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5화 : 한스럽구나, 가정의 싸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5화 : 한스럽구나, 가정의 싸움


한스럽구나, 가정의 싸움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관을 나선 사마의는 진채를 내리자마자 선 봉장합을 불러 말했다.

“제갈량은 평생을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라 감히 억지스런 일을 하려 들지는 않는구려. 만약 내가 그의 자리에서 군사를 부렸다면 자오곡(子午谷)을 통해 지름길로 장안을 쳐서 많은 시간을 벌었을 것이외다. 하기야 그가 그 길을 고르지 않는 게 꾀가 없어서만은 아 니었던 듯싶소. 다만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위태로움과 험함 을 무릅쓰지 못했을 뿐이오.

이제 제갈량은 틀림없이 야곡으로 나와 미성을 치려 할 것이오. 그리하여 미성을 빼앗게 되면,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한 갈래는 기 곡을 뺏으려 들 것이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자단(丹, 조진의 자)에게 글을 보내 미성을 지키게 하였소. 만약 적병이 오더라도 성을 나가지 말고 안에서 버티기만 하라고 시켜두었소. 또 신비와 손례에게 는 기곡 입구를 막고 있다가 적이 오면 기병을 내어 치라 하였소.” 

“그럼 장군께서는 어디로 군사를 내실 작정이십니까?”

듣고 있던 장합이 물었다. 사마의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나는 진작부터 진령 서쪽으로 한 가닥 길이 나 있음을 알고 있 소. 바로 가정(街)이란 곳을 지나는 길인데, 그 곁에는 열류성列柳 城)이란 성이 하나 있어 그 두 곳은 모두 한중으로 들어가는 목구멍 같은 곳이 되오. 제갈량은 자단이 아무런 준비 없음을 얕보고 틀림 없이 그 길로 나올 것이오. 나와 공은 지름길로 가정을 차지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양평관(陽平關)이 멀지 않소. 제갈량은 내가 목울대 같은 가정의 길을 끊어버리면 군량을 가져올 길이 없어 농서 일대를 편안히 지킬 수가 없을 것이오. 하는 수 없이 밤을 틈 타 한중으로 달아날 것인데 그때 그를 치는 것이오. 허겁지겁 달아 나는 그를 좁은 길목에서 막고 짓두들기면 틀림없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이외다. 만약 제갈량이 돌아가지 않을 때는 모든 곳의 샛길 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을 풀어 막고 있게 할 것이오. 그리되면 한 달 도 안 돼 촉병은 모두 굶어 죽고 제갈량은 내 손에 사로잡히고 말 리다.”

그 부근의 모든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며 밝히는 계책을 들어보니 장합도 크게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 에 엎드려 사마의에게 절을 하며 감탄을 쏟았다.

“실로 도독의 헤아림은 귀신 같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오히려 그때부터 조심하고 불안스런 얼굴이 되었다. 무거운 목소리로 장합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제갈량은 맹달 따위와는 견줄 수도 없는 사람이오. 장군 은 선봉으로 앞장서되 결코 가볍게 나아가서는 아니 되오. 마땅히 여러 장수에게 알리어 그 산 서쪽 길에 숨게 한 뒤 멀리서 조심조심 탐지해보고 복병이 없음을 알게 되거든 그때에야 나아가게 하시오. 그걸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했다가는 반드시 제갈량의 계책에 떨어 지고 말 것이외다!”

장합도 싸움터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그 같은 사마의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사마의가 일러준 곳으로 떠났다. 한편 공명은 기산(山) 아래의 진채에서 마음을 죄며 맹달의 소 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맹달에게 보내는 답장을 가지고 떠난 군사가 소식이 없어 다시 세작을 신성으로 보낸 다음이었다. 며칠 안 돼 세 작이 달려와 기막힌 소식을 전했다.

“틀렸습니다.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마의는 길 을 두 배로 달려 여드레 만에 신성에 이르렀습니다. 그 뜻밖의 재빠 른 진군에 맹달은 어찌 손써볼 틈이 없었는 데다, 신탐, 신의, 이보, 등현 등이 안에서 사마의에게 호응해, 맹달은 마침내 어지럽게 쫓기 는 군사들 틈에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마의는 그제서야 장안으 로 가서 위주를 만나보고 장합과 함께 관을 나왔는데, 지금 이리로 오는 중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깜짝 놀랐다. 그 어이없는 소식에 땅이 꺼지듯 탄식했다.

“맹달은 일을 꼼꼼하게 하지 못한 허물이 있으니 죽어 마땅하다 고 쳐도 앞으로를 어찌한단 말인가! 사마의가 관을 나왔다면 틀림없 이 가정을 차지해 우리의 숨통 같은 길을 끊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누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가정을 지키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공명의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참군 마속이 나섰다. 남달리 마속 을 아끼고 믿는 공명이었으나 그날만은 달랐다. 걱정을 감추지 못하 고 다짐받듯 말했다.

“가정이 비록 작은 땅이나 길목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만 약 가정을 잃어버리면 우리 대군은 모두 끝장이 나고 만다. 그대가 비록 꾀와 슬기가 뛰어났다 해도, 거기에는 성곽이 없는 데다 땅조 차 험하지 않아 지키기에 매우 어렵다. 그래도 가보겠느냐?” 

마속이 자신있게 그 말을 받았다.

“저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어 병법이라면 제법 압니다. 어 찌 가정 한 곳쯤 지켜내지 못하겠습니까?”

“사마의는 결코 얕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거기다가 그 선봉인 장합은 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다. 그대가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스럽구나.”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마속은 더욱 오기가 나는 듯했다. 큰소리에 그치지 않고 엄청난 걸 걸었다.

“사마의나 장합은 말할 것도 없고 조예가 친히 온다 해도 두려워할 게 무엇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저희 집안 모두를 목 베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공명이 그런 마속에게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군중에서는 말장난이 없는 법이다.”

“알고 있습니다. 군령장을 써두고 떠나겠습니다.”

마속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공명도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이 출전을 허락하자 마속은 제 말대로 군령장을 써서 바쳤다. 

“나는 그대에게 이만 오천의 가려 뽑은 군사를 주고, 다시 상장 한

사람을 더해 그대와 서로 돕게 하겠다.”

공명은 군령장을 거둔 뒤 그렇게 말하며 왕평을 불렀다.

“나는 평소 그대가 모든 일에 신중함을 알고 있다. 그걸 믿고 특 히 그대를 뽑아 이같이 중임을 맡기는 것이니 부디 그대는 삼가고 또 조심하라. 거기서는 반드시 요긴한 길목에 진채를 세워 적병으로 하여금 쉽게 지나지 못하게 하라. 진채가 다 서거든 얼른 그곳의 사 방 지형을 그림으로 그려 내게 보이고, 모든 일은 반드시 군사를 세 워 의논한 뒤 다시 나아가며 결코 가볍게 내닫지 말라.

지금까지 내가 이른 것을 모두 지킨다면, 아무런 위태로움을 겪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안으로 들어서는 데 으뜸가는 공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 부디 저버리지 않도록 하 라.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왕평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믿고 아끼는 마속을 위해 더욱 간곡해진 당부였다.

왕평과 마속은 공명의 당부가 끝나자 공명에게 절하며 작별하고 가정으로 떠났다. 공명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다시 고상 (高)을 불러말했다.

“혹시라도 두 사람에게 실수가 있을까 실로 걱정된다. 가정 동북 쪽에 열류성(列柳城)이란 성이 하나 있는데 산모퉁이의 좁은 길을 끼 고 있어 군사를 머물게 할 만하다. 그대에게 군사 만 명을 줄 것이니 그곳으로 가서 머물러 있다가 가정이 위태롭거든 달려가서 구하라.” 

이에 고상은 군사 만 명을 이끌고 열류성으로 떠났다.

하지만 공명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마의가 장합을 데 려왔다면, 틀림없이 장합을 거기 투입할 것인데 고상은 그 적수가 아니었다. 특별히 솜씨 좋은 대장 하나를 더 뽑아 가정 오른쪽에 묻 어두어야만 가정을 제대로 지켜낼 것 같았다.

이에 공명은 위연을 불러 말했다.

“고상만으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장군도 가보시오. 이끌고 있는 군사들과 더불어 가정 뒤편에 숨어 있다가 저들이 불리 하면 나가 도우시오.”

그러자 위연이 불평처럼 물었다.

“나는 전부로서 마땅히 앞장서 적을 쳐부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편안하고 한가로운 곳에 처박아두려 하십니까?”

공명이 그런 위연을 달래듯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앞장서서 적을 쳐부수는 것은 편장(將)이나 비장(裨將)들이 할 일에 지나지 않소이다. 이제 장군이 가서 도와야 할 가정은 양평관으로 가는 요충이 될 뿐만 아니라 한중의 목구멍 같은 곳이오. 실로 대임 중에도 대임이라 할 만한데 어찌 평안하고 한가로운 땅이라 하 시오? 장군은 결코 등한히 보아 나라의 큰일을 그르쳐서는 아니 되 오. 부디 조심하고 조심해 맡은 일을 다하시오.”

그제서야 위연은 기쁜 낯빛을 지었다. 거느린 군마를 몰아 공명이 시킨 곳으로 떠났다.

무슨 불길한 예감에서일까, 아니면 큰 싸움을 앞둔 장수의 소심함 에서일까. 두 번 세 번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건만 공명은 여전히 마 음이 놓이지 않은 듯했다. 또다시 조운과 등지를 불러 영을 내렸다. 

“이번에는 사마의가 군사를 끌고 나왔으니 지난날과는 다를 것이 오. 두 분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기곡으로 나가 의병이 되시 오. 위병을 만나거든 더러는 싸우고 더러는 싸움을 피해 그들의 마 음을 놀라게 하는 것이오. 나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야곡을 거쳐 미성을 들이칠 것이오. 미성만 뺏으면 장안도 우려뺄 수 있소.” 

명을 받은 두 사람 또한 그날로 군사를 이끌고 떠나갔다.

공명은 모든 배치가 끝난 뒤에야 강유를 선봉으로 삼아 야곡으로 밀고 나아갔다.

한편 가장 먼저 떠나 가정에 이른 마속과 왕평은 먼저 그곳의 지 세부터 살폈다. 한참을 돌아본 마속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승상은 어찌 그리도 걱정이 많으신지 모르겠소. 이 같은 산골짜 기에 위병이 어찌 감히 밀고 든단 말이오?”

왕평이 신중하게 그 말을 받았다.

“비록 위병이 감히 오지 못한다 해도 여기 다섯 갈래 길이 모두 모인 초입에다 진채를 내리는 게 좋을 듯하오. 어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서 나무를 베어 목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그런 다음 장구한 계책을 꾀해야겠소.”

“길 옆에다 어떻게 진채를 세운단 말씀이오? 저쪽 곁 산을 보시 오. 사방으로 이어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풀이 넓게 퍼져 있으 니 하늘이 내린 험지라 할 만하오. 그 산 위에다 군사를 머무르게 하 는 게 옳을 것이오.”

마속이 그렇게 왕평의 생각을 반대하고 나섰다. 왕평도 지지 않고 맞섰다.

“아니오. 그건 참군께서 틀리신 듯싶소. 길 곁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성벽을 쌓고 목책을 두른다면, 설령 적병 십만이 온다 해도 능 히 지나갈 수 없을 것이외다. 이제 만약 저같이 요긴한 길목을 버려 두고 산위에 진을 쳤다가, 위병이 몰려들어 사면을 에워싸버린다면 무슨 수로 견뎌내겠소?”

마땅히 뜨끔해서 들어야 할 말이었으나 마속은 어느새 제 생각에 취해 있었다. 큰 소리로 껄껄 웃어젖힌 뒤 핀잔처럼 말했다. 

“공은 참으로 좁은 소견을 지녔구려. 병법에 이르기를 높은 곳에 서 아래를 내다보게 되면 그 기세는 대나무를 쪼갤 때와 같다[高 視下 勢如破竹]고 하지 않았소? 만약 위병이 온다면 나는 저들에게 갑옷 한 조각 찾아갈 수 없게 할 것이오!”

“나는 여러 번 승상을 따라다니며 승상께서 진채를 세우시는 걸 보아왔소. 승상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내게 그곳에 진채를 세우는 까 닭을 일러주셨는데, 거기 따르면 참군이 잡은 진터는 옳지 않소. 내가 보기에 저 산은 이른바 절지(絶地)에 해당되오. 만약 위병들이 물을 길어 오르는 길만 끊어버려도 우리 군사는 절로 어지러워지고 말

것이오.”

왕평이 깐깐한 목소리로 다시 그렇게 맞받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속은 제법 성까지 내어 왕평을 몰아붙였다.

“공은 더 이상 어지러운 소리를 하지 마시오. 손자도 말하기를 죽 을 곳에 선 뒤에야 살 길이 생긴다[置之死地而後生]라 하지 않았소? 만약 위병이 우리 물길을 끊는다면 촉병이 어찌 죽기로 싸우지 않을 수 있겠소? 그때는 한 사람이 적병 백을 당해낼 것이오. 나는 일찍 부터 병서를 많이 읽어 승상께서도 모든 걸 내게 물으시곤 하셨소. 그런데 공이 어찌 내가 하는 걸 막으려 하시오?”

마속이 그렇게 나오자 왕평도 더는 마속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 을 알았다. 생각 끝에 말을 바꾸었다.

“좋소이다. 그럼 참군께서는 산 위에다 진채를 세우시오. 하지만 내게도 군사를 좀 나눠주시어 산 서쪽 아래편에 작은 진채를 세우게 해주셨으면 하오. 그래서 양군이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면 위병 이 와도 서로 도울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마속은 그마저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얼굴만 찌푸리고 있는데 문득 한 떼의 백성들이 몰려왔다. 모두 그 산 속에 사는 사람들로, 허겁지겁 달려온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왕평은 다시 한번 자기의 주장을 펴고 떠나려 했다.

마속이 마지못해 못마땅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이 굳이 내 말을 듣지 않겠다니 오천 군사를 주겠소. 가서 원하는 데 진채를 세우도록 하시오. 하지만 내가 위병을 쳐부순 뒤 승 상 앞에 가서 공을 나눠 가질 생각일랑은 마시오.”

하지만 그것도 승낙은 승낙이었다. 왕평은 군사 오천을 이끌고 산 아래 십 리 되는 곳에 진채를 세운 뒤 자신과 마속이 진채를 친 곳 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사람을 공명에게 보내 그 그림을 바침과 아 울러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알리게 했다.

한편 가정으로 다가들던 사마의는 먼저 둘째 아들 사마소를 불러명했다.

“너는 가서 앞길을 살펴보아라. 만약 지키는 군사가 있으면 그 자리에 멈춰서고 나아가지 말라.”

이에 앞서 달려간 사마소는 얼마 뒤 돌아와 알렸다.

“가정에는 지키는 군사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제갈량은 참으로 귀신 같은 사람이로구나! 벌써 사람을 보내 그 곳을 지키게 했을 줄은 몰랐다.”

힘 안들이고 지나칠 수 있을 줄 알았던 곳에 군사가 지키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사마소는 달랐다. 무엇을 보고 왔는지 빙긋 웃 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기세를 떨어뜨리고 계십니까? 제 가 보기에는 가정을 뺏기는 쉬울 듯했습니다.”

“네가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느냐?”

사마의가 아들의 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물었다. 사마소가 별로 들뜬 기색 없이 말했다.

“제가 그곳에 이르러 직접 살펴보고 알아낸 것입니다. 길가에는 아무런 진채나 목책이 보이지 않고 적병은 모두 산 위로 올라가 있 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적을 깨뜨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마의도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적병들이 산 위에 진을 치고 있다면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신 것이리라!”

그러고는 얼른 옷을 갈아 입은 뒤에 수백 기만 이끌고 직접 촉진을 살피러 갔다.

그날 밤 하늘은 맑고 달은 밝았다. 사마의는 몰래 병이 진을 치 고 있는 산 아래 이르러 산을 한 바퀴 돌며 자세히 살펴본 뒤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마속도 산 위에서 적병들이 산을 돌아보는 것을 알았다. 마속은 그게 사마의라는 것도 모르고 크게 비웃으며 말했다.

“누구건 살기를 바란다면 감히 이 산을 에워싸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기세 좋게 영을 내렸다.

“만약 적병이 몰려오면 모두 산꼭대기의 붉은 기를 쳐다보고 있 으라. 그러다가 그 깃발을 휘두르거든 사방으로 쏟아져 내려가 적병 을 짓밟아버려라.”

제 생각에만 취해 오히려 위병들이 덤벼주기를 기다리며 하는 소리였다.

한편 진채로 돌아온 사마의는 가만히 사람을 풀어 가정을 지키는 촉의 장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얼마 후에 그중에 하나가 돌아와 알렸다.

“산 위의 진채를 지키는 장수는 마량(馬)의 아우 마속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사마의가 기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제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헛된 이름만 높은 자다.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졌을 뿐이지. 공명이 그따위 인물을 쓰고 어찌 일을 그르 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 다시 물었다.

“가정 좌우에 따로 적군이 있던가?”

“산 아래 십 리쯤 되는 곳에 왕평이 진채를 얽고 있습니다.”

살피러 갔다 돌아온 군사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알았다. 그렇다면 가정은 우리 것이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장합을 불렀다.

“장군은 한 갈래 군마를 이끌고 왕평이 달려올 길목을 지키시오.” 

그리고 이어 신탐과 신의에게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주며 말했다.

“그대들은 저 산을 에워싸라. 먼저 적이 물 길어 나르는 길을 끊 고 기다리다가 적병이 어지러워지거든 그때 들이치도록 한다.”

이에 명을 받은 장수들은 각기 그날 밤 안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이튿날 날이 밝자 먼저 장합이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산 뒤로 돌 아 떠났다. 왕평이 구원 오는 걸 막기 위한 배치였다. 장합이 자리를 잡았다 싶자 사마의는 크게 군사를 몰아 나갔다. 한덩이가 되어 촉 군이 진을 치고 있는 산 아래에 이른 위병들은 곧 사방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

마속이 산 위에서 보니 위병들이 산과 들을 덮고 있는데 그 기치며 대오가 매우 엄정했다. 그걸 본 병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 다. 감히 산 아래로 뛰어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마속은 산꼭대기에 있는 붉은 기를 크게 휘두르게 했다. 모두 죽기로 뛰쳐내려가 싸울 줄 알았으나 결과는 거꾸로였 다. 겁을 먹은 장수와 사졸들이 서로 미루며 한 사람도 움직이려 하 지 않았다.

마속은 크게 성이 났다. 스스로 칼을 빼어 장수들을 베어 넘기며 싸우기를 재촉했다. 그제서야 겁을 먹은 장졸들이 마지못해 산을 내 려가 위병과 부딪쳤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위병이었다. 물러가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제자 리만 지키니 촉병들은 겨우 싸우는 흉내만 내고 산 위로 다시 물러갔 다. 적병이 힘을 다해 밀어붙이지 않으니 죽을 곳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물러날 곳이 있으니 죽기로 싸울 악도 받치지 않았다. 마속도 마침내 일이 제 뜻 같지 못함을 알았다. 얼른 군사들을 진 채 안으로 불러들이고, 굳게 지키며 밖에서 구원이 오기만을 기다 렸다.

하지만 그때는 왕평도 구원을 갈 처지가 못 되었다. 위병이 산을 에워싸는 걸 보자 왕평은 군사를 이끌고 나섰으나 가는 길에 장합을 만났다. 미리 와서 기다린 데다 군사까지 많으니 왕평이 오천 군사 로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여남은 합 어울렸다가 힘은 빠지고 세력 은 다해 제자리로 쫓겨오고 말았다.

위병들은 마속이 진을 치고 있는 산을 진시부터 술시까지 에워싸고 있었다. 밖에서 구원도 없이 산꼭대기에 갇히게 되니 촉군이 먼 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밥을 지을 물은커녕 목말라 도 마실 물이 없자 촉군의 진채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밤중이 되자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적에게 에워 싸인 데다 주리고 목마른 촉군 중에 그 산 남쪽에 있던 일부가 진채 를 걷고 산을 내려가 위에 항복해버렸다. 마속이 막으려 해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거기 힘을 얻은 사마의는 한층 매섭게 촉군의 목을 죄었다. 산 둘 레에 주욱 불을 놓은 게 그랬다. 사방에 불길이 오르자 촉군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마속도 마침내는 더 버텨낼 수 없음을 알았다. 남은 군사를 휘몰아 산을 내려온 뒤 서쪽으로 달아났다.

사마의는 일부러 큰길을 비워두어 그런 마속이 달아날 수 있게 했다. 궁한 짐승을 급하게 몰다가 되몰리느니보다는 천천히 쫓아 지 치기를 기다리려 함이었다.

큰길을 빠져나간 마속을 뒤쫓게 된 위장은 장합이었다. 짐승 몰듯 마속을 뒤쫓기를 삼십 리쯤 했을까, 문득 앞쪽에서 북과 피리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마속은 보내고 장합을 막아서는 게 어김없이 촉군이었다.

장합이 놀라 앞선 장수를 보니 바로 위연이었다. 위연은 칼을 꼬 나들고 말을 박차 똑바로 장합에게 덤벼들었다. 장합이 몇 번 싸우 는 시늉을 하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연은 전세 를 뒤집었다 생각했다. 그대로 군사를 휘몰아 장합을 뒤쫓았다.

오래잖아 가정은 다시 촉군에게 돌아왔다. 위연은 더욱 기세가 올 라 그대로 장합을 뒤쫓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었다. 한 오십 리쯤 뒤쫓았을까,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며 등 뒤 양쪽에서 두 갈래 의 복병이 뛰쳐나왔다. 왼쪽은 사마의요, 오른쪽은 사마소였다.

위연은 그제서야 속은 걸 알았다. 급히 군사를 돌리려 하는데 이 번에는 그때껏 쫓기기만 하던 장합이 되돌아서서 덮쳐왔다. 세 갈래 의 위병이 한곳으로 몰려 에워싸니 위연은 곧 적병 한가운데 갇히고 말았다.

위연은 좌충우돌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병을 뚫고 나올 수가 없 었다. 위연이 그 모양이니 그 아래 장졸들은 더했다. 잠시 동안에 위 연의 군사는 태반이 꺾이고 말았다.

그런데 조금만 그대로 가다가는 촉군이 끝장나버릴 것 같은 때였 다. 갑자기 한 떼의 군마가 촉군을 에워싼 위병을 뚫고 들어왔다. 위 연이 보니 반갑게도 왕평이었다.

“이제 나는 살았구나!”

위연이 가슴을 쓸며 그렇게 소리쳤다. 군사들도 힘이 배나 솟았 다. 왕평이 거느린 군사들과 힘을 합쳐 위병들에게 부딪쳐 갔다. 그 제서야 위병들도 못 견딘 체 물러갔다.

하지만 그 물러감 또한 속임수였음은 곧 드러났다. 위연과 왕평이 겨우 길을 앗아 진채로 돌아가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진채에 꽂힌 것은 모두가 위의 기치였다. 사마의와 장합이 위연과 왕평을 몰아 대고 있는 사이에 신탐과 신의가 그 진채를 휩쓸어버린 것이었다. 자기 진채에서 신탐과 신의가 군사를 몰고 나오는 걸 보자 낙담

한 위연과 왕평은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 뒤로 돌아서서 열류성 고상(高翔)에게로 의지하러 갔다. 의

그때 고상은 가정이 적의 손에 떨어졌단 말을 듣고 성안에 있는 군사를 모조리 긁어모아 달려오는 중이었다. 한참 달리다가 도중에 위연과 왕평을 만났다.

“두 분 장군께서는 어찌 된 일이시오?”

고상이 놀라 물었다. 위연과 왕평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 어놓았다. 듣고 난 고상이 말했다.

“그것 참 큰일입니다. 오늘 밤이 되거든 위병의 진채를 들이쳐 가 정을 되찾는 게 좋겠습니다.”

위연과 왕평도 거기 찬동했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그 들도 공명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이어 의논을 맞춘 세 사람은 작은 산 언덕에 숨어 해 지기를 기다 렸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세 사람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가 만히 가정으로 몰려갔다.

가정에 먼저 이른 것은 위연이었다. 그러나 위병이 득시글거릴 줄 알았던 그곳에는 어리친 개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위연은 부쩍 의심이 일었다.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알맞은 길목 같 은 곳을 골라 군사를 매복시켰다.

한참을 기다리니 다시 고상이 이끈 군사가 이르렀다. 적군은 하나 도 없고 위연만 나와 맞자 고상이 물었다.

“위병은 어디 있습니까?”

“글쎄 나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소. 자칫 적의 계략에 걸려들까 두려워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위연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왕평이었 다. 그곳에 이를 때가 지났건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위연과 고상은 한편으로는 궁리를 짜 맞추고 한편으로는 왕평을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갑자기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하늘을 찌를 듯한 불길이 솟으며 북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기다리는 왕평은 오지 않고, 난데없는 위병이 밀려와 위연과 고상이 거느린 군사를 에워싸버렸다.

위연과 고상은 힘을 다해 부딪쳤으나 아무래도 빠져나갈 수가 없 었다. 위병 한가운데 갇혀 정신없이 싸우는데 다시 산 뒤편에서 우 레 같은 북소리가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짓쳐들어왔다. 바로 기다 리고 기다리던 왕평이 이끄는 군사였다.

위연과 고상을 구해낸 왕평은 열류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들 이 성 아래 이르렀을 때는 또 다른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 근처 에서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오는데, 앞세운 깃발을 보니 ‘위도독 곽회’란 글씨가 뚜렷했다.

곽회가 거기 나타난 경위는 이랬다.

사마의가 모든 공을 독차지할까 봐 걱정이 된 곽회와 조진은 머 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곽회가 가정을 뺏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 러나 곽회가 군사를 나누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마의가 가정을 뺏 은 뒤였다. 이에 곽회는 지름길로 열류성을 치러 갔다가 위연과 왕 평, 고상의 군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적을 만난 세촉장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놀라 허둥대는 군사만 잔뜩 잃고 쫓겨갔다.

“이미 열류성까지 적의 손에 떨어졌으니 이제는 양평관이 걱정되는구려. 우리 모두 그리로 갑시다.”

위연은 그렇게 말하며 왕평, 고상과 함께 양평관으로 향했다.

한편 곽회는 한바탕 크게 촉군을 두들겨 쫓은 뒤에 군사를 거두 며 좌우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가정을 빼앗지 못했으나 열류성을 얻었으니 마찬가지로 큰 공을 세운 셈이다.”

그러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으로 달려가 외쳤다.

“문을 열어라! 곱게 항복하면 목숨을 붙여두리라.”

촉군 몇몇이 남아 지킬 것쯤으로 여겨 먼저 그렇게 얼러대본 것 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한소리 포향과 함께 그때껏 뉘 어져 있던 깃대들이 일시에 세워지는데, 앞선 큰 깃발에는 ‘평서도 독 사마의’ 일곱 글자가 뚜렷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의 자신도 곧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 다. 앞을 가린 널빤지를 달아 올리고 가슴을 보호해주는 나무 난간 에 기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곽백제(伯濟, 곽회의 자)는 어찌 이리 늦는가?”

곽회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중달(仲)의 귀신 같은 헤아림과 재주는 내가 따를 수 없구나!” 

그리고 절로 풀이 죽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사마의가 그런 곽회를 맞아 말했다.

“이제 가정을 잃었으니 제갈량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오. 공은 자단과 더불어 빨리 그 뒤를 쫓도록 하시오.”

그 말에 곽회는 다소곳이 따랐다. 곧 성을 나가 물러가는 촉군을 뒤쫓으러 떠났다.

곽회가 떠난 뒤 사마의는 다시 장합을 불러 말했다.

“자단과 백제는 나 혼자서 공을 세울까 봐 이 성을 뺏으러 달려왔 던 것이오. 내가 비록 홀로 공을 독차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일은 요 행히 이리되고 말았소. 내가 보기에 위연과 왕평, 마속, 고상 등은 틀 림없이 양평관으로 몰려갔을 것이외다. 만약 내가 그 관을 치러 가 면 제갈량이 반드시 우리 등 뒤를 후릴 것이니 그것은 바로 그 계책 에 떨어지는 게 되오. 병법에 말하기를 물러나는 군사를 덮치지 말 고, 궁한 도적을 뒤쫓지 말라[歸師勿掩 窮寇莫追]고 했으니 우리는 따 로 계책을 세웁시다. 장군은 샛길로 가서 물러나는 적병을 막으시 오. 나는 야곡으로 가서 그쪽의 적군을 막겠소. 그러나 적이 맞서오 면 싸우지 말고 그저 길만 끊어버리시오. 그리되면 적이 끌고 온치 중은 모조리 빼앗을 수 있을 것이오. 우선은 그 정도로 넉넉하오.”

명을 받은 장합은 곧 군사 절반을 이끌고 기곡으로 달려갔다. 사 마의도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곡을 뺏은 다음에는 서성을 지날 것이다. 서성은 비록 산골짜 기의 작은 성이나, 촉군이 양식을 감추어둔 곳일 뿐만 아니라 천수, 남안, 안정 세 군 모두로 가는 길목이다. 만약 그 성만 얻는다면 세 군을 되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영을 내린 다음 신의와 신탐을 남겨 열류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대군과 더불어 야곡으로 떠났다.