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3화 : 치솟는 촉의 기세, 흔들리는 중원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3화 : 치솟는 촉의 기세, 흔들리는 중원


치솟는 촉의 기세, 흔들리는 중원

부도독으로, 왕랑을 군사(軍師)로 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때 왕 랑은 싸움터에 어울리지 않게도 나이 일흔여섯이었다.

조진이 이끌고 갈 군사는 동서의 경군(軍) 이십만이었다. 조진 은 사촌아우 조준을 선봉으로 삼고 탕구장군 주찬을 부선봉으로 삼 아 길을 떠났다. 그해 동짓달 어느 날의 일이었다. 조예는 몸소 서문 밖까지 나가 그런 조진을 배웅했다.

대군을 이위주 조예는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아 절월(節鉞)을 내리고, 곽회 를 끌고 장안에 이른 조진은 곧 위수를 건너 그 서쪽에 진 채를 세우고 왕랑, 곽회와 적을 물리칠 의논을 했다. 왕랑이 나서서 말했다.

“내일 우리 군사의 대오를 엄정히 하고 기치를 크게 벌여 세운 뒤 이 늙은이가 친히 나가 제갈량에게 몇 마디 해보겠소. 제갈량으로 하여금 손을 내밀고 항복하게 만들면 싸우지 않고도 촉병을 절로 물 러가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워낙 아는 게 많고 말 잘하는 왕랑이라 어찌 보면 될 듯도 싶었다. 이에 조진은 기꺼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 사경에 밥 지어 먹고 날 밝는 대로 대오를 갖추게 하라. 사 람과 말을 모두 위엄 있게 치장하고, 기치며 북과 피리도 격식을 갖 추어 벌여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공명에게 보내 다음 날 싸우자는 글을 보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양군은 기산(山) 아래서 마주 보고 진세를 벌 였다. 촉군이 보니 위병들이 자못 씩씩하고 굳세 보이는 게 하후무 가 거느리고 온 무리와는 달라 보였다. 그때까지는 조진이 뜻한 바 대로 된 셈이었다.

요란했던 양쪽의 북소리 피리소리가 그치자 위병들의 진 속에서 왕랑이 말을 타고 나왔다. 앞쪽에는 도독 조진이요, 뒤쪽에는 부도 독 곽회가 섰고, 선봉과 부선봉은 각기 진 모퉁이에 머문 채 나가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뜸되는 적장은 진 앞으로 나서라. 나와서 묻는 말에 답하도록 하라!”

위병 하나가 촉군 앞에 나와 소리쳤다.

그러자 촉군 쪽에서도 문기가 열리며 관흥과 장포가 말을 몰고 나와 좌우로 갈라섰다. 뒤이어 한 무리의 씩씩한 장수들이 줄을 나누어 서는가 싶더니 그 가운데로 한 대의 수레가 천천히 굴러 나왔다. 수레 위에 단정히 앉은 것은 공명이었는데, 언제나처럼 윤건 쓰 고 깃털부채를 들었다. 검은 띠에 흰 옷자락이 표표히 바람에 나부 끼는 듯했다.

공명이 가만히 눈을 들어 위진(魏陣)을 보니 진 앞에 세 개의 햇 별가리개가 놓여 있고 그 위의 큰 깃발에는 사람의 이름이 크게 씌 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수염 흰 늙은이가 앉았는데 이름을 보니 사 도 왕랑이었다.

‘왕랑은 반드시 말로 어찌해보려 들 것이다. 때를 보아 알맞게 대 응해나가야겠다.’

공명은 왕랑을 보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수레를 밀어 진 앞으로 나가게 한 뒤 위병 쪽에 자기가 나온 것을 알리게 했다. 

“한(漢)승상께서 사도(司徒)와 말씀을 나누시겠다고 하신다.” 

공명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그렇게 소리치자 왕랑도 말을 몰아 진 앞으로 나왔다.

공명이 수레 안에서 손을 모으자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 례했다. 이어 왕랑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공의 큰 이름을 들은 지 오래더니 오늘 다행히 이렇게 뵙게 되었 소이다. 공은 이미 천명을 알고 시무(時)를 헤아려보시면서 어찌 이같이 명분 없는 군사를 내시었소?”

그러자 공명이 낭랑한 목소리로 받았다.

“나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러 왔소. 어찌 우리 군사에게 명분이 없다 하시오?”

공명이 별로 말싸움을 피하려는 눈치가 없자 왕랑은 잘됐다 싶었다. 멋진 솜씨로 길게 늘어놓았다.

“하늘이 정한 운수는 변하게 마련이고, 천자의 자리도 바뀌기 쉬 워 덕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는 법이외다. 그게 자연의 이치라 할 수 있소. 먼저 지난 일을 돌이켜봅시다. 환제, 영제 이래 황건적이 크게 일면서 천하는 어지럽게 다투는 형국으로 변했소.

초평(平) 건안建) 연간에는 동탁이 역적질을 했고, 뒤를 이어 이각과 곽사가 다시 못된 짓을 했으며, 원술은 수춘에서 천자를 자 칭하고 원소는 업상(鄴上)에서 또한 그 위세를 자랑했소. 유표는 형 주에 버티고 있었으며, 여포는 범처럼 서주를 삼켰고, 도둑은 사방 에서 벌떼처럼 일어, 나라는 달걀을 쌓아둔 것같이 위태롭게 되고, 백성들의 목숨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지경으로 급박하게 되었던 것 이오.

우리 태조 무황제(武皇帝, 조조)께서는 그런 천하를 깨끗이 비질하 고 변두리 땅까지 모두 힘으로 바로잡으셨소. 그러자 백성들의 마음 은 그분께로 기울어졌고 온 나라는 그 덕을 우러르게 되었소이다. 우리 태조께서 제위로 나가신 것은 권세로 차지한 게 아니라 실로 하늘의 뜻이 그분께로 돌아간 것이오.

세조(世祖) 문제(文帝, 조비)께서는 문무에 거룩하시어 그 대통을 이으셨으며,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들의 마음에 합치어 순임금이 요임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듯 한의 제위를 물려받으셨소. 그래서 중국(中國)에 계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셨으니 이 어찌 하늘 과 사람의 뜻에 따른 것이라 아니할 수 있겠소?

공은 큰 재주를 지니고 큰 그릇을 갖추어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樂)에 견주시려 한다 들었소. 그러면서 어찌 그 같은 하늘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억지를 써서 거스르려 드시오? 어찌 온 세상 사 람들의 뜻을 저버리려 하시는 것이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 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逆者亡]’란 말을 듣지도 못하 셨소?

이제 우리 대위(魏)는 갑옷 갖춘 군사가 백만이요, 좋은 장수만 도 천 명이 넘소이다. 그런데 썩은 풀더미 위에 날아다니는 반딧불 같은 세력으로 어찌 하늘의 밝은 달에 맞서려 하시오? 공은 어서 창 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어던지며 항복해 봉후(封侯)의 자리나 잃 지 않도록 하시오. 그것이 나라를 편안케 하고 백성들을 기쁘게 하 는 일이니 그 아니 아름다운 일이겠소!”

왕랑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 공명이 껄껄 웃으며 받았다.

“나는 그래도 공이 한조(漢)의 오래되고 큰 신하라 반드시 들을 만한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어찌 그런 더러운 소리를 하시오? 이제 내가 한마디 할 터이니 그쪽에서 조용히 들어보시오. 지난날 환제, 영제 시절에 한(漢)의 왕통이 뒤바뀌고 환관들이 화를 빚어, 나라는 어지럽고 세월은 흉흉해졌으며 사방은 시끄러웠소. 황건적이 난리 를 일으키고 동탁과 이각, 곽사의 무리가 발꿈치를 이어 일어나 한 의 천자를 억누르고 백성들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갔소.

또 조정에는 나무로 깎은 꼭두각시 같은 것들이 벼슬아치가 되어 있었고, 궁궐 안에서는 짐승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 녹을 받아먹고 있었소. 늑대의 심보에 개 같은 행실을 하는 것들이 떼 지어 조정을 채우고 있었으며, 종놈 같은 낯짝에다 종년같이 무릎밖에 꿇을 줄 모르는 것들이 정사를 한답시고 어지럽게 설쳐대고 있었소이다. 그 바람에 나라는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들었던 것이오. 나는 특히 그런 조정에 길게 몸담고 있은 그대가 한 짓거리를 다 알고 있소. 그대는 동해의 물가에 태어나 처음에는 효렴(孝廉)으로 뽑히어 벼슬길에 올랐소. 그랬으면 마땅히 임금을 돕고 나랏일을 잘 보살펴 한(漢)을 평안케 하고 유씨(劉氏)를 일으켜 세워야 하거늘, 오히려 역적을 도와 제위를 훔칠 줄 누가 알았겠소! 그 죄악이 하도 커 하늘과 땅이 모두 그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그대의 고기를 씹으려고 벼를 뿐이다!”

왕랑이 들으니 절로 모골이 송연하고 식은땀이 등을 적실 소리였 다. 그러나 공명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꾸짖는 말투가 되 어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다행히도 염한(炎漢)을 보살피는 하늘의 정이 끊어지지 않 아 소열황제(皇帝, 유비)께서 서주에서 대통을 이으셨고 나는 오 늘 그 뒤를 이은 천자의 뜻을 받들어 역적을 치려 군사를 일으켰다. 그대는 원래 힘있는 것들에게 빌붙어 지내는 자로서 몸을 감추고 고 개를 움츠려 먹고 입는 것이나 챙기는 게 마땅하거늘 어찌 함부로 군사들 앞에 나와 하늘의 운세를 떠들고 있는가? 이 머리터럭 흰하 찮은 것, 수염 푸른 늙은 역적아! 너는 오늘이라도 죽어 구천으로 들 게 되면 무슨 낯짝으로 스물네 분 천자를 뵙겠느냐? 늙은 역적은 어 서 물러가고, 천자를 내친 못된 신하놈이나 소리쳐 불러내 나와 승 부를 결판짓게 하라!”

말을 시작할 때의 높임마저도 없어진 추상같은 꾸짖음이었다. 그말을 듣자 왕랑은 분함과 부끄러움이 가득 차 올라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문득 한소리 알아듣지도 못할 고함과 함께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공명은 차가운 눈길로 그런 왕랑을 보다가 다시 부채를 들어 조 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너까지 핍박하지는 않겠다. 어서 돌아가 군마를 정돈하고 내일 나와 결판을 내자.”

그러고는 그대로 군사를 돌렸다. 조진도 굳이 싸움을 서두를 마음 이 없어 그대로 군사를 물렸다.

조진은 왕랑의 시체를 거두어 나무관에 넣은 다음 장안으로 돌려 보냈다. 정사에서는 글 잘하고 강직하며 제 집에서 편안히 죽은 사 람을 『연의』가 전장에 끌어내 볼품없이 죽여놓은 꼴이다. 두 조정을 섬긴 자, 왕랑만이 아니건만 필주(筆誅)치고는 좀 가혹하다.

“제갈량은 오늘 밤 우리가 장례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줄 알고 틀림없이 야습을 올 것입니다. 우리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두 갈 래는 험한 산길로 도리어 촉군의 진채를 야습게 하고, 두 갈래는 우 리 본채 밖에 숨겨두었다가 야습을 오는 촉군을 좌우에서 짓두들기 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위병이 진채로 돌아간 뒤 부장 곽회가 조진에게 말했다. 조진이 기쁜 얼굴로 찬동했다.

“그 계책이 꼭 내 마음에 든다. 그대로 하리라.”

그리고 먼저 조준과 주찬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들 둘은 각기 군사 만 명씩을 거느리고 기산을 돌아 촉군의 진채 있는 데로 가라. 거기서 살피다가 만약 촉병이 우리 진채를 향 해 떠나거든 군사를 몰아 비어 있는 병의 진채를 들이치라. 그러 나 병이 움직이지 않거든 얼른 군사를 물려 되돌아오라. 결코 가 볍게 나아가서는 아니 된다.”

두 사람이 영을 받고 물러나자 조진은 다시 곽회를 보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각기 한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진채 밖에 매복하 도록 하자. 진채 안에는 짚더미를 쌓아놓고 몇 명만 남겨 촉병이 밀 려오면 거기 불을 질러 신호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빈틈없는 계책이요, 채비 같았다.

한편 진채로 돌아온 공명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먼저 조운과 위연을 불러 영을 내렸다.

“두 분 장군은 각기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위병들의 진채를 들이치시오.”

그러자 위연이 문득 말했다.

“조진은 병법을 깊이 익힌 사람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저들이 상 중(喪中)인 틈을 타 기습을 해올 줄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면 거기에 대한 방비가 어찌 없겠습니까?”

위연이 나름으로는 머리를 짜낸다고 짜내 한 말이었으나 공명은 빙긋이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내가 바란 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조진이 내가 저희 진채를 기 습하려는 걸 미리 짐작해주기를 빌고 있다. 그러면 그는 틀림없이 기산 뒤에 복병을 묻어두었다가 우리 군사가 지나가면 도리어 텅 빈 우리 진채를 기습하려 들 것이다. 나는 그걸 노려 그대들 두 사람을 먼저 보내는 셈이다. 그대들은 그 산발치를 지나 멀찌감치 진채를 내리고 위병들이 우리 진채로 짓쳐들기를 기다리라. 그러다가 불을 질러 신호하거든 두 길로 나누어 문장, 위연의 자)은 산어귀를 막고 자룡은 되돌아오라. 위병들은 그런 자룡과 만나면 반드시 되돌 아 달아날 것인데 그때 승세를 타고 들이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 이다.”

결국은 공명의 헤아림이 곽회나 조진보다는 한 수 위였던 셈이다. 조운과 위연이 명을 받고 나가자 공명은 또 관흥과 장포를 불렀다. 

“너희들은 각기 군사 한 갈래를 이끌고 가 기산 길목에 숨어 있으 라. 그러다가 위병들이 그 앞을 지나가거든 그들을 뒤따라 그 진채 를 쓸어버려라.”

공명이 그렇게 영을 내리자 그 둘 역시 시킨 대로 떠났다. 공명은 또 마대, 왕평, 장익, 장의 네 장수를 불러들였다.

“그대들은 진채 밖에 숨어 있다가 위병들이 밀고 들어오면 사방 에서 나와 짓두들기도록 하라.”

공명이 그들에게 그런 영을 내려 위병을 잡을 그물코를 더욱 촘 촘하게 짰다. 그런 다음 진채에는 마른 풀과 장작더미를 쌓아 올려 불지르기 좋게 채비케 하고 자신은 진채 뒤에 숨어 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위의 선봉 조준과 주찬은 해 질 무렵 저희 진채를 떠나 가만 히 촉군의 진채 쪽으로 나아갔다. 한군데 알맞은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과연 밤이 깊자 왼편 산 아래로 가만가만 군사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조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곽도독의 헤아림은 귀신 같구나!”

그러고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군사를 재촉해 촉군의 진채로 밀고 들어갔다.

조준과 주찬이 촉군의 진채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삼경 무렵이었다. 정말로 텅 빈 진채 같았다. 조준은 앞장서서 진채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진채 안에 들어가니 이상했다. 사람이 없다 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구석 저 구석을 쑤셔보아도 어리친 개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자 마침내 조준에게도 짚이는 게 있었다. 

‘우리가 거꾸로 적의 계략에 빠졌구나……………’

조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른 군사를 물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진채 안에서 불이 일며 주찬이 이끄는 위병들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조준은 저희 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맞싸우니 주찬 또한 적인 줄 알고 덤벼 위병들은 저희끼리 죽고 죽이는 사태에 빠졌다.

같은 편끼리 싸운 걸 알게 된 것은 조준과 주찬이 맞닥뜨린 뒤에 야 겨우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얼른 군사를 합쳐 적진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쳐놓은 그물에 걸려든 고기나 다름없었다. 그 들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사방에서 함성이 일며 왕평, 마대, 장익, 장의가 이끄는 촉군들이 밀어닥쳤다.

조준과 주찬은 그대로 얼이 빠졌다. 가까이서 부리는 군사 백여 명만 데리고 큰길로 냅다 뛰었다. 나머지 졸개들은 나몰라라 하고 달아난 것이지만 그마저도 뜻 같지는 못했다. 촉의 맹장 위연이 또 덮쳐온 까닭이었다.

조준과 주찬은 죽기로 싸워 겨우 길을 앗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 고 저희 진채를 향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겨우 본채에 이르렀지만 이곳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몇 명 남 아 진채를 지키던 위병들이 저희 편을 촉군인 줄 알고 놀라 불을 지 른 까닭이었다.

그 불길을 보고 미리 숨어서 기다리던 조진과 곽회가 조준과 주 찬을 덮쳤다. 왼쪽에서는 조진이 이끈 군사가 달려 나오고 오른편에 서는 곽회가 이끈 군사들이 달려 나와 짓두들겨서 거기서 위병들은 또 한번 저희끼리 죽고 죽이는 어이없는 짓을 했다.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진짜 촉군이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덮쳐 왔다. 가운데는 위연이요, 왼쪽은 관흥, 오른쪽은 장포였다.

그때서야 위병들은 저희끼리 싸우고 있었음을 깨달았으나 어떻게 싸움판을 돌이켜보기에는 늦은 뒤였다.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개처 럼 쫓겨 십 리나 달아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죽은 자 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명은 한바탕 크게 이긴 뒤에야 겨우 군사를 거두어 자기 진채로 돌아가버렸다.

계책을 쓴답시고 껍죽대다가 오히려 공명의 계책에 걸려 낭패를 보아도 크게 본 조진과 곽회는 간담이 서늘했다. 싸움에 진 군사를 수습해 진채를 세운 뒤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다.

“이제 우리 위병은 세력이 외로워졌고 촉군의 사기는 드높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저들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조진이 그렇게 묻자 곽회가 대답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싸우는 사람에게는 매양 있는 일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계책이 있으니 이대로만 하면 촉군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볼 틈이 없어 절로 물러가고 말 것입니다.”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띈 조진이 물었다.

“그게 어떤 계획인가?”

“바로 서강(西)의 군사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곽회는 그렇게 말해놓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뒤를 이었다. 

“서강은 태조 때부터 해마다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왔고, 문황제 (皇帝) 역시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험한 곳에 의지해 굳게 지키는 한편 사람을 뽑아 샛길로 강중(中)에 보 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청함과 아울러 화친의 뜻을 보이면 그들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촉병의 뒤를 들이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크게 군사를 내어 앞에서 촉군을 치고 나면 저들의 머 리와 꼬리를 한꺼번에 짓두들기는 셈이 되니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 니까?”

한번 그의 꾀를 빌렸다가 낭패를 본 뒤였지만 워낙 그럴듯한 말 이었다. 이에 조진은 다시 한번 곽회의 계책을 따라보기로 하고 그 날 밤으로 사람을 뽑아 서강으로 보냈다.

곽회의 말대로 서강의 국왕 철리길(徹里吉)은 조조 때부터 위에 해마다 조공을 바쳐온 자였다. 그 밑에는 문과 무에 각기 뛰어난 사 람이 하나씩 있었는데, 문에 뛰어난 자는 아단(丹)이란 승상이요, 무에 뛰어난 자는 월길(越)이란 원수였다.

조진이 보낸 위의 사신은 금은 보석과 좋은 구슬을 싸들고 강중에 이른 뒤 먼저 아단 승상부터 구워삶았다. 후한 예물을 바치며 구해주기를 청하니 아단은 두말 없이 사신을 국왕 철리길에게로 데려

갔다.

사신은 철리길에게 예물과 함께 위에서 보낸 글을 올렸다. 그걸 읽어본 철리길이 여럿을 보고 물었다.

“위가 구해주기를 청하는데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소금 먹은 놈이 물 켠다고 아단이 나와 말했다. 

“위와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 오감이 있었습니다. 이제 조(曹)도 독이 구해주기를 청하니 들어주는 것이 이치에 맞을 듯싶습니다.” 

철리길은 믿는 아단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승상 아단과 원수(元 帥)월길에게 군사 이십오만을 주며 촉군의 뒤를 치게 했다. 그런데 그 이십오만 강병(兵)은 여느 군사와 달랐다. 모두가 활과 쇠뇌며 칼과 창, 질려(마름쇠 모양의 무기), 비퇴(飛) 등을 잘 다루는 데다, 싸움에 쓰는 특이한 수레를 가지고 있었다. 쇠 판대기를 이어 못질 을 한 튼튼한 것으로, 강병들은 거기에 군량이며 병기 따위를 싣고 다녔다. 그 수레를 끄는 것은 더러는 노새였는데, 그걸 앞세우고 싸우는 모습이 유별나 사람들은 그 군사를 ‘철거병鐵車兵)’이라 불 렀다.

승상 아단과 원수 월길은 그 철거병 이십오만을 이끌고 서평관(西 平關)으로 달려가 관을 들부수기 시작했다. 그곳을 지키던 촉장 한 정(韓禎)은 크게 놀랐다. 곧 사람을 뽑아 기산에 있는 공명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공명이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서평관으로 가서 강병을 물리쳐보겠는가?”

장포와 관흥이 한꺼번에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이 한번 가보겠습니다.”

공명은 그들을 기특한 듯 바라보다가 걱정스레 말했다.

“너희들이 가는 건 좋지만 그곳 길을 모르니 걱정스럽구나.” 

그러더니 문득 마대를 불러 일렀다.

“그대는 원래 강인들의 성미를 잘 알 뿐 아니라 오래 그들과 함께

살아 그곳 길도 훤할 것이다. 그대가 저 두 젊은 장수의 길잡이가 되 어주라.”

마대가 선뜻 거기 응하자 공명은 그들 세 장수에게 군사 오만을 가려 뽑아주며 서평관을 구하게 했다.

관흥과장포는 마대와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서평관으로 떠났다. 며칠 가기도 전에 그들이 오는 걸 알고 달려온 강병들과 맞닥뜨렸다. 관흥은 백여 기를 이끌고 높은 산 언덕에 올라가 강병들을 바라 보았다. 강병들은 그 이름난 쇠수레의 꼬리와 머리를 이어 몇 군데 진채를 얽어놓고 있었다. 쇠수레 위에는 창칼이며 활과 쇠뇌가 걸려 있어 그대로 든든한 성과 같았다.

관흥은 한참이나 그런 적진을 살펴보았으나 그걸 깨뜨릴 만한 계 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두운 얼굴로 돌아가 장포와 마대를 불러 모아놓고 의논을 시작했다. 그중 가장 싸움에 경험이 많은 마 대가 말했다.

“우선 내일 한번 싸워보고 난 뒤에 의논합시다. 그들의 허실을 알아내야 계책이고 뭐고가 나올 것이오.”

관흥과 장포도 뾰족한 수가 없어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촉군은 아침 일찍부터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강병들의 진채로 밀고 들어갔다. 가운데는 관흥이 이끄는 군사요, 왼쪽은 마대가, 오른쪽은 장포가 이끌었다.

강병의 진채 뒤에서 원수(元)월길이 말을 몰아 나왔다. 손에는 철퇴를 들고 허리에는 보석으로 아로새긴 활을 찬 게 자못 그럴듯해 보였다.

“모두 앞으로!”

관흥이 그렇게 소리치며 세 갈래 군마를 일제히 몰아 강병에게 덮쳐갔다. 그러자 강병들이 갑자기 두 편으로 갈라서며 그 가운데서 쇠수레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밀물이 들 듯하는 기세인데 더 못 견딜 것은 그 쇠수레 위에서 퍼부어대는 활과 쇠뇌였다.

거기 견디지 못한 촉군은 그때까지의 기세도 잊고 되돌아서서 달 아나기 시작했다. 먼저 등을 돌린 마대와 장포는 크게 다치지 않고 군사를 물릴 수 있었으나 적진 깊숙이 들어왔던 관흥은 그렇지가 못 했다. 한 떼의 강병이 똑바로 서북쪽을 질러 막으며 에워싸니 관흥 은 곧 적진 속에 갇히고 말았다.

관흥은 왼쪽으로 찌르고 오른쪽으로 베며 힘을 다해 싸웠으나 아 무래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사이 빽빽이 둘러쳐진 쇠수레의 벽 은 그대로 든든한 성벽 같았다. 관흥이 그러하니 군사들은 더했다. 촉군들은 서로를 돌볼 틈이 없이 허둥거리다가 강병들에게 죽어갔다.

마침내 길을 앗기를 단념한 관흥은 산골짜기로 뛰어들어 길을 찾 았다. 겨우겨우 길을 헤쳐 정신없이 달아나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관흥은 더욱 마음이 급해 말 배를 걷어찼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검은 깃발이 하나 나타나며 그 아래 벌떼처럼 뭉쳐 오고 있 는 강병들이 보였다.

앞서 오던 장수 하나가 철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젊은 장수는 달아나지 말라. 나는 월길원수다!”

그러나 관흥은 이미 싸울 마음이 없었다. 말에 채찍질을 더해 정 신없이 달아날 뿐이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깊은 벼랑 사이의 여울이 입을 벌리고 관흥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관흥은 하는 수 없이 돌아서서 월길과 싸웠다. 이미 마음이 어지 럽고 겁에 질려 싸움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끝내 월길을 당해낼 수 없어 여울을 끼고 벼랑 사이로 달아났다.

월길이 그런 관흥을 놓아 보내려 할 리 없었다. 어느새 뒤쫓아 와 철퇴를 날렸다. 번쩍 날아오는 철퇴를 보고 관흥이 가까스로 몸을 피했으나 철퇴는 관흥이 탄 말의 엉덩이를 후렸다. 아픔을 이기지 못한 말이 여울로 뒤집히자 관흥은 물 속에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소리 이상한 울림과 함께 뒤따라오던 월길이 말과 함께 물에 곤두박질했다. 관훙이 물 속에서 고개를 들어 내다보니 한 장수가 물가에서 강병들을 후려쳐 쫓고 있었다.

거기 힘을 얻은 관흥은 칼을 뽑아 물에 빠진 월길에게로 덮쳐갔 다. 이번에는 월길이 놀라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대로 물에서 뛰쳐 나가 바람같이 달아나버렸다.

월길이 버리고 간 말을 얻은 관훙은 물가로 끌고 나가 안장을 바로 한 뒤 말등에 뛰어올랐다. 칼을 꼬나쥐고 싸울 채비를 갖추고 나서 보니 자신을 구해준 장수는 아직도 저 앞에서 강병들을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저분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마땅히 찾아뵙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

관흥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박차 그 장수를 뒤쫓아갔다. 가까워 지면서 보니 한 대장이 구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기운 속에 싸여 싸우고 있는데, 얼굴은 잘 익은 대춧빛이요, 눈썹은 누에가 누 워 있는 듯했다. 녹색 전포에 금투구 쓰고, 청룡도를 든 채 적토마를 탄 것이며 아름다운 수염을 길게 드리운 게 틀림없이 돌아가신 부친 관공이었다.

관흥은 깜짝 놀랐다. 얼른 가서 불러보려는데 문득 관공이 손을 들어 동남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 아들아, 빨리 이 길로 달아나거라. 네가 진채에 돌아갈 때까지 지켜주마.”

그리고 말이 끝남과 함께 보이지 않았다.

관흥은 놀랍고 감격스런 가운데도 동남쪽으로 급히 말을 달렸다. 한밤중이 되자 문득 한 떼의 군마가 맞은편에서 밀려들어오고 있었 다. 장포가 이끄는 촉군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관흥을 만 나자마자 장포가 묻는 말이었다.

“아우는 둘째 큰아버님을 뵙지 못했는가?”

“형이 어찌 그걸 아시오?”

관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장포가 아직도 감격에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철거병에게 급하게 쫓기고 있는데 홀연 큰아버님께서 하늘 로부터 내려오셔서 강병을 내쫓고 이쪽을 손가락질하며 말씀하셨 네. ‘너는 저길로 가서 내 아들을 구해주어라’ 그래서 나는 군사를 끌고 아우를 찾으러 급하게 달려온 것이네.”

그러자 관흥 역시 자신이 겪은 걸 얘기하며 서로 그 신기함에 감 탄했다. 뒷날 관공이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전설 가운데 하나 를 『연의』의 저자가 빌려 쓴 듯하다. 촉과 강인들의 싸움에서 처음 에는 촉이 무척 애를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는 허구다.

관흥과 장포가 나란히 진채로 돌아가자 걱정하며 기다리던 마대 가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강병들을 깨뜨릴 계책은 없던지 두 사람이 자리 잡고 앉기 바쁘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같은 강병들을 깨뜨릴 계책이 없는 듯하오. 나는 여기서 진채와 목책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고 있을 테니 두 분은 승상께 돌아가 이 일을 알리고, 계책을 써서 저들을 깨뜨리라 이르 시오.”

한번 혼이 난 관흥과 장포에게도 그밖에는 달리 길이 없어 보였 다. 이에 두 사람은 그날 밤으로 말을 달려 공명에게로 갔다.

관흥과 장포가 돌아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알리자 공명도 얼굴 이 굳어졌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먼저 조운과 위 연에게 각기 한 갈래 군사를 떼어주고 어디론가 보내 매복해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따로이 삼만 군사를 골라 뽑아 강유, 장익, 관흥, 장포와 더불어 마대의 진채로 달려갔다.

마대의 진채에서 하룻밤을 쉬고 난 다음 날이었다. 공명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 가만히 강병들의 진채를 살폈다. 관훙이 살펴볼 때나 크게 다름이 없었다. 쇠수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고, 사람과 말이 가로세로 치달으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명 은 역시 관흥과는 달랐다.

“저따위 진을 깨뜨리는 거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

공명은 무엇을 보았는지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곧 마대와 장익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렇게 저렇게 하여라.”

공명은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게 무언가를 말해주어 어디론가

로 보냈다.

마대와 장익이 물러가자 공명은 다시 강유를 불러들여 물었다.

“백약(伯)은 저 진을 깨뜨릴 방도를 알고 있는가?”

“강인들은 용맹과 힘만 믿고 날뛰는 무리들입니다. 어찌 승상의 묘한 계책을 알겠습니까?”

강유가 슬쩍 비키듯 대답했다. 계책을 쓰면 된다는 막연한 대답인 셈이었으나 공명은 그것만으로도 됐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 마음속을 알고 있구나. 오늘 보니 하늘에는 붉은빛 도 는 구름이 두껍게 덮여 있고, 찬 북풍이 세게 이니 아무래도 눈이 올 듯하다. 내 계책을 베풀 만한 날씨다.”

그러고는 다시 관흥과 장포를 불러 어딘가로 매복을 보냈다.

공명은 마지막으로 강유에게 영을 내렸다.

“그대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되 철거병이 나오거든 얼른 물러서서 달아나라. 그리고 진채 어귀는 깃발만 잔뜩 세워두고 군마는 펼쳐두지 말라.”

강유 또한 공명이 시키는 대로 채비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해 섣달 그믐이 가까울 무렵 공명의 짐작대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유는 공명이 미리 일러둔 대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 강 병에게 싸움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월길은 철거병을 이끌고 마 주쳐 나왔다.

철거병이 나오는 걸 보자 강유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병들은 기세가 올랐다. 강유를 뒤쫓아 겁없이 촉군의 진채로 덮쳐갔다. 강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채 뒤쪽으로 달아날 뿐이었다.

강병들은 그런 강유를 찾아 진채 안으로 들어갔다. 촉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깃발만 무성하게 서 있는데 어디선가 북소리 피리소리 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강병들은 얼른 되돌아가 월길에게 그 일을 알렸다.

듣고 보니 월길도 의심이 났다. 가볍게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 는데 승상 아단이 말했다.

“저건 제갈량의 속임수일 뿐이다. 거짓으로 군사들이 있는 것처 럼 꾸며놓은 것이오. 들이쳐서 안 될 것 없소.”

이에 월길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촉군의 진채 앞으로 밀고 들었 다. 여전히 군사들의 기척은 없고, 수레에 앉아 있는 공명이 보일 뿐 이었다. 수레 위의 공명은 거문고를 안고 서너 명 말 탄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진채 뒤로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공명을 눈앞에 둔 강병들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진채 안으로 뛰 어들어갔다. 어서 공명을 사로잡고 싸움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뒤 쫓다 보니 어느새 작은 산어귀를 지나게 되었다. 앞서 가던 공명의 수레는 거기서 느릿느릿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혹시 복병이 있을까 보아 월길이 잠시 머뭇거리자 아단이 그런 월길을 부추겼다.

“저따위 군사로는 설령 매복이 있다 해도 두려워할 게 없을 듯하오. 그냥 밀고 나갑시다.”

그러자 월길도 힘을 얻은 듯 대군을 몰아 뒤쫓기 시작했다. 한참 가다 보니 공명은 안 보이고 강유의 군사들만 눈길에 엎어 지락 자빠지락 하며 달아나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월길은 더욱 자신 이나 졸개들을 재촉했다. 산길은 하얗게 눈이 덮이고 한눈에 사방 이다 보일 만큼 평평했다.

하지만 촉군이라고 언제까지나 쫓기고 있지만은 않았다. 강병들 이 한참 뒤쫓는데 문득 산 뒤에서 한 떼의 병들이 달려 나왔다. 그 리 대단한 군세는 아니었다.

“한줌도 안 되는 복병이 나왔다손 겁낼 게 무엇 있겠느냐? 모두 그대로 밀고 나가라.”

다시 아단이 나서서 그렇게 소리쳤다. 이에 강병들은 모두 힘을 다해 말과 싸움수레를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갑자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앞서 가던 강병들이 깊고 큰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뒤따르던 쇠수레들은 얼른 멈추려 했으나 달려온 속도가 있어 쉽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그 뒤를 달려오던 강병들이 뭉치지어 밀어붙이니 쇠수레들은 모두 구덩이로 떨어지 고, 남은 강병들은 또 서로 밟고 밟히어 죽는 자를 다 헬 수 없을 정 도였다.

뒤따라오던 강병들은 그런 대로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온전할 수는 없었다. 급히 발길을 돌려 물러나려 할 때 어디선가 촉군이 쏟아져 나왔다. 오른쪽은 장포가 이끄는 군사 였다.

촉군이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아 붙이니 강병들은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낭패는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등 뒤에서 다시 강유와 마대, 장익이 이끄는 촉병들이 덮쳐왔다.

그렇게 되자 그 무섭던 철거병은 그대로 갈팡질팡 뒤죽박죽이 돼 버렸다. 촉군을 맞아 싸우기는커녕 제 한목숨 건져 달아나기 바빴다. 다급하기는 원수인 월길도 마찬가지였다. 뒤쪽 산골짜기로 냅다 뛰었으나 끝내 몸을 빼내지는 못했다. 한참 달리는데 어디선가 관흥 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월길이 철퇴를 휘둘러 관흥을 쫓아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말 머리가 서로 엇갈리는가 싶었을 때 관흥이 한마디 꾸짖음과 함께 청룡도를 후려치자 월길은 두 토막이 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월길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아단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졸개들 틈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마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 다. 월길이 죽고 아단이 사로잡히자 강병들은 그대로 끝장이 났다. 소리개에 까투리 장끼 모두 채여간 꿩병아리들같이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마대가 아단을 사로잡아 오자 공명은 장막을 걷고 그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무사들을 꾸짖어 그 몸을 얽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게 한 뒤 술을 내주며 놀란 가슴을 달래게 했다.

아단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자 공명은 다시 좋은 말로 그를 달랬 다. 꼭 죽는 줄만 알았던 아단은 공명의 그 같은 너그러움에 감동되 어 몸둘 곳을 몰라했다. 그런 아단에게 공명이 한층 부드럽게 타일 렀다.

“내 주인은 대한의 황제시다. 내게 역적을 치라 명하시기에 나왔 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역적을 도왔느냐? 이제 너를 놓아줄 터이 니 돌아가 네 주인에게 일러라. 우리와 너희는 서로 이웃해 있는 나 라이니 길이 화친을 맺어 사이좋게 지낼 일이요, 역적들의 말을 들 어서는 아니된다고. 그게 작게는 너희를 온전히 보전하는 길이요, 크게는 천하를 평안케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고는 곁에 있는 군사에게 일렀다.

“사로잡은 강병들과 빼앗은 수레며 병기를 모두 아단에게 돌려주 어라. 아단이 그들과 함께 돌아가는 걸 아무도 막아서는 아니 된다.” 

그 너그러운 처분에 아단과 그 졸개들은 한결같이 감동했다. 땅에 엎드려 절하며 고마움을 드러내고 모두 저희 나라로 돌아갔다.

강병을 물리친 공명은 다시 기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밤으 로 삼군을 몰아 그곳의 대채로 향하고, 관흥과 장포를 먼저 보내 앞 길을 살피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뽑아 성도로 보내 이 긴 소식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조진은 매일같이 강인들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강인들의 소식은 쉬이 오지 않았으나 다른 데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병들이 진채를 뽑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러 보냈던 군사들이 돌아와 조진에게 그 렇게 알렸다. 조진이 무턱대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강병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등 뒤를 후려치니 배겨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고는 조준과 주찬을 불러 명했다.

“너희들은 각기 한 갈래 군마를 이끌고 촉병을 뒤쫓으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아니 된다.”

이에 위의 두 갈래 군마는 어지럽게 달아나는 촉병을 뒤쫓기 시 작했다. 하지만 뒤쫓는다는 건 기분뿐이고 실은 그게 바로 덫에 걸 려드는 길이었다.

먼저 조준이 험한 꼴을 당했다. 한참을 기세좋게 달리는데 문득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한 떼의 인마가 번개처럼 뛰쳐나와 길을 막았 다. 앞선 장수를 보니 촉의 위연이었다.

“역적 높은 달아나지 말라!”

위연이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로 그렇게 소리치며 조준을 덮쳐 왔다. 조준은 깜짝 놀랐다. 급히 창을 들어 맞섰으나 겨우 세 합을 채우지 못하고 위연의 칼에 맞아 말 등에서 떨어졌다.

부선봉이었던 주찬의 운명도 조준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군사 를 휘몰아 한참 촉병을 뒤쫓다가 그 또한 한 떼의 촉병과 맞부딪쳤다. 앞선 장수는 바로 조운이었다. 천하의 조자룡과 맞닥뜨리자 주찬은 오금이 얼어붙어 창칼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허둥대다가 조운의 한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조진과 곽회는 두 선봉이 그렇게 죽는 걸 보자 일이 잘못돼도 크 게 잘못된 걸 알았다. 얼른 군사를 물리려 하는데 이번에는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북소리 나팔 소리가 요란했다. 장포와 관흥이 이끈 촉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