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9화 : 옛 맹세를 어찌할거나
옛 맹세를 어찌할거나
결국 관공은 의리와 자부심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거룩한 순사(死)였다. 어리석음, 고집, 미련스러움, 맹목, 어쩌면 현대인들은 그 죽음에서 그런 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나 그 왜소한 말들이 관공의 무엇 하나를 다칠 수 있으랴.
관공이 사로잡힐 때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함께 마충에게 사로 잡혔다. 마충은 그 말을 손권에게 바쳤으나 손권은 관공을 죽인 뒤 마충에게 그 말을 도로 내주었다. 마충은 그 말을 받아 뽐내며 타고 다녔다. 하지만 그 말은 어찌 된 셈인지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마시 지 않다가 며칠 뒤 끝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관공의 충의가 그 말에도 옮은 것이라 여겨 한결같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관공이 죽던 날 아침 맥성에 남겨졌던 왕보는 까닭 없이 뼈가 쑤시고 살이 떨렸다. 거기다가 꿈자리도 사납기 그지없어 마음이 어수 선해 하던 나머지 주창을 불러놓고 말했다.
“어젯밤 꿈에 관공께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계신 걸 보았소. 급하게 그 까닭을 묻다가 갑자기 놀라 잠에서 깨었는데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모르겠구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사 하나가 헐떡이며 뛰어 들어와 알렸다.
“동오 군사들이 성 밖에다 관공 부자의 목을 걸어놓고 항복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왕보와 주창이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성 밖에 걸린 것은 정말로 관공과 관평의 목이었다.
그걸 본 왕보는 눈앞이 캄캄했다. 절망과 분노를 못 이기고 성벽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창도 아뜩하기는 마찬가 지였다. 왕보가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걸 보고 칼을 뽑아 제 목을 찔렀다.
왕보와 주창이 차례로 목숨을 끊자 남은 군사들은 더 망설일 게 없었다. 성문을 활짝 열고 적병을 맞아들이니 그로써 맥성마저 동오 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한을 품고 죽은 관공의 혼령은 쉽사리 흩어지지 아니했다. 드넓은 허공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한곳에 이르니 형문주州)당양현이었다.
그곳에는 옥천산(玉泉山)이란 이름난 산이 있고 그 산에 늙은 중이 한 사람 살고 있는데 이름을 보정(普)이라 했다.
전에 사수관 진국사(鎭國寺)에 장로로 있으면서 관공을 구해준 적이 있는 바로 그 스님이었다.
관공을 도와준 일로 진국사를 떠난 보정은 구름처럼 천하를 떠돌 다가 그곳에 이르렀다. 산이 밝고 물이 빼어남을 본 그는 그 산 중턱 에 풀로 암자 하나를 얽고 좌선하며 도를 닦았다.
어린 행자(行)하나가 시중 들어주어 그럭저럭 지내고 있던 어 느 날이었다.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삼경이 넘도록 좌선을 하고 있 는데 문득 공중에서 사람의 외침이 들려왔다.
“빨리 내 목을 내놓아라!”
놀란 보정이 가만히 소리나는 곳을 올려다보니 거기 어떤 장수 하나가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비껴든 채 서 있었다. 왼편에는 얼 굴이 흰 장수요, 오른편에는 검은 메기수염을 기른 장수가 따르는 데, 모두가 옥천산 꼭대기에 걸려 있는 구름 위였다.
한눈에 그게 관공인 줄 알아본 보정은 터리개로 문을 두드리며 관공을 청해 들였다.
“관공은 어디 계시오?”
관공의 혼령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곧 말에서 내리더니 바람을 타고 암자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팔을 엇갈리게 하여 가슴에 모 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스님은 어떤 분이시오? 바라건대 법호(法號)를 일러주시오.”
목을 잃은 혼령이라 보정을 못 알아보는지, 서로 만난 지 오래되 어 얼굴조차 잊었는지 그렇게 물어왔다. 보정이 가만가만 대답했다.
“이름은 보정이외다. 지난날 사수관 앞 진국사에서 군후를 뵈온 적이 있지요. 그런데도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
그제야 관공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연하게 말했다.
“그때 구함을 받았는데 어찌 잊었을 리 있겠소이까? 그러나 나는 이미 화를 입어 죽은 몸이외다. 바라건대 밝은 가르치심을 내리시어 길 잃고 헤매는 이 몸을 이끌어주시오.”
보정은 아직 관공의 혼령이 이승에서의 한을 잊지 못해 중천을 떠돌고 있음을 알았다.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설법 섞어 타일렀다.
“지난날은 이제가 아니니 일절 말하지 말 것이며, 뒷일은 앞에 이 미 그 까닭이 있었음이니 서로 따지지 않는 게 옳습니다. 이제 장군 께서는 여몽에게 화를 입으시고 머리를 돌려달라고 소리치시나, 그 렇다면 안량과 문추며 저 오관의 여섯 장수는 누구에게서 머리를 찾 아야 하겠습니까? 바로 장군께 목을 잃은 더 많은 사람들은 어찌하 시겠습니까?”
그러자 관공의 혼령은 원통한 가운데도 문득 깨닫는 게 있는 듯 했다. 머리를 수그려 불법에 귀의하는 뜻을 나타내고 말없이 사라졌 다. 하지만 보정에게서 얻은 그날의 깨우침이 고마운지 관공은 그 뒤로도 종종 옥천산에 모습을 드러내 그곳 백성들을 보살펴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관공의 은덕에 감사해 그 산꼭대기에 사당을 짓고 사 철 제사를 드렸다.
한편 손권은 오랜 걱정거리이던 관공을 죽인 데다 형주와 양양의 넓은 땅을 독차지하고 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삼군에게 고루 상을 내리고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인 다음, 크게 잔치를 열어 장수들의 공을 치하했다. 공이라면 아무래도 여몽이 으뜸이었다. 손권은 여몽을 높은 자리로 끌어올린 뒤 여럿을 보고 말 했다.
“나는 오랫동안 형주를 가지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제 손에 침 한번 뱉은 힘으로 형주를 얻게 된 것은 모두 여기 이자 명의 공이다.”
“그게 어찌 저 하나의 공이겠습니까? 여러 장수와 병졸들이 한마 음으로 힘을 다한 덕분입니다.”
여몽은 그렇게 겸손을 보이며 공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렸다. 손권 이 더욱 흐뭇하여 여몽을 추켜세웠다.
“지난날 주랑(郞)은 웅대한 재략(略)이 남보다 뛰어나 적벽에 서 조조를 쳐부수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죽어 나는 자경(敬, 노숙) 으로 그를 갈음할 수밖에 없었다. 자경도 여러 가지로 뛰어난 사람 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제왕에 이르 는 큰길을 일러주었고 둘째로는 조조가 쳐내려왔을 때 다른 사람은 모두 항복할 것을 내게 권했지만 그는 홀로 싸울 것을 고집했다. 내 가 주유를 불러들여 오히려 조조를 쳐부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실 로 그의 격려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 주도록 권한 흠이 있다. 거기 비해 이제 자명은 계책을 세우고 꾀를 내어 형주를 얻게 해주었다. 일찍 죽은 주랑이나 흠이 있는 자경보 다 훨씬 나은 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고는 한잔 가득히 술을 부어 여몽에게 내렸다. 여몽도 그제서야 더 사양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그 잔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뜻 아니한 일이 벌어졌다. 여몽이 입에 대려던 술잔 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느닷없이 손권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 눈 푸른 어린 놈, 붉은 수염 달린 쥐새끼야, 나를 알아보겠느냐?”
손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장수가 깜짝 놀랄 소 리였다. 하지만 여몽은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이 미 처 구하러 갈 틈도 없이 손권을 땅바닥에 메꽂고는 성큼 손권의 자 리를 차고 앉더니 부릅뜬 눈으로 손권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황건적을 쳐부순 뒤로 삼십여 년이나 천하를 거침없이 종 횡했다. 그런데도 네놈은 하루아침의 간사한 꾀로 나를 해쳤구나. 비 록 살아서 네놈의 고기를 씹지는 못했다마는 죽은 이제라도 여몽 이 도적놈의 넋은 데려가야겠다. 나는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운장이다.” 그 소리에 더욱 놀란 손권은 황급히 장수들을 이끌고 계단 아래 로 내려가 엎드렸다. 그러자 여몽은 갑자기 뒤로 자빠지더니 몸의 일곱 구멍으로 한꺼번에 피를 쏟고 죽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모든 장수들은 한결같이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아마도 이 일은 민간에 떠도는 관공의 전설을 『연의』를 지은 이가 그대로 받아들인 듯하다. 여몽이 형주를 차지한 뒤 얼마 안 돼 원래 부터 시달리던 병이 도져 죽자 생겨난 민간의 수군거림이 부풀려져 이루어진 전설이었다.
손권은 여몽의 시체를 거두어 후히 장사 지낸 뒤 남군 태수에 잔 릉후(屠陵侯)로 봉하고 그 아들 여패(呂霸)로 하여금 아비의 벼슬을 잇게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관공을 죽인 일이 새삼 떨떠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공의 혼령이 자신에게도 무슨 해코지를 할까 봐 손권이 은근히 떨고 있을 때 건업에서 장소가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손권은 얼 른 장소를 불러들이고 마음에 켕기는 일을 털어놓았다. 듣고 난 장 소가 말했다.
“죽은 사람의 넋이 산 사람을 어찌할 수야 있겠습니까만, 주공께 서 이번에 관공 부자를 죽이신 일로 강동에는 머지않아 큰 화가 미 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유비와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을 때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유비는 서천의 대군 이 있는 데다 제갈량의 꾀와 장비, 조운, 마초의 용맹을 곁들였습니 다. 만약 유비가 관공이 죽은 걸 안다면 반드시 온 나라를 들어 군사 를 일으키고 원수 갚음을 하러 달려올 것입니다. 우리 강동에 그걸 막을 만한 힘이 있을지 실로 걱정스럽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손권은 발을 구르며 뉘우쳤다.
“내가 계책을 그릇 썼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했 으면 좋겠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서천의 군사들이 우리 동오로 쳐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주도 바위 위 에 선 것처럼 든든할 것입니다.”
병 주고 약준다더니 장소가 바로 그랬다. 손권이 얼른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지금 조조는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범이 먹이를 노리듯 우리 화하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급하게 원수를 갚으려 들 면 반드시 조조와 먼저 손을 잡을 터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동오는 참으로 위태로워지고 맙니다. 먼저 사람을 보내 관공의 목을 조조에 게 갖다 바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유비로 하여금 이 일은 조조 가 시켜서 한 것임을 알게 하면 유비는 반드시 조조에게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서촉의 군사들이 동오로 오지 않고 위로 쳐들어 가게 만드는 계책입니다. 우리는 가운데서 그 형세를 보아 움직이면 되니 이 아니 좋은 계책이겠습니까?”
손권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곧 관공의 목을 나무상자에 담고 사 자에게 주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조에게로 달려가게 했다.
이때 조조는 마피에서 군사를 물려 낙양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오 에서 사자가 관공의 목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관운장이 죽었다 하니 이제 나는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자 계단 아래서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별로 기뻐하실 일이 못 됩니다. 이것은 동오가 화를 우리에게로 옮겨 씌우려는 수작일 뿐입니다.”
조조가 보니 그 사람은 주부 사마의였다. 조조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지난날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을 때 함께 살고 죽기로 맹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동오는 그 셋 중에 하나인 관공을 죽여놓고 그들이 원수 갚음을 두려워하여 관공의 목을 대왕께 바친 것입니다. 유비의 분노를 대왕께로 돌려 그가 동오를 치지않고 우리 위에게 덤벼들게 하려는 꾀지요. 저희는 가운데서 구경만 하다가 형세를 보아 움직이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제서야 조조도 깨닫는 게 있었다.
“중달의 말이 옳다. 어떻게 저들의 계책을 풀면 되겠는가?”
“그 일은 아주 쉽습니다. 대왕께서는 좋은 향나무로 관공의 몸을 깎게 하여 그 목과 더불어 관에 담고 대신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도 록 하십시오. 유비가 그걸 알면 손권에 대한 원한이 더 깊어져서 반 드시 힘을 다해 남쪽으로 쳐내려갈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가운데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촉이 이기면 오를 치고, 오가 이길 때는 촉을 치 면 됩니다. 그리하여 두 곳 중에 한곳만 얻게 되면 다른 한곳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마의의 그 같은 계책을 듣자 조조는 몹시 기뻤다. 곧 그대로 따 르기로 하고 동오의 사자를 불러들이게 했다.
사자가 들어와 관공의 목이 든 나무상자를 바치자 조조는 그 뚜 껑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관공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나 크게 다르 지 않았다. 조조가 문득 웃음을 띠고 관공의 목을 향해 물었다.
“운장은 그간 별일 없으셨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문득 머리뿐인 관공이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수염까지 올올이 곤두선 것이 그대로 조조에게로 뛰어오 를 것 같았다. 조조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뒤로 넘 어졌다. 곁에 있던 관원들이 눕혔다.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이 든 조 조가 여럿을 둘러보며 질린 듯 말했다.
“관장군은 참으로 천신(天神)이로구나!”
그때 오에서 온 사자가 다시 저희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관공이 남의 몸에 붙어 나타나 손권을 꾸짖고 여몽의 넋을 빼갔다는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조조는 더욱 겁이 났다. 소를 잡고 감주 를 떠 제사를 지내 관공의 원통한 넋을 달래는 한편 침향목(沈香) 을 구해 관공의 몸을 깎게 했다. 그리고 그 몸이 갖춰지는 대로 목과 함께 이어 좋은 관에 넣은 다음 왕후)의 예로 낙양 남문 밖에 장사 지내주었다.
장례가 있던 날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영구를 배웅하고, 조조는 스스로 절하며 제사를 맡아 했다. 관공에게는 다시 형왕(荊 王)의 칭호를 더하였고 그 묘소에는 따로이 관리를 뽑아 지키게 했 다. 오의 사자는 그 모든 절차가 끝난 뒤에야 강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관공의 장례에 얽힌 사 정이다. 죽은 관공의 목이 눈을 뜨고 입을 벌렸다는 것은 아마도 조 조의 후하기 짝이 없는 장례 때문에 생겨난 소문인 듯하다. 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때문에 도읍까지 옮기려 했던 조조가 죽어서 바쳐진 그 사람의 목에 그토록 큰 애도와 정중함을 보인 것은 어딘 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거기다가 여몽의 갑작스런 죽음에 얽 힌 신비한 풍문은 조조에게조차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하게 만 들 만했다.
그러나 조조 일생의 행적이나 관공에 대한 그의 유별난 애정으로 보면 그 장례는 조금도 지나칠 게 없다. 지난날 그는 유비를 찾아 자 기를 버리고 떠나는 관공에게조차 비단옷과 금붙이를 내리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들의 마지막 관계는 화용도에서 조조가 관공의 은 덕을 입은 것으로 끝나 있었다. 비록 양양과 번성의 일로 그 몇 달 시달렸다고는 해도, 조조는 그만한 도량은 있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럼으로써 유비의 칼끝을 손권에게 돌린다는 정치적 계산까지 곁 들여졌음에랴.
관공이 한을 품고 그렇게 죽어가는 동안 한중왕 유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잠시 알아보자. 한중까지 얻고 성도로 돌아간 유비가 여럿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고 오래지 않은 어느 날 법정이 문득 들 어와 말했다.
“주상(主)의 선부인(先夫人)은 돌아가시고, 다시 얻으신 손부인 (孫夫人)은 동오로 불려가버리신 뒤 아직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하지만 남녀가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은 인륜이라 비록 제왕이라도 폐 할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도 하루 빨리 왕비를 맞으시어 궁 안의 일 을 맡기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한중왕도 은근히 마음이 움직였다. 서천, 동천에 형 주까지 차지하고 나니 생긴 느긋함에서인지도 몰랐다.
“마땅한 사람이 있는가?”
“오의(吳懿)에게 누이 하나가 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어질다는 소 문입니다. 일찍이 상을 보는 이에게 보였더니 장차 매우 귀하게 되 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에 유언의 아들 유모(劉瑁)에게로 시집 갔지만 유모가 일찍 죽어 아직껏 홀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왕께 서 맞아들이시어 왕비로 세우도록 하십시오.”
법정이 미리 살펴둔 듯 그렇게 대답했다. 한중왕이 문득 달갑잖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유모는 나와 같은 유씨외다. 도리에 맞지 않은 듯하오.”
그러자 법정이 옛일을 들추어 말했다.
“혼인에 있어 그 가깝고 을 따진다면 진문공(文公)과 회영)의 일보다 더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진문공이 진목공(秦穆公)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조카며느리가 되 는 회영과 결혼한 일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유언과는 성만 같을 뿐 촌수도 따지기 힘들 만큼 먼 피붙이인 데 다 법정이 옛 왕실의 혼인까지 들먹이자 한중왕도 마침내는 오씨를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했다. 오(吳)부인은 뒷날 두 아들을 두게 되는 데 맏이가 유영(劉永)이요 둘째가 유리(劉)이다.
왕비를 맞아 궁궐 안의 일을 맡기자 촉의 왕실은 더욱 안정이 되었다.
동서 양천(川)은 백성들이 평안하고 나라는 넉넉한 데다 논밭의 곡식까지 풍년을 이루니 바야흐로 태평성대가 열리는 듯했다. 하루는 형주에서 사자가 달려와 알렸다.
“동오에서 관공께 구혼을 했으나 관공께서는 한마디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공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한중왕 유비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형주가 위태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 형주를 다스리게 하고 관공은 불러들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관공이 앞뒤로 적을 맞게 될 것을 내다본 공명의 말에 유비도 적이 걱정이 되었다. 누구를 대신 보낼까를 상의하고 있는데 관공이 싸움에 이겼다는 전갈이 잇달아 들어왔다. 한 싸움에 양양을 빼앗았 으며 번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침저녁이라는 식이었다.
걱정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겼다는 전갈이 꼬리를 이으니 유비도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다시 관흥이 와서 알렸다.
“아버님께서는 조조가 보낸 일곱 갈래의 대군을 쳐부수셨을 뿐만 아니라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목 베셨습니다.”
실로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 았다. 다음 날 다시 관공서 사자가 와 알렸다.
“관공께서는 장강을 따라 봉화대를 세워 동오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하고 계십니다. 또 반준을 다시 뽑아 보내 형주를 한층 엄히 지 키게 하셨습니다.”
공명과 유비의 걱정을 모두 앞질러 방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에 유비도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유비가 공연히 몸이 뒤틀리고 살이 떨려 앉아도 서도 편치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밤이 되어도 잠을 이 룰 수가 없어 촛불을 밝혀두고 책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 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희미해져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한 줄기 찬바람이 불며 촛불이 꺼질 듯 깜박였다.
유비가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등불 아래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너는 누구기에 이 깊은 밤에 내 방으로 들어왔느냐?”
유비가 놀라 그렇게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게 괴이쩍어 몸을 일으킨 유비는 촛대 곁으로 가서 보았다. 관공이 얼른 촛대 그늘로 숨는 게 보였다. 더욱 괴이쩍게 여긴 유비가 물었다.
“아우는 그동안 별일 없었는가? 밤이 깊은데 이렇게 찾아온 걸 보 니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대와 나는 형제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피하는가?”
그러자 관공이 울며 유비에게 빌었다.
“형님, 부디 군사를 크게 일으키시어 이 아우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불어온 한 줄기 음습한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유비가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런 유비의 귀에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예사 꿈이 아니라고 느낀 유비는 곧 침 전을 나가 사람을 불러 일렀다.
“가서 군사를 모셔오너라.”
부름을 받은 공명이 자다 말고 유비에게로 달려왔다. 유비는 공명 에게 꿈에 본 걸 자세히 알려주고 그 뜻을 풀어보게 했다.
“주상께서 너무 깊이 관공을 생각하시다 보니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허황된 꿈을 가지고 무얼 그리 걱정하십니까?”
공명이 당치 않다는 듯 유비의 말을 받았다.
“아니오, 꿈이라도 이건 너무 괴이쩍소이다. 거기다가 낮 동안도 자꾸 몸이 뒤틀리고 살이 떨려 아무래도 진정할 수가 없었소.”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걱정하는 빛을 거두지 못했으나 공명은 거듭 좋은 말로 꿈을 풀이해 유비를 달랬다.
유비가 겨우 진정하는 모습을 보고 물러난 공명이 중문(中門)밖 에 이르렀을 때였다. 허정이 거기서 기다리다가 공명을 보고 말했다.
“군사의 부중으로 한 가지 기밀을 말씀드리러 갔다가 군사께서 입궁하셨단 말을 듣고 여기서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기밀이라니? 무슨 기밀이 날도 새기 전에 내게 알려야 할 그런것이 있소?”
공명이 그렇게 물었다.
“큰일났습니다. 내가 들으니 동오의 여몽이 형주를 들이쳐 빼앗고 관공께서는 이미 해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먼저 승상께 몰래 알리고 의논하려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그제서야 공명도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허정의 말을 받았다.
“실은 나도 관공이 이미 죽음을 당한 걸 알고 있었소. 어젯밤 천 상(天象)을 보니 장성(將) 하나가 형), 초(楚) 땅 쪽으로 떨어지 더구려. 그러나 주상께서 지나치게 상심하실까 봐 아직도 감히 말씀 드리지 못했소.”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 싶은 것은 관공의 죽음에 대한 공명의 도다. 『삼국지』 전편을 통해 보이는 공명의 귀신 같은 통찰력이 딱 한곳 힘을 못 쓰는 데가 형주와 관공의 운명에 관한 쪽이었다.
공명 정도의 헤아림이라면 관공이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고 오와 는 굳은 결속을 유지해야 되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런데도 공명은 오히려 조조가 서천을 넘보게 하지 않기 위해서란 명 목으로 관운장에게 먼조 조조를 치게 했다. 만약 그게 전략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공명은 당연히 관공의 등 뒤를 지켜주어야 했다. 오와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취할 수 없으면 서천의 군사라도 보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공명은 그 어느 쪽도 애쓴 흔적이 없었다.
유봉과 맹달이 관공의 곤경을 외면한 것도 단순히 그들의 사감(私 感) 때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유봉에게는 그런 대로 관공의 곤경 을 외면할 구실이라도 있지만 맹달은 그런 게 없는데도 오히려 앞장 서 관공을 구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지키고 있던 상용은 형 주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공명이 만약 형주와 서천을 묶어 천하통일 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면 바로 그 두 곳을 묶는 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땅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조조를 막는 것보다도 관공의 뒤 를 도와주는 것이 더 큰 역할일 수도 있었건만, 도움은커녕 구원조 차 외면해버렸다.
맹달은 일생에 세 번이나 주인을 바꾸고 네 번째 다시 바꾸려다 끝내 사마의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일 수록 세력을 잘 가늠하고 눈치가 빠르다. 그런 그가 아무런 사감 없 이 관공의 위급을 외면한 것은 틀림없이 그래도 괜찮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인데, 그게 바로 공명의 존재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공 명이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관공을 도와주는 걸 그리 기뻐하 지 않으리라고 이 눈치 빠른 인물이 단정했다 해서 큰 무리는 아니 었다.
저 남양의 초당에서 유비를 따라나선 이래 공명이 가장 힘겹게 맞서야 했던 내부의 경쟁자는 관공이었다. 적벽 싸움을 앞뒤로 해서 그들의 불화는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다가 화용도에서 관공이 조조를 놓아준 일로 주도권은 공명에게 돌아가지만, 그동안에 엉킨 감정의 응어리는 둘 모두에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서천을 차지할 때 그토록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끝내 관공을 불 러들이지 않은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공명 은 중요한 싸움이 있을 때마다 관공을 들먹여 장수들을 분기시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가 관공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아니 그 이상 관공 없이도 서천을 얻어 보여 오랜 세월에 걸친 관 공의 공적을 뛰어넘음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려 함이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관공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잇달아 이기고, 봉화대를 세워 형주의 방비를 빈 틈 없이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유비가 그토록 무력하게 관공의 몰락을 방관하게 된 데도 의심스런 구석이 있다.
설령 세밀하지 못한 유비가 마음을 놓았다 하더라도 공명이 끝내 그걸 일깨워주지 않은 것은 좀 지나치다. 그 뒤의 어떤 시대도 그 시 대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할 만큼 삼국시대의 정치의식은 높았고, 전 략전술도 발달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공명 또한 『연의에서 과장되 고 있는 것만큼의 신통력이 아니더라도 여몽이 구사한 전략전술의 가능성을 걱정할 만큼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동오 내부의 반(反)유비파를 잘 알고 있었고, 더 구나 관공이 손권의 청혼을 모욕적인 말로 거절한 걸 걱정한 적까지 있으면서도 몇 마디 소식만 듣고 마음을 놓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석 연치 않다.
유비가 관공의 뒤를 든든히 지켜주지 못한 원인으로 조조와의 싸움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후연의 원수를 갚으러 왔 던 조조가 장안으로 되돌아간 게 오월(건안 24년)이고 관공이 곤경에 빠진 것은 시월이었다.
곧 서천과 한중을 차지하고 다섯 달이나 여유가 있었던 셈인데, 유비는 그간 왕위에 오르고 왕비를 뽑고 하는 식의 내정에 허비했을 뿐 관공 걱정은 조금도 않고 있다. 제갈공명의 조장 또는 묵인 없이 는 어려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공명은 비록 관공이 그토록 참혹한 최후를 맞기를 바 라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떨어질 위험성에 대해 의외로 냉담했 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좀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번성 공략 에서 관우가 거둔 초기의 눈부신 성공에 고까웠던 나머지 그가 뻔 히 빠질 위태로움까지 강 건너 불 보듯 한 것이나 아니었던지 모르 겠다.
그러나 관공이 그렇게 험악한 끝장을 보자 공명도 당황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 와서 알리자니 자신의 불찰이 낯없고, 그렇다고 숨기자니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답답하여 허정을 잡고 어떻게 해 야 할까를 의논하고 있는데, 문득 문 안에서 한 사람이 나오며 소리 쳤다.
“그같이 끔찍한 소식을 가지고 공은 어찌 나를 속이려 드시오.”
공명이 놀라 그를 보니 바로 유비였다. 아무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를 않아 뜰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공명과 허정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은 듯했다. 깜짝 놀란 공명과 허정이 입을 모아 말했다.
“방금 한 말은 모두가 뜬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깊이 믿을 게 못되니 주상께서는 부디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고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나와 운장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도 유비는 그렇게 다짐하듯 말했다. 공명과 허정이 갖은 말로 그런 유비의 근심을 풀어주고 있는데 다시 근시 하나가 와서 알렸다.
“마량과 이적이 와서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얼른 그 둘을 불러들이고 물었다.
“답답하다. 형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자 두 사람은 형주의 사정을 자세히 말하고 구해주기를 바라 는 관공의 글을 올렸다. 가느라고 갔건만, 걸음이 더뎠는지 길이 막 혔는지 그들도 아직 관공이 죽은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관공이 살아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반가워 유비가 막 그 글을 뜯어보려는데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방금 요화가 이르렀습니다.”
“어서 들게 하라.”
유비가 까닭 없이 불길한 느낌으로 서둘러댔다. 요화가 주르르 달 려들어와 엎드려 통곡하며 맥성의 위급함과 유봉, 맹달이 군사를 내 구해주지 않은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렇다면 내 아우는 그대로 끝장이란 말이냐!”
유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공명이 얼른 나서서 때늦은 열성을 보였다.
“유봉과 맹달이 그러했다면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앞장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형주를 구하고 그 둘을 잡아오겠습 니다.”
이미 천상을 보아 관공이 죽었음을 알고 있는 공명으로서는 아무 리 해보는 소리라 해도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유비가 울며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운장이 죽는다면 나도 결코 홀로 살아남아 있지는 않을 것 이오! 내일 내 몸소 일군(軍)을 이끌고 가서 운장을 구해내겠소!”
그러고는 한편으로 낭중(中)에 사람을 보내 장비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널리 군마를 모으게 했다.
하지만 날이 밝기도 전에 다시 엄청난 소식이 들어왔다.
“관공 부자분께서는 밤에 맥성을 빠져나가 임저로 가시다가 오병 (吳兵)에게 사로잡히셨다고 합니다. 손권은 관공을 달래 제 사람으 로 만들려 했으나 관공은 끝내 절개를 지켜 아드님과 함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유비는 무언지 모를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한중왕 유비가 쓰러지자 놀란 관원들이 달려가 그를 부축해 안으 로 들였다. 한참 뒤에야 정신이 돌아온 유비에게 공명이 권했다.
“주상께서는 부디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십시오. 예부터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다 명에 달린 일이라 했습니다. 관공은 평소 성격이 너무 굳세고 스스로를 높게 여기는 데가 있어 오늘 이런 화를 입게된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먼저 옥체를 돌보신 다음 천천히 원수 갚 음을 꾀하도록 하십시오.”
“나와 관장 두 아우는 도원에서 의를 맺고 함께 죽고 살기를 맹 세했다. 이제 운장이 이미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 어떻게 부귀를 누 린단 말인가!”
유비가 그렇게 말하는데 관흥이 울며 달려 나왔다. 그걸 본 유비 는 다시 기혈이 뒤집혀 한소리 큰 외마디와 함께 혼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여러 관원들이 부축해 정신을 되찾았으나 유비의 슬픔은 끝간데를 몰랐다. 울다가 혼절해 쓰러지기를 하루에도 너댓 번, 사 흘이 되어도 물 한 방울, 미음 한 숟갈 입에 담지 않았다. 피눈물을 쏟는다더니 유비가 바로 그러했다. 옷자락이 눈물로 젖는데 점점이 피가 얼룩졌다.
보다 못한 공명과 여러 벼슬아치들이 갖은 말로 유비를 위로해 그 울음을 그치게 했다. 마침내 유비는 눈물을 거두었으나 한 맺힌 소리로 맹세하기를 잊지 않았다.
“내 결코 동오와 더불어 함께 해와 달을 이지 않으리라!”
그런 유비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여 공명이 방금 들어온 소식을 알렸다.
“동오가 관공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으나 조조는 오히려 관공을 왕후의 예로 장사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조조가 그랬다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오. 왜 그랬겠소?”
유비가 의심쩍다는 듯 눈을 번쩍이며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본 것처럼 대꾸했다.
“동오가 조조에게로 화를 떠넘기려 한 꾀를 조조가 알아차린 까 닭입니다. 관공을 후하게 장사 지내줌으로써 주상의 원한을 동오에 게로만 쏠리도록 한 것이지요.”
“어쨌든 동오는 내 아우를 죽였으니 용서할 수 없소. 나는 곧 군 사를 일으켜 동오에게 그 죄를 묻고 이 한을 씻을 것이오!”
유비가 자르듯 말하고 곧 군사를 일으키려 들었다. 공명이 그런 유비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지금 동오는 우리가 위를 치기를 바라고, 위는 우리 가 동오를 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우리가 다른 쪽과 싸 우는 틈을 타 가운데서 이득을 보려는 수작입니다. 이제 주상께서는 군사를 묶어 움직이지 않으시면서 관공의 장례나 치르십시오. 그러 다가 동오와 위가 싸우기를 기다려 움직이시면 관공의 원수 갚음은 물론 뜻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뒤따라 다른 벼슬아치들도 모두 공명을 거들었다.
“군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부디 한때의 진노로 천하 대사를 그르 치게 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군자의 복수는 백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말리니 유비도 마침내는 생각을 바꾸었다. 먼저 관공의 장례부터 치르기로 하고 서천의 높고 낮은 장수들에게 모두 상복을 입게 했다. 장례일이 되자 유비는 몸소 남문 밖으로 나가 초 혼제(招魂祭)에 술을 따르고 곡을 하는데 하루 종일 슬픈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삼십여 년 전 처음 관공을 만나던 날이며 도원에서 의를 맺어 형제가 되던 날의 일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그 뒤 함께 누비던 숱한 싸움터와 함께 떠돌던 여러 산하가 새삼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천하고 대세고 돌아볼 것 없이 그대로 동오로 달려가 원수를 갚 지 못하면 차라리 뒤따라 죽는 편이 더 견디기 나을 것만 같았다. 어 쩌면 유비가 일생 보인 흔한 눈물 중에서도 그때가 가장 진실된 눈 물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