도 관훙은 적의 우두머리 장수 손환을 보자 모든 걸 제쳐놓고 똑바로 그에게 덮쳐갔다.

손환 역시 크게 성을 내어 맞서니 곧 그 둘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손환은 관흥과 어울려 스무남은 합을 싸웠으나 아무래도 힘이 모자랐다. 곧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흥과 장포는 기세를 타고 그대로 오군의 영채를 들이쳤다. 그때 마침 장남, 풍습과 함께 오반이 대군을 이끌고 다시 오군을 덮쳤다. 그러잖아도 쫓기던 오군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사방으로 흩어 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바탕 싸움에 크게 이긴 촉의 장수들은 오군이 더는 보이지 않 자 비로소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런데 장수들 중에 유독 관흥이 보이지 않았다. 장포가 놀라 소리쳤다.

“안국, 관흥의 자)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나도 홀로 살아 있지 는 않으리라!”

그리고 급히 창을 잡고 말에 뛰어올랐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장포는 몇 리 가지도 않아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관흥을 보았다. 왼 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편 겨드랑이에는 사람을 하나 끼고 있었다. 

“그게 누구냐?”

장포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관흥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지럽게 싸우는 중에 바로 원수놈을 만났기로 이렇게 사로잡아 오는 길입니다.”

그 말에 장포가 사로잡혀 온 자를 살펴보니 바로 그 전날 적진 중 에서 몰래 활을 쏜 담웅이란 비장이었다. 장포는 기뻐하며 담웅을 데려가 목을 베고 그 피를 뿌려 죽은 말에 제사 지냈다. 그리고 사람 을 뽑아 선주에게 이긴 소식을 전해 올렸다.

한편 이이와 사정, 담웅 등의 장수와 수많은 군사를 잃고 쫓겨간 손환은 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힘은 다하고 도우러 오는 자기편도 없어 촉병을 막을 힘이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급히 손권에게로 사람을 보냈다. 새로이 장졸을 보내 어려움에서 구해주기를 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오군의 속사정을 눈치 챈 촉의 장수 장남과 풍습이 오반에게 말했다.

“지금 오나라 군사들은 싸움에 져서 기세가 몹시 움츠러들어 있 습니다. 그 진채를 갑자기 들이쳐 흩어버리기에 꼭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오반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대 꾸했다.

“손환이 비록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주연이 이끈 수군은 강물 위에 영채를 엮고 있어 한 사람도 꺾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손환의 진채를 급습하러 간 사이에 주연의 수군이 뭍에 내려 우리가 돌아갈 길을 끊어버린다면 어찌하겠는가?”

“그거야 아주 쉽지요. 관흥과 장포 두 장군에게 각기 군사 오천을 이끌고 산골짜기에 숨어 있게 하시면 됩니다. 만약 주연이 손환을 구하러 오면 양쪽에서 뛰쳐나가 들이치게 하십시오. 승리는 어김없 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장남이 걱정 없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오반도 조금 마음이 움직였다. 장남의 계책에다 자신의 계책을 하나 더 보탰다. 

“먼저 군사 몇을 거짓으로 항복시켜 주연에게 우리가 손환의 진 채를 들이치리라는 걸 알려주는 게 좋겠네. 그래야 주연은 손환의 진채 쪽에서 불길이 솟기만 해도 바로 달려 나오지 않겠는가? 그때 숨어 있던 우리 편 군사가 들이친다면 모든 것은 절로 풀릴 것이네.”

그러고는 곧 그대로 일을 꾸몄다. 풍습과 장남은 자기들의 계책이 쓰이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오반이 시키는 대로 몫을 맡았다.

이때 강물 위의 주연도 손환이 싸움에 져서 많은 장졸을 잃었다 는 소식을 들었다.

얼른 군사를 내어 구하러 가려고 하는데 문득 한 떼의 병이 항 복해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주연은 그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너희는 무슨 까닭으로 항복하려 하느냐?”

“저희들은 풍습 아래서 싸우는 사졸들로 풍습이 상과 벌을 함부 로 하는데 못 견디어 특히 이렇게 항복하러 왔습니다. 아울러 은밀 히 알려드릴 것도 있습니다.”

항복해 온 병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게 말했다. 주연이 귀가 솔깃해 다시 물었다.

“알릴 것이라니 그게 무어냐?”

“풍습은 오늘 밤 오군의 허술한 틈을 타 손환의 진채를 갑자기 들 이치려고 합니다. 횃불을 드는 걸 신호로 삼고 있습니다.”

듣고 보니 매우 중요한 기밀이었다. 주연은 곧 사람을 보내 손환 에게 그 소식을 알리게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은 끝내 손환에게 전해질 길이 없었다. 길목에 미 리 숨어 있던 관흥이 그 심부름꾼을 잡아 죽여버린 까닭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연은 손환에게 사람을 보낸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여럿을 불러놓고 손환을 구해줄 의논을 시작했 다. 부장 최우(崔禹)가 나와 말했다.

“한낱 졸개들의 말을 깊이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조금이라 도 잘못되면 물과 물의 두 곳 군사가 모두 결단나게 되니 장군께서 는 다만 조용히 수채를 지키기만 하십시오. 제가 장군을 대신해서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주연도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그 말을 따라 최우에게 일 만 명을 주고 나가보게 했다.

그날 밤이었다. 풍습과 장남은 오반과 더불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눈 뒤, 똑바로 손환의 진채를 들이쳤다. 손환의 진채는 금세 불길 에 휩싸이고 거기 있던 군사들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제대로 싸워보 지도 않고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손환을 구하기 위해 수채를 떠난 최우는 갑자기 손환의 진채 쪽 에서 불길이 이는 걸 보자 마음이 급했다.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군 사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최우가 막 한군데 산굽이를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산골짜기 안에 서 함성과 북소리가 크게 일며 두 갈래 군사가 뛰쳐나왔다.

한쪽은 관훙이 앞장을 서고 다른 한쪽은 장포가 앞장을 섰는데, 양쪽 다 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 최우를 좌우에서 두들겼다.

최우는 깜짝 놀랐다. 비로소 속은 줄 알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 려는데 어디서 왔는지 장포가 벌써 앞을 가로막았다. 최우는 힘을 다해 장포에게 덤볐으나 어림없었다. 한 합을 넘기지 못하고 장포에 게 사로잡혀버리고 말았다.

강물 위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된 주연은 급히 배를 물렸다. 오륙십 리나 달아나 겨우 배를 멈추고 남은 군사를 정돈했다.

한편 오반과 풍습, 장남의 야습으로 진채와 장졸 태반을 잃고 쫓기던 손환은 함성이 차츰 멀어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려 뒤따르는 부 장에게 물었다.

“앞으로 가면 어디에 성벽이 높고 양식이 넉넉한 곳이 있는가?” 

“이리로 똑바로 가면 북쪽에 이릉성(城)이 있습니다. 잠시 군 사를 머무르게 할 만한 곳입니다.”

그 부장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에 손환은 싸움에 져 얼마 남지 않 은 군사를 이끌고 이릉성으로 달아났다.

손환이 겨우 이릉성을 차지해 들어앉기 바쁘게 오반이 이끈 촉군 이 벌써 성 밖에 이르렀다. 촉군이 그대로 성을 에워싸고 들이치니 손환은 더욱 딱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다른 한 갈래 촉군은 최우를 사로잡은 장포, 관흥과 더불어 선주 가 있는 자귀로 돌아갔다. 선주는 몹시 기뻐하며 사로잡은 최우를 목 베 장졸들의 기세를 돋워주는 한편 삼군에 흠뻑 상을 내려 그 공 을 치하했다.

큰소리 치고 나갔던 손환과 주연이 모두 볼품없이 쫓기고 많은 장수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남의 장수들 치고 간담이 서늘하 지 않은 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강남의 산과 들이 모두 선주와 촉군의 위세에 벌벌 떨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구해주기를 바라는 손환의 사자가 손권에게 이르자 손권 또한 크 게 놀랐다. 곧 문무의 관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물었다.

“지금 손환은 이릉에서 고단한 처지가 되어 있고 주연도 강물 위 에 있으면서 대패해 몇십 리를 쫓겨났다 하오. 촉군의 세력이 그처럼 크니 이제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장소가 일어나 말했다.

“이제 많은 옛 장수들이 죽어 없어졌다 하나 아직 우리에게는 여 남은 명의 좋은 장수들이 남아 있습니다. 유비 따위를 두려워할 게 무엇 있겠습니까? 한당을 대장으로 삼으시고, 주태를 부장으로 삼으 시며, 반장을 선봉으로 세우고, 능통에게 뒤를 맡기신 다음, 감녕으 로 하여금 부족한 곳을 메우게 하시면 넉넉합니다. 그들에게 십만 군사를 주어 유비와 맞서도록 명하십시오.”

싸움에는 잘 나서지 않는 장소답지 않게 씩씩한 말이었다. 손권은 그 말에 따라 모든 장수들에 영을 내리고 그날로 떠나가게 했다. 이 때 감녕은 이질을 앓고 있었으나 일이 급하니 병든 몸으로나마 나서 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